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첫째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님에 의한 잉태 사실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숫처녀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고 선포하였다 (31절)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그런 말씀을 들을 때 당황하여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라고 반문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어찌 아들이 잉태될 것인가? 천사장의 답변은 성령님이 임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리라는 것이다.
어느 날 좀 낙심하여 성경을 읽다가 탁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계 1:4) 라는 말씀이었다. "그래, 일곱 영이신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겁날 것인가?" 라는 확신이 확 들어왔다. "일곱 영"이란 교부들이 사 11:2의 70인역을 근거로 (히브리어 본문: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헬라어 70인역: 지혜와 총명의 영, 조언과 권능의 영, 지식과 경건의 영,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 그를 충만 채우리라 (καὶ ἀναπαύσεται ἐπ᾽ αὐτὸν πνεῦμα τοῦ θεοῦ πνεῦμα σοφίας καὶ συνέσεως πνεῦμα βουλῆς καὶ ἰσχύος πνεῦμα γνώσεως καὶ εὐσεβείας ἐμπλήσει αὐτὸν πνεῦμα φόβου θεοῦ) 성령님의 다방면의 권능을 망라하는 표현으로 이해했다. 계시록의 묵시적 성격에 비추어 7영이란 표현도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7이란 천지만물을 창조한 주간의 수자로 따라서 만물의 창조 곧 모든 것을 망라하는 완전을 상징하는 수자이다. 따라서 성령님을 7영이라 표현한 것은 완전한 성령님,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성령님, 전지 전능 무소부재하신 성령님이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 유사하게 계 5:6에서 예수님을 만화로 그리듯 환상 중에 나타난 모습은 7뿔과 7눈을 지닌 어린 양의 모습이었다면, 그는 완전한 권세와 (7뿔), 완전한 지식의 (전지하심) 존재임을 상징한다.
7영께서 처녀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처녀가 남자의 정자없이 아이를 잉태케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령 그렇게 남자 아이가 잉태되어 태어난다고 해도 어떻게 남자 아이가 (예수) 영원전부터 선재하신 둘째 위격이신 하나님일 수가 있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으로 여자의 자궁 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 머리로 풀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권능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이 말씀하니 그렇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신앙 생활 하면서 성경이 틀렸다, 잘못되었다. 믿을 수가 없다는 부분을 경험한 적이 없다. 어찌 사람이 쓴 책이 이렇게 신빙성이 있고 그것을 따라서 살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느냐? 이상한 책이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사람이 기록한 신적인 책인 까닭이다.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다가 워터게잇 사건으로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와 전도자가 되었던 척 콜슨은 간증하길, 자기가 교도소에 찾아가 죄수들에게 그저 성경을 읽어 주기만 해도 죄수가 듣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것을 보고 아, 이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로구나 라고 믿게 되었다고 했다.
성경에서 묘사된 성령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창조의 영이시다. 창 1:2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신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엘로힘"인데, 이 표현을 현대 역본들을 본다면 적어도 세 가지로 달리 번역한다. 1) 하나님의 영 (보수적인 번역본들), 2) 강한 바람 (대풍)(NAB), 3) 하나님의 바람 (NRSV, TNK 유대교) 등이다. 하나님이란 말은 어떤 경우에 "강한, 큰"이란 형용사적 의미로 다른 명사를 꾸미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번역이 가능하고, 또한 히브리어 "루아흐"란 단어가 헬라어 '프뉴마'처럼 바람, 호흡, 영 등의 의미를 모두 가지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번역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란 번역이 옳다. 왜냐하면, "루아흐 엘로힘"이 주어라면 그 주어의 동작을 묘사하는 "운행하다"란 동사가 (rachaf) 오경에서 유일하게 다른 곳에서 사용된 신 32:11에서 독수리의 동작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즉 바람과 같은 무생물이 아니라 인격체가 주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추정컨대 창 1:2에서 신 32:11에서처럼,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을 새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성령님은 복음서에서 비둘기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마 3:16과 병행절들) 성령님은 새처럼 태고적 그 원시 혼돈의 물 위를 운행하셨던 것이다. 운행하다로 번역된 말은 영역본이 hovering이라 번역하는데 헬리콥터가 공중 선회하며 제자리 걸음하듯 빙글빙글 맴도는 동작이다. 성령께서 새처럼 그렇게 태고적 혼돈의 물 위에서 창조의 기운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그분을 창조의 영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라고 명령하실 때 빛이 나타나게 된 것은 성령님이 창조의 잠재력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령님은 새나 물고기 짐승들 나무나 온갖 만물을 창조하도록 역사하셨던 창조의 영이시다.
다음에 성령님은 사사기에서 보듯 권능의 영이시다. 그분이 임하면 평범한 사람이 카리스마 넘치는 능력 지도자로 돌변한다. 불을 밭는다고 하는데 기도하다 불이 임하면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고 마음에 강력한 확신과 자신감이 넘쳐나고 전에 없던 기쁨이 솟구쳐 오르고 기도의 소리가 달라져 버린다. 그런 현상이 강력하게 나타날 경우에 그 사람에게는 각종 은사들의 역사가 나타난다. 즉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이 치유되고 영안이 열려서 사람의 속이 들여다 보이기도 하고 각종 초자연적인 현상이 임하는 것이다. 이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다. 성령님을 체험해 보지 못하면 그분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임하니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드온은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고 저들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성령님이 임하니 어부 베드로는 능력 설교자, 능력 치유자로 변했고 그가 설교할 때 듣는 청중에게 성령님이 임하여 방언 예언이 터졌던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 그분이 한량없이 충만하게 임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생각해 보라. 그분은 여기서 성령님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우리에게는 내가 한 일들보다 더 큰 것들을 너희가 행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그리고 성령님이 누구시냐? 그분은 치유의 영이시다. 성령받으면 병이 치유되고 만다. 그것이 불치병이라도 상관이 없다. 수술도 하지 않고 그냥 하늘의 불로 태워 버리는 것이다. 나도 그 불로 결핵 균들이 태워지고 치유받은 경험이 있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향에서 투병생활하다 하루는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늘 보좌에서 불 덩이가 내 가슴팍에 날아와서 쳤고 나딩굴었을 때 불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불이 내게 기도할 때에 임하였다. 불치병 환자들아, 낙심말아라. 치유의 영께서 당신을 찾으신다. 그분에게 치유를 요청해 보아라. 반드시 그분이 치유해 주실 것이다.
성령님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방면에서 기술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 하고, 처녀 마리아에게 아이를 배도록 역사하신 그 역사는 어떤 능력의 역사인가? 창조의 역사인가? 치유의 역사인가? 권능의 역사인가?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기에 창조의 역사였다고 하기 어렵고, 치유나 권능의 역사였다고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무한 권능으로 역사하셨는데, 범주를 정할 수 없는 그 능력을 행사하셨다고 하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니 그분을 신이라 하는 것이다. 영원무궁하시고 전능 전지하신 성령님이여 이번 성탄절에 우리도 치유하시고 우리에게도 권능을 부어 주시고 우리에게 새창조의 역사를 이루소서! 새창조란 구속을 지칭하는 말인데 죄에서 구원받고 새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은 한 번의 사건이지만 중생한 자들도 성령님을 다시 받고새롭게 새롭게 날마나 날마다 새롭게 된다.
둘째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태어난 예수님에게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라고 하였는데 (33절) 이 말씀은 언제 성취되는가? 하는 것이다. 롬 1:3-4에서 바울 사도는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을 아들로 언급했는데, 그는 육신적으로 다윗의 후손이지만, 부활 후 (승천 후에) 하나님의 능력있는 아들로 선포/ 세워졌다. 즉 그는 다윗 후손의 인간이었으나 (구원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부활 승천 후에 하나님의 능력있는 아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메시아 왕으로 세움을 입으셨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에 다윗 후손이 다윗 언약에 따라 (삼하 7:11이하)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할 때, 입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됨으로 즉위하여 합법적인 통치자로 세워졌던 관례를 따른 것이다. 시 2:7-9에서 다윗 후손이 왕으로 즉위되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그 말씀은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7절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말씀은 동의 병행법으로 하나의 사고를 약간 다른 단어들로 반복한 것이고 (이처럼 병행법이란 한 번 말할 것을 반복함으로 하나의 사고를 강조한다) 이 말씀은 바로 다윗 후손 즉위식 때 입양식의 현장을 반영한다. 입양식이 다윗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워서 그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합법적 권세를 갖도록 하셨다. 즉위식이 입양식이었다. 그 다윗 후손 메시아에게는 8절에서 보듯 세계 통치권이 약속되는데 구약 이스라엘 어느 다윗 후손 왕도 그런 약속을 체험한 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메시아 예언이라 한다. 왜냐하면 다윗 후손으로 올 미래의 누구인가를 예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미래의 누구가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처녀 마리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직 처녀였으나 다윗 후손 요셉이란 청년과 약속한 사이였다. 유대사람들에게 약혼은 법적으로 결혼관계이다. 단 결혼식까지 잠자리만 같이 하지 않을 뿐 이미 법적인 부부관계였다. 그래서 마리아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요셉의 법적인 아들로서 다윗 후손이 되며, 그래서 그는 다윗 후손에게 약속된 통치권이 합당하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 이후에 하늘 궁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있는 아들로 세움을 입었고 즉 다윗 후손 메시아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
그 즉위 후에 행한 일은 오순절에 성령님을 부어주신 일이다. 성령님을 통해서 그분은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성령받아서 제자들이 권능 받고 만방에 나가 복음을 증거함으로 영적인 정복 전쟁을 함으로 수 많은 인민들이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것이 구약에 이스라엘에 약속된 다윗 후손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약속의 성취이다. 예컨대 렘 23:5-6의 약속을 보라.
렘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가지"란 나무의 새 싹이 돋을 수 있는 그 연한 가지를 지시하는데 그 가지는 (다윗의) 후손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가 공평과 공의를 행사하고, 유다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다. 이 구원은 구약적으로는 이방인의 압제에서 구원이지만, 신약에서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을 지시하게 된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다윗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니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방문한 해외 유대 교민들이 은혜를 받아 변화되었고 구원을 받았으며 예루살렘 거주 유대인들 역시 많은 수가 그리했다. 그것이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구원 혹 회복 약속의 성취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이란 이방인들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정도가 아니라, 바로 죄와 사단의 세력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이다. 구약식으로 이방인들의 손에서 건져내는 정도가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될 때 이렇게 의미상의 변화가 동반된다.
한편 행 15:16이하에서 암 9:11이하의 다윗 왕조 재건의 예언 성취가 선포된다.
행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여기 16-17절의 말씀은 암 9:11-12의 인용이다
암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윗의 무너진 천막은 다윗의 무너진 왕조를 지시하며 그 틈과 퇴락한 것들이란 무너진 다윗 왕국을 천막/ 장막에 비유하여 낡아서 헤어지고 구멍이 뚤린 그런 상태를 지시한다. 그런 천막을 재건하시겠다는 암 9:11이하의 다윗 왕국 재건의 예언은 예루살렘 공회에서 야고보 사도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의 초림으로 성취되었고, 그래서 그 왕국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증거한 그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얻는 일은 다름 아니라 다윗 왕국이 재건되어 (다윗 후손 예수께서 부활 승천 후에 메시아 왕으로 즉위하셨으니 왕국이 재건된 것이 아닌가?) 그 왕국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백성이 되고 있다고 야고보가 이방인들의 구원 현상을 다윗 왕국의 재건과 연관시켜 해석한 것이다.
다윗 왕국은 구약에처럼 군사적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영적 왕국이다. 그 왕국이 복음서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이기도 하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님을 통해서 메시아 왕은 지금 통치하신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교회를 통해서 메시아 왕께서 통치하신다. 계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 17:14, 19:16에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분의 왕 되심을 기술한다.
혹자는 재림 이후에 지상에 실제 왕국을 세우시고 천년 통치하는 천년왕국이란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잘못된 해석이다. 이미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사단에게서의 해방을 이루셨는데 무슨 의미와 무슨 이유에서 지상 천년왕국이 그것도 유대인 중심으로 이방인이 그들에게 굴복하는 그런 다윗 왕국이 세워져야 할 것인가? 구약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이유가 없다. 구약 예언들에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겉옷과 그 속의 알맹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겉옷은 당대인들이 예언을 알아 들을 정도로 표현했기에 유대적 관례와 지리적 요소들로 묘사되었어도 신약의 성취는 그 알맹이를 드러내는데 영적인 것이다. 이것을 나는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라 부른다.
지금 주님은 왕중의 왕으로 다윗 후손 왕으로 통치하신다. 이번 성탄절에는 왕이신 주님으로 높이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자. 이미 2천년 전에 말 구유간에 오셨지만 이제는 왕으로 통치하시는 우리의 왕이여, 여기 심령의 보좌로 임하사, 찬양을 받아 주소서! 주님을 경배 하오니 왕이신 예수님, 내 마음에 좌정하사 다스리소서! 아멘
한 가지 첨가하자면, 왜 하나님은 마리아를 택하셨을까? 어느 지상의 인간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 속에서 10개월을 품고 살았으며 그에게 젖을 주고 양육하여 30년 가까운 세월을 곁에서 지켜보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주님을 우리는 꿈에라도 한 번 만나 뵙기 원하는데 마리아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 아들로서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생활하는 특권을 얻었던 것이다. 나중 주님이 공적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마리아는 여전히 그를 자기 아들로만 간주하고 그분의 신적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던 것 같다. 예컨대, 막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 . .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에서 한 귀중한 도구로 사용받았던 것은 무조건 그분의 선택과 호의 때문이라 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마리아의 인품이나 믿음도 (그런 것들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마리아는 처녀였다. 오늘날 처녀성을 우습게 알고 결혼 이전에 처녀막을 함부로 터뜨리는 어리석은 음행을 감행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처녀란 순수함과 정조를 의미한다면, 마리아는 정조 있는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정조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그분의 진리 말씀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일을 지시한다. 한 남편의 아내로서 자신을 지키는 일 정도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분의 뜻에 순응하여 자신을 온갖 더러움에서 지키는 자세가 정조이다. 정조가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인이라 할 수가 없다. 결혼 하기 전에 정조를 지키자! 남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자기 순결을 함부로 더럽히는 자처럼 어리석은 자들도 없다. 그런 자들은 평생에 더러운 생활을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기란 (물론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어거스틴은 18세에 사생자를 낳았던 방탕아였으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나중 성자처럼 살았다) 어렵지 않겠는가? 기독인 청년들아 세상 청년들의 풍조에 휩쓸리지 마라! 자기를 정결하게 지키는 일은 자기의 앞날의 소망과 꿈, 축복을 지키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마리아가 선택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다윗 후손 요셉과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약혼은 유대인들에게 법적으로 결혼 관계 설정인지라, 이미 저들은 부부 사이였다. 단지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한다. 오늘날도 그렇게 굳게 정조를 지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마리아는 성령님이 임하시고 요셉의 정자가 아닌 성령님의 초자연의 역사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그 생물학적 과정은 어떠했을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렇게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이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가브리엘 천사에게 반문했지만, 천사가 \
눅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할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굴복하고 순종하였다. 이런 말씀은 마리아의 멋진 순종과 믿음의 성품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한 몸이 앞으로 어떤 위기와 고통에 처할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순복하는 것이다.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네," "저 년은 겉으론 순전한 척 하더니 호박씨를 까고 있었구먼!" "저 죽일 년, 돌로 쳐 죽이자!" 등등 어떤 위협과 위기에 처할지 상상할 수 없었지만, 무조건 굴복하고 순종하는 자세가 믿음이다.
'성경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개혁 이신칭의 교리 재 검토 (0) | 2017.02.06 |
---|---|
하나님의 치유는 언제 일어나는가? (0) | 2017.01.02 |
민주주의의 허상 (0) | 2016.10.18 |
제자도 (0) | 2016.10.13 |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 (0) | 2016.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