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하고 고요하라
설교: 잠잠하고 고요하라
막 4: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신앙생활에서 예기치 않게 환란의 큰 광풍이 우리를 덮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 광풍아 잠잠하라, 고요하라!"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해서 광풍을 제압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모델이요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롬 8:29). 그분의 십자가 대속 죽음을 제한다면 우리도 그분의 능력, 그분의 인격, 성품, 그분의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타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의 삶과 발자취를 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광풍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가 보이는 가장 근원적인 반응은 아마 두려움과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예수님과 거리가 먼 감정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일에 두려워 하신 일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수님이 아닐 것입니다. 혹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공포가 그를 덮쳤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감정들이 있지만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감정이 아니라 마귀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그리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요일 4:18).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면 두려움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을 이유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귀신이 사용하는 흔한 수법입니다. 두려음의 감정을 먼저 넣고 그 다음에 머뭇거릴 때에 의지를 장악해 버립니다. 어떤 일에서건 두려움이 느껴진다면 두려움의 영은 떠날지어다!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문제의 광풍, 질병의 광풍, 자연력의 광풍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큰 광풍은 잠잠할지어다!" 라고 명령해서 제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문제의 광풍은 잠잠할지어다! 질병의 광풍은 고요할지어다! 질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 라고 명한다고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화되듯 현실화 될 수 있을까요? 우리 같은 사람이 명한다고 바다가 잠잠해 질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 17:6) 하셨고 또한 요 14:12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요한 목사의 자서전적 글인 "꺼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에서 최목사가 1988년 충현교회 북한 선교원에서 일할 때, 경상도 지역을 맡아, 대구를 거점으로 하여 선교운동을 확대시켜 나가는 데 1989년 8월 경, 기도하다가 대구에 내려가서 성회를 선포하고 그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집회를 대구에서 가장 큰 운동장에서 열라는 지시였습니다. 당시 35세였던 최목사는 부담이 되어 1주일 간 아내와 함께 금식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아 대구로 내려가 정우천 집사를 만나 주님의 뜻을 전하고 대구 두류산 공원 축구장에서 집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축구장 관리 사무소에 가서 9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사용료 125만원을 지불하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현수막 300장 붙이고 포스터 3만 장, 전단지 15만 장을 뿌립니다. 그리고 대구 MBC 라디오와 TV측과 광고 계약을 맺고 9월 한 달 동안 집회 광고를 했습니다다.
집회 이틀 전에 그런데 정집사가 최전도사 숙소로 찾아왔다. 큰 일 났다는 것이다. 뭐가 큰일이냐? 물으니 일기예보에 큰 태풍이 제주도까지 상륙하여 집회 당일 대구 지역에 100밀리 이상 집중 호우가 쏟아질 것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최목사는 "집사님, 이 집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셔서 시작된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비가 안 올 것입니다. 집회는 무사히 잘 치러질 겁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드디어 집회 당일이다. 기상청의 예보대로 오전부터 대구 경북 지역에 강한 바람과 먹구름이 잔뜩 끼어 낮인데도 저녁처럼 어두컴컴했습니다. 가을 날씨답지 않게 매우 쌀쌀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습니다. 모든 집회 준비를 정집사에게 맡기고 최목사는 금식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기브온 골짜기에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태양을 멈추게 하신 주님이시여, 먹구름을 잔잔케 하시고 비를 막아주옵소서! 원수들으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놀라운 회개운동과 생명운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바람아, 고요하라! 비는 멈추어라! 바람아, 고요하라! 비는 멈출지어다!" 이렇게 기도하며 명령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3시간 지났을 때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마음에는 평안이 강물처럼 흘러 넘쳤습니다. 아무 염려도 걱정도 없었습니다. 이번 집회는 기적이 나타나는 은혜 충만한 집회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회는 저녁 7시부터 시작되었는데 두류산 공원 주변에 서서히 차량이 몰려들어 정체현상이 일어났고 집회 장소로 향하는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고 성도들이 운동장 안에 꽉 들어찼습니다.
최목사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마이크를 잡고 최목사는
"성도 여러분 지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이번 집회 기간 동안 절대로 비가 오지 않을 겁니다. 이 시간 저를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외쳤다.
"먹구름아, 떠나가라! 비는 멈출지어다!"
"먹구름아, 떠나가라! 비는 멈출지어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성도들이 두류산 일대가 떠나가도록 크게 외치니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집회는 대 성공 총인원 10만 명, 대구지역 집회 역사상 최대의 인파였다. 정집사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목사님, 이번 집회는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저는 계속 일기예보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호우주의보가 내렸는데,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적은 대구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대구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구미, 왜관, 김천, 영천 등 대구를 둘러싼 주변 지역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대구만 뺴놓고 다른 데는 비가 억수같이 왔다니까요."
최목사는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도 그러한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기에 합당한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대하 16:9).
구약에는 정우천 집사가 지적한 대구에 일어났다는 그런 현상이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4:7-8).
비나 태풍이나 우박이나 지진까지도 쓰나미까지도 자연 현상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창 1:28). 이 말씀은 우리를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왕적 존재로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통치해야 합니다. 땅만 아니라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 땅의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으니 바다도 공중도 또한 우리가 정복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권세로 온 세상을 영적으로 정복해서 그분의 주권을 찬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상의 부분이나 바다의 부분도 귀신의 영역으로 (신화적 영역) 남겨두지 말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찬양의 근거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높은 산에 신들이 살기에 그곳을 신성시하고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가 늦어져 이 창조사상이 없었던 동양에서는 서양인들에게 정복당하고 밀리고 말았습니다. 서양인들이 철도를 놓고 먼 바다를 항해하고 신대륙을 발견할 때 동양인들은 지신이 노한다고 철도 건설도 반대하고 용왕신을 무서워하고 먼 바다 항해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서세동점의 역사적 환경은 서양인들이 하나님의 창조 사상으로 무장하고 인간의 왕적 신분 사상을 알았던 결과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는 죄로 타락하여 상실했던 왕적 신분을 예수님을 통해 회복했기에 어떤 인생의 환란의 광풍이 덮여오건 왕적 권세로 "너 큰 광풍아, 잠잠하고 고요하라!" 라고 외쳐야 합니다.
인간이 왕적 존재이기에 어떤 세상 자연력이나 어떤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왕이 만약 어떤 것을 두려워 한다면 그는 이미 왕이기를 포기한 자입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찾아오고 마음이 심약해 지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권세와 성령님의 감동을 차단시켜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원래 왕적 신분이었던 인간이 피조물인 야수들을 무서워하게 되고 심지어 죽은 고목이나 큰 바위 앞에 가서 복을 비는 비참한 존재가 된 것은 죄악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면 위계질서의 전도가 일어나서, 우리에게 순종해야 할 자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대적하고 있다면 그 부모가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행동했는지, 불순종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우리가 지은 죄만 아니라 조상의 죄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여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면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큰 광풍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주장되기 때문입니다. 큰 광풍은 헬라어로 '라이랍스 메갈레'인데, 이 '라이랍스'란 (광풍) 구약 히브리어에서 '세아라'이고 이 '광풍'이나 "폭풍" "회리바람" 등의 단어를 찾아본다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광풍을 부리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컨대, 시 107:25, 29에서는 여호와께서 명하시니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킨다고 했고, 시 148:8에서는 말씀을 좇는 광풍아, 너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왕하 2:1, 11에서는 하나님께서 "회리바람"을 사용하여 엘리야 선지자를 하늘로 올리셨다고 합니다. 앗시리아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반대 방향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가 탄 배가 순풍에 잘 나간다 싶었으나 불순종한 요나를 태우 그 배를 갑자기 대풍이 일어나 강타하기 시작합니다. 그 배도 갈릴리 예수님을 태운 배처럼 침몰의 위기에 처합니다. 그 대풍을 그런데 누가 일으켰습니까? 바로 우주의 절대 주권자 하나님이시지요? 그분은 나중 선원들이 누구 때문에 신이 진노해서 이런 대풍이 일어나서 배를 침몰시키려는지 제비를 뽑아 그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 신의 진노를 무마시키고자 할 때, 요나가 뽑히게 하셨고, 선원들이 요나를 들어, 하나 둘 셋 하고 바다에 들어 던졌을 때 이미 그 아래에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보내어 기다리게 하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만드신 분입니다. 나중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자 (본문에서는 이 점이 분명히 진술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해변에 토하도록 만듭니다. 요나는 이제 니느웨로 가서 40일이면 "하나님이 심판이 임하여 니느웨가 망한다! 이 놈들아, 회개할지어다!" 라고 외칩니다. 본문대로 하자면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그러자 그곳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었고,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니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서 뭇 백성에게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라고 칙령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고하신 그 심판을 취소하시고 저들을 용서합니다 (욘 3:10).
이제 문제가 생긴 것은 요나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은 선지자 혹 선교사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에 잡혀서 앗시리아인들을 증오하는 사람이 무슨 선교사입니까? 나도 공산주의나 진화론, 동성애 이런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무진장 싫어하지만, 그들 인격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에 속아 행동하는 그 악을 증오하고 싫어합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 내가 자비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줄 알았었습니다. 그래서 앗시리아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을까봐 제가 다시스로 도망가고자 했지 않겠습니까? 라고 항변하고 그분의 뜻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저 니느웨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초막을 하나 떡 짓고는 거기에 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망하나? 관전하려고 할 때,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습니다 (욘 4:6). 요나가 그늘이 자기 머리에 지니 너무 좋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여 시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욘 4:7). 그러자 요나는 골이나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요나 선지자의 성품이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 그분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차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임의대로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전능자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박넝쿨을 하루만에 자라게도 하시고 하룻만에 시들게도 하시는 분이시며 바다를 요동치게 하는 대풍만 아니라 눈에 보일까 말까 한 작은 벌레까지도 명하여 자기 뜻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욥 38:1). 즉 지진이나 폭풍은 신현 현상에 동반됩니다 (출 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 . .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광풍을 제압하시고 자기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이상합니까? 출애굽 당시의 10재앙을 보십시오. 모두가 자연력을 하나님이 임의로 임의의 시각에 임의의 강도로 주장하시는 것들이 아닙니까? 개구리나 메뚜기나 바람이나 파리 떼나 이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10:28-30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를 구원하시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찌 구속받은 성도를 귀하게 여겨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염려도 말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대신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재정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넷째로, 예수님이 바다 저 건너로 건너가자!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 40:6-8에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건너가자! 라고 했으면 건너가게 되어 있고 파도나 광풍이나 배를 침몰시킬 수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지상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사명이 남아 있다면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비명에 횡사하거나 파도에 침몰하여 몰사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현실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까지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어떤 것도 두려워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12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있었지만, 광풍이 일어 파도가 배를 치고 덮칠 때 얼마나 당황해하고 공포에 사로잡혔습니까?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곧 그분의 신성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찬송가 419장에 "구주여 광풍이 불어 큰 물결이 일어나 온 하늘이 어둠에 싸여 피할 곳을 모르니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된 때 주무시려 합니까?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 엎어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왜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 엎어놀 능력이 없도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공포에 잡혔을까요? 자신들과 함께 배안에 계셔서 평안하게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분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어떤 정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주님이 내주하신다면 그분을 모신 내가 왜 큰 광풍이 덮친다고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분은 이 세상 만유보다 더 크신 분이신데, 어찌 세상 일개 자연력이 그분을 덮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건져내신 분입니다. 그분이 건져내신 이후에는 아이고 내가 너를 책임지고 안전하게 지키기가 버겁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죽든지 살든지 해라!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고 저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출애굽이 일어나기 400년 전에 벌써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라고 예언해 놓았었습니다. 가나안 약속의 땅에 인도하여 들이기로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시키시고 인도하시다가 야, 너희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이 너무 어렵구나! 이제 포기한다! 너희들 알아서 광야에서 죽든지 살든지 해라! 이렇게 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3에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나에게 설혹 광풍이 덮친다 할지라도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면 왜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고 죄 가운데 빠지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 패역한 시대에 우리는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주님의 성령님의 성전된 내 몸을 온갖 더러움에서 지켜 그분의 감동과 인도하심이 늘 충만하도록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우리의 안전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어 저 천국까지 데리고 가실 것을 믿습니다.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결론:
신앙생활 할 때 환란의 광풍이 일어 우리를 덮친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너 광풍아 잠잠할지어다! 외쳐서 제압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델이신 주님이 그렇게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접근할 때도 "너 더러운 귀신아, 떠날지어다!" 라고 명령해서 물리치고 귀신들린 자도 그렇게 명령해서 축출시켜 버려야 합니다. 어떤 문제의 광풍이건, 질병의 광풍이건 왕적 제사장의 권세로, 우주의 절대 주권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해서 제압해 버려야 합니다. 이 나라를 휩쓰는 사악한 사상이나 악한 죄악의 파도까지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그라들지어다, 완전히 제거될지어다! 명령해서 제압해 버려야 합니다. 항상 내 안에 모신 성령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영적 권세가 충만하여 승리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