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뮐러
독일 출신 조지 뮐러는 (George Muller, 1805-1898) ‘5만 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 ‘브리스톨 고아들의 아버지’로 알려진 영국에 파송된 선교사, 목회자, 전도자였다. 1805년 9월 27일 독일 프로이센의 할베르쉬타트 (Halberstadt) 인근 크롭펜쉬태트에서 (Kroppenstaedt) 한 세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길들여지는 악한 습관들
뮐러의 고백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자기 자녀들을 세속적 원리들에 따라 가르쳤는데, 나이에 비해 자기나 형에게 상당히 많은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 돈은 쓰라고 준 것이 아니라, 쓰지 않고 돈을 소유하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면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부친은 자기를 형보다 편애했는데 그것 때문에 형은 아버지나 동생인 자기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하간 나이에 비해 많은 돈을 지닌 이들은 곧 여러 가지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예컨대, 돈을 도박이나 아주 유치한 방식으로 거듭 소모했고, 나중에 부친이 자기 작은 금고를 들여다 볼 때는 아버지를 속이는 방식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나중 그 일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았지만, 그런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벌써 뮐러는 거듭해서 아버지에게 맡겨진 정부 국고를 훔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부친은 없어진 돈을 보충해야 했다. 어느 날 마침내 그의 꼬리가 잡혔다.
뮐러가 10-11세 나이였을 때, 그는 할베르쉬타트의 대성당 고전학교에 보내져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부친의 바람은 뮐러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뮐러가 하나님을 섬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례비가 두둑한 국교 루터파 목사로 편안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시절에 그는 어린 나이에도 온갖 죄악된 일들을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그런 악한 나날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14살 되던 해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 그는 견진 성사를 하였는데,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회개나 기도도 없이 구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1820년 부활절 다음 주일에 그냥 의식을 통과했다. 그의 모친은 (Sophie Eleonore Müller 1771-1820) 그가 14세 되던 해에 뮐러와 형을 (Friedrich Johann Wilhelm 1803–1838) 남기고 돌아가셨고, 그의 부친은 재혼해서 프란츠란 (Franz, 1822년 출생) 동생을 얻었다. 사실 그는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랑과 양육을 받지 못하고 그렇게 방탕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견진성사 (Confirmation) 의식이 있은 지 여섯 주 후에 뮐러는 2주간 동안 브룬스빅 (Brunswick) 고모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한 처녀에게 빠지게 되었다. 1821년 여름 중반까지는 공부를 약간 하고, 대개는 피아노-포르테와 (piano-forte) 기타 연주, 소설 읽기, 술집 들락거리기를 지속하였다. 악습들을 끊기로 결단도 여러 번 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821년 여름 중순에 부친이 마그데부르그 (Magdeburg) 인근 쇠네벡으로 (Schoenebeck)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뮐러는 자기를 마그데부르그의 대성당 고전학교로 옮겨달라고 간청할 기회로 잡았다. 뮐러는 죄악의 친구들을 떠나 악한 덫을 피해 다른 선생님들 밑에 두어진다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에는 더 사악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부친이 승인을 얻고 할베르쉬타트를 떠나 9월 29일 미가엘 축일까지 하이머스레벤에 (Heimersleben) 머물렀다. 미가엘 축일이 닥쳐오자, 뮐러는 자신을 하이머스레벤에 부활절까지 두시고, 같은 곳에 사는 한 성직자와 고전들을 읽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나겔 박사는 아주 박식하였고, 학생들을 돌보는 습관도 있었으며,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해서, 그의 간청은 허락되었다. 그때에 그는 사실상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는 그런 삶을 아버지가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두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 돈을 마치 받지 않은 양 속였다.
11월에 뮐러는 6일간 많은 죄 가운데 행한 쾌락의 마그데부르그 여행을 하였다. 그는 자기가 구입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돈을 긁어모아 브룬스빅으로 갔는데, 개인강사에게는 여러 가지로 거짓말을 해서 둘러대어 허락을 받고 그리했다. 브룬스빅으로 간 이유는 18개월 전에 그곳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그 처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한 주간을 브룬스빅의 비싼 호텔에서 지냈다. 그 주말에 그의 돈은 모두 허비되고 말았다. 여권도 없고 돈도 없고 이제 더 이상 그 호텔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뮐러는 브룬스빅에 머물고 싶어서 고모부에게 가서 머물렀는데, 고모부는 뮐러의 생활이 엉망인 것을 보고는 1주일 후에 떠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뮐러는 돈도 없이 부른스빅 근처 한 마을의 다른 호텔로 가서 마치 돈이 많은 양 행세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1주간 동안 살았다. 마침내 그 호텔 주인이 뮐러가 무일푼인 것을 눈치 채고 숙박비를 지불하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뮐러는 자신의 최고 좋은 옷들을 전당물로 잡히고 가까스로 체포를 피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6마일을 걸어서 볼펜부텔의 (Wolfenbuttel) 한 여관에 투숙했다. 거기서도 자기가 돈이 많은 양 행세했다. 거기서 이틀을 머물고 도망갈 기회를 엿보았다. 이제 그는 전당물로 잡힐 것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것 외에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방의 창문이 너무 높아 저녁에 그곳을 나와 내려가 도망할 수가 없었다. 셋째 날 아침에 뮐러는 마당으로 살그머니 나가서 그리고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주인이 의심을 하다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게 되어, 곧장 소리쳐 불렀다. 그래서 그는 되돌아와야 했다.
뮐러는 자기 사정을 그대로 고백하였지만, 어떤 동정도 받지 못하고 체포당하여 두 병사들에게 이끌려 한 경찰관에게로 인계되었다. 강도로 오인 받아 세 시간동안 조사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가도들이나 살인자들과 함께 감옥에 수용된 것이다. 첫날에는 빵과 약간의 고기가 제공되었으나 다음날 부터는 죄수들의 일반 음식과 동일하게 조잡한 빵과 물, 그리고 점심으로는 야채가 제공되었으나 고기는 없었다. 밤낮으로 감방에 문이 잠긴 채 감방을 떠날 수가 없었다. 첫째 날 저녁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는 조금 먹고, 셋째 날에는 다 먹고, 넷째 날부터는 조잡한 음식이라도 더 먹고 싶었다. 둘째 날 간수에게 심심해서 성경을 달라고 부탁하니 주지를 않았다. 그가 갇힌 감방에는 아무도 없고, 책도 손에 일할 것도 없이 큰 쇠창살만이 좁은 창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며칠 후에 그는 한 강도가 자기 감방 옆에 수감된 것을 알았다. 두꺼운 나무 판막이가 감방들 사이로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와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교도소장이 그 강도를 뮐러 감방에 같이 살도록 허락했다. 이제 둘은 자기들이 감행했던 모험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소일하게 되었는데, 뮐러는 자기가 실제로 행했던 악한 일들보다 없는 이야기까지 꾸며서 얼마나 자기가 유명한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거기서 매일 풀려나기만을 기다렸지만, 허사였고, 10일 혹은 12일이 지나자 둘은 사이가 털어져서 서로 대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뮐러는 1821년 12월 18일부터 1822년 1월 12일까지 감방 생활을 하였다. 이제 간수가 와서 같이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전에 조사를 받았던 그 경찰관이 브룬스빅에 사는 자기 고모부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고모부는 뮐러의 비행은 그 부친에게 알리는 것이 더 좋다는 답을 받아, 그렇게 해서 뮐러의 부친이 필요한 돈을 그 경관에게 보내오기까지 감방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그 돈은 뮐러가 집으로 여행할 때 필요한 여비와 여관에 갚아야 할 여관비, 감옥에 머물렀던 기간 동안 구류비 등이었다. 이렇게 감방에서 풀려난 뮐러는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음에도 여전히 죄악된 그 습관들은 끊지 못하고 있었다.
토요일 기도모임에 참석
그러다가 1825년 11월, 뮐러는 그간 세상 쾌락을 함께 즐기던 친구였던 베타가 (둘은 그해에 할레 대학교에 입학해서 900명의 신학생들과 함께 루터파 교단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자기는 토요일 저녁에 한 기독인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곤 한다고 말을 해서 무슨 모임인지 물으니, 성경을 읽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인쇄된 설교를 읽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즉시로 뮐러는 이런 모임이야말로 바로 내가 그간 찾고 있던 모임이 아닐까 하고 같이 가자고 하니, 이 친구는 이 세상 친구가 그런 모임에 가서 무슨 실망을 하려 하나? 생각하며 처음에는 데리고 가기를 주저했다. 베타와 뮐러, 그리고 다른 학생들 몇몇하고 그해 8월 방학 때 자신들의 소지물들이나 책을 전당포에 맡기고 경비를 마련하고, 필요한 여권은 자기 부친의 편지인 양 위조(僞造) 편지를 만들어 뮐러가 구입해서 스위스로 여행을 갔는데 43일간 보내면서 죽을 고생을 하였고 여러 번 큰 재앙을 만날 뻔 했으나 극적으로 피하기도 했었다. 뮐러는 그들의 여행 경비 돈 지갑을 맡아서 자기 돈은 친구들의 3/2 정도만 쓰는 등 사기를 (詐欺) 치기도 했다. 여행에서 겪은 좋지 못한 사건들 때문에, 베타의 마음속에는 주님께 대하여 심한 죄책감이 일어났기에, 그는 자기 잘못을 자기 부친에게 전부 고백했다. 그런데 할레 (Halle) 대학교에 입학한 뮐러의 마음에는 자기가 죄악된 삶을 개혁하지 않으면 어떤 교구에서 자기를 목사로 청빙하겠는가? 라는 현실적 감각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베타와 뮐러는 그 날 저녁에 그 모임에 참석했다. 뮐러는 성도들이 가련한 죄인들을 보고 그들을 대하는 자세나 그들이 갖는 기쁨에 대하여 알지를 못하고 있었기에, 자기가 모임에 참석해서 미안하다고 쓸데없는 사과를 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인 바그너는 (Wagner) 얼마나 친절하게 말하는지 뮐러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오세요; 이 집과 내 마음은 항상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거기 앉아서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나서 런던 선교회 소속 아프리카 선교사인 카이저 (Kayser) 형제가 무릎을 꿇고는 그 모임을 축복해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무릎을 꿇는 모양에 뮐러는 크게 인상을 받았다. 그 전에 누구도 그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자신도 그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성경 한 장을 읽고, 인쇄된 설교를 하나 읽었다. 안수 받은 성직자가 없는 경우에는 프러시아에서 성경 강해를 위한 정규모임은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마칠 무렵 그들은 다른 찬송을 불렀고, 그리고 집 주인이 기도를 했다. 그가 기도할 때, 뮐러가 느낀 감정은 “이 무식한 사람보다 훨씬 내가 더 배웠지만, 나는 저렇게 기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누가 물으면 왜인지는 명쾌하게 답할 수 없었지만, 그 모임에 참석해서 행복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뮐러는 베타에게 “우리가 스위스에 여행가서 보았던 모든 것이나, 우리가 이전에 즐겼던 모든 세상 쾌락들은 오늘 저녁 모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뮐러는 침대에 평안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누웠다. 그 날 저녁의 모임은 뮐러의 삶에서 전환점을 만들었다. 비록 그는 그 날 저녁에 정확한 지식이나 혹은 어떤 회개의 슬픔도 갖지 않고서 영적인 희열을 맛보긴 했어도, 여하간 주님이 그에게 역사하기 시작한 날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 다음 날, 그리고 월요일, 그리고 한 두 번 더, 바그너 형제의 집에 찾아가서 그와 다른 형제와 함께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토요일까지 기다리는 것은 뮐러에게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자를 주셨으니
그 즈음에 하나님은 뮐러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요한복음 3:16) 진리의 의미를 조금 가르치고자 하셨다. 뮐러는 왜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는지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번민하고 고통 하셨는지 이유에 대하여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처벌을 직접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셨던가? 예수님이 자기를 그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뮐러는 예수님을 이번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뮐러의 부친이 그를 꾸짖고 훈계했던 모든 권면이나 훈계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뮐러 자신의 못된 습관과 죄악을 끊어야 하겠다는 결심도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곤 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당하여 못된 습관과 죄악을 분명하게 끊을 수가 있었다. 술집도 끊었고, 거짓말이나 시기치는 악행도 끊어졌다. 물론 때로 악에 굴복하기도 했지만, 이전의 그는 더 이상 아니었다. 이제 뮐러는 깨달았다. 자기 죄를 용서받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속죄의 죽음으로 믿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죄를 이길 힘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역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죄악을 이기는 힘을 구해야 한다.
선교사를 갈망하게 되다
그동안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눈물로 기도할 때 그에게도 구원의 기쁨이 임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나는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넘실넘실 거리며 날아다는 것 같아"고 고백하였다. 1826년 1월 그는 선교사 편지들을 읽게 되었는데, 자기가 선교사가 되고 싶은 강력한 소망이 생겨남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영적소원이 간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의 길을 가로막는 두 개의 걸림돌이 있었으니, 하나는 아름다운 여자 친구 엘머가르데였다 (이 처녀 이름은 아무리 여기 저기 확인해 보아도 확인 불가했다). 엘머가르데는 그 토요 모임에 참석하는 유일한 여성이었는데,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뮐러와 같이 선교사로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 준 몇 사건들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다른 장애물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비싼 돈 들여서 대학 공부 시켜놨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선교사냐? 네가 장남으로써 그게 할 말이냐?" 라고 호통을 쳤다. 뮐러의 부친은 뮐러가 목회자가 되도록 신학을 하도록 권고했었지만,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나 헌신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사례비가 많은 국교(國敎) 루터교 교회 목사가 되기를 바랬고 또한 말년에 아들의 목사관에서 편히 지낼 마음에서 그러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인간적 소망은 뮐러의 꿈과 정면으로 대치되었고,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로 간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조지 뮐러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학비를 끊었다. 이즈음에 그러니까 1826년 부활절에, 그는 허만 발이라는 (Hermann Ball) 젊은 형제를 대하게 되었는데, 부모가 부자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함으로 자기 부모님에게 의지하는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그는 폴란드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노동하면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뮐러는 자기와 그를 비교해 보았다. 여자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나는 주님의 사역을 포기하다니! 기도도 없이 사귄 그 처녀와의 관계 때문에 선교사의 꿈이 희미해 졌던 점을 생각하고, 그녀와의 사귐을 끊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이제 어떻게 학비를 감당해야 할지 당황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 .”)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학비를 공급해 주시라고! 그런데 놀라운 일은 1시간 후에 누군가 자기 방문을 두드리는데, 그는 미국인 대학 교수로 뮐러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는 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국인 교수들의 강의도 독어로 번역해 주었다. 그렇게 그는 학비를 스스로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영국에 파송된 선교사로서
1828년 할레 대학을 졸업한 그는 1829년 2월 10일 집을 떠나 3월 19일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그런데 건강이 악화되어, 그는 의사들의 조언으로 디본셔의 테인마우쓰로 (Teignmouth in Devonshire) 가서 휴식을 취할 때 헨리 크레익을 (Henry Craik 1805-1866; 스코틀랜드 St. Andrews 대학교 출신 히브리어 학자, 신학자, 설교자) 사귀게 되었는데 이후로 친한 동역자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유대인 선교를 목적으로 런던의 유대인 선교회에 지원해서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1830년에는 18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테인마우쓰의 에벤에셀 채플에 (Ebenezer Chapel in Teignmouth) 청빙을 받아 사역하면서 엑세터 (Exeter) 근교에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서양 나이로 24세였는데 거기서 만난 29세의 메어리 그롭스 (Mary Groves 1830-1870) 양과 결혼을 했다. 결혼 후 3주부터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자기들의 필요를 아뢰고 그분에게만 의존하기로 결단하였다. 예컨대, 1832년 2월 19일자에는 믿음으로 자기 병을 치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위궤양으로 (gastric ulcer) 고통을 당했는데, 뮐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고치실 수 있다고 믿고 기도했는데 나흘 후에 그는 고침을 받았다고 적었다.
뮐러는 다시 1832년 5월 25일 브리스톨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죽기까지 사역하였는데, 베데스다 채플에서 헨리 크레익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였다. 1832년 9월 17일에는 첫 아이 루디아가 (Lydia) 태어났다. 1834년 3월 19일에는 첫 아들 엘리야가 출생했지만 다음 해인 1835년 6월 25일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1834년에는 "국내와 해외 성경 지식 연구소"를 (Bible Knowledge Institute Home and Abroad) 세우고 기독교 계통 학교들과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2; 중국 내지 선교회 창시자) 같은 “믿음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성경과 전도 책자를 배포하며 주일학교, 성인 학교, 주간 학교 등을 시작했다.
고아원을 시작하다
그는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시작할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1835년 12월 9일 자신의 생각을 한 공적 석상에서 말을 하였다. 헌금은 거두지 아니했지만, 어떤 이가 그에게 10실링을 건넸고, 한 여 성도가 자원봉사하겠다고 나섰다. 5일간의 기도 후에 300불이 들어와서 이제 집을 하나 세내어 꾸미고 장비를 갖출 여력이 되었다. 지속적인 기도 제목은 아이들하고 일하는 사역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기본 목표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어떤 사역을 하는 것이었다. 뮐러는 거리에서 만나는 가련한 아이들에 마음이 늘 아팠지만, 그것은 사실 고아원을 시작한 둘째 이유였다.
주변 사람들의 여러 반대도 많았지만, 자기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우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빈민가 브리스톨에 고아원이 세워지기를, 주님이 원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고아원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아무래도 1천 파운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빈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받아주신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조지 뮐러는 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편 81편 10절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을 묵상하다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는 말씀의 의지하고 혼자 조용히 부르짖는 기도를 계속해서 드릴 수 있었다.
그는 1836년 4월 11일 자기가 살아 왔던 윌슨가 6번지를 세내어, 26명의 아이들과 함께 고아원의 문을 열었다. 그 아이들은 7세에서 12세 사이의 소녀들이었다. 1836년 11월 28일에는 두 번째 집이 문을 열어 갓난 아이에서 7세 사이의 아이들을 맡았다. 1837년 9월에는 셋째 집이 문을 열어 7세의 소년들을 돌보았다.
뮐러는 빚을 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항상 초자연적으로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한날 아침에는 식탁 위에 빈 접시들과 빈 컵들과 빈 대접들을 올려놓고 아이들이 아침 식사를 위해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식품 저장고에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음식을 살 돈도 없었다. 그 때 뮐러는 “아이들아, 너희들은 우리가 학교에는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 손을 들어서 “사랑하는 아버지여,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실 음식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올렸다. 그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빵업자가 거기 서서 말하길, “뮐러씨, 나는 지난 저녁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조반에 빵이 없다는 것을 감지하였고, 주님은 내게 당신에게 빵을 조금 보내길 원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는 2시에 일어나서 새 빵을 구워서 여기 배송 했습니다”라고 했다. 뮐러는 그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곧 두 번째 문소리가 나고 문을 여는데 보니 우유 배달인이었다. 그가 말하길, 자기 우유 나르는 짐수레가 바로 여기 고아원 앞에서 부서져서 그는 아이들에게 신선한 우유가 담긴 우유통들을 그냥 주고 싶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 수레를 고치려면 일단 비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0개의 큰 우유통이 전달되었고, 그 우유는 지금 목마른 300명의 아이들에게는 충분한 양이었다. 수년 후에 뮐러는 세계 각처에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위스, 독일, 홀란드, 캐나다,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 소아시아, 터키, 그리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러시아, 폴란드, 인도, 중국, 일본, 말라카 해협, 싱가포르, 페낭, 콜롬보, 호주, 태스메니아, 뉴질랜드, 실론 등) 전도자로 다니게 되는데, 그 때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물건들을 직접 얻는 사람”이라고 (the man who gets things from God!) 알려지고 있었다.
1844년 7월에는 윌슨 가(街)에 넷째 집이 문을 열었다. 이제 그의 고아원에서 맡은 고아들은 13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845년 10월 30일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때 뮐러의 나이 40세였다. 그 편지가 그의 사역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 편지 내용은 그 지역 주민이 아이들이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항의 서신이었다. 사실 고아원은 아주 과도하게 만원이었다. 그래서 경작할 땅이나 옷을 세탁할 공간도 부족했다. 그는 그 편지를 받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만약 그가 이곳을 떠난다면, 적어도 300명의 고아를 수용하기 위한 건물을 6만 달러 비용으로 건축해야 했다. 이 문제를 안고 그는 기도에 돌입해서 36일째 되는 날, 6천불을 건축헌금으로 받았다. 1848년 7월까지 그는 필요한 6만 불 전체를 받았다. 그는 1847년 7월 5일 이미 애쉴레이 다운스라 (Ashley Downs) 불리는 곳에 건축을 시작했었다. 1849년 7월 제1호 건물이 완공되어 300명의 고아들과 직원들의 공부와 돌봄의 장소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비용은 예상보다 높아 7에이커의 부지에 여러 가지 장비며 물건들 구입까지 합하여 모두 9만불 가까이 소요되었다. 윌슨가의 이전 집들은 비우고 모두가 한 지붕 아래에 모이게 되었다.
1850년에 그는 제2의 고아원의 필요를 느꼈다. 기부금이 기적같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1857년 11월 12일 400명의 아이들을 수용하는 제2 건물이 12만 6천불의 비용으로 완공되었다. 1862년 3월 12일에는 450명의 아이들을 수용하는 제3의 고아원이 13만 8천불의 비용으로 완공되었다. 이 고아원은 11.5에이커 부지였다. 1868년 11월 5일에는 제4 고아원이, 1870년 1월 6일에는 제5의 고아원이 완공되었는데, 이 둘은 각기 450명을 수용했고, 건축비는 30만 달러 이상이 들었다. 1848년에서 1874년까지 사이에 기부금이 들어와서 130명의 고아들은 2050명으로 불어났고, 고아원 부지는 13에이커로 늘어났다. 뮐러는 1874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의 무한한 부자 재무관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사실이 내게 평안을 준다. 더구나 1년에 26만4천불 가량 필요한 사업도 만약 그가 기뻐만 하신다면 나는 기꺼이 이런 믿음의 모든 시련을 이기겠다. . . 만약 그분에게 영광만 된다면, 그의 교회와 세상에 유익이 되기만 한다면, 나는 자신을 어떤 수단도 남기지 않는 위치에 두었다 (즉 수중에 한 푼의 돈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 자신을 두었다). 2천 백 명의 사람들이 매일 식탁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것들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모든 기금들이 사라졌다. 189명의 선교사들을 도와야 하나,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9천명의 학자들이 있는 약 100개의 학교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데 수중에는 그들을 지원할 수단이 아무 것도 없다. 매년 4백만 권의 전도 책자와 수 만권의 성경책을 보내야 하는데, 모든 돈은 소진되었다. 나는 모든 일을 그분에게 위탁한다. 그분은 비록 나는 어디서 그 수단이 나올지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장래에도 내게 공급하실 것이다.
1898년 3월10일 93세의 일기로 부름을 받기까지 뮐러는 오직 기도로 자기 생애 동안 5개의 고아원을 통해 1만 24명의 고아들을 보살폈으며, 세계 각처로의 선교여행을 통해 42개국 300만 명 이상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뮐러는 이러한 믿음과 기도로 63년 동안 750만 달러 (약 30억) 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추정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의 재판장으로 불린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신명기에서 특히 이방인 객과 고아, 과부 등 이른바 사회의 저층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돌보도록 빈번하게 당부하신다. 신명기 저술 이래 수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소외 계층에 대한 그런 사랑과 관심의 말씀은 성도들의 양심을 분기시켜야 한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신 14:29, 16:11)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신 24:17)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신 24:20)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신 24:21)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 26:12)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신 26:13)
여기 신 26:12 본문에서 언급된 삼년 십일조에 대하여 잠시 설명하자면, 이 십일조는 매 3년 마다 소산의 10분지 1을 계산하여 성소로 가져가는 대신 자기의 거하는 성읍에 저축하고, 그것으로 고아(孤兒), 과부(寡婦), 객(客) 등과 레위인들을 대접하게 했다. 이 십일조는 이른 바 구제(救濟) 십일조라 불린다. 성소에서 먹는 것은 둘째 십일조, 레위인들에게 사례비로 주는 십일조는 첫째 십일조 혹은 레위 십일조라 불렸다.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소득의 1/10이 아니라, 먼저 소득의 십분지 일을 레위인 성직자들에게 바치고, 나머지에서 또 1/10을 떼어 그것을 가지고 성소에 가서 절기 잔치를 벌려 레위인들이나 고아 객들을 초대해서 함께 먹고 교제를 하였고, 매 3년마다에는 구제 십일조를 저축해서 그것으로 사회 저층민들과 영토를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 성지자들을 대접하게 했다.
구약에서 십일조 법규는 신 14:22에서 나타나지만, 매 7년에 닥치는 안식년을 기준하여 제1년, 제2년, 제4년, 제5년에는 첫째 십일조와 (레위 십일조) 둘째 십일조를 (먹는 십일조) 계산하고, 제3년, 제6년에는 구제 십일조와 첫째 십일조를 낸다. 십일조를 계산할 때는 가장 먼저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를 구분하고, 남은 것은 다시 십 등분 하여 하나를 십일조로 떼어서 먹는 십일조나 구제 십일조로 삼는다. 그러니까 성소에 올라가 먹고 즐길 수 있는 십일조는 1, 2, 4, 5년 되는 해에 활용할 수 있었고, 화목제 고기는 언제고 (어느 해건) 먹을 수 있었다.
뮐러는 그 수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데 정부의 보조를 청구하거나, 특정한 부자에게 손을 내민 적도 없었다. 단지 순전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신뢰하고 기도에 매달려 기도의 응답으로 매일 고아들의 양식을 공급받았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곧 “생명줄”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뮐러는 고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 기도했다. 또 기도할 때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는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르게 기도하는 것도 얼마동안 기도를 계속한다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끝까지 기도를 계속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까지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축복을 쉬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기도 응답의 한 예를 들어 보자 (조지 뮬러 「기도가 전부 응답된 사람」 배응준 역, 규장 출판사, 2005)
1857년 11월 하순경, 첫 번째 고아원의 난방 보일러가 샌다는 말을 들었다. 고장 난 보일러로 겨울을 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아원의 난방 장치는 원통형의 보일러와 두 종류의 파이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보일러가 원통 안에 불을 지피면 원통에서 방바닥으로 연결된 파이프가 방을 데우고, 원통에서 천장으로 연결된 파이프가 뜨거운 열을 방에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300명의 고아가 겨울을 나기에는 그런 보일러가 제격이었다. 만일 우리가 보일러가 낡아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새것으로 교체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른 기도일까? 8년 동안 겨울을 나면서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뜻밖에, 그것도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보일러에 이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뮐러는 아이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염려스러웠다. 어린아이들을 추위에 떨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디서 열기(熱氣)를 끌어온단 말인가?
보일러의 상태로 미루어보아 수리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수리만 한다고 해도 일주일 이상이 소요된다고 하니 새 보일러를 시공한다면 공사기간이 최소한 몇 주는 걸릴 게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 300명의 아이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따뜻한 방을 마련해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먼저 임시로 석유난로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두 개의 석유난로만으로는 수많은 방들을 전부 따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설령 난로가 많다고 해도 거기 들어가는 석유의 양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 또 석탄난로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창밖으로 길게 연통을 뽑아야 했기 때문에 임시로 사용하기에는 역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석탄난로가 난방문제를 충분히 해결해줄지 미지수인데다가 아이들이 생활하는 방의 외관(外觀)까지 크게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석탄난로를 설치하는 계획 역시 포기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나는 (조지 뮐러) 이 문제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그런 다음 벽돌을 허물어 보일러가 얼마나 손상되었는지, 수리가 가능한지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마침내 보일러 수리공들의 방문 일정이 잡혔고, 우리는 보일러 수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보일러를 꺼야 했다. 그런데 수리 일정을 잡은 그 날부터 황량한 북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수리공들이 오기로 한 날 닷새 전이었다. 그리고 12월 초하루,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음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렇다고 보일러 수리를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구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북풍을 남풍으로 바꿔달라고, 수리공들에게 ‘일할 마음’을 허락하셔서 속히 일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했다.
마침내 수리공들이 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황량한 북풍은 전날 저녁까지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리공들이 오기로 한 날이 되고 그래서 보일러를 꺼야만 했을 때, 주께 기도했던 그대로 남풍이 불기 시작했고 보일러를 켜지 않아도 될 만큼 날이 푸근해졌다. 보일러 제조사에서 보낸 수리공들은 조심스레 벽돌을 허물었고, 벽돌을 허물자마자 문제점을 찾아내 곧바로 수리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 8시 30분경, 수리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작업 속도를 재촉하기 위해 보일러 제조사 간부가 현장에 나와 직접 감독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나는 그 길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수리를 끝내 아이들이 추위에 떠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간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간부) 수리공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밤늦게까지 일하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시작 할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리 팀 내 고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밤을 꼬박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내일까지 모든 일을 마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에게 ‘일할 마음’을 주셨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수리가 완료되어 더 이상 보일러가 새지 않게 되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맨 처음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만 하루 만에 수리를 끝낸 것이다. 벽돌을 쌓아올린 다음 보일러를 다시 가동시켰다. 물론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포근한 기온이 계속되어 별도의 난방은 필요가 없었다. 기도와 믿음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난관을 극복했다.
또 다른 예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식탁에 빈 식기들을 놓고 둘러 앉아 뮐러는 손을 모으고 식사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한대의 마차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사연인즉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의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또한 1865년 1월 14일 토요일, 브리스톨에는 강한 질풍이 몰아 닥쳤다. 그래서 고아원 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는데, 고아원 지붕들에 20개의 구멍이 났다. 20개의 창문들이 부서졌고, 떨어지는 슬레이트들 때문에 두 창틀이 부서졌다. 유리 끼우는 회사나 슬레이트 회사는 자기들이 채용한 직원들에게 이미 다른 일들을 맡겼기 때문에, 월요일까지 부서진 고아원을 복구할 수가 없었다. 폭우에 강풍이 지속되었더라면 고아원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많은 기도 후에, 강풍이 오후 들어 멈추고 수요일까지 비가 그쳤다. 그 때까지는 피해 복구가 완료되었다.
1877년 8월에 뮐러는 증기선 사르디니안을 타고 (Sardinian)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가 그만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뮐러는 선장에게 지금 자기는 다음 날 오후까지는 퀴벡에 도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선장 둣톤은 (Joseph E. Dutton) 말하길, 안전을 위해 지금 배의 속력을 감속했고, 뮐러는 예정된 그 스케줄에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뮐러는 선장에게 해도(海圖)실을 (chartroom) 빌려 달라고 했다. 거기서 안개를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선장은 뮐러를 따라 그 해도실로 내려가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이라고 말을 했다. 뮐러가 기도한 후에, 선장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뮐러는 그의 기도를 중단시켰다. 왜냐하면 선장이 별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자기 기도는 응답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두 사람이 선교(船橋)로 돌아갔을 때, 이미 안개가 걷히고 없었다. 그 후로 그 선장은 참 기독인이 되었다. 뮐러는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에 몇 시간을 투자했고, 나중에 그는 1년에 전체 성경을 4번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Frederick G. Warne, George Müller: the modern apostle of faith, Fleming H. Revell, 1898: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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