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7 과부 된 지 팔십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는 한역대로 과부된 지가 84년이 아니라, 결혼 생활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현재 84세까지 지내고 있다 (εως cum )*ABLΞ 33. 120. f ff2. g1.2. vg et.δ) sah cop Augcons … ). 과부로 지낸 지가 84년이라 제시하는 사본도 있다 (S ως cum )cXΓΔΛΠ unc8 al pler syrutr arm Ps-Ath364 … D a b c e l m81 q go aeth Ambsiric 543 (ut ante) al plane om).
사본들의 무게를 따져보면, 현재 나이 84세까지 과부로 살았다로 읽어야 적절하다.
안나는 84세가 되도록 7년의 짧은 결혼생활 이후에 날이면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출근하며 주야로 기도와 금식하며 하나님을 섬겼다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영안이 열리고 영적 세계가 보였고, 하나님의 성령님과의 교통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선지자로 인정을 받았다. 성령님은 그녀에게 메시아를 만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녀의 삶은 이 세상을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게 사는 방식을 보여준다. 인간을 만드신 그 목적에 부합되는 삶이 예배의 삶이다. 그녀는 그 목적을 다 이루고 메시아를 만났고 그 메시아를 경건한 자들에게 증거하였다. 다만 그녀가 기대한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메시아께서 유대 나라를 로마에서 독립시키고, 의와 공평으로 통치하며 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 당대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약이 증거하듯, 유대인들의 그러한 메시아 관은 잘못된 것이었다. 메시아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건지시러 오셨고, 로마군의 지배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키고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메시아는 죄와 사단, 죄의 결과인 각종 질병과 저주에 매인 자들을 해방시키러 오셨지, 지상의 어떤 민족의 정치적 군사적 독립을 이루고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메시아는 인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루셨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지상에 오셔서 지상 천년 왕국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다스려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런 시나리오는 성경적일 수 없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최정점이고, 그 사건으로 일어난 놀라운 속죄와 구원의 역사는 단 9:24-27에서 예고된 최종 종말적 안식년 예언으로 미리 예고된 바 있었다. 사단은 십자가에서 머리통이 박살났고 (창 3:15, 골 2:14-15), 하늘에서 축출당하였고 (계 12:7이하), 결박당하여 무저갱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계 20:1-3), 세상 임금의 자리에서 축출당한 상태이다 (요 12:31). 우주적 정권 교체는 십자가와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 메시아 왕으로 좌정하심으로 일어났고, 성령 부으심으로 메시아 통치는 시작되었다.
첫째로, 안나는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섬겼다.
"섬겼다"란 말은 (λατρεύουσα 현재 분사) 밤이나 낮이나 규정된 예배나 기도 시간에 참석하여 지속적으로 매일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이다 (행 2:46 참조). 이 문장은 "금식과 기도로 그녀가 경배하고 있었다"라 번역할 수 있다.
"섬기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라트류오"인데, 이 말에서 영어의 liturgy란 (제의, 의식) 말이 유래한다. "섬기다"란 동사는 구약 히브리어로 "아바드"이고 이 동사의 목적어가 땅이 되면, "땅을 경작하다"란 의미이지만, 하나님을 목적어로 하면, "하나님을 섬기다" 곧 하나님을 경배하다가 된다. 인간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두시고 자신을 섬기고 (아바드) 자기 계명들을 지키게 (샤마르) 하셨다 (창 2:15). 즉 인간의 원래 사명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인간의 근본적인 사명에 속한다.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예배라면, 구속하시는 목적도 그러하다 (출 3:12). 또한 영원 세상에서 우리가 영원히 해야 할 일도 역시 그를 섬기는 일이다 (계 22:3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만약 인간이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 근본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인도를 경험하며 축복과 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서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려한 교만한 망동 때문이었다 (창 3장).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러져서 그분을 오로지 의지할 때 그분의 인정과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이 근본 목적에 부합되는 생활을 하려면, 매일 아침 기도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매일 가정 예배를 드려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물론 교회의 공적 예배들에 모두 참석하여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이런 개인들이 모인 가정 사회 국가는 역동적이며 진취적이며, 영적이며 도덕적이며, 부요할 것이며 모든 악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안나는 결혼 생활 7년하고 남편과 사별했음인지, 혼자 과부로 84세가 되기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과 기도로 예배를 드리며 살았다고 한다. 이는 성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성직자가 아닌 사람에게 그런 공간을 내어줄리 만무하다) 거의 매일처럼 성전에서 드려진 2번의 제사 예배 때 참석하고, 기도 시간에 참석해서 예배와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기도의 삶은 성령님과의 친밀함을 유발하여 성령님의 주시는 환상과 꿈, 그리고 음성을 받아 영적으로 수직 상승하게 된다. 그리하여 과부 안나는 여선지자의 차원에 올랐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예언 계시를 주시고, 영적으로 영안이 열려 하늘 영계의 환상을 보는 자가 되었다.
만약 우리가 안나가 성전 경내에 살았다고 판단한다면, 그럴 경우 그녀는 성령 충만한 여선지자로 인정받아 성전에서 등불 심지를 손질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예언을 발하거나 등등 일을 하는 조건으로 작은 공간을 얻어 살고 있었다고 (대하 34:22에서 훌다?) 추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구약에서 여선지자는 미리암, 드보라, 훌다 등이 있었고, 신약에서 언급된 이들은 빌립의 네 딸들이다 (행 21:9).
주야에 금식하고 기도하며 "경배하였다"는 (한 "섬기다") 말은 안나가 얼마나 영적으로 하나님께 몰두하였고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던지를 암시해 준다.
구약에서 금식일은 대 속죄일 하루였다 (레 16:23). 그러다가 나중 국가적 참극이 일어났던 날들을 기념하여 금식하게 되었고 (슥 7장 참조), 주님 당대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2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하고 있었다 (눅 18:12).
사도 바울은 딤전 5:5에서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라고 하였다. 안나가 바로 그런 참 과부였다. 오로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로 살았다. 이런 참 과부는 초대 교회 당시 과부 명부에 기록하여 생활이 어려운 경우 교회에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하였다. 그런 과부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했다.
안나는 80평생을 예배 생활로 일관하였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을 이룬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한 삶을 그녀는 살았다. 과부로 바람이 나서 재혼하고 이혼하고 때 삼혼하고 이런 영적 혼란과 흑암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청결한 신령한 신부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하늘 나라에서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잠시 사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과부이건 과부가 아니건 그러하다.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복되고 하나님의 의도에 합당한 것이다.
둘째로, 안나가 성전에서 아기 메시아를 만나다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 라
안나는 당대 전체 유대인들의 소망이었던 메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 자신에게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을 그녀가 만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은 (lutrwsin Ierousalhm) 몇몇 후대 사본들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본들의 권위를 보자면, 현재 한역처럼 번역해야 한다. 25절에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말이나 대동소이한 말이다.
구약의 메시아 약속들에 근거한 다윗 후손 메시아의 오심이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의 소망이었고 기대였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고 공평과 의로 통치하며 (렘 23:5, 33:15) 열방을 통치하리라는 (시 72:8이하) 소망이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대신에 '예루살렘의 구속'이라 하였을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도성으로서 일종의 제유법이라 (일부로 전체를 지시함 synecdoche) 할 수 있다.
구약의 메시아 사상은 다윗 후손과 연관된다 (삼하 7:11이하, 시 2:7이하). 구약에서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삼중 직분자들을 지시했는데, 그 중에서도 현직 왕을 지시하는 명칭이었다 (삼상 12:5, 24:6, 10 등). 선지자나 제사장도 기름 부음을 받고 직분자가 되었지만, 현직 왕을 제외한 선지자나 제사장을 '메시아'란 칭호로 부른 곳은 구약에서 한 군데도 없다.
그러다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당하고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렇게 왕정이 사라진 이후로 '메시아'도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포로 시절이나 귀환 시절 어느 시점부터 '메시아'란 용어를 다윗 후손으로 장차 왕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의와 공의로 통치할 왕 구세주를 지시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현직 왕이 아니라, 장차 오실 다윗 후손 왕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단 9:24-27에서). 신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히브리어 '메시아'의 번역어이다.
구약에서 메시아 예언들과 연관되는 중요한 사고가 '이스라엘의 회복' 사고이다. 이는 선지자들에게서 특히 이사야 후반부에서 부각되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에 이스라엘이 회복/ 구속된다는 사고이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열방도 이스라엘의 구원에 참여하리라고 보았다. 구약 선지서들에서 소위 회복 메시지에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 구속 예언들이 나타나는데, 이사야 후반부에서 이 회복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신천신지와 예루살렘의 회복을 목표로 바라본다 (가령, 사 65:17이하):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신천신지와 (새) 예루살렘이 예언되고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이스라엘이 살아갈 자연 환경이 새롭게 되고 (사 11:1이하, 65:19이하 참조), 새 예루살렘이 창조된다. 사실 신천신지와 새 예루살렘은 전체와 일부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둘은 서로 불가분리의 동일체로 간주될 수도 있다. 신천신지는 전부 새 예루살렘화 되겠기 때문이다.
셋째로, 안나가 아기 메시아를 잠간 만났다면, 우리는 메시아께서 통치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변화될 신천신지와 새 예루살렘 미래 세상의 모습은 계 21:1이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 계시록의 말씀은 앞서 인용한 이사야 구절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계시록은 이사야가 예언한 그 미래의 예루살렘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라 불렀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라기보다 새 예루살렘이 신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이고 아내이다 (계 21:9). 또 이 새 예루살렘은 사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성전이기도 하다 (겔 40: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이 에스겔의 말씀과 계 21:10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를 비교해 보라.
계시록의 말씀은 모든 구약 예언들의 해석이자, 구약 예언들의 성취가 교회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요 아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이 곧 교회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히 12:22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했다면, 갈 4:26에서는 위의 예루살렘이라 했다. 모두 교회를 그렇게 불렀다.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은 이상적인 교회 곧 성도들의 무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성도들이 영원히 살게 될 처소이기도 하다. 이중적인 요소로 묘사된 것이다. 각종 보석으로 단장한 그 성읍의 모습은 사 54:11-12의 반영이며, 곧 이상화된 성도들의 인격을 (갈 5:22-23의 성령님의 열매) 상징하고 또한 그들이 살아갈 성읍의 놀라운 영광을 반영한다.
새 예루살렘 성을 관통하는 생명수 강물과 그 강변 좌우편에 늘어 선 생명나무와 그 과실들은 모두 겔 47:1-12의 반영인데, 요 7:38, 4:14에서 영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실제로 하늘에 생명수 강물이 흐르고 그 물을 마시거나 거기서 목욕한다기보다 지금 우리가 성령 충만을 통해 향유하는 그 생수의 강물을 지시한다. 그 생명수 강물의 근원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온다 (계 22:1; 겔 47:1에서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 성도들이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모시면 (롬 8:10) 그분의 보좌가 성전된 우리 마음에 설치된 셈이고 거기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 나오게 된다. 그분의 심령 보좌는 그분의 권세와 통치를 상징하고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의 뱃속에서 생명수 강물은 흘러 나온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대로 그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은 흘러가는 사해의 염해를 생수의 바다로 바꾸고 물고기 떼가 생겨나게 만들고 강변 주변의 과일 나무에 생명 과일이 맺히게 하고, 그 생명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치유하는 효력을 발생한다. 생명수나 생명 나무나 그 과일 잎사귀 등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현재 맛보기로 누리고 있는 영생의 축복,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능력과 희락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주님 당대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시리라 기대하였다면, 방금 묘사한대로, 메시아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들은 그들의 기대와 (세속 정권과 독립 국가 수립) 완전 어긋나는 영적인 성질의 것이다.
오늘날도 세대주의 신학 체계는 우리가 보기에 주님 당대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메시아 사상, 종말 사상으로 성도들을 오도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구약은 전부가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신약에서 복음서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리라 기대한다. 가령 마태복음 전체는 유대인들과 연관되는 말씀이고 이방인이 낄 틈새가 없다. 산상수훈도 유대인들을 위한 것인데, 주님이 재림하여 지상에 세울 천년왕국 시대의 실천 윤리라 한다. 계시록도 물론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생겨난 말하자면, 임시 방편으로, 유대인들이 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자, 하나님께서 예언에도 없었던 교회를 부랴부랴 만드시고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향하도록 하셨다 한다.
구약의 예언 약속들은 모두가 주님의 재림 이후 그들이 가정하는 지상 천년왕국 시대에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리라 한다. 가령 천년왕국이 되면 구약 예언들의 말씀들이 성취되리라 한다.
사 6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 . 5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 . . 11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사 49:23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 61:5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이처럼 그 때가 되면 유대인은 1등 국민이 되고, 이방인들은 그네들의 종이 되고 그 발의 티끌을 핥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방인들이 시온산으로 물밀듯 밀려 와서 거기에 세워질 새 성전에서 야웨 하나님을 경배하리라 한다:
사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이런 말씀들이 실제로 그들이 가정하는 천년왕국 시대에 성취되리라 한다.
하지만, 이런 세대주의 신학 해석은 신약이 제시하는 해석과 전혀 다르다. 가령 앞서 언급한대로 새 예루살렘은 교회의 상징이고, 그 교회 안으로 열왕이 영광을 가지고 지금 들어온다고 계시록은 말씀한다: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3절은 사 60:19-20의 반영이고, 24-25는 사 60:3, 5, 11 등을 반영한다. 새 예루살렘이 어린 양의 신부 곧 교회이기 때문에 지금 이런 예언들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지 않고, 재림 이후에 가정된 그 지상 천년왕국의 수도 중동 예루살렘으로 열방이 영광과 재물을 가지고 들어온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할 그리스도 복음의 축복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잘못된 해석에 근거하여 실망만 잔뜩 부풀리게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 교회에서 구약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도래했지만, 그 최종적 완성은 "아직 아니" 이르렀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 13장 천국 비유 참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은 맛보기이고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재림 이후에 그 완전한 성취와 완전한 축복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가령, 사 11:6이하의 자연계의 완전 회복).
그러나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복음의 축복, 곧 오순절에 성령님을 부어 주심으로 시작된 메시아 통치는 구약 예언 약속들이 교회 안에서 성취되도록 하고 있으며, 그 최종 완성은 재림 이후에 나타날 신천신지와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되리라는 사실이다. 즉 구약 예언들은 재림 이후에 유대인들 중심으로 지상 예루살렘 중심으로 성취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인류 역사의 최대 사건들이다. 그 십자가 사건으로 사단의 머리가 박살나고 (창 3:15), 사단의 세력이 무장 해제를 당했으며 (골 2:14-15), 하늘에서 사단의 세력이 쫓겨났고 (계 12:7이하), 사단이 결박을 당하여 무저갱에 던져졌다 (계 20:1-3). 십자가 사건 외에 무슨 수로 사단을 결박하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이었다. 죄를 먹이로 먹고 사는 사단에게 죄의 제거는 그 머리통을 박살내는 치명타인 것이다. 예증하자면, 검사는 죄를 먹고 산다. 죄를 없이하면, 검사란 직업은 사라지고 만다. 판사도 그럴 것이다. 사단은 죄를 근거로 인간을 기소하고, 정죄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다. 사단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죄를 근거로 인간에게 침투하여 인간을 주장하고 고통을 주고 억압하는 것이다. 우울증이나 많은 질병들이 귀신들과 연관되고, 진화론이나 동성애 사상, 공산주의 사고 등 많은 세상 철학 사상들도 귀신들의 영향하에 발생한다 (딤전 4:1-2).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계 13:18에 언급된 666이라는 수자 곧 짐승의 수자라는 것도 사실 여기 언급된 양심이 화인 맞는 일과 연관된다. 혹자는 이 666이 무슨 베리칩이라 (Verification Chip) 이해하기도 하는데 (서사라 목사) 사단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 것을 (겔 9장, 계 7:1이하) 모방해서 하는 영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도장을 찍는 일은 종의 소유권을 표시하고자 불에 달군 인두로 종의 몸에 표지를 새긴 것처럼, 성령님으로 도장을 치는 일을 가리킨다 (고후 1:22, 엡 1:13, 4:30). 이 일이 영적이고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듯, 사단이 제 놈의 소유권을 주장하고자 친다는 그 666 수자 표지도 역시 영적이며, 심령에 불 도장을 팍 찍는 일과 연관되어 볼 수가 없다. 물론 어떤 전직 무당은 (윤순분 집사) 무당 활동할 때 기독인들이 들어오면 그 우편 어깨 위에 별이 반짝였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은 있다.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은 누가 사단에 속한 자이고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통은 박살났다. 즉 치명타를 입었다. 그럼에도 사단의 세력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죄 용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성도로 부름을 받은 자들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세속의 더러움에 오염되어 악령 세력을 여전히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 20:1-3에서 묘사된 사단의 결박과 무저갱에의 던짐 사건은 어디까지나 묵시 문헌 곧 환상을 매개체로 영적 세계의 실체들을 만화처럼 보여주는 상징적 묘사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다차원의 세상 실상을 어떻게 단면적 만화 영상으로 다 그려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묘사들도 등장한다. 복합적 실체를 단면으로 그릴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현상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고, 그리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메시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놀랍게 구약 예언들은 현재 우리 교회에서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성취되고 향유되어야 한다. 이를 저 먼 중동 유대 땅에서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 이해하는 해석법은 교회에 해가 되고 유대인들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지금 메시아 통치 시대 곧 은혜 받을만 한 때에 구원의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후 6:2).
저 여선지자 안나나 시므온 같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그 메시아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의 약속들을 다 이루고 계신다. 우리는 이방인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 (갈 3:29) 구약에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지금 여기서 내 것으로 주장하고 향유할 수 있고 그리해야 마땅하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구약 모든 약속들) 이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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