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信稱義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을 받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다란 가르침 곧 "이신칭의" 교리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라고 믿어져 왔다. 이 교리는 중세 카톨릭의 공로 + 믿음 = 구원 등식을 깨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마틴 루터의 (M. Luther) 깨달음에서 세상에 선포되기 시작하여 서구 종교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고, 오늘날까지 개신교의 핵심 교리로 자리잡았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과 달리,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고, 선행은 구원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로 행하기 시작하여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 근거가 된다고 가르친다. 즉 선행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는 손꼽만치도 역할을 감당할 수 없고 오로지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루터의 이런 이신칭의 교리는 특히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에게서 핵심 기독교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루터파 견해에서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개개인에게 수여되며, 그것은 법정적 개념이다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28-30). 불트만은 바울이 율법 준수를 통한 행위 구원을 주장했던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를 논박한다고 보았다. 불트만이 보기에 율법은 온전히 준수될 수도 없을 뿐더러, 순종에 대한 요청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자랑을 산출할 뿐이다. 바울은 양적인 이유에서나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없다), 질적인 이유에서 (율법을 지키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죄악이다) 율법이나 그 율법에 집착하는 유대인 기독인들을 반대했다. 루터의 복음과 율법의 대조는 불트만의 바울 이해에서 최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케제만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의"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리키는 것이 (불트만이 주장한대로)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서, 그것은 자기 피조물과 자기 백성에 대한 그분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의 구원하는 활동이다 (saving activity). 그 하나님의 의는 우주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서, 그 힘 아래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집합 백성의 일원으로 살게 된다고 했다. 그런 백성은 세례를 통해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E. Kaesemann, "Gottesgerechtigkeit bei Paulus," ZThK 58 [1961], 367-78; ET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i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1969, 168-82).
쉬툴마허는 케제만의 기본 전망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쉬툴마허는 주장하길, 하나님의 의에 대한 구약과 유대적 묵시적 이해를 배경삼아 (케제만처럼 불트만의 실존론적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묵시적, 우주적 범주로 이해하고자 한다) 바울에서 "하나님의 의"란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서 경험되는 현재적 실체인데, 무엇보다 개인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세계 안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다 (Peter Stuhlmacher, Gerechtigkeit Gottes bei Paulus;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이렇게 루터가 주창한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견해를 따르는 루터파 진영에서 조차도 새로운 견해들이 대두되고 있었지만, 이와 별개로 1977년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라는 책의 발간 이후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주창하는 학자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제임스 던이나 (J. D. G. Dunn), 롸잇 (N. T. Wright) 같은 학자들은 루터의 바울이해를 다소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세의 루터가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과 싸울 때에, 바울을 연구하면서 바울도 자기 당대에 율법주의 혹 행위 구원론자들과 싸운 것이라고 착각하였는데, 그런 루터의 바울 이해가 오늘날까지 개신교에 그대로 전해져서 주도적 견해가 되었지만, 새로운 시각 주창자들은 그런 루터의 바울 이해를 일부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이 논박하였던 그의 논적들은 (논쟁의 대적자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유대교 율법주의자일 (혹 행위 구원론자)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몽트피오르나 (C. G. Montefiore, Judaism and St. Paul) 모어가 (G. F. Moore, Judaism in the Fir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지적한대로, 바울 당대의 팔레스틴 유대교 사상에서는 회개를 통한 은혜에로의 회복 사고나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언약 백성 사고가 주도적이었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 한 어떤 율법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그로인한 언약 백성의 지위가 벌써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보했었고, 율법 준수는 어디까지나 언약 백성됨 곧 구원받은 백성됨의 표지에 불과했다고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의 상황과 바울의 상황을 동일시했지만, 바울이 처했던 상황은 루터의 그것과 같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바울이 싸워야 했던 복음의 대적자들은 유대주의자들로 (Judaizers) 통상 지칭되는데, 저들은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할례나 음식법 같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루터나 전통적 개신교의 이해였다. 그런데 새로운 바울 이해는 그런 루터의 이해가 옳지 못하다고 바로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논박한 그 유대주의자들은 율법 준수를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한 것이 아니라 (루터가 싸웠던 로마교의 사상처럼), 선택으로 구원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처럼, 이방인들도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일부로 가입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으리라고 대개 추정된다.
구약적 견지에서 신약을 본다면 이런 바울에 대한 새로운 시각 주장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1세기의 팔레스틴 유대교 사상만 아니라, 구약의 기본 사상이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체결을 통해서 주어졌던 것이고, 율법을 주신 것은 구원받은 백성에게 이방인과 구분되는 표지로서 작용하도록, 즉 너희들은 이방인들과 구분되는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의 표시를 보이라는 것이었다. 즉 율법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분시키는 울타리 역할을 감당하였다. 전통적 개신교 바울 이해가 이처럼 공격을 받자, 무나 (D. Moo) 크랜필드 (C. E. B. Cranfield) 같은 학자는 바울이 논박한 그 유대주의자들은 행위 구원론을 가르친 정통 유대교와 달리 어떤 행위 구원론/ 율법주의를 주창한 퇴보한 유대교의 사상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혹은 다른 이들은 (예컨대, S. Sandmel, The Genius of Paul) 팔레스틴 유대교 사상이 아니라 어쩌면 해외 교민들 곧 헬라파 유대교 사상과 바울 사도가 싸웠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전통적 바울 이해는 어찌하건 간에 어느 방식으로건, 바울 사도가 싸운 그 유대교 사고에는 행위 구원론적 요소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시각 주창자들은 마틴 루터의 바울 이해에서 "하나님의 의" 개념에서 그릇됨이 있다고도 지적한다. 의란 義 한자어는 양(羊) 아래에 내가 (我) 서 있는 형상이다. 즉 어린 양 예수님 아래에 내가 설 때, 나는 의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이겠다 (한자의 신학적 풀이). 여하간 한자에는 성경신학 사고가 나타난다는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라고 할 때 구약에서 어떤 의미인지가 문제된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의 "의" 개념은 구약에 근거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약의 모든 사고나 어휘들은 무엇보다 구약에 근거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물론 헬라적 개념을 전연 도외시할 수는 없겠지만).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의롭게 하다" 혹은 "의롭다고 칭하다"란 말의 용례가 구약에서 어떠한가? 가 중요한 것이다. 구약에서 본다면, "의롭다고 선고하다"란 말은 (tzadiq) 사역형으로 (hiphil)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만들다란 의미이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의롭다고 선고하다"란 의미이다. 이 경우 사역형은 선포적 의미를 나른다. 이는 재판정에서 사용하는 법정용어인데 (forensic term) 어떤 사람을 재판장이 "무죄하다 라고 선고하다"란 의미이다. 이런 법정적 의미는 출 23:7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악인을 의롭다고 선고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재판장이시다). 그리고 사 53:11에서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라고 했다. 여기서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이 자기 지식으로 (혹 자기 "고난"을 통해서 [beda'to])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라"는 (yatzdiq) 것이다. 이는 야웨의 종이 고난을 통해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 (사 53:5-6),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롭다고 선고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롭게 하다"란 말은 이렇게 법정에서 재판장이 선고하는 법정적 개념도 있지만, 창 15:6 같은 경우에는 전혀 법정적 뉘앙스와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예컨대, 창 15:6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아들이 한 명도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들을 가리키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이 믿으니, 그 믿음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로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이 어떤 율법 조항을 준수하기 전도 심지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할례를 받기도 전에 (창 17장) 벌써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결정적 증거 구절로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롬 4:3, 갈 3:6).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이는 창세기 전체에 비추어 본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그대로 되리라고 믿어 버림으로, 곧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신 앞에서 의로운 존재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시해야 할 것은 "의"라는 개념이 고전적 헬라-로마에서의 "의" 개념과 달리 "관계적" 측면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이다. 헬라 로마적 사고에서 "의"란 인간이 도달하고자 애를 써야 할 그 이상적인 기준이다. 자기 홀로 애를 써서 도달하면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이 의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아무리 내가 애써도 하나님께서 아니야! 그것은 아니야! 라고 해 버리면 아브라함의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귀하게 보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손에 잡히는 것 없고 눈에 보이는 것 없고, 귀에 들리는 것 없었어도, 약속이 곧 자기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되리라는 그분의 약속이 현실화 될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추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신뢰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아브라함의 의로운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그 무엇이다. 그 관계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고 신뢰하시고 자기 맘을 터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를 구원의 견지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신의 친구 혹은 자기 가족 혹은 자신의 신뢰하는 자녀 혹은 백성이라고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혹은 구원얻은 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나 같을지 모른다.
롬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우리 성도들도 역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을 믿을 때,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임을 믿을 때, 우리도 그분 앞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구원 사건들을 나를 위한 것임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단지 법정에서의 무죄 선고를 하다란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짐을 암시해 준다.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권속과 무관한 멀리 떨어져 살던 소망 없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 들여지는 일이 바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롭다고 선고하다란 말은 법정적 의미에 더하여, 하나님의 사랑받는 관계 울타리 안으로 받아 들여짐의 상태도 함축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신칭의란 말은 단지 법정에서 너는 무죄하다고 선고받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로 혹은 그분의 가족됨의 울타리 안으로 받아 들여짐, 그분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그런 상태로 인정받음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신칭의 사고는 좁은 의미에서 법정적 견지에서만 보지 말고, 좀더 넓게 의롭다 함을 선고 받은 이후에 누릴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 (롬 5:1이하) 그분의 가족 혹은 언약 안으로의 받아 들여짐의 상태까지 포괄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신약에서 의롭다 함을 얻다란 사고는 성화 곧 거룩하게 됨의 사고와 중첩되기도 한다.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모든 일에서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살고 죽는 일, 먹고 마시는 일, 월세 내는 일,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재정의 문제, 앞날의 일, 현재의 일, 모든 일들은 주님께 전폭 맡기고 그냥 오로지 믿음으로 행해야 하고 믿음의 순종만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안된다, 할 수 없다, 못한다의 부정적인 생각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리고 염려나 걱정도 던져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에게는 모두가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일 염려도 걱정도 두려움도 사라질 지어다! 나는 오직 맡기고 믿음으로 살리라! 오로지 기도하면서 살리라! 성령님이 지시하는대로 감동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리라!
믿음도 선물이라고 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니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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