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이스라엘의 미래

중일사랑 2015. 3. 7. 23:11

이스라엘의 미래

롬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말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거기서 저 중동의 이스라엘이 언젠가 주님 재림 직전 정도에 대거 집단 개종해서 믿으리라는 예언을 보기도 한다. 그렇게 보는 근거들이 롬 11장에서 몇 가지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롬 11:12, 15이다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이 말씀 특히 12, 15절의 말씀은 장차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대거 집단 개종하리라는 중요한 근거로 기능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넘어짐 - 세상의 풍성함; 유대인의 실패 - 이방인의 풍성

(하물며) 유대인의 충만함 - 이방인의 풍성/ 축복?

유대인을 버림 - 세상의 화목; 유대인들을 받아 들임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재림 직전의 유대인 집단 개종을 주장하는 존 머레이의 (John Murray) 주장은 이러하다: 이스라엘이 대규모로 버림당함이 (15a) 전체 민족적이었다면 그들의 받아들임도 (15b) 전체 민족적이어야 한다. 회복은 배척의 규모에 상응해야 한다. 이스라엘 전체가 넘어졌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받아야 한다.

다음으로, 머레이는 (Murray) 이스라엘이 전체 민족적 은총에로 받아들여짐에서 야기되는 “죽은 자로부터의 살아남”은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이라고 믿는다. 그는 말하길, 그것은 복음의 확장과 성공에서 전 세계에 전대미문의 역사이다 (1965:2,84). 그러므로 머레이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에 맞추어 전 세계적인 대규모 (이방인들의) 개종이 있으리라 가정한다.

전체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미래파의 (John Murray) 주장에 대하여, 신약시대 내내 유대인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역사파"는 롬 11:11-15은 하나의 전후(前後) 관계를 기술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 답한다. 즉, 롬 11:11-15은 사건들의 전후 관계를 제시한다: 먼저 유대인이 메시아를 배척하고, 그 후에 이방인이 믿고, 믿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시기(猜忌)나게 하여 저들을 믿음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시기로 믿음으로 돌아오면, 그들의 개종은 다시 세상에 더 한층의 큰 축복을 낳는다. 머레이가 (Murray) 대표하는 그 미래파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범죄”는 (혹 떨어져 나감) 현재 복음 (신약) 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충만함”은 (혹 받아들여짐)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의 민족적 집단 개종을 지시한다고 한다.

역사파 견해는 다른 접근법을 사용한다. 라벗슨은 (O. Palmer Robertson) 이렇게 말한다:

전체 사이클은 복음 선포 시대, 곧 현 시대에서 성취를 갖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문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이방인들의 경험과 비교한다. 30절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한 때 불순종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받았다. 동일하게 이스라엘은 현재 불순종하여, 그들도 현재 긍휼을 받을 수 있다.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 모두의 경우 불순종에서 긍휼의 상태로의 전체 이동 사이클은 현 시대에 일어난다. 이런 전망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받아들임은 현 시대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믿는 유대인의 접목을 (椄木) 가리킬 것이다. 그런 일은 이스라엘의 충만이 실현될 그 시점에 최절정에 달할 것이다. 이방인 세계에서 일어날 유사한 병행 경험은 이스라엘의 떨어져 나감과 버림의 시기가 현 복음 시기와 일치하고, 그들의 받아들임과 충만함은 그 이후 (재림 직전) 시대에 준비 되었다는 사고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1979:214-15).

14절로부터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분명한 것은 바울의 사고에서, 현재 이방인들이 경험하는 바와 병행되는 것은 현 시대의 개개 유대인의 구원이지, 미래 종말에 나타나리라 가정된 그런 집단 개종이 아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자기 사역을 통해 자기 동족 이스라엘 인을 격동시켜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한다. 이런 “얼마”를 구원하는 일은 재림 직전에 나타날 “충만”과 비교하기 어려운, 유대교도 중의 가련할 정도의 소수 얼마의 구원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이 얼마의 구원은 롬 11장의 주요 주제들 중의 하나와 완전히 통합될 수 있다. 바울은 말하길, 현시대에도 은혜의 선택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한다 (5절). 사도가 구원하고자 하는 그 얼마는 그가 전체에서 논의하는 그 ‘남은 자’의 수자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얼마를 구원함과 ‘남은 자’를 유지하는 일은 서로 상관되는 사고들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얼마가 자기 현재 사역을 통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소망은 ‘남은 자’가 항상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O. Palmer Robertson 1979:215).

바울은 11b에서 이방인 구원은 유대인으로 질투심 나게 격동시킬 의도라 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로서 이 목적을 위해 자기 동족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데 이는 그들이 얼마라도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바울의 전도 활동은, 그 당대에, 15절에 언급된 유대인들의 ‘받아들여짐’과 바로 연결된다. 라벗슨이 (Robertson) 지적하듯, 15절의 “만약”이 (eiv ga.r) 현 복음 시대 바울 사도의 사역과 유대인의 받아들여짐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방인들 중의 현재 사역을 통해 사도는 유대인을 시기(猜忌) 나게 격동시키길 원한다.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 얼마를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14절에 묘사된 그들의 구원은 15절의 그들의 ‘받아들임’과 상응한다. 각 경우에 바울은 자기의 현재 사역의 소망하는 결과를 묘사한다 (O Palmer Robertson 1979:211).

따라서 미래파 견해 주장자들에게 물어야 할 것은 이렇다:

만약 15절의 받아들여짐이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야 일어난다면, 바울의 1세기 사역이 어떻게 12절의 이스라엘의 충만과, 15절의 받아들임에 기여하는가?

이제 미래파는 12, 15절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충만/ 받아들여짐은 재림 때에 살게 될 그 종족 유대인들 한 세대의 구원에만 유효하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1세기 당대 바울 사도의 전도 사역이 그 당대 유대인 종족 세대에게 어떻게 연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달리 말해서, 만약 이스라엘의 충만이 재림 때의 이스라엘의 민족적 집단 개종을 의미한다면, 1세기에 바울은 어떻게 그 미래 집단 개종에 기여한다는 것인가?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자기 사역이 (현 시대의 초기인 1세기에) 이스라엘의 충만과 받아들여짐에 기여할 목적을, 심지어 촉진시킬 목적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충만은 역사 전체에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전체 남은 자들의 총합이다. 바울 사도는 자기 당대에 유대인 일부를 구원함으로 그 이스라엘의 충만에 일부 기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충만과 받아들여짐은 하나님께서 역사 내내 행하시고 현재 행하시는 바의 전망에서 조망되어야 하고,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 하나님께서 미래 재림 때에만 행하실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이 때문에, “남은 자” 원리가 재림 때에 새로 도입되는 “충만” 원리로 대체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필요치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충만해진 수자가 “이스라엘의 충만”인 것이다 (O Palmer Robertson 1979:216).


둘째로, 롬 11:23-24이다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여기 접붙힘 표상은 현실과 반대의 사실을 가정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돌감람나무에 좋은 접목을 가져다가 접을 붙이지만, 사도는 반대로 말하고 있다. 그가 농사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가 예증하고자 하는 바가 그런 방식의 접붙임을 요청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좋은 감람나무에 우리 이방인들 돌 감람나무가 접붙임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우리 이방인들이 접붙임이 되어 곧 그분에게 우리가 속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원 가지인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용이하게?) 예수님에게 접붙이심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런 진술은 로마의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 성도들을 멸시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지 그 이상의 의미를 추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셋째로, 25-26절이다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여기 26절에서 "그리하여"는 (헬, '후토스') "이런 방식으로"인데, 이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오직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르는 방식으로 구원역사 내내 각 시대 마다 이스라엘 택한 자들 전체가 구원에 이르리라는 것이다. 즉 "온 이스라엘"은 재림 직전의 온 이스라엘이란 말이 아니라, 시대마다 택함 받은 남은 자들 전부가 이런 식으로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르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26절 후반절은 이미 예수께서 야곱의 경건하지 않은 자를 돌이키셨다는 점을 증거해 준다 (사 49:6의 성취)

이방인의 충만한 수자가 들어오기까지는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전부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일부 완악하고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할 때 "까지"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고 난 다음에 다시 이스라엘의 완악이 풀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까지"는 종착점만을 단지 지시할 뿐이다.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한다면, 죽은 다음에 다른 충성하지 못할 상태가 예상된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종착점으로 말씀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는 시점까지 곧 그 역사 종착점까지 이스라엘의 일부 완악함의 상태는 (유기의 원리; 버림의 원리) 지속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 다음에 이스라엘의 완악이 풀리고 저들이 대다수 믿고 구원에 이른다면 남은 자의 원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재림 직전에만 그런 별다른 시대가 될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택한 자들이 모두 구원에 이른 다음에는 그들에게 더 이상 이스라엘이 무슨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이미 구원의 문이 닫혔는데 이스라엘의 충만함이 (12절) 무슨 이방인에게 축복이 될 것인가? 12절에서 이스라엘의 충만 역시, 이방인의 충만처럼 시대마다 남은 자들의 총합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충만이 이방인에게 더 큰 축복이 된다는 것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인구 증가 등의 원인도 있고 해서 하나님의 택한 자가 더욱 증대된다고 생각하면 그런 증대된 이스라엘의 구원자들이 이방인들의 전도에 축복이 되리라는 정도의 의미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28-29절이다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유대인들을 책망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마 3:9). 조상 공덕 때문에 자기들은 당연히 구원의 백성이 된다는 사고는 성립 될 수 없다. 그들 중의 남은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들을 다 고찰해 보아도, 이스라엘이 장차 재림 직전에 다 거의 다 집단 개종해서 믿으리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1) 사도 바울은 9장부터 지속적으로 구원역사에서 오직 선택받은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고 강조해 왔다. 남은 자의 원리이다.

2) 사도는 롬 1:18-8장에서 "하나님의 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가르쳤다. 그런데 갑자기 재림 직전에는 그런 원리와 무관하게 주님이 오시는 순간에 바라 보는 순간 회개하고 믿으리라고 한다. 그런 것은 복음과 무관하게 믿는다는 사고이니 성립될 수 없다

3) 사 6:9, 10의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악하게 된다는 예언은 이사야 당대에나 예수님이나 바울 당대 모두에 해당된 구원사의 흐름에서 항상 있어 왔던 사항이다. 재림 직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기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림 직전에만 유기의 원리가 폐기되고 거의 전부가 믿을 것이라는 사고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원리와 조화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갈라디아서나 엡 2장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제 구원사의 변천에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까닭에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적 특권적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자기의 복음을 선포할 때, 그 상황성을 좀 고려해야 그의 진술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에베소서에서는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제대로 뿌리를 내렸기에 더 이상 그 이전의 유대주의자들이 난동을 피우며 사도를 대적하는 염려가 없었다. 그런 정황에서는 얼마든지 말을 간접으로 조심스럽게 표현하지 않고 이제 구약 이스라엘의 지위는 신약의 교회로 대체되었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로마서의 경우에는 아주 다르다. 그는 지금 고린도에서 주후 57년 봄 경에 로마서를 로마 성도들에게 보내고 있는데 그 당시에 그는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려 곧 올라갈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 후에는 로마에 갈 계획이 있었다. 로마에도 유대 성도들이 제법 있었고 특히 예루살렘에는 극성 유대주의 성도들이 있어서 사도바울은 신경이 곤두 섰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정황에서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우회적으로 간접으로 함축적으로 밖에 글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구약적 지위는 이제 더 이상 존속되지 않는다 라고 선포했다간 돌에 맞아 죽을 외에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주후 49년이 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간주되는 갈라디아서의 경우에는 갈라디아에서 소란을 피운 그 유대주의자들의 극성 소란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아주 고사 상태에 빠진 상황이었으므로, 사도 바울은 체면이고 뭐고 차리실 이유가 없었다. 그저 단도직입적으로 저들의 주장을 제압하고 자신이 계시로 받은 복음을 분명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와 같이 직접적인 진술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예컨대,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라고 분명하게 진술할 수 있었다.

물론 로마서에서도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라고 이제 유대인의 정의가 달라져야 함을 밝히기도 하였다 (롬 2:28-29).

구원사의 흐름에서 항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이스마엘은 제외되고 이삭만, 이삭의 자녀 중에서 에서는 제외되고 야곱만, 엘리야 시대에는 우상에 무릎꿇은 사람들은 제외되고 오직 그 당대 남은 자들 전체 (7천명; 7 x 10 x 10 x 10 곧 남은 자 전체), 바울 당대에 "나도 이스라엘인이라" 라고 항상 남은 자만 구원 받음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