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총신대 신대원 이상원 교수의 글 중에서 필자가 좀 고려해 보고자 하는 부분을 싣고 거기에 논평을 가하고자 한다. 빨간 글자는 이상원의 글이지만, 색 표시는 필자의 것이다. 빨간 글자 다음에 제시되는 필자의 논평은 보라색이다.
자살이 항상 보편적 도덕률을 범하는 반윤리적인 행위로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윤리적 행위로서의 자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윤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자살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a.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살은 행위자의 자유로운 결단에 위하여 행해지는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서, 정신질환 등으로 인하여 자유로운 결단의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경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울증이나 조울증 등과 같은 정신질환 때문에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에 윤리적인 반성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은 대부분 악령의 소행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자살은 귀신의 영향력 아래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환자가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가? 곧 성령님으로 거듭났다는 확신을 갖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면 마귀의 자살 권유를 이길 것이 분명하다.
b. 행위자의 자유로운 결단 안에서 행해지는 경우도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상황이 요청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동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선한 동기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상황이 자기 목숨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요구할 때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그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후자의 경우는 동기나 목적 여하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정당화될 수도 있다.
b-1.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하는 경우는 정당화될 수 있다. 이는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다. 다시 말해 주님을 위해 죽는 일은 순교이기에 자살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주님께로 가고자 하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눅 14:26).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빌 2:30).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롬 14:8). 신앙을 부인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그 길을 포기하고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순교자들의 행동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믿음을 지켜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순교라는 영예를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어 놓는 행동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성도들은 탄압과 핍박이 찾아 올 때 최선을 다하여 피할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살아서 신앙을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교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것이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맞이하는 행동은 아니다.
b-2.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경우에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 이 경우도 자살의 범주에 넣기 어렵다고 보인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동역자인 바울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롬 16:4).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행동은 기독교인들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는 행동을 요청하는 모범으로 제시된다(요일 3:16). 이 말씀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로 일단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살은 생명을 버리는 행동이므로 자살을 결행하는 목적이 생명의 희생을 상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를 공리적으로 계산해 보아야 하며, 불가피한 수단이었는가도 따져 봐야 한다.
b-2-1. . 사병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상태로 떨어뜨린 수류탄 위에 자기 몸을 덮쳐서 폭사(爆死)하고 수많은 사병들의 생명을 살려낸 강재구 소령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경우에는 판단이 상당히 어렵다. 자기가 책임 진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경우인데, 주님을 위해서나 주의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반 불신자를 위한 자기 희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좀 사색해 보아야 한다. 어느 군목은 전쟁 포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송되어 가던 중 파선을 맞이했다. 구명 보트가 내려졌는데, 이 구명 보트의 승선 허용 인원이 승선해야 할 사람들 숫자에 비교하여 볼 때 한 사람이 모자랐다. 군목은 다른 전쟁포로들을 다 태우고 자신은 바다에 뛰어내려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이 군목의 행동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b-2-2.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전투를 중단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죽음의 가능성이 충분하게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전우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는 조국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총탄이 난무하는 전선에 뛰어드는 행동은 비록 구해야 할 특정한 사람의 생명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정당한 행동이다. 이 경우도 방금 앞에 언급된 사항처럼 약간 모호하다. 삼손의 경우는 자살적 행동이 분명한데, 그의 행동은 그럼에도 히브리서 기자에게 믿음의 행동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을 치는 영적 전쟁으로 보았을 것이다. 삼손이 다곤 신당을 무너뜨린 행동도 이 범주에서 정당한 행동으로 판단할 수 있다(삿 16:23 이하). 더욱이 삼손의 행동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이후에 한 행동으로서(삿 16:28), 히브리서 기자로부터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행동으로 평가받았다(히 11:32~34)는 사실은 삼손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b-2-3.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동권에서 열사(烈士)로 추앙되고 있는 전태일의 분신자살이나 월남전쟁 당시에 월남 정부의 부패에 항의하는 표시로 승려들이 분신 자살한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정치적인 이념의 실현을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정치적 이념 때문에 혹은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정치적 이념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체로 정치적 이념들은 인간과 사회를 증진시키기 보다는 그것들이 지닌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에 오히려 인간과 사회에 심각한 해독을 끼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b-2-4. 순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는 행동은 순결이 소중한 가치이긴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 만큼 무거운 가치는 아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여자가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귀한 결단이긴 하나 목숨을 순결보다 귀하게 여김이 타당할 것이다.
b-2-5.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이나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가족에게 안겨주고 가족들의 희생적인 간병이 필요한 환자는 가족들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살을 결행하고자 하는 당사자가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될 일원임을 인식시켜주고 포용하는 태도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가족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럴 용기가 있으면 주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담당하는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b-2-6. 폭력조직과 같은 비윤리적인 조직에서 조직의 보스나 조직 그 자체를 보호하고 조직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자살한 신자의 구원의 문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항목이 자살을 악한 행동으로 전제하고 자살을 막는 일의 신학적 자원이 되는 것이었다면, 성경은 또한 이미 자살한 자와 자살한 자의 가족들이 정당하지 않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을 차단시켜 주기도 한다. 서구의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자살이라는 행동을 기독교인의 구원의 문제와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 하나의 상식으로 확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한국교회 안에는 자살한 기독교인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심지어 수십년 간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오는 삶을 살았다 해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중세적인 속설이 목사들과 평신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 속설들을 뒷받침하는 논증들과 이 논증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아무리 서구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 자살이 구원과 무관하게 고려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문제는 성경이 어떻게 말하느냐? 이지 어떤 전통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수 십년 간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오는 삶을 산 사람이라면 자살할 수 없다고 본다. 자살하는 사람은 그 상황이 어떠하건 간에 하나님의 금하신 계명을 고의적으로 범한 것이므로 자신의 구원과 하나님의 선택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비겁한 자)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배교자)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했다 (계 21:8). 사도 바울은 고전 6:9-11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했다.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이런 죄악들에서 떠나야 하고, 또한 온전히 회개를 하여야 한다. 만약 삶이 여전히 죄악에 끌려 다니고 죄를 이기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거듭났는지 여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분명 살인자는 여기 지옥 불 못에 던져지리라 했고, 성적 범죄자나 우상숭배자, 10계명 범하는 자는 천국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행위 구원론이 아니라 삶의 변화와 열매가 동반되지 않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삶의 열매가 개판이라면 그것은 참 믿음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그렇다면, 앞에서 이상원 교수가 서구 개혁주의 전통 운운하면서 자살과 구원을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합당하다 할 수 없다.
a. 자살한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자살을 성령 훼방죄로 해석하는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자살이 성령을 훼방한 죄라는 견해는 중세시대에 형성된 견해이며, 루터, 푸치우스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 의하여 비성경적인 교리로 거부되었다. 성령 훼방죄(마12:31, 막3:28,29)는 히브리서 10장 29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거부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 불신앙적인 행동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에 제한시켜 적용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죽는 순간까지 고집하다가 죽으면 그 후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령훼방죄의 핵심이다. 자살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관련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b. 다른 죄를 범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기가 범한 죄를 회개할 시간이 있지만 자살한 사람은 자살이라는 죄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자살하는 자리까지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는 어떤 상황에서건 그 사람의 생명을 자살에 방치 하지 않으실 것이다. 회개치 못한 죄가 있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요점은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과연 자살에까지 이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이지, 자살하고 회개할 시간이 없어서 지옥간다는 것은 아니다. 진정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살의 순간에 죽어가는 그 몇 초에라도 개입하셔서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항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원은 인간이 지은 죄를 남김없이 회개한 공로를 근거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만일 특정한 죄를 회개했는가에 근거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맞아서 회개할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폭사한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치매에 걸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하는가? 많은 신자들은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 싶어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회개하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신자들이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다면 이 신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다 지옥에 가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신자의 삶이 값없이 오직 은혜로 중생함으로써 시작되었다면 ,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것도 값없이 오직 은혜로 영화됨으로써 구원받을 뿐이다.
c. 구원받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살에의 충동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의 중생의 상태를 너무 이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는 것은 그가 지금 사단의 공격을 집중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그런 자살 충동은 사단이 주는 것이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귀신이 잠입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충동이 온다면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어야 한다. 그런 충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절대 아니다 (딤후 1:7 참조). 이미 우리는 엘리야, 욥, 요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죽고 싶어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신자들도 자살에의 충동을 느낄 수 있으나, 믿음 안에서 넉넉히 극복할 뿐이다. 자살은 분명히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여 자살에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신자를 평가할 때 자살을 결행한 그 한 순간의 행동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음에 내모는 살인죄를 범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그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다윗을 규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과 다윗의 삶 전체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평가하실 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하갈을 취한 한 사건만 근거하여 아브라함을 평가하지 않으셨다. 수십 년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를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 그 순간만 가지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
d. 청소년들에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교육적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실이 아닌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육적 효과를 거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에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이 왜 복음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자살해도 천국에 간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진정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듭난 성도라면 자살 충동이 올 때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생각을 바로잡아야지, 자살해도 구원은 상관이 없다라고 말할 것인가? 자살하면 다시 말해 자살 결단을 내리는 사람은 이미 마귀의 주관 하에 들어간 사람이며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따라서 우리는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자살에 이르는 행동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청소년들을 설득하여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성적이나 가정 불화나 실연 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깊은 배려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면서 자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선한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살예방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행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은 중세 말기 로마 카톨릭의 복음 왜곡과 교회 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때문에 사람의 영혼의 운명을 결정짓는 복음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고, 공로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이를 이용하여 돈을 주고 구원을 사고파는 면죄부 파동까지 일어났다. 교육적 효과는 복음과 진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도모되어야 한다.
e. 그러나 교회는 자살한 성도가 자살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루터는 자살자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평민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사탄이 이 가르침을 이용하여 더욱 더 많은 살인을 자행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예배 석상에서는 자살은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죄라는 것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가에만 근거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까지만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자살한 가족을 가진 성도들이 자살한 가족이 죽은 후에 간 길에 대하여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개인적인 상담을 통하여 신앙고백을 한 신자라면 사망을 포함한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기 목숨을 끊은 사람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위로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살한 사람이 과연 구원의 확신을 가졌으며 성령님으로 거듭난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는 자라면 자살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런 근본 문제를 뒤로하고 죽은 자의 남은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에 치우쳐 구원의 문제를 적당하게 다룰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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