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몇 가지로 말씀을 전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로, 순례자의 신분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구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약속을 향해 광야를 여행할 때의 나그네 삶을 상기시켜 준다. 매일 매일의 필요한 양식을 구할 필요가 있었던 그 시절에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해 뜨기 전에 일용할 양식을 만나를 모아야 했다. 하루 이상 보관할 때는 썩어 벌레가 생겼다. 그래서 매일의 양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 하루 전인 금요일 아침에는 이틀 분량을 거두어 다음 안식일을 위해 보관해도 썩지 않았다.
이렇게 매일의 양식을 필요로 하던 광야 시절은 바로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을 살았던 모습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가 많고 또 질병과 죽음의 땅이다. 여기서 우리가 영원히 살 수가 없고 잠시 머물다가 영원한 본향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의 삶은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인 것을 늘 인식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지혜롭게 영위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때 아마도 "넉넉잡아 한 달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지!" 라고 생각하고 1달치 양식을 짊어지고 준비해서 떠났을지 모른다. 지금 출애굽한 지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다. 둘째 달 15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세를 향해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과거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 빵을 배불리 먹던 때가 좋았다고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온 회중으로 굶어 죽게 하냐?"고 아우성을 치며 난리를 피웠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에 양식을 비같이 쏟아 부어 줄 것이니 매일 일용할 양식을 거두어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출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매일 필요한 양식만 거두어 먹게 하셨다. 이틀 분을 거두어, 먹고 저녁에 남은 것을 보관하면 다음 날 일어나 보면 썩어서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겼다.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 받아 살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매일 매일 먹을 양식만 모아서 먹고 비축하지 말아야 한다. 쌓아 두지 말아야 한다. 남기지 말고, 오직 그 날의 양식으로 족하고 내일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아주 필요한 것을 저금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미래를 설계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이다.
순례자는 이 땅을 지나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여기에 많은 것을 저금하고 쌓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행하는 사람이 그 날 그 날 필요한 양식을 구해서 먹어야지, 쌀 가마를 지고 여행을 할 수가 없다. 순례자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예증) 유정옥 사모의 아들 신학생의 '몽땅 털기'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58이하):
미국 뉴저지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한 목사 집에서 사는데, 가지고 떠난 돈은 하나로 교회에서 마련해 준 2천 불이 전부였다. 그것을 가지고 학비로도 방세로도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정을 한다. 이것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 것도 되지 않으니 차라리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에게 직접 공급을 받자! 이것이 그 아들의 생각이었다. 그 주일에 그렇게 전부 드렸다. 그리고 나서 어떤 성도가 학비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역을 해야 하는데, 자리가 없다. 한국 엄마에게 그런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니 엄마의 답변인즉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사람이 사는데 무슨 소리냐? 네가 전도해서 일을 하면 되지 않냐? 그래서 기도를 하니 한 장로가 쪽지를 전해 준다. 자기 아들이 뉴욕에 유학을 갔는데, 술과 마약에 잡혀 폐인이 되었으니 한 번 찾아가서 전도해 주십사 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서 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저는 이 아이에게 제 인생의 목회 사명을 걸겠습니다" 라고 기도하고, 비장한 각오로 그 아이를 10번도 더 찾아가서 전도함으로 결국 데리고 교회로 왔다.
이 아이가 교회로 돌아온 후 아이의 아버지 장로는 자신과 똑 같은 고민을 하는 교회 친구들에게 방을 붙였다.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이 전도사에게 아이의 주소를 줘. 그 전도사와 만나면 백발백중이야." 너도 나도 자기 부끄러운 아들을 부탁해서 모아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 사례비를 받게 되었다. 기업인들에게 성경공부도 시키고 거기서도 사례비를 받았다.
이렇게 공부하기에 안정적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살 수 있다는 안일감이 찾아왔다. 그래서 결정했다. "엄마, 내일 나는 무작정 아무도 모르는 미시간으로 떠나려고 해요. 하나님의 임재 하에 사는 그 삶을 위해서 떠납니다." 엄마는 걱정이 되었다. "아들아, 안정된 자리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데 왜 그러냐?" "엄마, 안정이 아니라 영적 퇴보예요. 저는 다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고 싶어요." 그래서 다시 미지의 세계로 출발했고, 거기서 하루에 2불로 하루 세끼를 해결한다고 엄마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 영혼의 생명이다. 그 관계를 부요함과 풍족함이 깨뜨리도록 양식을 남겨두지 말라.
잠 30: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기자의 말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조명해 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안정되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되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좇아 갔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풍족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발로 차 버린다.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렇게 하나님을 배교할 것이라고 노래를 통해 경고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사랑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은 풍족해 지면 야웨 하나님을 바로 차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언약 기소 노래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적나라하게 예언해 준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했고 또 배반했다.
그러한 역사는 시 106편에서 그리고 있다:
시 106:34 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35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36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37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38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39 저희는 그 행위로 더러워지며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4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41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사사기에서도 구원사의 사이클을 묘사함으로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은망덕 행위를 고발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너무나 풍족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순례자의 삶, 나그네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저 천국 본향은 의미가 없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 맘대로 삶을 설계하고 계획한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주인되어 살게 된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순례자는 하루 하루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분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성도들이 이 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요 체류자임을 말씀하신다:
레 25:23에서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1. 이 세상은 나그네 길 나는 다만 나그네 나의 집은 저 하늘 저 너머있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2. 이 세상은 고독 불안 슬픔 괴롬된 세상 나의 주님 의지할 것 밖에 없어
앞에 가신 성도들의 순교 정신 따라서 천한 몸 이나마 싸워서 가리라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3. 이 세상은 어제밤의 꿈과 같은 천막집 그 기쁨은 저마다 물거품같고
해아래서 바람잡는 것과 같이 헛되니 나는요 주님만 섬기고 살래요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우리의 삶은 균형을 잡아야 한다. 천국 본향과 이 세상의 실제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내세 중심으로만 살면서 염세주의 빠져서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현실에 매몰되어 영원 세상을 버리는 일도 신앙적이지 않다. 우리는 지상에 살되, 사명자의 길, 순례자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구시대적 유물이 아니라, 영원 변함이 없는 진리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그 기도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생활이다. 그래서 바꿔야 할 것은 진리 말씀이 아니라, 내 잘못된 삶의 모습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란 책은 우리 신앙인들이 하늘 본향을 향해 여행을 하는 순례자임을 소설로 기술하였다. 가족도 버리고 등에 무거운 죄 짐을 지고서 저 천국 본향을 향해 여행하는 것이다. 광야 저편 좁은 문을 향해 그 순례자는 뛰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이 자기 집에서 과히 멀리 가기 전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그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였으나 두 손으로 귀를 다 막은 그 사람은 그냥 달아나면서,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그는 평원 가운데로 향해 계속 달렸다. 가족을 내 팽개치고 천국만 가겠다고 달려가는 이 순례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는 (딤전 5:8)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듯 보인다. 가족을 팽개치고 나만 구원을 얻고자 나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우리의 순례자의 삶, 신앙의 좁은 길로 걸어야 하는 우리의 본 모습을 변질시킬 수도 없다. 둘 사이에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의 현장에서의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집 사람들도 순례자를 미쳤다고 했지만, 순례자는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천국의 좁은 문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웃에 사는 고집쟁이와 유순이가 이 순례자를 따라 잡아서 집으로 데려 오고자 했으나 할 수가 없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신네가 사는 고장은 멸망의 도시입니다. 내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지만 멸망해 버릴 도시란 말이요. 우리가 조만간 죽을 몸인데 그곳에 살다가 죽으면 무덤보다도 더 낮은 곳, 유황불이 타고 있는 구렁텅이 속에 빠진단 말이요. 그러니까 당신들도 딴 마음 먹지 말고 나를 따라 같이 가기로 합시다.”
“무어라고?” 하고 고집쟁이가 말했다. “우리 친구들과 편안한 생활을 뒤에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요?” 고집쟁이: “이 세상 모든 걸 다 버리고까지 당신이 찾는 것은 도대체 뭐요?” 크리스천 : “내가 찾고 있는 유산은 썩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고 스러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재물은 하늘나라에 안전하게 쌓아 둔 것인데, 때가 이르면 그것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선물로 줄 것입니다. 꼭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세요.” 고집쟁이 : “치! 그따위 책은 버리고 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 갈 테요, 안 갈 테요?” 크리스천 : “안 가요. 난 집으로 안 돌아가요. 나는 이미 손에 쟁기를 잡았으니까요 (누가 9:62).”
고집쟁이 : “그래요? 그럼 여보, 유순 선생, 이 사람은 버려두고 우리끼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분처럼 허풍떨기 좋아하는 자들은 한 번 어떤 환상을 붙들면 도리에 맞는 충고를 해 주는 사람 일곱 명의 말보다도 자기 생각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유순: “그렇게 무턱대고 욕만 하진 말아요. 이 착한 크리스천의 말이 진정이라면 그이가 추구하는 것이 우리 것보다 나을지도 알 수 없지 않소. 난 이분을 따라갈 생각이 드는데요.”
고집쟁이: “뭐라고요! 바보가 또 하나 생겼구먼! 내 말 따라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런 미치광이가 어디로 끌고 갈지 알고 따라간단 말이오? 돌아갑시다, 돌아가. 슬기로운 사람이 됩시다.”
크리스천: “유순 선생, 날 따라오시오. 내가 가는 데로 가면 지금 말씀드린 그런 좋은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내 말을 못 믿겠거든 여기 이 책을 읽어 보시오. 이 책에 기록된 진리가 진리를 만드신 주님의 피로 증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요.”
유순 : “글쎄요. 여보, 고집쟁이 선생, 나는 요령을 얻기 시작했어요. 난 이 착한 분과 동행해서 같은 운명에 내 몸을 던지겠소. 그런데, 크리스천 선생,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까?” 고집쟁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크리스천과 유순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평원을 걸어 나간다.
유순: “자, 크리스천 선생, 지금 우리 둘 밖에 딴사람은 없으니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대관절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즐기게 될 것이며, 어디로 가는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크리스천: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쉽지요. 허나 당신이 꼭 알고 싶다니 이 책을 읽어 드려 그것들이 무엇인지 아실 수 있게 해 드리지요.”
유순 : “그 책에 기록된 것은 전부 다 틀림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크리스천 : “그럼요. 절대 진실이지요. 왜냐하면 거짓말을 절대로 안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니까요.”
유순 : “말씀 잘 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이 기록돼 있습니까?”
크리스천 : “끝없는 왕국이 있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왕국에 영원토록 살게 해 주십니다.”
유순 : “좋은 말씀입니다. 또 그 밖에는?”
크리스천 : “영광스런 왕관이 우리 머리에 씌워질 것이요, 창공에 뜬 태양빛처럼 빛나는 곤룡포(袞龍袍)를 우리 몸에 입혀 주어 우리 몸은 햇빛처럼 빛날 것입니다.”
유순 : “정말 기분 좋은 일이군요. 그 밖에는 또 무엇이?”
크리스천 : “그곳에 가서 살게 되면 우리는 다신 울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을 겁니다. 그곳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눈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테니까 말입니다.”
유순 :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됩니까?”
크리스천 : “보기만 해도 우리 눈을 부시게 하는 천사들과 함께 살게 되지요. 우리보다 앞서 그곳으로 가서 사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들 중에 우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 다 친절하고 거룩한 분들일 것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 걸어 다닐 것이며, 하나님 앞에 서서 영원토록 그의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금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선배들을 거기서 우리가 보게 될 것이요, 금 거문고를 타고 있는 거룩한 동정녀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곳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속세에서 몸이 갈가리 찢기고 불에 타 죽고 야수들에게 물려 죽고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온전한 몸을 도로 찾아 영원불멸의 옷을 입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유순 : “말만 들어도 가슴이 흐뭇하군요.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정말 즐길 수 있게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그런 자리에 참여할 수가 있을까요?”
크리스천 : “그 나라 지배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해 놨어요. 요점만 말하자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기만 하면 그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우리에게 하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유순 : “참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자, 우리 발걸음을 빨리 합시다.”
그들이 얘기를 끝낼 때 평야 중심지에 있는 진흙 수렁에 아주 가까이까지 가 있었다. 수렁이 있는 줄 알 턱이 없는 그들은 무심코 걸어 가다가 둘 다 그 늪에 퐁당 빠졌다. 이 수렁의 이름은 「절망」 이었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그들은 한동안 수렁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진 크리스천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유순: “아! 크리스천 선생,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 거요?”
크리스천: “바로 말하자면 나도 모르겠소.”
이 말에 기분이 상하기 시작한 유순은 골난 목소리로 동행자에게 대들었다. “여태까지 말해 준 소위 행복스런 곳이라는 게 바로 이런 곳이요? 처음부터 이런 고생을 하게 됐으니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어떤 고생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오? 내가 여기서 목숨을 구해낼 수 있다면 당신 혼자 그 좋은 나라로 가 차지하시오.” 한두 번 필사적으로 몸을 솟구친 그는 바로 자기 집 옆쪽에 면한 수렁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는 집으로 가 버리고 크리스천은 그의 모습을 다시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 곁으로 오고 있는 것을 봤다. 이 사람의 이름은 「 도움 」인데, 도움이 크리스천에게 그런 데서 뭘 하고 있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크리스천 : “선생님, 장차 파멸될 이 세상에서 도망가려고 하면 이 길로 나아가, 저쪽 문까지 가야 한다고 전도사라는 분이 알려 주어 제가 이 길로 가던 도중, 어쩌다가 이 수렁에 그만 빠졌지요?”
도움 : “왜 길을 잘 살펴보지 않고 마구 걸어왔소?”
크리스천 : “겁에 쫓겨 마구 달리다가 그만 이 꼴이 됐습니다.”
“손을 이리 내미시오.” 하고 도움이 말하자 크리스천이 손을 내밀었다.
짐을 진 크리스천이 이 길을 달려 올라가고 있는데, 등에 걸머진 무거운 짐 때문에 뛰어가기 매우 힘든 것 같이 보였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향해 그는 뛰어 올라갔다. 십자가 바로 아래에는 바위를 뚫어 만든 무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크리스천이 그 십자가 앞에 다다르자 그의 어깨로부터 짐이 풀어지고 미끄러져 내렸다. 그 짐은 내리 구르기 시작하더니 계속 굴러 무덤 입구까지 가서 그 속으로 굴러 떨어져 보이지 않게 됐다.
몸이 가벼워져 기쁨을 느끼는 크리스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주께서 괴로움을 당하여 내게 평강을 주셨고, 주께서 죽으셔서 내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이르자마자 무거운 짐이 저절로 벗겨져 몸이 가벼워진 데 무척 놀란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신기한 듯이 두리번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샘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와 두 뺨을 적시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그는 이리 저리 두리번거렸다. 그 자리에 선 채 울면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광채를 발산하는 세 사람이 나타나 “평안할지어다.” 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당신의 죄는 사함을 받았소.” 하고 말해 주고, 두 번째 사람은 크리스천이 입고 있는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역주: 스가랴 3:3-5), 세 번째 사람은 크리스천의 이마에 표를 붙여 주고는 도장이 찍힌 족자 한 개를 주면서 길 가면서 읽고 하늘나라 대문에 이르러 제시하라고 말했다(엡 1:13). 그러고 나서 세 사람은 다 가 버렸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순례자로군요. 어쩌면! 낡은 것은 다 물러가고 새 것이 왔는데 이게 모두 진정입니다. 이상하긴 하지만! 그이는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걸 내가 보증합니다. 순수한 털이 순수한 새를 만들어주는 것이니까요. 너무 기뻐서 세 번 껑충 뛴 크리스천은 노래 부르며 길을 걸었다. 이렇게 순례자는 가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마침내 천성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도 순례자로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순례자의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루 하루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을 체험할 수 있다. 그분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섭리자이시기에 자기의 말씀대로 순례자의 길, 사명자의 길로 걷는 자들의 필요를 시시 때때로 채워주신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장하시기에 자기 뜻에 순응해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라고 기도하여라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루 하루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에 절대 순종하길 원하신다. 순종하는 제자에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주권자이시고 능력자이시다. 만물에 대한 그분의 주권과 능력은 이렇게 저렇게 성경에서 다양하게 지적되고 있다: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의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욥 38:32)
이 말씀은 천체의 운행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말씀한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시 104:27)
이 말씀은 세상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께 양식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한다. 믿음의 사람만 아니라, 세상 모든 생물이 하나님께 양식을 구한다는 것이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시 145:15)
여기서도 인간이 하나님께 양식을 구한다고 지적한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 5:24)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겔 34:26)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하늘의 비도 움직인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이런 진술을 미신적이고 그릇된 것이라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날씨나 지진이나 세상의 만사 어느 것 하나 그분의 주권 하에 놓이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학이 규명하는 세상 현상들의 이면은 2차적 요인들이라면 그 모든 것의 근원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앙인들은 그분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하게 그분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리고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 보아야 한다.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9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우리 매일의 기도는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정리하도록 촉구하는 채찍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교회 공동체의 필요를 구하라
사업가, 재벌,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는 기도에 코 웃음을 칠지 모른다. "나는 100년 먹어도 남을 양식도 쌓아 두었는데. . . 돈이 은행에 산더미처럼 적금되어 있는데 무슨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인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구만, 이 말씀은 오늘날 별로 적용성이 없어. 오늘날 하루 식량 하루 벌어 먹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한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나" 개인의 삶보다 우선하는 것이 "우리"라는 공동체의 삶이다. 즉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교회"란 말은 헬라어 '에클레시아'란 말의 번역어이고, 이 헬라어는 구약 70인역에서, "회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다"나 "카할"의 번역어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결국 "회중"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성전"이란 단어도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도 개인이나 성도들의 모임을 지시한다 (고전 3:16, 고후 6:16). 따라서 신약시대에 성전이나 교회는 어떤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 혹은 성도 개인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면, 제자 된 믿는 성도들 곧 교회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라는 말은 모두 9번 나타난다. "나"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는다. 주님의 제자들은 곧 성도들은 하나같이 "우리" 중심의 신앙 생활을 영위하라는 무언의 명령이라 보인다. "우리"는 곧 교회이고 성도들이다.
앞에서 유정옥 사모의 아들 전도사 이야기를 했다. 다시 그 사모의 책에서 언급된 다른 이야기를 들어 보자 (134이하).
유사모님이 미국에 집회 인도를 할 때 어떤 여집사가 상담을 청했다. 그 여집사는 자기가 운영하는 봉제 사업이 위기에 몰려 식구들이 거리로 나 앉을 처지라고 어려운 처지를 말하였다. 그래서 "내일 새벽부터 맨 앞자리에 나와 소리 내어 울며 기도하라" 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울면서 기도를 하였다. 그랬더니 유사모님이 인도하는 그 집회가 끝나고 어떤 성도가 찾아와서 "왜 아침마다 그렇게 우느냐?" 고 해서 "사실 사정이 이렇게 어렵다"고 하니, "우리 세탁소에 와서 일을 하면 한 달에 2천 불을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래서 기쁨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날 유사모에게 말하길, "가보니 세탁소에 내가 할 일거리가 없고 주인 혼자 해도 될 만큼 한가하였다; 제가 필요하지 않은데 왜 나오라고 했느냐? 고 물으니 /그 여집사와 자기 집사람이 한 구역 성도인데, 그냥 사정이 어렵다고 돈을 한 달에 2천불 준다면 그 성도도 자존심이 상해서 받으려 아니할 것이고, 우리 집사람도 왜 그렇게 공짜로 돈을 주냐? 고 할 것이니 그냥 일거리가 없어도 세탁소에 나와만 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찌 뻔뻔하게 그 곳을 다닐 수 있겠어요? 저는 힘에 겹도록 일하는 것이 나아요" 라며 낙담했다. 그래서 유사모는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교우사 사업에 망한 교우를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성령님이 준 마음이니 둘이 힘을 합쳐서 열심히 일하면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고 두 집이 다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권면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낸 듯 하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이 세탁소 주인은 새 세탁소를 하나 열었다. 세탁소를 담보로 대출도 얻고 아는 사람에게 돈도 좀 융통해서 좋은 길목에 있는 더 큰 세탁소를 인수했다 (미국 교포들은 대개 세탁소업을 하였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 새로 인수한 큰 곳은 자기가 하고 작은 옛 것은 그 여집사에게 주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겠지만, 이 세탁소 주인은 작은 옛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새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렇게 어려움 당한 성도의 필요를 채워준 것이다. 이 두 세탁소는 서로 사심이 없이 도우면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랬더니 소문이 날 정도로 번창하게 되었고 세탁소를 6개나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내게 되었다! 사심없이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모습을 하나님은 주목하셨고, 그래서 저들의 하는 바에 축복하셨음이 분명하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제자된 성도들을 지시한다. 성도들은 내 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 중심의 기도를 드리면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지체 성도들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렇지 않고, 자기 중심의 기도만 드린다면 그는 주님의 말씀을 져 버린 자이고, 따라서 제자로 살고 있지 않다. 그런 자는 만약 돈이 좀 넉넉하고 사업도 하는 성도라면, 그리고 다른 성도의 필요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면, 즉 교회의 필요에 대해서 무관심한 기도만 드리고 있다면, 눅 12:16이하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그 어리석은 부자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 성도들은 믿음 공동체 중심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이전에 하나님은 광야 여정 가운데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 하루의 필요한 양식을 주셨을 뿐 아니라, 몸이 불편하여 만나를 매일 거둘 수 없는 자들의 몫까지 몸이 성한 자들이 거두라고 명하셨다:
출 1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오늘날 교회 성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내가 넉넉하다면 다른 궁핍한 성도의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 장막에 남아 있는 만나를 거둘 수 없는 자들을 건강한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먼저 믿는 자들을 책임져야 하고 다음에는 사회의 약자들의 필요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고안해 낸 최상의 사회 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자본주의 자유 민주 경제체제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갖는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책이리라.
불어로 noblesse oblige란 (노블레스 오블리쥐; 영어: nobility obliges) 말이 있다.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 안의 가진 자는 갖지 못한 자의 필요를 공급하고 사회의 약자들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고 책무이다.
주님은 12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교회 공동체 중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머리이시고, 우리는 몸의 지체들이다. 지체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고, 지체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영적인 양식도 구하라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단 우리의 육체적 양식의 기근만 아니라 영적 양식의 기근과 기갈도 있음을 알려 주셨다:
암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사무엘이 자랄 때, 엘리 대제사장이 사역하였는데,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한다. 말씀은 "이상"과 동일시 되고 있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 3:1의 전후 문맥을 살펴 본다면, 삼상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시는 것이 여기 '이상'이란 말의 (히, '하존') 의미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바른 믿음"이란 구호를 내걸고 환상이나 방언 혹은 영적 체험을 말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이단시하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한 선교 사역자를 "고학력의 무당 박수"라느니 하면서 모독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는 어떤 양반도 있지만, 사무엘 시대 사무엘에게나 혹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만 아니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환상이나 방언 혹은 하늘의 음성 혹은 여러 기이한 영적 체험들이 있다. 이것을 무조건 이단시하는 것은 "나는 영적인 소경에 불과한 자요!" 라고 자기 영적 무지를 선전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 설교가 많지만, 내 영혼의 영의 양식을 구하지 못하여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성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내 영혼과 네 영혼 곧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는 신령한 말씀을 강단에서 주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간절하게 우리 교회 강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강단에서 말씀이 능력있게 선포되면 심령이 살아나고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산다. 강단이 죽어간다. 특히 대형 교회에서 후계자 계승이 되면서 많은 대형 교회 후계자들이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는지 의문이 든다. 서울이나 전국의 내노라하는 대형 교회의 설교를 들어보라.
전임 목사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고는 성경에 없다. 아들이건 아니건 후계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후계자가 과연 영적인 말씀을 공급하여 성도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인물이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석박사 유학파 목사라 해도 설교가 허공을 친다면 문제이다. 아들이기에 문제 삼을 이유는 없고 아들이 증거하는 말씀이 허공을 치느냐? 성도의 가슴을 치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까?
선지자 사무엘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사무엘은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증거하는 말씀은 권세가 있었고, 기름 부으심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문제는 모두 강단의 쇠퇴에서 찾아야 한다. 강단의 설교가 권세를 상실하고 영적 양식을 공급하지 못함으로 성도들이 비실거릴 때 나라도 덩달아 비실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요 핵심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된 성도들이 은혜로운 말씀으로 충만하여 세상을 바꾸는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한국의 역동성이요 힘이었다면 강단의 쇠퇴로 야기된 성도들의 허약 체질은 결국 한국의 쇠퇴로 이어지게 된다.
1980년대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산으로 철야 산기도를 가면 대단했었다. 오뉴월의 개구리가 개골거리듯 수 많은 사람들의 기도 소리가 온 산을 뒤 덮고 있었다. 오늘날 누가 산기도로 부르짖는가? 기도의 쇠퇴가 교회의 쇠퇴를 가져오고, 교회의 쇠퇴는 결국 나라의 쇠퇴로 귀결된다. 이것이 세계사가 지금까지 보여준 역사 현실의 실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우리의 신령한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의 강단을 회복시키소서!
우리의 교회를 회복시키소서!
우리의 조국을 회복시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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