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에 미국 한 신학교에 석사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갔을 때, 공항에 먼저 온 친구 두 분이 (지금도 감사!) 마중을 나와서 그들의 차에 짐 싣고 학교로 갔었다. 그 때 주변 풍경을 보니 잔디를 잘 가꾸어 놓은 모습이 에덴동산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아, 미국이 이런 곳이로구나! 그리고 집을 구하러 부동산 중개소에 다녔고, 차도 하나 중고 300불에 사고 차 보험도 들고, 한국에서 몇 번 해 본 운전 실력으로 운전도 새벽에 나가 연습하고 등등 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고, 이제 9월이 되어 수업을 듣게 되었다. 1개 3학점 짜리 3개 과목인가 듣는데 1주일 내내 도서관에서 소논문을 복사하여 읽고 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처음 살았던 곳은 방 1개에 부엌과 세면장 화장실 모든 것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미국 영어로 efficiency apartment라 하는데, 그 당시 매달 600, 아니 700불? 여하간 그렇게 수업을 듣는데 영어는 소통에 문제가 없었지만, 시험이 아니라 소논문 paper 작성이 성적 평가의 근본이었다. 깊이가 있고 독창적이며 논리적인 글을 써야 한다. 이게 하루 만에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지금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 당시 한 가지 충격은 수업을 마치고 빈 공간, 그러니까 강의실이 둘러 있고 중앙의 넓은 홀에서 휴식하는데 거기에 학생들이 서서 담배를 떡 피우는 것이었다. 그곳은 신학교인데 말이다. 그것도 신신학 보다 보수적인 아니 복음주의 신학교라 하는데도 그러했다. 그곳은 뭐 숨길 것도 없고 미시간 Grand Rapids 소재 칼빈신학교였다. 그 때 그 충격은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아니,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나? 여기가 신학교 맞아?
그런데 나의 지도 교수님이 또한 골초였다. 그의 교수실에 가서 상담을 하는데 30년 골초 찌든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서, 아니 왜 이렇게 담배를 피워 시험들게 하느냐? 라고 항의를 하니, 아니 이런 일은 구원과 연관되는 핵심 문제가 아니라, 아디아포라 조항이라는 것도 모르느냐? 그것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가변 조항이란 말이었다. 그래도 바울 사도께서 만약 내 행동이 타인에게 시험거리가 된다면 난 영원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말도 모르느냐? 이렇게 논쟁을 하다가, 물러났다. 소논문 점수도 B+ 정도 계속 주니까 그것도 그 교수님에게 화가 난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분 덕택에 글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내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단지 각주에 이런 저런 유명 학자들 이름이나 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데이터를 탐구해서 쓰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공치사가 아니라, 그분 덕분에 글 쓰는 훈련을 제대로 받았다.
이번 추석 무렵에 한 고3 학생이 여자 몸으로 혼자 캐나다에 유학을 갔다가 되돌아왔다. 왜 돌아 왔느냐? 아, 거기 가서 음식을 못 먹고 1달간 그냥 라면만 먹었고요, 그리고 애들이 마약을 하고 정말 질겁했어요. 맞지를 않아요. . . 동성애는 어떻고. . . 세상이 미친 것이다. 돈만 많이 공중에 날려 버렸다고 그 부모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로서는 그 아이가 생전 처음 부모 슬하를 떠나 이국 땅에서 경험한 바가 충격 자체였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버티고 극복했었더라면,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앞에 언급했지만, 미국 땅에 처음 가서 살던 그곳에 점차 익숙해 졌는데, 가만 보니, 사람들이 전부 이혼을 했거나 정말 가정들이 온전하지가 못했다. 그리고 혼자 살면서 노인이 집으로 젊은 여자를 불러 시시덕거리고, 여러모로 깨어진 사회였다. 학교 캠퍼스에서도 여름에는 여자 대학생들 웃통을 벗고 잔디 밭에 누워 있는 둥, 신학 사상적으로 약간 진보적이고 신신학 경향이 있어서 편치가 못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사회주의 전체주의 통치하에 중공을 닮은 경찰 국가로 변신하였다. 언론은 통제당하고 정권을 쥔 자들은 디지털 독재로 (투표지 개표 분류기나 서버 등 선거 관련 기기들의 자유로운 검증 거부하고 오로지 권력자 손아귀에서 사용) 국민의 주권을 조작과 기만으로 강탈하고 그렇게 얻어진 권세로 의석으로 자기 입맛에 맛는대로 국가를 휘두른다. 자기 편에는 법도 도덕도 필요없고 무죄, 무혐의로 일관하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고소 고발 체포 감금한다. 그리고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국가 재정을 표를 얻는 일을 위해 펑펑 쏟아 붓고 있다.
이런 상황이 무슨 세상 종말을 알리는 징표라도 된다는 것이냐? 그렇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종말의 징조이고, 이 나라의 종말은 곧 세상의 종말이 아니던가? 도덕적으로나 정치 사회 문화 면에서 종말의 징조들을 드러내고 있다. 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느냐? 교회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모두를 포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 말은 맞다. 그런데 좌파라는 것은 극단에 치우쳐서 중공과 북한의 경찰 국가, 전체주의 국가를 향해 나아가고자 안달이다. 그 결과는 결국 사회주의 연방제 통일로 나타날 것이고, 그 때에는 좌파나 우파도 교회에 받는다고 말할 수가 없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신앙의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세상 종말에 다름 아니다.
중공은 덩샤오핑 이래, 장쩌민, 후진타오로 개혁개방으로 나감으로 공산주의는 일단 숨기고 서방 민주국가들의 자본과 기술을 빨아 들인 후에, 이제 시진핑 체제하에서는 숨겼던 발톱을 드러내고 공산당의 세계 제패라는 야망 실현을 위해 깃발을 올렸다. 기세등당하다가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로 숨이 넘어 갈 지경이 되어, 지금 트럼프 시대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시진핑이 특별한 것은 자신이야 말로 마오쩌둥 등의 1세대 공산당을 이어받는 정통 공산당 2세대라 자부한다는 점이다. 그 이전 지도자는 좀 서구 자본주의 날라리 취급을 한 셈이다. 공산당 세계 제패를 위하여 일대일로 등 야심찬 계획을 펼쳤으나, 이제 자신들의 야욕을 알아 챈 트럼프 정부의 반격을 당하여 자신을 가누느라 가뿐 숨을 쉬고 있는 중이다.
공산당 세계 제패, 중화민족 부흥, 이 둘 중에 후자는 전자에 부속되는 들러리요 핑계이다. 우한 폐렴이 시작된 우한 지역은 종교 시범 지역으로 선정되어 십자가 종탑 철거, 교회당 파괴 등으로 교회를 핍박한 곳이었다. 공산당에 대한 경고가 내려졌지만 기독교 박해는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나라가 이런 중공 체제에 보조를 맞추고자 한다는 점이다. 감시 경찰 전체주의 국가에로 변신이 거의 완료된 중이다. 우리는 이 사단적 세력의 지배 하에서 어떻게 신앙의 자유를 지킬 것이냐? 먼저 무엇보다 디지털 독재를 먼저 깨뜨려야 한다. 국민이 검증할 수 있는 분류기와 서버 등등 선거제반에 대한 투명한 제도를 세워야 한다. 지금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4월 15일 선거 후 5개월이 지난 지금껏 재검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체가 부정선거의 증거라고 보는데, 대법원은 모든 선거 관련 기기를 검증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하지만, 지난 부정선거가 너무나 치명적 중대 범죄인고로 그것을 밝히는 일은 자기 파멸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다. 다음에 올린 영상을 보시라. 선관위 직원들이 추석 명절도 잊고 밤샘 작업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충성스러워 그렇게 할까요? 아니면 지난 5개월간 못다 한 조작 은폐 작업 처리를 위해서일까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선거 조작이 없다고요. 여론 조작, 통계조작, 선거 조작, 중공, 북한과 이제 대등한 수준에 올랐다고요.
이 나라의 종말 파국을 막아야 한다. 전광훈 목사같은 애국자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닥쳐 온 세상 종말을 막는 길이다. 이 나라가 다시 신앙으로 부흥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고, 그래서 참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온 세상에 임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는 세상의 종말이 와도 담대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