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8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마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을 정죄하는 설교를 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결국 나중 참수를 당하였다. 세례 요한이 정죄한 그 헤롯 왕은 헤롯 안디바라는 왕으로 헤롯 대왕이 말다스와 결혼해서 얻은 아들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을 통치하는 분봉 왕이었다. 그가 세례 요한에게 책망을 받은 까닭은 헤롯 안디바가 (주전 20년-주후39년) 자기 본부인을 (나바티아 왕국의 아레다 왕의 딸) 내치고,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1세의 (Herod Philip 주전 22/21-주후 34년) 아내 헤로디아를 가로채어 결혼해 버렸기 때문이다.
[Peter Paul Rubens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헤롯에게]
어떤 설교자는 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처럼 순수 복음만 전할 일이지, 그렇게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정치적 발언을 하여 자기 명을 재촉하였나? 라고 세례 요한의 사역의 방향성을 문제 삼기도 하였다. 세례 요한은 구약 선지자 계통에 선 인물로서 마땅히 자기 언약 백성을 향해 삶의 전반 문제를 거론할 수 있었다. 주님은 마 11:13에서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라고 그를 구약 선지자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은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 등 사회 전반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을까? 가령 대통령이나 나라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 설교는 성경적인가? 이런 질문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성경은 롬 13:1-2일 것이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유사하게 베드로도 이렇게 말씀한다: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그리고 우리는 '정교분리'란 단어를 자주 들어 왔다. 종교/ 교회와 정치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고이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는 당대 정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가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오로지 천국 복음을 전파했을 뿐이었다. 당시 헤롯 왕가의 왕들의 정치는 로마 식민지 체제에서 로마를 위한 정치였다. 따라서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께서 만약 정치에 관해 말씀하셔야 했다면 그것은 로마 제국의 정치와도 직결되었다.
왜 바울이나 베드로 사도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하셨을까? 당대 로마제국의 통치 체제를 인정해서였던가? 당대 노예제를 인정해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하셨을까? 성경의 신적 권위를 무시하는 신신학 계통에서는 성경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성을 인정하는 우리로서는 이런 성경적 가르침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나온 말이 "정교 분리"라는 사고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주님 당대나 바울 사도 당대와 오늘날 상황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당대에 적절했던 말씀이 지금 적절하지 않다는 말씀은 아니다. 즉 성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신적 권위를 지니고 우리에게 말씀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대는 구원사의 전환기로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중간기 시점이었다. 그래서 구약의 사고 곧 언약 백성 중심의 사고가 이제 세계화, 민주화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런 전환기에는 예수님이나 바울은 자기 백성을 통치하는 유대인 왕국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헤롯 왕가에서 통치하고 있었지만, 헤롯 가문은 원래 에돔 족속의 후손인 이두매 족속이고, 그들도 사실 로마 제국에 속국으로 위임받은 왕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런 정황은 유대인들의 민족 국가가 없었다는 말이다. 즉 유대인 스스로의 정체가 없고 따라서 스스로의 정치 지도자가 없었던 시기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시대에 만약 정치적인 발언을 한다면 그것은 곧 로마 제국을 향한 말이 될 것이다. 물론 구약 선지자들은 이방 나라들에 대해서 치는 설교를 하였기에, 주님이나 사도 바울 역시 구약 전통대로라면, 로마 제국을 치는 설교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로마 제국을 거스리는 정치적인 설교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각자가 처한 나라에서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정부에 순응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에서 교회를 대적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책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그런 정책에 순종할 수 없다. 예컨대, 동성애를 합법화시키고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자 하거나 차별금지법이라 해서 동성애나 우상숭배를 정죄할 수 없도록 (그런 설교도 불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은 순응할 일이 아니라,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 민주 정체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체인데,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할 자리에 국민이 위치하는 점은 잘못되었지만, 이것이 세속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정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자기 의견을 모아서 그 나라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정치 체제에 살면서 성도들은 마땅히 나라의 정책이 성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할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말을 하고 의견을 피력하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로마 제국 시대와 지금 민주 시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아까 언급한 바울 사도나 사도 베드로의 말씀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세워진 자기 정부에 순응하되 만약 정부가 성경과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성도들은 마땅히 민주 국가 시민으로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성경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부정적인 방법으로 (선거 부정이나 개표 조작을 통해서) 세워진 정부라면 마땅히 국민들은 저항해서 그런 부정 불법의 권력을 깨뜨리고 정당한 절차로 온전한 정부를 구성할 책무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4.19의거의 저항 정신을 보장하고 있다.
지금 2021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당 주사파 정권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중공이나 북한처럼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이들은 남북 사회주의 연방제를 꿈꾸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이 나라를 그런 방향으로 몰고 나가고자 할 때, 특별히 2018년 지방 선거나 2020년 415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규모 개표 조작과 부정 선거가 개입되었다는 증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부정직하고 사악한 정권의 기독교 탄압이라 불릴만한 정책들이나 행동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가 침묵하면서 교회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기 머리를 사자 입에 들이대미는 어리석은 행동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결국 우리는 가진 자유를 빼앗기고 교회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떨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내어 저항해야 한다.
그렇다면 북한이나 중공 같은 공산당 혹은 일당 독재 사회에서 거주하는 성도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이런 식으로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고 가르칠 것인가?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감옥에 던져진 죄수들처럼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항거해서 자유 민주제를 쟁취하라고 선동할 수도 있다. 그렇게 설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인내의 덕목이 가장 필요한지 모른다. 그렇게 저항하다 잡혀서 감옥에서 일생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체제 하에 처한 성도들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처한 성도들은 외적으로 순응하고 내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자유 민주제라는 선물을 안기워 주실 것이다. 물론 우리 자유를 누리는 민주국가 성도들은 이런 독재 체제 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고 가능하다면 여러 면에서 독재 체제의 파멸을 위해 노력하고 자유 민주제를 저들에게 선물로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세례 요한이 왜 정치 설교를 해서 자기 명을 재촉했느냐? 고 묻는다면, 그렇다면, 자기 나라 지도자는 윤리적 범행을 저질러도 눈을 감고 있으라는 말이냐? 일반 성도들의 죄는 책망하지만, 그 범죄자가 대통령이고 장관이라면 지적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이 정치 설교를 피하는 길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소방관은 교회에 참석치 말라는 명을 어기고 참석했다고 직위 해제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그렇게 조처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정부가 어떻게 민주제 정부라고 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코로나 걸리면 직위해제 해야 하는가? 왜 이 정권이 교회를 대 놓고 핍박하는지 이유는 분명하다. 자기들의 사상적 방향성에 최고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정치 지도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엄격하게 윤리나 나라의 사상적 방향성과 연관하여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문재인이란 사람이 행동과 말로 보여준 바 중에서, 이 나라를 공산화시키고 우리가 가진 자유를 박탈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외에 다른 한 일이 무엇인가?
기회만 나면, 입만 열면 골수 공산주의자 신영복이나 이영희, 6.25남침 선봉 김원봉, 독일 간첩 윤이상, 광주출신 중공 공산당 김산 같은 자들을 치켜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이영희는 자기의 정신적 스승이라 하고 신영복이는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고 사람들을 기소한다. 자신이 자기 입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라고 자랑처럼 말을 했음에도 그것을 근거로 공산주의자라고 지목하면 아니라고 발뺌하고 기소까지 한다. 자기나라 원자력 발전은 위험하니 폐쇄하면서 남의 나라에 가서는 우리나라 원자력 안전하고 세계 최고니 사라고 한다. 이런 이중 인격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라고 있는 대한민국이 불행한 것이다.
자유 민주 투사들을 태어나지도 말아야 했을 몹쓸 인간으로 모독하고 8.15 건국을 부정하고, 교과서 사회 과목에 '자유 민주제'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초헌법적 공수처를 설치하고, 세계 최고 원자력 발전을 폐기하고, 온갖 사악한 방법으로 선거를 조작하고 . . .
코로나 2단계 강화 때, 버스, 지하철 (붐비는 시간에 지하철 타보라; 지난 주 2021.1.8 오후 5시경에 1호선이나 5호선에 사람들이 만원이라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백화점 , 대형 마트 같은 곳은 인원 제한 없고, 장례식장 30명, 결혼식장 50명, 오직 교회만 20명. . .
교회는 1.5단계만 되도 식사 불가, 음식점 식당 가서는 제한 없이 먹고 마시게 하고, 교회에서는 김밥 하나만 나눠 먹어도 감염되니 절대 식사 금지라고 한다.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떨어져 설교하는데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한다. 음식점에서는 서로 말하고 이야기해도 괜찮고. . .
나라를 파괴하려고 작정한 듯 행동하면서, 특별히 교회를 대적하고 교회를 완전 없이하려고 작정한 듯 행동하는 이런 대한민국 국가 반역자나 그 일당에게 어떻게 순응해야 한다라고 설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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