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암 그렇구 말구! 하나님 만세!

중일사랑 2021. 11. 25. 23:27

나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김일성 주석 서거 이후에야 처음으로 목격하였다. 그것은 그동안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처참함이었다.  주석의 서거 이후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 타개를 위한 고육책으로 외국 자본의 투자 유치가 절실했다. 그때 나는 중국 자본가들에게서 투자를 유치해 오고, 중국과의 일본 중고 승용차 무역에서 받지 못한 30대의 승용차 값을 받아오라는 당의 특명에 따라 훈배우에서 무역 지도원으로 발령 받으면서 남자 무역지도원과 함께 3일간의 중국 출장길에 오르게 되었다.


함께한 남자 무역지도원은 승용차 무역업을 하는 나의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승용차들을 여러 차례 밀수출했던 사람이었다. 거래하던 몇몇 중국 무역대방(업체) 들이 물자 값을 지불하지 않고 연락이 되지 않자 대방들의 얼굴을 알고 있는 그가 나와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고 그들을 찾아내어 물자 값을 받아오는 것이 업무였다.


그렇게 나선 3일간의 출장길이 고향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이별의 길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중국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세관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북한 땅과 중국 땅에서 자라고 있는 옥수수의 키가 달랐고 산천과 초목들의 색깔부터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 분명 하늘은 하나인데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선 나는 중국 연변의 숙소인 한 호텔로 안내를 받아 여장을 풀었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안내를 받았다. 나는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마나! 이 식당에서 1호 행사를 했습네까?” 안내원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1호 행사가 뭐임까?”
수령님, 장군님을 모신 행사를 1호 행사라고 합네다.”
여기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는 곳임다.”
아니, 그럼 여기 계신 분들이 중앙당 간부 동지들이 아닙네까?”
지금 여기 있는 손님들은 관광객도 있고 무역차로 온 손님도 있고, 어쨌든 여기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다 올 수 있는 곳임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수령님을 모셨던 1호 연회장인데 이런 자리에 중앙당 간부들도 아닌 인민들이, 그것도 돈만 있으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접대원이 와서 식사를 주문받았다.


1호 연회장에서 즐겨 먹었던 광어회를 주문했다. 잠시 후 회가나왔는데 이상했다. 둥근 타원형 접시에 찐빵 크기만 하게 불룩불룩 솟아 올라온 투명한 냉면 국수가락을 얹고 그 위에 종이처럼 얇게 썬 생선을 몇 장씩 살짝살짝 눕혀 놓은 것이다.


광어회를 주문했는데 이것은 무슨 휩네까?”
이것이 광어회임다.”
아니, 무슨 광어회가 대가리도 없고 꼬리도 없습네까?”


테이블에 함께 앉은 안내원 선생님과 옆에 앉은 분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광어회가 이렇지. 대가리는 뭐고 꼬리는 또 뭘까?"
또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조선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는데 선생님은 광어회를 먹어 봤슴까?”


나는 우리 조국을 업신여기는 그들이 괘씸하였고 자존심이 상하였다.


인민들은 먹을 수 없어도 1호 행사 연회장에는 없는 것 내놓고는 다 있습네다. 산해진미가 다 있고, 또 광어회는 동해에서 펄펄 뛰는 물고기를 직승기로(헬기)실어오면 대기하고 있던 요리사 동지들이 고기를 받아 즉석에서 회를 떠서 만듭네다. 대가리, 꼬리가 있는 그대로 몸통 우에 멋지게 장식을 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요리사 동지가 살아서 눈을 감았다 떴다 하고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는 광어 입에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물려 놓으면 광어가 살아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위로 올라갑네다.”


뭐라고요? 광어가 누워서 담배를 피운다고?"
네, 그렇습네다.”
인민들이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어가는데 광어회가 있느냐? 며 조선을 무시하는 듯이 하는 말에 발끈하여 한 말이었다. 테이블에 함께 앉은 사람들이 “와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여성들은 짐승처럼 팔려 다니는데 자기들은 담배 피우는 광어만 먹는다고? 나쁜 새끼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자 누구 보구 나쁜 새끼라고 했습네까?”라고 하자, 그들은 또 수령님. 장군님 이름을 막 불러 대며 욕하는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습네까?”


너무 끔찍했다. 조국에서는 해외 출장을 떠나기 전 1개월간 강습을 받는다. 해외에 나가서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옹호 보위해야 하며,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키는 현상을 절대로 용서하거나 묵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엄격하게 대응하였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막말들을 하였다. 아주 심각한 분위기가 잠시 흘렀다.

 

특색 있는 사회주의
심각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한 여인이 다가와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 호텔의 주인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조국에서 오리지널 배우가 왔다며 노래 한 곡 불러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해 왔다.
“선생님, 조선에서 오신 배우라고 들었슴다. 노래 한 곡 좀 부탁합시다.”
'반주가 있습네까? 반주 없이 어떻게 노래를 합네까?”
나는 큰 무대에서 배우생활을 했기에 관현악단의(오케스트라)반주가 있어야만 노래를 부르는 줄 알았고 하다못해 손풍금(아코디언) 반주라도 있어야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주기가 있슴다. 걱정 마시오.”


주인의 그 말에 식당을 휘둘러보며 손풍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았다. 이때 식당 주인은 텔레비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이 화면 반주김다. 북조선 노래는 무슨 노래든 다 있슴다.”
“정말입네까? 그럼 반갑습네다’ 반주 좀 부탁 합네다.”
바로 앞에 있던 텔레비전이 켜지면서 화면에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외국인 여자들이 야한 가슴띠를(비키니)하고 바닷가에서 요상한 몸짓을 하는 그림이 나오면서 “반갑습니다” 반주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눈을 감았다. 화면에 나오는 그림이 이상하고, 벗지 못해 대중 걸친 여자들의 모습이 마치 내가 벗은 것처럼 부끄럽고 기분이 나빴다.
저 화면을 좀 끄고 반주만 나오게 해줄 수 없습네까?”
"화면을 끄면 반주도 안 나옴다."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그쪽을 보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구나! 중국이 특색 있는 사회주의를 한다더니만 완전히 자본주의가 다 되었구나. 자본주의는 썩고 병든 사회라고 하더니만 어쩌면 여자들을 아주 다 벗기지 못해 대충 입혀 놓고 미친 짓을 하게 하는가?


아무리 외국 여자라고 해도 같은 여자로서 수치심을 느꼈고,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그곳 사람들을 보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 반주기에 맞추어 반갑습니다’를 부르자 식당 손님들이 식사를 하다 말고 모두 나를 향해 마주 앉더니 매우 좋아하며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들고 일어나 춤을 추며 난리들이 었다. 열광하던 그들은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르르 달려 나와 서로가 먼저 꽃다발을 안겨 주려고 야단법석이었다. 나는 다섯 개나 되는 꽃다발을 정신없이 받아 들고 당황하였다.


“노래 한 곡에 어쩌면 이렇게도 많은 꽃다발을 줄까? 생화가 얼마나 많길래……”
그러는 순간에 손님 한 사람이 또 꽃다발을 들고 나와 나의 품에 안겨 주었다.
"어마나, 무슨 꽃다발을 이렇게 많이 줍네까? 됐습네다. 더 주지 않아도 일 없습네다.”
“일 없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가 주고 싶어서 주는건데. 얼마든지 다 받아도 돼요.”
당황한 나는 불쾌한 표정을 짓고 말하는 그 손님에게 설명을 했다.


“인제는 안 줘도 된다는 말입네다.”
“조국에서는 큰 대행사나 공연장에서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오직 두 분만이 생화 꽃다발 하나씩 받습네다. 나도 음악무용 대공연이 끝났을 때 생화 꽃다발 하나씩은 받습네다.”
“아니, 생화도 자기들만 받습니까? 나쁜 새끼들!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고 두만강을 건너온 숱한 여성들이 짐승처럼 팔려다니는데 자기들만 배불리 처먹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그런 새끼들이 나쁜 새끼들이지.’’


수령님, 장군님이 아닌 내가 생화 꽃다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정숙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 땅에 와서 이토록 많은 생화 꽃다발을 받는다는 사실이, 그것도 노래 한 곡에 꽃다발 한 아름을 받아 안은 것이 놀랍기만 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꽃다발을 안겨준 뒤 모택동 주석이 그려져 있는 중국 인민폐
100위안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어마, 근데 돈은 왜 줍네까?’
“노래를 불렀으니 돈을 주는 검다.”
“네, “이것이 바로 특색 있는 사회주의라는 검다.”
“이렇게 노력의 대가를 즉시 돈으로 주는 것이 자본주의람다.”


노래를 불렀다고 꽃다발을 한 아름씩 안겨주고 거기다 돈까지 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곡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앙코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앙코르라는 노래는 모릅네다.”
“와하하하하.”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망코르는 노래 제목이 아니라 또 부르라! 는 뜻임다.”
조선족 한 사람이 큰소리로 설명했다.
‘네? 우리 조국에서는 노래를 더 부르라는 것을 재청이라 합네다.”


이렇게 말하자 모두 큰소리 내어 웃고는 “재청!” 하며 박수를 쳤다. 재청곡으로 '휘파람’을 부르는 나는 나도 모르게 성수가(신명)났고 어깨춤이 저절로 나왔다. 식당에서 노래를 감상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성을 질렀고, 박수를 치며 난리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몸을 흔들며 춤추자 내 몸도 저절로 흔들어졌고 점점 더 심하게 흔들어지는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게 된 것이다.


‘아니야, 이렇게 몸을 흔들면 안 돼.’


조국에서는 무대나 어디서든지 노래를 부르면서 몸을 흔들면 수정주의 날라리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심하게 대한민국의 ‘비’나 ‘효리’처럼 신세대 가수들이 춤추는 것은 미치광이들의 ‘정신 광란증’이라고 조국의 청소년들에게 강연제강(강의) 으로 교육시 켰다.


그런데 지금 나도 모르게 수정주의 날라리풍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걱정스러워 조국에서 함께 출장 온 지도원 동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오히려 그가 더 성수 나서 손님들과 어울려 춤을 추다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쳐들어 보일 정도로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고 마음 놓고 재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환호하는 사람들과 꽃다발을 안겨주며 돈을 주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돈을 받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미안해서 더 이상 받지 않으려고 사양했다.


“일 없습네다. 됐습네다!” 했지만 나의 말은 소용이 없었다.


북조선의 간부들처럼 몸도 좋고 잘생긴 사람들 일곱 명이 식당 창문 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나에게 내내 관심을 가지고 사진도 찍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섯 번째 노래 ‘심장에 남는 사람’이 끝났을 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다가와서 꽃다발과 함께 지금까지 받은 돈과는 색깔부터가 다른 새파란 돈을 쥐어주며 말했다.


“노래 부르느라 힘드실 텐데 잠시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목을 축이세요!”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고 그들의 테이블로 나를 이끌어 갔다. 중국 인민폐나 달러, 일본 엔화와 달리 처음 보는 파란색 돈을 받아 들고 보니 몹시 궁금했다. 돈에 그려진 중절모 쓴 아바이가 누구냐? 고 물었다.
“이 돈은 대한민국 돈이고, 돈에 그려진 사람은 바로 한글을 지은 세종대왕이에요.”
“네?
대한민국은 어느 나랍네까?” “아니, 그럼 한국도 모르세요?”
한국은 또 어느 나람네까?” “그럼 남조선은 아세요?”
그럼요. 알지요. 우리 조국 절반 땅. 미국 놈들 때문에 둘로 갈라져 있는 남녘 땅을 왜 모르겠습네까?”


그러자 그 사람들은 남조선을 이제는 남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세계에서 얼마나 발전된 나라인지. 그리고 한글을 지은 세종대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인민학교 시 절에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장군 같은 우리 조선의 위대한 영웅들이나 위인들의 업적을 역사책을 통하여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불온 서적이라고 한 뒤로 그 역사책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새로 나온 역사책을 통하여 철천지 원수인 강도 일본 놈들한테서 빼앗긴 우리 조선을 다시 찾아주신 위대한 영웅은 오직 김일성 장군님 한 분 밖에 없다고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당연히 조선글 조선말을 지으신 분도, 강도 일본 놈들한테서 빼앗긴 우리말과 글을 다시 찾아오신 분도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신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 장군님이라고 배웠을 뿐이므로 우리말과 글을 만드신 분이 세종대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통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십일조로 만난 하나님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온 관광객들입니다.”
혹시 하나님을 아십니까?”
예, 위대한 수령님께서 돌아가셔서 하늘에 올라가 계시니까 우리 수령님이 하느님이십네다.”
내 말에 그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이름과 이야기들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봉수교회를 아십니까?’ “지하교회를 아십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아십니까?” “십일조를 아십니까?”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한 사람씩 물어보십시오. 입 가진 사람마다 그렇게 한꺼번에 질문을 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네까?”

 

그분들을 통해서 나는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관광객들은 웃으면서 강조했다.


오늘 팁으로 받은 돈 10분의 1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바쳐보십시오. 그러면 부풀려서 복을 주실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관광객들은 팁이라는 개념조차도 모르는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하면 이렇게 노력의 대가를 즉시 즉시 지불해 준다고 했다. 팁이라는 것도 수고한 노력의 대가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또 호텔 방에 가서 뜯어보라며 예쁘게 포장된 묵직한 선물까지 주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손님들로부터 받은 돈을 세어보니 중국 돈 2,700 위안이었다. 2000년 당시, 호텔 식당에서 일하는 접대원들의 한달 월급이 인민폐 500위안이었다고 하니 그날 나는 노래 몇 곡을 부르고 다섯 달 월급하고도 200위안이나 더 받은 셈이었다. 십일조가 뭔지는 몰랐지만 부탁하는 대로 부풀려서 주신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호기심이 났고 그 하나님을 만나서 두 배로 부풀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어 300위안을 따로 떼어 놓았다. 어느새 나의 가슴은 설레며 “쿵광쿵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레 벌어지고 있는 일들로 정신이 없었지만 낯선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신기하고 흥미롭기까지 하였다.


더군다나 지금 조국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했기에 노래를 불러서 돈을 받은 것부터가 가슴이 격동되는 일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이라는 분이 그 돈을 배나 부풀려서 주신다니 어떻게든지 그분을 만나 감동을 시킨 후 돈을 부풀려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돈 가방으로 보인 성경책
선물을 싼 예쁜 포장지를 뜯으니 시커먼 가죽 가방이 튀어나왔다. 가방은 자꾸가(지퍼)둘러쳐져 있었고 앞면에는 ‘라이프 성경’이라는 글이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아, 돈 가방이로구나! '라이프 성경’ 이 글은 돈 가방 이름이로구나! 얼마나 많은 돈을 넣었으면 가방이 이+렇게 무거울까? 달러일까? 엔화일까? 아니면 남조선 돈일까?”


돈이 나올 거라고 잔뜩 기대하며 조심스레 지퍼 한쪽을 열었다. 번쩍번쩍한 황금색을 칠해 놓은 옆면이 보이자 기쁨과 감격에 설레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켜야 했다.
어마나,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렇게 돈을 빼곡히 책책(꽉꽉) 넣었을까? 난 정말 운도 좋지, 처음 외국 출장길인데 이렇게 돈이 생길 줄이야.’


출장 전 1 개월간 교육을 받을 때, 중국 연변에 가면 남조선 안기부가 확 깔렸는데 그들은 한번 매수하면 조국의 기밀을 빼먹은 뒤 사정없이 죽여 버리고, 필요하면 보쌈도 해가니 절대로 접촉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안기부가 아니라 이렇게 돈 많은 사업가들을 만났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어마나. 황금색이 번쩍번쩍나는 걸 보니 안기부 검은 돈이 아니고 달러겠구나!’


기대는 더 커졌다. 주저 없이 나머지 부분의 자꾸를(지퍼)확 열어젖혔다. 순간 잔뜩 부풀어 올랐던 기쁨과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돈이 아니라 책이었던 것이다.


'
도대체 무슨 책이기에 이렇게 금박을 칠해 놓고 자꾸까지 달아 놓았을까?’
궁금증이 발동했다. 책의 첫 표지를 들춰보니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또다시 들여다보아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생소한 글이어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라고 쓴 글을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순간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아〜 남조선 인민들은 어버이 수령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러 모신다고 하더니 수령님이 돌아가셔서 하늘에 올라가 계시니까 정말 수령님을 흠모하여 이런 책까지 만들었구나!’


콧등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북조선 인민들은 아직 이런 책까지는 만들지 못했는데 남조선 인민들은 하늘에 계신 수령님을 흠모하는 책을 다 만들었을까?’ 수령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안고 한 장 한 장 정중히 책장을 넘겨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나오는 말들은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도대체 이 무슨 말일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또다시 책장을 스르륵 스르륵 넘겨가다 보니 악보와 가사가 보였다. 그 말들도 역시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단어와 문장들뿐이었다. 답답해서 포기를 하고 책을 덮으려고 하다가 마지막 표지 안쪽 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십계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십계명과 10대 원칙
십계명? 십계명? 십계명이라는 것은 뭐일까?’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이것도 한 번 읽어나 보자 하고 읽어 나갔다.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 십까지 읽어 내려가다 보니 북조선의
10대 원칙이 떠올랐다.
‘십계명과
10대 원칙, 글이 다르다 뿐인데 뭐가 다를까?’
북조선의
10대 원칙’을 외워 보았다.
첫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여야 한다.
둘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한다.
셋째,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아니 이럴 수가!’
10대 원칙을 외워 내려가던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찜 우리 10대 원칙을 가져다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하나님으로 바꿔 놓다니? 이 사람들이 아주 나쁜 남조선의 안기부로구나!’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북조선에서는「김일성 주체사상」 이나「김일성전집」 같은 서적은 까만 비닐 책으로 되어 있었다. ‘'남조선 사람들은 우리 북조선의 주체사상을 가지고 김일성 수령님의 이름을 신으로 표현해서 이렇게 나쁜 책을 만든 후 우리한테 나쁜 사상을 퍼트리는구나.’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교육을 받을 때 남조선 안기부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다 내가 이런 사람들의 검은 마수에 걸려 들었을까.’ 싶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책을 한쪽에 밀쳐 버렸다. 그래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면 두 배로 부풀려서 주신다고 한 말을 기억하며 십일조를 바칠 것에 대해 가슴이 설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텔레비전에서는 남조선의
KBS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가 나오고 있었다. 제목부터가 신기했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제목이 저럴까?’ 북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연속극 제목이었다. 나는 화면 속에 나오는 집안 살림들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번쩍거리는 오장육기[북조선에서는 양복장, 이불장, 옷장(서랍장), 장식장, 책장을 오장이라고 하고, 천연색 텔레비전수상기, 냉동기 (냉장고), 록음기, 선풍기, 비디오, 발전기(자주 정전이 되기에 불법으로 만든 발전기 혹은 충전기) 를 육기라고 함], 집 안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식구들마다 하나씩 자기 방을 갖고 있고, 연속극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입고 있는 잠옷부터 시작하여 멋진 외출복에 이르기까지 북조선 인민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는 전혀 딴 세상이었다.


남조선 사람들은 지금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고 미국 놈들의 군홧발 밑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연속극에 나오는 남조선 인민들의 모습은 북조선의 고위 간부들의 생활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기에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연속극 속의 대사 그 자체도 놀라움이었다.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신기하기만한데 속옷 바람의 여배우가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더니 귓쌈을 여지없이 박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렇게 곱게 생긴 여자가 저 잘생긴 남자 귓쌈을 여지없이 박아 놓다니? 남조선은 썩고 병들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라고 하더니 정말이구나! 남조선 여자들이 드살이 세다더니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쥐여 사는구나!’ 남조선 남자들이 불쌍하고 측은해 보였다. 하늘 같은 남편에게 절대복종하고 순종하며 사는 북조선 여자인 나로서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통해 처음으로 대해 본 남조선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조선은 해와 별이 빛나는 나라!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내 조국 북조선을 떠나 중국 땅에서의 첫째 날 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 약간의 피로감이 밀려오면서 오늘 식당에서 만났던 관광객들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면 배로 부풀려 준다고 한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기대감에 부풀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고 그분께 십일조를 하라고 얘기해 준 그 관광객들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중국으로 선교를 하러 오신 선교사님들과 목사님들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비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어수선하기만 했던 밤을 그렇게 보내고 중국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하루 일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곧장 소중히 보관해 놓았던 11조(십일조) 라고 쓴 봉투를 들고 안내원 선생님을 졸라 십자가가 서 있는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 나는 교회나 예배당이라는 말조차 알지 못했다. 안내원의 차를 타고 십자가가 세워진 커다란 집으로 안내되어 갔다. 굳게 닫혀 있는 출입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한참을 두드린 뒤에야 아바이 한 분이 출입구 쪽으로 나왔다.


“오늘은 예배하는 날이 아님다.” 퉁명스러운 중국의 조선족 억양이었다.
"아바이! 아바이! 빨리 문 좀 열어 주십시오.
11 조 바치러 왔습네다.”
나의 고함치는 소리에 아바이는 교회당 문을 열어 주며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아니 북조선에서 오지 않았소? 북조선에서도 십일조를 함까?’
“아바이! 빨리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빨리
11조 바쳐야 합네다.”


아바이는 머리를 가우뚱 가우뚱하면서 앞서 걸어갔다. 나는 아바이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는 줄 알고 급히 따라갔다. 드디어 아바이가 교회당의 큰 문을 열어 젖혔다. 전깃불을 밝히지 않은 커다란 건물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바이! 하나님 어디에 계십네까? 빨리 불을 좀 켜 주십시오.”


아바이가 긴 의자들 뒤에 있는 나무함을 가리키며 구멍이 있는 곳에 넣고 그냥 가라고 했다.
“아닙네다! 하나님 만나서 인사하고 직접 바치고 가야 합네다. 빨리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어이없다는 듯 한바탕 웃더니 아바이는 그냥 그 구멍에 넣고 가면 된다고 말했다.
“아니, 그럼 하나님이 이 안에 계십네까?”

“이 안에 넣어도 하나님이 받으심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던지라 어저께 그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 준 말대로 하기로 하였다.
"
하나님, 어디에 계십네까? 하나님 만나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이 돈을 이 통에 넣고 가니 빨리 가져가시고 꼭 한 배만 부풀려 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네다.”
눈을 뜨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아바이가 나를 보았다 나무함을 보았다 하며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바이, 어째서 안 가고 여기에 있습네까?”
걱정이 되어 발걸음을 돌릴 수 없던 나는 다시 나무함 앞으로 가서 아바이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한 번 더 부탁을 드렸다.
하나님! 저 아바이가 돈을 꺼내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이 돈을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꼭 한 배만 좀 부풀려 주십시오. 불쌍한 저 북녘 땅의 동포들을 위해 부탁을 드립네다.”


이렇게 다시 부탁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세 번이나 뒤돌아 보고서야 겨우 교회당 문을 나섰다.

 

낮에는 안내원을 통하여 평양에 투자할 수 있는 돈 많은 자본가분들을 시내 대우호텔에서 만나 투자 설명을 해드렸다. 예닐곱 분이나 되는 기업가 회장님들이 하나같이 모두 좋아하면서 투자 하시겠다고 하여 평양 초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나누어 드렸더니 점심식사를 멋지게 대접해 주셨다.
그날 당으로부터 받은 임무인 평양 투자유치 면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어제 그 호텔 식당이 좋습네다. 그리고 음식도 제 입에 꼭 맞습네다.”


이렇게 말했지만 속마음으로는 어제 노래를 불러서 많은 돈을 받았으므로 ‘오늘도 식당에 가면 혹시 또 노래를 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호텔에 들어서자 호텔 식당 주인이 반색을 하며 맞아 주었다.


선생님을 많이 기다렸슴다. 선생님 때문에 어제 우리 식당의 매상이 평소보다 세 배나 많이 올랐슴다. 오늘도 노래 몇 곡 불러 주시면 고맙겠슴다.”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들을 내오면서 식사를 빨리 하라고 했다. 난생 처음으로 한 아름 받아 안은 생화 꽃다발에다 중국 사람들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을 받았던 터라 미안한 마음에서 말을 못하였을 뿐 마음속으로는 오늘도 내일도 노래를 불러 또 꽃다발과 돈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돈을 너무 밝히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 때문에 못이기는 척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섰다. 이제는 호텔 안에 있던 다른 식당의 손님들조차 북조선에서 온 배우의 노래를 듣겠다고 몰려들었다.


여성은 꽃이라네’, ‘도시처녀 시집와요’, ‘심장에 남는 사람’ 등 조국에서 유행한 노래들을 불러 드렸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열광을 했고 손에 손에 꽃다발을 들고 나와 돈을 쥐어 주는가 하면 기념촬영을 하였다. 시간이 되어 노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팁으로 받은 돈을 세어보니 4,800위안이었다. 첫날보다 거의 배에 달하는 큰돈이었다. 10분의 1을 바치면 하나님이 직접 돈을 부풀려서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지만, 남조선 관광객들의 말대로 11조를 바치면서 기도하면 달라고 하는 대로 배로 부풀려 주신다는 말이 딱 맞았다.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안 나타나실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무식하다 할까 봐 다시 물을 수도 없었다.


이날도 10분의 1을 세어서 500위안을 봉투에 넣고 ‘하나님께 드리는 11조’ 라고 정중하게 글을 써놓았다.


'내일은 얼마를 요구할까?' 생각하느라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봉투에 넣은 500위안을 11 일조로 바치기 위해 십자가가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경비 아바이가 또 왔느냐? 며 반기더니 나무함이 있는 데까지 따라와서는 봉투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왜 웃습네까?” 했더니 봉투에 써 놓은 11조가 숫자가 아니라 조선 글 ‘십일조’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한번 재미를 본 기도 부탁을 이번에는 욕심이 생겨나 더 많이 요구하려고 잡도리하고 정중히 서서 부탁을 드렸다. "하나님, 고맙습네다. 어제는 기도한 대로 한 배로 부풀려 주셔서 감사합네다. 내일이면 3일 출장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제는 몰라서 한 배만 부풀려 달라고 했습네다. 오늘은 500위안을 드리니 10배 아니 100배로 부풀려서 주십시오. 부탁드립네다.”


첫날처럼 혹 아바이가 가져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빨리 가져가시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교회당을 나왔다. 그날도 출장업무로 어제 만났던 평양 투자 사업가들을 만나서 함께 중국 시내 관광도 하고 시장도 돌아보았다. 시장을 돌아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시장에 있는 형형색색의 옷가지들과 옷감들, 가게 천장까지 아 올린 생활필수품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갖가지 식량들과 매대(진열대) 판매원들이 “사지 않아도 좋으니 먹어보세요!” “사지 않아도 좋으니 입어보세요!”라며 여기저기에서 권하는 것이 매우 신기하고 딴 세상 같았다.


이곳은 분명 천국이었다. 사실 북조선을 떠날 때에는 평양이 세상에서 제일 잘사는 곳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잠시 미국 놈들 때문에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고, 한시바삐 미국 놈들을 남녘 땅에서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는 중국 땅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천국의 모습이었다. 북조선은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시신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먹을 것을 구하려고 떠도는 사람들의 무리가 거리와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너무나도 판이한 현실을 놓고 만감이 교차되었다.


그날 사업가들에게서 북조선으로 가져갈 선물과 지원물자를 한 트럭이나 지원받았다. 쌀, 옥수수, 밀가루, 의료품, 중고 천연색 텔레비전수상기, 흑색 텔레비전, 록음기, 비디오, 중고 옷들을 비롯한 여러가지 지원물자들을 가득 실은 트럭을 호텔 앞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전날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곳에서의 저녁식사 대접을 마다하고 노래를 불렀던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고집했다.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호텔 로비까지 꽉 차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한 사람이 “저기 온다〜” 하고 소리를 쳤다. 영문도 모르고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식당 안은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왜 이제야옵니까? 우린 지금 선생님의 노래를 들으려고 두 시간 째 기다리고 있슴다.”

 


'단골손님’과 롤렉스 금시계
식당사장 동지가 저녁식사는 방에 가져다 드린다고 하며 우선 노래부터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손님들은 앉을 좌석이 없어 보조 의자까지 갖다놓고 그것도 모자라 식당 문 앞까지 서 있었다. 관객이 많으니 성수가 나(신이 나서) 식사고 뭐고 생각할 겨를 없이 마이크를 손에 잡고 씩씩하게 소개 인사부터 시작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통일은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만났습네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네다. 그럼 반갑습니다로 저의 공연을 시작하겠습네다.”


반갑습〜니다. 반갑습〜 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하였고, 노래가 끝나자 꽃다발과 함께 팁이 쏟아져 나왔다. 또 재청으로 ‘휘파람’, ‘여성은 꽃이라네’, ‘심장에 남는 사람’, ‘도시 처녀 시집와요’를 계속해서 열창했다. 노래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팁과 꽃다발이 셀 수 없이 식당의 작은 무대 아래에 쌓여갔다. 누군가 한국 노래를 요청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대한민국 노래 한 번 들어보고 싶어요. 한 곡만 꼭 불러 주세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북조선에 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1호 연회장에서 남조선 노래 테이프를 틀어놓고 가끔씩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식당사장 동지가 노래를 시켜줘서 고마웠고 노래 부를 수 있는 기계가 있어서 무척 좋았다. 식당사장 동지께 감사의 보답을 해 드리고 싶었다. 한 번도 불러보지는 않았지만 북조선에서 가끔 녹음기로 들어본 적이 있는 ‘단골손님’을 부르겠다고 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식당의 단골손님이 되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조선의 조미미 동무가 부른 단골손님을 불러 드리겠습네다.” 박수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오실 땐 단골손님 안 오실 땐 남〜인데 무엇이 안타까워 기다려지나〜
달콤한 그 말씀도 달콤한 그 말씀도 오실 때는 좋았지만
안 오시면 외로워지는 안 오시면 외로워지는 아〜아〜 단골손님 그리워라 단골손님〜”


1절이 끝나고 간주가 흐르자 “휘〜익 획〜”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휘파람 소리와 환호하는 함성소리가 식당이 떠나갈 듯이 터져 나왔다. 남한 노래를 부르자 더 큰 폭소와 난리가 일어났던 것이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돈과 꽃다발을 들고 무대로 뛰어나오느라 아우성이 었다.


북한 사람 목소리로 남한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신기하군요. 꼭 통일이 된 것 같아요.”


감격하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콧등이 찡해 왔다. 한 손님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 손에 채워주면서 말하였다. “선생님, 이 시계는 말발굽에 채워서 천 리를 달리게 하였는데 1초도 틀리지 않은 롤렉스 금시계예요. 기념으로 드립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모습에 나도 눈물을 흘리며 2절까지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는 식당사장 동지가 비닐주머니를 들고 나와 높이 쳐들고는 100위안 다섯 장을 비닐주머니에 넣으면서 소리쳤다.


"
자, 여러분! 이제부터 돈을 여기다 넣으시오.”


또 다른 사람들은 목걸이를 목에서 빼내어 내 목에 걸어 주었고, 또 어떤 사람은 손가락 반지를 빼서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노래가 끝날 때마다 목걸이와 반지와 시계, 꽃다발, 팁을 아낌없이 주었다. 이렇게 환호와 감동 속에 노래를 부르다 보니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지난 것을 알지도 못했고, 그만 하자는 안내원의 사인을 받고야 헤어지기 싫어하는 손님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꿈같이 만났다 헤어지지만 통일된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꼭 다시 만납시다.”


마지막 곡으로 ‘다시 만나요’를 불렀다.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나고 기념 촬영을 하며 아쉬워하는 관객들과 헤어져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십일조 바치고 선물 받은 아파트 두 채
비닐 주머니를 침대에 쏟아 놓고 안내해 주는 분들과 선별에 들어갔다. 손목시계가 3개! 목걸이가 3개! 손 가락지가 4개! 그리고 돈은 36천 위안이나 되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안내원 선생님과 함께 중국으로 출장 온 남지도원 동지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돈덩어림다. 이 돈이면 여기서 방 세 간짜리 아파트를 두 채나 살 수 있는 큰 돈임다. 아예 북조선에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어서 이 호텔을 인수해 버리시지요!”


사람들이 자본주의 바람을 자꾸 불어넣는 것이었다. 당황스런 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남지도원 동지가 마음에 걸렸다. 혹시 출장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이 모든 일들을. 특히 남조선 사람들을 만난 일과 십자가 집에 간 사실들을 당에 보고하지나 않을까 불안스러웠다.
“안 됩네다. 다시 출장 오는 한이 있더라도 꼭 조국으로 돌아가야 합네다.”


오늘 받은 거액의 돈과 각종 시계와 반지, 목걸이를 보면서 아침에 십자가 집으로 갔을 때
10배, 100배로 부풀려 달라고 했던 그 부탁을 다 들어주신 그분은 정녕 어떻게 생긴 분이신지 한번 만 나보고 북조선으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같이 났다. 그날 밤도 여전히 36천 위안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36백 위안을 봉투에 넣고 원주필(볼펜) 로 ‘하나님께 드리는 11조’ 하고 써 놓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막아섰다.


“선생님, 내일이면 북조선으로 돌아가는데 또
11조를 바침까? 내일은 노래도 못 부르고 36백 위안이면 큰돈인데 그 돈을 북조선으로 가지고 가야지! 무슨 또 11조를 바친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함까?” 너도 나도 그 돈을 바치지 말라며 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이 돌아간 후 내 마음은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야, 바쳐야 한다. 바쳐야 한다. 바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불타올랐다. 내일 조국으로 돌아가지만 내 부탁을 다 들어주신 그분께 꼭 마지막 11조를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아 온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그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3일간의 중국 출장을 성공리에 마치고 고향으로 가져갈 옷 가지며 생필품, 먹을 것들을 커다란 트럭에 가득 싣고 사랑하는 딸과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 땅으로 향했다. “부르릉트럭의 엔진 소리도 힘이 넘치게 조국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십자가가 눈에 안겨 오면서 11조를 바치지 않고는 도저히 그냥 떠날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안내원 선생님께 소리쳤다. “선생님! 차 좀 세우십시오. 잠깐만 갔다 오겠습네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교회당으로 뛰어올라 갔다. 이틀 동안
11조를 바쳤던 나무함 앞에 가서 기도 부탁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의 기도 부탁을 들어 주신 하나님 고맙습네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갑네다. 이 돈은 저 불쌍한 고향 사람들에게 가져가서 나누어 주면 몇 달을 살아갈 수 있는 큰 돈입네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부풀려 주신 돈이기에 하나님의 것은 바치고 가오니 이 돈을 받으시고 조국에 가서도 많이 부풀려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에는 3일 출장이 아니라 3개월 출장을 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굶어 죽어가는 저 불쌍한 인민들을 살리게 도와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네다.”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버렸다.
36백 위안이 든 돈 봉투를 나무함 구멍에다 넣는 순간 “털서덕!”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교회당을 나오며 경비 아바이에게 하나님께서 11조를 가져가실 때까지 잘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훗날 성경을 읽다가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신 말라기
310절 말씀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이 성경구절을 보고 십일조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십일조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분명 그분은 나의 부탁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업고 너회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그동안 내가 하나님께 드린 11조는 십분의 일의 십일조가 아니라 열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알고 숫자로 11조라고 써서 하나님께 바친 것이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대한민국 신분증을 받아 안고 처음으로 어느 교회에 가서 간증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의 땅으로 온 것이 매우 감사해서 사례를 받지 않고 그냥 간증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십일조 간증을 마치고 나자 교회 측에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금액을 사례해 주셨다. 그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고 오려고 봉투를 받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
11조를 바칩니다!”라고 써서 뒤에 서 계신 전도사님께 십일조 봉투를 드렸다. 십일조 봉투를 받아든 전도사님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십일조를 이렇게
11조라고 썼어요?"
“제. 뭐가 잘못됐습네까?
11조가 아닙네까? 그럼 뭐임네까?”


여전도사님께서 ‘
11조’ 라고 쓴 봉투에 ‘십일조’라고 다시 고쳐 써 주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숫자 11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렇듯 모든 것이 서툴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이 미숙한 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중심을 예쁘게 보시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체포령
트럭에 지원물자를 가득 싣고 두만강 세관을 향해서 떠났다. 한참만에야 조국 땅이 바라다 보이는 중국 세관에 도착하였다. 세관 검사를 마치고 막 조국을 향해 떠나려는데 세관 종업원이 급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귓속말로 전해 주었다.


“선생님. 빨리 피하십시오. 지금 북한쪽 세관에 보위부 체포조가 대기하고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슴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라구요? 다시 말해 주십시오.” "떠 이상 묻지 말고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남다. 위험하니 지금 즉시 피하시오!”


밝은 대낮에 날벼락과도 같은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체포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눈 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함께 중국 출장길에 동행한 남자 무역지도원, 승용차 밀수대금을 받아오는 임무를 받은 줄로만 알았던 그 남지도원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당에 낱낱이 보고했던 것이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일부러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두 번 반복해서 들려왔다.
“빨리 화장실로 가라.”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도 모른 채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네다.”


돈 가방만 쥐고 우선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털썩 주저 앉자 식당에서 처음 만나 성경책을 주며 말해 주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 이번 출장길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기도는 뭐고 어떻게 하는 겁네까?” 하고 묻자, “하나님!” 하고 위급 상황을 그대로 보고 드리고 도와 달라고 하면 된다던 그들의 말이 생각났다. 잠시 머뭇거리다 우선 기도로 보고부터 하였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지금 조국에서 보위부 체포조가 저를 체포하려고 기다리고 있답네다. 어떡하면 좋습네까? 가야 됩네까, 가지 말아야 됩네까? 빨리 좀 알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네다.”
너무도 간절하고 애절한 부탁의 기도가 터져 나온 순간, ‘쉬이이익, 쉬이이악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처럼 말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서는 안 된다. 빨리 택시를 타고 여기를 빠져나가 연길로 다시 들어가라.”
분명하고도 또렷이 들려오는 말소리였다. 옆 칸 화장실에서 누군가가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화장실을 온통 둘러보고 귀 기울여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무턱대고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 빨리 갑시다.” “취 나알리? 취 나알리?"(어디로 갈까요?)
운전수의 중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때 내 귀에 소리가 들렸다.
엔지.”
그 말에 그대로 씩씩하게 말했다.
엔지!” (연길)


그러자 운전수는“쉬 엉.”(알았다) 하며 택시를 출발시켰다. 차는 출발했지만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참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그들이 화장실 쪽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럼 내가 화장실을 나와 택시를 탔는데 나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한참을 달리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나를 기다리느라 안절부절못하는 남지도원의 초조한 모습이 멀어져가는 차창 너머로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이 쫓아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운전수 아저씨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뒤에서 누가 쫓아와도 차를 세우지 말고 그냥 이 속도로 달리세요!”
다급한 나는 손짓 몸짓 다 해가며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운전수 아저씨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반응이 없이 묵묵히 차를 몰아갔다. 급한 나머지 돈 가방에서 300위안을 꺼내들고 운전수 아저씨 눈앞에 흔들며 소리쳤다. “아저씨, 이 돈 다 드릴 테니 절대 차를 세우지 마시오. 알았습네까?”


돈을 보자 금세 얼굴빛이 달라져 돈을 봤다 앞을 봤다 하며 신이 나서 운전하는 아저씨를 보면서 그때서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발 무사히 도망치게 도와주십시오. 저 사람들이 오지 못하게 붙잡아 놓으십시오.”
신기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들려오는 귓속 말소리대로 행동했는데 하나님은 화장실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세관원들과 남지도원의 눈을 가려 주시어 그들의 앞을 지나 택시를 탈 수 있게 해 주셨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 주신 것이다. 이 사실도 그때는 모르고 있다가 아주 먼 훗날 나의 그날의 간증을 듣고 난 목사님들의 설명을 통해서야 깨닫게 되었다.


‘‘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 19:11).


두려워 말라
80위안이면 갈 수 있는 시내를 300위안이나 준다고 했으므로 운전수 아저씨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전 속력으로 중국 시내를 향해 내달리고 또 달렸다. 이렇게 나는 3일간의 중국 출장길에서 십일조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이 보위부 체포조의 손아귀에서 나를 안전하게 벗어나게 해 주셨던 것이었다. 결국 출장 첫날에 선물로 받아든 한 권의 성경책이 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산과 나무들, 그 모습 속에 엉켜서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쁜 옷과 신발. 계란을 사가지고 올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딸과 아들, 부모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에 처음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쳤던 십자가가 보였다. 복잡한 시내에 들어서니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다. 혹시 저 교회당은 내가 다니던 곳이어서 나를 잡으러 올 수도 있다. 안 된다. 저곳은.” 다른 십자가 집을 찾고서야 택시에서 내렸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간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며 목놓아 울고 또 울었다. 3일 출장이 아니라 석 달 출장 오게 해 달라던 나의 부탁마저 들어 주셔서 아예 석 달이 아닌 영원한 출장길이 되게 해버리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울었다.


하나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네까? 3일간의 출장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과 정든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렇게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네다. 생각도 못해 본 가족들과의 생이별의 아픔을 과연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쯤 무사히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겠습네까? 도와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네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사야 41장 10절의 하나님 말씀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성형수술
눈앞이 캄캄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갈 날이 과연 언제가 될지 눈물만 앞을 가렸다. 또 보위부 체포조가 언제 중국까지 들어와 잡아갈지도 모르는 무섭고 불안한 상황에서 이렇게 낯선 중국 땅에 홀로 남게 되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 속에서 하나님께 지금의 처지와 심경을 털어놓으며 한참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 표현하지만 그때는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단지 통곡과 간절한 부탁이었다.


한참 동안 울고불고하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의 메시지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국경 세관 화장실에서 들렸던 그 소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다가 귓속말 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 중국 조선족 신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형수술을 하여라.”


너무 놀라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고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어디서 나는 소린지, 누가 하는 소린지 한참을 살펴보아도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교회당 정면에 십자가만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조선족 무역 대방들을 통해 조선족 호구를 (주민등록증) 사게 되었고 성형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하였다. 성형병원 의사 선생님이 호구의 사진을 보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더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하는데, 이 사진 속의 사람처럼 만들면 미워질 텐데. 성형은 이뻐지자고 하는데?” “아님네다. 사람들이 내 얼굴만 알아보지 못하면 됩네다.”


겨우 상담을 마치고도 의사 선생님은 못 마땅해하셨다. 즉시 수술에 들어갔다. 세 시간여의 수술이 끝나고 병실에 와서 거울을 보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쭉 찢어져 올라가 사납고 무섭게 변해 버린 완전히 딴 사람의 얼굴이었다. 너무 놀라 거울 속에 비친 한심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하소연했다.


하나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네까? 얼굴 때문에 어려서부터 어버이 수령님의 총애를 받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중국 3일 출장 동안도 내 얼굴을 보며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했고 그래서 노래를 불러 많은 돈을 받기도 했습네다. 이렇게 한심한 얼굴을 보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달아나겠습네다. 앞으로 이 무서운 얼굴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입네까? 제발 밉지만 않게 고쳐 주십시오.”


그때부터 병실에서 링거를 꽂은 채로 제발 얼굴이 입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집중적으로 기도부탁을 시작했는데, 수술 후 5일이 지나면서 얼굴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더니 본래의 내 얼굴 모습은 아니었지만 입지 않을 정도로 바뀌어 갔다. 어찌나 고맙던지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하루는 시장을 지나다 평양에서 온 무역지도원과 마주쳤다. 평소에 잘 알고 가깝게 지냈던 남편의 친구가 아닌가! 나는 그를 보고 몹시 반가워서 마치 평양에서 만난듯이 소리쳐 불렀다.
승범철 지도원 동지!”
그런데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주변을 휘둘러 이 사람 저 사람 살펴보더니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왜 모르는 척할까?’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참 내 얼굴이 바뀌었지!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못내 서운했지만 그래도 내 얼굴을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염없는 눈물로 애곡하는 나의 기도 부탁을 들어주신 것이었다. 3천6백 위안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돈을 더 많이 부풀려 달라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 어떤 큰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지켜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이것이 시련의 시작이었음을 그리고 시련과 역경으로 위장된 고통의 포장 속에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그 오묘하신 계획과 섭리가 계시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야곱아 너를 향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엡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苦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위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딸에게 쓴 눈물의 편지
사랑하는 딸 현희에게!
현희야! 엄마가 정말 잘못했다. 계란 많이 사다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정말 나쁜 엄마가 되었구나. 눈물 흘리며 먹고 싶어 하던 그 계란이 이다지도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힐 줄 알았더라면 그때 기어코 네 입에 넣어줬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지금 이 가슴이 이렇게 찢어지지는 않을 것을.
3일 밤만 자고 돌아올 때 고운 연주복에 꽃신 사다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이 엄마를 용서해 다오! 계란이랑 꽃신이랑 사탕 과자 사다 준다고 했을 때 “정말이야! 우리 엄마, 만세! 만만세!” 하며 그리도 좋아서 깡충깡충 뛰면서 할머니 집 대문 밖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엄마는 지금 낯설고 산 설고 물 설은 이국 땅에서 사랑하는 너의 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망명객의 신세가 되어 버렸구나!
사랑하는 내 딸아!
우리의 이별이 언제까지일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엄마가 자리 잡돈 많이 벌어서 우리 딸 맛있는 사탕과자랑 고운 옷 많이 보내 줄게. 언젠가 당에서 엄마의 죄 없음을 인정해 줄 때 조국으로 돌아가 그동안 너에게 주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다 안겨 줄게! 엄마 만날 때까지 학교도 잘 다니고, 아코디언 열심히 배우고, 알았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오빠와도 잘 지내거라.
보고 싶은 딸, 사랑하는 딸 현희야! 그럼 안녕히…….


거리에서나 식당에서 내 딸 또래의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손잡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딸에 대한 그리움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매일 밤 쓰고 또 쓰곤 했다.


눈물로 쓴 편지는 수없이 쌓여만 갔다. 딸에게 편지라도 쓰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식당에서 냉면 그릇 위에 떠 있는 손님들이 먹지 않고 남긴 계란을 볼 때마다 그 계란 반쪽에 사랑하는 딸의 얼굴이 둥둥 떠다녀서 목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염없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중국 사람들은 먹기 싫어 버리는 계란을 가난한 나라의 어린 자식에게조차 먹일 수 없다는 아픔과 함께 생이별의 고통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갔다.


시간만 되면 십자가가 서 있는 교회당으로 찾아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픔이 너무 큽네다. 언제 만날 수 있습네까? 언제까지 이렇게 헤어져 지내야만 합네까? 아버지 하나님! 언제 조국 땅으로 돌아갈 수 있습네까? 언제까지 이렇게 숨 막히게 살아야 합네까?” 몇 시간이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
사랑하는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내가 너를 지켜 주리라.”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그 목소리, 위로의 말씀을 받고 한없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교회당을 나오곤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나를 지켜 주신다.’

 


하루의 시작은 십일조의 시작
‘돈을 벌어서 십일조를 바치자. 그러면 하나님은 항상 부풀려 주신다. 그러면 고향에도 돈을 보내고 두만강 건너에서 죽어가는 왜가리 부대에게 옷도 보내고 쌀도 보내자.’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식당을 시작할 마음을 먹었다. 중국 출장 3일 동안 노래 불러 번 돈, 바친 십일조를 부풀려 주신 그 돈으로 우선 120평 되는 건물을 얻어 식당을 시작하였다. 개업하자마자 넓은 식당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밀려왔다. 정신없이 영업에만 전념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하루의 시작은 십일조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고, 부풀려 주시기 때문이었다. 또한 돈만 있으면 저 죽어가는 인민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십일조는 제1의 생활 준칙이었고 하루 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매일 아침이면 어제 영업해서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는 교회당에 찾아가 십일조를 바쳤다. 참 감사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달라고 한 대로 부풀려 주셨다. 정말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다.


그때부터 식당에 오는 단골손님들에게 십일조 선전을 하기 시작했고 북조선 친척방문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북조선 친척을 돕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경비로 드는 돈을 다 대주고 쌀, 옷, 옥수수를 비롯한 지원물자들을 누구에게라도 상관없이 자동차들이로 내보내어 아무에게나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내 집이 아닌 죽어가는 북조선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그 당시 유일한 나의 기쁨이었고, 그와 같은 사명으로 나의 가슴은 불타올랐다.


아니? 이렇게 많은 쌀과 돈들을 내보내도 조선 세관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제대로 전하겠슴까?”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해도 불쌍한 우리 조선 사람, 아무 사람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나는 마음이 기뽑네다.”


정말 그때 나는 식당일을 해서 번 돈으로 십일조를 바치는 일과 부풀려 주신 돈으로 조국에 쌀과 물자 보내는 재미로 가족들과의 생이별의 아픔을 견디어 나갔다. 사실 지금까지 내 자랑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식당영업을 하면서 조선으로 보낸 지원물자는 도문/남양 세관 2트럭, 칠성/무산 세관 1트럭, 훈춘/라진 세관 2트럭, 삼합/회령 세관 1트럭, 개산툰/삼봉 세관 2트럭’이었다. 이 많은 양의 지원물자를 나 혼자의 몸으로 누구에게라 할 것없이 조선족들을 시켜서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물질의 축복, 십일조와 함께 부풀려 주신 그 사랑, 나를 통해 죽어가는 저 북녘 동포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두만강을 건너온 아들
그렇게도 가슴을 아프게 하던 딸에 대한 생각조차도 잊어버릴만큼 분주하게 식당을 운영하고 지원물자를 이름도 없이 조선족들을 시켜 내보내며 바삐 보내던 어느 날 새벽, 룡정에 살고 있는 친척 집에 갑자기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웬일인지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조심스럽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시오!” “니 쓰세야?” (누구야?)
전화기 저편에서 큰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큰엄마, 접네다. 명수 엄맘네다.”
뭐라구? 어떻게 알구 전화했소?” 하며 놀라는 것이다.
아니 왜 그럼네까? 무슨 일 있었습네까?”
있다마다. 명수가 지금 여기 와 있소. 온 지 일주일이나 되는데 명수 엄마 행처를 몰라 명수를 도루 조선에 보내려고 속을 태우고 있는 중인데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소” “네, 갑자기 큰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했습네다.” “정말이오? 아이고 신기해라. 명수 엄마, 점이래도 쳤소?’


가슴이 철렁했다. 큰엄마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서도 너무 놀라웠다. 그랬다. 새벽에 갑자기 큰엄마 집에 전화를 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부라부랴 룡정으로 갔다. 큰엄마 집에 가보니 과연 조선에 있어야 할 아들 명수가 와 있었다.


명수야, 어떻게 된 일이야?” 나를 쳐다보면서 의아해하는 아들! “우리 어머니 맞습네까? 왜 얼굴이 이상합네까? 목소리는 맞는데 얼굴은 영 딴 판입네다.”


그래, 명수야, 보위부에 체포될까 봐 얼굴 수술을 했단다.” “그럼 아부지랑 현희가 몰라 보면 어접네까?” “그래도 엄마가 안전하자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단다.” “그래도 그렇지 얼굴이 입습네다.”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아들 명수는 영 서운한 표정이었다. “엄마, 아버지 말씀이 지금 국경에서 보위부 체포조가 어머니를 체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오시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셔서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왔습네다.” “뭐라구? 그럼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니?” “두만강을 헤엄쳐서 왔습네다. 전화번호는 할아버지가 적어 주셔서……”


어린 아들이 거기까지 온 것이 참 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예상은 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을 듣고 보니 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명수가 개학을 앞두고 있어 빨리 조선으로 보내야 했다. 며칠동안 룡정 시내 구경도 시키고 옷도 사 입히며 먹을 것도 사 먹인 후 보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마침내 수소문하여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가 골동품을 사 들여오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보낼 날을 정해 놓고 나니 명수가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며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어머니, 나 안 가고 싶어요.” “명수야! 너는 돌아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 싫습네다. 무서워서 두만강 못 건너요.” “두만강을 혼자서 건너온 애가 무섭다는 게 말이 되니?” 올 때는 어머니를 꼭 만나야 했기에 목숨 걸고 왔지만 가는 건 무서워서 못 가겠어요.”


그래도 너는 공부를 해야 되지 않니? 할아버지 대원수님은(김일성) 너처럼 열 두 살 어린 나이에 빼앗긴 ‘조선을 찾자면 조선을 알아야 한다’ 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혼자서 팔도구에서부터 만경대까지 일본 놈들한테 신음하는 조선 인민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 찾을 큰 뜻을 품고 배움의 천리 길을 걸으셨기에 위대한 령도자가 되지 않았느냐? 너도 앞으로 위대한 수령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자면 엄마 말대로 돌아가서 공부를 마쳐야 한다. 엄마가 돈을 벌어서 네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돈이랑 먹을 거랑 많이 보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저씨 따라 가도록 해라.”


명수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내가 더 컸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아픈 가슴을 억제하며 억지로라도 아들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명수를 겨우 설득시킨 후 골동품 장수에게 돈을 주고 업혀서 두만강을 건너보내기로 하고 부모님과 남편, 그토록 꿈결에도 잊지 못하며 보고 싶은 딸 앞으로 돈과 편지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를 용서해다오. 엄마 혼자 잘 먹고 잘살자고 이러는 것이 아니란다. 아직은 네가 나이가 어려서 알지 못하는 심각한 일들 때문에 너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단다. 딸아, 엄마 마음이 너무 아프고 찢어질 것만 같구나. 엄마는 너를 공에서라도 보고 싶어 밤마다 네 생각을 하며 자리에 눕지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한단다. 엄마가 곡 약속 지킬게. 그리고 곱게 커다오. 미안하다. 어서 하루 빨리 만날 그날을 약속하며……. 엄마 보냄.”


만약의 경우 국경 보위부에 잡힐 염려 때문에 짧은 편지를 몇 자 적어 돈과 함께 명수 속옷 깊숙한 곳에 만든 주머니에 감추어 넣어 주었다. 명수를 업고 두만강 물에 들어선 골동품 장수가 천천히 헤엄쳐 가는 모습을 떨리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았다. 등에 업힌 명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무사하기만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들이 두만강을 건너간 지 며칠 후 새벽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하얀 머리에 하얀 옷을 입고 기다란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하였다.
얘야, 빨리 룡정으로 가거라. 거기에 귀한 사람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전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상한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룡정 친척 집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북조선에 있어야 할 아들 명수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수야!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떠듬떠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두만강을 건너간 명수는 할머니 집에서 아침을 먹고 열차를 타려고 기차역에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보위부 지도원들에게 체포되었다. 12세 어린 나이에도 뭔가 잘못될 것 같은 낌새를 알아차린 명수가 조사를 받던 도중에 변소 갔다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 즉시 두만강을 헤엄쳐 건넌 후 중국으로 도망쳐 다시 룡정까지 돌아온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렇게도 보고 싶고 그리웠던 딸이 함께 왔으면 하는 생각에 너무 아쉬워 다시 물었다.


명수야! 왜 동생은 데리고 오지 않았니?” “어머니, 보위부 조사를 받다가 변소에 가겠다고 하고 보위부 지도원이 변소 앞을 비우는 사이에 바로 도망을 쳤어요. 현희를 데리고 올 생각은 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러면 먼젓 번 올 때에는 왜 안 데리고 왔니?’
현희는 내 말을 안 들어요. 그리고 겁이 많아서 두만강 못 건너겠다고 했어요. 물이 제일 얕은 데로 골라서 데리고 떠났는데 물에 들어서서는 무섭다고 막 울어서 군인들한테 잡힐까 봐 다시 데리고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 후 아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낼 마음을 접고 중국 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명수는 날이 갈수록 중국 생활에 잘 적응해 가면서 더욱 건강해졌고 공부도 잘했다. 감사의 기도제목들이 늘어나면서 마음의 슬픔도 줄어갔고 하나님 앞에 더욱 진심으로 참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알고 받은 것보다 모르고 받은 것이 더 크고 많았다. 성경 말씀도 몰랐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현장실습으로 축복의 비밀을 직접 가르쳐 주고 계셨던 것이다.

 

21세기 라이브 식당
동북삼성의 돈을 저 여자가 끌어 모은다.” 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내가 운영하는 ‘21세기 라이브 식당’은 대인기였다. 120평이 되는 식당은 늘 좌석이 모자랐다.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동포들의 사랑이 넘치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소문이 나자 중국에서 방황하던 탈북 여성들이 하나 둘 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식당에 찾아오는 동포들의 입을 통해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한 여성들이 중국 사람들한테 팔려다닌다는 처참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막상 본인들을 통해 피눈물 나게 팔려다니던 이야기와 가슴 아픈 가족들 이야기를 들으니 더는 마음이 아파 들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듣고 보니 우리 가정의 이별과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찾아오는 여성들 중 몇 명을 동생으로 삼아서 데리고 있기로 하고 아파트를 구입해서 함께 생활하며 식당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동생들도 기뻐하였고 손님들도 조선 여성들이 서빙하는 것을 모두 좋아하며 너도나도 팁을 주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접한 동생들은 돈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미안함과 고마움에 당황스러워하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받으라고 했다.


하루는 저녁에 식당 청소를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데 동생들이 물어왔다.
“로반(사장) 언니! 언니는 조선족인데 딱 조선 사람 갔슴다. 평양 말도 하는 것 같구. 또 어떤 때는 함경도 말두 하구요. 우리 북조선 사람 아임까?"
“그래 맞아. 식당을 하려니까, 조선족 호구를 만들었단다.” “언니! 무섭지 않습네까? 이렇게 식당을 하는 것이?’ “언니는 무섭지 않슴까? 우리는 언니가 간첩인 줄 알았습네다.”


동생들은 참 촌스런 연변 말을 잘하고 있었다. 말씨는 오히려 그들이 조선족이었다.


“나도 너희들과 꼭 같은 조선 사람이고, 출장을 왔다가 이렇게 식당까지 하게 됐어. 그리고 돈은 십일조라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부풀려서 주신다고 하기에 바쳤더니 정말 내가 부탁한 대로 부풀려서 받게 되어 식당까지 하게 되었단다.”


내 이야기를 듣고 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언니는 그럼 하나님 만나 봤슴까?”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슴까?” “우리 어버이 수령님보다 더 잘 생겼습데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내가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십일조를 바치자고 권했다.


“얘들아! 우리 다 같이 내일 십자가 집으로 가자. 십자가 집에 가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고 부풀려 달라고 기도하자!” “언니! 기도라는 건 뭐임네까?”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음, 기도는… … 아! 부탁이야!”

나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순간 내 부탁을 다 들어주신 하나님이 생각났고 정말 기도는 부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튿날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 하나님께 십일조 바치러 가자고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동생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십일조를 바치러 가던 교회당으로 갔다. 교회당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버릇대로 십일조를 바치던 교회당 긴 의자 맨 뒤에 놓여 있는 나무 상자 앞에 이르러 동생들과 나무상자를 중심으로 손을 잡고 빙 둘러섰다.


“얘들아! 내가 이제부터 기도를 하면 너희들은 마음속으로 부풀려 달라고 하고 싶은 대로 부탁을 하여라.”
“하나님! 중국 땅에서 정처 없이 팔려 다니며 온갖고생을 다 하다가 우리 모두 이렇게 만났습네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부풀려 주신다고 얘기했더니 동생들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해서 함께 왔습네다. 부탁드립네다. 이들의 부탁을 꼭 들어주셔서 부풀려 주십시오. 꼭꼭 부탁드립네다.”


그 후로 동생들은 영업이 끝나면 자기들이 받은 팁의 액수를 세어 보고는 정말 부풀려 달라구 한 대로 불어났다면서 “참 이상두 하지. 하나님은 어디 계시기에 이렇게 부풀려 주실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십일조를 계속해 보자고 했다.


고향을 떠나 넓고 넓은 만주광야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니며 떠돌다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에서 누리게 된 자유와 지금의 십일조 생활 때문에 재미있어 했고 행복해했다. 동생들은 ‘어쩌다가 우리에게 이런 행복과 즐거움이 찾아왔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날마다 수입이 늘어나는 재미와 기쁨에 푹 빠져 식당에서 하는 일을 전혀 힘들어하거나 피곤해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늘 동생들에게 모든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하루 일과의 철칙으로 십일조 생활을 강조했다. 우리에게 날마다 기쁨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고마워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인가 답례를 드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 만세’ 와 ‘암 그렇구 말구’
우리가 어떻게 해드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까?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동생들과 성경공부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성경공부를 하려고 하니 성경에 적혀있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웠으나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우선 성경책 맨 앞쪽에 있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맨 뒷장에 적힌 십계명을 모두 암송했다.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나 끝낼 때 그리고 밥을 먹을 때면 늘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어느 날 기도를 마치려는데 동생들이 나한테 물었다.

“언니, 할렐루야가 무슨 말입네까?”
“으응!”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 자신도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남들이 하기에 그냥 따라한 것뿐인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다. 한참 동안 동생들 얼굴을 쳐다보다가 하나님께 물어보기로 했다.
“하나님, 할렐루야가 무슨 말입네까? 동생들이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합네까? 빨리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만세!’라고 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할렐루야는 ‘하나님 만세’라는 뜻이란다.”


그랬더니 한 동생이 또 질문했다. “그럼 언니! ‘아멘’은 무슨 말입네까?”
이번엔 “하나님 아버지, 아멘은 뭐라고 가르쳐 줄까요?” 했더니 “’암 그렇구 말구’라고 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멘은 ‘암 그렇구 말구’라는 뜻이란다.”


“근데 왜 어려운 외국말을 쓸까요?” “하나님이 외국에서 태어나셔서 그렇겠지 뭐!”
이때 ‘정미’ 라는 동생이 말했다.


“언니, 언니는 꼭 목사 대학 나온 사람 같습네다. 어떻게 그렇게 아는 것도 많고 우리가 묻는 것마다 척척박사처럼 막힘도 없이 대답을 잘 합네까? 혹시 언니가 예수님 동생 아임네까?”
“앤 큰일 날 소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데.” 정미의 말에 다른 동생들도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다. 성경지식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쑥스러워하며 겨우 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언니에게 귓속말로 가르쳐 주셔서 그렇게 말한 것이야. 너희들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기도해서 물어보면 대답해 주실 거야.” 이렇게 어린 왕초보 신앙생활에 우리 스스로도 웃음보를 터트렸다.


어쨌거나 앞으로는 어려운 외국말로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쉬운 우리말로 ‘하나님 만세’, ‘암 그렇구 말구’라고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합창으로 ‘하나님 만세’를 세 번씩 외치고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고, 기도를 마칠 때는 '예수님 이름 받들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암 그렇구 말구!’라는 합창으로 마무리를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성경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예수님 오빠와 세 누이동생
하루는 성경공부를 마치려는데 동생들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면 우리가 버릇없이 존칭을 붙이지 않고 그저 ‘예수님’ 하는 것이 미안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 뭐라고 하면 좋습네까? 위대한 예수님? 친애하는 예수님?” “아, 그건 이상하다. 조선에서 하는 대로 하는 건 이상합네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형제가 아닌가요?"
“아! 그럼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한 형제니까 예수님을 우리 오빠라고 부르면 좋지 않겠습네까?”
“그래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내가 동의했더니 우리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 동생 ‘은주’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언니들은 나이가 있으니까 예수님을 오빠라고 부르면 되겠지만 나는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버릇없이 오빠라고 할 수 있습네까? 나는 ‘아저씨’ 나 ‘삼촌’ 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습네까?

그래 은주야, 너는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아저씨보다 ‘예수님 삼촌’ 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네!
좋습네다. 나는 삼촌이라고 부르겠습네다.”
“호호호호. 하하하. 깔깔깔.”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된 우리는 모든 시름을 다 잊고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 당시 조선 보위부 공작원들이 중국 교회에 진을 치고 있다가 탈북한 사람들을 색출해내면 중국 공안이 체포하여 버스로 실어간다면서 교회에 나오면 위험하다고 하여 교회에 나갈 수 없었고 십일조를 바칠 때에도 교회 재무과에 찾아가서 직접 바쳐야 했다. 목사님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성경 말씀을 배울 수 없었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직접 물어 가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오빠 와 삼촌’으로 우리들 마음대로 부르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교회에 찾아가서 목사님 방으로 무작정 들어가려고 하자 목사님은 당황하며 우리를 다짜고짜 복도 쪽으로 밀어냈다. “목사님,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네다. 설명을 좀 해 줄 수 없습네까?”


“안 됨다. 큰일 남다. 잡혀가면 우리가 책임질 수도 없고. 어젯 밤에 잡혀간
26명 때문에 벌금이 1인당 중국 돈 2,800위안씩 나왔는데 중국 공안원들이 지금 내 방에 벌금을 받으러 와 있슴다. 당장 교회가 문을 닫게 생겼슴다. 당신들도 저 사람들 눈에 띄면 체포되니 빨리 여기서 나가시오.”


목사님은 우리를 급히 내보내고 황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 말에 우리도 겁이 덜컥 나 줄행랑을 쳐서 교회당을 빠져나왔다. 우린 이렇게 생명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사모하였지만 말씀의 문턱도 넘어서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생들 중의 명순이는 의심이 많았고 미신을 더 믿었다. 그래서인지 십일조 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이었다.


“언니가 돈 복이 있어서 장사가 잘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지 무슨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돈을 부풀려 주신다구 그립네까? 십일조로 바치는 그 돈을 조선으로 보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네까?”


“이 무슨 막말인가? 하나님이 들으시고 노여워하시면 어떡하려구 저런 말을 하지?”


나는 속이 상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동생들은 ‘명순이’를 사탄이라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명순이의 말에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생활의 철칙으로 삼았던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하루 영업을 시작하였다. 하루는 그 문제를 두고 기도를 하는데 “이름을 바꾸라!”라는 소리가 강하게 들려왔다. 나는 지체 없이 동생들을 모아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딸들로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났습네다. 하오니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에게 새 이름을 주십시오!’’

기도를 한 후 우리들의 새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오빠이신 예수님의 ‘예’ 자를 따서 먼저 하나님을 알고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내 이름은 ‘먼저 선’ 자를 넣어 ‘예선’이라고 하고, 첫째 동생은 믿음이 약해서 미신을 믿으니 하나님만 똑바로 바라보며 살라고 바를 ‘정’ 자를 써서 ‘예정’이라고 지었다. 둘째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라고 ‘예삼’이, 막내는 착하고 믿음도 좋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예림’이라 지었다. 재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내 입에서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새 이름을 가진 우리는 기쁘고 즐거웠다. 모두 자기의 이름이 정말 마음에 꼭 든다고 했다.


언닌 어찜 이름도 멋있게 잘 짓습네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오빠 이름 따라 지었는데 어쨌든 마음에 든다니깐 좋아!”
우리 새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드리자!” 하고는 서로 손을 잡고 “하나님 만세!” 삼 창을 외치고 내가 대표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고맙습네다. 이렇게도 좋은 새 이름을 주신 하나님. 예선이. 예정이. 예심이. 예림이 하나님의 딸들로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새롭게 태어났습네다. 이제부터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 아버지 것이니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이 중국 땅에서 지켜 주실 것을 굳게 믿겠습네다. 예수님 오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동생들은 내 기도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잡은 손들을 위로 올리며 합창을 했다.
암 그렇구 말구요!”


기도가 끝나자 우리는 매우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웠다. 성경 말씀도, 주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다는 의미도,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새로운 이름에 모두가 만족했다. 사실 서로 자기들 이름이 촌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쁜 이름을 짓고 나니 이제야 정말 예수님의 동생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딸들이 된 것에 감사했다. 이렇게 우리들의 신앙은 어렸지만 고난 속에서도 행복한 신앙 생활의 기쁨을 함께 누려가기 시작했다.

 

체포
식당을 운영하며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이른 새벽,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문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 “광 쾅 광!” 몇 시쯤 되었을까? 부서질 듯 두드려 대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가 보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렇지 않아도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숨을 죽이고 있던 동생들이 놀라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얘들아, 우리 집 문 두드리는 거 맞지?”
“네, 언니. 문 열지 마세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하도 요란해 문을 열어 볼 수가 없었다. 모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또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온 아파트를 흔들어 댔다. 그 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이번엔 웬 한족 여자의 다소 조용한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언니, 위생비 받으러 왔대요.” 예림이의 통역에 우리 모두에게서 동시에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얘들아, 언니가 나가볼 테니까 너희들은 방문 꼭 잠그고 있어. 혹시 어떤 상황이 되어도 문을 열지 마. 내가 열라면 열구.”


그리고는 혹시라도 바깥 상황을 몰라 우선 신발들을 모두 신발장에 넣고 나서 잠옷 바람에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나의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 복도에는 위생반장이라는 여자 한 사람이 세 명의 공안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소름이 끼치다 못해 하마터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뻔했다.


일본군 순사처럼 차가운 눈길로 무섭게 나를 보던 공안 한 사람이 신분증과 호구부를 보자며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중국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호구부와 신분증을 보자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입가에 여유 있는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잠깐만요.” 하고는 문을 닫아 걸어 놓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질렀다.


“하나님이시여! 살려주십시오!”


‘잡히더라도 나 혼자 잡혀야 해! 동생들까지 잡히면 안 돼!’ 앞 뒤 가릴 시간이 없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급하게 동생들을 옷장 안에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들만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신분증을 가지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니 밖에는 공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고 있던 나는 중국 공안원들의 억센 팔에 떠밀려 짐짝처럼 차에 태워졌고 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어디론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그렇게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장 통의 장사꾼들, 빠르게 질주하는 차량들의 모습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한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타국 땅에서 자유를 빼앗긴 채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나! 몽롱해지는 의식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악몽 같은 끔찍한 그 순간! 얼마나 달렸을까?


‘아! 기도! 그래, 기도해야지. 하나님, 이 일을 어떡합네까?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릅네다. 다만 중국 공안에 붙잡힌 것은 분명한데 조선의 지령을 받고 체포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네다. 무섭습네다.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저를 조선에만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반복해서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아파트에 남아 있는 동생들이 옷장에서 나와 빨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고 있을 때 ‘북부 공안 지구대’ 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빈방으로 데리고 가서 나를 의자에 앉히고 팔걸이에 달려 있는 수갑을 손목에 채우더니 조사를 시작했다.


‘니 찌아오 션머 밍쯔?’ (네 이름이 뭐야?)


당황스러웠다. 조사관이 한족이라는 (중국인) 것이 두려웠다. 아직 나의 중국말 실력은 겨우 인사말을 하는 정도였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습네까? 한족말로 자꾸 물어보는데 어떡하면 좋습네까? 제발 조선족 조사관으로 바꿔 줄 수는 없습네까? 도와주십시오! 마음속으로 기도를 마쳤는데 조사관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선에서 무슨 임무를 받았는가? 조선 공작원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겁도 없이 조선 노래까지 부르며 식당영업을 할 수 있는가?” 어안이 벙벙해서 조사관의 얼굴과 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분명 한족인 줄 알았는데 조선말로 물어보지 않는가! 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조사관의 마음을 바꿔 놓았구나!”


네가 부블 때에는 나 여主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징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9).


조사를 받으며 조선 보위부와 미리 짜고 한 체포가 아니 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7시부터 시작한 조사가 10시까지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아침 출근 팀과 교대하면서 지구대 대장이라는 사람이 인계를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조사받은 내용대로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이대로 조선으로 넘겨지는 것입네까? 조선으로 가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네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제발 조선으로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데 끼 순간을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된다. 이들이 시키는대로만 하다가 북송되고 말 것인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목숨을 걸고 무엇인들 못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심장으로부터 용기가 솟아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저, 대장 동지! 벌금을 내라는 대로 다 내겠으니 제발 북조선으로만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내심 나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어느새 내뱉는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강한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담배를 피우려는 듯 담배와 라이터를 찾던 대장은 자신감 넘치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는가 싶더니 반응을 보였다.


“돈 많이 벌었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장이 다시 물었다.
“그럼 벌금은 얼마나 할 수 있어?” “하라는 대로 하겠습네다.”
내 말이 떨어지자 잠시 방을 나갔던 대장이 다시 들어오며 물었다.
“벌금
5천 위안 할 수 있어?”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벌금 액수가 너무 적어서 내가 너무 긴장한 탓으로
5만 위안을 5천 위안으로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사실이었다.
“전화를 해서 돈을 만들어 보겠습네다.”


내 말에 대장은 잠시 나의 눈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돈이 많은 모양이지!”

대장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금 5천 위안을 직원을 통해 보내왔다. 돈을 받아 든 대장은 얼굴빛이 환해지더니 말했다. “벌금 냈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돼! 그리고 다시는 잡히지 말라구! 다시 잡히는 날에는 재미없어!”


대장은 나를 풀어주었다. 벌금을 내고도 남을 큰 돈을 동생들한테 맡겨 놓았으나 혹시라도 동생들이 돈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가 잡히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건물 주인한테 벌금 낼 돈
5천 위안을 부탁했던 것이다. 빨리 도망치라는 대장의 말을 뒤로 하고 정신없이 허둥지둥 지구대 방을 빠져나왔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이 넓고 넓은 중국 땅에서도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우선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를 타고 다람쥐처럼 한참 동안 시내를 돌면서 어디에 내려야 할지 정신없이 앉아 있는 데 기사 아바이가 물었다.
“어디 감까?” 이미 풀려난 몸이었지만 정신이 혼미해서 택시에 앉아 내릴 생각이, 아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디 감까?” 또다시 재차 묻는 운전수 아바이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바이! 십자가 있는 집에다 내려 주십시오.”
“교회 말임까?” “네, 교회당이오.”


교회당 안에 들어가자마자 십자가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미 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네다. 정말 감사합네다. 구원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네다. 이 넓고 넓은 중국 땅 천지에 우리가 마음놓고 자유롭게 살아갈 곳은 정녕 없습네까? 동생들의 신변도 걱정입네다. 동생들이 무사할 수 있게 지켜 주십시오. 마음속으로 드린 그 기도를 들어주신 고마우신 하나님! 진정 고맙고 감사합네다!”

 


떼어먹은 십일조
교회당 안에서 소리쳐 기도를 하던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왜 내 십일조를 떼어먹었느냐? 왜? 왜?”
“아!
5천 위안.”


그랬다. 며칠 전부터 그렇게 재밌게 바치던 십일조를 놓고 동생들이 옥신각신 다투었다. “언니, 십일조 내는 돈 너무 아깝습네다. 하나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계속 나무함에 집어넣고 오면 그 교회당에다 좋은 일만 합네다. 매일 바치지 맙세다.” “글쎄!” 하고는 십일조
5천 위안을 한 번 바치지 않았는데 그 이튿날 이런 기막힌 봉변을 당하였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인데 그 5천 위안을 내가 가지려다가 그 무시무시한 북송 길을 대신해 벌금으로 때우고 말았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나의 수준에 맞게 십 일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십일조를 통해 신앙 훈련을 시켜주신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 비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그렇게 혼이 나서 목 놓아 엉엉 통곡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동생들 생각이 들었다. 교회당에서 나와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아파트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동생들은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었다.


“얘들아, 언니야 언니!”
그제야 동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달려 나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모두 부둥켜안은 채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우린 언니를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슴다. 그런데 어떻게 무사히 돌아왔슴까?”

얘들아! 글쎄 공안에 잡혀가서 3시간 동안 조사받으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소리도 못 내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드렸더니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분명 들으시고 도와주셨단다. 이제부터 우리 십일조는 처음처럼 절대로 떼먹지 말구 바치도록 하자! 떼먹은 십일조 5천 위안을 벌금 5천 위안으로 바치구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단다.”
“세상에 어찜 그런 일이.”


동생들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고 겁이 나서 다시는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들은 꼭 하나님께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굳게 굳게 다짐하면서 다 같이 마음을 합쳐 기도를 올렸다.

 

북송되어 가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딸을 지켜 주시고 그 무시무시한 중국 공안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네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의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겠으니 우리를 중국 땅에서 지켜 주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약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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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순영, 축복의 나라로, 제1권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