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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 우병훈 교수의 책에 대한 정이철의 서평

중일사랑 2022. 5. 10. 21:01

고신 총장님! 우병훈 교수의 언약신학이 마음에 드십니까?

 정이철

 


고신 우병훈 교수의 책에 대한 정이철의 서평

 

우병훈 교수는 서울대(자원공학)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M.Div)을 처음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시간 주의 칼빈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Ph.D) 취득했고 현재 고신대학 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앞으로 우병훈 교수는 고신의 신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될 것이고, 한국 교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비록 필자는 우병훈 교수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지만, 우병훈 교수 같이 탁월한 분이 성경적이지 못한 것을 가르치면, 한국 교회와 신학생들에게 돌아갈 그 피해가 클 것이므로 부득이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이 글을 고신의 총장님과 교수님들께서도 보신다면, 그리고 이 글에 부당한 내용이 있으면, 괜한 문제를 일으키는 필자를 크게 공개적으로 꾸짖어 주시기를 바란다. 

 

어제 우병훈 교수의 <그리스도의 구원>(SFC, 2014)을 다 읽었다. 일단 머리말을 소재로 이 글을 쓴다. 우 교수가 그 책 전체에서 전개하는 내용이 머리말에 요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경의 언약에 대한 우 교수의 우려스러운 말들을 보았다.

 

“성경을 보면, 어떤 곳에서는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런데 또 성경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저는 이것을 예정과 언약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일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약속으로서, 그 약속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병훈 교수)

 

예정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받을 자들을 택하심이다. 택하신 자에게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베푸시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겉보기에 인간이 믿음을 택하여 구원을 길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구원에 대한 공로, 자격을 주장할 것이 없다. 그런데 우 교수는 인간이 노력하여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고도 성경이 가르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뜻하지만, 성경의 다른 내용들은 구원을 위한 인간 편의 조건, 행위, 역할에 대하여 가르친다는 것이다. 

 

필자는 우병훈 교수가 심각한 신학적 혼란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성경에 구원을 위한 인간의 노력, 조건, 역할을 강조하는 말씀이 있는가? 그런 내용이 있다는 주장은 성경의 구원의 진리를 파괴하는 알미니안 계열 신학자들이 하는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위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응, 조건, 역할, 순종을 중시하는 내용이 없다. 대게 성화에 대한 말씀을 곡해하여 구원과 관련시키는 실수에서 나온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약속으로서, 그 약속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병훈 교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조건)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인간이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규정하는 것이 기독교의 언약이라고 우병훈 교수는 주장하였다. 매우 비성경적인 언약 이해이다. 성경의 언약은 구원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에게 구원을 찾으라고 주시는 언약이 아니다.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필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은혜 안에서 창세전에 확실하게 구원을 예정한 택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떠맡기시는 명령형의 선물이다. 이것이 성경의 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그 약속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병훈 교수)

 

우병훈 교수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제시하는 조건에 대해 인간이 신실하게 반응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 사상이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그 방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도 그 방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우병훈 교수는 구원과 언약에 대한 이상한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개혁 핵심 사상과 하나님이 제시하는 조건에 대한 인간의 동의, 승낙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언약이 성립된다고 가르친 회중파 청교도들의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회중파 청교도들은 앞에서는 칼빈주의, 즉 종교개혁 구원론을 강하게 말하고, 뒤에서는 인간의 반응과 역할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를 가르쳤다.
 

우병훈 교수의 저서

 


“예정론은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결정하시며, 인간의 노력은 구원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언약론은 구원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근거하며, 인간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고 언약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병훈 교수)

 

‘개인경건’을 강하게 증진시키기 위해 윌리엄 퍼킨슨, 리처드 십스, 존 프레스턴 등의 회중파 청교도들의 언약 사상이 곧 우병훈 교수의 언약 신학인 것 같다. 종교개혁을 그르친 회중파 청교도들은 칼빈의 예정론이 사람들에게 영적인 나태, 신앙의 수동성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각 개인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발바닥에 불 나도록 일하게 만드는 신학적 동력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회중파 청교도들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율법 준수에 실패하여 저주 받은 상태로 태어났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은혜언약으로 이동되기 위해 각 사람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하고, 자신들에게 조건과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구원 받도록 예정 받은 사람이고, 또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똑 같은 사상이 우병훈 교수에게서 나타난다.

 

“인간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고 언약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우병훈 교수)

 

우병훈 교수는 ‘인간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언약 사상을 성경에서 보지 못한다. 우병훈 교수는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하여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계속 말씀 순종이라는 고무줄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가?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하나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조건이 충족됨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는 것 하나만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가 행하신 완전한 속죄와 그리스도가 얻으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의 것으로 인정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믿음 외의 다른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읽기, 기도하기, 헌금하기, 순종하기, 선교하기 ...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만 요구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 만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이루신 언약 조건이 믿는 자의 것으로 인정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는 다시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의 능력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병훈 교수는 망령된 말을 하는 것인가?

 

“칼뱅과 바빙크 둘 다,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이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기반이 되어서 언약적 삶이 시작될 수도 있고,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뱅과 바빙크 두 사람 모두 언약이 실행되는 데 있어서는 인간의 책임과 순종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언약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자유가 만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병훈 교수)

 

우병훈 교수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행되기 위해 인간의 책임과 순종이 중요하다고 칼빈과 바빙크가 말했다고 한다. 정말 그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들의 무덤에 찾아가서 꾸짖어야 할 일이다. 구원은 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선물을 아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떠 안겨 주신다. 언약이 작동되기 위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을 것만 요구하신다. 믿음을 가지는 것도 인간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역사이다. 불가항력적 은혜가 임하면, 북한의 김정은과 일본의 아베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으로 변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언약을 이루신다. 사람이 수행하는 조건이나 역할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병훈 교수는 칼빈, 바빙크가 “언약이 실행되는 데 있어서는 인간의 책임과 순종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했다. 정말 칼빈과 바빙크가 그랬다면 우리가 그 들의 무덤에 찾아가서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언약이 실행되기 위한 인간의 책임, 순종이라는 것은 기독교와 성경에 없다.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스스로의 맹세이고 헌신이다.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셨다. 인간이 그 언약을 파기하였으나 하나님 자신이 그 죄 값을 친히 감당하심으로 다시 언약을 회복하여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셨다. 이것이 성경의 언약이다. 서철원 박사의 말을 들어보라!


 

 

"본래 언약의 법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은 인간에게 지워진 몫이다. 그러나 사람은 파기된 언약을 회복하거나 성취할 수가 전혀 없다. 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언약의 법적 요구 곧 죄 값을 갚으셔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에 오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사람의 신분으로 언약의 법적 요구를 충족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시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그가 언약의 법적 요구를 성취하사 그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신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3: 인간론, 154-155)

 

처음 선악과로 언약을 맺으신 것도 하나님 백성을 가지시기 위함이고, 신약의 새 언약도 아담의 죄로 파기된 언약을 자신의 희생으로 회복하여 영원한 하나님 백성을 가지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첫 언약을 파기한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요구하신다.

 

우병훈 교수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인간의 신실한 반응과 순종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는 주장은 기독교를 고치는 거짓된 주장이다. 인간의 책임, 순종, 성화, 변화 ... 이런 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성화, 즉 복음의 능력의 열매이다. 그리스도를 믿어 언약 백성이 되었으므로 그런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언약 백성으로 초대하신다고 한 적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은혜가 언약을 완성한다. 

 

우병훈 교수의 언약 사상은 새관점 학파, 유보적 칭의론, 알미니안, 팰라기우스 파들의 주장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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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제시된 정이철의 글은 논리적으로 분명한 글이고 뭐,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사고를 전달하고 있다. 정이철은 분명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정이철 자신이 우병훈에게서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점은 잘 지적했다. 그렇지만, 정이철의 글 중에서 문제될 만한 것은 없을까? 여기 저기 많아 보인다. 가령, 다음 문장들을 보라.

 

언약이 실행되기 위한 인간의 책임, 순종이라는 것은 기독교와 성경에 없다.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스스로의 맹세이고 헌신이다.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셨다. 인간이 그 언약을 파기하였으나 하나님 자신이 그 죄 값을 친히 감당하심으로 다시 언약을 회복하여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셨다. 이것이 성경의 언약이다. (정이철의 글)

 

자, 여기 제시된 정이철의 글은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제시된 언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예컨대, 아브라함 언약을 보라, 이것이 구 언약의 토대이고, 여기에 근거해서 몇 백년 후에 시내산 언약이 (혹 모세 언약) 주어졌다. 신약에서 구 언약이라 지칭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시내산 언약을 지칭한다. 아브라함 언약이 토대이고 근본이라 해도, 그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개인적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대개 고대 중동 지역에서 종주 왕이 약소국 봉신국에게 일방적으로 선물로 하사하는 하사 언약의 모델을 따랐다고 이해되고, 시내산 언약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긴 해도, 그래도 언약 조항들을 (율법) 지킨다는 조건 하에 주어진 언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중개자 모세를 통해 전달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일제히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라고 답하였다 (출 19:8). 우리가 하사 (下賜 왕이 선물로 땅이나 어떤 것을 수여함) 언약 모델로 분류했던 아브라함 언약도 사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한 '자손'과 (세상에 복의福 통로가 [참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교사] 되어야 했다) 그들이 발 딛고 살 '땅'을 선물로 약속해 주셨던 언약이었지만, 아브라함이 언약 말씀을 믿지 못하고, 85세에 하갈을 첩으로 얻어 86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자, 13년 기간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침묵하시고 (적어도 창세기 기록에서 생략되었다; 창 16:16)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책망 하셨다 (창 17:1). 

 

그리고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자신만 자기 저주 맹세 의식을 통하여 (비록 환상 중이긴 했어도),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확증하여 주셨지만 (창 15장), 아브라함의 언약 불신을(不信)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남자 후손들에게 모두 할례를 몸에 언약 표지로 새기도록 요청하셨다 (창 17:10이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 남자들은 시! 하고 소변을 볼 때마다 자기들이 언약 백성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했었다. 아브라함 언약이 하사 언약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 편에서 지켜야 할 바가 없었던가? 할례 시행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분명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행하라고 명하시는 규범이 있었을 것이다. 창 17:1에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실 때는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암시를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인간의 모습으로 천사 둘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창 18: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데렉) 지켜 의와 (체다카) 공도를 (미쉬파트)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wušamru Derek yhwh la'asot tzedaqa umišpat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 '도,' '의,' '공도'란 번역된 세 단어는 사 58:2에서 조합으로 나타나지만, 이런 단어들은 시내산 언약 조항들 곧 율법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가령 신 26:17에서 (신 30:16에서도) "네가 오늘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데렉) 행하고 그 '규례'와 (호크) '명령'과 (미츠바) '법도'를 (미쉬파트) 지키며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라 할 때, '도'와 '법도/ 공도'란 말의 조합이 나타난다. 

 

자, 다시 앞에서 인용된 정이철의 글을 들어 보라:

언약이 실행되기 위한 인간의 책임, 순종이라는 것은 기독교와 성경에 없다.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스스로의 맹세이고 헌신이다. (정이철)

 

언약은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으로 깨어진다.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의 불신앙으로 깨어질 뻔 했으나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도록 요청하시는 선에서 회복되었다. 시내산 언약은 (출 19-31장) 시내산에서의 우상 숭배 사건을 통해 깨어졌고 (출 32; 언약서의 핵심인 십계명 두 돌비의 깨어짐으로 상징됨), 모세의 중보 기도 덕분에 3천 여명의 처형으로 (출 32:28) 그 범죄 행위는 마무리 지어졌고, 갱신 되었다 (출 34:10이하).  

 

시내산에서의 우상 숭배 사건은 모세가 시내산 정상에 올라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결혼이라 불릴 수 있는 시내산 언약의 핵심 요소인, 신방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아파트; 성소, 성막) 마련을 위해 설계도를 받는 와중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그 범죄의 중대성은 더욱 심대하다. 그러니까 신랑 신부가 결혼 예식을 거행하고, 남편이 아파트 마련하려 떠난 사이에 신부가 바람을 피웠다고 비유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그 남편의 분노는 이혼을 선언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리라. 하나님은 영적 결혼이 깨어졌음을 선언하셨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전부 전멸될 위기에 처했었다 (출 32:10).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낸 것이 바로 모세의 중보기도였다:

 

출 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의 중보기도는 논리가 하나님의 말하자면 급소를 찌르는 것이었다: 1) 불신자의 훼방하는 말이 나올 터인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12절) 2)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약속하신 바를 깨신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의심되지 않겠나이까? (13절)

 

이런 급소 논리에 하나님은 말하자면 선포하신 진멸의 처벌을 취소하시고, 화를 내리지 아니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했던 모세의 중보기도는 가데스 광야에서 12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고 정탐꾼들이 돌아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백성들이 동요하여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를 부정하는 행동을 하고자 할 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하시고자 하실 때도 다시 빛을 발한다.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13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14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15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16 여호와가 이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7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9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옵소서!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이번에 모세가 드린 기도에서 급소 논리는 1) 불신자들이 이스라엘의 멸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모독할 것인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16절) 2) 야웨 하나님의 이름/ 속성 선포대로 (출 34:6-7) 야웨께서는 인자가 많으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만약 지금 이스라엘을 진멸시킨다면, 그 선포된 속성은 거짓으로 판명되지 않겠습니까? (18-19절). 이번에도 불신자들의 비방 요소가 들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 큰 치명타가 된다. 다른 급소 논리는 내용은 약간 다르지만 (조상들에게 맹세로 하신 약속을 지키는 문제와 하나님의 속성의 문제) 사실 본질상 같은 하나님의 속성 사고라 할 수 있다. 앞에서는 (시내산 우상숭배 사건) 그분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심의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스스로 계시해 주신 야웨 하나님의 속성을 거스려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문제시 된다. 그런데 앞에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심의 문제였다면, 여기서도 속성을 따라 인자를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선포된 그분 자신의 모습에 신실하심의 문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듯,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긴 하나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약속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받는 이스라엘 혹은 성도는 그 언약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은 깨어진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에게 언약을 지킬 책무와 의무가 지워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새 언약 시대를 사는 성도들도, 구 언약이 새 언약으로 갱신되었기에 구 언약의 제의적 요소들이나 고대 중동 지역에 부합되는 여러 민법들이나 형사법 요소들을 포함하여 구 언약의 모든 언약 조항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 완전 성취되었지만, 구 언약의 조항들이 갖는 그 법의 정신은 여전히 새 언약 성도들에게 유효하다. 가령, 포도원에서 포도 수확을 할 때, 다 따지 말고, 그 일부를 남겨서 당대 가난한 자들, 고아, 과부, 객들 심지어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는 법규의 정신은 오늘날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도덕법이라 분류되는 십계명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새 언약 성도들은 구약 율법을 폐기되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엄연히 그 정신은 살아 있고, 그 율법을 기준해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필자는 율법과 복음을 예리하게 대조시키는 "이신칭의"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관한 전통적인 루터파 견해보다는 토마스 라이트 (Thomas Wright) 나 제임스 던으로 (James Dunn) 대표되는 소위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학파의 견해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빌 3장을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고 판단한다. 특히 라이트의 사고가 개혁파 신학 사고와 일치한다고 본다.

 

가령 율법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루터파 견해에 비해,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표지로서 추구해야 할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율법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지킴으로 좋은 일들을 행케 하는 순례자의 나침반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개혁파 견해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언약에 대한 강조도 개혁파 사고와 일치한다.

 

 

만약 루터파의 견해대로 "오직 은혜로만!" 이라고 외치고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배척해 버린다면, 성도는 안내자를 상실한 나그네처럼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혼탁한 세속 물결에 휩쓸려 내려가 버릴 위험에 처하고 말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개신교의 이신칭의 교리를 모두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소위 새 관점의 장점들을 적극 수용하고 전통적인 견해의 장점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극히 유익하고 성경적인 사고에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 규정, 안식일 규정, 음식 법규 등과 같은 율법 규정들을 편협되게 이해하여, '언약에 대한 언약 백성의 신실성의 표지들'이라고 간주하며, 새 언약 성취를 통해 동이 튼 종말 시대에 메시아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이방인은 방금 언급한 그런 규정들을 지킴으로 유대인화 되어야 언약백성으로 가입된다는 배타적 선민주의 (Jewish ethnocentrism) 자세를 논박하고, 율법이, 성령님을 통해 종말 시대를 사는 새 언약 백성에게 주어진 삶의 안내자라고 재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난 성도들에게 율법은 새 언약의 율법으로 변화되어 생명의 성령님의 법으로 기능한다 (롬 8:2).

 

 

새 언약은 구 언약 곧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마 5:17) 또한 새 언약 체결로 율법이 전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엡 2:15), 일부만 구원사의 발전에 비추어 폐기되고 나머지는 새 언약 안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죄를 죄로 규정하는 율법의 기능은 여전히 새 언약 체계하에서도 유효하다. 예컨대, 우상 숭배의 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상 숭배는 죄로 정죄되는 것이다. 

 

요컨대, 정이철의 글은 문제의 핵심을 단순 명료하게 제대로 지적했지만, 우병훈의 책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매도했다고 함이 적절하다. 우병훈 교수는 정이철의 글에 도전을 받아 더욱 자신의 사고를 정교하게 표현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이철의 이번 글은 상당히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이철의 다른 비판적인 글들 중에서 최악인 것은 오늘날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거나 초대교회의 은사나 이적들이 오늘날 일어난다고 믿고 말하는 이들을 무조건 신사도 이단이네 하고 비방하는 글이다. 그런 사고는 자신이 영적 세계에 맹인이라고 자인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신약의 견지에서 한 마디 첨가한다면, 예수님의 산상설교 결론 부분은 새 언약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 .

 

이신칭의,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선고받은 우리 성도는 아무런 책무도 없다? 다시 정이철의 주장을 반복해 보자:

 

언약이 실행되기 위한 인간의 책임, 순종이라는 것은 기독교와 성경에 없다.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스스로의 맹세이고 헌신이다.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주셨다. 인간이 그 언약을 파기하였으나 하나님 자신이 그 죄 값을 친히 감당하심으로 다시 언약을 회복하여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셨다. 이것이 성경의 언약이다. (정이철)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성령님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분명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고, 그리하게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반드시 징벌이 따른다. 성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그런 징벌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생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왜 언약 조항을 순종할 책무가 없다고 말하는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거나 (언약 백성이 아니거나), 아니면 정이철과 같은 주장에 현혹당한 사람일 수 있다. 구원받았기에 우리는 순종해야 할 책무가 있고, 구원받았다면 반드시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다. 물론 정이철이 강조하는대로 우리의 순종이나 바른 삶이 구원의 조건은 전혀 아니다. 그 점을 우병훈이 모르고 그의 책에서 말하겠는가? 우병훈은 정이철도 고백했지만, 한국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탁월한 인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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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최덕성 교수가, 방금 소개한 우병훈 교수의 책에 대해 비판적 날을 세운  정이철 목사에게 주는 충고적 글이다.  

최덕성 교수가 정이철 목사에게 주는 충고

 

정이철 목사님이 '바른믿음'에 게재한 글, 고신대학교 우병훈 교수의 책 <그리스도의 구원>에 비판 서평을 잘 읽었습니다. "고신 총장님! 우병훈 교수의 언약신학이 마음에 드십니까? 고신 우병훈 교수의 <그리스도의 구원> 서평 1" (바른믿음, 2019.7.27. 01:02:22)은, 많은 분량의 독서를 하고 요점을 또렷하게 지적하는 정 목사님의 실력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적 현안을 다루는 내용이므로 한국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우병훈 교수의 위 책을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정 목사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저자의 몫입니다. 저자 본인이 직접 나서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 글에서 정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나의 소감과 고신 공동체의 분위기를 알려드리고, 더욱 소호력 있는 접근방법을 권하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 공동체의  교회사적 단면을 담아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우병훈 교수와 정이철 목사님을 모두 아끼는 마음으로 쓰는 상호권면의 이 글이 서로에게 유익하기 바랍니다.

 

 

우병훈 교수에 대한 정 목사님의 정보에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① 그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지 않았고, 박사 학위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② 그가 신학을 처음 공부한 고려신학대학원은 부산이 아니라, 천안시 천안삼거리 부근에 있습니다. ③ 칼빈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④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학부)의 전임 교수입니다. ‘고신대학’이라고만 하면 고려신학대학원을 배제하는 인상을 줍니다. ⑤ 그는 장차 고신의 신학을 대표할 신학자가 아닙니다. 고신대학교 신학과와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는 현재 예장 고신 공동체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입니다. ⑥ 장차 한국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이바지하고 있는 신학자입니다.

 

 

바울은 서울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칼빈신학교를 배설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이 학교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수사적인 의미로 바울과 배설물을 동원한 것을 이해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배운 세속 지식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가 배설물로 여기 그 학문을 배우는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한 바울의 통찰력, 통합력, 학문성이 형성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진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여 진리를 계시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 칼빈신학교의 교육은 우병훈의 하나님의 확장과 복음전파 능력 구축에 이바지 했습니다. 정 목사님이 고려신학대학원과 칼빈신학교가 배설물을 가르친다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근거제시와 철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우병훈은 자신이 정통 기독교를 따르고, 종교개혁의 신학에 부합하는 해석을 선호한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동시에 인정하려고 하는 입장은 겉으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모순을 그냥 품고 가자는 입장으로서, 건전한 인간의 지성이 받아들일 수 없고 계시의 온전성을 믿는 신자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교회사를 통해서도 가망성 없는 입장으로 판명이 난 견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우병훈, “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구원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 <개혁정론>,2016.9.16.).

 

 

우병훈이 “인간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고 언약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서술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한국교회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표현은 다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는 ‘기독인’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병훈은 청년 사역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난해한 신학 주제를 쉽게 풀어주고 이해시키는 탁월한 능력 소유자입니다. “우병훈 교수의 언약 사상은 새 관점 학파, 유보적 칭의론, 알미니안, 펠라기우스파들의 주장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비판의 소지는 그가 구원론이라는 난해한 신학 구조를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약간의 결핍 또는 현대 청년 언어로 이해되는 쉬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긴 찰과상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우병훈이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기초 신학을 수학할 무렵, 나는 동료 교의학 교수들이 언약신학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언약신학을 어느 정도로 가르치느냐"라는 나의 질문에 어느 교의학 교수는 “요즘은 언약신학이라는 퀘퀘먹은 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두 해 전, 일부 고신 목회자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버리고 '이신행칭의' 교리를 도입하려고 시도했으나, 고신교단 총회(2018)에 의해 중단되었습니다. 고신 공동체는 개혁신학의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영역은 대립과 심한 각인(刻印) 전쟁터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은 여러 해 전, 성경관과 에큐메니즘을 둘러싼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신학충돌을 겪었습니다. 이 때, 고신 공동체는 각인 효과를 선점하려는 선동형, 권력형, 공격형 접근의 천박성과 폭력성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 후 고신공동체는 먼저 문제점을 개인적으로 지적해 주고, 수용하지 않으면  성경적-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반응하지 않으면 공개적 논의를 요청하는 접근 방식을 선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마 18:15-17)에 부합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인에게 직접 문의하지 않고 “고신 총장”과 “신학교수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은 고신 구성원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우병훈은 자신의 주장과 같지 않은 견해도 잘 소화하고 걸러 이해하는 해석학적 능력을 가진 학자입니다. 자기의 명제나 주장이 완전하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 목사님의 지적 가운데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용하고, 다소 불투명한 부분은 다듬어 발전시킬 수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넓고 깊은 해석학적 소양을 요구합니다. 고신 공동체는 개혁신학을 지향하며, 성경과 합리성에 호소하는 범위 안에서 학문적 자유의 공기가 넉넉한 신앙공동체입니다.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절대성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21년 동안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주입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 합리적 정답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내는 학문능력을 배양시켰습니다. 진론드의 <신학적 해석학>(서울: 본문과현장사이, 1999)의 인식론적, 해석학적 이해력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격한 공격과 일방적인 매도는 어느 학문세계에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신학이나 교리에 일치하지 않으면 쉽게 이단으로 정죄하면 미숙한 학자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다루는 인간 인식의 능력과 한계 또는 제한성을 다 소화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수준의 해석학적 자기 통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복음사역자에들에게 진리에 대한 변증 노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 목사님의 수고는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상대 비판에는 지켜야할 학자적인 예도가 있습니다. 정 목사님의 글을 접하면서 ‘극단,’ '성급한 판단,' '근거 불투명'이라는 용어들을 떠올리지 않도록, 긴 글이나 짧은 글이나 간에 진중함과 예의를 갖춘 접근이 호소력을 제공합니다. 높은 품격과 격조를 지닌 글을 기대합니다. 학문성과 통합성(integrity)을 지닌 정중한 질문, 지성적인 논의가 ‘바른믿음’의 신인도 향상에 이바지하리라 생각합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