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이중 예정론

중일사랑 2015. 6. 10. 00:24

질문

1차 논박의 강의에 이중예정에 대한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인 에서와 야곱을 사랑한 야곱과 미워한 에서를 말씀하시며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유기된 부분으로 설명을 하셔서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말씀하셔서요
정말 죽어봐야 만 은혜를 받았는지 / 받지 못했는 지를 알 수 있는건가요?
사람은 거짓되고 언제든지 환경이 조성되면 범죄할 수 있는데 그러면 교회를
나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늘 불안하고 평안을 누리지 못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신데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은혜 받지 못 할 자로 정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어렵네요?
설명 부탁 드립니다

 

 

답변

이중 예정설은 (선택과 유기/ 택하지 않음) 성경에 근거한 가르침이지만, 많은 이의 제기도 있어 왔지요. 

말라기 1:2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구약시대에는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이방은 유기하셨지요. 

신: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러실 수 있냐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설명하지요. 인간은 죄로 타락해서 모두가 지옥행에 처해져야 하나, 하나님은 그 중 일부를 긍휼히 여겨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나머지는 자기 죄값으로 지옥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타락 이후 선택설이고 (infralapsarianism), 타락전 선택설은 (supralapsarianism) 심지어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일부는 구원하시기로, 나머지는 죄로 타락할 것도 아셨지만, 그대로 두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자이시기에, 그분이 구원하시기로 일부를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그냥 두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그분의 뜻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분의 주권에 순응하는 도리 외에 없어요.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라고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임의대로 만드실 권리가 있으시지요. 피조물인 우리가 보기에 불합리하게 보이는 부분도 그분의 섭리가 있지요. 


타락전 선택설이건 타락 이후 선택설이건 모두 하나님께서 죄의 원인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지요. 타락하지 않도록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로봇형 인간의 순종과 섬김보다, 자원적 섬김과 순종을 원하셨다고 설명하기도 하지요.
칼빈주의 사상은 어거스틴이 바울의 사고에서 발전시킨 것을 칼빈이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요. 요셉도 칼빈주의자라 할 수 있지요.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 가운데 움직인다는 사실은 예수께서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라고 (마태 10:29-30) 하신 말씀이나,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이란 말씀이 가르쳐 주지요.

천하만물이 다 하나님의 손 끝에서 움직이지요. 
그분이 절대 주권자이시기에 우리는 타락전 예정설이 논리적일 수 있다고 보지요.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의 좁은 이성적 판단이고 우리 작은 머리로 그분의 무한대의 차원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없지요. 이런 예정론은 카톨릭 교회에서 이단시하고 있고, 감리교의 알미니안 주의 신학도 배척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인간은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서 움직이는 피조물에 불과하지요. 

 

그리고 예정론은 전도의 맥락에서나 다른 상황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하고 찬양할 제목으로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은 이렇게 찬송의 맥락에서 예정론을 언급했습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니 예정론의 활용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하지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목으로 사용하되 함부로 전도 현장에서 언급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우리가 맛있게 먹는 밥알이라도 그것이 밥 그릇에 담길 때 좋은 것이지, 김치 그릇에 밥알이 한 두 개 떨어져 있다면 지저분하고 합당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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