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영적 이스라엘

중일사랑 2015. 6. 10. 00:01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선지서가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써 하나님을 영접하여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요 예수님이 오셔서 영적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표현하는 것이 유대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 기독교인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언제부터 신학에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이방인 기독교인이으로써 하나님이 택한자라고 하면 맞지 않는 말인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유대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는데 이런 신학 용어로 교리화할 근거가 있는것인지 궁금중이 생겨서 질문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문제의 핵심을 짚은 질문입니다

1. 신약 예수님의 사역은 모두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이스라엘 회복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야웨의 종 (사 53장), 인자 같은 이 (단 7:13이하) 이시지요. 다윗 후손 메시아로 오셔서 다윗 왕국을 회복하셨고 야웨의 종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지요. 어떤 이방 압제가 아니라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이지요. 

2. 예수님의 기적과 사역 말씀 선포 등에서 충격을 받고 흥분한 유대인들은 그를 다윗 후손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나중 그의 사상과 행동이 군사적 정치적 다윗 왕국의 재건과 무관하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돌아섰지요. 예수님의 목적과 달랐고 메시아 관이 달랐지요.

3. 유대인들은 삼하 7:11이하, 암 9:11이하, 렘 23:5, 33:15 등에 근거해서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의로 통치할 메시아는 정치 군사 영웅, 다윗 왕국의 재건자로 기대했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사고는 전혀 영적인 것이었지요. 막 10:45에서 보듯, 죄악을 위해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대속물로 드리려고 오신 것이지요. 이는 사 53장의 야웨의 종의 예언을 반영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사 53장의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이 유대인들 자신들이라고 착각했지요. 이사야 다른 부분에서 이스라엘이 야웨의 종으로 불리기 때문이지요. 

4. 여하간 예수님의 메시아 관은 죄에서 건져내는 구세주라면 유대인들은 정치 군사 해방자. 지금도 재림 후에 지상 천년왕국을 기대하는 이들은 그릇된 메시아 관을 가진 것이지요. 예수님은 근본 문제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러 오신 것이고 그 목적을 이루셨기에 다시 지상에 정치 군사 왕국을 세울 이유가 하등 없어요

5. 구약은 현상적 물질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면 신약은 영적인 면으로 초점을 옮겼지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 그것은 바벨론 추방 생활로부터의 회복이지만 사 40:3-5의 바벨론 추방으로부터의 회복을 신약 기자들은 모두 영적으로 해석해서 세례 요한의 사역에 적용시키지요 (마 3, 눅 3, 막 1, 요 1장). 
구약의 이스라엘 회복이나 (렘 31장, 33장 등) 메시아 예언들도 (렘 23:5, 33:15이하) 현실적 물질적 유대적 요소들로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예언의 시대적 제약성 때문입니다. 당대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선지자 자신의 인간적 제약성 때문에 그 당대 관례들과 지리적 요소들로 미래사르 묘사한 것이지요 (겉옷과 알맹이 원리; 최종태, 구약개론 신학을 사서 꼭 읽어주세요; 신구약 전체를 보는 눈을 열어야 해요). 

6. 그러니까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오해하지요. 구약 이스라엘 회복이나 메시아 예언들은 지상 물질적 정치적인 요소를 갖는데 왜 영적으로만 해석하냐고. 왜 구약 이스라엘 저 유대인들에 관한 것을 교회,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시키냐고 묻기도 하지요. 신약 기자들이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들이 해석법이 기준이니까요. 

7. 왜 교회를 영적인 이스라엘이냐고요? 이사야 후반부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지요? 그리고 사 11장 같은 곳에서도 그렇지요. 그 이스라엘의 회복자는 바로 야웨의 종이예요 (사 53장). 유대인들은 그 종을 자기들이라고 착각했지만, 예수님을 지시하지요. 그러니까 그들의 메시아 관이 잘못된 결정적 이유가 바로 사 53장의 야웨의 종을 메시아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서 건져줄 정치 군사 메시아만 알았지 자기들의 죄, 인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속의 죽음을 죽을 고난의 메시아는 상상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8. 이스라엘의 회복 방식은 바로 야웨의 종 곧 메시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복이 일어날 때 선지자들은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슥 8, 14장, 사 60장 이하, 사 2:2-4, 11장 등 참조. 

9.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죄값을 갚으셨지요. 그로 인하여 그를 믿는 자마다 이제 죄에서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내용인데, 구약과 다른 구원 방식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결혼이나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처럼 되어야 했지만, 이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으면 내가 구원받아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사의 흐름에 따라 이제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롬 2: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제는 구원사의 변천으로 이스라엘의 정의가 새롭게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이스라엘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지요. 성령님으로 거듭난 자가 이제 참 이스라엘이예요. 중동의 유대인들이 700만 정도 사는데 그 중 기독인들은 1만명 내외 될까 말까이지요. 핍박하고 차별대우가 하도 심해서 모두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렸고, 지금도 교회 유리창을 깨고 난동을 부리기 일수이지요. 이제 민족 단위로 하나님 자녀 백성이 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10.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두 가지를 언급하고 마치지요.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이 말씀에 근거해서 재림 즈음에 유대인들이 집단 개종하리라고 기대하는데 오해이지요. 롬 11장 문맥에서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남은 자들 전체를 지시하지 재림 즈음에 생존할 민족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구원사에서 항상 택한 남은 자만 구원한다고 사도 바울은 롬 9-11장에서 주장하는데 갑자기 재림 즈음에 유대인들이 전부 거의 개종해서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즈음에 살 유대인들만 그런 특권을 입을 이유가 없고, 구원사에서 그런 일도 없었고 항상 남은 자만 (이삭과 이스마엘 중 이삭만, 야곱과 에서 중에서 야곱만, 나중 엘리야 시대 7000명 [상징적 수자] 등등, 바울 당대에도 남은 자들만 구원 받았지요). 

많은 사람들은 주님 재림 이후에 예루살렘을 수도로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메시아 왕으로 예수께서 세상을 지배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소위 지상 천년왕국설, 전천년설) 오해이지요. 주님의 다윗 왕국 재건은 이미 성취되었고 그는 지금 메시아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지요 (행 15장에서 암 9:11이하의 다윗 왕국 재건 예언의 성취 참조). 
예수님은 인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이루셨기에 지상에 정치 군사 왕국을 세워 통치할 이유가 없고 그렇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11. 구약은 현상적, 물질적 측면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이제 신약시대에는 영화 신령화 시킵니다. 원수도 모압 에돔 아람이 아니라 혈과 육이 아닌 공중 권세 잡은 자, 악령의 세력 등. 땅도 가나안 아니고 쇠하지 않는 기업 (벧전 1:4) 혹은 세상 전체 (롬 4:13, 엡 6:1이하), 성전도 건물 아니고 우리 성도 (고전 3, 고후 6, 엡 2:20이하), 이제 우리 성도가 왕같은 제사장 곧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다윗 후손이 되고 레위 자손이 됩니다. 

12. 7년 대환란 운운하는 시나리오는 비성경적이예요. 세대주의 신학에서 나온 것으로 단 9:24-27의 잘못된 해석에 근거했지요. 이런 여러 사고들과 연관해서 최종태, 구약개론 신학을 꼭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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