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배종부 목사의 기도생활

중일사랑 2017. 10. 21. 15:52




殉命 배종부 목사의 기도의 경험 (7년 전의 글임)

(이 글은 한 작은 목사인 저의 개인적인 고난과 성령과 은혜의 체험 고백입니다. 사람 마다 신앙 체험과 삶의 정황이 다르므로, 어찌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정답일 수가 있으리요? 부족함과 치우침이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교정 받고자 합니다. 기탄없이 지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벽 2시 반입니다. 오늘은 새벽기도회가 없는 토요일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한번 읽어 주세요. 사람은 경험의 존재입니다. 자기가 경험해 보아야 비로소 알지요. 제가 경험한 기도의 세계를 좀 말씀 드려, 기도에 도움을 드리고 싶군요. 자랑이 될까 두렵기도 하고, 교만하게 보일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글이 읽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슨 평가를 받든 그게 그리 중요할까요?

 

신앙생활의 제일 원리는 뭐니 뭐니 해도 기도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사실 내용 없는 글이며, 실체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인용한 종교 생활일 뿐이지요. 종교생활에서 어떻게 영적 생명이 나옵니까? 저는 기도 없이 말씀 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허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없는 자에게 말씀을 열어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옥 같은 말씀의 권능은 오직 기도로만 열립니다. 성령으로만 열립니다.

 

말씀이 없는 기도는요? 이건 정말 위험합니다. 이는 마치 방향타 없는 배와 같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분별 없는 지식인의 파괴적인 행태와 같습니다. 우리 성도 중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온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 이상으로 단 두 문장도 연결이 안되는 말을 합니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언어가 다 영어입니다.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무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말씀 없는 기도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기도와 말씀은 신앙생활의 양대 산맥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느 것 하나만 강조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의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 두 가지는 기도하는 일말씀 전하는 일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6:4) 우리는 기도(祈禱)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하니,

 

제가 볼 때에 신자 모두에게 공히 적용되는 삶의 우선 순위는 첫째 기도, 둘째 말씀, 셋째 성령, 넷째 예배, 다섯째 교회생활, 여섯째 성도의 교제... 이런 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 첫째인 기도가 없는 성도는 허세의 사람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람은 일반 평신도가 아닌 기도 없고, 은혜 없는 목사, 장로입니다. 이들이 기도 없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사람 보기에도 그렇다면, 하물며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실까요? 단도직입적으로 기도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은 다 마귀 짓입니다.

 

기도 없는 사람은 영적일 수가 없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함으로 어디까지나 理性的(이성적)인 사람일 뿐, 영적인 세계에 사는 靈的(영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아! 기도로 영적인 세계를 연 사람이 누리는 자유, 풍요, 기쁨, 평안, 감사, 행복, 두려움 없음, 영적인 세계의 遊泳(유영), 권능, 주님을 소유함, 성령님과의 교통의 기쁨, 권능과 은사의 세계... 등을 무엇으로 표현하리요?

  

사랑하는 당신은 똑똑한 理性(이성)이 앞서서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꼭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어디까지나 편견 없이 들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꼭 무슨 말을 하면 신학적 교리를 갖다 대고, 자기 중심의 편견과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인간 사이의 대화는 그렇게 하면 끊어집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정말 진심으로 대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의도도 없습니다. 저는 제 글을 읽는 분들을 잘 모르지만 여러분들은 저의 신분과 위치, 어떤 사람인지... 보내 드린 글들 만으로도 어느 정도 알잖아요? 제가 다소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저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가장 중요한 기도의 삶에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들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 

 

저는 서울 북노회 상계 시찰회 소속 새성 교회 담임목사이며, 장로교 통합 측의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 대학원을 나온, 정상적 교육을 받은 목사입니다. 저는 장로교 중에서도 가장 보수파인 고려파 출신이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통합 측으로 옮겨 온 목사입니다. 선교학 박사 과정까지 공부를 했으며, 나름대로의 인생 길에 목회의 고난과 애환을 삶의 체험으로 경험한 목사입니다. 저는 23세에 교육전도사를 시작하여 52세인 지금까지 30여 년을 오직 외길로 교역자의 길을 걸어 왔으며, 교역자로서 거쳐 온 교회 만도 10여 개가 넘습니다. 이런 초라한 이력을 소개하는 것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저의 기도론과 성령신학이 어떠한 지식적 無知(무지)나 이단적 토대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强辯(강변)하고 싶어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제 생애에 책 외에는 실제적인 스승의 모델이 될 만한 교수님이나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이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과거에 소극적이었던 제 성격 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소극적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용감하지요. 

 

제가 이제 중견 목사의 나이에 처하여, 우리 장로교 통합측 신학 교육과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단의 신학교육이 정말 문제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그 교육을 받고 자라난 목사이기에, 신학의 迷妄(미망)을 깨고(?) 진정한 목회자로 거듭나는데 죽음 같은 진통을 겪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 교육 커리큘럼을 진정 목회자 교육 위주로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신대원 3년 과정은 신학공부 과정도 아니고, 목회자 교육 과정도 아닙니다. 너무나 현장과 동떨어진 엉뚱한 커리큘럼입니다. 신대원 교수로 있는 친구들이 직접 하는 이야기 들입니다. 

 

적어도 신학 수업 때, 다시 말하면 교육전도사로 견습할 때에 목회의 기초를 배워 두어야 교회 현장에 나와서 헤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 목사들이 현장에 나와서 배운 신학과 목회 현장을 조화 시키는데 대략 10여 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젊음과 기회가 거의 다 지나 가 버리지요. 이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많이 빗나 갔습니다. 다시 기도 얘기로 돌아 가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인격과 信義(신의)를 믿으며, 이 이야기를 해 나가려 합니다. 저의 기도 이야기에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이야기는 하나의 경험이 되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참고해 주시면 저의 작은 소원 하나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제 나이 46세였던 2004 3월에 소위 성령 체험(성령 세례)을 했습니다. 우리 교단의 장로교신학을 버리고 순복음신학을 선택했다는 말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기도하다 성령님을 만난 순수한 제 기도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전의 저의 신앙생활, 기도생활은 제 판단과 지성, 그리고 배운 신학, 이성의 한계, 나의 자아를 결코 넘어 갈 수가 없는 한계에 묶인 신앙생활, 율법적인 신앙생활에 불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여 제 마음 속에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거부감과 동시에, 영적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심 사이의 깊은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그 반대 심리로 인하여 소위 영적으로 말하거나 영적 신앙 생활 하는 사람 들을 여지 없이 공격했지요. 가장 제게 욕을 많이 먹은 사람은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입니다. 그리고 소위 성령사역 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돌아 보니 이 모든 무지의 행동이 바로 한쪽 면 만을 가르친 우리 교단의 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서 도 이런 분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오늘날 젊은 목사들 층에는 장로교신학과 순복음신학을 잘 조화한 훌륭한 목사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신학적 소양과 성령을 잘 겸비한 주의 종들이 많이 일어 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위하여 정말 고무적인 일들입니다. 순복음 교단이 아닌 장로교를 비롯한 모든 교단 내의 이런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을 가리켜 “제 3의 물결이라 하지요. 신학적으로 분류하자면, 저도 그 부류에 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기도”와 “성령”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교회와 기도원 변두리에서 횡행하는 소위 성령사역을 빙자한 무당 푸닥거리 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속의 여자 목사들, 사모들, 여전도사들, 권사들 중심으로 행해지는 성령을 빙자한 이 미혹의 세계는 상상할 수 없는 혼탁함 그 자체입니다. 제가 이 세계들을 너무나 잘 알고 경험해 왔기에 가슴이 아프고, 앞으로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무당 푸닥거리 같은 작태들 때문에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건전한 주요 교단에서 외면 당하고, 버림 받고 만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기를 목욕시킨 후에 더러워진 물을 갖다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갖다 버린 꼴입니다. 

 

한국 기독교사를 공부해 보세요. 초기 한국교회의 성령의 영맥은 오늘날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한국교회에서는성령님이 퇴출 당해 있습니다. 온통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요. 

성령 세례 받기 이전의 저의 신앙생활은 정말 곤고한 것이었습니다. 내적 평화와 자유,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심정이 전혀 없었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목사의 길에 대한 소명의 懷疑(회의),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할 수 없는 고민, 성도들에게는 멋들어지게 설교하지만 어디까지나 말 장난에 불과한 권능이 실리지 않은 말들,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추론적인 이야기들, 교단과 목사 장로들의 세계에 대한 환멸... 정말 하나의 종교인에 불과한 삶이었지요. 저는 예수 팔아 먹고 사는 고급 거지였던 것입니다. 

 

저는 11년 전 1998, 저희 교단 신성북교회가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새성 교회에 공채 목사로 부임해 왔습니다. 31명의 후보 목사들 중에 뽑혔으니, 설교를 못하는 목사는 아니지요. 초기 3년 동안 다른 목사가 하는 것처럼, 교회를 세워 보겠다고 의욕에 넘쳐 일했습니다. 그러나 목회 경험이 부족하고, 원래 허풍이 심하고, 인격이 채 갖추어지지 못한 제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語不成說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개척 3년 만에 저는 2억 이상의 부도를 맞은 부채 인생이 되었습니다. 원인은 교회를 나의 능력 이상으로 키워 보려던 저의 과욕 탓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불경기에 무리한 투자를 강행하는 어리석은 사업을 한 것입니다.

 

당시 하루에 40여 명씩 카드 빚 부도로 자살하던 그 시절에, 저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지요. 정말 저도 죽고 싶었습니다. 하루에 40여 통씩 걸려 오는 빚 독촉 전화는 저를 사실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 갔습니다. 고통 속에 마비가 와서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고난의 세월들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저의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산 세월이 꼭 5년 정도 지나 간 듯 합니다. 이 죽음과 같은 기간에 제가 한 신음은 오직 하나 하나님! 저 좀 살려 주세요.”하는 절규 뿐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욥과 같은 지옥을 통과해 왔습니다. 저는 당시 인생의 광야 끝까지 간 듯 합니다. 저는 인생의 광야 끝에 가 본 사람입니다. 그 곳에는 아무 것도, 아무도, 그 무엇도 없는 곳입니다. 철저하게 버려진 저 혼자 만의 세계가 광야입니다. 저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오직 나의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광야 끝에서 저는 저의 죄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행위죄의 문제였는데, 그것이 존재론적인 죄의 회개로 나아 갔습니다. 3년을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정말 남아 대장부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통곡을 하며 운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오열하고, 통곡하고, 절규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주님은 저의 회개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 주실 준비를 하셨습니다. 2004 3월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가기 직전, 1여년 전부터 뭔가가 내게 다가 온다는 느낌이 늘 있었습니다. 꿈에서도 있었고, 뭔가가 내 영혼에 그렇게 계속 충동으로 알려 왔습니다. 그것이 알고 보니 성령님이셨습니다. 저는 남이 겪지 않는 고난을 경험한 선물로 성령님을 소유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 지식으로 성령을 말하는 사람과 줒어 들은 경험으로 성령을 말하는 사람을 진정한 성령의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학적 성령 세례”논쟁은 하지 마십시다. 책을 보시면 다 나오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은 정말당신의 양심으로 말할 때, 진정 성령 하나님을 만났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방언에 대하여 말할 수는 있지만, 직접방언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은 직접 만나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 말에 찔리는 성령 세례 받지 못한 분들(?)은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제가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가기 이전 5년 정도를 나름대로 영적인 길을 찾아 온 세계를 다 헤맨 듯 합니다. 세미나를 200여회 이상 다녔다고 생각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세미나는 거의 다 가 보았습니다. 일년 내내 세미나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무려 5년 간을 방황한 것이지요. 그리고 배운 그것을 바로 교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1개월에서 3개월이면 바닥이 났습니다. 다시 다른 프로그램을 적용 했습니다. 이런 세월이 반복 되었지요. 다 개척교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원없이 목회 실험을 다 해 본 셈입니다. 

당시 저는 전국의 기도원이란 기도원, 유명한 목사라는 목사, 부흥사, 성령의 현장은 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테이프 들을 있는 대로 다 사 왔습니다. 지금도 갖고 있는 수천개의 테이프들은 아주 유용한 자료들입니다. 그 때 온 세상을 섭렵한 견문은 지금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숨은 성령의 종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목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의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기존의 조직이 돌아 가는 교회는 프로그램으로 어느 정도의 효과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담임목사인 당신이 갈 길은 당신 만이 가진 것으로 승부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저는 일체의 프로그램을 다 버렸습니다. 방법과 수단은 이제 제게서 떠나 갔습니다. 오직 말씀, 기도, 성령, 예배, 전도, 양육... 이런 본질로 승부하기로 한 것이지요.

 

2004 3월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가기 3개월 전 쯤, 저는 조용기 목사의 목회자 세미나 테이프 20개를 듣기 시작 했습니다. 반복해서 듣는 중에 저는 당시 나이 46세인 그 때까지도 나의 교회론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목회 철학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테이프들을 듣는 중에 우리 기독교 신앙이 성령신앙이며, 교회는 오직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성령님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설교 때마다 “성령, 성령으로...” 했지만 도대체 성령님에 대하여 만난 적도 없고, 그 깊은 내용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아!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얼마나 잘들 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술자리의 정치 토론이나, 연예인의 사생활 들을 루머 들로 각색하여 하는 말들 같습니다. 그로부터 “성령”을 나의 목회 주안점으로 두어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교회를 성령” 위에 정말 바르게 한번 세워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 현대 사회에 초대교회의 원형을 재현해 보리라 결심 했습니다. 저의 변치 않는 평생 표어는 성령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입니다. 이것은 저의 교회론이며, 목회관의 요약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목회자세미나 테이프가 계기가 되어, 저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성령의 세계를 제게도 열어 주세요...” 하나님은 정말 각자에게 각각 다르게 은혜를 부으시나 봅니다. 이전 세월들에도 저는 끊임없이 성령”을 찾아 헤맸습니다. 온 천지를 다니며, “방언하나라도 받아 보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지요. 그런데 42세가 되도록 방언도 못한 것을 아세요? 42세에 겨우 방언을 받았지요.

 

제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은 먼저 한 개인을 철저하게 회개를 시키신 후에, 성령을 부으시고, 연단 속에서 훈련하신 후에, 그리고 제 자리에 앉히시고, 그 다음에 쓰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내 마음에 불같이 일어나는 거역할 수 없는 감동과 감화, 열정, 충동을 말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없이 어느 누가 은혜의 자리로 나아 갈 수 있으리요? 3년을 회개한 후에 어느 날,“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제게 임하여, 금식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이전에 금식을 자주 했지만, 정말 다급할 때에 살려 달라고 한 금식들 외에는 금식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저는 8일 금식이 최고였고, 5일 금식 정도가 대중이었지요. 그리고 힘들어 지속하지를 못했습니다.

 

! 성령님의 은혜의 때가 임하니 온 천지를 돌아 다니던 제가 강대상에 늘 꿇어 앉아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단 사실을 잊었네요. 기도하다 보니, 금식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체질로 변화되어 있었고, 기도와 금식, 성령 충만이 자연스럽게 조화된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일상적 교회 업무와 정상적 생활을 하면서 금식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전혀 힘들지 않게 하루, 이틀 금식한 것이 어언 23일이 되었습니다.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양산 감림산 기도원에 제직들 6명을 뜨레스디아스에 파견한 중이라, 부모님이 양산에 계셔서 심려를 드릴까 염려하여 부모님 댁에 머무는 동안 금식을 풀었습니다. 정말 애석했습니다. 그 때 내 생애 처음으로 금식 기록을 갱신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아아! 자기 자랑의 마귀는 언제나 사람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지요. 

금식은 사람의 결심으로는 절대 하지 못하고, 성령님의 붙들어 주심이 있어야 하는 것임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절대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금식하지 않고, 성령님이 금식을 하라고 하시면 바로 금식에 들어 갑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제 삶과 목회의 모든 영역을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하게 되었지요. 

 

예를 들어, 저는 철저하게 원고를 준비하여 설교하는 스타일인데, 설교 준비를 다 했더라도 주일 아침에 성령님이 다른 감동을 주시면 영감을 메모한 것 하나만 들고 단에 올라 가 다른 설교를 합니다. 설교하고 나면 성령님이 왜 그렇게 했는지 바로 답이 나오지요. 그 설교를 반드시 들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한 저의 모토는원고는 철저히, 그러나 단에 올라 가서는 원고에 얽매이지 말고 쉽게, 구어체로, 가장 중요한 것은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그냥 단순한 도구 되어설교하는 것이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의 제 설교 원고가 다 컴퓨터에 들어 있습니다. 수천 편은 되지요. 설교 원고를 만들지 않는 목사님들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일생을 목사로 살고 설교집 하나도 남기지 못한다면 무엇을 남기지요? 교수가 일생을 가르치고 전문서적 몇 권을 내지 못한다면 무엇을 한 것이지요?

저는 또 오로지 설교 원고에 매여 설교하는 목사님 들을 보면서, 설교의 초보단계를 지나 10여 년 이상 설교하고 나면 원고에서 자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직접 말씀할 현장은 어디 있지요? 설교 원고대로 하는 것이 곧 성령님이 그 때 주시는 그 말씀은 분명히 아니잖아요? 

이렇게 성령 감동을 따라 첫 장기금식을 한 후에, 도전의식이 생겼습니다. 이후 계속 재미가 나서금식을 했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좋아야 하는 것이지요. 금식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죄악이 떠나 가고, 성결해지며, 영계가 맑아지는 것이 얼마나 좋았는 지... 물론 건강이 따르고, 성령님의 강권적인 기름 부으심이 있어서였겠지요.

 

당시 저의 목표는 훌륭한 목사님들이 했다는 40일 금식기도가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전에 금식훈련이 필요한 듯 하여, 마음에 작정을 하고 먼저 31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금식기도는 큰 은혜 중에 끝났습니다. 

이후 약 6여 년 동안 정말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어느 해는 일년 365일 동안 무려 150일 이상을 금식을 했습니다. 대충 11, 21, 31, 41일 징검다리로 해서 수 십번의 금식을 한 듯 합니다. 잘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보름 정도의 금식이 10여 회, 20일 이상이 5회 정도, 30일 이상이 5회 정도, 그리고 41일 금식기도 2, 51일 금식기도 1회 정도인 것 같습니다. 10일 이하의 금식은 밥 먹듯 했습니다. 

 

마치 자기 자랑 같이 들리네요. 그게 아니옵고, 제가 금식하다 받은 기도의 능력과 은혜를 말하려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만큼 부어 주시는 분이예요. 정말 기도의 골방을 헤매고 또 헤매어야 합니다. 엉덩이가 진물이 나도록 기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기도가 되건 안되건 무조건 기도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으라는 것입니다. 기도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주님의 은혜의 산물이지요. 저는 가장 큰 은혜를, 가장 짧은 기간에 물 붓듯 부음 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은혜인지요?

제 기억에 너무나 선명한 금식기도의 은혜 체험 중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31일 금식을 할 때에 기도제목이 한국교회를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이름하여 한국교회를 위한 31일 작정 금식 禁足(금족)기도였습니다. 성전 강대상에서 자며, 31일 동안 3층 교회에서 한 발자욱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은혜로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 두 번째 41일 금식기도를 할 때 받은 은혜는 12일 만에 시편 84:5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경험이었습니다. ()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大路)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 때 하나님이“16차선의 하늘고속도로를 제게 뚫어 주셨습니다. 제가 기도하기만 하면 하늘나라에서 부두의 콘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것 같이, 하늘 트럭이 즉시로 출발하도록 부릉 부릉 항상 시동을 걸고 있는 상태의 환상이었습니다. 신속하게 하늘의 화물을 나르기 위하여 1, 2차선도 아니고, 무려 16차선의 하늘고속도로가 뚫린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정말 제게는 핍절함이 없는 기적이 연속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2-3가지의 기적이 언제나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물질, 마음, 가정, 교회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또 언젠가의 금식기도 중에 받은 은혜는 제 교회에 놓여진식빵의 환상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제 교회의 의자들에 식빵들이 착착착 놓여지더니, 사람들이 착착착 들어 와서 빽빽히 앉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온 자리에 차고, 강대상, 복도, 1, 2, 3, 나중에는 교회 앞 삼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교통이 온통 마비되어 버리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그 꿈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기도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이 제게 폭발적 부흥을 주실 그 날을 꿈꾸고, 또 꿈꿉니다. 

조용기 목사가 불광동에서 천막 교회를 개척할 때에 눈을 감으면 천만 사람이 운집한 것이 보이고, 눈을 뜨면 빈 공간의 가마니떼기만 보였다더니, 저도 이 환상을 본 이후에는 자나 깨나 그 속에 젖어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눈물의 기도는 간암에 걸린 최00를 위한 51일 금식 기도입니다. 두 번의 41일 금식기도를 하고는 하도 무서워서, 마지막 3번째는언제 이 무서운 금식기도를 하나?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느닷없이 최00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위하여 하기 바랐던 3번째 금식기도는 엉뚱하게 남을 위하여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41일을 작정하고 기도를 끝냈는데, 병원에 갔더니 아가씨의 간암은 더욱 커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충격이 커서 금식을 풀지 못하고, “굶어 죽으리라”하고 계속 갔던 것이 그만 51일까지 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최고 장기금식 기록은 태백기도원(소원의 항구) 이옥희 원장의 53일 기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경남 양산 내원사의 어느 여승은 80일 이상을 했더군요. 제가 그 기도원장을 이기고 싶어 55일을 작정했는데, 하나님이 교만 그만 부리라고 하셔서 끝냈습니다. 기적은 그 후에 일어 났습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던 아가씨가 3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소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눈물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금식기도로 받는 은혜와 열리는 성령의 세계는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경험을 보면 대충 이런 것입니다. 이제 이후의 이야기는 기도”, “금식”, “성령이 함께 어우러질 것입니다.

 

1. 기쁨, 평안, 감사, 행복, 충만의 은혜

 우리가 말하는 이런 것들은 대부분 세상의 것이 채워질 때에 주어지는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가짜지요. 그런데 목사님들은 이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은 엄연히 다르지요.

 

저는 광야 끝에서 정말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하늘의 기쁨, 평안, 감사, 행복, 충만을 만끽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정말 부유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물질의 고통을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액수를 언제나 정확한 하나님의 시간에 딱딱 채워 주셨습니다. 제 보물 창고는 정말 하늘에 있지요. 사람이 그냥 염려가 안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있어야 염려가 안되는 것이지요.

 

또 지금 사정은 지옥의 현실인데, 마음은 천국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정말 희한한 것입니다. (14:27) 평안(平安)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平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世上)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현실과 조건에 상관 없는 감사의 사람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런 것들을 설교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목사님!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예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현실의 이성이 통제하는 세계와 성령이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는 분명히 달라요. 이 모든 것들이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선물들이지요.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분명히 구별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목사님들이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가르칠 수가 없지요.

 

2. 기도하는 은혜

 기도하는 은혜보다 더 귀한 은혜가 있을까요? 사실 그렇게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가 안되잖아요? 왜냐하면 성령님의 기도의 기름 부으심”, 기도의 영이 임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기도의 영이 제게 임하니, 하루에 작정한 대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열흘 5시간 작정하고 기도하고, 그것이 가능해지자 7시간으로 넘어 가고, 8시간으로 넘어 가고, 10시간으로 넘어가고, 12시간으로... 그런데 하루 12시간을 꼬박 기도하기는 정말 힘들더군요. 그래도 계속 밀어 부쳐 14시간 기도하니, 그만 파김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기도하려고 애쓰면 하루 8시간 정도가 적당한 균형인 것 같아요. 물론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오직 기도만 할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적어도 일년에 이런 순수한 작정기도를 한 열흘 정도씩 5-6회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금식을 곁들이면 금상첨화가 되겠지요. 저는 지금도 기도하면, 10여 분이 지나면 바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깊은 기도에 몰입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사람이기도하는 은혜를 받는 것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또 있을까요?

 

목사님들은 필히기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기도의 영이 충만해야지요. 정말 목회의 다른 어떤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3. 사람관계가 편안해지는 은혜 

사람 때문에 고통 당하시는 성도님이나 목사님은 금식기도를 하세요. 반드시 해결이 됩니다. 금식기도를 하니 모든 사람관계가 다 풀리고, 평안해졌습니다.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푸는 것이잖아요? 정말 놀라운 풀림의 역사입니다.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壓制) ()하는 자()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아! 저처럼 교인들이 착하고, 순종 잘 하는 성도들을 모신 목사가 또 있을까요?

  

저는 설교에 막히는 말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합니다. 일반교회에서 했다가는 당장 쫓겨 날 온갖 소리들을 그대로 다 해도 됩니다. 하하하! 작은 교회니까요. 아니요! 제게는 교회가 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사람에게 막히지 않는 悔心(회심)의 말씀”을 원음 그대로 생생하게 전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합니다.

4. 열등감, 박탈감, 부정적 감정이 소멸되는 은혜

사람이 절대적 긍정의 사람, 용기의 사람, 힘 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 되는데 있습니다. 성령님이 힘을 부어 주시니까요? 새롭게 하시니까요? 입술이 어눌한 제가 어찌 성령님의 이 오묘한 역사를 다 말할 수 있으리요?

교회 초창기의 우리 교인들은 일거수 일투족 저의 분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게슈타포처럼 저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저들의 작은 허물과 불충성도 일일이 지적 받았습니다. 그렇게나 부정적이고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던 제가 이제는 절대 긍정의 사람, 밝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자신을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포용하게 되고, 저 또한 사람들의 판단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내가 세운 꿈과 비전, 목표가 아닌,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사명의 길을 가는 은혜

저는 제 2의 인생을 살며, 이전의 제가 가던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 간 것 같은 전혀 반대의 길을... 성령님을 따라 가는 이 길은 아무 걱정, 근심, 염려가 없어요. 목회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그냥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면 되요. 그러면 그 분이 다 해요. 교회 부흥! 그것을 왜 내가 신경을 써요? 저는 이제서야 교회 부흥이 목사의 목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친구 목사 교회 장로들이 위임을 해 주는 조건으로 앞으로 3년 안에 교회를 배로 부흥시키지 못하면 나가라는 각서를 받고 위임식을 해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 와서는, 슬픔에 가슴이 미어져 울었습니다. 

저는 외치고 싶어요. 왜 그런 불행한 목회를 해요? 그런 마귀 장로를 데리고 어떻게 목회를 해요? 목사님 교회에는 그런 장로가 없어요? 있잖아요? 그런데 왜 있는지 아세요? 목사님이 기도 안하고, 성령의 종이 아니니 그런 마귀가 설치지요! 회개할 분은 바로 기도하지 않는 목사님이세요.

 우리 성령님은 희한하셔서 꼭 내게 필요한 영역의 연단과 시련, 훈련으로 나를 인도해 가시지요. 사람의 고통, 물질의 고통, 질병의 고통, 목회의 고통, 사람 없는 고통, 개척교회의 고통, 큰 교회의 고통... 다 그에게 꼭 필요한 오직 그 만의 연단의 과정이지요. 그걸 깨달으면 비로소 기도의 무릎을 모으게 되지요.

 영적으로 사람과 사물 모든 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기도하게 되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성령님 그 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고 매이지 않는 삶이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6. 온전한 자유와 해방과 두려움이 없는 은혜

아아! 저는 외치고 싶어요. 왜 이 성령님을 모르느냐고? 왜 이 성령님을 제쳐 두고 당신이 목회하고, 살아 가려고 그렇게 힘들게 몸부림 치느냐고? 이런 놀라운 세계, 만남, 누림, 영적 해방과 자유, 연애(?) 보다도 더 좋은 그 분과의 관계가 있는데...


성도님! 세상의 부귀영화, 성공, 출세가 중요한 게 아니예요. 목사님! 목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예요. 교회 키워서 뭐하려고 하세요? 부유함, 명예, 대접을 누리려고? 장로들의 압박 때문에?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를 키우려 하세요? 교회 키우면 천국 간대요? 절대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성도님, 목사님! 속지 마세요. 세상의 부귀영화나 성공적인 목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성도님, 목사님 당신이 진실로 성령 하나님을 만나 행복해지는 게 중요하지요. 목사님이 불행하다면 그런 목회를 왜 해요? 먹고 살려고? 아니잖아요? 목사님이 불행한데, 어떻게 교인이 행복해요? 성령님 안에 그 행복이 고스란히 있는데, 왜 세상 행복을 찾으면서 사람들에게 엉터리 설교를 해요? 왜 세상적 가치관을 가르치면서 복음이라고 해요? 계시록의 음녀의 물이 바로 변질된 복음이잖아요? 목사님이 성령도 못 받고, 복음을 영적으로 이해도 못하면서 무슨 설교를 해요? 전혀 영적이지 못한 설교를, 세상적 소리를, 윤리 도덕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그런 세상적 복음은 절대로 성도들에게 영적 생명을 일으키지 못해요. 성령님 안에는 무한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넘쳐요. 그것을 말하다 보니... 


7. 원대한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의 은혜

 성령님은 크신 분이라 절대 비전을 작게 주시지 않아요. 그래서 진짜 성령의 비전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해요.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난하니까요. 제가 받은 성령의 비전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었더니, 그들 중에 어떤 분은 비꼬며 냉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주제에 감히 그런 일을...” 하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참 가슴이 아파요. 그러나 성령님이 주신 비전을 가슴에 품고 가는 자는 행복해요. 하나님의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져요. 연단과 인내와 시간을 요할 뿐이지요.

 

8. 무한정 쏟아지는 말씀의 은혜

설교할 때에 내가 말씀하는데, 내 입에서 그 분의 말씀이 막 줄줄이 튀어 나오지요. 설교에 막히는 법이 없지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쳐 나면 성도들이 설교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지요. 뭔가 이상한 힘이 성도들을 빨아 들이게 됩니다. 내가 하는 말씀에 내가 은혜를 받고, 내가 눈물이 나고, 격동이 되고, 그래서 울면서 설교하고, 터져 나오는 설교를 하게 되지요. 그 때에 성도에게서 회심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 나는 거예요.

 

이런 설교는 그냥 잘 한다는 설교와는 차원이 다르지요. 그야말로 살아 있는 말씀, 성령의 그 말씀이 되지요. 이런 말씀이 선포되면 사람은 그 말씀 앞에 반드시 거꾸러지게 되어 있어요. 그냥 이해하고 은혜 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아니지요. 과거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분들이 했던 설교가 바로 이런 설교 들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대고 말씀하는 그런 설교! 아아! 이런 진짜 성령설교는 성령이 덮지 않은 목사님과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지요. 저는 설교를 꼭 녹음하는데, 간혹 쏟아지는 그 성령님의 원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9. 영적 사건이 일어 나는 은혜

내 생애에, 교회에 영적 사건이 일어 납니다. 소위 말하는 기적이지요. 개인이 일상에서 느끼는 기적이 하루에 2-3가지는 반드시 일어 나지요. 그 놀라운 경이의 세계는 그야말로 생생히 살아 있는 영적인 세계이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역사하는 분임을 알게 되지요.

 

10.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열리는 은혜

저는 고전12장의 9가지 은사 외에 갖가지 은사가 쏟아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사 하나 하나는 받지 않은 자는 알지 못합니다. “방언”을 못하는 사람이 방언에 대하여 무엇을 설교하며, 어떻게 가르칠 수가 있겠어요? 기껏 책들을 보고 인용하는 정도지요. 중요한 것은 책은 이론이고, 능력과 은사는 실제예요. “신유에 대하여 설교할 수는 있지만, 신유가 나타나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그 신유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성령의 은사는 하나가 터지면 줄줄이 터지지요. 예를 들어 어떤 분이든방언받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저와 함께 앉아 10분만 기도하면 방언이 터져요. 이렇게 받기 쉬운 방언을 받으려 하지는 않고 온갖 신학적 이론은 다 갖다 대고, 비방하고, 이러쿵 저러쿵 하고... 정말 하나님 앞에, 그토록 은사를 부어 주시기 원하시는 성령님 앞에 너무나 완악한 자세 아니예요?


우리 속된 말로 모르면 가만히 있어!” 하잖아요. 반드시 은사들을 받아야 해요. 성령의 권능을 소유해야 해요.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은사, 권능이 더 소중해요. 은사를 사모하지 않고 은사에 무지몽매한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따지고 보면 사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은사로 섬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성령의 은사들은 배척하니, 참 앞 뒤가 맞지 않은 어불성설이지요.

 

11. 깨달음의 은혜

성령님은 늘 깨닫게 하시지요. 돌아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무엇보다 부족함을 보게 하시고... 아아! 깨닫는 은혜 보다 귀한 은혜가 또 있을까요? 사람이 자기 주제와 교만함을 깨닫지 못하면 정말 문제 덩어리의 인생이 되고, 남을 해치고 다치게 하지요. 그러면서 자기는 주님의 뜻을 따라 한다고 하니,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과 무엇이 다를 게 있어요?

(49:20) 존귀(尊貴)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滅亡)하는 짐승 같도다.

 

12. 성도를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도와 주는 은혜

설교만 하고 성도를 방치하는 목사님도 있고, 세상적인 입발림으로 간지러운 곳을 살살 긁어 주며 속이고 넘어 가는 목사도 있고, 인간적 수단과 정으로 현혹하는 목사도 있고,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수단을 부리는 목사도 있고, 머리가 좋아 이리 저리 굴리는 목사도 있고, 협박하고 위협하는 목사도 있고, 여성도들을 자상한 남성적 이미지로 유혹하며 속이는 목사도 있고, 목사는 만사에 언제나 선생이어서 가르쳐야만 하는 목사도 있고...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기를 목사는 4종류가 있데요. 강도 목사, 거지 목사, 사기 목사, 진짜 목사! 누가 천국 가는지는 아시지요? 성령의 목사, 은사와 권능의 목사, 진정 주님의 정신과 얼이 있는 목사 만이 성도를 살리고 도울 것입니다. 


13. 사람들의 영을 분별해 주고, 깨끗하게 해 주는 은혜

사람의 영의 정체를 모르면 그의 신앙과 삶은 언제까지나 답보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한계와 약점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라고 성령을 부어 주셨는데, 어리석은 자는 그 성령님을 구하지도 않고 언제나 자기가 주인 되어 그 분을 무시하며 평생을 살아 가지요. 참으로 무지몽매하고 안타깝고 기가 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영분별의 은사를 받아 사람의 영의 정체를 알고, 바로 지도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 진정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오늘날 거듭나지 못한 채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엉터리 교인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14. 귀신을 쫓아 주는 은혜

찰스 크레프트의 <사악한 영을 대적하라>는 책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1/3 정도가 귀신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말을 인용하는 저를 이상하게 보세요? 못된 교인들을 보면서 정말 저 사람 속에는 귀신이 몇 마리나 들었나 하고 스스로 물어 본 적이 없으세요? 그의 머리에 손 얹고 뭐라고 한번 기도해 보셨나요? 무엇이 보였나요? 목사의 눈에 귀신이 보이고, 귀신을 알아야 내쫓지요. 저는 기도하다가 계시의 은사로 환상, 영분별, 지식의 말씀, 투시, 영안이 열렸습니다. 일례를 들면 아파서 기도 받으러 온 사람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보면, 몸 속의 실핏줄까지 다 보이는 경우가 30% 정도 됩니다. 성령님이 모든 것을 투시로만 보여 주시지는 않으니까요.

 

환상, 투시, 영안, 지식의 말씀, 방언 통역, 예언의 말씀, 영 분별... 등의 계시의 은사들을 종합하여 악한 영과 사람을 분별하고, 실제적으로 그 영혼을 살리며, 병을 고치며, 삶의 범사를 도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있던 바로 그 권능들입니다. 

(2:43)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사도(使徒)들로 인()하여 기사(奇事)와 표적(表蹟)이 많이 나타나니,

 

15. 성도들을 영적으로 세우는 은혜

성령의 목사가 아니면 성도들을 영적으로 절대로 절대로 세울 수 없지요. 사람은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만 남에게 가르칠 수 있어요. 성령 받지 못하고, 영적 세계를 모르는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세계를 가르칠 수가 없어요. 기껏 해야 혼적 설교, 이성적, 상식적, 합리적, 현실적 범주 안에 머무는 설교 밖에는 할 수가 없어요.

 

영적인 영역을 터치할 수가 없어요. 목사님 자신이 혼적 한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또한 현대인의 생리에 맞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설교는 성도의 영혼을 살리지 못해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의 기독교는 神靈(신령)과 眞情(진정)의 종교예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禮拜)하는 자()들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禮拜)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自己)에게 예배(禮拜))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다시 말해 우리 기독교는 영적인 종교이며, 성령의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고, “성령을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성령의 종교를 말합니까?

 

16. 교회를 그야말로 神靈(신령)하게 만드는 은혜

교회가 왜 신령합니까? 말로만 신령합니까? 실제로 신령해야 신령하지 않나요?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나타나시고 역사해야 신령한 교회지요? 사람이 설치고 인본주의적인 말들이 난무하는 교회가 어찌 신령합니까? 그건 신령한 교회가 아니라 세속적인, 가장 세상적인 교회이지요. 계시록이 말하는 타락한 음녀의 교회지요.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 현상은 말세로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17.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완성하는 은혜

우리 기독교 신앙과 복음, 교회, 모든 역사는 다 성령 안에서 되어지는 역사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진행하고, 성령으로 결론지어져야 진정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령운동의 방향성의 문제

진정한 올바른 성령운동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저는 “골방의 기도, 깊은 말씀 묵상, 올바른 균형의 신학, 정상적 교회생활속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성도의 영적 無知(무지)에서 나온 성령 사역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일반 성도들도 얼마든지 성령의 사람이 되고, 은사를 받고, 능력을 행할 수 있으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신학이 없고, 말씀의 기초가 약함으로 반드시 마귀의 미혹에 넘어 가고야 맙니다. 그들은 분별력을 갖지 못함으로 절대 바른 성령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많은 양신 (  ; 귀신과 성령님) 받은 성령 사역자들을 보아 왔습니다. 자기는 성령 사역을 한다는데 사실은 귀신이 들어 귀신 사역을 하는 것이지요. 미혹으로 영혼들을 노략하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목사님들이 바르게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성령 사역의 ! 오직 길은 사도인 목사님들 만이 바로 있을 것입니다. 성령사역의 길을 걷는 목사님들도 절대로 미혹의 영을 경계해야 것입니다. 성령사역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이 타락하고 변질되고 도태되어 갔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목사님들이 분명히 성령 받아야 하고, 성령 받은 성도들을 바로 지도하지 못하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온갖 무당 푸닥거리가 난무하게 되고, 성령사역은 정통적 교회에서 퇴출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오직 성령으로 살기 원하며, “오직 성령으로 목회하기 원하며, “성령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 만들기를 소원하고 또 염원합니다. “성령 사역”하는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신유”, “영분별

方言(방언)이 왜 중요하냐구요? 저는 우리 장로교 통합 교단의 목사님들이 전혀 방언을 사모하지 않는 것을 너무나 기이히 여깁니다. 그것은 신학 때문이며,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에는 성령 신학이 제대로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방언없이는 결코 기도의 깊은 세계가 열리지 않거든요. 아니 방언없이는 진정 기도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말로써 하는 기도는 결코 자기 생각의 범주, 이성의 한계, 현실의 인식 세계 이상을 넘어가지를 못해요. 일반 기도는 응답의 비율이 5%도 되기 어려워요. 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땅에 전부 떨어지고 말지요. (3:3) ()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情慾)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그런데 방언기도하면 영이 자유함으로 그야말로 기도의 차원이 달라지지요. 영계를 넘나 드는 전천후 기도 생활이 가능해지지요. (2:4) 저희가 다 성령(聖靈)의 충만(充滿)함을 받고 성령(聖靈)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方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방언기도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내 영이 하나님께 직고하는 기도이기에,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100% 응답이 되지요. 저는 늘 설교에서 일반적인 말로 하는 기도와 방언기도를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고물 트럭과 고속도로를 달리는 벤츠승용차에 비교하곤 합니다. 방언 기도는 100% 응답되는 성령님이 직접 하시는 기도입니다. 저는 목사님들이 꼭 방언 받고, 유창하게 방언기도 하기를 바래요. 그래야 비로소 기도의 세계가 제대로 열리지요. 

 

神癒(신유)가 왜 중요 하냐구요? 오늘날 사람들은 영 혼 육이 다 병들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자, 정신병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아아! 간단한 축사로 해결할 영혼들을 일평생 동안 정신병원에 가두어 놓고 그 인생을 망가뜨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가슴이 무너집니다.

진정한 복음은 그들을 실제적으로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귀신 들린 자는 逐邪(축사), 정신병자는 神癒(신유)로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현장에 언제나 축사와 신유가 나타 나야 합니다. 목사가 따로 안수하지 않고 예배를 인도만 해도 귀신들이 떠나고,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성령이 덮고 계시는 권능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부흥회를 나가면 공개적으로 신유사역을 행합니다. 온 교인이 보는 앞에서 실제로 기도하여 그 자리에서 병을 고칩니다. 그러면 반드시 신유의 기적이 일어 납니다. 10명을 기도하면 현장에서 2-3명은 완치가 되고, 보름 이내에 확인해 보면 절반 이상이 신유를 경험합니다.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고치는 것이지요. 악한 영에 붙들려 있고, 마음이 온통 부정적인 사람을 단순한 말 뿐인 능력이 없는 설교로 어떻게 교정을 합니까?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엉터리 영적 싸움일 뿐이지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영 혼 육을 치유하는신유의 복음입니다. 

靈分別(영분별)이 왜 중요하냐구요?

사람을 붙들고 있는 영의 상태가 있습니다. 이 은사는 오래 기도하여 실제로 영분별 은사를 받고, 사람을 붙들고 있는 영이 보여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장로가 지속적으로 목사님을 괴롭힙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한다고 합니다. 만일 목사님에게 그 장로를 붙들고 있는 영의 정체가 파악된다면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장로를 붙든 영이 올바르다면 목사님이 회개해야 할 것이고, 장로를 붙든 영이 귀신이라면 추방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를 붙든 귀신이 떠나고 나면, 그 장로는 되돌아 옵니다.

 

영분별은 여러 각도에서 목회에 반드시 필요한 은사입니다. 목사님들이 사실 기본적인 영분별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영적 세계의 영분별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목회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일반적으로 분별하는 것 외에 목사님은 영적으로도 깊이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해야 실제로 그 신앙생활을 올바로 지도할 수 있습니다. 속이는 성도, 거짓말 하는 성도, 음란 간음하는 성도, 목사를 해칠 성도, 이단에 빠져 있는 성도들도 얼마든지 양으로 둔갑하고 가까이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돌아 보면 지나 간 20043월은 제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은 하늘을 둥둥 떠 가는 성령충만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생각조차도 거룩해지는 신령한 경험 속에 살았습니다. 그 세계는 그야말로 천국의 세계이지요. 그 뒤에 차츰 차츰 식더군요. 제 경험에 의하면 장기금식을 하면서 영성훈련에 박차를 가하면,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갑니다. 근신하며 오직 성령님 그 분에게만 주목할 때에 대략 그 기간은 1개월에서 3개월 정도 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부패성이 성령 충만한 상태를 지속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난 6여년 간에 성령 충만 상태에 5번 정도 들어 간 듯 합니다. R.A. 토레이 목사는 일생 동안 42번의 성령 충만을 체험했다고 고백하더군요. 지난 6년 동안 매일 저녁 <365 성령집회>를 하면서 약1,500여 편의 성령 설교를 했습니다. 300여 권의 성령 서적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라 틀린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배우고, 바로 잡았습니다. 작은 교회이기에 기탄없이 마구잡이로 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들과 목사님들이 성령 세례를 경험하고,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늘 동행해야 합니다. 일생에 자주 자주 성령 충만한 상태를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소원은 이 글을 읽는 모든 목사님들이 저처럼 성령 받고, 진정 권능이 넘치는 기도의 경계를 돌파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자랑도 아니고, 하나의 도전을 드리고 싶은 간증 같은 것입니다. 혹시 무례하게 느껴지셨거나 자기 자랑처럼 보였거든, 용서해 주세요. 저는 제가 섬기는 교회 규모로 보나, 제 주제로 보나, 자기 자랑할 만한 그릇이 전혀 못됩니다. 그냥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부어 주신 성령의 역사와 은혜를 나누고 싶은 것 뿐입니다.

  

! 이제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따라, 기도해 보세요. 기도는 量()입니다. ()이 아닙니다. () 이전에 절대 質()을 말하지 마세요. 당신이 기도 무릎을 오래 모으는 만큼, 성령님이 나타 나시고, 일하십니다. 기도하려고 하다가 3시간을 엎드려 잠만 자다 일어 나도 3시간 기도한 것입니다. 저녁에 기도하며 잠들고, 새벽에 기도하다 깨면 밤새 내내 기도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기도훈련 덕에 수면기도를 참 많이 하고, 꿈을 통해 성령님의 계시를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든 기도한다는 사실! 이게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말을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 자리에 머물러 있는 긴 시간을 보십니다. 신음을 보십니다. 금식을 오래 하면 기도가 안됩니다. 정신이 가물 가물 하는데, 무슨 기도입니까? 그냥 심신이 다 고갈된 채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냥 모든 것을 선물로 부어 주십니다. 우리의 말의 기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세와 정신을 보시는 것이지요. 

영적 세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판단, 지성, 이성의 세계 저 너머에 있습니다. 성령님을 만나고, 깊은 영계에 들어 가 본 사람 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라면 반드시 그러한 세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창합니다.

 

기도와 아울러 금식하는 분들이 아실 것이 있습니다. 장기 금식을 오래 하면 뼈가 상합니다. 저는 무릎과 허리, 그리고 치아가 약해졌습니다. 특히 무릎의 고통이 심합니다. 건강학적인 처방을 꼭 겸하십시오. 가능하면 보름 이상은 금식하지 마시고, 대신 기도 시간을 많이 가지세요. 언제나 먼저 간 경험자의 말은 도움이 되잖아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건 내 계획대로 안되는 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많이요? 사람 사랑도 하나님의 부어 주신 은사입니다. 샬롬! 저의 오직 하나의 소원은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 나는 그 날을 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목사님들이 성령에 대하여 열리고,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사역하는 그 날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의 군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목표는 한국의 5,000 교회 이상에 성령의 불이 붙는 그 날이 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모하며, 눈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를 위하여 五能 福音 (오능복음- 신유의 복음, 문제 해결의 복음, 축복의 복음, 은혜의 복음, 은사의 복음)”悔心(회심)의 말씀을 제 사역의 모토로 나아 갑니다. “성령님! 한국교회에 나타나 주세요. 다시 초대교회의 성령의 불붙는 그 역사가 이 땅 위에 재현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저의 이 원대하고 간절한 소원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아침 7! 몇 시간 동안 글을 썼네요. 읽기도 힘든 이 긴 글들을 누가 과연 읽어 주실까? 아니 공감해 주실까? 내가 가장 바라는 것! 어느 분이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며 충고해 주실까?

 

오늘도 좋은 날이 되세요. 주님의 평안을 전합니다. 샬롬!

 

주일을 하루 앞두고... 새성교회 배종부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