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리스도인이 “ 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왜 저에게는 불행하고 안좋은 일들만 생기죠? 왜 안좋은일들만 제 주위에 생기는거죠? 안믿는 사람들은 저처럼 안좋은 일들이 안생기는데.” 이런식으로 얘기를 하면 어떻게 답을 해줘야할지에 대해 교수님의 조언 듣고 싶어 이렇게 글을 씁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시 73: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짐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詭譎)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왜 불신자와 달리 성도가 매일 고난을 당하는지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기 전의 악습에서 손을 떼지를 않거나 변화가 너무 느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벌을 하시지요. 죄에서 손을 떼라, 죄악에서 떠나라고 징벌을 내리시지요. 그것이 성도가 당하는 고난이고 고통입니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의 의미는 죄를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이고 경고입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전부 죄와 결부될 수는 없습니다. 고후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가시가 자신이 받은 엄청난 계시로 교만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 바 있고 요 9장에서 소경이 하나님이 하실 일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고 하는 말씀도 있지요.
그러나 99퍼센트는 내가 보기에 죄 때문에 고난이 있습니다. 철저한 회개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죄에서 온전히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에 이르는 방편입니다.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이나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겠지요? 그러나 저들은 불신자로 죽었습니다. 시 73편 기자가 말한대로 건강하고 복을 누리며 살았고 죄를 지었음에도 그렇게 고통을 당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평안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불신자는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 분깃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영원한 축복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지요.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시 17:14)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을 (택하지 않은 자들) 징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온전히 거룩함을 이루어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고난이 옵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성도는 아름답게 빚어져 하나님의 손에 귀한 일군으로 사용을 받겠지요.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전략적 모델이란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지요. 욥은 3:25에서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라고 탄식하였는데, 그는 건강하고 부유한 상태에서 주님을 섬길 때에 재앙이 오면 어찌하나, 병에 걸리면 어찌하나 하고 두려워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두려움이 현실화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욥은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우주적 의의를 지니는 전략적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욥의 순전성을 하나님은 사단에게 단언하였고 사단은 고난을 통해 시험을 하면 욥도 별 수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리라고 주장하지요.
욥은 고난을 통해서 귀로 듣기만 하던 신앙에서 하나님을 뵙는 신앙에로 진보 상승했다고 할까요?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성도들에게 고난은 성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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