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많은 이들은 이 계시록 말씀에 언급된 낙원의 생명나무 과실은, 죽어 천국에 가서 먹으리라 생각할 지 모른다. 아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먹어야 한다. 만약 먹지 못한다면 그는 성도라 할 수 없다. 계시록을 많은 이들이 오해하여, 재림 직전에 나타날 일들에 대한 예언 정도로 이해한다. 그것도 잘못된 판단이다. 계시록은 지금 신약시대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영적 사건들을 만화처럼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은 환상 그림들로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할 때,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만화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그림에서 어린 양은 7뿔과 7눈을 가졌으며 몸에 핏자국인지 상처를 갖고 있었다. 이런 만화 그림을 불신자들이 본다면 "이 어린 양은 왜 이렇게 생겼어?" 양이 뿔이 7개나 있고 눈이 7개나 있나? 여기 상처도 보이네. 다쳤구나! 그런데 왜 뿔이 7개나 있고 눈은 7개나 있어? 정말 양 같지 않은데! 라고 할 것이다. 불신자는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자 속죄 제물로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님의 상징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데 7뿔이나 7눈은 무엇을 상징하나? 뿔이란 구약에서 권세나 권세자를 (통치자) 상징한다. 그리고 7이란 수자는 만물을 창조한 1주간 7일에서 나온 수자로 완전의 상징이다. 그래서 7뿔은 완전한 권세 곧 우주적 권세, 전 우주를 통치하는 권세를 상징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만왕의 왕"이나 '만주의 주'가 된다 (계 17:14, 19:16). 그리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고도 했다 (계 1:5).
그렇다면 7눈은 무슨 상징이냐? 그것은 완전한 지식, 전지하심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마 28:18) 하셨다. 즉 우주의 전권이 그에게 주어졌다 (단 7:14의 성취). 그분은 물론 전지하시다.
이렇게 계시록은 영적 실체를 만화 그림으로 그려서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묵시 문학 장르에 속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환상 문학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상징성을 생명으로 하는 책이고 상징들의 의미를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사용된 상징들은 구약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것들이기에 구약을 잘 알면 계시록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생명나무! 이것은 창 2:9, 3:22, 24 등에서 에덴동산 낙원에 있었던 것으로 언급되었다. 극과 극은 만난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 계시록은 끝의 책, 그래서 서로 만난다! 창세기에서 실락원을 통해 생명나무는 인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래서 꿈과 이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도교의 신선이 되어 영생한다는 사고나 진시황이 서복을 동방으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는 사건이 생겨난 것이다 (장량췬 張良群, '서복과 한반도'). 인류는 원시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알게 모르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회복되었다. 낙원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마 12:28)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어떤 의미에서 '낙원'이다. 둘은 같은 실체를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 왕권"이란 사고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그분의 통치권이 임한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낙원인 셈이다.
주님은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김세윤 교수 같은 이는 "칭의 유보론"을 주장한다. 예수님을 믿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선고는 지금 받아도 최종적 선고는 최후 심판 때, 우리의 삶의 형적들을 고려해서 선고되리라는 가설이다. 그런 가설이 바울 신학에 적절한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의 유기적 통일성을 믿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감동하여 기록된 것이기에 서로 간 모순이나 대립이 없다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요한복음 구절에서 우리는 믿는 자는 지금 여기서 이미 영생을 얻은 자로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여기 우리가 얻은 영생은 계시록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에 상응한다. 예수님을 믿어 얻는 영생이 곧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결과이고 생수의 강물을 마시는 결과이다. 즉 그것들이 서로 다른 실체들을 지시할 수 없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예수님은 겔 47장에 묘사된 그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동으로 흘러가다가 아라바 계곡에서 요단강과 합류해서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그 생수의 강물은 결국 믿는 성도들의 뱃속에서 흘러나는 생수라 하셨고, 그 생수의 강물은 성령님을 상징한다고 하셨다 (요 7:38).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 문 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흘러서 사해로 들어가 사해 죽음의 바다를 살리고 그곳에 풍부한 어족이 살아나고, 흐르는 강 좌우 둑에는 생명나무 과실들이 주렁 주렁 열린다. 이런 환상은 믿는 성도들이 받을 성령님의 충만을 상징한다고 해석해 주신 것이다. 겔 47장의 영상이 계 22:1-2에서 차용되어 제시되고 있다:
계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수 강물이 우리 심령에 흐른다. 흐르지 않고 있다면 가짜 성도이다. 아니면 아직 거듭나지 못했고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한 성도이다. 기도해서 성령 체험을 꼭 해야만 한다. 성령세례를 체험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기도할 때마다 성령충만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심령에 생수의 강물이 흐르면 그곳엔 반드시 생명나무들이 심겨지고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게 되어 있다. 그 생명나무 과실들을 이제 따서 먹는 것이다. 지금 그런 삶을 우리 성도는 누려야 한다. 먼 훗날 천국에 가서 그럴 것이다 라고 오해하지 말라.
그리고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유한다. 즉 우리가 성령충만해서 생수의 강물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심겨진다면, 그 과실들만 아니라 잎사귀들도 유용하다. 그 잎사귀가 무엇을 지시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답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는 분명하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 우울증 걸린 자, 삶의 의미와 목표를 상실한 자, 귀신들린 자들,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여 치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낙원이 이미 회복된 상태이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지속한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낙원을 우리 심령에 세워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생명수 강물을 마실 수 있다.
어떤 곳에서 누군가 말을 하길,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라는 말씀을 지적하며 다른 신약교수는 여기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유한다는 말씀은 "만국을 치유했던"이란 의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도 헬라어 원문을 근거로. καὶ τὰ φύλλα τοῦ ξύλου εἰς θεραπείαν τῶν ἐθνῶν (그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열방의 치유를 위함이다 the leaves of the tree are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 NRSV). 여기 묘사는 사도 요한이 미래 어느 시점에 자기를 두고 (투사하여) 자신의 과거, 곧 천국 생활에서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그런 묘사가 아니라, 지금 신약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현재 시점으로 묘사한 것이다. 지난 과거에 세상을 치유했던 그 잎사귀들이란 말씀이 아니라 그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지금 세상 민족들을 치유하고 있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낙원은 지금 우리 심령에 임해 있다. 거기에 생명수 강물도 흐르고 생명나무도 많이 자라야 한다. 그래서 나도 누리고 세상도 치유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의 성령충만한 삶은 자신의 삶도 능력있게 만들어 주고 세상 무수한 민족들을 살리는 방편이다. 누가 이렇게 의미 충만하고 능력 충만하며 기쁨 충만한 삶을 고난의 길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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