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엘리엇 JIM ELLIOT (1927-1956), 그의 고향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입니다. 숲과 자연을 즐기던 순수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 때부터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 그는 교과서와 함께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오랫동안 기도한 뒤, 이국땅 남아메리카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청년 선교사로 순교한 제임스 엘리엇과 그의 부인 (순교지에 가서 전도하고 이후 재혼하고 다시 남편 죽고 다시 결혼)
시카고의 기독교 명문 휘튼 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비전을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의 순간들이었습니다. 2학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남아메리카의 어느 국가에 가서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원하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성경 번역을 위해서 헬라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은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엇이 그의 탁월한 영적 은사를 미국에서 교회개척사역에 집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사람의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기도한 뒤 그는 이국 땅, 남아메리카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 번씩 들어야 합니까?” 그는 에콰도르에서 사역했던 선교사와 교제하며 아우카 부족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이 한번도 전해지지 않았던 사람들, 즉 미전도종족) 대해 들으며 그의 갈 길을 정했습니다.
짐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둘 다 에콰도르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도착한 뒤 거의 일년이 지나서야 그들은 마침내 약혼하였습니다. 1953년 10월 8일 그들은 에콰도르 쿠이토에서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엘리엇은 퀴추아 인디언 사역을 계속하였으며 아우카족에게 들어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1955년 가을 항공 선교사 네이트 세인트는 아우카 마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다음 달부터 엘리엇과 여러 동료선교사들은 호전적인 부족민들과 친구가 될 목적으로 비행기에서 선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이렇게 길을 닦은 후에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이들이 간단한 짐만을 챙긴 채 잔인하고 독하기로 이름난 아우카 족속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조그만 소형 비행기를 타고 해변에 내린 이들이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지 닷새 째 될 즈음, 선교 본부에서는 이들에게서 소식이 없자 혹시 하는 생각에 비행기를 보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 해변에서 다섯 명의 청년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1956년 1월 8일 다섯 명 모두 아우카족 전사들에게 창과 도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해변가에 그들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뽑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라이프 지와 타임 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라이프 지에서는 이 사건을 10페이지에 달하는 기사로 다루면서 “그들은 부인들과 퀴추아 인디언과 히바로 인디언 사역을 하면서 아우카족을 알게 되었다. 아우카족은 수 백년 동안 외부인들은 모두 다 죽여왔다. 다른 인디언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아우카족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라고 (What a unnecessary waste!)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멀리 남미까지 가서 제대로 일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무모한 선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한 기자가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찾아가 인터뷰를 하면서 또 다시 이런 말을했습니다. "얼마나 낭비입니까? (What a Waste!) 그러자 그 당시 20대 초반밖에 안 되던 그의 아내가 그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 뿐입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Elisabeth Elliot
나중에 엘리엇이 시카고에 있는 휘튼 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시절부터 적었던 글과 일기들이 공개되었는데, 그의 아내가 그것들을 모아서 출간했습니다. 그 속에는 깜짝 놀랄만한 말들이 두 가지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들을 적을 당시 엘리엇은 겨우 19살이었습니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가 29세였는데, 그렇다면 그로부터 10년 전에 이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 말입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주님 성공하게 하소서..높은 자리에 오른다는것이 아니라 제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께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짐 엘리엇은 이 땅에서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전능자의 그늘” (Shadow of the Almighty) 아래서 그분과 함께 풍성한 삶을 살기를 구하였습니다. 그 삶의 길이가 어떠하든지 간에!!! 아마도 그는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0:10에서 말씀하신 “풍성한 삶”의 비밀을 힘써 추구했고 마침내 그 비밀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일기장의 한 쪽 구석에 이런 글도 적어놓았습니다.
"결코 잃을 수 없는 것 을 얻기 위해 언젠가는 놓아야 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what he cannot lose!)
이 젊은이들의 아내 다섯 명은 한 두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남편이 순교한 그 나라를 찾아갑니다. ‘우리 남편들이 못다한 일들을 우리들이 마저 해야 한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아우카족을 다시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일년간 간호사 훈련을 받고 아우카족에게로 갔는데 아우카족은 여자를 해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하여 부인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목숨을 걸고 그곳에 갔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우카족을 위해 여러 해 동안 헌신하였습니다.
아우카족의 추장이 어느 날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서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인의 말을 들은 아우카족은 감동을 받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우카족의 추장이었던 사람이 빌리 그레함이 주도하는 한 예배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처럼 그분들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짐 엘리엇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그의 선교 사역은 결국 죽음으로 금방 끝났지만 복음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되는 죽음이었습니다.
또한 다섯 사람의 선교사가 피살된 지 36년이 지난 1992년 6월 11일, 이곳 와오라니 우림 지역에 외딴 마을 티네노에서는 감격적인 신약성경 봉헌 예배가 엄숙하게 드려졌습니다. 75명의 와오라니 인디안 기독교인과 수명의 성경번역선교사, 봉헌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온 손님들이 함께 한 예배에서는 와오라니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와오라니 기독교 지도자가 잔잔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와오라니 인디안 기독교인들 가운데 3명은 5명의 선교사 살해에 가담한 사람들로 이들은 현재 와오라니 교회의 담임목사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이 살해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이 죽은 마을에서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겨났으며, 엘리엇이 죽고 나서 태어난 아들이 그 교회 중 마을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미의 열대 우림 속에서 죽은 지 40년 후인 1995년, 엘리엇이 졸업한 휘튼 대학에서는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엘리엇으로 인한 부흥과 선교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Elisabeth '48 with her daughter, Valerie '76, in the 1970s
I was born among the Quichua people in Ecuador, where my mother, Elisabeth, and father, Philip James Elliot ’49, were sharing the gospel with unreached people. Less than a year later, my father was killed along with four other missionaries while attempting to make friendly contact with the Auca people in the Amazon. The last thing my father said to my mother was, “Teach the believers, darling, we’ve got to teach the believers.” So my mother continued with the work he had begun.
My mother was able to write over 30 books about obedience, trust, and suffering because of her experiences, and her speaking was a gift to the thousands of Christians who heard her over the years.
In her last ten years with dementia, she was peaceful, and I saw that serenity frequently when we sang hymns to her. When she and I would sing together before the dementia set in, she would point out special lines that she loved. She knew hundreds of hymns, and I’m so glad she sang them to me throughout my childhood, especially at night.
My mother taught me to pray to our Father, always starting her prayers with “Dear Father.” I learned trust and contentment at her side. God’s tender shepherding of us and learning that his will is the most important thing to pursue in life were mentioned almost daily. I learned to laugh and enjoyed many funny, fascinating, and fortifying stories.
Now my mother has gone on to see Jesus Christ face to face, her faith being made sight. The absolute principle she lived by was to give any suffering to him, and I’m so thankful for her exa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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