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1
샬롬!
교수님 은혜와 은총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요?
사전적 의미를 보면요
은혜?
1.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2. 하느님, 하나님 또는 부처님의 은총.
은혜와 은총을 혼용해서 사용가능한가요?
답변 1
은혜란 말은 히브리어로 "헨" 헬라어로 xaris 카리스라 하지요. 이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잘 보여서 윗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를 말합니다. 윗 사람의 눈에 벗어나면 아랫사람은 승진 길도 막히겠지요 아예 그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요 하나님의 눈에 벗어나면 직장 정도가 아니라 생명도 위험하고 영원히 살 수가 없겠지요
창 6:8에서 노아가 여호와 보시기에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노아가 야웨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곧 하나님께서 노아를 잘 보아 주셨다란 뜻이겠지요.
그런데 은총이란 말을 한글 성경에서 찾아 본다면, 출 33:12 같은 곳에서 나타나는데, 히브리어 "헨"; 헬라어 "카리스"로 은혜란 말이나 동일합니다. 그런데 창 32:11에서 "은총"이라 번역된 말을 찾아 본다면, 히브리어 "헤세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이군요. 헤세드란 히브리어는 "인자"로 보통 번역되지요.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불변 사랑, 언약 백성을 향한 사랑을 말합니다.
제가 보건대, 한역에서 은혜와 은총은 히브리어 "헨"이나 헬라어 "카리스"의 번역인데, 번역자들이 달라서 (성경 번역에 참여해 보았는데, 역자들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참으로 힘들고, 나중 성경 전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통합 검토하지만, 우리의 경우에 역부족이거나 아니면 태만해서 제대로 전부를 일관성있게 처리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한 팀이 번역하더라도 일관성을 유지하고 못하고 은혜라 했다가 은총이라 했다가 한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겠지요.
성경 번역은 그래서 아주 전문적이고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교수들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방학 기간에 합숙하며 팀을 이루어 번역하는 방식인데, 전문적인 성경/ 성서공회 소속 학자들이 없습니다. 자금도 부족하니 급히 하려는 목적도 있고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질문 2
안녕하세요.
성경을 읽을 때 비평가들의 분류를 참고해서 읽다보면 조금 놀랍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성경을 문헌자료로 보고 영감을 무시한 기록물로 봅니다. 이런 경우에 오는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2
성경을 대할 때 신앙의 눈으로 보느냐? 불신앙의 눈으로 보느냐? 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리츨이란 비평가는 성경도 여타 역사문헌처럼 철저한 비평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고하고, 1) 방법론적 회의, 2) 유추의 원리 3) 상관성의 원리 등을 주창했지요. 일단 성경도 역사적 오류가 많다고 전제하고 보라는 것이고, 현재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도 불가했다 (유추의 원리),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하나같이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기적이 자리하 여지는 없다고 초자연적 현상을 배척하지요. 이런 전제하에서 성경을 대하는 것을 역사 비평법이라 하지요. 그런 시각에서 성경을 대하면 지옥, 귀신, 기적들은 모두 미신적 사고를 가졌던 원시적 세계관의 발로이지요.
비평가들이란 중생의 체험이 없거나 있어도 성경의 신빙성과 역사성을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데, 서구에서는 성경이 고전 중의 고전이므로 신앙없이도 얼마든지 연구해서 박사되고 신학교수 되지요. 그래서 신학이란 기도없이는 또한 성령님의 내적 증거가 없다면 아주 위험한 일이지요. 기도만이 성령님의 조명만이 성경을 확신하며 영혼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혀 성경을 이해하고 감사하게 해 줍니다.
다음 간증은 (뉴욕 퀸즈 장로교회 김태열 사모) 우리의 입장을 예증해 줄 것 입니다
크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손
1969년은 내가 미국에 온 이래 가장 바쁘게 일한 한 해였다. 뉴욕 퀸즈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남편의 일을 돕는 것은 물론 낮에는 뉴욕시의 주택과 사회복지 직원으로 근무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교회 주보 만드는 일부터 교사 서기 회계일까지 내 몫이었다.
당시 뉴욕엔 한인이 600여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서로의 친목을 교회에서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편인 한진관 목사는 한국에서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유학을 와 태평양 신학교와 음악대한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했다. 계속 신신학을 공부했기에 신앙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었다. 때문에 교회 개척도 우리의 지식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일날 남편은 강단에 서면 모든 예배순서를 1시간 이내에 끝내곤 했는데 설교는 미리 작성한 것을 읽어 내려가는 형편이었고, 그것도 주로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의 내용에 성경을 조금 가미한 정도였다. 그러니 설교라기보다는 종교철학 강의였다. 이 무렵 미국을 방문하셨던 어머니도 "얘, 네 남편이 설교하는 것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푸념하셨다.
따라서 교인들도 예배만 끝나면 친교실에서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남자들은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쇼핑하는 일에 더 치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한글학교를 설립하여 교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인 봉사센터를 설립, 미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교포와 갓 이민 온 분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일을 했다.
교회가 영혼 구원보다는 사회복지와 봉사에 더 많은 힘을 쏟았던 것이다. 성도는 늘어났으나 그것은 은혜를 사모해 모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도움을 받기 위해 모인 것 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열심히 일했으나 만족은 없었다. 오히려 얼굴을 찡그리며 집에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다.
"여보, 우리가 목회하지 않는다고 밥 굶겠어요? 차라리 직장을 가져요."
견디다 못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내 직장의 봉급은 남편의 사례금보다 많았고 의료혜택은 완벽했다. 더욱이 남편의 사례금은 거의 헌금으로 드려졌기 때문에 가계는 내 수입으로 꾸려나갔다. 따라서 나는 교만이 팽배해 있었다. 교회가 편안치 못하니 가정도 편안치 못했다. 직장생활도 짜증스러웠고 모든 것이 실망투성이였다.
1961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온 나, 전공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가 모교에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 교수를 하리라고 다짐했는데 갑자기 목사 아내가 되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건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피곤과 짜증, 갈등과 원망 뿐이었다. 하루하루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은 좌절에 빠지곤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결코 좌절과 낙망 속에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드디어 크고 부드러운 손을 나와 우리 가정에 내밀어 주셨다. 목회에 기쁨을 얻지 못하고 좌절에 빠져 있는 동안 뉴욕 여러 곳에 교회가 많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은혜있는 교회를 찾는다고 했다. 무엇이 은혜있는 교회란 말인가? 나로선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성도들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고민스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왜 주님의 교회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고 냉랭하여 성도간에 교제가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과 가정, 교회 어느 하나도 나를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해 하루하루가 지겨웠다. 나중에는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이웃교회 부흥회에 다녀오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신앙에 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겠소. 이번 부흥회가 참 좋은 것 같으니 당신도 한 번 가 보구려!"
그동안 자유주의 신학에 길들여져 부흥회란 말 조차 못하게 했던 남편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미국에 온 이래 부흥회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고 내 마음도 무엇인가에 갈급해 있던 터라 다음날 저녁부터 집회에 참석했다.
진리의 생수에 목말랐던 내 영혼은 첫날부터 주님의 강한 섭리로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회개의 눈물을 쏟아내던 나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확신이 용솟음쳤다. 그동안 설교를 통해 수백번 이상 들어오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갑자기 내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잘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존재가 거울을 보듯 실체로 다가왔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직장도 나가지 않고 부흥 목사님의 다음 집회 장소까지 가 3일 동안 참석했다. 이빼 비로소 은혜의 의미와 성령충만의 뜻을 깨달았다.
"여보, 우리가 왜 진작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는지 안타깝구려. 이젠 새로운 마음으로 목회합시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남편 역시 나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답고 좋아 보일 수 없었다. 모든 일이 기쁨이요 찬송할 것뿐이었다. 부흥회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삶은 놀랍게 변해갔다.
1) 먼저 성경을 읽고 싶은 소망이 생겨났다. 8년 동안 한번도 들쳐보지 않았던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2) 또 전에는 교회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던 장로님 집사님들이 그렇게 밉더니 이젠 오히려 감사하고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할 정도가 되었다.
3) 또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님과 막혔던 장막이 찢겨 나가는 순간부터 기도의 교제가 시작되 것이다.
4) 가치관도 변화되었다. 예전에는 부잣집의 좋은 가구와 그릇들이 그렇게 부럽더니 이젠 그런 것등리 부질없이 보이고 자족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만 생겼다.
5)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기 시작했고, 음악도 명곡들보다 찬송이 더 좋았다. 성령을 통한 영적 변화는 나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꾸어 놓았다. 영의 눈을 뜨게 되니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감동된 진리의 말씀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꿈과 소망이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이 찬송이 입에서 언제나 흘러 나왔다. 지금까지 세상 일에 연연했던 삶을 청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는 신앙 고백이었다.
6) [세상 직장을 내려 놓다]
그러나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직장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님의 일에 저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다니던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뉴욕시의 공무원은 15년의 임기를 채우면 연금이 나오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나는 14년 6개월을 다녔기 때문에 6개월만 더 있으면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음 속에서 "두 명의 나"가 싸우고 있었다.
"김태열, 그 직장이 어떻게 해서 얻은 것이냐? 미국 유학을 10년을 준비하며 공부했고 유학 중에도 얼마나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느냐? 너의 사회사업과 학위는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이곳의 수입으로 가계를 꾸려 왔는데 그만두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능력과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을 예비해 주시고 더 크게 복내려 주실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담대한 신앙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자"
과감히 직장을 포기했다. 결국 신앙이 승리한 것이다.
질문 3
안녕하세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오류가 있을 수 없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E. Thiele 틸레의 계산법은 몇 가지 변수들을 도입하여 연대기를 조정
1) 유다는 9월부터 1년을 계산했고, 북쪽 이스라엘은 정월부터 계산한다(6개월 차이).
2) 이스라엘과 유다 왕 통치 & 8211 즉위년 계산법과 무즉위년 계산법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전 왕이 죽고 자기가 즉위한 해는 선왕의 해로 해서 계산하지 않는다 (1년이 늦어짐) .
3)적어도 한번은 남북 왕조에서 연대 계산법을 (1월부터 한 해를 계산하다 7월부터 계산하는 식으로) 바꾸었고
4) 이스라엘과 유다는 상대나라의 연대를 계산할 때는 자기 나라 기준으로 계산하였고,
5) 북쪽이나 남쪽은 섭정제도가 있어서 전 왕이 살아 있을때 벌써 후계자가 섭정으로 등극하여 통치하여, 그때부터 계산을 했다 등등의 변수를 도입하여 열왕기서의 연대를 확정했다.
예외적으로 왕하 17장의 통치기간은 잘 맞지 않는다.
위의 내용을 비교, 대조하여 맞추어 볼 수 있는 다른 고대 문헌자료는 없는지요.
답변 3
우리나라 역사를 보시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그나마 고대 역사를 다룬다는 것이지만, 실상 고구려가 주전 37년 건국해서 주후 668년에 망했고, 신라가 주전 57-992년 어간에 존속했지요. 삼국유사가 단군신화를 언급하지만, 역사적 기술로 보기 어렵고 몽골 침략에 불력으로 항거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정성은 가상하나 불교 전설과 설화로 역사적 사실들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역사는 고대사 상고사가 없습니다. 기껏 주전 108년 위만 조선이 알려진 바인데 중국인 위만이 조선에 와서 건축했다는 것이고, 그 이전의 고조선 역사는 오리무중입니다. 한단고기 같은 책이 과연 역사서인지는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고.
여하간 중요한 것은 우리 나라 역사에서 고대로 올라간다면 주전 108년 위만 조선 정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사군 설치와 삼국시대.
그런데 지금 열왕기서에 기술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전 1040년 즈음에 사울이 초대왕으로 세움받고 주전 586년 유다가 멸망하지요. 중국의 서경이 하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 은/ 상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 주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시대를 묘사하긴 하지만, 그것은 열왕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려주지 않고 주로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 중심으로 왕들의 칙령이나 훈시 등을 중심하여 기술되었습니다. 이 서경에서 마지막 주나라 시대가 대략 이스라엘 고대 왕정시대와 그 이후 바벨론, 헬라 시대와 근사합니다.
그만큼 고대 이스라엘 왕정사는 고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구약학계에서 그처럼 오래된 고대 역사를 다룰 때 연대를 정하는 방법은 주전 701년에 앗시리아 산헤립 대왕이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한 사실이 산헤립 비문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 시점을 기준해서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스라엘 연대기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조되는 것이 앗시리아나 고대 애굽 혹은 힛타이트 제국의 문헌들이지요. 고대 애굽의 역사도 전해지는 것은 겨우
톨레미 1세 때 활약한 이집트의 역사가, 헬리오폴리스의 대제사장이었던 마네토(Manetho)의 헬라어로 된 이집트의 역사서 (3권) 《이집트지》에 의한 것이고, 그것도 소실되고 다만 요세푸스 등의 저작에 인용된 부분으로만 전해지는 것입니다. 즉 고대 역사를 기술한 역사 문헌은 아주 희귀하였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들은 ANET라 약칭되는 책이나 (ancient near east texts) COS라 약칭되는 (The Context of Scripture 3권) 책들에 수집 수록되었습니다. 영문인데 참조를 하세요. 신학계에서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주로 영어, 그 다음이 독어, 다음에 불어, 스페인어 등입니다. 신학서적을 읽으려면 이런 언어들에 능통해야 합니다.
요컨대, 이스라엘의 고대 왕정사를 비교 대조하는 자료들은 고고학적 유물들이나 토판들, 비문들 등이 있을 뿐 제대로 된 역사서는 헬라인들이 저술한 (헤로도투스의 역사) 책들 몇 권 제하면 드물지요. 그래서 역사 연대기를 작성하는 것은 학자들마다 다르고 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틸레의 연구가 귀합니다.
질문 4
신명기 17장에 왕의법 세가지가 있다고 하셨는데 두 가지가 궁금합니다
답변 4
신명기서는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모압들 언약의 언약서이지요. 우리가 분석한대로 종주권 조약서 형식으로 분석한다면, 1:1-6이 전문, 1:6-4장이 역사서언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상기), 5-11장, 12-26장이 언약 조항들 (곧 법률 부분; 5-11장은 헌법에 상응, 12-26장은 그 헌법의 법률적 규정들), 28장은 상벌규정 등으로 분석되겠지요. 그런데 신 17장에서 14-20절이 왕의 법에 해당되지요:
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왕의 법 1항: 많은 말 금지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왕의 법 2항: 많은 아내 금지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왕의 법 3항: 많은 은금 금지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왕의 법 4항: 율법서를 복사하여 옆에 두고 주야로 읽으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질문 5
열정적인 강의 너무 잘 듣고 있습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질문 하려는 내용이 강의 내용과는 무관한 내용이라..
(성경은 전체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하셨으니, 아예 무관하진 않겠군요^^)
신약성경의 내용으로 굉장히 고민하고 있다가,
15주차 강의 들을 때 교수님께서 신약 Thm을 하셨다고 하셔서
용기 내어서 교수님께 질문드립니다.
우선 전, 서울 어느 중형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전임전도사입니다.
교회는 지금 담임목사님이 공석이고, 청빙 진행중에 있습니다.
다른 부목사님들도 그만 둔 터라, 현재 부목사님 한분과 저, 두명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헌법상 공예배는 대부분 목사님이 설교 하십니다.)
총여전도회 기도회 모임에서 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고난주간 때에 설교 한 내용이 약간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 중에 예수님께서 \"음부까지 내려가셨다\" 라는 말을 사용해서입니다.
)참고로, 음부(지옥)강하설에 관한 내용은 다른 수업시간에도 조금 다뤘던
터라 어느정도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집사님 한분이 부목사님에게 음부가 뭔가요?라고 질문하시면서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부목사님 귀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부목사님과 면담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음부까지 내려가셨다\"라고 말 한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극심한 고난에 대한 표현이며 이야기였지,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거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거나, 죽은 자들도 구원 받을 길이 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철저히 단절되는
영혼의 고난도 받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흐름 중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부목사님께 설명을 했습니다. 음부강하에 관한 것은
보수주의적 구원관 안에서의 뚜렸한 주관이 있었기에 사실 그렇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부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제가 엄청난 고민에 빠졌고
고난주간부터 요 며칠까지 괴로움속에 살았습니다.
부목사님께서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으로 보는게 안전하다고
하는 것이었씁니다. 예수님이 마음도 괴로워 하셨지만, 마음도 육체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육체의 고난으로 보는게 안전할 것 같다고..
그리고 하나님과 철저하게 끊어졌다고 하는 저의 말은
아주 잘못됐다고 하셨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인데, 예수님이 끊어지면
틈이 생기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제 주장을 뒷받침할 말씀들과 수많은 변론들이 머리속에 맴돌았지만,
제가 정말 크게 잘못 알고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교회 질서 안에서 일단은
아멘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수긍하고 일은 마무리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괴로운 것은 먼저는 지금껏 청년들(제가 청년부 담당입니다.)에게 잘못된 교리를 전했다는 것인가. 라는 자괴감 때문이었고
다음은,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이 도저히 수긍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제 신앙이 송두리째 뽑아내고 새로운 것을 심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교수님, 전 아직까지도 예수님께서,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던 순간 만큼은 육신 뿐만
아니라 영혼도 철저히 죽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죽음이 소멸이냐 수면이냐는 완전히 다른 논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고난이 그저 육신의 국한 된 고난이었다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하실 수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 말하시며 그렇게 두려하셨겠습니까. 일개 사람도 큰 뜻을
품으면 담대히 목숨을 버리는데, 메시야이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렇게
떨 이유가 삼위의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자 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예수님 위에 부어질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서
철저히 얼굴을 가리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상에서 죽으실 때에 예수님의 신성만이 괴롭지 않았다면
그것이 영지주의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쑈하셨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지금까지 제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교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혹시나 저와 제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잘모된 신앙에 이미 길들여져있지 않나..
라는 두려움에... 의도적으로
알고 지내는 목사님들, 저와 교제가 있는 분들에게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이단 종자들과 복음이 뒤섞여서
도무지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인맥도 아니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바 그나마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교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어지럽고 긴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된 신앙에 있다면 정확히 질책해주시고,
아니라면, 이 괴로움에서 얼른 건져주시길 바랍니다.
답변 5
전도사님의 말씀은 보니 틀린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잘못 가르치신 것 없고, 십자가에서 외치신 시 22:1의 말씀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신 (롬 8:3, 고후 5:21) 순간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된 순간이었지요. 정확합니다.
고후 5:21에서
ton meh gnonta hamartian huper hemwn hamartian evpoiese 죄를 알지 못하신 자를 우리를 위해 그가 (하나님) 죄(속죄제)가 되게 하셨다고 하였지요. 그리고 롬 3:25에서 hilasterion으로 (속죄제) 드리셨다고 하셨지요.
이런 말씀들은 십자가에서의 희생 제사가 되신 주님을 말씀하신 것인데,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의 순간에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과 육체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어디서 전도사님은 그런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정확합니다.
그리고 부 목사님의 사고는 조직신학적 사고인데 맞는듯 하지만,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고 보다 현실적이고 신약 본문에 근거한 이해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에 더하여 전도사님의 이해가 옳은 것은 다음 사실들로도 뒷받침 되지요. 마 12:40에서 예수님은 욘 2:6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흘 간의 땅속 깊음에서 체류를 언급하셨지요: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베드로는 시 16:8-11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사망의 쏘는 것에서 해방시키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셨다고요 (행 2:24-27). 롬 10:6-7에서 신 30:12-13, 시 71:20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저갱에로의 내려감이라 했고, 부활을 죽은 자들로부터의 올라옴으로 묘사했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간이 되셨고 사망을 체험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멸하셨다고 합니다 (히 2:14-16).
그리고 흥미롭게도 제가 신약신학으로 Th m을 하신 것을 이야기 하던가요? 맞아요 칼빈에 신약 Th.M.을 공부하러 갔더니 (사실 여기서 2년 Th m하고) 요한복음, 마태복음, 고린도 전서 등을 공부할 때, 전부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고 구약을 알지 못하니 신약적 이해가 전부 막힌 것을 알고 신약 마치고 구약 석사를 하고 박사는 구약전공으로 진학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성경 전체를 보지 않으면 구약 자체로나 신약 자체로 이해가 절름발이가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 성경 전체를 함께 보는 점을 중시하고 그런 견지에서 계시록, 로마서, 사도행전, 히브리서, 마태복음,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 등의 신약 관련 책을, 그리고 구약의 제 책들을 주석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신학과 신약 성경신학 책도 저술하는데 많은 책들을 저술했지만, 아직 전체로 출판하지는 못했지요.
앞으로 질문이 계신다면 언제나 jct95@hanmail.com으로 연락을 주세요. 그리고 부목사님하고 관계를 잘 맺어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잘 하신 것 같아요. 부딪히면 안 됩니다. 내가 물러서고 죽어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어렵지만요.
질문 6
교수님 12지파 땅 분배중 시므온지파는 왜 유다지파의 안에 땅을 분배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6
좋은 질문이예요
우선 우리는 야곱의 후손들이 지파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야곱은 임종 시에 12아들을 불러 유언 축복 기도를 하는데 예언적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자신이 경험한 자녀들에 관한 사항에 근거해서 드리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각기 2, 3번째 아들들) 야곱은 예언하길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동의 병행법으로 구성된 이 예언시에서 우리는 시므온과 레위가 축복 대신에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창 34:24-30에 묘사된 디나의 강간에 대한 보복으로 세겜 사람들을 살육한 무자비한 살육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나중 기업을 분배 받을 때 불이익을 받습니다. 레위 지파는 나중 출 32:27이하, 신 33:8-10에 기록된 대로 시내산 우상 숭배 사건 때 주님의 열심으로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하는 헌신을 통해 성직자 계층으로 부름을 받는데, 그 결과 저들에게 영지가 주어지는 대신 각 지파 영지에서 4개 성읍 전체 48개 성읍을 분배받아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거기서 저들은 레위 성직자로 말씀을 가르치며 혹은 성소에서 섬기는 것이지요.
레위 지파의 경우는 말하자면, 전화위복을 이룬 것입니다. 헌신을 통해서 이전의 처벌을 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흩으지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지만, 성직자 지파로 선택되어 섬기게 되었으니 이것이 복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시므온 지파의 경우에는 제2차 인구조사에서 가장 수자가 작은 미약한 지파로 몰락하는데 (민 26:14; 신 32:8에서 시므온은 아예 예언에서 생략), 가장 수자도 작고 하니 그냥 유대 지파 영지를 조금 떼어서 가장 남편에 위치한 현재 브엘세바 광야 지역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곳을 할당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이란 진공상태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의 실제 현실 삶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 부모일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경험한 자녀들의 성품이나 행동에 근거해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초자연적 요소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장자였던 르우벤은 자기 부친의 첩 빌하와 동침해서 음행한 까닭에 장자권을 박탈당하지요 (창 49:3-4; 대상 5:1).
유다 지파에게 왕권이 돌아간 것은 비록 그가 며느리와 음행했지만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고 나중 애굽 총리가 된 요셉에게 내려갔을 때 베냐민을 데려 오라는 총리의 말에 자기가 나서서 자기가 대신 구금당하겠다고 지도력을 발휘하고 총리를 눈물짓게 만들지요. 그의 지도력은 급기야 유다의 왕권 지파로 올려주었습니다.
질문 7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의들 들으면서 함께 성경을 보고있던 중에 궁금한 점이있어 강의와 상관 없이 문의 드립니다
사사기 1장 13절에 갈렙에 아우요 그나스에 아들인 옷니엘이..라고 나오는데
갈렙의 아버지는 민수기 13장에 여분네라 하고 역대상에서도 갈렙의 다른 형제는 나오지 않고, 그나스의 아들들은 옷니엘과 스라야라고 나오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인데 왜 갈렙이 옷니엘을 아우라고 기록했을까요?
답변 7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첫 사사인데 (사사란 히브리어 쇼펫 [판관 혹 통치자)(삿 3:7-11) 사사란 성령님의 카리스마를 입고 국가적 위기에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통치권을 장악 행사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사사란 (士師) 말은 한문에서 온 것으로 보이고,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재판관이란 의미가 아니라, 3권 분립 개념이 없던 시대의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옷니엘은 대상 4:13에서 갈렙의 형제 그나스의 아들로 언급되고, 수 15:15-19에서도 갈렙의 조카로,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합니다. 삿 1:13은 갈렙의 아우가 옷니엘이 아니라, 갈렙의 아우는 그나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 곧 갈렙의 조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나 원문을 보면 때로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요
고맙습니다
질문 8
안녕하세요.
교수님 유대인들이 절기 별로 읽는 성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인 절기를 알고 싶고 우리 기독교와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수고하세요.
답변 8
절기 (히, 하그) 곧 명절은 구약에서 유월절, 초실절 (77절, 오순절),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 등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전 164년) 수전절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안티오쿠스 4세가 더럽힌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하고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요 10:22에 언급되었습니다.
이 유대인 절기는 출애굽 사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었고 또한 농경력과 연관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유사하고, 초실절에는 밀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이고 유월절에서 7주간을 지내고 다음 날이라 해서 77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밀 추수절이라 해서 맥추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초막에 거하던 때를 회상하여 초막을 짓고 거기서 7일을 지킨다 해서 생긴 이름이고, 수장절은 그 때가 추수할 때이므로 (성력 7월 15일 - 양력 10월 초) 그렇게 불립니다
신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에 상응하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지요. 그래서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지킵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그분의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고, 추수감사절은 미국 청교도들이 지키던 관계를 우리 개신교에서 받아 지키는 것인데, 이는 구약의 수장절과 유사한 성격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 언약 백성으로서 구약의 절기 대신에 예수님의 구속사건 중심으로 절기를 지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약시대의 맥추절을 지키기도 합니다.
질문 9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노아홍수후 그 자손이 온세계로 퍼졌다고 성경은 언급하는데 세속의 역사는 연대가 성경연대보다 너무차이가 나서 두무지 이해가 않됩니다.
정말로 노아홍수후 그 자손만 이 이세상에 퍼졌다면 엄청난 연대 괴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니 페키넨시스니 쟈바 원인 이니등등
시원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9
성경을 믿지 아니하는 일반 과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들은 화석이나 기타 자기들 나름대로 증거를 근거하고 말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말하니, 서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론을 배격하는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점차 진화되어 갔다고 보지요. 그러니까 원래는 수렵이나 하고 나중에 목축 그리고 나중에 농경사회로 발전했다고 보는데 성경은 아예 처음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하지요. 누가 맞는지는 신앙적 차원에서 판단해야지요. 요사이 과학계의 철학 원리가 되어버린 진화론은 창조론과 양립될 수 없습니다.
저 이집트의 피라밋, 거대한 구조물은 주전 2200년 경의 작품이라 하지요. 우리는 그 시대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하지만, 그렇게 고도로 발달된 기하학적 건축물이 건축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1만년 남짓 합니다. 창조된 세계는 그렇게 역사가 길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창조학회의 웹페이지에서 여러 창조 과학자들의 말도 들어 보세요
질문 10
교수님 구약의 5가지 제사법은 자주 보는데도 구분이 명확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외울 수는 없을까요
답변 10
그러니까, 5대 제사라 하면 레위기에 제시된 순서대로 번제 (레 1장), 소제 (레 2장), 화목제 (레 3장), 속죄제와 속건제 (레 4, 5장), 그리고 이런 제사들과 연관하여 제사장들에게 주는 지침들 (레 6, 7장) 등이지요.
번제란 태울 번 제사 제 (燔祭), 그러니까 제물 가죽 벗기고 내장 씻고 나머지는 몽땅 번제단에 태워 올리는 제사로 burnt offering 히브리어로 '올라'이지요. 올라가다란 동사와 연관되는 제물을 태운 향기가 올라가는 제사라고나 할까요 Koehler란 학자는 ZAW 54 (1936):292에서 주장하길, 히브리어 '올라'란 '민하 올라' 곧 올라가는 (불태워져서) 예물의 준말일 것이라 했는데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음에 소제란 히브리어 '민하'이고 (한문으로 素祭, 곧 곡식 제사란 의미) 예물이란 offering 뜻입니다. 소제는 음식으로 하면 곡식 음식인데, 번제나 다른 제사는 모두 육식 음식이지요. 소제는 홀로 드려질 때도 있지만 다른 육식 제물과 동반됩니다. 곡식과 육식이 혼합되어 드려진다는 것이지요. 소제는 그래서 독립적 기능이라기보다 다른 육식 제물들에 동반되는 보조 제물입니다
다음에 화목제란 히브리어로 '쉘라밈' 이는 번역이 의견의 차이로 다양합니다. peace offering, fellowship offering 등. 화목제란 이름 때문에 화목케 하는 제물이란 인식이 있지만, 이 쉘라밈은 감사, 자원, 서원의 의미로 드립니다. 한나가 아들을 주시라고 서원 기도하고 응답받으니 서원 제물로 이 화목제를 드립니다 (삼상 1장). 자원제란 자원해서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께 드릴 때 이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이지요.
다음에 속죄제나 속건제는 모두 속죄제사인데, 속건제는 남의 재산에 손실을 입혔거나 성소 기물을 손상시켰을 때 제사를 드리고 손실된 물건의 값을 120퍼센트로 배상합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가 생각날 때 드리는 속죄 제사입니다.
이에 비해 번제는 헌신의 의미와 국가적 행사 때 주로 드리는데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죄 곧 지었으나 아직 속죄가 되지 아니한 죄를 모두 속죄하는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도 번제를 드리는데 헌신의 의미가 있고 속죄의 기능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전제, 요제, 거제 등도 나타나는데 전제는 음료수라 생각하면 되지요. 전제는 독립적이지 않고 다른 제사드릴 때 동반됩니다. 그리고 요제나 거제는 흔들어 드리거나 받들어 들어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인데 독립적 제사가 아니라 오대 제사를 드릴 때의 방법을 지시할 뿐입니다. 이전에는 히브리어 '테누파'를 요제 (흔들어 드리는 제사)라 하다가 요즘에는 학자들이 특히 유대교 학자 밀고름이 테누파를 거제라고 번역하자고 주장하고 유대교 구약 번역본 TNK성경에서 그렇게 번역했고, 이전에는 히브리어 '테루마'를 거제라 (들어 드리는 제물) 했더니 요즈음에는 역시 앞서 언급한 그 밀고름을 위시한 학자들이 이는 그냥 헌물 contribution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학이란 항상 다른 학문처럼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학문이지요. 잘못된 이해가 바로잡히고 또 다른 가설이 나와서 검토해 보고 더 좋으면 그것을 채용하고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학의 흐름을 파악함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폐기된 이론을 마치 정확한 것인 양 생각하고 성경을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새로운 이론이 다 맞을 수는 없겠지요. 여하간 신학을 할 때는 기도 많이 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 자세는 성경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질문 11
후선지서4권중 소선지서를 왜 1권으로 봅니까?
답변 11
아, 그러니까 그것은 분량이 적으니까 그렇지요. 전부 합해 보아야 이사야 한권 정도 되니까요.
유대인들은 오경도 모세의 저작으로 한권으로 보지요. 그리고 전선지서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이렇게 4권, 후선지서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소선지서 이렇게 4권, 그리고 성문서는 여타 책들을 지시하는데 성문서란 그냥 문서들/ 문헌들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케투빔' (책들)이라 합니다. 오경은 '토라'라 하고, 선지서는 '느비임'이라 합니다. 우리가 역사서라 부르는 책들을 전선지서라 부르는 것은 그 책들이 선지자들의 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상하로 구분하는 것도 원래는 한권이었지요. 구분은 구약의 헬라어역인 70인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경이라 부르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오권으로 나누는 일도) 70인역에서 시작되었지요.
이렇게 70인역으로 - 70인역에서 다시 라틴어역으로 (벌게잇), 그리고 기타 시리아어역이나 다른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지요. 영어역의 성경 책명도 다 라틴어역 - 70인역에서 유래합니다.
질문 12
제사를 드리는 데 있어서 시간이나 횟수는 상관이 없나요?
똑같은 죄를 여러번 지었을 경우에도 한번의 제사로 속죄되는 건가요?
답변 12
제사는 오늘날 예배처럼 정해진 시간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정해진 성막 입구 마당에서 잡아서 번제단에서 드리지요. 특히 안식일이나 절기에는 특별히 해당되는 제사까지 드리지요. 속죄제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속죄 제사로 번역된 하타트, 다른 하나는 속건제사로 번역된 아쉠. 후자는 성소 기물이나 타인의 재산상 손해를 입혔을 경우 드리고 속건제사를 드리고 그와 함께 손해를 끼친 금액은 120퍼센트로 배상하지요 그런데 속죄 제사라는 것은 자신이 법을 범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생각날 때 속죄하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짓는다면 속죄가 불가하겠지요 비록 나는 속죄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즉 부지중에 지은 죄만 속죄가 되고 의도적인 죄는 속죄 불가입니다.
번제는 국가적인 행사 때 주로 드리는데, 번제는 또한 헌신과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했지만 기억하지 못하고 속죄제를 드리지 못한 그런 죄를 전부 속죄하기 위해 드립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온전한 제물을 (정해진 규정에 따라서) 끌고 와서 성막 입구 마당에서 검사를 받고 거기서 잡는데 잡기 전에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고백 기도를 드리지요. 그리고 목을 찔러 피를 받아 번제단에 뿌리고 피는 생명의 상징이기에 그렇게 죄없는 제물이 자기 죄를 대신하는 것을 보고 죄를 깊이 회개하겠지요
질문 13
안녕하세요.
구약의 레위인들은 제사장직을 맡아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예배 인도자는 목회자 즉,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제사와 예배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목사님들을 제사장직으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혹 맞는지요 ~
답변 13
중세기에 카톨릭 교회에서 성직지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소명도 성직자를 부르신 일로만 생각해서 평신도의 일반 세상에서의 삶은 좀 저급한 것으로 보았지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으로 마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직을 제창하는데 이는 우리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말씀을 근거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평신도 사이의 구분은 엄격했지요. 오늘날 그렇다면 제사장이 모든 성도들이라면 목사와 평신도는 어떤 구분이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목자 곧 양을 치는 자라는 의미로 엡 4:11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선물로 주신 직분인데, 양들을 잘 쳐서 저들로 봉사의 일을 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평신도나 목회자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을 섬기고 경배하는 자들이란 의미이겠고 세상 불신자들을 품고 중보기도해야 할 책무를 지닌 자들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직분이나 기능적으로 목자와 양은 구분되지만, 모두가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 경배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섬긴다는 것은 같지요.
질문 14
교수님 이스라엘 율법 조항문이 제가 알기로는 613개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오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금지하는법 365
하라! 는 법 248
합 613
답변 14
지적하신 것이 정확합니다 어떻게 되어 있나요?
질문 15
창세기 8장 홍수 후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아라랏산은 지금 터어키와 이란 아르메니아의 국경에 있는 산의 지명과
같습니다 노아 홍수는 지금으로부터 4500~5000년 전의 사건인데 어떻게
지금의 지명과 같나요 ?
답변 15
창 8:4에서 노아 방주가 멈춘 곳은 "아라랏 산지"라 (hare ´arara†) 언급된다. 즉 여러 봉우리들이 있지만 어느 특정 봉우리를 지정하지 않고 아라랏 산지라고 그 지역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고대 앗시리아 문헌에서 "우라르투" 지방으로 불렸는데, 지금 터키의 동부 지역 밴 (Van) 호수 지역과 이웃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등의 접경지대이다. 아라랏 산지의 최고봉의 높이는 5137 미터에 (16854 피트) 달하며, 왕하 19:37/ 사 37:38 (산헤립을 죽인 두 아들이 아라랏 지역으로 피신했다), 렘 51:27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최고봉의 높이는 덮인 눈의 두께를 감안하면 5137 미터라고 하기도 한다.
아라랏이란 지명은 오랜 세월 동안에도 이름이 바뀌지 않고 전해진 듯 합니다.
질문 16
창세기 50장에 야곱의 장례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야곱의 시체를 향으로 처리한다는 구절을 교안에는 미이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소개되었는데요... 야곱의 사후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의 장례방법이 미이라로 만들어 묻는 방식이 많이 쓰였는지요? 예수님 탄생시 동방박사가 바친 선물중 하나인 몰약이 미이라를 만들 때 쓰는 방부제용으로 쓰였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답변 16
미이라 처리법은 구약에서 야곱과 요셉 (창 50:26) 외에 언급이 없습니다. 야곱과 요셉이 애굽에서 죽었기에 그렇게 애굽 방식대로 처리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가나안에서 살면서 그렇게 방부제 처리를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겠지요.
이스라엘의 무덤은 굴을 파서 굴 속에 선반을 만들고 각 선반에 자기 가족들의 시체를 두는데, 입구는 물론 큰 돌로 막아 들짐승이 시체를 해치지 못하게 하지요.
질문 17
노아의 세 자녀가 3명인데
제가 알리로는 순서는 셈 함 야벳으로 알고 있었는데~
교회 목사님 말씀을 통해 들을때 우리나라 성경의 오역으로
야벳 함 셈의 순서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게 맞는지...헷갈립니다.
그리고 순서가 셈이 셋째라고 하면 장자가 아닌 셋째를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지는 건가요???
답변 17
1) 노아의 세 아들이 태어난 것은 5:32에 의하면, 500세 되던 해였다.
2) 홍수가 나던 해가 600세 되던 해였으므로 (7:11), 그의 세 아들들은 그 때 쯤에는 적어도 100세가 되었다.
3) 노아는 500세 되는 해에 첫 아들을 낳고, 그 2년 후에 셈을 낳았다 (창 11:10)
4) 노아가 술에서 깨어 자기 막내아들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다 (창 9:24).
종합하면, 노아는 500세 되는 해에 첫 아들을 낳고 (야벳), 그 2년 후에 셈을 낳았다. 야벳이 장자, 막내는 함이다 (9:24 참조). 창 10장 족보에서 장자 야벳의 후손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점을 참조하세요
질문 18
히브리어 원어의 언약의 뜻을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신약의 원어의 언약은 유언의 뜻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깨질 수 없는 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내용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가도 다시 불신자처럼 살경우에도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해도 주님의 언약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물론 구약의 언약이 신약의 언약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답변 18
언약은 구약 히브리어에서 '베리트'이고 신약에서 '디아데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경우는 모두 일방적 언약이지요. 동등 조건에서 쌍방이 맺는 쌍무조약과 다르게 (헬라어, '순두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시거나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구언약은 새 언약으로 갱신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최종 언약이고 이제 더 이상의 다른 언약은 없습니다. 계약이란 말과 같은 것이지만, 언약이라 하여 어렵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계약은 쌍방의 관계를 법적으로 설정하는 법률 행위라 할 수 있지요.
언약에는 '유언'이란 의미는 없습니다 히 9:15-20에서 '유언'이란 말로 "디아데케"를 번역했지만, 틀린 번역이고 '언약'으로 번약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 가입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중생하면 언약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기까지 그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인지 모릅니다. 중간에 타락해서 변질되고 탈락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히 6장). 우리는 그렇다고 알미니안주의처럼 인간이 구원을 받고자 결단하면 구원에 이른다거나,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도 중간에 타락해서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그런 사고는 배격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여부는 죽기까지 분명하게 우리가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대략 확신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다가 부인하다면, 그 사람은 진정 선택된 백성인지 아니면 거듭났는지 의문시 됩니다. 언약을 가지고 그 사람의 구원의 확실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주님을 부인한다는 자체가 불신앙적 의지표명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구원 여부가 불분명하지요. 즉 언약 백성으로서의 지위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가도 다시 불신자처럼 살경우에도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해도 주님의 언약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물론 구약의 언약이 신약의 언약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질문 19
언약에 관한 질문입니다.
-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등은 편무적 언약이며 시내산에서 모세의 중재로 제단에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피를 뿌리며 맺은 언약은 쌍무적 언약으로 위의 언약과 확연히 틀린 부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쌍무적 언약에 양쪽 다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나중에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며 이들이 믿음의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19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모두가 일방적 언약입니다. 쌍무조약이란 동등 조건에서 서로 언약을 체결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시거나 혹은 이렇게 살아라고 요청하시지요.
질문 20
율법에 관한 질문입니다.
- 모세가 시내산 또는 회막에서 레위기를 받았는데 율법의 핵심이 사실은
레위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많이 중요한건데 이 율법이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것이지요? 율법 폐기론자는 이단으로 알고있습니다.
문제는 완성된 율법이 지금의 교회나 신학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으며
가르쳐 지고 있는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20
레위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제시되었으니 곧 신약의 십자가로 연결되며 (사 53장, 슥 3:8-10을 통해서) 지적하신대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의 모든 요청은 만족되어졌지요. 그러나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그분은 성취시키고 완성시키셨습니다. 딤후 3:15이하에서 구약 성경을 우리의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한 것은 율법의 성도들의 삶의 안내자 (선과 악의 구분을 제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두 주님으로 인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어떤 율법 조항도 우리 성도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의 정신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지요. 주님이 지적하신대로, 간음하지 말라는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 된다고 더욱 강화되었지요. 맹세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출 22:11에서 "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폐기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폐하러 오지 않고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으니 구약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주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헛된 맹세를 금지한 것입니다
질문 21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교수님의 활기찬 강의를 감동깊게 잘 듣고 있습니다.
질문은....
1. 언약에 관한 질문입니다.
-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등은 편무적 언약이며
시내산에서 모세의 중재로 제단에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피를 뿌리며
맺은 언약은 쌍무적 언약으로 위의 언약과 확연히 틀린부분이 있지는 않습니
까? 쌍무적 언약에 양쪽 다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나중에 그리심산에서 축
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며 이들이 믿음의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
까?
2. 율법에 관한 질문입니다.
- 모세가 시내산 또는 회막에서 레위기를 받았는데 율법의 핵심이 사실은
레위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많이 중요한건데 이 율법이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것이지요? 율법 폐기론자는 이단으로 알고있습니다.
문제는 완성된 율법이 지금의 교회나 신학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으며
가르쳐 지고 있는것인지 궁금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샬롬~~
질문 22
강의 중에 말씀하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강의 중에 말씀하신 것은 정결한 짐승은 제사에 쓰이기 위해 일곱씩 부르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양과 같은 몇몇 짐승만 정결한 짐승이 되는 것인가요?
짐승 또한 모두 창조하신 것인데 어떤 기준으로 구분이 생긴 것인지요?
답변 22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구분은 레11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구분은 들짐승과 날짐승 그리고 고기가 각기 다른데, 굽이 갈라져야 하고 되새김질 해야 한다 (들짐승). 그리고 날개가 있지만 기어다니는 것 혹은 육식성 은 부정하다 (날짐승).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한다 (물고기). 이런 기준이지만, 오늘날 위생적 관념 때문이었는지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구분했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다만 그런 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인간의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식욕에서부터 구분의 훈련을 시작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은 구분의 개념인데, 그런 구분을 통해서 자신들의 구분된 신분임을 자각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안식일이나 절기를 통해서 시간 구분
십일조나 초태생을 드림으로 물질 구분
등등
질문 23
앞의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번엔 창6장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제가 교회목사님에게 듣기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으로 알고있었는데 천사들이라니 의아합니다. 천사들이 예수님말씀처럼 결혼하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말이 옳을가요?
답변 23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주로 '천사들'을 지시하고 (욥 1, 2장, 38:7) 간혹 '이스라엘'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천사들로 보는가 하면, 벧전 3:18이하에서 옥의 영들을 언급하는데, 그 영들이란 노아 때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창 6:1-4에 언급된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벧전 3:20)
그리고 천사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육체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요. 그들이 육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창 18장이나 유다서 5-6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창 19장도 참조하세요.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타락 천사)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동성애)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질문 24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의를 통해 하나님 중심의 성경보기를 잘 배우고 있습니다.
강의 내용 중, 본문비평의 부분에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창조과학회에서 구약본문의 여러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가고 있는데요,
이러한 작업들이 변증학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한편,
무엇인가 반기독교적 학문에 너무 변론하고자 한다는 인식이 생겨서요
성경의 본문내용을 믿지 않고 반박하는 것에 대답하는 자세는 정말 중요한데,
결국 그들이 믿을 수 있는 한계는 성령님이 도와주셔야(계시? 조명?의 은혜로)가능할 것인데, 모든 부분에서 답을 하려는 것 같아서요.
이러한 작업에 대해 어떤 자세로 대하는 것이 좋을까 싶어 질문드립니다.
답변 24
수준 높은 질문이군요
창조 과학회에서는 성경을 과학적 견지에서 보고 변증하고 싶어하겠지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김명현 교수나 이런 이들이 하는 강의를 듣다 보면, 뭐라할까? 자기 취미 즐기기에 몰두하는 듯 자기 식으로 막 나간다는 느낌을 받아요. 성경은 여러 방면으로 연구할 가능성이 무궁무궁한 말씀이긴 하지만, 지적하신대로,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다면 우리가 바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성경은 글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 문법적 해석이 기본적으로 요청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모든 이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질문 25
6강 수업에서 노아가 함을 저주한 사건을 설명하셨는데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노아가 추한 행동을 했는데 왜 함이 저주를 받고 나중에 함의 자손에게 나타난 것인지요. 그 저주는 노아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답변 25
성경에는 모호하게 혹은 euphemism 정도로 넘어간 듯 합니다. 그런데 창 9장과 레 18장을 비교해 본다면 (원어로 벌거벗음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추정컨대 노아의 아들 함이나 가나안은 벌거벗은 노아에 대하여 동성애 행위를 한 듯 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적 설명이지요. 다른 이들은 나체를 보고 떠벌여서 저주를 받았다고 하기도 하지요. 가나안 후손은 나중 가나안 족속들인데, 성적으로 굉장히 타락했지요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가나안 족속인데 동성애로 유명했지요 (창 19장). 조상에게서 그 노란 싹수가 나타났었다고 보입니다.
질문 26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수업감사합니다.
계시에 대해서 늘 의문이 있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1.깨우쳐 보여 줌. 2. 사람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神)이 가르쳐 알게 함.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표현의 전달에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오늘 수업으로 정확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조금 혼선이 와서요.
그럼 성경 66권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끝났다라는 표현이 맞는 말인지요?
답변 26
계시란 드러내다, 드러냄의 의미인데 한자어로 표현해서 무게감이 있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나 그분에 대하여 그분 자신이 인간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시지 않는다면 알 길이 없습니다. 마치 개미가 사람의 뜻이나 사람을 알 수 없다고나 할까요? 무한 차원의 하나님을 우리 3차원의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영계의 일을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계시는 보통 조직신학에서 특별 계시와 일반계시로 구분해서 말을 합니다. 전자는 성경이요, 후자는 자연 만물입니다.
일반 계시는 자연계시라고도 하는데,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혹은 시 19:1-6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특별계시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자연을 설명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고 따라서 그분의 계시입니다. 특별한 자 곧 중생한 자만이 (고전 2:8이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기에 특별계시라 혹은 제한 계시라 할까요 라고 부릅니다. 성령님의 내적 증거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 인간의 글로 기록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일들을 담고 있기에 자연인은 (거듭나지 아니한 인간) 성경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므로 전부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오류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분명 꿈이나 환상 같은 것으로 성도들에게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그것을 계시라 할 때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그렇고 차라리 계시라고 하지 말고 조명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만이 우리의 삶과 사고의 최종 판단자이고 권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계시관을 (성경관) 말하곤 합니다.
1) 신정통 신학 (칼 바르트 류)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틀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2) 성경에서 구원에 관한 한 오류가 없으나 역사나 기타 분야에서는 오류가 있다 (G C 벌카워나 Rogers/McKim 같은 이들); 이것도 틀렸습니다. 구원만 아니라 성경에는 (원본에 국한되겠지만) 오류가 없도록 성령님께서 감독하셨습니다. 이것이 영감의 한 이유입니다.
3) 혹자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직접하신 말씀이 최고 권위이고 나머지 말씀은 그보다 권위가 낮다 하거나, 예수님은 범죄하는 손이나 발 눈을 찍어 버리라 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잘못 가르쳐 사람들을 (칼빈도) 지옥 가게 한다느니 하면서, 예수님이 아닌 사람의 성경책은 참고용이지 절대 권위가 없다는 식의 이상한 계시관으로 사람을 혼동시키고 있어요.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는 것을 자기가 하늘 환상 체험을 통해서 여러 번 확인했다느니, 아담과 하와는 심지어 칼빈도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등, 성경을 벗어나 자기의 입신 체험을 근거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입신해서 주님께 직접 물어 본다고 합니다. 지난 해 한국 전쟁을 예언했던 홍혜선 자매도 그런 유이지요. 이는 성경을 경시하는 신비주의인데, 모든 체험은 성경적 판단아래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음이 좋습니다.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을 내가 환상으로 보았다느니 한다면 어떻게 사람의 주관적 체험을 객관적으로 거짓인지 진리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어 혼란이 가중되고 자칫 마귀에게 코가 꾀일 위험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는 데 까지 가고 거기서 멈추라는 말씀이 있지요 (신 29:29)
질문 27
교수님 안녕하세요? 카톨릭에서는 성례가 우리가 인정하는 정경이외에서 기원된 것들이 있다고 아는데 그중 연옥설 에 죽은자를 위해 대신헌금하고 기도하면 연옥에 간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 고 합니다. 그 연옥 사상은 개신교 정경에 없습니다 혹시 외경에서 기원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 27
로마교의 연옥설은 외경만 아니라 신약의 구절들이나 여타 성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외경이 마카비하 12:38-45, 벧전 3:18-22, 딤후 1:16, 18, 벧전 4:6, 마 12:31이하 등.
천주교 용어집에서 연옥(煉獄)이란 하느님을 철저하게 등진 사람은 지옥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 하느님께 귀의하여 죄를 용서 받았으나, 다소간의 흠이 있는 자는 세상을 떠난 후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기 전에 스스로 정화(淨化)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화되는 상태를 장소로 표현하여 연옥이라 일컫는다 (최형락, “천주교 용어집” 성신출판사, 242).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연옥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른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편>, 389).
마카비하 12:38-45 유다가 자기 군대를 소집해서 아둘람 성으로 갔다. 제7일이 오고 있었기에 저들은 자신들을 관례에 따라 정결케 하고 거기서 안식일을 지켰다. 39 다음 날, 필요에 따라 유다와 그의 부하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취하러 가서 그 조상들의 묘에 눕혔다 42 저들은 간구하길, 범해진 죄를 온전히 사해 주십사고 했다. 43 그는 또한 헌금을 거두었는데 은 2천 드라크마에 달했다. 이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속죄 제물을 바치게 했다. 그는 아주 영예롭게 이를 행하였는데 부활을 고려함이었다. 44 만약 죽은 자들이 다시 부활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경건한 죽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보상이 있음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거룩하고 경건한 사고였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자를 위해 속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 범한 죄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였다.
마카비하는 외경으로, 유대교에서 정경의 지위에 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죽은 자를 위한 속죄가 가능하다는 사고나, 고기를 잡아 그 간을 살라 귀신을 축출한다거나 하는 허황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님을 훼방한 죄가 아니면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18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오네시보로의 가족들에게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하고, 다시 주님의 재림 때에 주의 긍휼을 오네시보로에게 허락해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네시보로가 죽었는데 그를 위해 재림 때에 긍휼을 받도록 기도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카톨릭의 연옥 교리에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고전 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poreuqei.j)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poreuqei.j)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여기 말씀은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사건이 지옥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 언급된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영들은 창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천사라고 이해한 데 근거한 것입니다. 그 악령들에게도 부활의 놀라운 소식은 전파되었습니다. 부활 사건의 우주적 차원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22절에서도 그는 하늘에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합니다. 이는 그분의 메시아적 왕되심을 의미하고 그에게 모든 영적 세력들이 굴복한다는 것은 그분의 왕권이 우주적임을 강조합니다.
요컨대, 성경은 전체로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배척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 속죄제를 올리고 위해 기도한다고 저들이 용서를 받고 하늘에 오를 가능성은 없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건대, 지금 여기서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이상 사후에 구원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또한 천주교의 가르침대로, 설사 택한 자들이 흠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히 10:14)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자신의 흠이 문제되지 않도록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회개하지 못한 상태로 죽는다면 그가 진정 하나님의 택자인지 거듭났는지 여부에 따라 지옥이냐 천국이냐 둘 중의 한 곳으로 결정될 뿐, 중간에 연옥을 거쳐 천국에 올라갈 그런 전망은 성경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하시고 하늘 영광에 오르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히 1:3) 정결케 하는 일은 이미 그분이 지상에서 다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믿어서 여기서 정결케 하십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기에 그를 믿는 자는 여기서 (지상에서) 죄에서 정결함을 받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 그렇게 정결케 되는 기회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신앙생활과 철저한 회개가 중요한 것입니다
질문 28
이스라엘 학자들에 의해 구약이 정경화 된 것은 당시 영감에 의한 문서들로 정경이 결정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가 신약은 영감에 의한 성서 문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인지요? 궁금합니다.
답변 28
질문을 참 잘 하셨군요 그러니까 구약은 비평학자들에 의하면, 주후 1세기 얌니야 회의에서 유대인 랍비들이 결정했다고 하지만 그 훨씬 이전에 아마도 에스라 시대에 이미 정경이 확정되었으리라 추정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성령님의 역사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고 이른바 신구약 중간기 시대 400년이 흐르지요. 그리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메시아인 것을 유대인들이 믿지를 아니했지요.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동이 자신들의 메시아관과 달랐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도 원래 열성 유대교인 아니었습니까? 유대교 중에서도 바리새파는 특별 열성분자들입니다. 그런 바울이 고후 5:16에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지요? 그 말은 바울도 부활하신 주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순전히 육신적인 안목으로만 평가했었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적인 눈으로만 보니 나사렛 목수 아들에다가, 가르치는 사상도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느니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느니 . . . 순전히 평화주의 사상에 어부 출신들이나 세리 출신 같은 자들을 제자들이랍시고 데리고 다니고 허구한 날 병자나 귀신들린 자 치유하고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곧 자기 나라를 로마압제에서 해방시켜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 이스라엘을 공의로 통치할 왕적 영웅으로 알았던 메시아 모습과 전연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이 다윗 왕 후손 메시아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 - 메시아가 그럴 수는 없다는 육신적인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사 53장의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을 메시아로 보지 못하고 자기 유대인들 특히 의인들로 이방인들에게 고난당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보았습니다. 왜 그런 이상한 해석으로 흘렀느냐? 하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 41:8, 9, 44:2 등). 그래서 사 53장에서도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은 유대인들 자신이라고 잘못 해석해 버렸지요.
이런 연유에서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처형해 버렸고, 따라서 신약의 내용은 말할나위도 없이 이단적 사상 서적으로 판단했고 지금도 읽지 못하도록 하고요.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자신들의 전통에 매여서 메시아를 배척했고 지금까지 소수의 남은 유대인들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교수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유대인들의 이사야서 해석이 우리와 다름으로써 오는 메시아 사상에 차이와 성령의 역사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이제야 이해를 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질문 29
안녕하세요 교수님 신입생으로서 부족합니다 잘지도해주십시오^^
외경이란 정경 외의 책들이란 의미인데, 구약 외경도 있고 신약 외경도 있습니다. 외경은 성경의 내용이나 인물과 연관된 유대인들의 작품들인데, 물론 신약 외경은 기독인들의 작품이지요. 외경 외에 가경 혹은 위경 (가짜 성경)이란 것도 있는데, 이 위경은 외경과 어떻게 다른가 하면, 후자는 구약의 헬라어 역본이나 라틴어 역본에 부록으로 첨가된 책들이라면 가경/ 위경은 그런 지위를 누린 적도 없는 책들이지요. 이 위경 역시 성경과 연관된 주제나 인물을 다룹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전까지 구약 외경이 구약 헬라어 성경이나 라틴어역본의 부록으로 첨가되어 읽히다가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유대교에서 한 번도 정경이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또한 그 내용에도 허황된 것이 있으므로 준 정경적 지위를 박탈해 버립니다. 그러나 루터 같은 경우는 읽어서 경건에 도움이 된다고 이해했고 오늘날도 진보적 성경역본들에서 첨가되어 나타납니다 (NRSV나 카톨릭 성경역본인 NJB 등).
종교개혁 이전에도 외경이 정경의 지위를 점하였다기보다, 준 정경적 지위를 지니고 읽혔다고 보입니다.
답변 29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자주 질문을 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모르면 질문도 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알아야 질문도 할 수 있지요. 신학을 처음하면 용어나 개념에서 아주 당혹스러운 것들을 자주 만나지요. 이해하기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부터 말을 잘 하지 못하듯 말이지요. 하나 하나 인내로 기도로 나가다 보면 어느 때에 문리가 트이고 감이 잡히지요. 성령님께서 도와 주시길 바랍니다.
질문 30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전까진 외경도 성경과 똑같은 가치를 지녓나요?
질문 31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는 대구 범어교회에서 섬기고 있는 김 웅 집사입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너무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강의도 많이 기대가 됩니다.
두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첫째는 강의 1 에서 말씀하신 개몽시대 이후의 \"비평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신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아닌지 여쭤보고 싶구요
예를 들어 말씀하신 성경의 저자에 대한 논쟁에서 첫 1강에서는 비평적 신학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3강 John Bright 이스라엘 역사(비평적인 입장),
Martin North이스라엘 역사(극단 비평적인 입장)
참고서적으로 추천하시는 부분은 그럼에도 비평신학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예로 들었던 토라의 저자를 보수주의와 비평신학의 조화로 두가지 다
맞다 라고 보는 입장이신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두번째는 교수님 강의 계획서에 보면 주 교재가 교수님의 저서인
구약 개론 신학이 되어있는데 이 교재와 강의에서 말씀하신 참고서적들 중
어떠한 것들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 같이 보면 좋겠지만... 생각보다 양이 많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샬롬~
답변 31
예 그러니까 신신학 =자유주의 신학이지요. 그리고 복음주의 혹 보수주의 신학을 기본으로 알고 신신학 혹은 역사 비평신학도 알아야 뱉을 수 있지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고서적은 이런 책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 수준에서는 주 교재를 보시고, 좀 더 연구하고 싶으시다면 참고서적들을 참조하시라는 것입니다.
개몽 = 계몽
질문 32
이유 3의 과학적 발전에서 뉴튼의 프린키피아가
무엇인가요 ?
답변 32
뉴튼의 principi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自然哲學- 數學的原理, 라틴어: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는 1687년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세 권짜리 저작으로, 라틴어로 쓰였으며, 서양의 과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책의 하나로 여겨진다. 줄여서 ‘프린키피아’(Principia)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책에서 뉴턴은 고전 역학의 바탕을 이루는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요하네스 케플러가 천체의 운동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알아낸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뉴턴은 자신의 위 두 법칙들로써 증명해 낸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되어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치면서 이루어져 온 천문학의 혁명을 완성하는 한편, 갈릴레오 이후 데카르트, 호이겐스 등을 통해서 이루어져 온 근대 역학의 성공을 눈부시게 보여주고 있다. 에드먼드 핼리도 이 책을 바탕으로 1530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났던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해, 이 혜성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천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일정한 주기에 따라 1750년대 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견했다. 뉴턴도 핼리도 죽은 뒤인 1758년에 수수께끼 같은 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핼리 혜성이다.[위키백과]
감사합니다
질문 33
샬롬!
욥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알면서도 정확히 모르는 말씀이 욥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수업으로 욥기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변 33
욥기서는 이른바 신정론이라 하는 주제를 다루지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창조주 절대 주권자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세상에 고난이 많으냐? 특히 의인들의 고난은 왜 있는가? 하는 "악의 문제'라고 철학에서 다루는 문제입니다. 그분이 선하지 않거나 선하시더라도 무능하시거나 아니면 아예 절대자가 없거나 이런 식으로 철학자들의 악의 문제를 다루겠지요
욥기서는 의인의 고난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반드시 죄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욥의 경우 사단의 중상비방과 기소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여 시험해 보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창조주는 절대자이신지라 인간이 아무리 귀해도 그분의 목적대로 얼마든지 인간을 다루실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선하심을 믿기에 그분을 절대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온전하시고 불의가 없으시고 완전 선하시지요. 설사 그분이 우리를 자기 목적으로 사용하신다고 불의하게 하신다고 할 수가 없지요.
성경의 주제를 인간의 구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궁극적 목적이지요. 그래서 성경의 주제를 구원사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 더 큰 범주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라고 봐요. 이런 점에서 나는 칼빈을 좋아하지요. 칼빈의 주석은 수 백년 전의 것이지만, 그 신학 사상은 오늘날도 보석처럼 귀하지요. 신학이란 특히 성경신학에서 여러 발전은 물론 고려해야 하지만 말이죠.
신학은 조직신학, 성경신학, 선교학, 교회사 등등 여러 분야지만, 전체는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신학을 할 때 우리의 모델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 헬만 바빙크 등의 선진들로 잡고 나아가면 좋다고 보지요.
질문 34
항상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성경의 인물 전개는 하나님의 사역에 중요한 인물로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시대부터 노아의 시대까지는 거의 800-1000년 가까지 살았는데요 아담부터 노아까지는 실질적으로 그 족보를 다 기록된 것일까요? 아니면 중요인물만 기록한 것일까요?? 실질적인 족보를 근거로 했다면 실질적으로 아담은 노아를 낳기 100여년전에 죽는 걸로 나오는데 이렇게 봐도 무방할까요??
답변 34
성경 족보는 마 1장의 경우 14대라는 수치에 맞추기 위해 여러 왕들을 생략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성경의 모든 족보가 그렇게 몇 대를 자기 목적을 위해 생략하는지 아니면 전부를 열거하는지는 목록 하나 하나를 전부 세심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창 5장의 족보가 생략되지 않았다고 본다면 다음과 같은 도표가 가능하겠지요 아담과 노아의 연대는 도표를 참조하세요
질문 35
샬롬!
유대의 구약 정경은 24권 우리의 정경은 39권입니다. 오늘 수업에서 설명을 해 주셨는데요. 그럼 왜 기독교는 유대의 정경법을 따르지 않는 것인지요?
답변 35
그것이 다 역사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지요. 그러니까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유대교의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고 율법도 준수하고자 하는 등 (바울은 이에 적극 반대했지만) 유대교와 별 차이가 없이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간주될 정도였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파멸 이후 그리고 135년 바 코크바 반란 이후로 기독교와 유대교는 근본적으로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이래로 기독교 성도들은 전에는 유대인 중심이었다가 점차 이방인 중심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기독교회는 점점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됩니다. 그러다가 신약 정경을 확정할 여러 교리적 문제들이 나타날 때 정경을 확정하게 되는데, 그 때에 기독교회는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을 사용하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70인역의 구약 책들 배열 순서나 책들 구분법을 (예컨대, 사무엘서를 한 권이 아니라 두 권으로, 오경을 한 권이 아니라 5권으로 분리)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70인역은 부록에 외경을 가졌는데 제롬의 라틴어역에서도 (벌게잇) 그러했습니다. 그렇게 외경과 친해 지다가 종교개혁으로 개혁자들이 외경은 성경적 권위가 없다고 배격하고 루터는 읽으면 경건에 좋다 정도로 인정했다면 칼빈이나 즈윙글리는 외경은 가치가 없다 정도로 배격했습니다.
이리하여 개신교는 70인역의 전통을 따르다가 유대교의 정경만 구약 정경으로 받았고, 그러면서도 구약 제책들 배열 순서는 70인역과 라틴어역을 따른 것입니다
질문 36
사사기를 방금 배우고 저는 감사했습니다. 성경이 시간대 별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사사기는 여호수아 앞에 놓여야 한다는 수업에서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앞뒤가 조금 맞지 않는다라고 느꼈던 궁금증이 해결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36
어,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사사기가 여호수아서 앞에 놓여야 한다고 제가 말씀했던가요? 그런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사기 1장이 여호수아서에 묘사된 정복전쟁과 중복되는 듯 하지만, 여호수아서에서는 대략 주요 부분만 정복했다고 보아야 하고 삿 1장은 그 나머지 정복 전쟁을 다룹니다.
그리고 삿 17장 이하는 부록이라고 했지요. 그 부분이 연대기적으로 삿 16장 이하의 사건들이 아니라, 여호수아 사후, 사사들이 일어나기 전의 이스라엘 지도력의 공백기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연대기적인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주제별로 배열되기도 하고 여러 다른 배열 기준들이 있습니다
질문 37
신명기 역사설은 구약을 공부하는 신학생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역사 비평적 방법에서도 특히 편집비평에서 주로 신명기 사관에 대해 다르어지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를 정확히 배워 두는 구약을 이해 할 때, 조금더 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답변 37
신명기적 역사 가설은 마틴 노트가 주장한 것인데, 신명기 +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가 모두 한권의 역사서로 추방 이후 대략 주후 56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신명기를 모세의 저작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많은 학설입니다. 비평가들은 신명기가 주전 622년 요시아 왕 때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라고 보는데 문제는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 요시아 시대 성전을 예루살렘 한군데만 두고 신앙 중앙집권화를 원하던 사상가들이 (당대 대제사장이나 그 일파) 고대 인물인 모세의 이름을 빌어 가짜로 모세의 저작인 양 기술한 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명기가 그러니까 비평가들에게는 주전 7세기 저작이고 그것도 가짜 문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1805년 독일의 WML De Wette가 처음 시작했는데 급기야 비평가들 거의 모두가 그런 가짜 문서설을 따르는 경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질문 38
교수님의 열강을 잘 듣고 있습니다. 청중이 보이지 않음에도 보이는 것처럼 강의를 열정적으로 해주셔서 매주 기대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신학을 오랜시간 해왔지만 늘 의문시 되었던 부분들을 시간 시간 마다 해소하고 있습니다. 저도 신학을 하는 동안에 부르심과 사명을 주시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자에서 가르치는 자로의 길이기에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암송하라고 하신 교수님의 당부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림니다. 구약의 개관적인 내용과 구약의 한권한권의 세부적인 내용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기대합니다.
답변 38
성경은 전체를 많이 읽고 또 전체를 어느 부분이건 막힘이 없이 무슨 내용인지 그리고 전체적인 사고의 흐름까지 파악해야 하겠지요. 그러러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성경을 전체로 통달하도록 해 주세요 하고 말이지요. 그렇게 기도를 하면 길이 열리고 좋은 선생님도 만나지요. 누구에게 배우느냐? 가 참 중요하지요. 잘못 배우면 고치기가 어려우니 말이지요 성령님이 진정 우리의 선생님이시지요 그분이 우리를 진리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에게 의지하고 그분의 내적 조명을 늘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많이 많이 필요합니다
질문 39
안녕하세요.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2013년 12월 2일 받고 신학을 배우는 학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다보니 읽는 것이 먼저인지 외우는 것이 먼저인지 잘 모르겠씁니다. 교수님이 많이 암송하고 하셨는데요 좀 더 말씀을 익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있으시면 초신자인 제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39
일단은 많이 읽어야 합니다. 암송을 하는 것은 어떤 특정 부분을 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체를 먼저 훤히 꿰뚫어 알도록 많이 읽고 읽되 무조건 읽지 말고 각 부분마다 주제나 내용의 줄거리를 이해하도록 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누구는 100독이다 200독이다 말씀하던데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전체를 훤히 꿰뚫어 이해하도록 도와 주세요 하고 많이 기도하세요 그러면 길이 열려요. 그리고 이 구약개론 강의는 성경을 전체로 이해하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지요. 그리고 우리의 교재인 구약개론 신학 책은 구약만 아니라 신약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교재라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 40
안녕하세요.
6강 수업을 받고 ~
노아의 홍수 이후에 무지개 언약이 우리 인간를 위한 증표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업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 위한 것이라는 교수님 수업을 듣고 제 자신이 성경을 너무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려고 했구나라는 고정관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답변 40
성경을 연구할 때, 내가 핵심 방법을 하나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본문성의 원리입니다. 영어로 하자면, textuality인데, 본문은 의미가 통하도록 단어들과 사고들이 얽혀 배열되었기에, 같은 단어들이나 (물론 유사어 반대어 등도 참조) 같은 사고들을 서로 연결시켜 성경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유대인 랍비들의 탈뭇과 같은 방대한 문헌 역시 그런 해석법의 결과물이고, 오늘날 여러 성경 해석법이 있지만, 전부 결론은 결국 이 본문성의 원리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언급하신 사항 무지개에 대하여 말씀하자면, 성경을 이해하실 때, 무조건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동시에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을 뚫어지게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본문을 통해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할 수도 있지요
질문 41
목사님들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많이 찾아 듣는 편입니다. 그런데 OO교회 목사님 설교에서 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오늘 성경의 주제는 구속, 언약으로 말씀하셔서요 그럼 00교회 목사님의 설교에서 주장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주제다 라는 말은 틀린 말씀인가요?
아니면 구속과 언약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하면 그렇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41
아, 그러니까 성경의 주제가 곧 중심 사고가 무엇이냐? 는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지요. 왜냐하면 성경은 여러 주제들을 다루니까요. 그런데 어떤 주제가 과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보기에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입니다. 언약은 그 통치를 위한 방편이지요. 언약을 설정하고 통치하신다 혹은 법을 제정해서 관계를 설정하고 그 법대로 통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통치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지만, 사실 구원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의도는 자신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경의 주제라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통치자이시고, 또한 인간 구속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5:39에서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고 하셨듯 구약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만큼 그분의 구세주로서의 역할이 성경의 중심 사고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도 역시 하나님의 통치의 한 부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라 할 수 있고, 구속, 언약, 교제, 거룩 등등은 모두 그 통치의 요소들입니다. 칼빈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중심 사상으로 본 것과 같은 사고입니다.
질문 42
안녕하세요.
신약에서 왜 예수님은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셨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오늘 수업에서 아람어가 지금의 영어처럼 사용되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씀에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42
그렇군요. 아람어는 사실 지금 우리가 구약 성경에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문자입니다. 히브리어를 아람어 문자로 표기한 것이지요. 아람어는 알파벳이 이집트의 신성문자나 앗시리아 바벨론이 사용한 악카드어에 비해 수가 작고 그래서 아무래도 배우기 쉬웠습니다. 애굽이 신성문자란 제사장들만이 쓰고 해독했기 때문에 거룩한 문자라고 불렸기 때문이고, 악카드어는 쐐기 문자라고 하는데 쐐기 (장작 팰 때) 처럼 형상이 생겼기 때문에 cuneiform 글자라 하지요. 아람어나 악카드어 등을 셈족어라 부르기도 하는데 우편에서 좌편으로 기록하지요
질문 43
교수님 시편의 탄식시를 보면 원수를 향한 기도가 조금은 과한언어가 사용된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카톨릭같은 경우는 그 부분을 삭제해서 사용되고 있다고도 들은것 같은데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그러한 원수를 향한 격한 표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또 실제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답변 43
아, 맞아요 그런 탄식시들은 저주 탄식시들이라고 하지요 (Imprecatory Psalms: 시 5, 10, 17, 35, 58, 59, 69, 70, 79, 83, 109, 129, 137, 140편 등). 특히 시 109편이 대표적인데요
시 109: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십자가 상에서 그 심각하고 참혹한 고통중에 조차도 자신의 가르침대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구약의 윤리는 비평가들이 말하듯, 신약의 윤리보다 저 차원이냐? 그렇게 구약과 신약을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지요.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모순된다는 전제 하에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의 시편들은 대개 다윗의 저작이 많은데 (오늘날 비평가들은 표제의 신빙성을 거의 인저아지 않는 경향이지만), 시 109편도 표제에서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사울 왕을 사실은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왔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삼상 24:6, 26:9에서 자기 부하가 죽이자고 하지만 금하지요. 야웨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시편에서는 아주 심하게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주제는 최종태, 시편 1권, 180페이지 이하에서 상세하게 다룬다는 점을 알려 드리고, 간략하게 몇 가지만 지적하지요.
1) 시인의 저주 기도는 자기 개인의 원수에 대한 복수심의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라는 구약 성도의 소망의 표현이다.
2)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에서 나온 기도였다. 다윗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대표였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 개인 감정 표현이라기보다, 시편의 저주 기도조차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발설하고 있다.
3) 저주의 기도는 구약 성도가 발한 죄에 대한 혐오감의 표현이었다
4)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는 예언적 의미를 갖는다.
이런 사항들이 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성경의 윤리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둘 사이의 조화에 근거해야 하므로 상당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청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