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손동희,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 보이스사
장로교 일본 귀신에게 무릎 꿇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의 신사 참배 가결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 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 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 노회장 박영률 목사가 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 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 (‘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 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 노회였다. 전남노회는 (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 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 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 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 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으로 (권연호 목사 제안)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 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 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에 일본 귀신들을 섬기는 신사가 세워졌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목사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 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 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 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 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 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 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 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 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당연히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일은 교단 총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몇몇 뜻이 통하는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많은 어려움과 희생이 뒤따랐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보배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2천명이나 일경에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했고 2백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고 또 50명의 순교자도 생겨났다.
나중에 나라가 해방되자, 총회에서는 다시 회의를 열어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제1,2계명을 범하는 죄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해방 후에도 신사참배에 찬성한 목사들 중 더러는 오히려 순교자를 향해 앞뒤가 꽉 막힌 보수주의자라고 매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융통성 없는 성격 탓으로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교회 천체가 일본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나섰다면 오늘날 한국의 복음은 누가 책임졌겠느냐? 는 논리였다. 우리는 신사참배를 해가면서 이 나라 교회를 이끌어왔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보다 먼 장래에 이 나라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때를 기다리며 일본의 정책을 묵묵히 따랐다는 식이다.
죄를 지은 자들이 더욱 당당해져서 옥중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고 나온 성도와 아침 이슬처럼 깨끗이 살다 쓰러져 간 순교자들을 향해 왜곡된 가치관으로 판단하며 교만하다느니, 어리석다느니 하며 여지없이 매장하려 들었다. 내가 회개했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신사참배는 각자의 양심 문제이니 회개할 것 없다 하며 회개하기는 커녕 낯 뜨거운 논리로 자기 들의 과오를 합리화하고 다녔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응한 목사들이 모두 그렇게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 가족들, 특히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결심한 목사도 여럿이다. 배모 목사도 그런 목사 중의 한 분이다.
처음에 그분도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면회 온 부인이 당신 고집 때문에 자식들과 나는 죽게 된다며 애걸복걸 사정하는 바람에 의지가 꺾여 신사참배를 하고 감옥 문을 나왔다고 한다. 허약한 신앙, 허약한 내조의 슬픈 결과다.
믿음의 일꾼을 길러내던 평양신학교 역시 신사참배가 몰고 온 회오리바람 속에서 폐교를 당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는 1938년 3월 16일에 받았어야 할 졸업장(33회)을 한참 지난 37세 때 우편으로 받았다. 그 즈음 아버지는 자주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곤 했다. 산에는 아버지의 지정 기도석이 있었는데, 한번 올라가면 여러 날 동안 내려오지 않고 기도에 힘썼다. 쌀을 가지고 가서 물에 불렸다가 한 주먹씩 씹어 먹으면서 지냈다. 밤중에 기도를 시작하면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산에서 소리 질러 기도할 때면 그 기도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산 아래 동네 사람들은 “아이고, 그 여우가 또 나왔구먼!” 하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산에서 기도를 하던 중 한밤중에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터졌다. 온 사방은 새카맣게 어둠에 잠겨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무 덩굴, 풀뿌리 등 닥치는 대로 휘어잡고 온 문이 진흙으로 범벅이되어 떠내려가다가 저 멀리 유일하게 보이는 불빛 하나를 발견하곤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그리로 갔는데, 그것은 절이었다.
여보시오! 하고 부르니 스님이 나왔다. 스님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이면 들어오고 귀신이면 썩 물러가라!” “나는 사람이오!” 아버지는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지독한 분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겐 손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버지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외지 전도사로 일하면서 밀양에 있는 수산교회, 울산에 방어진교회, 남창교회, 부산의 남부민동 교회, 양산에 원동교회 등을 개척했다. 우편으로 졸업장을 받은 후 아버지는 부산 지방의 선교사 대리가 되어 순회 전도를 다녔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그 목적이었다. 아버지보다 5세 위인 주기철 목사는 아버지와 한상동 목사를 향해 나는 북에서 싸울 터이니 제군들은 남에서 싸우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은 남쪽과 북쪽을 맡아 신앙 투쟁하자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러므로 이들을 체포하려는 일경의 손길 또한 늘 가까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리 말을 하지만, 그 세 분은 1년 후 모두 검거되었다. 검거되기 전에 아버지가 애양원으로 가게 된 것은 그런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었겠지만 말이다.
1940년 9월 25일 수요일,
무덥던 여름도 지나가고 바야흐로 가을 기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들판에는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벼 이삭들이 마냥 풍요로워 보이기만 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 나무 잎들은 들판을 건너온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고운 옷 갈아입은 잠자리들은 높디높은 하늘을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다. 한가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외부의 평화와는 달리 애양원 지붕위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날이다. 우리 가족들이 드디어 수난의 길로 접어들게 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다른 교회에 가해지는 박해에 비해 애양원은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신사 참배 강요도 심하지 않았고 유형무형의 간섭도 덜 한 편이었다. 나환자 수용소라는 특성 때문에 어지간한 말썽은 눈감아 주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악한 일본 경찰이 신사참배 반대를 강력히 주장하고 다니는 아버지를 결코 잊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애양원 교회에서건, 설교 때마다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로서 하나님의 십계명 중 제1,2계명을 범하는 것이므로 절대로 금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부흥집회 때마다 그랬고, 또 믿음의 신도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신사 참배의 부당성에 대하여 설교했다. 그런 아버지를 가만히 놔둘 그들이 아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가냘픈 몸을 내맡김 채 시름없이 한들거리고 있는 코스모스 사이로 여수 경찰서 소속 형사 두 명이 바삐 걸어왔다. 그들은 집에 당도하자마자 다짜고짜 아버지를 찾았다.
“손 목사 집에 있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불청객의 목소리에 놀란 어머니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누구신지요? “우리는 여수경찰서에서 온 형사다. 손 목사를 연행하러 왔다.”
아버지는 그때 애양원 교회에서 삼일 밤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당회가 열리고 있었기에 거기 참석하느라 아직 귀가하지 않은 상태이고 어머니만 일찍 돌아온 것이다. 안 계신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마루에 걸터앉아 사방을 휘둘러본다. 거만하고 위압적인 눈빛이다. 식구들이 무슨 일 대문에 그러는지 대충은 짐작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가족은 물론 애양원의 기둥인 아버지가 아닌가. 그런 아버지가 잡혀 가면 우리 가족과 애양원은 또 어찌 될 것인가?
하필 그 때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다. 형사 두 명이 총알 같이 튀어 나가 아버지를 낚아채더니 밖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는 이미 사태를 짐작한 듯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섰다. ‘왜 이러느냐?’ 는 항변의 말 한 마디도, 잡혀가지 않으려는 저항의 몸짓도 없었다. 잠깐 뒤를 돌아보며 사색이 되어 있는 어머니에게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했을 뿐이다.
이 짧은 이별의 말을 던지고 떠난 아버지는 그 날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무려 만 5년을 형무소에서 보냈다. 나중에 전해 듣게 된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과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그 따위 죄를 아버지가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잡혀간 아버지는 10개월이 다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 기다리면 풀려나올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기소 당하여 복역을 하게 되는 건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다. 답답한 시간이 자꾸 만 흘러갔다. 애양원 식구들과 우리 형제자매들의 불안한 마음도 마음이지만 어머니의 심정 도한 말이 아니다. 졸지에 가장을 잃어버렸으니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달리 무슨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매일 매일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도할 따름이다.
하루가 일년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나날이다. 잡혀가면 온갖 고초를 다 겪는다는데 경찰서에서 고문은 안 받고 지내는지, 몸은 건강한지, 앞으로 얼마나 더 지나야 나올 수 있는 건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버지의 신변을 염려하는 마음도 컸지만 그 보다 더 어머니의 마음을 강하게 지배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과 회유에 못이겨 혹시라도 아버지가 신앙의 절개를 꺾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였다. 경찰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후 신사참배를 하고 풀려 난 목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많기에 그럴 분이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만의 하나 그런 나약한 결정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더 이상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젖먹이를 들쳐 업고 여수행 기차를 탔다.
여수에 도착한 어머니는 안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석방 유무를 알려고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어찌어찌 하다가 어머니가 알고 있는 분을 통해 유치장에 밥해 주고 심부름하는 이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찾아가서 아버지에 대해 간곡히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손 목사는 재판 마치고 어쩌면 오늘 내일로 여수 경찰서를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귀띔해 주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이면 아버지가 여수경찰서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일찍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기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수경찰서 앞으로 가서 무작정 기다렸다. 10개월 간 얼굴도 못 본 아버지를 만나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우리 형제의 가슴은 마냥 설레었다. 경찰서 문이 열리는 순간 아버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큰오빠다.
“저기 아버지 오신다!”
다들 큰오빠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거기에 아버지가 계셨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머리를 빡빡 깎은 상태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아버지는 척 보기에도 풀려나오는 사람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지만 어머니는 형사들이 다른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틈을 타 얼른 아버지 곁으로 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광주로. . .”
채 대답을 다 듣지 않고 어머니는 숨겨 가지고 온 성경책을 펼쳤다. 반갑다고 인사나 나누고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씀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주구려!”
아버지 역시 초췌한 얼굴로 대답했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께 펼쳐 보인 말씀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그때는 내 나이가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뒤집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어머니는 보통의 아내들처럼 남편의 육신의 삶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아버지가 당할 고초가 아니라 혹시 아버지의 마음이 약해져서 우상 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맨 처음 여수 경찰서로 끌려갔던 때는 39세 때다. 이곳에서 10개월 동안 미결수로 있는 동안 여러 차례 불려나가 심문을 받았다. 금성구웅 (金城久雄) 형사에게, 가루베 형사에게, 또 어떤 때는 요다 검사에게 거의 비슷한 내용의 모진 심문을 수없이 받아야 했다.
여수경찰서의 밤은 깊어 간다. 가끔 유치장 쇠문 닫는 소리만 꽝꽝 하고 밤의 적막을 깨트린다. 그들은 밤새도록 아버지를 협박하고 회유하고 뺨을 때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평소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는 전도할 기회가 많았으나 경찰서 형무소 관리들에게는 전도할 기회가 없었다. 감옥소 고통 속에서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은 불신자들을 전도한다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성경관, 재림관, 심판관 등을 설명했다. 여기선 지명상 간단히 쓴다 (자세한 것은 기독교 서점에 있는 [손양원 목사 옥중 목회] 보이스사에 기록됨)
“. . . 이봐, 손 목사. 그래 다른 목사들은 물론 신학교수, 신학 박사들까지 모두 신사참배를 하고 노회장, 총회장도 다 국민 의식으로 시인하는데 왜 그리 독특한 예수를 믿소?”
“본시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고 신앙적 종교이며 감정적 종교가 아니고 체험적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학사, 박사가 믿지 못하는 진리를 무식한 노인들도 믿을 수 있고, 또한 무식한 자들이 체험하는 사실을 박사, 학사가 이해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로 지식적 세계와 신앙적 세계는 통하는 점도 있으나 통하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초자연적 종교라는 것입니다.”
“손 목사, 당신 보아하니 다루기가 좀 곤란한 사람 같은데 신사참배 하기 전에는 햇빛 보기가 힘들 것이요. 그리 아시오!”
“내 몸은 비록 형무소에 감금되어 있으나 내 신앙은 감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특히 말세론에 대해, 또는 일본의 천황 숭배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변함없이 명쾌했다. 그들의 질문은 하나 하나가 올가미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올가미에 두려움 없이 목을 디밀었다.
어느 날인가는 가루베 형사가 성경에 대해서도 물어 왔다. 아버지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66권의 성경에 대해 설명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예언한 책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여 그 예언을 강림한 책이며, 하나님의 뜻에 다라 사람이 살아 갈 도리와 내세의 부활을 밝힌 책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신이시며, 예수님은 그분의 아들 되시는 신이시니,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일체가 되신 고로 기독교에서는 이를 삼위일체라 부른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것이냐?”
가루베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싸늘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차근차근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주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천하 만민의 심판주이십니다!”
“그게 다 무슨 뜻인가?”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함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내려 보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죄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의이시라 함은 모든 사람의 의와 불의를 밝혀 의에 대해서는 상을 주고 불의에 대해서는 벌을 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의란 바른 것을 말하는데 그 기준은 모두 성경에 근거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의입니다.”
“그러면 교육칙어(?育則語)는 의인가 불의인가?”
가루베가 아버지의 설명을 중도에서 자르며 끼어든다.
“교육칙어라도 성경에 일치하면 의로운 것이로되 그렇지 않으면 불의입니다.”
가루베는 책상을 꽝 소리 나게 치며 버럭 화를 냈다.
“이런 괘씸한 . . . “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하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셋째, 하나님은 빛이라 함은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게 죄를 자각하게 하고 나아가 심판의 날에 가게 될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영이시라 함은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인간의 심중에 계시는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고 못 하실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라 하심은 천지만물은 모두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 말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잇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그렇다는 말이냐?”
물론입니다. 일본은 물론 세계 각 국은 전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전 세계와 인류는 오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쟁이 치고 말 못하는 놈 없다더니만, 계속해 봐.”
가루베는 치미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듯 신음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말을 재촉했다.
여섯째, 하나님은 주재자이시라 함은 세상 모든 이치가, 사람의 나고 죽음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천황도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호흡, 국토와 국민을 통치할 지위와 권력을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말세에 만민의 심판주이시라 함은 천년왕국이 지나고 무궁세계가 오면 불신자들은 준엄한 벌을 받아 지옥으로 추방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신도만이 눈물도 괴로움도 병도 죽음도 없는 참 행복한 세계에 남게 됨을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한번은 요다 검사에게 불려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그대는 1938년 구례에서 개최된 조선기독교 순천노회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순천 선교회는 그 결의에 반대해 순천노회와 분리됐다고 하던데 그 일도 알고 있는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애양원 교회도 그래서 순천노회로부터 분리되었는가?”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시인했다. 요다 검사는 전의를 다지는 듯 입술을 지그시 깨 물고 나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신앙에 대해 파고든다.
“그대는 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버지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를 주재하시며 절대불멸,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는가?”
다른 신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높은 지위의 신은 없습니다. 이는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신사참배에 대해 그대가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라!”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애양원이나 초빙되어 간 다른 교회에서 늘 설교하던 말씀 그대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성격에 의하면 하나님 이외의 신에게 절하지 말라, 내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고 되어 있고 신사의 신은 신이기는 하나 하나님은 아니며, 신의 형상을 만들어 모셨으니 분명한 우상이므로 참배해서는 안됩니다. 우상 숭배하고 예배하면 하나님이 그 예배 받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반대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오?”
첫째, 신사참배, 동방 요배는 하나님이 금하신 계명이니 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의 명령도 거역할 수 없을진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둘째, 우상에게 절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구원을 얻고자 함인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어찌 구원을 바라겠습니까?
셋째, 국민 된 도리로서 못하겠습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망하고 예수 잘 믿는 나라는 축복 받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가 망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보 손 목사, 우리 천황폐하께서는 현인신(賢人神))이다. 즉 신의 아들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1억 국민이 다 그렇게 믿는데 어찌 손 목사만 이를 믿지 않는가?” 하며 검사는 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1억 인이 그렇게 믿는다 해도 나는 그렇게 믿지 않소! 현인신이란 하나님 아들밖에는 있을 수 없소.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요 천황은 한 인간의 아들입니다. 천황이 신의 아들이란 것을 증거 해 주시오. 나도 예수가 하나님 아들 현인신이란 것을 말하겠소! 하며 아버지는 힘주어 말하니
“손 목사가 말하시오, 무슨 증거로 그러는지?” 하고 다시 물었다.
첫째 증거로 이 땅에 탄생하실 예수에 대해서는 4천년 전에 이미 예언되어 그 예언대로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나 천황의 탄생은 언제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까?
둘째, 예수는 성령으로 동정녀 몸에서 탄생되었습니다. 천황은 우리와 같은 양부모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셋째, 예수는 33년 간 지상에서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천황은 기사와 이적 등을 행했단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넷째, 예수는 인생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천황은 인생의 죄를 대속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이 없습니다.
다섯째, 예수는 죽은 후 3일 만에 살아났습니다. 역대 천황 중 그 누가 부활한 사실이 있습니까?
여섯째, 예수는 부활 후 그의 제자들과 함께 40일 간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언, 성취, 처녀 탄생, 기사, 이적, 속죄, 구원, 부활, 승천 같은 사실이 하나님 아들임을 증거하지 않습니까? 천황이 신의 아들 됨을 나타내는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하, 이거 안 되겠네!” 하며 검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외에도 간수들과 문답한 조서들이 많지만 다 소개할 수 없다. 이렇게 아버지는 여수경찰서에서 10개월 간 이리 시달리고 저리 시달리다 마침내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서 생명이 위독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검사 앞에 불려갈 때도 걸을 기력이 없어서 들것에 실려 다녔다. 극도로 쇠약해진 건강을 이유로 보석을 신청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렇듯 강직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토대로 신념을 굽히지 않으니 일본 경찰이 아버지를 석방해 줄 리 없다. 그리고 그들 마음은 더욱 강퍅해졌다. 그 형사는 아버지를 기소할 목적으로 10개월 간 아버지와 문답한 것을 500여 쪽의 조서(調書)를 작성해서 상부에 보고했다. 이로써 아버지는 미결수 생활을 마치고 광주구치소로 가게 되었다.
1941년 7월21일 아버지는 여수경찰서에서 광주구치소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4일에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확정 받고 그 후 곧바로 광주형무소로 옮겨 가서 복역하게 되었다.
피의자 심문 조서 제 1 회
우(右) 치안유지법 위반죄 피의 사건에 대하여 소화 15년 10월 22일 여수경찰서 사법 경찰이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형사 금성구옹의 입회 하에 피의자에 대해서 심문하기를 좌(左)와 여히함.
아버지는 여수경찰서에서 미결수로 있을 때도 때때로 끌려 나가서 동방 요배, 신사참배, 정오 묵도 등을 거부하느라고 죽을 힘을 다해 천신만고 끝에 싸워 이겨 나왔는데 앞으로 광주형무소로 가면 1년 반을 더 엄청난 고초를 당할 것이 뻔한 일이다.
복역 죄수는 형무소 안에 엄연한 규칙이 있는 지라 이 일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 인간의 육신을 가진 아버지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아버지는 하나님께 매달려 목을 메고 있는 힘을 다해 결사적으로 부르짖기 시작했다.
주님! 나도 인간입니다.
어떤 악형이 부딪칠지라도 싸워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주 위해 받는 아픔은 주 위해 사는 자의 면치 못 할 일이오며 내 몸의 석 되 밖에 안 되는 피는 주 위해 쏟고 이 백 개의 뼈는 주 위해 다 부러뜨리면 내 할 일 다 한 것이외다! 모든 걱정 근심은 내 알 바 아니오니 주님 이끄시는 대로 따르리이다. 오! 주여 용맹을 주옵소서!
이렇게 7일 간을 기도하고 나니 마음은 강철 같이 강해지고 더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 후 그리고 10여일 후 광주 지방법원으로 기소되어 갔다. 광주형무소에서도 동방 요배, 신사참배, 정오묵도 등이 꼬리를 물고 부딪칠 때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아픔을 생각하며 싸워 나갔다.
물론 그러자니 많은 고초가 뒤따른다. 그들은 고함치며 때리기도 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신앙의 절개를 꺾으려고 했지만 이를 이겨내는 데는 그 만큼 괴로움과 핍박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글로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형기 만료일인 1943년 5월 17일에도 풀 나오지 못하고 오히려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1년 6개월을 광주형무소에서 보냈지만 아버지의 신앙에는 티끌만한 변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사국에서는 아버지의 신앙문제를 놓고 재검토했다. 손 목사는 밖에 나가면 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할 것이 뻔하니 절대로 내보내면 안되겠다고 하여 예방구금소로 보내야겠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렇게 옥고를 치르고도 전향을 거부하여 종신형 언도를 받은 것이다. 당시 상황은 아버지가 그 해 6월 8일에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손꼽아 기다리던 5월 17일에 얼마나 놀라셨으며 근심하셨나이까? 붕초 양원은 무슨 말로서 어떻게 위안을 드리리이까? 아무 도리 없사옵고 다만 아브라함과 욥 같이 반석 같은 그 신앙으로 스스로 위안과 복을 받으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5월 20일에 예방 구금소로 가야 된다는 언도를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변함없이 신앙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월 20일에 항고서를 대구 복심법원에 접수할 것입니다. 그리한 것은 불편이나 고통을 면해 보려는 생각에서가 아니고 대구 가서 그곳 간수들에게 성경 교리를 증거(전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마 이 달 20일 경이나 그믐안으로 대구에 가면 8월중으로 끝이 나서 경성구금소로 갈 것입니다. 경성의 서대문 형무소 안에 있는 예방구금소로 가게 됩니다.
구금소에서 편지나 면회는 매월 누구나 몇 번이고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만은 자유롭게 생활 한다 하니 염려하지 마시고, 만주에 있는 동생 집에 가실 때는 면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종신형을 받은 후 9월 9일 적은 시다.
가을 까마귀 뭇 떼들은 때를 찾아 날아오고
삼월 삼일 왔던 제비 고향 강남 찾아가나
고향 떠난 옥중 고객 돌아갈 길 막연하다.
아침저녁 찬바람 가을 소식 전해주고
천고마비(天高馬肥) 금풍냉월(金風冷月)
낙엽 또한 귀근(歸根)하되
고향 떠난 3년 너머 돌아갈 길 막연하다.
우주 만유 모든 징조 인생 가을 전해주고
억천만인 모든 죄악 심판주를 촉진하되
준비 없는 이내 몸은 천당 고향 막연하다.
광주형무소에 있을 때이다. 만기가 가까워져갈 무렵에 형무소 측에서는 아버지의 신앙을 꺾는데 갖은 방법을 동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이것을 이용할 생각으로 한날 소장이 만주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아들이 지금 몸도 약해져서 죽게 되었으니 어서 고집 꺾고 신사 참배해서 나오도록 좀 하시오! 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편지를 읽은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옥중에서 죽으면 죽었지! 신사 참배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정반대의 글을 썼다.
이 편지를 본 소장은 “요 괘씸한!” 하며 아버지에게 다가와서 당신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가정이 풍비박산 났으니 고집 꺾고 어서 나와서 가정을 회복시키라고 씌어 있소! 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런 술수에 넘어 갈 아버지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소! 내 아버지가 그런 말씀하실 리 없소! 어디 편지 좀 봅시다.
그러자, 소장은 편지를 확 집어 던지면서 “이런 같은 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만!” 하고 화를 벌컥 내며 나가버렸다.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박상건 목사님이 (만주에서 할아버지 장례식을 인도한 목사) 훗날 들려 준 말이다.
여보! 내 눈이 점점 멀어 가오!
여수 경찰서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감옥 생활은 광주구치소, 광주형무소, 경성구치소를 전전하다 1943년 11월 청주구금소로 이어졌다. 다섯 번씩이나 감옥에서 감옥으로 옮겨진 아버지는 그 곳에서 해방이 되어 풀려날 때까지 지냈다. 만 5년의 세월을 가족과 떨어져 외롭고 고통스런 옥살이를 한 것이다. 그 고통스런 세월 속에서 어버지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라도 속히 나가는 것이 자유일 것 같으나 오히려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 감사한다고 했다. 경성구금소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곳 관리자가 와서 아버지가 소지하고 있던 성경과 찬송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불교 서적을 한아름 들여다가 아버지 앞에 놓았다. 읽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라는 뜻이다. 이 역시 아버지의 사상을 전환시키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일이다. 몇 날 동안 아버지는 그 책들을 빠짐없이 다 읽었다. 읽은 후에 감상문을 제출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썼다.
하늘에 어찌 두 해가 있을 수 있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우주의 주인공이 어떻게 둘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 외에 구원이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대성이나 오직 내 구주는 홀로 예수 뿐이니
내 어찌 두 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자 어디 있으랴?
이 신을 위하여는 아까울 것 무엇이며,
이 주를 버리고서 내가 어디로 가랴?
그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 앞에 구금소장, 감찰과장, 보도과장 그리고 당시 불교계에서 으뜸간다는 일본 승려가 와서 앉았다. 교도관들이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승려와 변론을 시키려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기독교가 진리냐? 불교가 진리냐? 를 놓고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몇 시간 동안 한치의 양보도 없는 논리 싸움이 계속되었다. 원래 그 일본인 승려는 마음속으로 기독교를 저급한 종교라고 얕잡아보고 있던 자다. 두 사람이 논쟁이 점점 열기를 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말문이 막히는 쪽은 오히려 승려 쪽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본 사람 있느냐?
하나님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일국의 왕도 보기가 황송하온데 어찌 하나님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그 승려를 향해 아버지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장하는 불교의 신을 내게 보여 주시오! 그러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 주겠소! 하고 일단락을 지어 버렸다. 한낱 보잘것없는 죄수 따위에게 신앙 토론에서 밀리고 있다는 자각이 그 승려를 흥분시켰으리라! 일본인 승려는 벌떡 일어나더니 “네놈이 감히 나에게 이기려고 도전하느냐? 자! 이것이 불교의 신이다!” 하며 느닷없이 아버지의 뺨을 후려쳤다. 아버지는 흥분한 그 승려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신도는 나같이 처량한 신세인 죄수의 뺨을 때렸지만, 하나님의 충직한 아들인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쪽 뺨도 마저 치십시오! 건방진 죄수 같으니...... 네가 감히 나를 이기려 한단 말이냐?”
일본 승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승려는 아버지를 발길로 차기도 하고,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었다. 놀란 간수들이 그 승려를 데리고 나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참 망측한 일이 벌어질 뻔했다.
변론에 이기지 못한 그 승려가 폭력으로 이기려고 했으니 사실은 그가 진 것이다. 이 광경을 본 후부터 승려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청해 듣던 강연도 중단되고 말았다.
청주구금소에 일을 때의 일이다. 이곳 사상 전환을 시키는 기관에서 기독교에 지식 있는 자를 외부에서 한 분을 초빙해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대화를 시켰는데 그분은 기독교 계통의 대학을 나왔고 과거에는 기독 신자였다. 그는 1달 내로 손목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이다. 그가 아버지 앞에 나타났다.
“손 목사, 지금 조선 교회는 극도로 수난기를 맞았습니다. 이 난관에 목자가 양떼를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외곬이 되어 처박혀 있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로마에 있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를 탈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이 말에 아버지는 하도 기가 막혀서
“네? 지금 조선 교회는 당신 말대로 어려운 수난기를 맞았습니다. 마음 놓고 진리를 전할 수 없거니와 진리를 바로 전하다가는 모두 나처럼 투옥시키니 이 기막힌 현실에서 내가 잘 살자고 양떼들에게 독초를 먹여 독살시킬 바에야 차라리 진리를 따르다가 투옥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위대한 무언의 설교가 될 것입니다. 진흙 구더기 속에서 연꽃이 향기를 드러내듯이 진리를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우리 일본 정부에서는 당신이 믿는 기독교를 믿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니야. 기독교를 믿되 일본주의적 기독교(일본신 천황)를 믿으라는 말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정부에서는 당신을 잘 살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이오!”
기독교는 본시 일본주의적 종교가 아니고, 신본주의적 종교인데 만일 기독교를 일본적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닐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그보다 작은 일본신 아래에다가 끌어넣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독속에 그릇을 넣을 수 있을지언정 그릇 속에 독을 넣을 수 없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아버지는 어떠한 질문에도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여러 번 심문이 있었는데 그때도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을 당당하게 밝혔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과 같은 구금 생활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가져 보지 않았다. 형편이야 어떻든지 오직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 날 이후 아버지에게는 식사량을 반으로 줄이는 감식이 벌이 내려졌다. 사상을 전향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집을 부린 데다 같은 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전도한다는 이유로 내려진 형별이다. 가뜩이나 적은 양의 식사인데 그것을 또 반으로 줄였으니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수저를 놓자마자 그 순간부터 또 배가 고팠다. 감식형으로 줄어든 밥은 꼭 곶감만 했다. 그 밥은 살기에도 어중간하고 죽기에도 어중간한 양이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한창 먹을 나이인데 그토록 적은 밥을 먹고 나면 더 배가 고파져서 견딜힘이 없었다. 이젠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부족한 식사로 인해 영양실조에 걸려 점점 눈이 멀어져 갔다. 그 시절에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꼭 초등학교 1,2학년 학생이 쓴 것처럼 대문짝만한 글자들이 이리 삐뚤 저리 삐뚤 중심이 잡혀 있지 않았다.
신앙의 누이인 황덕순 고모에게 쓴 편지에는 “덕순아, 내 눈이 지금 점점 멀어간다!” 라고 적혀 있다. 그 때 황 고모는 피복 공장에 다니며 일할 때였는데 그 편지를 받고 간유 영양제를 큰 것으로 두 통을 사서 보내드렸다. 아버지는 그중 한 통을 어머니에게 보내고, 나머지 한 통만을 자신이 드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 간유를 복용하고 차츰 눈이 회복되었다.
감옥 생활은 언제나 춥고 배고프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적응할 수 없는 곳이 감옥일 것이다. 불기 없는 썰렁한 방, 박탈당한 자유에의 갈구,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인하여 그 곳에 갇힌 사람들은 조금씩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변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앙으로 무장한 아버지만은 예외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아버지는 언제나 활기찬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죄수건 간수건 가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 간수들 중에서도 예외로 아버지를 동정하고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조선인 간수 한 분이 있었다. 아버지의 굽힘이 없는 신앙의 지조를 높이 사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려고 애썼던 자다. 이 조선인 간수는 한때 아버지를 동정하여 상부에다 선의로 거짓 보고를 한 적도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를 위해 요즘 손목사는 신사참배도 잘 하고 성적도 대단히 우수하다고 요다 검사에게 아버지를 변호해 준 바로 그 간수이다. 이 간수가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하루는 아버지에게 다가와서 아버지의 처지를 동정하며 간곡히 설득을 했다.
“손 목사, 당신은 참으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사람이오. 밖에 나가서 더욱더 보람 있는 일을 해야지, 언제까지 감옥에 갇혀 있기만 할 셈이오. 죄라고 해야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 뿐이잖소!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합시다. 신사참배는 안 해도 좋으니 그냥 여기에다 신사참배 했다는 지장만 찍으시오! 지금이라도 당장 내보내 주겠소!”
그가 내민 서류는 신사참배는 국민 의식이므로 거부하지 않고 참배하겠다는 것을 적은 일종의 서약서였다.
“그건 안 됩니다. 당신의 생각은 고마우나 이것은 나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안 한일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 하지 않을 일을 하겠다고 거짓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아버지는 대뜸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감옥에는 도둑질하다 잡혀온 이도 있고 치고 받고 싸우다 잡혀온 이들도 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쟁하다 잡혀온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도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은 밤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끌려 나갔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고문하는 자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같이 모의한 놈들을 대라!”
......
그 놈들 지금 어디 숨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지 네놈은 알고 있지? 어서 그 곳을 대라...... 이 자식, 정말 못 불겠어?
고문하는 자의 목소리는 살기등등했지만 독립투사의 입에서는 괴로운 신음 소리만 흘러나올 분이었다. 홀로 고통을 감당하다 견디지 못하면 죽을지언정 결코 동지를 팔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면 그들은 손톱 사이사이를 대쪽으로 만든 날카로운 침으로 찔러내곤 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으면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춧가루 물을 코에 들이붓기도 하고 전기 고문을 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고문에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여겨지면 독립 투사들은 입을 열어 자백하는 대신 혀를 깨무는 쪽을 택했다. 혀가 잘려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자백하여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유혹을 그런 식으로 물리친 것이다. 잘린 혀로는 말을 할 수 없을 터이므로.
아버지는 이런 애국지사들의 꿋꿋한 나라 사랑의 일념을 곁에서 지켜보며 더욱 강건한 믿음을 다짐하곤 했다. 보라, 저들은 나라를 위해서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위해서 이 한 목숨 못 바칠 까닭이 무엇이냐? 이 정도 고난을 어찌 힘들다 하겠는가?
아버지의 신앙은 독립투사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고문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본은 망하게 되어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이들을 벌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아니다.
아버지는 다섯 번이나 감옥에서 감옥으로 옮겨 다녔는데, 그 중 가장 고생이 심했던 곳이 바로 청주구금소이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눈만 뜨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쉴 새 없이 전도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결국 그 전도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인해 구금소 측에서 아버지를 독방에 가두어 놓았다. 외로움은 둘째 치고 뼈마디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이겨낼 길이 없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운 겨울이 계속되었다. 두터운 이불이 있을 리 없으니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독방에 갇힌 아버지로서는 그 고통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옆 사람의 온기라도 느낄 수 있다면 추위를 이겨내기가 한결 수월할 터였다. 계속되는 추위로 아버지는 동상에 걸려 손발이 얼다가, 또 얼고, 또 얼고...... 이것이 계속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열 손톱, 열 발톱까지 다 얼어 짓물러 빠져버렸다.
청주구금소 독방에서 쓴 시
빈 방 홀로 지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 하여 네 식구 되었도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밤 깊고 옥 깊고 마음 가득 수심도 깊다!
밤 깊고 옥 깊고 마음 가득 수심도 깊으나
주와 함께 동거하니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 고생 4년은 길고 긴 날이나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와 같도다!
지난 4년 편안히 보호해 주신 주는
미래에도 그리하실 줄 확신하노라!
편지를 쓰고 시를 짓는다고 해서 불기 없는 방이 따뜻해 질 리 없다. 온몸이 덜덜 떨려온다. 이러한 강추위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얼음덩이로 만들려는 것 같다. 독방 한쪽 구석에 붙인 아버지의 몸은 쭈그리고 앉으면 일어설 수도, 누울 수도없게 꽁꽁 얼어붙는다. 사람의 육체는 상황 변화에 따라 움츠러들기도 하고, 심하면 동작을 멈춰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동작이 멈추면 그 사람의 생명도 다하게 될 것이다.
그 날 밤은 유난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다. 영양실조에 독감까지 걸린 아버지는 온 몸이 불덩이처럼 열리 오르고 두통이 심해졌다. 그 추위 속에서 비몽사몽 헤매다가 의식을 일었다. 새벽에 아버지 방에 들른 간수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몸을 보고 얼어 죽은 줄 알고 곧 바로 어느 음침한 병실로 옮겨버렸다. 숨도 쉬는 것 같지 않고 꼭 죽은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음침한 병실이 분명했다. 하나님이 날 살리셨구나! 선뜻 그런 생각이 들면서 엎어진 채 입에서는 절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 .” 하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간수가 오더니 “흥! 이놈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났구만!” 하며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며 찬물을 끼얹었지만 감사에 넘쳐 저절로 나오는 찬송을 뉘라서 막을 수 있으랴.
이러한 모진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면 아버지의 양쪽 귀에선 진물이 줄줄 내리기도 한다. 감옥이란 다시없는 연단소인 것 같다. 만일 이런 옥고의 연단이 없었던 들 훗날 어떻게 죽음을 불사할 믿음이 생겼을까 싶다.
그런 와중에도 한 달에 한번씩 도착하는 아버지의 편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어떤 때는 동인 오빠에게, 또 어떤 때는 할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보내온 편지를 온 식구가 돌려 읽으며 더욱 강건해지는 아버지의 신앙심을 확인하곤 했다.
아버지의 편지가 올 때 쯤이면 할아버지는 예감으로 미리 아는지 돌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우체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체부가 편지를 건네주면 할아버지는 손에 편지를 쥐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편지를 개봉하는 할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떨렸고, 그 입에서는 우리 양원이, 우리 양원이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편지를 다 읽은 할아버지는 두 다리를 쭉 뻗은 채로 “아이고, 양원아! 불쌍한 내 아들아!” 하며 통곡을 터트린다.
동인, 동신 보아라.
지식에 대하여는 비록 학교에 안 다녀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느니라. 지식은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인 즉 무슨 일에서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 . 세계 대부흥사 무디 선생도 양화공장 직공이었고, 웅덩이에 내어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줄이야! 나일 강물 갈대밭 속에 내어버린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주가 될 줄이야! 통 만드는 너희들의 장래도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느냐?
그러므로 항상 근신하고 수양에만 노력하여 학식과 덕행에 많이 힘써야 한다. 분투와 건강한 뜻을 세우고 필사의 노력으로 끝까지 인내하여라. 옛날 요셉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믿고 의지하여 지덕의 완성에 나아가라.
1942, 12, 10
그래서 두 오빠는 공장을 갔다 오면 틈틈이 책을 읽었고 우리 동생들에겐 한글을 가르쳤다. 또 아버지는 우리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니 우리 모두의 키를 재어 보내 달라고 편지하곤 했다. 그럴 땐 큰오빠가 우리 동생들을 벽에 세워 놓고 키를 잰 것을 적어 아버지께 편지로 보냈다.
다음은 아버지가 어머니께 보낸 편지다,
동인 모친에게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달마다 한 번도 어기지 않던 당신의 면회가 이렇게 늦은 걸 보니 아마도 집안에 무슨 변이 생긴 것 같습니다. 누가 아픈지요? 무슨 별 일 인지요? 하여튼 면회를 못 오게 될 사정이면 편지라도 해주셔야 한가지 만을 위해서 기도를 할 터인데 편지마저 없으니 무슨 일인가 하여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속히 소식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밤마다 꿈속에서 보는 당신의 마음과 몸에 근심과 불안이 가득해 보였는데 아마 근심 걱정에 눌려 병이 된 모양 같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은 절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이란 병중의 병이요, 죄 중의 큰 죄가 되는 것이외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는 머리가 아프니 배가 아프니 손이니 발이니 하여 병인 줄 아나 근심이 병인 줄 아는 자 적고 도적질이나 살인이나 간음은 죄인 줄 아나 걱정이 죄가 되는 줄 아는 자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죄 중에 제일 큰 죄가 불신의 죄가 아닐까요? 믿음 없는 것 보다 큰 죄는 없는 듯합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면 주께서 권고해 주신다고 했는데 맡기지 않고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이 불순종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근심을 이루고 근심이 맺혀 병이 되는 것이요. 영적인 생각은 자족하는 마음을 생기게 하고 자족할 줄 아는 것은 일대 거부가 되는 것이올시다! 걱정은 병중의 큰 병이요 죄 중의 큰 죄가 되는 것이요, 자족은 부자 보다 나은 만족한 생활자외다!
내가 항상 말하거니와 고난은 참으로 큰 복이외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입 보다 더 큰 복은 없는 법이외다. 부자나 학자나 모든 성인군자까지도 다 고난의 산물이 아닐까요? 고난은 성공의 어머니가 아닐까요? 고난은 복을 거두는 씨가 아닐까요? 고난 중에 자기 과거의 죄를 다 깨닫게 되어 사죄의 은혜도 받고, 세상의 벗이 되어 죄 중에 빠진 자에게는 채찍이 되어 하나님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육체의 염려와 생각의 염려는 우리의 신앙 생명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걱정의 돌짝 밭이요. 염려의 가시덤불이외다. 그래서 이 걱정 근심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고 장래 하늘 영광을 못 보게 눈을 가리우게 하는 것이외다.
옛날 이스라엘은 몰록에게 장자를 바침으로도 기뻐하였거든 하물며 아브라함이 독자를 하나님께 바친 즐거움이리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조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의 본이 되었나이다! 당신이 나를 위하여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 주소서. 한 덩어리 주먹밥, 한잔의 소금국물의 맛이야말로 신선의 요리요. 천사의 떡 맛이외다. 당신은 엄동설한의 고생을 염려하나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이오! 일꾼인 나를 밥을 먹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식량을 본래 적게 하셨으니 이 밥으로도 내게는 만족이요, 나의 키를 적게 하심으로 옷과 이불은 나의 발등을 덮으니 이만하면 만족이 아닐까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이며 일하는 일꾼을 밥 아니 먹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께서는, 적게 믿는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꾸지람을 하십니다. 염려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을 탄식할 뿐이오니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외다! 안심하소서!
1942년 10월 14일
그 당시 아버지가 감옥에서 쓴 편지에는 항상 만족하라, 인내하라, 감사하라 등의 말이 빠지지 않았다.
신사 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목사들 중 김길창 목사는 할아버지가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도 한 고향에서 같이 자란 아주 절친한 사이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믿음을 보고 배우고 자란 그가 엉뚱한 설교를 하고 다녔다.
내가 신사참배 할 때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신사 뒤에서 예수님이 대신 절을 받으시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 할 때는 코가 땅에 닿도록 최상의 경의를 표해 절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일본을 이토록 축복하고 일본에게 권세를 주어 지금 세계와 싸워 이기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성도들은 이 권세에 굴복해야 합니다. 옥중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어리석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외곬입니다......
라고 역설했다.
천년만년 일본의 지배가 계속되리라고 판단한 것일까? 그래서 그는 일본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일신만 호의호식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더라도 불의 한 것을 용납하실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배워서 알텐데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존재마저 망각할 정도로 일본의 힘이 막강하다고 여긴 것일까? 그 목사만이 아니라 신사참배에 참여한 많은 목사들이 이런 식의 해괴한 궤변으로 순진한 교인들을 미혹시키곤 했다. 그래놓고는 훗날 해방이 되고 나자 그들은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았다.
목사들은 하나 둘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 나라의 모든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판국이던 것을 우리가 신사참배까지 해가며 교회를 살려냈고,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왔다. 이러한 우리에게 신사참배 앞잡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당치 않다.
그래도 그들에게 변명할 말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위선자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그 김길창 목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누우면 별이 올려다 보이는 초라한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돈이 든 흰 봉투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옛정을 생각하여 일시적이나마 동정심이 생겨서 선심을 썼노라! 는 태도였다. 그런 불의한 돈을 받을 어머니가 아니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따위 얄팍한 동정에 혹할 어머니가 아니었다. 때 묻고 흠집 난 선심은 이미 선심이 아니다. 어머니는 분노로 몸을 떨며 돈 봉투를 내동댕이 쳐버렸다.
“목사님! 우린 그런 돈 아니라도 굶어 죽지 않으니 목사님이나 그 돈 가지고 가서 잘 잡숫고 잘 사십시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 역시 왜 그리 슬픈지 목까지 차오르는 설움을 토해 놓으며 어머니와 함께 한없이 울었다. 무안해진 김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다가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돌아 가버렸다. 설움 중의 가장 큰 설움은 배고픈 설움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시절 진정한 설움은 따로 있었다. 배고픔보다 또는 못 입는 것보다 내가 느낀 가장 큰 설움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나하고는 놀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줄넘기, 돌차기 놀이를 할 때면 그들은 언제나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려 놀았다. 나는 언제나 먼발치에서 그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할 뿐이다. 학교 다니는 그들이 부러웠고, 함께 어울려 노는 그들이 부러웠다. 매번 나를 끼워주지 않고 마주쳐도 다정하게 아는 체하지 않는 그들이 야속했다. 너무나 속이 상한 나머지 뻔히 거절당할 줄 알면서 어머니에게 학교에 보내 달라고 졸라 댄 적도 있다.
엄마, 나 좀 제발 학교에 보내 주세요.
안 돼. 학교에 가면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한단다.
절 안 하면 되잖아요.
너도 잘 알잖니. 오빠들을 보렴. 큰오빠는 신사참배 거부로 소학교 3년 때 퇴학당했다가 나중 창신학교로 전학 가서 간신히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작은오빠는 신사참배 거부로 3학년 때 결국 퇴학당하지 않았느냐? 늘 똑같은 대답이었다.
생략
어머니의 일생은 한마디로 희생과 인내의 삶이었다. 평생을 헐벗고 굶주리며 지냈지만 언제나 자신 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사셨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싸우면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주어진 운명에 대해 원망하지도 않았다. 당시의 어머니는 한 달에 한번씩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면회 갈 때마다 꼭 성경 한 구절 씩을 외워 가서 아버지께 읽어드리곤 했다.
“만일 당신이 신사 참배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어머니는 자주 부산 기장에 있는 장 부자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곤 했다. 세 살 박이 동림이를 데리고 다니며 남의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해주고 돌아오는 날, 치마폭에 싸온 음식을 우리들 앞에 내어놓으며 하던 말씀을 나는 지금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다.
“나 먹으라고 내어놓은 것인데 너희들 생각에 목에 넘어 가야지. 그래서 주인 몰래 싸가지고 왔다. 많이들 먹어라.”
어머니는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끔 부엌에서 일하다 빈혈 증상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당신의 몫으로 나온 음식을 먹지 않고 우리 남매들을 위해 싸오곤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련을 안고 이토록 우리는 해마다 가난해야만 했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아버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날이 드디어 돌아왔다.
1943년 5월 17일!
고난 속에서도 세월이 흐르기 마련이다. 여수경찰서에 검속 된 날이 1940년 9월 25일이고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선고받고 수감된 날은 1941년 11월 17일 임으로 그 날이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의 만기 출소 일이다. 집 떠나신 지 거의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1943년 2월 13일에 황덕순 고모께 쓴 편지에는 “네가 4월경에 면회 온다고 했는데 5월 17일이 출소일이니 한 달만 더 기다리면 5월 17일에 옥문 전에서 반갑게 만나게 될 텐데 공연히 시간과 돈을 낭비해서 되겠나?” 라고 쓰여 있었다.
이날을 어느 명절에 비할 수 있겠는가? 얼마 만에 보게 되는 남편이며 얼마 만에 보게 되는 아버지인가? 또 얼마 만에 보게 되는 아들인가? 달력에다 ○표를 해 놓고 달력만 바라보며 손꼽아 기다린 날이 아닌가! 애양원 식구들도 모두 함께 손꼽아 기다려 온 날이다.
엄마는(36세)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부터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며 부산하게 움직인다. 그동안 남편없이 험한 세파를 헤쳐 오면서 겪었던 설움과 고초야 이루 말 할 수 없지만, 이제 남편이 돌아와 함께 사는데 그까짓 과거의 고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엄마의 들뜬 마음속에 자리한 뿌듯한 행복감을 눈치 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우리 다섯 남매에게도 미리 빨아 두었던 새 옷과 신발도 정성스레 준비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다가, 웃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찌 보면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남매들의 기쁨 역시 엄마에 못지않았다. 영원히 올 것 같지 않던 그 날이 왔고, 다시는 못 볼 것 같던 아버지를 이제 곧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대로 하늘을 날아 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손에 손을 잡고 아빠가 갇혀 있는 그러나 곧 풀려나올 광주형무소로 향했다. 다른 때는 쳐다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여겨지던 높다란 담장도 오늘은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졌다.
우리들은 형무소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제각각 아빠를 만나는 달콤한 상상 속에 빠져든다. 나를 끌어안고 수염 난 뺨으로 내 볼을 비비는 아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 동희가 벌써 이렇게 컸나? 하는 아빠. . .
그러나 굳게 닫힌 철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엄마가 어디선가 먹을 것을 사왔다. 정문 앞에 쭈그려 앉은 우리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를 만난다는 희망에 찬 마음으로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아무 것도 부끄럽지도 부럽지도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기다림과 설레 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느새 정오가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쩐 일일까? 우리 가슴속으로 슬금슬금 초조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대감 사이로 끼어드는 알지 못할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런 심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우려의 말을 뱉어 내게 했으리라!
“엄마, 오늘 아빠 못 나오시는 것 아닐까요?”
“그럴 리 없다. 형기가 만료되면 당연히 나오는 거란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틀림없이 나오실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마 역시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이곳저곳을 서성이는 모습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다. 사방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더는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엄마가 담당자를 만나겠다며 형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도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사무실 쪽문은 열렸다. 그곳에서 창백한 얼굴로 엄마가 걸어 나왔다. 아빠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으면서 나오는 엄마를 큰오빠가 달려가 부축했다.
우리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엄마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우리들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넋이 빠진 듯한 모습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확실한 말이었다. 우리는 이미 상태가 어떠한 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들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고 있었다.
이윽고 엄마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파랗게 질린 얼굴을 좌우로 마구 흔들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꼭 감은 어머니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는 출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의 그 비통한 심정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뉘라서 어머니의 그 절망적인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기대가 무너지고 난 가슴속에 하얗게 쌓이는 그 허망함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그 간절한 갈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실망감에 다들 어머니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이윽고 목이 멘 어머니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오늘 종신형을 선고 받았단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종신형이라니! 아버지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살아서는 감옥 밖의 세상을 볼 수 없게 한단 말인가? 그토록 학수고대하며 형이 만기되는 시간만을 기다려왔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소망의 탑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종신형! 이것은 살아서는 이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머니와 어린 우리들을 위로하고 달래는 큰오빠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빠 바보야! 고개 한번 숙이면 되는 걸 정말 바보야!”
고인 눈물은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울지 마! 하면서 울었고,
걱정 마! 하면서 울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눈물의 홍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의 걸음걸이는 패잔병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희망을 잃어버린 채, 온통 캄캄한 절망만 한 움큼 안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걸음에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부산) 범냇골 산꼭대기 다 찌그러진 판잣집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또 다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껏 고생한 세월 속에서 그래도 아빠가 나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대와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는 그나마 그런 기대도 품을 수 없는 막막한 뿐이었다.
이제 달력에는 아빠의 출옥일을 표시할 수 없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뛰논다는 것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앞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아버지는 형기를 다 복역하고도 신앙의 지조를 무너뜨리지 않아 종신형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다음은 일본 재판부의 당시 종신형 결정문인데 이것은 해방 후 안용준 목사가 광주지방 검찰청장 원택연 장로께 부탁해서 광주 형무소에게 찾아낸 조서 원문이다. 이외에도 많은 조서문들이 있지만 다 소개할 수 없다.
소화 18년 예구항(豫拘抗) 제 1호
결 정
본적: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
주거: 부산 범일정 1474번지
광주 형무소 재감 중
목사 성손(性孫) 대촌양원(大村良源) 당42세
우자(右者)에 대한 광주지방법원 소화 18년 예구 제2호 예방 구금청구 사건에 관하여 소화 18년 5월 20일 동원에서 한 결정에 대하여 항고인(피청구인)이 항고한 것을 당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근등춘의(近藤春義)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기를 좌(左)와 같이함.
주 문
본 건 항고는 이를 기각함.
이 유
본건 기록을 사열한 즉 항고인은 기독교의 목사로서 기독신관에 입각한 국가관에 의하여 여호와 신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주재 섭리하는 지상의 유일 절대전지 신으로서, 황송하옵게도 천조대신께서도 그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기고 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인고로 할 수 없는 일이며 장래에는 아국까지도 포함하여 현존 세계 각 국가의 통치 보직은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재림할 예수를 만왕의 왕으로 하는 영원한 이상 왕국이 실현된다고 망신하고 여사한 이상 왕국의 실현을 기구하여 그 반국가 사상을 다수 교도에게 선전 고취하여 우리 국민의 국체의식을 마비 동요시켜 이로써 국체 변혁을 촉진 달성시키기를 기도하고 이를 선동하였기 때문에 소화 16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에 의한 징역 1년 6개월에 처하여 소화 18년 5월 16일에는 이 형기가 종결하게 되나 수형 중에도 우리 존엄한 국체에 대하여 아직도 각성함에 이르지 못하여 의연히 과거대로 기독교리에 의한 반국가적 궤격 사상을 고집하여 포기하지 않으므로 바로 사회에 석방할 때에는 다시 치안유지법 제 1장에 제시한 죄를 범할 우려가 현저하다고 인정되어 치안유지법 제 39조 제 1항에 의하여 항고인을 예방 구금에 처함이 적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취지에서 나온 원 결정 역시 적당하
므로 본건 항고는 기각을 면치 못하게 되고 형사소송법 제 166조 제 1항 후란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함
소화 18년 9월 16일
대구 복심법원 형사 제 1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고도행열랑 인
유동정행 인
축원소웅 인
우등본야
소화 18년 9월 20일
대구 복심법원 형사부
조선 총독부 재판소 서기 유전계
아버지는 종신형 결정서를 정신없이 읽고 난 후 두 눈엔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쓴 시
나를 치는 모진 질고여!
너의 강한 세력으로 나를 쳐보라!
모진 질고의 내면에 묻혀 있는
신애(神愛)의 진리를 맛보리라!
당시 아버지가 보낸 편지에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난 후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걱정과 근심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였다.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간 복역하는 동안 온갖 방법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시련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 여기며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꿋꿋이 신앙을 사수하였던 아버지는 종신형 선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버지가 종신형을 받은 직후에 보인 반응은 네, 좋습니다. 나는 감옥에 있어도 예수와 함께 살 것이고, 밖에 나가도 예수와 함께 살 것인즉 예수와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나를 감옥에 가둠은 나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될 대로 될 것이오니 주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따르리이다! 였다.
기독교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서 더욱 단련된다는 아버지의 신앙관을 잘 보여 준 것이다. 또, 아버지는 일본은 망한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우상숭배 하는 나라는 다 망했다! 라고 말했다. 세상에서는 더할 수 없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일 속에서도 아버지는 만족한 생활자로 살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섭리를 발견하였다.
산산조각난 가족
아버지가 종신형을 선교 받은 이후, 1944년 1월에 큰오빠가 19세 때 청주구금소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 갔다. 그 동안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았을 뿐이고, 오빠가 면회를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간 길이다. 설레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면회를 신청하는데, 보도과장이 오빠를 불렀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은근한 목소리로 느닷없이 물었다.
“신사참배 하겠나?”
큰오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못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보도과장은 오빠의 반응에 별로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장황한 설득의 말을 늘어놓았다. 말하는 도중 그의 얼굴에는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젊은 사람이 사고방식이 그렇게 꽉 막혀서야...... 네 아버지야 구식 사람이라 그렇다 치고, 지금 조선 교회 지도자들을 보아라. 아무렴 그들이 네 아버지보다 학식이 없겠느냐? 신앙이 부족하겠느냐? 그들과 너의 아버지 차이가 무엇인 줄 아느냐? 그들은 현실을 바로 볼 줄 아는 현명한 이들이다. 생각해 보아라. 신사참배가 어찌 종교 의식이란 말이냐? 만약 종교 의식이라면 왜 내무부 종교국에서 지휘, 감독하지 않고 문교부에서 주관하겠느냐?”
보도과장은 계속 오빠를 설득했다.
“이것만 보아도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국민의식을 거역한다는 건 그 마음속에 일본을 미워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민족의식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선일체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냐? 시국을 인식하지 못하고 종교의 가면 아래 민족운동을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사상범인 까닭이다. 너야 네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잘못 받은 허물 밖에 더 있겠느냐?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신사에 절 한 번 하는데 깊이 생각할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깊이 생각한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개만 숙이는 단순한 행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라. 자, 한번 해보아라!”
보도과장은 오빠를 얼르고 달래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궤변 속에 도사린 음모를 여지없이 부서 버리고 싶지만 큰소리 내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그 날은 아버지를 만나 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 자리가 사상 논쟁이나 신앙 논쟁을 하는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오빠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인데 이 정도 말도 못 참아낸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빠는 보도과장을 너무 과소평가했고, 그 뱀 같은 보도과장은 오빠의 속마음까지 읽고 있었는지 모른다.
오빠의 간절한 소망을 간파하고 그것이 오빠의 약점이라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아무런 대답 없는 오빠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허참, 사람 말을 그리 못 알아듣나. 딱 한 번만 해보라는데도. 정 그렇다면 나도 아버지 면회 못 시켜 주겠으니 그리 알아.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는 것 아니겠나?”
그 말은 오빠에게 청천벽력이다. 벼르고 벼르다 찾아온 천리 길이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뵈러 올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다음에 또 시간을 내어 찾아온다고 해도 이 보도과장이 버티고 있는 한 아무 조건 없이 면회를 시켜 줄 리도 없다. 오빠의 마음속으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어쩔 것인가? 아버지를 만나 뵙기 위해 딱 한 번 불의를 범할 것인가, 비록 먼 길을 왔지만 깨끗이 되돌아갈 것인가?
아버지를 만나 뵙자니 신앙이 양심이 허락지 않고, 돌아서자니 아버지의 얼굴이 삼삼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제일로 싫어하는 금기 사항이 아닌가. 그러나 옥에 갇히고 나서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지다. 오빠는 아버지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를 면회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이겼다.
오빠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형식일 뿐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니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것이다!” 보도과장을 따라 신사가 있는 곳으로 간 오빠는 보도과장이 딴전을 피우는 동안 어물어물 고개도 숙이지 않고 돌아서 나왔다. 그러나 보도과장은 그런 오빠의 행동을 못 보았는지, 아니면 실제 행동보다 참배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만을 중시했기 때문인지, 아무 말 없이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오늘 신사참배 했다는 확인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러면 바로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오빠는 지장을 찍었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하여 어렵게 어렵게 아버지를 면회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창백하고 깡마른 모습이지만 형형한 눈빛만은 여전했다. 오랜 옥중 생활로 인해 육신은 상할 대로 상했으나 그 영혼은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져 있었다.
큰오빠는 면회실에서 아버지를 보자마나 “아버지!” 하고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그런 오빠에게 울지 마라. “동인아. 우리가 이 땅에서 못 만나면 나중에 하나님 보좌 앞에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하며 울고 있는 오빠에게 이로의 말씀을 해주었다. 너무나 짧은 면회 시간이었다. 면회가 끝날 때 아버지는 미리 써 두었던 편지를 오빠의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그 편지를 들고 오빠는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큰오빠는 돌아오는 기찻간에서 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며 제 1,2계명을 범하는 것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하지 말것,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가정예배, 새벽기도를 빼먹지 말 것, 성경 읽기에 힘쓰고 십일조를 실행할 것,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잘 봉양하고 말씀에 복종할 것 등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오빠는 그 편지를 읽으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이 확연히 깨달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고생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데 그러한 아버지를 만나고자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거부하는 신사참배를 하다니, 비록 형식적으로 어물어물 넘어가긴 했지만, 무슨 자랑이라고 그 사실에 지장을 찍어 남겼을까? 혹시라도 그 글을 아버지가 읽게 된다면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쓰리고 아프실까? 갑자기 꿈을 깬 듯 오빠는 정신을 차렸다.
회한이 오빠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보도과장의 능글맞은 웃음이 떠오르고, 그에 겹쳐서 아버지의 비통해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오빠는 자신이 마귀의 시험에 빠졌으며 순간일 망정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어떻게 하나님을 대할지 눈앞이 캄캄해오고 사지가 떨렸다. 하나님의 음성이 번개처럼 오빠의 머리를 쳤다. “오, 하나님!” 오빠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아무리 만나고 싶은 아버지라 하더라도 신사참배만은 거부했어야 했다. 그 일로 인해 설사 아버지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명만은 지켰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이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했다니...... 기차는 세차게 달려갔다.
창 밖의 숲과 새들, 아름답게 보여야 할 삼라만상이 이제는 무서운 눈초리로 자기를 노려보는 듯했다. 오빠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죄인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들어 우상에게 절을 한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불의를 저지르고 뻔뻔하게 하나님의 이해를 구한 죄인입니다. 그 때 제 눈에 무엇이 씌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눈이 밝아지게 도와주옵소서! 그 때 무엇을 택해야 옳은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빠의 회개 기도는 숫제 울음이었다. 그 때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이동 경관이 다가와 무슨 연유로 그렇게 슬피 우느냐? 고 물었다. 그리고 오빠 옆 좌석에 앉았다. 갇혀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아버지를 만났으면 만났지 울긴 왜 울어?” 흥미가 당긴다는 듯 일본인 경관이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또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된 이유는 신사참배 거부 때문이라고 숨김없이 털어놓고,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신사참배에 응한 사실과 아버지의 신앙 사상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오빠는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거참,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아직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감옥에 가도 싸지. 너도 시국을 똑바로 인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네 아버지 꼴 난다!”
일본 경관의 힐난에 가까운 대꾸였다. 오빠는 낮에 자신이 저지른 미욱하기 짝이 없는 죄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으시고 이 기회를 만들어 주셨거니 생각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신사참배는 죄입니다. 그것은 국민의식이 아니라 종교의식이며, 하나님 교리에 위배되므로 응하면 불경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본에서 국민 의식이라고 합리화시켜도 진실은 가리워지지 않습니다.”
오빠는 그제서야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진작 청주구금소 보도과장 앞에서 했어야 할 말이다. 두려움은 피하면 피할수록 커지는 법,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겁내지 않고 당당히 죄악과 맞서는 것이 최상의 퇴치법이다. 그 사실을 오빠는 잠깐 동안 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앞서서 오빠는 그만 그 교활한 보도과장에게 속고 만 것이다. 그 ‘일본 경관은 이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 하는 시선으로 한참 동안 오빠를 노려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집 주소와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오빠에게는 이제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경찰에 잡혀간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고 아버지처럼 감옥에 갇힌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오빠는 솔직하게 주소와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일본 경관은 수첩에 받아 적은 후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결국 그 일이 우리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동기가 된 걸 그 당시엔 오빠도 미처 알지 못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상처를 입고 얼마동안 집에 편지도 안 하고 금식기도만 하셨던 것이다. 큰오빠가 청주에 다녀오고 시일이 좀 흘렀는데 북부산 경찰서에서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일본 경찰은 군대에 가면 매일 신사참배를 해야 할 터이므로 골치 아프게 어린 녀석을 오라 가라 할 필요 없이 징병 통지서를 보내버리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 통지서는 우리 집안을 산산이 깨뜨리는 폭탄이 되어 떨어졌다. 징병에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일본 경찰이 생각한 것처럼 일본 군인이 되면 동방요배나 신사참배를 거부할 길이 없었다. 백이면 백 꼭 아침마다 절을 해야 한다. 무슨 재주로 빠질 것인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곳이 군대가 아닌가? 큰오빠는 신체검사에서 갑종을 받았다. 확실한 군 입대 예정자가 된 것이다. 몸에 병이 없고 신체가 건강하니 당연한 결과지만, 당시엔 건강하다는 사실조차도 행복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디가 한 군데 병신이 되는 게 낫지 멀쩡한 육신으로 군인이 되어 신사참배를 행하는 게 낫겠는가? 그래서 어머니는 날마다 어린 우리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기도드리곤 했다.
“하나님, 우리 동인이가 징병에 끌려감으로 인해 범죄케 될 것인데 차라리 문둥병에 걸려서라도 범죄 할 기회를 면하게하여 주옵소서!”
근심과 걱정 속에 날이 지고 밝았다. 그 당시에 징병을 거부하면 바로 사형이다. 실제로 큰오빠는 목숨을 끊어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께 죄가 되는 일이니 할 수 없고 멀리 도망가 버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이 당할 괴로움을 생각하니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다. 큰오빠는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해 어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작은오빠도 동참했다. 이들은 며칠 동안 밥을 굶은 채 참으로 간절하게 기도에 매달렸다. 눈은 깊숙이 패어 들어갔고, 양 볼은 홀쭉해졌다. 기운이 다 빠져나간 육신은 흡사 무슨 허깨비 같았다. 그 때의 모습을 묘사하려니 펜이 떨려서 쓰던 글이 멈춰진다. 그 가엾고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하리라.
엄마와 큰오빠는 이러한 고통을 안고 오죽이나 괴로웠을까? 평소에 잘 먹고 잘 지낸 사람들이라면 또 모른다. 늘 부족한 식사였고 그나마 대부분의 끼니를 콩깻묵 죽으로 때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금식이라니......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 어느 날 큰오빠는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몸이지만 결연한 어조로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어머님, 제 생각은 죽어도 군대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건 바로 큰오빠의 회개의 열매가 아닌가 싶다. 거기까지 말한 후 오빠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오빠의 낮은 흐느낌의 소리만이 방안을 떠돌 뿐이다.
“어머님......”
“오냐! 네 결심을 말해 보아라!”
어머니가 먼저 침묵을 깨고 오빠에게 물었다. 그러나 오빠는 한참동안이나 대답하지 않는다.
......
“말을 해보아라. 이 에미에게 못 할 말이 어디 있느냐?”
불안과 긴장의 시간이 마냥 흘러갔다. 너무나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라 아무도 기침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눈치 챈 어머니는 결국 말을 꺼내었다.
“알았다. 네 뜻은 식구들을 분산시키자는 것이겠지?”
어머니 역시 오빠와 똑같은 결심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하긴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께 매달렸으니 그 응답 역시 같은 내용일 것은 당연했다. 징병에도 끌려갈 수 없고 자해나 자살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우리 가족 각자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숨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길 밖에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의견들이 어머니와 오빠의 마음속을 오고 갔던 모양이다. 결론은 산산조각 이별이다. 고향과도 같고
낙원과도 같던 애양원을 떠나 부산 범냇골 판잣집에 정착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불평 없이 견디어 온 세월이었는데, 함께 살기는 커녕 오히려 남아 있는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아버지 없는 집이지만, 비록 곤궁하고 허전한 살림살이지만 나름대로 성실히 신앙을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가족인데 이제 각각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될는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다. 어쩌면 영영 그렇게 헤어져서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는 못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큰오빠가 징병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고 판단했다. 오빠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한번은 속았지만 두 번 다시 안 속는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가족을 고생시키는 건 마음 아픈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길이 오히려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때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나는 그런 결정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빠와 어머니의 그 결심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의 산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웬만큼 굳은 믿음이 없고서는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임에 분명했다.
큰오빠를 끌고 갈 징집영장이 오늘 날아올지 내일 날아올지 모르는 판국이다. 이제 여유를 둘 시간이 없다. 기왕 결정을 한 마당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피신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고 형편에 따라 식구들을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만주 하얼빈에 사는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가기로 정해졌다. 아버지 바로 아래 작은아버지는 (손문준 목사) 할아버지가 3.1만세 운동의 주동자가 되어 감옥에서 형을 살 때, 아들마저 잡아들이려는 일경에 쫓기고 쫓기다 만주 하얼빈에 정착했다. 그 작은 아버지 집으로 할아버지는 가기로 하고, 어머니와 막내는 부산 기장의 장부자 집으로, 작은오빠는 애양원에서 나온 일곱 명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옥종면 북방리 움막으로, 그리고 큰오빠는 남해 깊은 산골로 들어가 숨어버리기로 했다. 나와 내 밑의 동생은 부산 구포에 있는 애린원이라는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각각 결정이 된 것이다.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곱이나 되는 식구들이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아무 대책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으니 그 저미는 가슴이 오죽했겠는가? 이제 우리 집안 공기는 어둠으로 가득 찼고, 움직이는 시계 소리도 마치 우리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식음을 전폐했다. 초조한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별은 돌이킬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고, 슬픈 감상에만 젖어 있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이제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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