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 해석 원리 중에서 "성령님의 내적 증거"의 원리가 있다. 이는 리츨이나 다른 역사비평법을 따르는 비평가들이 성경도 여타 역사 문헌과 똑같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사고를 배척한다. 성경은 성령님으로 기록된 문헌으로 오직 성령님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은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들, 예컨대, 예언이나 기적들, 귀신, 지옥이나 천국 같은 것은 고대 미신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판단하고 그런 것들을 제거한 나머지 본문들을 근거로 기독교 사상/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의 도덕적 기독교가 될 것이 자명하다. 남이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고 남에게 대접 받으려는 대로 너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런 정도의 도덕 종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도덕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도덕율을 능가하는 차원도 있다. 홍해를 가르는 일,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일, 하늘에서 우박으로 가나안 남부 동맹군을 멸하신 일, 산헤립 대군 18만 5천을 천사로 치신 일, 물고기 2마리와 보리 떡 5개로 5천명을 먹이고 남은 부스러기 12광주리에 채운 일, 물을 포도주로 그것도 큰 항아리 6개에 넘치는 양을 그렇게 하신 일,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 - 주님의 하신 일을 누가 다 고대 미신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허구적 이야기들이라고 말하나? 그런 정도의 사고라면 성령님으로 거듭난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뉴욕 퀸즈 한인 교회 원로 한진관 목사의 사모 김태열의 간증집 "내 모습 이대로"에서 일절을 인용해 본다:
1969년 7월 교회를 개척하고 77년 10월 성령 하나님을 체험하기 전의 목사님은 배운 지식을 전달하는 종교철학적(사회학적, 심리학적 등) 목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영적체험이 없는 당시에 할수 있었던 것은 이민생활을 도와주어 이민정착에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뉴욕한인봉사센터를 설립하여 사회사업도 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목회인줄 알았다.
초창기의 개척교회의 사모의 역활은 이민정착을 도와주는 역활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교인들을 도와주는 일을 집중하다가 77년 성령세례후 영적인 중개역활에 집중했다. 다른교회의 부흥회에 참가하여 목사님이 성령세례를 받고 나도 다음날 집회에 참가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태양빛에 감격한 감동이 선하다.
크고 부드러운 하나님의 손
1969년은 내가 미국에 온 이래 가장 바쁘게 일한 한 해였다. 뉴욕 퀸즈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남편의 일을 돕는 것은 물론 낮에는 뉴욕시의 주택과 사회복지 직원으로 근무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교회 주보 만드는 일부터 교사 서기 회계일까지 내 몫이었다.
당시 뉴욕엔 한인이 600여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서로의 친목을 교회에서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편인 한진관 목사는 한국에서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유학을 와 태평양 신학교와 음악대한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했다. 계속 신신학을 공부했기에 신앙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었다. 때문에 교회 개척도 우리의 지식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일날 남편은 강단에 서면 모든 예배순서를 1시간 이내에 끝내곤 했는데 설교는 미리 작성한 것을 읽어 내려가는 형편이었고, 그것도 주로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의 내용에 성경을 조금 가미한 정도였다. 그러니 설교라기보다는 종교철학 강의였다. 이 무렵 미국을 방문하셨던 어머니도 "얘, 네 남편이 설교하는 것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푸념하셨다.
따라서 교인들도 예배만 끝나면 친교실에서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남자들은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쇼핑하는 일에 더 치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한글학교를 설립하여 교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인 봉사센터를 설립, 미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교포와 갓 이민 온 분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일을 했다.
교회가 영혼 구원보다는 사회복지와 봉사에 더 많은 힘을 쏟았던 것이다. 성도는 늘어났으나 그것은 은혜를 사모해 모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도움을 받기 위해 모인 것 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열심히 일했으나 만족은 없었다. 오히려 얼굴을 찡그리며 집에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다.
"여보, 우리가 목회하지 않는다고 밥 굶겠어요? 차라리 직장을 가져요."
견디다 못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내 직장의 봉급은 남편의 사례금보다 많았고 의료혜택은 완벽했다. 더욱이 남편의 사례금은 거의 헌금으로 드려졌기 때문에 가계는 내 수입으로 꾸려나갔다. 따라서 나는 교만이 팽배해 있었다. 교회가 편안치 못하니 가정도 편안치 못했다. 직장생활도 짜증스러웠고 모든 것이 실망투성이였다.
1961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온 나, 전공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가 모교에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 교수를 하리라고 다짐했는데 갑자기 목사 아내가 되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건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피곤과 짜증, 갈등과 원망 뿐이었다. 하루하루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깊은 좌절에 빠지곤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결코 좌절과 낙망 속에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드디어 크고 부드러운 손을 나와 우리 가정에 내밀어 주셨다. 목회에 기쁨을 얻지 못하고 좌절에 빠져 있는 동안 뉴욕 여러 곳에 교회가 많이 생겨났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은혜있는 교회를 찾는다고 했다. 무엇이 은혜있는 교회란 말인가? 나로선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성도들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고민스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왜 주님의 교회가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고 냉랭하여 성도간에 교제가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과 가정, 교회 어느 하나도 나를 편안하게 해 주지 못해 하루하루가 지겨웠다. 나중에는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이웃교회 부흥회에 다녀오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신앙에 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겠소. 이번 부흥회가 참 좋은 것 같으니 당신도 한 번 가 보구려!"
그동안 자유주의 신학에 길들여져 부흥회란 말 조차 못하게 했던 남편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미국에 온 이래 부흥회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었고 내 마음도 무엇인가에 갈급해 있던 터라 다음날 저녁부터 집회에 참석했다.
진리의 생수에 목말랐던 내 영혼은 첫날부터 주님의 강한 섭리로 여지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회개의 눈물을 쏟아내던 나는 비로소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확신이 용솟음쳤다. 그동안 설교를 통해 수백번 이상 들어오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갑자기 내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잘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존재가 거울을 보듯 실체로 다가왔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직장도 나가지 않고 부흥 목사님의 다음 집회 장소까지 가 3일 동안 참석했다. 이빼 비로소 은혜의 의미와 성령충만의 뜻을 깨달았다.
"여보, 우리가 왜 진작 이런 체험을 하지 못했는지 안타깝구려. 이젠 새로운 마음으로 목회합시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남편 역시 나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답고 좋아 보일 수 없었다. 모든 일이 기쁨이요 찬송할 것뿐이었다. 부흥회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삶은 놀랍게 변해갔다.
1) 먼저 성경을 읽고 싶은 소망이 생겨났다. 8년 동안 한번도 들쳐보지 않았던 성경책을 창세기부터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2) 또 전에는 교회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던 장로님 집사님들이 그렇게 밉더니 이젠 오히려 감사하고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할 정도가 되었다.
3) 또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님과 막혔던 장막이 찢겨 나가는 순간부터 기도의 교제가 시작되 것이다.
4) 가치관도 변화되었다. 예전에는 부잣집의 좋은 가구와 그릇들이 그렇게 부럽더니 이젠 그런 것등리 부질없이 보이고 자족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만 생겼다.
5)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기 시작했고, 음악도 명곡들보다 찬송이 더 좋았다. 성령을 통한 영적 변화는 나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꾸어 놓았다. 영의 눈을 뜨게 되니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감동된 진리의 말씀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자 꿈과 소망이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이 찬송이 입에서 언제나 흘러 나왔다. 지금까지 세상 일에 연연했던 삶을 청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는 신앙 고백이었다.
6) [세상 직장을 내려 놓다]
그러나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직장을 포기할 것인가? 하나님의 일에 저념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다니던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뉴욕시의 공무원은 15년의 임기를 채우면 연금이 나오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나는 14년 6개월을 다녔기 때문에 6개월만 더 있으면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음 속에서 "두 명의 나"가 싸우고 있었다.
"김태열, 그 직장이 어떻게 해서 얻은 것이냐? 미국 유학을 10년을 준비하며 공부했고 유학 중에도 얼마나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느냐? 너의 사회사업과 학위는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이곳의 수입으로 가계를 꾸려 왔는데 그만두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능력과 공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을 예비해 주시고 더 크게 복내려 주실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담대한 신앙으로 주님의 뜻에 순종하자"
과감히 직장을 포기했다. 결국 신앙이 승리한 것이다. 믿음은 결단을 필요로 하며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이 있을 때 더욱 성장한다는 것은 참된 진리였다.
"세상"을 포기하고 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믿음도 굳세졌다. 본격적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나셨다. 돌보지 못했던 성도들을 심방하며 기도해 주는 일을 계속 했다. 이것은 어떤 일보다 보람되고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위해 아침 5시에 일어나며 밤 11시경에 들어왔다. 예전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원망과 불평이 없어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이렇게 바쁘게 생활하니 자녀들을 돌볼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
태관이와 태진이는 주일 오전에는 미국교회 주일학교에 나갔다. 우리 퀸즈 교회는 오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미국교회를 빌려 오후에만 사용했는데 성도 수가 늘어나면서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예배장소를 빌려주던 미국교회가 더 이상은 곤란하니 딴 곳으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 . .우리는 교회 건축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새 건물이나 교회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물색했다. 그러나 이미 과밀지역인 뉴욕 퀸즈에 교회를 지을만한 넓은 땅이 있을리 만무했다. 땅값도 엄청나게 비싸 우리가 원하는 3에이커 (3600평) 땅을 사려면 1천 200만 달러가 필요했다. 돈도 없었지만, 마땅한 땅도 없었기에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남편은 아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며 우리가 겨우 마련한 집과 그동안의 저축금을 모두 건축헌금으로 바치자고 했다. "이 집과 저금이 어떻게 해서 마련된 것인데. . . 그 동안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왔던가?" 인간인지라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교회 건축이 도저히 힘들 것만 같았다. 그러자 지나온 일들이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 . .
[이전 미네소타 대학 시절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 나의 짐을 예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이 흑인 교수에게 모조리 쏟아 부어 놓은 것이었다. 거듭난 신앙인이 아니었던 나는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거나 현실문제를 주님 앞에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다. 이 지도 교수는 나의 영어 실력을 감안하여 자기 조교 한 명을 나에게 지정해 주어 내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어려운 과목의 시험날이 돌아오면 시험장 입구에서 계시다가 나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시험을 잘 치루라는 격도도 마음껏 해 주셨다. 또한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감안하여 여러 교수들에게 시험 답안지에 "외국학생"이라고 기록하도록 부탁도 하셨던 것이다. . . 이 흑인 지도 교수는 지식 전달에도 훌륭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해를 직접 실천해 가시면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참 교사였다. (그녀의 이름은 Ruby Pernell 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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