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2편은, 왕의 시라고 분류하지요. 이런 왕의 시는 시 18편, 20, 21, 29, 45, 72, 89편 등이 있는데 왕이 주체가 되어 노래하고 왕에 관한 시이지요. 왕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니까 메시아라 불렸지요.
그래서 왕의 시는 메시아 시라고도 하는데, 특히 시 2, 72편 등은 메시아 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시가 다 메시아 시가 아니고, 오실 이스라엘의 구세주 메시아에 관한 시란 의미에서 메시아 시라고 하니까요
시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에서 드러난 사고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왕이 이룰 수 없었고 이룰 수도 없는 세계적인 왕권을 노래하는데 이런 일은 오직 오실 메시아 예수님에게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시 2편을 메시아 시라고 하지요.
시 2:8-9은 이제 복음을 통해서 온 세상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지요
오늘은 시 2편 이해를 위해서, 언약과 메시아 두 개념을 말씀드리지요
시 2편은 왕의 시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왕이 (다윗 후손) 주변 모압, 에돔, 아람 등을 통치할 때 아마 그런 봉신 왕들이 반란을 일으킬 징조를 보일 때 지은 시라고 추정하지요. 이런 시의 상황을 그 시가 생겨난 자리 (Sitz im Leben) 라고 해요. 그 시의 상황은
시 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에서 암시되고 있지요.
시 2:2에서 (밑줄 그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세상 나라들이 대적한다는 것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구약 시대 다윗 왕이나 그 후손을 암시하지요.
이렇게 시 2편의 생겨난 자리가 하나님이 세운 다윗 왕가 어떤 왕을 반란하려는 주변 나라들의 움직임과 연관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봉신국들의 반란 움직임에 대하여 하늘에서 비웃으시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들의 도모가 가소롭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라고 하지요. 7절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말씀은 삼하 7:11이하에 언급된 다윗에게 주신 약속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후손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때 (즉위식 때), 대제사장이 아마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는 그 왕이 되는 사람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된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는 동의 병행법인데,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씀은 너는 내 아들이라 라는 말과 사고를 맞추려고 (시를 지으려고) 그렇게 표현했지요. 하여간 그 날 그 왕이 되는 사람은 삼하 7:11의 다윗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을 대신하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왕은 하나님의 아들로 통치하는데, 기름 부음을 받기 때문에 메시아라고 불렸지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메시아”라 할 때는 구약 시대 사람들은 당대 현직 왕을 메시아라 불렀지만, 우리가 메시아라 할 때는 장차 올 이스라엘을 구원할 다윗 후손 왕을 지시하지요.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구원자 왕, 곧 다윗 후손 메시아를 예고하는데, 구약 선지자들은 삼하 7:11이하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언젠가 다윗 후손이 와서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에게서 구원해내고 무너진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암 9:11이하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공의로 통치하며, 세상도 전부 정복하고 통치하리라 (시 2:8에 근거) 예언했지요.
예컨대, 렘 23:5-6에서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가지 = 후손)
했지요. 다윗 후손이 일어나서 통치하리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참으로 이상적인 시절이 오고 축복의 시기가 되리라 예언한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 사람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아주 강렬하게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가 오기를 학수고대했지요. 주전 586년 망한 후부터 이스라엘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으로 줄곧 상전이 바뀌면서 남의 나라 종 노릇 해 왔으니까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도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는 장면도 있는데 다윗 후손이여! 라는 것은 메시아여! 라고 부름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하간 시 2편을 왕의 시이기도 하지만, 메시아 시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통치 범위가 우주적이어서 구약 시대 왕이 감히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노래하고 오직 오실 메시아만 이루리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노래하기 때문이지요.
구약에는 메시아 예언들이 많아요. 특히 “그날에” 라 하거나, “말세에” 라고 하면, 그것은 대개 오실 구세주 메시아의 날에, 메시아가 와서 통치하는 때에란 의미입니다. 이 말세란 지난 번 언급한대로, 구약 시대에 이어 인류의 마지막 시대가 메시아의 통치와 함께 시작되리란 사고를 표현한다고 했지요. 지금 신약 시대 전체가 말세이고 메시아 시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 왕권을 선포할 때, 이스라엘은 (유대인들) 자기들의 메시아가 왔다고 열광했지요. 하지만 그가 선포하는 말씀이나 행동이 좀 자기들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 달라요. 자기들은 정치 군사적 영웅, 자기들을 로마에서 구원해 낼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회개하라 외치고 가난한 자, 죄인, 세리, 병자 같은 자들에게 주로 초점을 맞추고 귀신 쫓아내고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화평케 하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설교하니 원수를 몰아내기는커녕 관심도 없으니 아, 이 사람은 우리가 기다린 그 메시아일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그래서 결국 신성모독죄란 죄목으로 예수님을 처형시키지요. 그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의 인기에 놀라서 자기들의 입지를 지키고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가 참 메시아라는 것은 보여주지요. 사 53장에서 야웨의 종은 대속적 죽음을 당하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예언했었는데, 그 예언을 성취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은 구약 메시아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해서 정치 군사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사 53장의 ‘야웨의 종’은 이방인의 손에 고난당하는 유대인 자신들이라 이해)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에서 건져내는 메시아를 보내시리라는 것이었지요. 이런 후자 메시아 사고는 신약 기자들이 구약 메시아 예언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드러나지요. 베드로나 (마 16:16) 기타 제자들도 현실적, 물질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대했다가 (행 1:8) 나중 성령 받고 영안이 열려서 아,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을 건질 메시아는 정치 물질 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인 메시아, 죄에서 건져 낼 메시아로구나 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지요.
여하간 메시아 사상은 구약에서 아주 중요하고 신약은 전부가 예수님이 메시아로 어떻게 인류를 (이스라엘을 포함) 구원하며 통치하는지를 말씀하지요. 신약 전부는 구약 메시아 예언들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거예요. 그리고 메시아 와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었고 (죄에서), 지금 통치하지요. 하늘 보좌 우편에 즉위하셔서 메시아 왕으로 통치하지요. 그래서 지금이 메시아 시대이고, 지금이 종말의 시대, 곧 말세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시대.
그런데 많은 이들이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면 저 중동 이스라엘이 대다수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리라 하고 재림 후에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고 세상을 주님이 통치하시고, 유대인들이 1등 국민이 되고 이방인들을 통치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소위 천년왕국설) 이런 기대는 구약 메시아 예언을 문자적으로 잘못 해석한데서 기인되었지요. 천년왕국설이란 계 20:4-6에 근거하는데, 천년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는 사고입니다. 그런데 전-천년설도 있고,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이 있는데, 전-천년설이란 재림 후에 천년간 통치한다 (지상에 군사정치 물질적 통치); 후-천년설이란, 재림 전에 1천년간 물질적 정치적으로 통치한다; 무-천년설이란, 그런 물질적, 정치적 통치는 없고 신약시대 전반에 걸쳐서 지금 현재 영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가설입니다. 물질적, 정치적 통치 사고를 담은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은 모두 구약 메시아 예언들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후천년설은 세상이 점점 좋아져서 주님 재림 때까지 지상 유토피아가 (이상향) 이루어진다는 사고인데 오늘날은 따르는 학자가 거의 없고 전천년설이 많이 퍼져서 따르는 자들이 제법 있지요.
하지만, 교회사를 보면, 주후 4세기 이래로 (어거스틴) 카톨릭 교회나 종교개혁 교회들은 (개혁주의 교회들; 루터파나 칼빈 장로교회들) 모두 무천년설이예요. 정통 주류 신학은 모두 무천년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넬슨 다비란 사람이 세대주의 사고를 퍼뜨렸고 이후에 전천년설이 다시 재흥해서 많이 퍼졌지요.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대개 전천년설주의자 혹 세대주의자들이어서 한국 장로교회에는 전천년설이 많이 퍼졌지요. 하지만 오늘날 세계를 본다면 이 전천년설은 한국이나 미국 정도 퍼졌고, 세계적으로는 무천년설이 대세이지요.
언약
여하간, 메시아 사상은 아주 성경의 중요한 사상이고요 이제 “언약”에 대하여 좀 말씀하지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을 어떤 이들은 언약이라고 보기도 하지요. 중요하긴 하지만, 나는 언약이 성경 전체를 이어주는 핵심 사고라 보지 않아요. 더욱 큰 개념이 하나님의 왕권 개념이지요.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때 사용하는 방편이지요. 언약을 맺어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맺지 않고는 통치가 사실 어렵지요. 오늘날로 해서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서 통치한다는 것이 언약을 통해 통치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근거가 있어야지 백성을 어떻게 통치하지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사고는 하나님의 통치/ 왕권 사상이라고 봐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도 사실 하나님의 통치권 개념이지요. 지난 번 언급했지만, “하나님 나라”라 번역된 헬라어는 ‘바실레이아 투 떼우’인데,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으로 번역해야 옳지요. 헬라어 ‘바실레이아’란 말은 영토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통치권 개념을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통치권은 결국 영토를 암시하지만, 영토란 개념은 “바실레이아”란 말에서 부차적일 뿐입니다.
구약에서 언약은 인간들끼리 언약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언약은 ‘베리트’라 하고 헬라어로는 ‘디아데케’라고 하지요. 언약들 중에서 아담 언약 (창 2:16이하), 노아 언약 (창 9장 무지개 언약), 아브라함 언약 (창 15장, 17장), 시내산 언약 혹 모세 언약 (출 19장 이하), 그리고 다윗 언약 (삼하 7장), 새 언약 (렘 31:31이하) 이렇게 구약에서 언약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것들 중 대표적인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인데 (갈 3장) 내용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주시겠다는 것이고, 후손이 살려면 땅이 필요하니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인데 언약이라 하는 것은 쌍방 관계 설정이기 때문이지요. 언약이란 결국 법적 관계 설정인데, 그렇다고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면 곤란하지요. 아주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전제한 관계 설정이니까요.
여하간 아브라함 언약은 무수한 후손인데, 이 후손은 사실 오늘날로 하면 영적인 자녀 곧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롬 9장이하, 특히 11장에서 누가 아브라함 후손이냐? 약속의 자녀, 선택된 영적 자녀들을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교회를 (하나님의 회중) 크게 일으켜 주시겠다는 교회 부흥에 관한 약속이지요. 이는 다시 말해 창조 질서의 회복에 다름 아닙니다. 이스라엘만 편애하셔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 하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이지요.
아브라함 언약 후에 주어진 시내산 언약은 부족 중심의 아브라함 언약의 보충인데,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크게 성장하니 그들의 사회적 질서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보다 세밀한 관계 설정을 위해서 시내산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주로 율법이라 불리는 법규들이지요. 율법이란 법이란 의미이지요. 그리고 다윗 언약은 이스라엘을 누가 통치하느냐?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다윗 후손들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 이전에 노아 언약이 있는데 이는 보존 언약이라 하지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 무대인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리라는 언약이니까요. 그리고 에덴에서 주신 아담 언약은 타락하기 전에 주어진 유일한 언약인데 행위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타락 이후에는 모두 은혜 언약이지만, 타락 이전에는 행위로 구원을 받아야 했으니까 행위 언약이라 하지요.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 계명, 그러면 생명을 얻으리라는 것이겠지요.
여하간 렘 31:31이하에서 새 언약이 예고되는데, 그 새 언약은 1) 법의 내면화 (돌비가 아니라 마음에 법을 새긴다) 2) 죄 용서 (참여자 모두에게 죄 용서를 약속), 3) 그 최종성 (마지막으로 주어질 최종적 언약, 종말론적 언약), 4) 우주성 (모든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포함) 등이 그 특징입니다. 마 26:28에서 마지막 만찬 시에 주님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시지요. 어떤 사본에서는 “새 언약의 피니라” 고 하고, 병행 구절인 눅 22:20에서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새 언약
새 언약은 이렇게 예수님의 만찬 석상에서 예기적으로 체결되었고 (렘 31:31이하는 예언이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실제로 체결되었고, 부활 시에 확정 비준되었지요.
언약을 체결할 때는 오늘날 계약 체결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도장 찍듯, 고대 근동에서 언약 체결 시에는 반드시 제물을 잡아서 쪼개어 갈라 놓고 그 사이로 언약 맺는 쌍방이 지나가는데 지나갈 때 내가 언약을 어기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저주를 (죽음) 당하리라는 자기 저주 맹세 의식이지요 (창 15장, 렘 34장). 혹은 약간 다른 의식은 출 24장에서 나타나는데 (같은 의미이긴 하지만) 제물을 잡아서 언약 쌍방에게 뿌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피를 받아서 반은 제단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곳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상징) 반은 거기 선 백성의 대표들에게 뿌렸지요. 이 피 뿌림은 곧 언약을 파기하면 저주를 받아 피를 흘리리라 곧 죽임을 당하리라는 자기 저주 맹세 의식이지요.
성경에서 피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가 중요하게 간주되는데, 그래서 보혈, 예수 피, 예수 피 하면서 예수님의 피가 구원하는 양 기도도 하고 강조하지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그 피란 죽음 곧 그분의 고귀한 생명의 희생이란 의미이지, 피 자체에 강조점을 두는 것은 없습니다. 그분의 피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분의 생명을 상징한다는 것이지요. 여하간 언약 체결 시에는 피를 흘리는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제물을 통해서 언약 당사자들이 언약을 생명을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것이지요.
히 9:15이하에서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언”이란 번역은 헬라어 ‘디아데케’의 번역인데, 모두 “언약”으로 고쳐야 합니다. 잘못된 번역이니까요. 구약에서 유언 신학이란 없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오직 언약 신학만 있지요. 우리가 제안한대로 유언을 언약으로 바꾼다면, 16절에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라고 하는데 “언약은 언약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가 되겠지요. 이게 무슨 말이냐? 언약을 맺을 때는 그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제물들이 죽어야 효력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은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고 하는데, 언약으로 바꾼다면, “언약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언약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가 되지요. 여기서 “언약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언약은 ‘시체들’에 근거해서 유효하다”입니다. 시체들이란 복수형이지요. 언약한 자는 단수인데, 어떻게 시체들이냐? 하면, 바로 이 표현 때문에 히 9:15-19 전체에서 헬라어 ‘다이데케’란 말은 “유언”이 아니라 “언약”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데, 바로 구약에서 언약 체결 때에, 짐승 사체들에 근거해서 언약이 확정 비준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히 9:17의 표현은 (헬라어에서), 시 50:5의 (“그들은 ‘제물들에 근거해서’ [70인역에서 ‘epi thusiais]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반영입니다.
여하간,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통해서 새 언약을 체결하셨지요. 그분의 죽으심은 구약적으로 하면 언약 체결을 위한 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언약의 중보자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개자도 되세요. 구약의 모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었듯,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이스라엘과 세계) 사이의 중보자이시지요. 결혼에서 중매자가 중요하듯, 중보자는 정말 중요하지요. 그런데, 주님은 또한 인간 편과 하나님 편을 모두 대표하기도 하지요. 참으로 오묘하지요. 예수님은 언약 당사자로서 인간을 대신하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이지요. 최후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이 참석했지요. 이들은 이스라엘의 대표라 할 수도 있고요, 예수님은 언약 체결 의식을 그 자리에서 (유월절 잔치에서) 하신 것인데, 자기 몸을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새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예기적으로 proleptically).
이제 시 2편으로 돌아가면
시 2편은 신약에서 메시아적 관점에서 이해되었지요. 메시아 시니까 당연하지만요.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을 핍박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렇게 기도드렸지요: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제 시 2편은 성취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세상의 군왕들은 헤롯 왕 + 본디오 빌라도 (로마 총독) 이고, 그들이 대적하는 대상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지요. 아주 기막히게 시 2편을 메시아 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은 모두 시 2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지요.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지라. 교회 핍박이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죄가 교회를 (그리스도) 핍박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시 2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에게서도 성취되는데, 계 2:26-27에서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곧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은 현재로 철장 권세로 세상을 통치하는 자들입니다. 장래 일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행사해야 할 왕권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권세를 입고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사탄과 죄악 권세를 깨뜨려야 합니다.
이렇게 메시아 시인 시 2편은 결국 예수님과 그와 연합한 성도들에게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롬 1:3-4에서
롬 1: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였는데, 복음은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 그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 후손,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 후에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움을 입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두 시대가 여기 언급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주님의 지상 생애와 그 부활 이후의 영적 종말 시대. 육적으로 다윗 후손이어야 이스라엘에 대한 합법적 왕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이 되어야 이스라엘 곧 하나님 백성에 대한 합법적 왕권/ 통치권을 행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움을 입었다/ 선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하간 부활 후에 승천 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곧 메시아 왕으로 즉위하셨다는 것입니다.
암 9:11에서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라고 한 예언은 다윗 왕국을 재건하신다는 약속인데 (예언), 첫 예루살렘 공회에서 사도 야고보는
행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말씀함으로, 다윗 왕국 재건 예언이 영적으로 성취되고 이제 남은 자들이 다 주께로 돌아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만왕의 왕으로 메시아 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또한 세상을 통치하지요. 지금이 그러니까 천년왕국 시대라는 것의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고전 15:25이하에서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하셨지요. 지금 그분이 왕 노릇하지만, 나중 만물이 그에게 전부 완전히 복종하게 될 때 (재림 때) 예수님도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그 때가면 예수님의 왕권이 만료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했던 대로, 개선장군이 승리 이후에 임금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모든 지휘권을 상징하는 그 무엇을 반환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후에 장군의 지휘권이 박탈되느냐? 그것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 제스처로서 왕을 높이는 의식이고 그 이후에도 지휘권이 행사되듯, 예수님의 왕권도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은 이 위대하신 왕, 영원하신 왕,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성령님으로 감동하시어 자발적으로 자신을 섬기게 하시는 좋으시고 온유하신 왕께 전적 헌신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정치나 지방색 혹은 민족 감정 따위는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세계 시민이어야 하고, 만왕의 왕과 연합하여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는 왕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을 대표하는 우리들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 영원하신 왕, 만왕의 왕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리고 성령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