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논쟁 기사 (막 2:18-22)
서론:
2장에서 3:6까지 (장절구분은 후대 창안이다) 5개의 논쟁기사들이 제시되었는데 2:1-12에 묘사된 중풍병자 치유 기사나 3:1-6의 손 마른 자 치유 기사는 얼핏 보면 치유기사로 보이나 그것도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신학논쟁들을 담고 있다. 여기 부분에 제시된 5개의 논쟁기사들은 2:18-22의 금식 논쟁기사를 축으로 교차 대구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A: 중풍병자를 치유하심 (2:1-12)
B: 의식법에 (ritual law) 관한 논쟁 (2:13-17)
C: 금식 논쟁 (2:18-22)
B': 안식일 법규에 대한 논쟁 (2:23-28)
A': 안식일에 손 마른 자 치유 (3:1-6)
금식 논쟁 기사가 축이라면, 중풍병자와 손 마른 자 치유 기사는 이 부분을 둘러싸는 틀이다. 이 두 치유기사에는 중간에 놓인 세 기사들이 공통으로 다루는 먹는 문제와 연관이 없고 병자의 치유만 다룬다. 두 치유기사에는 공통점이 많은데, 무엇보다 처음에 “그가 다시 –에 들어가셨다” 라는 진술로 시작 된다 (중풍병자 기사에서는 “가버나움에” 손 마른 자 기사에서는 “회당에” 들어가셨다). 또한 두 기사 모두에서 주님은 논적들의 발설되지 아니한 마음의 생각을 초자연적으로 감지하시고, 그들의 속생각의 불평을 다루고자 하던 일을 중단하신다. 두 기사 모두에서 주님은 거의 동일한 말로 표현된 (그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환자에게 주시는 두 말씀을 말씀하신다. 두 기사 모두에서 예수님은 환자에게 “일어나라”고 (egeire) 명하신다. 만약 마른 손이 중풍의 일종이라면, 결국 두 기사 모두 중풍병을 치유하는 일을 다룬다.
조애나 두이가 지적하듯 (Joanna Dewey, Markan Public Debate: Literary Technique, Concentric Structure, and Theology in Mark 2:1–3:6, Chico, Calif.: Scholars Press, 1980:115-116), 이 논쟁기사 집합체 전후에는 주님의 인기를 강조하는 요약 기사들이 배치되었다. 즉 1:45과 3:7-8에서 그러하다.
금식논쟁 기사에 담긴 새 베옷과 헌 베옷 비유나 새 가죽부대와 헌 가죽부대 비유는 여기 실린 5개의 논쟁기사들의 중심 주제를 드러낸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오셨으므로 옛 것은 새 것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새 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시작된 종말시대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의 구원 참여, 그리고 자연계의 변화 등을 가리킨다면, 옛 것은 종말시대 이전에 지속되어 온 모든 질서체계를 지시할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옛 사람이 말한 바와 자신이 말하는 바를 대조시켰다면, 여기 논쟁기사들에서 옛 것에서도 당대 유대교의 가르침이 중심을 점하고 있다.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당대 유대교가 펼친 그 가르침은 폐기되거나 새롭게 변화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죄를 사할 권세를 지닌 절대자이고 (중풍병자 치유기사에서) 구약에 주어진 모든 모세법을 친히 입안하신 분으로서 그 법의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해석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판단해서 그 당대 유대교의 가르침은 원래 주어진 모세법의 정신을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원래 모세법의 수여자이신 메시아와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주님의 치유 현장에 있었다면, 주님의 영적 권세가 어떠했는지 직접 목도하고 당대 유대교 랍비들의 무기력한 성경강해와 어떻게 확연하게 대조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막 1:27에서 보듯 주님의 축사(逐邪) 현장에 있었던 당대 유대교인들은 주님의 영적 권세에 압도당하였고 저들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이렇게 메시아는 법질서 내용면에서만 아니라, 영적 권세 면에서도 무능했던 당대 유대교와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당대 유대교 랍비들 중에서도 기도를 많이 해서 귀신을 축출하는 영적 권세를 행사하고 있었던 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랍비들의 가르침은 구태의연하게 이전 누구누구의 유명한 랍비의 이름에 근거해서 성경을 풀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꿀 수가 없을 것이다. 메시아는 그런 구태의연한 가르침이 아니라, 모세법의 수여자로서 그 법의 입안자로서 직접 그 정신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혹은 영적 권세로 구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가는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일러라” 라고 기술하여 (막 1:22) 메시아의 가르침과 당대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어떻게 대조되었는지를 보이고 있다.
이런 여러 옛것과 새 것의 대조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몰고 올 것이 예상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행하는 행동거지나 여러 가르침이나 행동에서 자기들의 정통 가르침이나 관례에서 벗어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없었던 영적 권세로 청중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역 초기이기에 그분에 대한 대중의 인기에 관하여는 아직 언급이 없지만, 벌써 사역초기부터 유대교 지도자들은 새로운 영적 권세자의 등장에 그의 새로운 이단적 가르침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금식 논쟁 본문 고찰 (막 2:18-22)
불트만은 그의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p. 17) 이 금식논쟁 기사와 연관하여 19상반절은 질문형식의 논쟁적 성격에서 이 말씀이 논쟁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했다. 학자들은 이런 기사를 논쟁기사라 하거나 아니면 선언 (pronouncement) 이야기라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런 기사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선언을 통해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18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금식은 종말을 기대하는 사고와 연관될 것이다 (마 11:19/ 눅 7:34).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 (눅 18:12). 이들의 금식은 어쩌면 자신들의 경건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저들도 진지하게 종말의 소망을 품고 즉 수 백 년의 외세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다윗 후손 메시아를 신속하게 보내주시라는 목적으로 금식했는지 모른다.
“혹이”라 번역된 질문자는 비인칭 복수형으로 “그들”이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언급이 없다. 아마 앞에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인지 아니면 바리새인들인지 모른다. 아니면 여기 논쟁 기사들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서기관들인지 모른다.
19-20절: 신랑 비유로 금식의 불가함을 강조하신다 (Tait Michael, Jesus, the Divine Bridegroom, in Mark 2:18-22: Mark's Christology Upgraded. Roma: Gregorian & Biblical Press, 2010 참조).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적 관계는 결혼 관계로 종종 표현되었다. 예컨대, 호 1-3장이나 겔 16장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언급하는 사실 (출 20:5), 우상숭배를 음행이라 기술하는 점 (겔 16:41, 23:19, 미 1:7), 언약관계의 핵심을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진술의 (출 6:7, 레 26:12) 결혼의식과의 연관성 등은 구약은 하나님과 그 언약백성 이스라엘 관계를 결혼 언약관계로 이해했다는 암시를 준다.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혼인집 손님들”은 (οἱ υἱοὶ τοῦ νυμφῶνος) 문자적으로 “신혼 침실의 자녀들”이고 신랑 수행자들이나 아니면 혼인 잔치 손님들을 지시할 수 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때이다. 그 때에는 금식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그래서 금요일을 금식의 날로 지켰다.
21-22절: 시편에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시 102:26) 하여 세상을 의복에 비유하였다 (히 1:10-12). 종말의 때에 세상은 변화될 것이 암시된 것이다. 그런데 종말의 때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요 2:11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은 메시아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즉 메시아의 영광이 드러난 것은 이미 종말의 때가 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고 (사 40:5) 종말의 때의 사건을 예고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바로 이 구절 앞부분에서 광야에서 야웨를 위하여 대로를 예비하라고 언급했다. 그 말씀은 사 복음서 기자들이 공히 모두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성취되었다고 이해했다. 이제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 본 종말의 때, 곧 야웨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오는 종말의 때가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사역을 통해 동이 텄고 더구나 메시아 자신의 기적을 통해서 그의 영광이 드러났다.
베 조각 비유나 가죽부대 비유는 모두 옛것과 새것이 혼합될 때의 파괴적 결과를 강조한다. 새 베 조각으로 헌 옷을 기우면 그 헌 옷은 기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찢어짐이 더 심화될 것이고,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붓는다면 새 포도주의 발효로 결국 가죽부대가 터지고 포도주를 쏟아 붓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의 의식에서 유래했다. 그의 논적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를 알지 못하고 그의 행동과 말씀에 자신들의 오랜 관습과 사고를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지만, 이제 모든 옛 질서 체계는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새 것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메시아는 종말의 시대를 가져오는 분으로, 유대교의 기존 질서 체제와 공존할 수 없다. 베옷이 찢어지고 가죽부대가 터지는 일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종말의 새 질서에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박살남을 상징할 것이다. 메시아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 8:14, 28:16 → 롬 9:33).
메시아의 종말시대를 특징짓는 성령님이 (사 11:2-3, 32:15, 42:1, 44:3) 임하신 그 메시아의 (막 1:10) 우주적 변혁을 기존의 유대교 사고나 체제로는 결코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막 1:9-11에 묘사된 예수님의 세례식은 그분의 메시아 즉위식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의 정식 즉위는 부활 승천 이후에 일어났지만, 지상에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임시 즉위식이 세례를 통해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세례 받으실 때의 하늘에서 들린 소리나 임하신 성령님이 그 좋은 증거들이다. 유대교는 이제 사역을 시작하신 메시아의 새로운 질서 체제에 길을 비켜 주고 물러나야 했다. 복음서에 기록된 메시아를 대적하는 모든 유대교의 행태들은 부질없는 것들이었고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유대교의 근본 기둥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중심의 예배는 필요치 않다. 이제 성도들을 성전삼고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신인합일의 구속사의 목표가 도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
구약에서 금식은 오직 한 날 시행되었다. 그것은 대 속죄일에 자신을 괴롭게 하고 회개하는 금식이었다 (레 16:29, 31). 모세법에는 없지만 후대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총독 아달리야 암살의 날 등을 기념하여 금식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아니었다 (슥 7장).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거나 국가적 재난의 때에 베옷을 입고 티끌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금식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모세법에 규정된 바는 아니었다.
우리가 금식을 하는 것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더욱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자녀가 음식을 끊고 죽기 살기로 자기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가 그런 자녀를 이기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원하시는 금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레위기에 규정된 바에서는 자기를 괴롭히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해 내는 그런 것이어야 했다. 더 나아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식사를 금하는 그런 금식만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고 저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도 금식이라고 알려 주셨다.
사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1)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2)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3)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4) 모든 멍에를 꺽는 것, 5) 주린 자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6)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7) 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 입히고, 8) 도움 받고자 찾아오는 친척을 피하지 않는 것 등 8가지는 금식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1-4는 사실상 병행법으로 보고 모두 동일 사항을 반복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흉악의 결박, 멍에, 압제 등은 거의 병행어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빚에 눌려 압제를 당하는 사람 혹은 돈이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 혹은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를 생각할 수 있다.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려면 영적 권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빚에 눌린 자를 해방시키려면 재정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런 고통에 처한 자들을 내 일처럼 가슴아파하고 저들을 도우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해, 흉악의 결박이나 멍에는 인간을 하나님으로 분리시켜 속박하는 죄나 사단이라 할 수 있다. 복음만이 이런 결박을 끊어 놓을 수 있다. 이제 나머지 네 가지 사항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식사를 끊는 금식과 함께 우리 삶에서 약자와 가난한 자를 향한 사랑의 삶을 하나님은 또 다른 금식으로 요청하시는 것이다.
이 정신은 결국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통한다. 그리고 야고보 사고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고 (약 1:27) 한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잠 21:3) 한 말씀도 그런 정신을 드러낸다.
또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오늘날 우리가 금식기도를 함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꺽고 회개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기뻐하신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의 삶에서도 금식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빈민을 구제하고 복음으로 돌보는 일이다. 선을 행하되 믿는 성도들에게 우선적으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그것은 하나님이 금식기도처럼 값지게 받아 주신다.
이하는 주로 Johannes Behm, “네스티스, 네스튜오, 네스테이아,” TDNT, 4,923-935를 참조하였다.
어휘 "금식하다" (네스튜오), "금식" (네스테이아)
‘네스튜오’ 동사는 기본어인 ‘네스티스’와 (먹지 아니한 자) 연관되고, 세속적인 용례에서 “배고프다, 음식을 먹지 않다”란 의미를 지녔다. 반면 종교적 용례에서 “금식하다”를 의미했다. 명사 “네스테이아”는 세속적 용례에서 “먹지 아니한 상태,” “영양공급이 없는 상태” “배고픔으로 고통당함” 등의 의미였고 종교적 용례에서 “금식”을 의미했다.
1. 이 동사는 신약에서 20번 나타난다. 오직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난다 (마 4:2; 6:16 [2번], 17, 18; 9:14 [2번], 15; 막 2:18 [3번], 19 [2번], 20; 눅 5:33, 34, 35; 18:12; 행 13:2, 3). 그리고 명사는 누가 저작들에서 3번 (눅 2:37; 행 14:23; 27:9;) 바울에서 2번 (고후 6:5; 11:27). 이 명사나 동사는 언제나 금식(禁食)을 의미하지만, 고후 6:5에서는 바울 사도가 고난 중에 ‘굶식’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금식은 “먹지 않다” (눅 4:2; 마 4:2), 배고픔과 목마름 (고후 11:27) 등으로도 표현되고, “먹고 마시다”의 반대의 (눅 5:33; 막 2:19, 마 9:14) 대조로 제시된다. 막 2:20에서는 신랑의 표상 때문에 아마 상징적인 의미인지 모른다.
2. 신약은 유대교와 초대 기독교인의 금식 관례를 반영한다.
a) 유대교에서는 대 속죄일에 금식 규정이 있었다 (레 16:29–34, 23:27–32; 민 29:7). 행 27:9이 그 금식 규정을 언급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그런데 레 16장의 대 속죄일 규정에는 “금식하다”란 단어는 없고 대신 “(스스로를) 괴롭히다”란 (70인역 ‘타페이노오’ -낮추다, 천하게 하다; 히브리어, ‘인나 네페쉬’) 말이 사용되었다 (레 16:29, 31, 23:27, 29).
유대교는 추방 이후에 압 월 9일을 국가적 금식일로 정했다. 그 날은 성전 파괴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미쉬나 타아닛 4, 6-7). 당국에서는 역병, 한재, 전쟁 발발 등 국가 위기 시에 전체 금식령을 발할 수도 있었다.
예수님 당대나 구약에서 자원(自願)해서 하는 금식도 있었다. 그것은 국난의 위기에나 친척 가족 혹은 왕이 죽었을 때 슬픔과 회개의 표시였다. 예컨대 삼상 7:6에서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지도하에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고 부르짖었다. 삼상 31:13에서 길르앗 사람들이 사울 왕의 뼈를 묻고 7일을 그를 위해 금식하였다. 삼하 1:12에서 다윗은 사울 왕과 요나단의 전사(戰死)를 애통해 하며 하루 금식을 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 (마 4:2와 병행구 눅 4:2; 막 1:13와 대조); 여선지자 안나는 밤낮으로 금식 (눅 2:37);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도 정기적으로 금식 (막 2:18: ἦσαν… νηστεύοντες [그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눅 18:12: “일주일에 두 번”); 안디옥 교회의 5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바나바 바울 파송할 때 금식하다 (행 14:23).
b) 금식과 “기도하다”가 같이 나타난다 (눅 2:37, 5:33 [네스튜오 +데에시스]; 행 13:3; 14:23; 막 9:29와 병행구 마 17:21; 고전 7:5; 행 10:30).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표시였다 (눅 2:27에서 λατρεύουσα [경배하다] + 기도하다; 행 13:2에서 λειτουργούντων[경배하다] +기도하다).
기도는 금식을 통해 그 효력이 증대된다 (렘 14:11-12; 느 1:4 등).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애통 없는 형식적인 금식, 곧 형식주의가 질책을 받기도 했다 (렘 14:12, 사 58:1이하).
유대교인들에게 금식은 기도, 구제와 함께 경건의 중요 요소들로 간주되었다 (마 6:2–6, 16–18, 눅 18:9–14 [바리새인들이 1주에 2번]). 금식은 속죄의, 대속의 성격을 가졌다. 금식은 경건한 자들에게 나라의 죄악에 대한 회개와 슬픔을 의미하였다(마 9:15에서 금식과 애통을 동일시).
3.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금식에 대한 자세는 막 2:18–22에서 잘 드러난다 (병행구 마 9:14–17/ 눅 5:33–39; 마 6: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