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유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신 때는 주전 586년부터 시작된 외세의 오랜 지배가 잠시 끝나는 가 했던 마카비 하스몬 왕국의 독립 시대가 (주전 141-63년) 로마 폼페이 장군의 침공으로 끝나고 로마의 속국으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에돔인의 후예 헤롯 왕가가 통치하던 시대였다. 결국 로마 식민지로서 독립국가로 보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1. 그 시대의 헤롯 왕가와 그들의 통치 영역들을 잠시 고려해 보자
[예수님 공생애 당시 유대 총독 빌라도 26-36년 재임 시]
*유대 총독들은 헤롯 대왕의 아들 아켈라오가 자질 부족이라고 해임당한 후인 주후 6년부터 제1차 유대인 반란이 발발하던 주후 66년까지 사마리아, 유대, 이두메 등을 지배했다. 이 지역에 부임한 로마 총독은 시리아 총독이나 타 지역 총독에 비해 등급이 한 단계 낮은 기사 骑士 계급에서 차출되었다. 주후 6-41년 어간에 이 로마 총독들의 칭호는 prefect였다가, 헤롯 아그립바가 41-44년 유다를 다시 통치했지만 죽은 후에 다시 로마 총독 지배로 환원되어 이제부터는 procurator라 불렸다. 이 프로큐라토르란 칭호는 원래 재정 관리를 지시하던 것이었지만, 지방 총독을 지칭하는 칭호로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로마 총독들의 명단 (주후 6–135)
2.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 목적
마태 기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수 백년 간 외세의 통치 하에 신음하면서 그처럼 고대했던, 자신들을 압제에서 신음에서 건져 내어줄 다윗 후손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태나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되, 당대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정치 군사적 영웅인 왕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사단에게서 해방시키는 영적 해방자로 예수님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이해하듯, 구약이 예언한 그 왕적 군사적 정치 메시아로 예수께서 오셨지만, 유대인들이 그의 왕됨을 거절하였기에 죽임을 당했고,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식의 이해는 곤란하다. 구약 예언들에 대한 피상적 고찰이 다윗 후손 왕 메시아는 정치적 군사적 해방자라는 결론을 내게 할지는 몰라도, 예수님의 모습은 그런 정치 메시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고, 오히려 그의 진정한 목표는 처음부터 인간을 죄와 사망, 사단에게서 건져내는 일이었다.
구약 예언들이 그렇게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말씀하는 것을 왜 우리 주님은 자신을 영적인 메시아로 이해하였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분을 그런 영적인 측면에서 묘사할까? 그것은 구약에 담긴 메시아 예언의 겉옷은 유대적으로 색칠 되었다 해도 그 근본 알맹이는 어디까지나 신약 시대에 들어가서야 모습을 드러낸 그 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즉 예언이란 항상 그것이 주어지는 당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당대 관례나 지리적 배경 등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언이 표현되는 그 겉옷과 그것이 담고 있는 알맹이는 아주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먼 미래에 나타날 메시아의 모습은 예언의 속성상 당대인들의 이해에 어울리는 당대 관례나 지리적 배경에 맞추어야 했지만, 수 백 년의 시간이 흐른 이후에 나타난 메시아의 역사적 실체는 구약 시대의 예언이 제시하는 그런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야 함이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마태가 책의 주제 선언을 내세운 마 1:1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 소개하고 있듯, 마가 역시 막 1:1에서 그리하고, 누가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요한은 20:31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은 하나같이 예수님에 관해 묘사하면서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아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을 지적하는데, 그를 통해서 저들이 가졌던 메시아 사상이 구약 메시아 예언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아님을 간접으로 폭로하고 특히 "그리스도"란 명칭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날들에 일어난 사건들 특히 유대인들과의 충돌 사건들에서 대부분 사용되었다. 유대교 당국자들이나 유대인들은 메시아 사상을 가졌으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행동에서 메시아된 증거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저들의 가졌던 메시아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씀에서 참 메시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3. 메시아의 오신 목적
메시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란 헬라어로 그리스도인데, 메시아 사상은 구약에서 삼하 7:11이하 다윗에게 주신 약속 다윗 언약에 근본적으로 근거한다. 다윗 후손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인데, 다윗 왕조가 쇠락기에 접어든 시점에 혹은 그 이전부터 선지자들은 장차 다윗 후손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공의로 통치할 것을 예고했던 것이다 (사 9:6이하, 11:1이하, 렘 23:5, 33;15 등). 이런 예언들은 모두 삼하 7:11이하 다윗 언약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다윗 왕조가 망한 이후에 추방 시대에나 그 이후 선지자들은 이런 다윗 후손 왕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예언을 지속하였다.
이런 예언들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오랜 외세의 압제를 당하는 동안 자기들을 구원해 줄 다윗 후손 왕 메시아를 고대하게 되었다. 그 구원자는 메시아로 불렸는데 메시아란 칭호가 구약 자체에서는 현직 왕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추방 이후 어느 시점부터는 오실 다윗 후손 왕 구세주를 지시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메시아가 순전히 정치 군사 지도자로서 다윗이나 모세처럼 외세에서 건져내고 무너진 다윗 왕국을 재건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유대인들의 지상적 물질적 메시아 사상이 그릇되었음으로 자기들의 복음서에서 간접으로 지적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사건들을 묘사하면서 그리하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 자신 조차도 예수께서 메시아라고 고백은 했지만, 실제로는 정치 군사 지도자로서 자기 민족을 로마군에게서 건져 해방시켜주길 기대했으리라 여겨진다. 진정한 메시아 사상의 핵심은 사 53장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는 고난의 종인데도 유대인들은 사 53장의 야웨의 종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들이라 잘못 이해함으로 고난의 메시아 사상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고 놀라긴 했어도 혹시 이 분이 메시아이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치와 거리가 먼 이 사람이 메시아일 수 없다고 대다수는 판단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진정한 목적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즉 처음부터 그분의 메시아 사명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이스라엘의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 정치 군사적 사명을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 일시적이고 지상적 사명은 구약 메시아 예언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기인되었다.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라가 우리가 부르는 바는 구약 메시아 예언들이 비록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의 관습과 그 지리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 알맹이는 어디까지나 신약 기자들이 해석하는 방식대로 교회에서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바라고 이해하는 해석 원리이다. 세대주의 학자들은 구약 예언들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신약 기자들의 해석 방식이 아니라 원래 예언을 선포한 그 선지자들의 의도, 곧 저자들의 의도가 제일 우선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약 시대 예언들은 전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기에 유대인들에게 이루어 져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구약 예언대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유대 왕국을 재건하여 왕으로 통치하려 하셨으나 유대인들의 반대로 구약 예언들의 집행을 먼 재림 이후로 연기하고 일단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로 계획을 급히 변경하셨다 한다. 이런 식의 성경 이해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천하고 시시한 어떤 것으로 만들고 만다.
세상에 유대 왕국을 재건해서 세상을 통치한 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분의 오신 목적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죄에서 건져내고 (이스라엘 회복의 진정한 의미) 그와 함께 열방도 건져내는 일이었다. 다만 구원사의 흐름에 있어서 구약 시대는 신 32:8-9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하나님의 기업이었지만 열방은 마귀의 세력에게 넘겨준 바 되었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까지는 여전히 이방인들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어야 했고 그것이 지상 사역 동안에 주님이 제자들을 이스라엘에게만 파송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십자가 부활 사건 이후로 마귀의 세력은 괴멸되었으므로 (죄를 매개로 사단은 이방을 지배할 권세를 가졌었기에; 고전 15:56, 롬 7:7-8) 주님은 제자들에게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4. 지상적 천년왕국설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님
사정이 이러하다면, 왜 주님이 재림 하신 이후에 지상에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정치 군사적 통치를 세상에 펼쳐야 하겠는가? 즉 지상 천년왕국설은 성경적일 수가 없다. 이미 그분은 부활 후에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메시아 왕으로 즉위하여 통치하고 계신다 (롬 1:3, 행 7:55, 골 3:1, 히 1:3, 8:1, 12:2, 벧전 3:22). 그분의 나라는 성령님과 말씀으로 통치되는 세계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왕권이고, 그것이 소위 천년왕국의 실체이다 (계 20:4-6). 십자가로 사단을 결박당하여 무저갱에 감금되었고 (계 20:1-3), 사단의 세력은 하늘에서 추방당했으며 (계 12:7이하), 사단의 세력 곧 정사와 권세는 무장 해제 당하였다 (골 2:14-15). 죄로 사단이 지배하던 세상을 주님은 복음 증거를 통해 회복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이 가르치는 종말론은 실현 도중의 종말론이다. 이미 그분의 나라는 임했고 지금 확장 일로에 있으며 재림 때에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화론과 공룡 그리고 성경 (0) | 2015.05.16 |
---|---|
창 6:1이하 하나님의 아들들과 거인들 (0) | 2015.05.16 |
성령님의 내적 증거와 자유주의 신학 (0) | 2015.05.06 |
불을 받는 일 (0) | 2015.04.08 |
겉옷과 알맹이 원리 (0) | 2015.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