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일천번제

중일사랑 2015. 7. 16. 19:49

일천번제라는 것은 왕상 3장에서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드린 번제를 지시하는데, 그 때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고 말씀하신다 (왕상 3:5). 솔로몬은 꿈 속에서도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또 다른 자신을 보는데,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leb shomea'; 직역이나 오역 a heart to hear, 70인역; 바른 번역 a discerning heart 분간하는 마음, NIV)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렇게 구하니 그런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오늘날 이 말씀이 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중시되는 이유는 교회가 1천 번제 기도회니 1천 번제 예배니 하면서 1천 번의 수자를 강조하여 그렇게 작정하고 예배나 예물 기도를 드릴 때, 솔로몬과 같은 축복을 받는다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즉 솔로몬의 1천 번제는 매일 새벽 기도회나 매일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의 축복을 반드시 받겠다는 작정 기도나 작정 예배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천 번제라는 것을 오늘날 교회 현장에서는 흔히 1천 번의 번제를 드렸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도들에게 설교자는 우리도 1천번의 작정 예배를 드리고 솔로몬처럼 축복을 받자고 설교한다. 어떤 이들은 1천 번 예배를 작정하고 매번 1만원 헌금을 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자기 헌신과 정성을 표현하고 소원을 성취하기 원한다.

본문을 보면 왕상 3:4에서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elep 'olot ya'aleh shelomoh 'al hammizbeach hahu'; a thousand burnt offerings did Solomon offer upon that altar) 한다. 그리고 기브온 산당은 컸다고도 한다. 산당이란 "높은 곳"이란 (바마, high place) 의미인데, 성전 건축 이전에 산 중턱이나 산상에 만든 제사나 기도처소를 지시한다.

솔로몬이 당시 성전이 없었으므로, 규모가 컸던 기브온 산당에 갔다. 대하 1:3에 의하면, 거기에 모세 성막이 있었는데, 삼상 21:6에서 성막은 놉에 있었으므로 언제 기브온으로 성막을 옮겼는지는 미지수이다. 여하간 대하 1:2에 의하면, 솔로몬은 온 나라 대표자들을 다 소집해서 기브온 산당으로 갔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북서편으로 11킬로 (7마일) 지점이었는데, 솔로몬의 이런 거국적 제사 행사는 아마도 삼상 11:15에 언급된 사울 왕의 취임식 제사처럼 자기도 취임식 제사를 드리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솔로몬은 거기 번제단 위에 1천 마리 번제물을 드렸다. 번제단이 허용되는 대로 많이 드리는 방식으로 단 시일에 (아마 어느 절기 1주일간 지속되었는지 모른다) 드렸을 것이다. 헤로도투스 역사 7,43에 의하면, 페르시아 세륵세스 대왕은 트로이에서 1천 마리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물론 세륵세스나 솔로몬이 직접 그 많은 제물을 일일이 잡고 손질하고 제단에 바친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번제단에서 1주일간 드린다 해도, 1천 마리 번제 제물을 드리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추가로 제단들을 몇 군데 더 설치해서 동시적으로 많이 드릴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그런 관례는 왕상 8:63, 64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개연성이 크다. 

왕상 8:63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는데 
64 그 날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물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여호와의 앞 놋제단이 작으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음이라 

여하간 중요한 것은, 본문은 오늘날 교회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1천 번의 번제들이 (3년여에 걸친) 아니라, 1천 마리 번제물을 수일간에 걸쳐서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드렸다고 말씀한다는 점이다.


레 1장의 번제 규정에 의하면, 번제는 소이면 수컷, 양이나 염소도 수컷으로 드리라 한다.

그런데 번제 드리는 절차가 복잡하였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번제를 드리는 솔로몬이 직접 번제 제물인 양/ 소/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야 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이런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했나이다. 나의 이 모든 죄를 이 양에게 전가하오니, 나의 죄는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양손으로 안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양의 목을 따서 죽이는데, 그 때 제사장들이 양푼에 피를 받아 번제단 사방에 뿌렸다. 피는 생명의 상징이기에 경배하는 제사자가 죽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제스쳐였다. 물론 죽은 것은 솔로몬 본인 자신이 아니고, 그를 대신한 양들 혹 황소들이었다. 아마 왕이었으니 제물도 고급스러워 황소들을 1천 마리 드렸지 않겠나 짐작된다.

그 다음에 그 죽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끄집어 내어 물로 씻고 고기나 내장이나 모두 잘게 썰어서 번제단 나무 위에 올려서 불로 태워 향기가 하늘을 향하게 하였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인데 "올라"는 공교롭게도 한글의 "올라가다"란 말과 연관된다. 그렇지만, "올라"는 가죽을 제한 모든 제물 고기나 내장을 모두 번제 단위에서 불태워 드리는 제사를 지칭한다. 그래서 번제라 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란 의미이다.


번제는 대개 두 가지 목적으로 드렸는데, 하나는 국가적 행사에서 드렸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헌신을 목적으로 드렸다. 국가적 행사에서는 혹시 부지 중에 범한 모든 성도들의 죄를 속죄하고 또한 백성의 헌신을 상징하는 그런 제사였다면, 개개인이 드린 번제는 자신의 헌신이나 부지 중의 죄를 속죄하고자 드렸을 것이다. 부지 중에 지은 죄가 생각나면 곧 자신이 율법을 자기도 모르게 범한 일이 생각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 속죄 제사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율법을 범한 죄를 속하는 '하타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잘못해서 성소나 이웃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경우 원가의 20퍼센트를 원가에 더해서 배상하고, 배상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속건제사 (배상 제사, 아솀) 이다. 이렇게 속죄 제사는 따로 있었기에 번제는 국가적 행사나 헌신의 목적으로 드렸고 또한 속죄제와 함께 드리곤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1천 번의 작정 기도나 작정 예배는 솔로몬의 1천 번제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을까? 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런 현실적 신앙 관례가 반드시 비 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설혹 솔로몬의 1천 번제 사건이 없었다 해도, 작정 기도 혹은 서원 기도나 예배는 정당한 신앙 관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라면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건 정성과 헌신을 표시하여 그분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설혹 불신자라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정성을 쏟으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나를 만나 주시라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긍휼히 보시고 응답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백사겸이라고 일제 시대 소경 점장이의 경우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의 지극 정성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은 전도인을 보내어 예수님을 알게 하셨고 그는 회개하여 점술로 돈벌이하던 소경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세리 삭개오처럼 (아니 삭개오 이상으로) 재물과 집까지 나눠주고 거지로 가족의 손에 이끌려 정처없이 떠났으나 하나님은 그를 교회 강단에 서게 인도하셨고 그의 간증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는 능력의 도구가 되어 그는 일약 소경 부흥사로 들림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