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우리의 스승

중일사랑 2015. 9. 19. 22:29

손동의 권사 간증 녹취록 (다른 곳에서 날라 옴)


◑갑작스레 찾아온 815 해방

▲나 (손동희 권사)는 고아원에서 815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동생 손동장과 함께 부산 구포 애린원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난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아원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낮이었는데, 큰 고목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서

고아원 원장 한정교 목사님과 열명 가량 되는 교인들이

돗자리 위에 둘러앉아서 대낮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예배는 보통 때의 예배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아주 예배가 막 그렇게 요란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한데 얽혀서 울고 불고, 손뼉을 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무슨 큰 난리가 난듯이 예배를 드렸는데, 제가 그런 요란스런 예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참 별나게 예배를 드리는구나’ 하며, 그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13살) 

그랬더니 마침내 요란스런 예배가 끝났습니다.


끝나자마자 한정교 목사님은, 막 나 손동희를 찾았습니다.

저를 찾더니 제 손을 꼭 잡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희야, 너 그동안 고생 많았지? 오늘 해방이란다.

일본이 원자탄을 맞고 망했단다.

방금 일본 천황이 라디오에, 미 연합군에 항복한다고 공포했단다.

이제 네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서 나오시겠구나..’

 

저는 그때 그 나이에, 해방이 무엇이며, 일본 천황.. 이런 것도 다 모르겠고,

단 한 가지, 아버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다 하니.. 제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이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버님은 종신형을 선고 받아서, 죽어야만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아버님이 출옥하시는 것은 잊어버려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방으로 출옥하신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이 아니고서야,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고아원으로 저희를 찾아오셨습니다.

1년 전(1944)에, 우리 가족은, 동인 오빠 징집 문제로,

모두 전국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산에는 우리 둘만 고아원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목사님이 8월17일경에 출옥하셔서 구포 애린원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뵌 아버지의 몰골은, 정말 거지 중에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몸은 뼈와 가죽만 남아있었고, 눈은 송장처럼 쑥 들어가 있었고,

거기에다 낡은 슬리퍼에, 푸른 죄수복 차림 그대로, 고아원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 손목사님은, 여기 애린원에서, 옷도 갈아입으시고, 신발도 바꿔 신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저희를 보시더니 ‘이놈들아,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구나!’를 실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함께 울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인연


▲손양원 목사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아버님 손양원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던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셨습니다.

주목사님은 손목사님보다 나이가 5살 위입니다.

평소에 손목사님은 ‘기철 형님, 기철 형님’ 이렇게 불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에 평양에서 투옥되셨으니, (~1944 옥사)

손목사님 보다는, 약 2년가량 앞서 옥고를 치르신 셈입니다.


그러므로 손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도,

앞서 주기철 목사님의 신사참배 반대 정신을 이어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손목사님은, 평소에 주기철 목사님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손양원이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 1929년에 졸업했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당시에 부산초량교회를 시무하시면서,

경남성경학교에서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주1)에 간략 연대표 있음


손양원의 일기에 보면,

‘주기철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는, 은혜의 부흥시간 이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님 당신 신학생을 대단히 아끼셨다고 합니다.

‘손군,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지만,

많은 위인이 나타날 것 같으니, 위인전을 많이 읽으세요’ 하시면서

좋은 책도 많이 권면해 주셨다고 합니다.


▲주영해(장로)와 만남                                     *주기철 목사님 3남

애린원으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손목사님을,

저희가 만나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을 때,

조금 있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3남 주영해가 그때 저희랑 같이 애린원에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감옥에서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장 달려왔습니다.

 

(주영해의 부친 주기철 목사님은, 1944.04.21.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해방 후,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당시는 강도사 시절이었습니다.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년도에, 신학교가 패쇄되어,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양원 목사님'으로 통일해서 쓰겠습니다.)


그는 막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더니, 손양원 목사님을 꽉 끌어안았습니다.

“목사님, 제가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해입니다.”

한 마디 하고는, 두 분이 서로 끌어안고 얼마나 목을 놓아 우시던지요...


그렇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님, 이제 감옥에서 순교하시고(1944),

해방이 되어, 그 아들 주영해를 만나보니까,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겠습니까?

두 분이 서로를 붙들고, 고아원 마당에서 한참을 서로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울고 나더니, 주영해 (당시 10대 후반)는 갑자기

고아원 마루 밑에 장작 패는 도끼가 있었는데,

그 도끼를 꺼내서 감아쥐더니, 어디론가 막 달려갔습니다.

고아원 원생들은, 우르르 그를 뒤따라갔습니다. 


그 애린원 근처 좀 떨어진 곳에 공원이 있었고,

그 공원에는 일본 신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그 우상 앞에 절하고 빌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었습니다.


주영해는 도끼를 치켜들더니, 단 한 방에 신사 우상을 찍어서 무너뜨리고는,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제 오빠 동인, 동신은, 부산에서 주영해와 친구였습니다.

나이도 비슷했고, 또한 통공장에 다닐 때, 주영해도 같이 공장에 다녔습니다.

두 집안 다, 아버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들어가 있었고,

두 집안 다, 소년가장들이 통공장에 다니면서, 가족 생계를 꾸릴 때였습니다.

                                                   *관련글/ 순교자와 남겨진 그 가족 이야기 


훗날 제가 주영해 장로를 한 번 만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애린원 고아원 시절에,

주영해 장로가 도끼로 신사 우상을 때려 부수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옛날을 추억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영해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서 순교했을 때도,

가장 먼저 우리 집에 쫓아와서    *부산 범내골

“사모님, 사모님, 방금 제 아버님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라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주영해와 함께, 해가 지도록 방에서 슬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해방이 되어서, 가족들이 여수 애양원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애양원을 떠나간 지 꼭 5년 만에, 그리운 애양원 사택으로 돌아왔습니다.

손목사님은 다시 애양원 목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그동안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때문에 다 학교를 못 다녔습니다.

이제 해방과 함께,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학교를 쉬다보니,

학교에서 몇 살이나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다시 다닌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때 큰오빠 동인은 순천사범학교 4학년,

둘째오빠 동신은 순천중학교 2학년,

저는 국민학교 4학년으로 각각 입학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13살

저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꿈엔들 상상 못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애양원 근처에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부득이하여 우리는 애양원에서 50리 떨어진 순천에 자취방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형제들은, 순천 자취방에서 살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애양원 사택에 거주하시면서, 나환자들을 돌보셨지요.


저는 토요일과, 방학 때면, 애양원에 가서 살았습니다.

부산에서, 구포의 고아원에서

‘내 평생 소원은 학교에 한 번 다녀보는 것’이었습니다.


길에서 가방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또 저희들끼리만 놉니다.

학교에 안 다니는 저는, 같이 놀 친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범내골 집에 와서, ‘엄마, 나도 학교 보내 줘’

‘안 돼! 학교에 가면 모두 신사참배 해야 되기 때문에 안 돼!’


그렇게 5년 동안 학교를 못 다니다가,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정말 하늘을 날아갈 듯 했습니다.

지금 늙은 제가, 저의 인생을 통 털어 가장 즐거운 시절을 꼽으라면,

그때 순천에서 다시 국민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과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게 큰 태풍이 불어 닥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여순반란 사건과 동인, 동신의 순교


▲큰 오빠 손동인을 마지막 본 날

제가 16살, 순천 매산여중 1학년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아침밥을 먹고, 소풍가방을 들쳐 메고, 대문을 막 나서는데,

갑자기 큰 오빠가 “동희야” 하면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동인은, “어머니가 곁에 없어서, 소풍 준비를 많이 못했지?” 하면서

제 소풍가방에, 준비해온 과자 봉지를 넣어주고,

또한 용돈도 제게 주었습니다. 


“오빠 고마워요. 소풍 잘 다녀올게요.”

하면서 제가 늦을까봐 뛰어 나가는데,

“동희야!” 하면서 또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3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날 아침 동인 오빠 얼굴은 매우 심각해 보였습니다.

오빠는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동희, 예쁜 동희, 너 오늘 소풍 잘 다녀와야 해!”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저희 오빠와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큰 오빠 동인이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쩌면 부모님 사랑만큼, 큰 오빠의 사랑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애양원 사택에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제가 소풍을 다녀왔을 때, 이미 두 오빠는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고, 즐겁게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소풍 다음날은, 학교에 수업이 없어서, 자취집으로 안 가고

저는 소풍 간 장소에서 막바로 애양원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서 쉰 그 다음날, 애양원으로 트럭이 한 대 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애양원 근처로는 차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트럭에는, 엣띤 공산당 학생들이

양손에 무기를 들고서 트럭에서 뛰어내리면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손양원 목사, 이리로 나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행히 그때 손목사님은, 출타 중이셨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신다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어머니와 저) 말을 믿지 않고,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손목사님이 안 보이자,

그들은 집 천정에 대고, 총알을 난사했습니다.

그리고 죽창으로 마루 밑을 찌르며 휘저어 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겁에 질려서, 현관문에 기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폭도들은 별 성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줄줄이 집안을 빠져나갔는데,

맨 마지막 폭도가 나가면서, 어머니께 이런 말을 툭 던졌습니다.

“당신 알고나 있소? 당신 아들 둘이 다 총살 당해 죽었소!”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동인아, 동신아!” 부르면서 나자빠지셨습니다.


엊그제까지 멀쩡하던 두 오빠가 죽었다는 말이,

우리 모녀에게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 학생이 거짓말 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제 아래 제가 소풍 나오던 날,

동인 오빠가, 저를 3번이나 불러 세우며, 애절하게 저를 바라보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물론 모든 일이 다 일어난 후였습니다.)


▲저는 사실을 확인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에,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늘 제 시각에 오던 기차는, 그날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지금 여수와 순천은, 공산당들이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순반란사건>이었습니다.                         1948.10.19 ~ 1주일간

그 여파로 그날 기차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천까지 뛰어가기로 했습니다. 약 50리, 20킬로 거리였습니다. 

순천에 가 보니, 공산당들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인민 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총칼을 메고,

트럭을 타고, 여수와 순천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사람(반동)이 보인다 싶으면, 총으로 쏘아버렸습니다.


     순천 읍내에는, 사람들의 시신들이 길에 무수히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무수히 시신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전봇대에 매달아 놓은 시신, 불에 태워 죽인 시신..


     이 <여순반란사건>은 1주일 만에 진압되었는데,

     그 죽은 사람의 숫자는,

     당시 전남 보건후생국 발표에 의하면, 3천5백여 명에 달했습니다.


제가 이런 시체들을 넘어서, 뛰어서 걸어서, 우리 오빠들의 자취집에 도착했습니다.

“큰 오빠, 작은 오빠” 제가 소리쳐 불렀지만, 집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마당 안을 보니, 그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핏자국을 보는 순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내 두 오빠가 죽었구나... 아이고...”


사람이 감정의 극에 도달하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두 오빠의 죽음을 확인하고, 제 신앙이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집사님은, 우리 집 옆방에서 애양원 목수 일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두 오빠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라도 치를 수 있도록, 다른 곳에 옮겨두었습니다.


저는 양집사를 따라서, 어느 산모퉁이 논구덩이에 가 보았습니다.

거기 가마니 위에, 우리 두 오빠의 시신이 누워 있었습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몸에는 멍 자국이 선명했고,

이마와 가슴에는 총알자국이 수없이 나타나 있어서, 참으로 처참했습니다.

 

저는 그만 두 오빠의 시신 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망한 대상은, 공산당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때 원망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두 오빠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저 하늘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 고작 이런 것들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요?”


한 사람만 데려가도, 큰 충격인데,

어떻게 두 오빠를 한꺼번에 데려가신 일에.. 저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왜 하나님이, 우리 착한 두 오빠의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이해 못 했습니다.


‘하나님, 두고 보세요. 내가 예수 믿는가 봐요.

나는 이런 하나님 절대 안 믿을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이런 잔인한 하나님은 있어도 믿지 않을 거야..’

 

저는 그날부터 신앙에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윤선홍, 나제민 님의 증언

당시 손동인은 25세, 손동신은 19세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너무나 허망하게 마쳤습니다.


그날은 1948.10.21.일이었습니다.

이날 두 분이 순교하는 장면은,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윤선홍, 두 오빠가 순교하실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보신 분

나제민의 증언에 의하면, 두 오빠가 순교하신 후, 많이 도와주신 분, 나덕환 목사님의 아들


윤선홍, 나제민 두 분은 평소에 제 두 오빠와 매우 친했습니다.

같은 교회에서 성가대도 돕고, 주일학교도 도우면서 절친하게 지냈었습니다.

이 두 분은, 공산당의 참화를 피하여, 용케 살아났습니다.


그 두 분의 증언을 토대로, 손동인, 손동신의 순교 장면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신OO경찰서 뒤뜰에서, 좌익 학생들(학교 동료들)에 의해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석상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폭도 좌익 학생들은, 순천 우리 자취집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손동인을 끌어내서, 밧줄로 묶고는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손동신은, ‘왜 죄 없는 사람을 때리느냐?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자’며

때리는 폭도들을 뜯어 말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폭도가 ‘너희들은 기독학생회 회장이요, 예수쟁이들의 두목이다!’

그게 죄목이었습니다.


이제는 손동신까지 함께 얻어맞게 되었습니다.

폭도들은, 모두 평소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무지하게 두들켜 팬 후에,

손동인을 일으켜 세워, 밧줄에 맨 채로, 사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동생 손동신은 양손을 들어 올린 채로, 사형장으로 끌고갔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이 점거한 신OO경찰서 뒷마당에

손동인을 그 사형장 의자에 먼저 앉혔습니다.


학생 한 명이 이렇게 윽박질렀습니다.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 사상 뽑아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협력할 것 같으면 살려주겠다.

어떻게 할 테냐?”


그러자 손동인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나, 내 속에 신앙은 빼앗을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내 영혼은 죽일 수 없다.”


그러자 “할 수 없다. 저 놈을 쏘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동생 손동신이 나섰습니다. 그리고 손동인을 가로막았습니다.

“안 돼요, 안 돼요. 우리 형님을 죽이지 마세요.

형님은 장남입니다. 부모를 모셔야 하니,

형님은 살려주고, 그 대신 나를 쏘아 죽이시오.”


그렇게 손동신이 대신 죽겠다고 하니까, 손동인이 말했습니다.

“동신아, 너 왜 이러느냐?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너는 얼른 가서 내 대신 부모님을 모셔야 해!

그러다가 너 마저 죽어. 어서 집에 가, 어서 집에 가!”


이렇게 두 분은, 사형대에서, 서로 죽겠다고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때 어떤 폭도 학생 한 명이,

손동신을 강제로 뜯어내었습니다.

뜯어내고는, 손동인의 두 눈에 수건을 가렸답니다.

이제 정말 최후가 임박했습니다.


손동인은 “너희들은 회개하여라. 나는 지금 곧 천국으로 간다.”

하면서 손동인은 양팔을 벌리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 하나이다.”

그 말과 함께,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동생 손동신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형 손동인에게 막 달려갔습니다.

그 형을 끌어안고, 손동신은,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형님, 형님, 형님은 이제 천국 가셨습니다. 나도 형님 뒤를 따르렵니다.”


한참을 울고 나더니, 손동신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러고는 공산 폭도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죄 없는 자를 죽입니까? 당신들은 그 죗값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회개 하십시오!”


그러자 학생 중에 한 명이 “저 놈도 마저 죽여 버릴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래, 저 놈도 마저 해 치우자”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손동신은

“나도 내 형님 가신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내 형님 신앙과 같다.

이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며 일어서서 두 팔을 벌렸습니다.

그리고 좌익 학생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답니다.

“나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처럼, 팔을 벌렸다.

자, 총을 맞을 터이니, 너희 하고 싶은 대로 쏠 테면 쏘아라!”

 

그러자 “야, 저놈 자기 형보다 더 지독한 놈이다.

저런 놈은 살려둬서는 안 되겠다. 죽여버리자”며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동신은 양팔을 벌린 채로, 하늘을 향해 잠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시고, 저들을 회개시켜 주시옵시고,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기까지만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그 순간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손동신에게, 어떤 폭도 학생이 다가와서,

확인사살 두 발을 더 쏘았답니다.

그 사람이 바로 OOO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장례식과 그 이후


▲두 오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순천에서 애양원으로 왔습니다.

애양원의 뜰 한복판에, 두 분의 운구가 내려졌습니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동인아, 동신아!” 부르짖다가

몇 번이나 기절하고, 다시 깨곤 했습니다.


천 여 명에 달하는 온 애양원 식구들도 다 마당에 나와서

땅바닥을 치면서, 모두가 울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모두의 울음소리가 애양원을 차고 넘쳐서, 저 하늘에까지 닿는 듯 했습니다.


두 오빠의 장지는 애양원 안에 동도 섬이었습니다.

햇볕 잘 들고, 은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그곳으로

두 오빠의 꽃상여를 앞세우고, 온 애양원 식구들이 그 뒤를 울며 뒤따랐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모습도 참 비참했습니다.

아버지도 인간이었습니다.

꽃상여 행렬의 맨 앞에서, 상여를 붙잡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또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찬송을 불렀습니다.

찬송인지 통곡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육신적 슬픔과, 영적 신앙이 교차되는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손목사님이 지으신 <9가지 감사>는 여러 자료에 소개되었으니,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합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일생 을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손양원 목사님은 OOO을 양자 삼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난 터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동인이, 동신이 죽인 놈을 잡았다!’는 소리였습니다.


그 놈은, 손동인과 같은 학교, 같은 3학년 OOO으로 밝혀졌습니다.

(OOO은, 1979년에 소천 하셨고,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을 위하여, 본명을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발생 1주일 만에 모두 진압된 후

주모자와 주동자들을 색출해서 심판하는 일이 진행되었는데,

OOO도 체포되어, 매를 무수히 맞고, 사형언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있을 사형집행날짜만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제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잡아 죽이리라고, 이를 갈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손목사님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손목사님은, OOO을 사형장에서 빼내어, 양자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설마 그럴 리가?’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버님이 그 일을 위해 움직이시는 것을 보고,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저는 펄쩍펄쩍 뛰면서, 울면서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그런 놈은 죽도록 내버려둬요.

그런 놈이 안 죽으면, 도대체 누가 반란의 책임을 지고 죽는단 말입니까?”


아버지는 저를 달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이 아버지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서 그렇게 고생을 했고, 그 바람에 너희들까지 고생을 시켰다.

 

그런데 OOO을 안 잡았으면 모르거니와, OOO을 잡았다는데, 내가 모른 척 할 수 없구나.


제1계명과 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 역시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제1계명과 2계명만 순종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내가 만약 지금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옛날에 감옥 살은 것도 다 헛 살은 것이다.

너희들 고생 시킨 것도, 헛고생이 되고 마느니라.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


▲아무리 아버지가 좋은 말로 저를 설득시켜도, 저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쌓인 한이 풀리려면, OOO이 죽어 없어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두 오빠의 한이 풀린다고 여겨졌습니다.


당시 16살이었던 저는, 그때 아버지의 말씀과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꼭 이래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용서하면 용서로 되었지,

또 아들 삼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그 놈을 아들 삼으면,

제게는 그 원수가, 제 오빠가 되는 셈인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 하늘 아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막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까?” 꼭 이래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동희야,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들을 삼아야’ 하느니라.”


저는 아버지께 대들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죽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 그래서 그 계명 지키느라,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도저히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형직전에 처해 있던,

그 원수 같은 OOO을, 사정사정해서 빼 내어, 집으로 데려와 아들을 삼았습니다.

(나덕환 목사님이 OOO을 빼 내는데 힘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OOO을, 부산에 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저 손동희 권사는, OOO과 결국 화해 했습니다.

     1979년 OOO이 지병으로 죽기 직전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야기는 손양원 목사님, 625와 순교 에서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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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주기철 목사님 간단 약력


1897년 경남 창원군 옹천면 출생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 평양신학교 19회 졸업

1926년 봄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

1926~1931 6년간 초량교회 시무 중

일제의 신사참배 거절안을 경남 노회에 제출, 반대 투쟁 시작

(이 시기 1929년 경, 경남성경학교에 로마서 강의하시던 중, 손양원 신학생 만남)


1931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6년간 시무하심.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

1938~1944 감옥에서 옥고 후 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