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중일사랑 2017. 7. 28. 19:18

 


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


(Βλπετε δ μες αυτος· παραδσουσιν μς ες συνδρια κα ες συναγωγς δαρσεσθε κα π γεμνων κα βασιλων σταθσεσθε νεκεν μο ες μαρτριον ατος)


 

 

필자는 이 구절에 언급된 "공회"라는 말을 오해하는 이들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일을 금지 배척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을 듣고 아연실색했던 적이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 중에는 기본적인 성경 진리도 알지 못한 채 어떤 변칙 방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하는 이들이 허다하게 많다. 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말아야 하는가? 혹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 막 13:9에서 보듯, "공회"는 교회를 핍박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라.


특히 마 10:17에서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라고 했다면, 10:23b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고 하였다. 즉 사도신경을 배척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의 사고에서, 마태복음의 같은 장에서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을 핍박하는 "공회"가 함께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여기 공회는 주님이 재림할 때에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핍박할 기구로 세우는 그런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한) 공회"를 내가 믿사오니 라고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해는 나는 성경의 기본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폭로함과 같다.


10:17에서 '공회' "회당"과 짝을 이루고 있다.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이는 주님 당대의 상황에서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지였던 '회당'이 결국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핍박하는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할 것에 대한 예고이다. 신약에서 "공회"는 모두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를 지시한다.


그런데 마 10:23하에서 언급된 '인자의 오심'은 반드시 그분의 종말 때의 '재림'을 지시하지 않는다. 거기서 인자의 오심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파멸 사건을 지시할 수 있다. 주후 70년에 유대교의 총본산이었던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된 것은 유대교가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며 더 이상 구원사적 기능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판단 하에 일어난 그분의 심판이었다. 이제 구원사는 다윗 후손 메시아를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을 잇는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며, 믿음 공동체, 언약 공동체로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다.


주후 70년에 인자의 임하심은 부패하여 하나님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유대교를 심판하기 위함인데, 구약에서 '야웨의 날'이 야웨께서 역사에 개입하여 분명하게 타락한 언약 백성을 심판하고 경건한 자를 구원해 내는 날이었다면 주전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사건도 야웨의 날 곧 '주의 날'이었다. 마찬가지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사건 역시 주님이 임하여 타락한 유대교를 심판한 "주의 날"이었다. 그래서 마 10:23하반절의 인자의 임하심은 주후 70년의 심판에 임한 것으로 이해해야 마 10장의 문맥에 적절하다.


이렇게 본다면, 사도신경에 "공회"란 말을 오해하고, 그것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예배에서 사도신경의 낭송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드러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왜 배척해야 한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의 의미는 무엇인가?


A.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B.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C. 성령님에 대한 신앙고백

 

성령을 믿사오며,


D. 기타 보편 교회, 성도들의 교제, 죄의 용서, 부활,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E. 신앙고백 확인

 

아멘.


이제 의미를 고려해 보자.

 

A.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곧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Πιστεύω ες θεòν πατέρα, παντοκράτορα, ποιητν ορανο κα γς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http://www.jhdh.org란 웹페이지에서 ("사도신경 [신앙고백] 루시퍼 [지옥왕]가 만든 덫인가?")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천주교에서 만든 신앙고백으로 완전히 배척해야 정통교회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울부짖으며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어 보았다. 전목사는 사도신경 처음에 등장하는 창조주에 대한 고백도 성경적이 아니고 틀렸다고 열변을 토했다. 여기서 그 사람이 틀렸다는 말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 했기에 틀렸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히브리어 '바라' 동사를 사용해서 "창조하다"라고 했는데 왜 "만드신 하나님"이라 했느냐? 틀렸다는 것이다. '바라' 동사는 오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동작만 묘사하는 것인데, 왜 인간처럼 하나님을 천지를 "만들었다"고 하느냐? 틀렸다 한다.

"전효성 목사님, 말 유희 하고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 딱 해당될지 모른다. 

이제 논박하겠다. 창 1-2장에서 "바라" (창조하다) 동사는 창 1:1, 21, 27 (3번), 2:3, 4등에서 나타난다. 그 동사는 물론 창 5:1, 2, 6:7, 출 34:10 등등에서도 나타난다. 창 1-2장의 창조기사에서 이 "창조하다" 동사만 아니라, 그 동사의 병행어로 "만들다"란 동사도 (히, '아사') 나타난다: 창 1:7, 11, 12, 16, 25, 26, 31, 2:2, 3, 4 등. 창 2:3, 4에서

창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바라) 만드시던 (아사)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3절에서  창조하다/ 만들다 병행어로 나타나고, 4절에서 원문을 본다면 야웨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던 때에, 이것들이, 그것들이 창조된 때에, 천지의 (창조) 기사이다 (These are the geneses of the heavens and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heavens, TNK).

요컨대, 창조하다란 말은 만들다란 말이나 병행어로 창조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조형하다"란 말도 (form; 히, '야차르') 창조하다란 말의 병행어로 나타나고 있다 (창 2:7, 17). 사실 창조기사는 텍스트-언어학의 견지에서 보자면, 무에서 유의 창조를 말씀하기보다, 기존의 혼돈의 물을 원료로하여, 체계화 조직화시켜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 1:1은 제목, 2절은 창조 이전의 혼돈의 물 묘사와 그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님, 3절부터 창조 사역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무에서의 창조를 부인한다는 말은 아니다. 현재 주어진 본문을 정직하게 대한다면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혼돈의 물에서 사람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사역에 강조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B.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Κα (ες) ησον Χριστòν, υἱὸν ατο τòν μονογεν, τòν κύριον μν,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하나님의독자, 우리의 주님을 (믿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독자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아들 관계임을 표현한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알지 못한다. 한 하나님이시나 삼위 인격으로 계신다. 6:4에서 (소위 쉐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 했다.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이시다라고 할 때 야웨는 하나는 히브리어로 야웨 에하드이고 한 야웨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창 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 할 때 한 몸이란 말은 바사르 에하드이다. 야웨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신데 (신약의 더 밝은 계시에 비추어 보건대), 삼위 하나님이 한 야웨라는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두 사람이지만, 결혼을 통해 한 몸이 된다는 사실에 유추해서 생각한다면, 삼위 하나님께서 한 야웨라는 말씀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이해와 사랑을 통한 완전한 일치, 온전히 하나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영이란 표현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어떤 사랑과 신뢰와 조화의 관계를 인간적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니 출생의 관계가 연관된 것 아니냐? 하는 식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동등이며 권능과 지혜도 동등이시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비어 낮추셨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희생제물로 죽을 수 있었다. 이런 경륜적 (구원을 위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해질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 ‘구원자란 의미이고 구약의 여호수아혹은 예수아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의미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에 해당되며, 구약에서 현직 왕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물론 선지자, 제사장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기름부음을 받는 일은 하나님의 선택과 지명을 의미하고 또한 그분의 성령님으로 충만함을 받아 신적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받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므로 "예수 왕/ 선지자/ 제사장"이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다윗 왕"이라 부르듯. 그리고 "우리 주"란 말은 우리의 임금이란 의미이다. 물론 이는 그분이 우리의 삶의 절대적 주권자이시고 주인임을 의미한다. 반면 "그리스도" ""이란 의미이면서도 제사장, 선지자란 의미도 포함하는데, 특히 그분이 십자가에 자기 몸을 속죄 제물로 (3:25, 힐라스테리온) 드리심으로 멜기세덱의 체제를 따른 대제사장으로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심으로 선지자의 직분도 행하셨다. 그리고 십자가 죽으신 후에 부활 승천하여 계 5장에서 보듯 우주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 1:3-4, 5:5, 6). 따라서 "그리스도"란 말에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란 의미도 포함되었다]

전효성 목사는 여기서도 트집 잡기를 왜 "외아들"이냐? 그분은 독생자이신데? 라고 울분을 토하듯 열변을 토한다. 독생자라 번역하건 외아들이라 번역하건 같은 것인데, 필자가 보기에 후자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 판단된다. NIV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를 독자/ 외아들로 번역했다. 독생자란 출생된 외아들이란 말로 어머니 배속에서 출산된 외아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반면 외아들은 출산의 여부와 상관없이 독자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두어진다. 현대 서구 번역본들은 대개 '외아들' 혹 '독자' 쪽으로 번역하고 있다 (his only Son, NAB, NIV, NJB, NLT, NRSV, LSG [son Fils unique] 등).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monogenes)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 11:1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 여기서 '독생자'로 번역된 말은 monogenes인데 눅 8:42 (독자), 9:38 (외딸), 요 1:14, 18, 3:16, 18, 히 11:17 (이삭), 요일 4:9 등에서 나온다. 전효성 목사는 독생자가 맞는데 왜 외아들이라 했느냐? 틀렸다! 이런 식인데 말 유희에 불과하다. 사실 외아들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께서 출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외 아들로 표현한 것은 우리 인간적 언어로 두 위격의 관계를 표현한 것인데, 창 22:2에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사용된 그 '외아들'이란 (히, 야히드) 표현은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사랑의 관계이며 육신적 정의 관계인지를 강조한다. 그런 뉘앙스가 독자/ 외아들이란 말에 들어 있다고 보인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τòν συλληφθέντα κ πνεύματος γίου, γεννηθέντα κ Μαρίας τς παρθένου,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 나셨는데, 성령께서 처녀 마리아에게 임하여 잉태시키셨다. 이것도 신비에 속하는 문제인데,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의 결합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처녀의 몸에 예수님을 잉태시키셨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전효성 목사는 여기서도 "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냐? 마리아 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던가? 예수께서 성령님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은 사 7:14의 예언 성취로 예수께서 어떤 인간 남자의 씨에서 태어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갈 4:4). 이것을 트집 잡을 일이 무엇인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παθόντα π Ποντίου Πιλάτου, σταυρωθέντα, θανόντα, κα ταφέντα,


본디오 빌라도는 Πόντιος Πιλάτος (주후 26-36년간 통치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를 통치하던 로마 총독이었다. 그의 통치 때에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 형틀에 달려 처형당하신 것이다. 죽은 예수님의 몸은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자기가 만든 동굴 묘에 안치하였다. 유대 지방에는 석회석이 많고, 동굴을 파기가 쉬운데 하얀 석회석 동굴은 규모가 엄청 큰 것도 있다. 그 동굴 묘는 방처럼 잘 꾸며졌고 벽에 선반처럼 만들어 가족들의 시체를 층층이 두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그곳 동굴 묘는 새로 만든 것이기에 예수님의 시신 밖에 없었다]

전효성 목사는 여기서도 트집 잘기를, 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셨다고 하느냐? 우리가 주님을 죽였다. 유대인이 죽였다! 등등 또 말 유희를 한다. 빌라도는 그 당시 로마 총독으로서 사형 언도의 책임을 가졌다.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 식민지로서 사형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트집 잡을 일이 무엇인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descendit ad infern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κατελθόντα ες τ κατώτατα, τ τρίτ μέρ ναστάντα πò τν νεκρν,


여기 라틴어나 헬라어에는 한역에서 생략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진술도 있다. 이는 헬라어 역본의 경우 엡 4:9에 근거한다 (땅의 아래 곳으로 내려 가셨다). 주님이 죽은 이후에 영으로 지옥에 가셨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벧전 3:19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를 반영한 것이리라. 그런데 여기 베드로서의 말씀은 그가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직접 가서 자신의 부활을 선포하셨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분의 부활 소식이 지옥에 갇힌 악령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는 그분 부활의 우주적 의의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님은 죽음 이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살아나신 것이다. 이것이 부처나 공자나 다른 어떤 성인과 다른 예수님의 특징이다. 그는 부활하여 어제도 지금도 또한 영원까지 살아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신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ascendit ad caelos, 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

 

νελθόντα ες τος ορανούς, καθεζόμενον ν δεξι θεο πατρς παντοδυνάμου]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오르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여기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한역, NJB, KJV)à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우편으로 높이셨다 (NASB, NAB, NIV, NRSV). 이 말씀의 사고는 행 2:36에서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부활 승천 이후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임금) “그리스도 (다윗 후손 메시아 왕) 되도록 높이셨다. “주와 그리스도는 사실 두 단어 모두 동일한 한 가지 사고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진술은 예수께서 이제 다윗 후손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셨다는 의미이다. 다윗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세례식에서 약식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셨다면,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정식으로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셨고 (5:5, 6, 1:5, 2:33, 36, 1:3, 8:2) 성령님을 부으심으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셨다.


사실이 이러하므로, 예수님의 통치를 재림 이후에 지상에서 예상하는 전천년설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 이후로 재림 때까지 왕으로 통치하신다. 그리고 재림 이후 부활, 최후 심판을 통해 현 질서는 새로운 영원한 질서로 대체되고 영원 신천지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κεθεν ρχόμενον κρναι ζντας κα νεκρούς]


저리로서는 현재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께서 거기로부터 재림하실 것을 말씀한다. 재림하신 후에 그 때에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은 부활체로 즉시 변화되고 이미 죽은 자들은 영혼이 썩은 육체와 결합하여 부활체를 입게 된다. 부활체를 입은 사람들은 이제 백보좌 앞에서 (20 :11이하) 최후 심판을 받는다.  


C. 성령님에 대한 신앙고백

 

성령을 믿사오며,

 

[Credo in Spiritum Sanctum,

 

Πιστεύω ες τò πνεμα τò γιον]


성령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다른 수식어가 없이 아주 간단하다. 아주 아쉬운 부분이다. 그분이 현재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사실 성령님이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역할을 하신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이다 (고후 3:17). 성령님이 오시는 이유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15:26, 16:14). 성령님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오셔서 내주하신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성령 하나님을 모신 성전인 것이다 (고전 3:16, 6:19, 고후 6:16, 2:20-22). 물론 성도들의 모임도 역시 성전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기도할 때마다 그분의 임재를 되살리고 그분의 불 체험을 함이 매일 신앙생활의 활력소를 제공한다.

여기서도 전효성 목사는 성경에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는 표현이 없는데, 왜 이렇게 비 성경적인 내용을 고백해야 하느냐? 라고 트집을 잡는다. 이것도 말 유희에 불과하다. 성령님을 받으라,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 했지 성령님을 믿습니다 라는 진술이 성경에 없으니 이런 것은 고백할 이유가 없다는 트집인데, 트집 잡을 일도 아닌데 그렇게 울먹이며 성토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전체로 보자면, 먼저 성부 하나님을 천지 창조주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다음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셋째로 성령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믿는 우리로서는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오직 성부 성자 예수님만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대상이지 성령님은 그런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야 할 대상이라느니 하던데, 궤변이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닐테고?

 


D. 기타 보편 교회, 성도들의 교제, 죄의 용서, 부활,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remissionem peccatorum,
  carnis resurrectionem,
  vitam aeternam.

 

γίαν καθολικν κκλησίαν, γίων κοινωνίαν,
  
φεσιν μαρτιν, σαρκς νάστασιν, ζων αώνιον.


[‘거룩한 공회라 번역된 말은 "거룩한 보편() 교회"란 의미이다. ‘거룩한 카톨릭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 말은 교황을 수장으로 받드는 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의미하지 않고, 온 세상에 흩어진 교회들이 (성도들) 예수님의 교회로서 '하나'라는 사고를 고백하는 표현이다. 즉 교회 성도들의 일치와 통일성을 강조한다. 이는 이단들을 겨냥한 것이고 또한 다른 불신 세상을 겨냥한 것이다.

여기서도 전효성 목사는 트집 잡기를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한다고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하던가? 설명한대로, 세상에 흩어진 정통 보편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지금 개신교와 구분되는 그런 "로마 카톨릭 교회"란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교통이란 성도들의 교제, 성령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일치와 사랑의 관계를 강조한다. 교단이나 교회는 다를지라도 성도들은 바른 신앙을 고백한다면 모두 성령님으로 교제하여 사랑과 조화를 표현해야 한다. 죄 용서와 몸의 부활과 영생은 기독교 신앙의 축복들이다. 죄가 극악하고 무서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아니함이 문제이다. 진심으로 철저하게 회개만 하면 그 죄의 경중을 떠나서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부활은 죽은 육체가 주님의 재림 때에 다시 살아나 영혼과 결합되는 것을 지시한다부활 후에는 각자가 최후 심판을 받고 영원한 신천지나 (성도들) 아니면 영원한 지옥으로 (불신자) 가게 된다.

여기서도 전효성 목사는 트집 잡길, 여기서 말하는 "성도"는 로마 교황이 "성자"라고 선포한 그런 자들을 지시하고, 그들과 우리 산 신자가 교통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던가? 그래서 죽은 자와 교통한다고 하니 강신술이라던가? 아니다. 우리 보편 교회 성도들이 바른 신앙 교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한 형제요 지체로서 서로 교통한다는 의미이다.



영생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일하여 그분 안에서 영원히 누릴 축복을 표현한 것이다]


E. 신앙고백 확인

 

아멘.

 

Amen.

 

μήν.


['아멘'이란 말은 히브리어에서 '진실로!' 를 의미하고 기도나 고백의 진실성을 확증하는 말이다. ]


 


주기도문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곧 주기도문에서 마지막 진술에서 "대개"를 빼야 한다고 큰 소리를 쳤다. 왜냐하면 그 말이 원문에는 없기 때문이라 했다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대개"를 넣어서 했더니 왜 원문에도 없는 말을 멋대로 넣어서 하느냐? 고 따졌다.


그런데 마 6:8-13에 언급된 주기도문을 한글 개역은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 번역했다.


여기서 13절 후반부 괄호 안의 부분은 헬라어 사본들에서 고대 권위있는 사본들에서는 생략되었고 후대 사본들에서만 나타난다. 앞에서 "대개"라는 말을 넣는다고 질책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부분 (송영전체가 원문의 일부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 하다. "대개"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에서 "대략"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헬라어 원문에서 (후대 사본들에서) "왜냐하면"에 해당되는 gar에 해당된다. '대개'가 대략의 의미로만 사용된다면, "왜냐하면"으로 바꾸어 번역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은 우리 성도들의 기도문의 모델인데, 먼저 하나님을 부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부분은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번역함이 적절하다. 하늘에 그저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은 말하자면 우주의 백악관이고, 그곳 보좌에 높이 좌정하여 우주를 통치하는 주권자 아버지를 부르는 부름의 소리이다]


다음에 그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시길 우선적으로 간구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 자신을 지시한다. 이름은 어떤 사람의 인격, 그분 자신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거룩하게 존중 받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이 임하옵시며"에서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며, 이 말은 정적인 영토 개념보다, 동적인 '왕권' '통치권' 개념이 우선적이다. 즉 하나님의 왕권이 이 지상에 임하여 그분의 공의로운 통치가 실현되길 기도한다. 다음으로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천사들에 의해 즉각 즉각 실행되듯 이 땅에서도 우리 성도들의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종으로 즉시 실현되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의 필요를 그분께 아뢰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잠언서 기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30:8) 기도했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면 교만해서 하나님을 떠날까 두렵기 때문이고 가난하면 구차하고 천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선한 일에 부요한 자가 되리라.


다음에 우리는 기도 할 때 내게 해를 끼친 자들,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온전하게 용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12절의 기도문을 낭송하기 어렵게 된다. 내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했으니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의 만 가지 죄를 용서하셨다면 내가 용서못할 죄는 무엇인가? 다음에 시험에 들게 마소서! 란 우리가 예방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이다. 미리 미리 예방 기도를 많이 드리면 유혹이나 미혹이나 악한 일에 우리가 연루될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악에서 구하소서! 란 기도는 악, 곧 죄악, 혹은 죄악의 원흉인 사단, 혹은 악한 재앙 등을 망라하는데 이런 것들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소서! 란 예방 기도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부분은 오래된 고대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후대 필사자가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송영, 곧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다. 나라는 그분의 우주에 대한 절대 통치권과 세상 만물을 지시하고, 권세는 그분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권세, 즉 만물이 필연적으로 그분에게 순종해야 하는 합당한 권세이며, 영광은 창조주, 구속주로서의 위엄과 영화로우심이다. 예배 시에 우리는 그분의 속성과 (거룩, 공의로우심, 인자하심 등)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창조와 구원) 찬양하는 찬양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예배시에도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와 예수 예수 내 주여, 이제 내게 오셔서 곧 가까이 하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같은 복음송, 혹은 '깨어라 일어나라 달리다쿰 일어나라' 같은 복음송만 부른다면 그것은 찬양이라 하기 어렵다. 그런데 "멀리 멀리 갔더니"라는 찬송은 내용이 주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간절히 기원하는 내용이니 찬양은 아니라 해도 좋은 찬송이라 여겨진다. 찬송가에 실린 찬송들 중에서도 내용이 하나님의 성품이나 그분의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고 높이는 내용이라기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들을 주제로 노래한다면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복음송이다]


우리는 성경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큰 주제가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이라 판단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신학은 롬 11:36을 좋아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τι ξ ατο κα δι ατο κα ες ατν τ πντα·

 

ατ δξα ες τος αἰῶνας, μ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