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구원의 순서 부르심 (소명), 회개, 중생, 칭의, 양자, 성화, 영화

중일사랑 2017. 9. 20. 09:45

구원은 어떤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가지는가? 과거에 조직신학 혹 교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순서/ 서정"이라 (ordo salutis) 불리는 주제를 가르쳤다. 그 때 벌코프나 칼빈 등이 구원의 순서가 전후 관계로 발생하는 사건들의 연속의 사고라고 배웠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사고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1. 여러 다른 접근 방식들

 

1) 존 머레이(John Murray), "성취된 그리고 적용된 구속" 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98.

로마서 8:23: 부르심(calling), 의롭게 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 하심(glorification) 

부르심 --> 중생 --> 믿음과 회개 --> 칭의 --> 양자 삼으심 --> 성화, 견인 --> 영화

effectual calling, regeneration, faith and repentance, justification, adoption, sanctification, perseverance, union with Christ, and glorification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6911), 416-18.
부르심 (내적 소명에 앞서 외적 소명이 있다) --> 중생 --> 회심 (회개와 믿음) --> 칭의 -->성화 -->견인 -->영화

Calling (external calling preceding internal calling), regeneration, conversion (including repentance and faith),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perseverance, and glorification


2) 벌카우어(G. C. Berkouwer) Geloof en Rechtvaardiging (Faith and Justification).
그는 "구원의 순서" 라는 표현보다는 "구원의 길"(way of salvation)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구원의 순서를 정하기 거부한다.


안토니 후크마 (A.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55.

우리는 연속적 단계들을 지닌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일을 (구원의 길) 생각해야 한다. 그 구원의 길 안에서 여러 국면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러 측면들은 동일한 종류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동일 범주 안에 배치될 수 없다. 예컨대 이 구원의 길의 어떤 측면들은, 비록 하나님의 힘으로만 (믿음과 회개) 하는 것이긴 해도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관심사이다. 반면 다른 측면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중생과 칭의). 어떤 측면들은 사법적 행위들과 (칭의) 연관되고, 어떤 측면들은 사람의 도덕적, 영적 갱신과 연관된다 (중생과 성화). 어떤 측면들은 즉각적 행동들 (중생, 위기 형태의 회심, 결정적 성화), 어떤 측면들은 지속적인 행동들을 다룬다 (점진적 성화, 견인) 

We should think, then, not of an order of salvation with successive steps or stages, but rather of a marvelous work of God’s grace—a way of salvation—within which we may distinguish various aspects. These aspects, however, are not all of the same sort; they should not therefore all be placed into the same category. For example, some aspects of this way of salvation concern what man does, though only in God’s strength (faith and repentance), whereas other aspects concern what God does (regeneration and justification). Some aspects are judicial acts (justification), whereas other aspects concern the moral and spiritual renewal of man (regeneration and sanctification). Some aspects are instantaneous actions (regeneration, conversion of the crisis type, definitive sanctification), while other phases are continuing actions (progressive sanctification, perseverance)

*필자는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 소재 칼빈 신학교에서 이미 고인이었던 후케마 박사 장학금을 그 부인이 제공하셨는데 그 장학금을 하올더 교수의 추천으로 4천불을 받은 바 있다. 감사의 마음을 늘 갖고 있다. 


3)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3:682 (2판). 

중생, 믿음, 회심/돌이킴, 새로워짐 등등의 표현들은 종종 성경 속에서 구원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단계들을 가리키기보다는, 구원받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전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시키는 것이다. Regeneration, faith, conversion, renewal, and the like, often do not point to successive steps in the way of salvation but rather summarize in a single word the entire change that takes place in man in redemption

로마서 8:30에서는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 삶을 통하여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핫지(A. A. Hodge), Evangelical Theology (Carlisle, Pa: Banner of Truth, 1976 [1890]), 310-11.

만약 당신이 성화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칭의의 단계에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 . 피의 순환과 산소흡입을 구분할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호흡과 순환이 별개의 것이기는 해도 후자없이 전자는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함께 공존하여 한 생명을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칭의와 성화도 함께 공존하며, 한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은 중생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회개/ 돌이킴→칭의 (의롭다고 하나님이 선고함)→성화 (거룩하게 되어짐)→성도의 보존과 (하나님께서 택한 성도를 끝까지 믿음 안에 보존) 같이 일련의 시간적 전후 관계를 지닌 연속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고, 구원의 과정은 동시에 시작되어 죽기까지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 경험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마지막 견해가 적절해 보인다. 


2. 불신자, 거듭났으나 육신적인 성도,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C.C.C. 평신도 피교육자 요람, 1968). 

1) 프슈키코스(psuchikos), 즉 중생을 통하여 새롭게 되지 못하여 아담의 부패성이 지배하는 사람 (Adamic man)(요 3:3, 5, 약 3:15, 유19), 

2) 프뉴마티코스 (pneumatikos), 영적인 사람,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가운데서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 (엡 5:18∼20), 

3) 육신적인 혹은 세상적인 성도 (sarkikos), 중생하였으나 육신을 따라 걷는 어린 아이 성도 (고전 3:1-4, 히 6:1-4).


이런 인류의 삼분 구조가 성경적인가? 혹자는 성경적으로 이렇게 구분한 예가 없다고 배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의 삼중 구분이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험적으로 본다해도 이런 구분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구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신앙 연륜에 따라 무한한 구분도 가능하다. 초초초보 성도, 초초보 성도, 초보 성도, 아이 성도, 소년 성도, 청년 성도, 성숙한 성도 등등. 그러나 성숙한 성도와 초초보 성도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있겠지만, 이 지상에서 완전 성화에 달한 성도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성숙한 성도라 해도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해도 어느 순간에 영적으로 침체되고 유혹에 넘어져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기도 한다. 한 때 세계적인 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들도 (이들에게 사단이 집중 공격을 가할 것이다) 어느 날 음행의 덫에 걸려 초라하게 넘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런 삼중 구분이 성경적이냐? 라고 묻는 것은 그래서 잘못된 질문 형식일지 모른다. 이런 구분의 의도는 교육적 목적을 위함이다. 교육이란 성경의 내용을 아주 잘 요리하여 성도들이 들어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주제나 사실을 단순화 도식화시키기도 한다. 


3.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아니면 행함으로 (by works)?

연세 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 성도가 전해 주었다: 

"만약 오늘 주일 예배를 통해 완전히 회개를 한 상태에서 주님이 오신다면 나는 구원에 참여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주중에 회개가 덜 된 상태에 있는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면 나는 버림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온전한 회개 상태에 머물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성도는 자기는 걱정이라고 했다. 회개가 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이 오시면 자기는 영원히 버림 받아 지옥에 갈 것이라고 두려워 한다. 그런데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갔더니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은혜를 강조해서 너무나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뻤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이제 모르겠다고 한다. 윤목사가 맞는 것인지 조목사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것이 옳은지 좀 판단해 달라고 한다. 


재미 교포인 서사라 목사는 칼빈이 사도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는 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킨 죄로 지금 지옥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분명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마 5:29-30)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90퍼센트나 80퍼센트의 중요성을 갖는다면 사도 바울이나 나머지 사람들의 말은 참조용이지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서사라는 말한다. 


서사라의 말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이단적 사고이다. 사도 바울이 기록했다고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렇게 기록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다. 서사라의 계시관이 크게 잘못되었다. 지옥의 소리라는 덕정교회인지 어디서는 옥한흠 목사나 한경직 목사도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 무슨 죄 때문인지 그렇게 지옥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 역시 서사라 목사처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기본 진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설교를 하여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의 오도하는 죄는 지대하게 크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한 행악자는 이 십자가에 달린 채로 예수님을 향하여 1분간의 간구 기도를 통해 즉시 구원을 얻어 낙원에 들어갔다. 단 1분의 외침 기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앞의 주님의 말씀과 여기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의 자세는 서로 부합되지 아니 하는 것인가? 달리 말해 마태의 주님과 누가의 주님은 서로 다른 구원관을 드러내고 계시는가? 마태와 누가는 다른 관점으로 예수님을 제시하는가? 모든 성경이 동일한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면, 두 저자가 제시하는 사고는 일치해야 하며 그러하리라 확실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상에서의 자세와 지상 사역 때의 말씀 가르침이 달라 보이는 것인가? 


설명이 쉽지는 않지만, 이렇게 보면 어떨까? 앞에서 마 5장의 말씀에서는 지금 신앙생활 중인 천국 백성에게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면, 여기 십자가 상의 행악자에게는 이제 처음 예수님을 믿는 새 신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허락하신다. 그렇다면 아무리 이미 믿어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 해도, 눈으로나 손으로 범죄하게 되면 지옥에 간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 아닌가? 라고 묻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과장법적 표현이라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로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볼 때 (물론 이런 전제를 거부하고 성경이 서로 모순되는 많은 사고나 견지를 함께 담고 있다고 보는 비평가들에게 이런 전제는 배척된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대 진리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은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한 과장법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4. 여기서의 사역/ 섬김/ 봉사의 기회, 영원한 신천신지에서의 삶과 보상/ 상급

우리는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믿는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나의 행위나 나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그렇다면 믿음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나의 죄를 갚는 속죄 제물로 드리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할 때 영원한 구원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는데 믿고 난 후에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삶의 방식이 이전 불신앙의 삶에서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참 믿음이 생겼다면 반드시 인격에서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자, 믿다가 또 타락해서 넘어졌다고 하자. 어떤 성도는 그렇게 결심했다가도 또 술에 빠지고 넘어진다. 음행에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은 버리시는가? 아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용서할까? 라고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마 18:22). 70 x 7 = 490번의 용서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7이란 완전을 상징하는 수를 사용하여 무한대의 용서를 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그처럼 넘어졌다가 회개하면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렇지 못한데 인간에게만 그렇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용서를 베푸시게 한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서로 이 문제로 대립했다.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저 공짜로 은혜로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는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18세에 사생자를 낳을 정도로 난잡한 성생활을 했고 삶이 지저분하고 문란했었다. 


하지만, 그가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덮었던 어둠의 영이 떠나고 더러움에서 자유를 얻어, 불신앙에서 떠났을 때, 그의 마음은 세상사람들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어린 아이 신앙으로 죄 가운데서 떠 나지 못하고 사는 어린 아이 신앙인들도 자기의 불신앙 시절의 타락한 삶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은혜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그는 체험했다. 

어거스틴은 박해 때 신앙 정조를 지키며 핍박을 감수하거나 순교한 성도들이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해서 만든 도나투스파와 논쟁을 벌이며 저들의 주장을 논박했는데도나투스파의 기원(起源)은 로마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가 AD. 303-305년 사이에 일으킨 기독교 박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때 로마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자진해서 그들의 성경책을 로마 관리들에게 바치라고 명령하였다이러한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迫害)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아무 것도 내어 놓지 않고 저항하다가 투옥되고 고문 당하며 순교하였다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성경책뿐 아니라 교회의 기물까지도 반납하였고일부 사람들은 도망가거나 숨기도 하였다이때 로마제국의 압력에 못이겨 성경책을 바친 자들을 "책을 바친 자들" (traditores)이라고 불렀다

박해(迫害)가 끝나자 "책을 바친 자들"은 다시 교회에 돌아오기를 원했다그러나 교회 안의 강경파들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오히려 책을 바쳐 배교한 성직자들이 준 성례(聖禮)까지도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재세례(再洗禮)를 시행하였다이들은 급기야는 가톨릭교회를 이탈하여 따로 교회를 세웠는데 이들을 그들의 지도자였던 감독 도나투스의 (Donatus) 이름을 따라 "도나투스파"라고 (Donatist) 부르게 되었다이리하여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도나티스트 교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狀況)에 직면하여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一致)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를 분파주의자들이며 신앙(信仰)을 곡해(曲解)한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논박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왔다어거스틴 생존시에 도나투스파의 세력은 이미 크게 약화되었다

도나투스파는 진정한 교회는 오직 충성된 그리스도인으로만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그들은 지상(地上)의 교회(敎會)는 흠도 없고 주름 잡힐 것이 없는 거룩한 교회가 되기 어렵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대하고 자기들의 교회만이 배교하지 않은 순수하고 거룩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또한 그들은 성례전(聖禮典)의 정당성(validity)이 성례를 베푸는 성직자의 성품에 의존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따라서 배교한 성직자들이 베푼 성례는 무효이며박해시기에 성경책을 로마관원들에게 바쳐 배교(背敎)한 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즉 거룩한 도나투스파 교회에서 받지 않은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이러한 주장에 의거하여 그들은 배교자가 안수하여 세웠던 카르타고의 감독 캐킬리아누스(Caecilianus)의 감독직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였다그들은 교회의 일치(一致)를 가져오기 위해 로마황제가 간섭을 시도하자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반문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절대적 분리를 주장하였다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의 이러한 이단적(異端的)인 주장에 대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되며따라서 교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것은 배교(背敎)보다도 더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도나투스파를 비판(批判)하고 당시 가톨릭교회를 옹호하였다그는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성령의 능력과 활동에 의해 유지된다고 주장하면서성례(聖禮)는 누가 베풀든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로서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다고 역설하였다따라서 이미 성례를 받은 사람은비록 그가 배교한 성직자에 의해 성례를 받았다 할지라도다시 성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어거스틴의 이러한 교회론은 이후 거의 모든 교회관의 뿌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8.15 해방 이후에 일제의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성도들과 목사들과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출옥 성도나 목사들이 논쟁을 벌이다 결국 갈라져서 출옥 성도 중심으로 고려파 교단이 장로교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신사 참배를 했던 지도자들에게 출옥 성도들이 회개하라고 외치자 저들은 당신들은 옥에 들어가서 편안히 지내는 동안 우리는 밖에서 양 떼들을 돌보느라 수고를 더 많이 했다는 궤변을 늘어 놓는 등 회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고려파 교단이 생기게 된 것인데, 오늘날 고려파 교단에 속한 성도들이나 해방 이전의 그 장로교단에 속한 합동이나 통합측 장로교단 혹은 기독교 장로회 교단은 서로 신학적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점점 서로를 인정하며 신앙생활하고 있다. 고려파는 합동측과 같이 보수적 신학을 고수하고 통합이나 기장은 진보적 성향을 고수한다. 

일제의 강압을 못이겨 신사 앞에 가서 고개를 조아리며 잡신에게 절한 성도들이나 목사들은 타락한 자들이다. 하지만 저들도 하나님은 모두 지옥에 던져 버리신 것이라 보기 어렵다. 회개한 자들은 모두 구원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타락하고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만 하면 받아준다고 말한다면, 히 6:4-6의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는 말씀에 어긋나는 주장이 아닌가?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지적하는 "타락한 자들"은 로마 제국 때 주님을 배교했던 자들이나 일제 시대 신사 앞에 가서 절함으로 배교했던 성도들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회개하면 저들도 구원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받아 주셨으리라 이해하는가? 여기서는 분명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라고 했지 않은가? 여기 본문에서 "타락한 자들"은 로마제국이나 일제의 강압 하에 마지 못해 생명을 건지기 위해 고개를 숙이거나 성경책을 자진 바치는 행위, 이방 제단 앞에서 제사를 바친 행위를 자행한 자들, 그러나 그들은 박해가 끝나자 교회로 돌아가고자 했고 회개하기도 했던 그런 자들을 지시한다기 보다, 외부의 강압에 의해 일시적으로 배교행위를 하긴 했어도 회개한 자들, 혹은 외부의 어떤 강압과 무관하게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믿음에서 떠나 불신앙의 길로 나아가 회개할 생각도 아니하는 자들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요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고, 또 회개가 그래서 아주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죽기까지 범죄하고 또 회개하고 그렇게 살다가 천국 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구지 그렇게 신앙인으로 성숙을 위해 몸 부림 칠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을 즐기며 살다가 마지막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신천지 복락에 참여하면 될 것 아닌가? 

우리의 주장은 이렇다. 그런 시나리오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죄를 떠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동일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거듭났는지 진지하게 고려할 이유가 된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났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면 동일한 죄를 습관적으로 반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반복해서 동일 죄를 짓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요일 5:18, 3:9). 

또한 신속하게 우리가 죄를 버리고 온전한 회개를 이루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함을 얻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그분의 사용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용받는 일, 말씀/ 전도/ 선교 사역을 하는 일, 그분을 섬기는 일의 분량과 질에 따라서 영원 세상에서의 상급과 보상이 달라진다. 마 20장의 포도원 비유에 근거해서 혹자는 천국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고 하고 차등 상급을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유에서 요지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 그 비유에서 요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 베푸심이지, 천국에서의 상급에 관한 것이 아니다. 1시간 일을 했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하루 품삯을 주신다. 이는 은혜라고 불린다.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얼마나 우리가 충성되게 얼마나 오래 얼마나 열심으로 그분을 섬겼는지에 따라서 영원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정도가 결정된다면 이는 우리의 영원한 삶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육신의 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주님을 섬김으로 "영혼의 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지금이 육신의 때라고 불릴 수는 있겠지만, 영원의 삶을 "영혼의 때"라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 때에 우리는 부활체로 부활하여 온전히 육과 영의 결합 상태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혼만 사는 그런 때는 중간기 상태에 국한되고 (지상에서 죽어 주님 재림까지 기간) 영원한 삶은 부활체의 때이지, 영혼의 때가 아니다. 

지금이 구원의 기회이고 은혜받을 때이기도 하지만, 지금이 우리가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할 기회요 때인 것이다. 이 사실을 죽기 전에 깨닫는다면 영원 세상에서 영원히 후회를 달고 살아야 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영원 세상에서 영원히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낸 타다 남은 장작개비같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5; 암 4:11) 영원 세상에 (신천지) 참여한다고 하자. 그는 영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야 하며 (비록 낙원이긴 해도) 자기에게 주어진 상급이나 거처가 없어 꽃밭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천국은 현재 죽은 성도의 영혼이 올라가서 거하는 곳이라면 신친신지는 현 세상이 재림 때에 변화되어 우리가 영원히 살 변화될 세상을 지시한다. 그 신천지에서 우리에게 각자 행한대로 거처와 지위를 주실 것인데,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 거처도 없고 지위도 낮아 보는 이마다 고개를 숙이는 삶을 영원히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고자 여기서 기회를 살리고자 하는가? 이를 빨리 깨닫고 실천하는 자만이 복된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