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떤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과정을 가지는가? 과거에 조직신학 혹 교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순서/ 서정"이라 (ordo salutis) 불리는 주제를 가르쳤다. 그 때 벌코프나 칼빈 등이 구원의 순서가 전후 관계로 발생하는 사건들의 연속의 사고라고 배웠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사고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1. 여러 다른 접근 방식들
1) 존 머레이(John Murray), "성취된 그리고 적용된 구속" 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98.
로마서 8:23: 부르심(calling), 의롭게 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 하심(glorification)
부르심 --> 중생 --> 믿음과 회개 --> 칭의 --> 양자 삼으심 --> 성화, 견인 --> 영화
effectual calling, regeneration, faith and repentance, justification, adoption,
sanctification, perseverance, union with Christ, and glorification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6911), 416-18.
부르심 (내적 소명에 앞서 외적 소명이 있다) --> 중생 --> 회심 (회개와 믿음) --> 칭의 -->성화 -->견인 -->영화
Calling
(external calling preceding internal calling), regeneration, conversion
(including repentance and faith),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perseverance,
and glorification
2) 벌카우어(G. C. Berkouwer) Geloof en Rechtvaardiging (Faith and Justification).
그는 "구원의 순서" 라는 표현보다는 "구원의 길"(way of salvation)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구원의 순서를 정하기 거부한다.
안토니 후크마 (A.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55.
우리는 연속적 단계들을 지닌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일을 (구원의 길) 생각해야 한다. 그 구원의 길 안에서 여러 국면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러 측면들은 동일한 종류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동일 범주 안에 배치될 수 없다. 예컨대 이 구원의 길의 어떤 측면들은, 비록 하나님의 힘으로만 (믿음과 회개) 하는 것이긴 해도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관심사이다. 반면 다른 측면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중생과 칭의). 어떤 측면들은 사법적 행위들과 (칭의) 연관되고, 어떤 측면들은 사람의 도덕적, 영적 갱신과 연관된다 (중생과 성화). 어떤 측면들은 즉각적 행동들 (중생, 위기 형태의 회심, 결정적 성화), 어떤 측면들은 지속적인 행동들을 다룬다 (점진적 성화, 견인)
We should think, then, not of an order of salvation with successive steps or stages, but rather of a marvelous work of God’s grace—a way of salvation—within which we may distinguish various aspects. These aspects, however, are not all of the same sort; they should not therefore all be placed into the same category. For example, some aspects of this way of salvation concern what man does, though only in God’s strength (faith and repentance), whereas other aspects concern what God does (regeneration and justification). Some aspects are judicial acts (justification), whereas other aspects concern the moral and spiritual renewal of man (regeneration and sanctification). Some aspects are instantaneous actions (regeneration, conversion of the crisis type, definitive sanctification), while other phases are continuing actions (progressive sanctification, perseverance)
*필자는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 소재 칼빈 신학교에서 이미 고인이었던 후케마 박사 장학금을 그 부인이 제공하셨는데 그 장학금을 하올더 교수의 추천으로 4천불을 받은 바 있다. 감사의 마음을 늘 갖고 있다.
3)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3:682 (2판).
중생, 믿음, 회심/돌이킴, 새로워짐 등등의 표현들은 종종 성경 속에서 구원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단계들을 가리키기보다는, 구원받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전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시키는 것이다. Regeneration, faith, conversion, renewal, and the like, often do not point to successive steps in the way of salvation but rather summarize in a single word the entire change that takes place in man in redemption
로마서 8:30에서는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 삶을 통하여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핫지(A. A. Hodge), Evangelical Theology (Carlisle, Pa: Banner of Truth, 1976 [1890]), 310-11.
만약 당신이 성화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칭의의 단계에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 . 피의 순환과 산소흡입을 구분할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호흡과 순환이 별개의 것이기는 해도 후자없이 전자는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함께 공존하여 한 생명을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칭의와 성화도 함께 공존하며, 한 생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은 중생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남)→회개/ 돌이킴→칭의 (의롭다고 하나님이 선고함)→성화 (거룩하게 되어짐)→성도의 보존과 (하나님께서 택한 성도를 끝까지 믿음 안에 보존) 같이 일련의 시간적 전후 관계를 지닌 연속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어질 수 없고, 구원의 과정은 동시에 시작되어 죽기까지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 경험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마지막 견해가 적절해 보인다.
2. 불신자, 거듭났으나 육신적인 성도,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성도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C.C.C. 평신도 피교육자 요람, 1968).
1) 프슈키코스(psuchikos), 즉 중생을 통하여 새롭게 되지 못하여 아담의 부패성이 지배하는 사람 (Adamic man)(요 3:3, 5, 약 3:15, 유19),
2) 프뉴마티코스 (pneumatikos), 영적인 사람,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가운데서 성령 안에 거하는 성도 (엡 5:18∼20),
3) 육신적인 혹은 세상적인 성도 (sarkikos), 중생하였으나 육신을 따라 걷는 어린 아이 성도 (고전 3:1-4, 히 6:1-4).
이런 인류의 삼분 구조가 성경적인가? 혹자는 성경적으로 이렇게 구분한 예가 없다고 배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의 삼중 구분이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험적으로 본다해도 이런 구분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구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신앙 연륜에 따라 무한한 구분도 가능하다. 초초초보 성도, 초초보 성도, 초보 성도, 아이 성도, 소년 성도, 청년 성도, 성숙한 성도 등등. 그러나 성숙한 성도와 초초보 성도 사이에 확연한 차이는 있겠지만, 이 지상에서 완전 성화에 달한 성도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성숙한 성도라 해도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해도 어느 순간에 영적으로 침체되고 유혹에 넘어져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기도 한다. 한 때 세계적인 부흥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들도 (이들에게 사단이 집중 공격을 가할 것이다) 어느 날 음행의 덫에 걸려 초라하게 넘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런 삼중 구분이 성경적이냐? 라고 묻는 것은 그래서 잘못된 질문 형식일지 모른다. 이런 구분의 의도는 교육적 목적을 위함이다. 교육이란 성경의 내용을 아주 잘 요리하여 성도들이 들어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주제나 사실을 단순화 도식화시키기도 한다.
3.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아니면 행함으로 (by works)?
연세 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한 성도가 전해 주었다:
"만약 오늘 주일 예배를 통해 완전히 회개를 한 상태에서 주님이 오신다면 나는 구원에 참여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주중에 회개가 덜 된 상태에 있는 시간에 주님이 오신다면 나는 버림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온전한 회개 상태에 머물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성도는 자기는 걱정이라고 했다. 회개가 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이 오시면 자기는 영원히 버림 받아 지옥에 갈 것이라고 두려워 한다. 그런데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갔더니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은혜를 강조해서 너무나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뻤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이제 모르겠다고 한다. 윤목사가 맞는 것인지 조목사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것이 옳은지 좀 판단해 달라고 한다.
재미 교포인 서사라 목사는 칼빈이 사도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는 교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시킨 죄로 지금 지옥에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분명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마 5:29-30)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90퍼센트나 80퍼센트의 중요성을 갖는다면 사도 바울이나 나머지 사람들의 말은 참조용이지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서사라는 말한다.
서사라의 말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이단적 사고이다. 사도 바울이 기록했다고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렇게 기록하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다. 서사라의 계시관이 크게 잘못되었다. 지옥의 소리라는 덕정교회인지 어디서는 옥한흠 목사나 한경직 목사도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 무슨 죄 때문인지 그렇게 지옥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 역시 서사라 목사처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기본 진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설교를 하여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의 오도하는 죄는 지대하게 크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한 행악자는 이 십자가에 달린 채로 예수님을 향하여 1분간의 간구 기도를 통해 즉시 구원을 얻어 낙원에 들어갔다. 단 1분의 외침 기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앞의 주님의 말씀과 여기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의 자세는 서로 부합되지 아니 하는 것인가? 달리 말해 마태의 주님과 누가의 주님은 서로 다른 구원관을 드러내고 계시는가? 마태와 누가는 다른 관점으로 예수님을 제시하는가? 모든 성경이 동일한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면, 두 저자가 제시하는 사고는 일치해야 하며 그러하리라 확실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상에서의 자세와 지상 사역 때의 말씀 가르침이 달라 보이는 것인가?
설명이 쉽지는 않지만, 이렇게 보면 어떨까? 앞에서 마 5장의 말씀에서는 지금 신앙생활 중인 천국 백성에게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면, 여기 십자가 상의 행악자에게는 이제 처음 예수님을 믿는 새 신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허락하신다. 그렇다면 아무리 이미 믿어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 해도, 눈으로나 손으로 범죄하게 되면 지옥에 간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 아닌가? 라고 묻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과장법적 표현이라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로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볼 때 (물론 이런 전제를 거부하고 성경이 서로 모순되는 많은 사고나 견지를 함께 담고 있다고 보는 비평가들에게 이런 전제는 배척된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대 진리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은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기 위한 과장법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4. 여기서의 사역/ 섬김/ 봉사의 기회, 영원한 신천신지에서의 삶과 보상/ 상급
우리는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짐을 믿는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나의 행위나 나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그렇다면 믿음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나의 죄를 갚는 속죄 제물로 드리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할 때 영원한 구원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는데 믿고 난 후에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삶의 방식이 이전 불신앙의 삶에서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참 믿음이 생겼다면 반드시 인격에서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자, 믿다가 또 타락해서 넘어졌다고 하자. 어떤 성도는 그렇게 결심했다가도 또 술에 빠지고 넘어진다. 음행에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은 버리시는가? 아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용서할까? 라고 물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마 18:22). 70 x 7 = 490번의 용서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7이란 완전을 상징하는 수를 사용하여 무한대의 용서를 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그처럼 넘어졌다가 회개하면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렇지 못한데 인간에게만 그렇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히 용서를 베푸시게 한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서로 이 문제로 대립했다.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저 공짜로 은혜로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는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18세에 사생자를 낳을 정도로 난잡한 성생활을 했고 삶이 지저분하고 문란했었다.
하지만, 그가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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