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보았다 (아래 글 참조).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제2의 출애굽 사건 이런 제목의 글이다. 잘못된 성경 해석의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러 번 그 주제들에 대하여 글을 썼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제2의 출애굽이란 사고는 이사야 후반부에서 집중 언급되는데, 그것은 주님의 초림으로 성령 강림 이후에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을 하나님이 불러내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하는 구원 사역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교회사 전반에 걸쳐서 복음 전파를 통해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 남은 자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아래 글]에서 글쓴 이는 구약 신 30장이나 예레미야서의 이스라엘의 본토 귀환 예언들을 주로 언급했는데, 이사야서의 예언들도 언급했지만, 신약 4복음서가 공히 언급하는 사 40:3-5에 대해서는 언급을 아니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제2의 출애굽) 말하려면 무엇보다 사 40:3-5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가장 분명한 선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야웨께서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들을 이끌고 고국으로 귀환하도록 광야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라'는 요지의 말씀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상징적인 해석이 요청되는 데, 왕이신 야웨께서 행차하시기에 길을 닦으라는 이런 요청은 문자적인 의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 4복음서 기자들은 하나같이 이 말씀은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구자 세례 요한의 죄의 회개를 위한 세례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했다 (마 3, 막 1, 눅 3, 요 1장). 이런 신약의 구약 예언해석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이나 이스라엘 회복 예언들을 해석하는 표준을 제공해 준다.
그렇게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세대주의 해석법은 흥미롭게도 성경의 영감을 받은 신약 기자들의 이런 구약 예언 해석을 구약 예언들을 해석하는 표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라고 의아하게 생각되겠지만,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인 달라스나 무디, 탈봇 신학교 교수들이나 그들의 저서를 보면, 저들은 (진보 세대주의자들은 제외) 신약 기자들의 구약 해석은 구약 예언 해석들의 표준이고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나온 (영감을 받았을 망정) 한 적용에 불과하고, 구약 예언들은 어디까지나 구약 본문 자체의 문맥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들 한다. 달리 말해서, 신약 기자들의 구약 예언 해석과 구약 예언들을 기록한 구약 선지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의미, 곧 구약 저자들의 의도한 의미는 (authorial meaning) 서로 다르다는 것이고, 구약 문맥에서의 본문의 의미를 최고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신약 기자들의 구약 예언 해석은 하나의 적용일 뿐, 본문에 대한 해석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본문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딱 하나 뿐이며, 여러 적용들이 있다고 한다.
세대주의 신학자 존 마틴의 사 40:3-5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겠다:
사 40:3-5 한 목소리가 (아마 이사야의 것, 6절의 목소리와 다르다) 백성에게 주의 길과 영광을 예비하라고 외친다. . . 각 복음서 기자는 사 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켰다 (마 3:1-4; 막 1:1-4; 눅 1:76-78; 요 1:23).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광야의 선지자였다. 요한은 주님을 위해 대로를 광야에 만들었던 선지자였다 (cf. 마 3:3). 하지만, 여기 이사야서에서 전체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 광야에 있었다. 각 자는 주님과 그의 영광의 나타남을 영적으로 준비해야 했었다.
골짜기들을 돋우고 산들을 깍아 내리는 일은 과장법적 표현으로 왕이 어떤 지역을 행차 방문할 때 노무자들이 길들을 닦았던 일을 지시한다. 오늘날로 하면 “붉은 카펫을 깔다”를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당대에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이스라엘에 오셔서 통치하도록 길을 평평하게 만들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는 모든 선지자들이 강조하는 바인데, 이스라엘이 윤리적으로 의로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종국적으로 이스라엘은 주의 영광이 나타날 때 (사 40:5) 영적으로 평탄케 만들어 질 것이다. 이사야는 주께서 자기 영광 중에 나타나실, 즉, 그분에게 특이한 영광이 모든 곳에 드러날 때인 천년왕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고난 당할 것이며, 또한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했지만, 그는 고난과 영광 사이에 끼일 긴 시간적 중간기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긴 했어도 (요 1:14),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아직 보지는 아니했다. 다만 그들은 천년 왕국에서 그의 영광을 볼 것이다. 이런 오는 영광은 확실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cf. 사 1:20; 58:14). 주의 말씀은 확실하고 깨어질 수가 없다 (John Martin, “Isaiah,” in J. F. Walvoord, R. B. Zuck, & Dallas Theological Seminary eds.,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Wheaton, IL: Victor Books, 1983-1985), 1:1091-1092.
이런 해석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자신들의 가치관, 세계관, 해석 입장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자기네 만의 원리를 따라 성경을 자기들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의 고리타분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느낌을 갖는다. "아, 이렇게도 이상하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같이 이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했다. 누가를 보면,
눅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사 40:3-5를 인용했다. 마태와 마가는 사 40:3-4만 이용했다면,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오직 누가만 사 40:5을 인용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그런데 누가는 사 40:5을 인용하되, 70인역의 사 40:5의 중간 부분만 인용했다. 70인역 사 40:5" "주의 영광이 나타나리라, 그리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왜냐하면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 (καὶ ὀφθήσεται ἡ δόξα κυρίου καὶ ὄψεται πᾶσα σὰρξ τὸ σω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 ὅτι κύριος ἐλάλησεν).
사 40:5에서 맛소라 사본이 (히브리어 사본)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했다면, 70인역은 약간 달리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번역했다. 맛소라 사본에서 "모든 육체가 보리라"고 했지만, 목적어는 생략되었다. 반면 70인역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보충해서 번역했다. 사 40:5의 맛소라 사본을 따른다면,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보리라"가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출 15:6에서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했다면, (주의) 영광// 원수를 부수다 (원수를 파한 일)의 병행이 성립된다. 주의 영광은 그분의 임재 때 동반되는 그 빛나는 영광의 광채를 생각하겠지만, 출 15:6에서처럼 홍해에 바로의 병거부대를 몰살시키는 구체적인 사건을 지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 52:10을 참조해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번역한 70인역의 번역은 문맥에서 아주 적절하고 누가의 70인역 인용 역시 예수님 당대의 상황에 비추어 아주 적절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을 통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가 시행됨으로 마음에 대로가 닦인 탓에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메시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기 (체험했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신학자 존 마틴은 사 40:3-5에서 엉뚱하게도 "천년 왕국"을 거론했다. 이사야에게 천년왕국은 없었다! 만약 세대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저자의 한 가지 의도/ 의미에 집착한다면, 천년왕국 사고가 없었던 그 시대에 어찌 이사야가 그런 의미를 자기 예언에서 선포할 수 있었을까? 세대주의 신학의 자기 모순적 해석이다.
사 40:3-5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예비한 길을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그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이는 사 40:3-5이 문맥상 바벨론 추방생활로부터의 고토로의 귀환을 의미하지만 (사 40:1-2 참조) 그것은 겉옷에 불과하고 그 속 알맹이는 실상 예수님을 통한 (복음 전파를 통한) 죄로부터 하나님께로의 귀환을 의미했다.
이런 해석이 신약 복음서 기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예언에 대해 가했던 해석이라면 우리는 그 해석의 원리를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라 부른다. 분명 구약 선지자들은 자기 당대인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당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관례들이나 지리적 배경을 가지고 장래사를 예언하였다. 그래서 저들의 예언은 겉보기에는 유대적이고 구약적이며 그 지리적 요소 역시 구약적이고 유대적이다. 하지만, 그 예언들이 성취되는 시대나 상황은 원래 예언의 그것들과 상당히 다르다. 예언과 그 성취 사이에는 이렇게 많은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을 메꾸어 주는 방법은 신약 기자들이 구약 예언들을 해석한 방식을 따라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다.
신약 기자들의 구약 예언 해석을 따른다면, 구약 모든 예언들은 (메시아 예언이건 이스라엘 회복 예언이건; 기본적으로 메시아가 올 때 이스라엘의 회복은 일어난다고 선지자들이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되기 시작해서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성취되고 재림 때에는 완성된다. 유대인들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은 재림 직전에 살 유대인들이 대거 예수님을 믿기로 집단 개종함으로 이루어질 일이 절대 아니고, 더구나 이방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저 좁은 중동의 팔레스틴 지역으로 귀환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고, 오히려 신약 기자들이 해석했던 방식을 따르자면, 예수님의 초림과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이킴을 지시한다.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
(아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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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출애굽사건
작성일: 7월 4, 2012 글쓴이: admin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속속히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있다.놀랍게도 그 숫자가
해를 거듭할 수록 기하급수 적으로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메시아닉 쥬)이 늘어나고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 이 현상은 성경적인 예언의 성취이며 장차 오실 예수 재림의 징표이기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것을‘제2의 출애굽(저자:스티브 라이틀–
EEF의 창시자)’이란 책에서는 제2의 출애굽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유대인이 핵심Key가 아니다. 알리아 가 핵심Key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또한 핵심Key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하신 말씀이 핵심
Key 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사역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첫 구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여러가지의 사역이 있겠지만 그 중에 이스라엘의 회복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이는 사역이다.
우리교회를 비롯한 유대인 귀환에 눈이 열린 교회와 협력 기관들은 때론 몰이해와도 싸워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과 열방의 부흥을 준비하는 사역은 사탄이 집요하게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 사역의 중요성을 말씀을 통하여 다시한번 각인 시켜야 겠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15:12-16)
아브람에게 예언하신 이 말씀은 요셉의 때에 이집트로 내려간 자손들을 통해, 그리고 모세의 때에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자손들을 통해 성취가 된다.
역사적으로 칠십 명이 내려갔다가 사백 년 만에 이백만 명이 되어 출애굽을 이루고,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땅으로 돌아오면서 미리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신 하나님을 증거해 준다.
또한 예레미야 29장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장면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29:10)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칠십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때에 끌려 가고 바사 왕 고레스를 거쳐 다리오,아닥사스다 왕의 때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옴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은 역사적으로 성취된다.
그런데 성경은 ‘출애굽 사건’이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과는 다른 또 하나의 대형사건을 말씀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소위 대선지서의 주요 선지자들뿐 아니라 소선지서에서도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을 비교해 본다면 년수나 규모를 떠나서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인정하는 바 대로 출애굽이 훨씬 더 큰 사건이다.
400년 대70년,2백만 명 대 불과4-5만이며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등의 지도자도 존경받는 인도자들이지만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 비견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을 노래하며 ‘출애굽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위대한 ‘출애굽’ 보다 더 큰 한 사건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렘23:7-8)
이 놀라운 예언에는 출애굽의 4백 년이나, 바벨론 포로 귀환의 70년과 같은 년수가 지정되어 있지 않다. 단지 ‘날이 이르리니’ 라고 말씀한다. 지역도 이집트나, 바벨론처럼 어느 한 지역이 아니며, 방향도 전혀 다른 곳, 곧 ‘북방 땅’과 ‘모든 쫓겨 났던 나라’를 말씀하신다. 이집트는 남서편이며 바벨론은 동편이다.
출애굽보다 ‘더 큰’ 사건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맹세’에 관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맹세는 늘 더 큰 존재, 혹은 가장 큰 존재를 걸고 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없으므로 ‘자기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신다’고 히브리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존재가 행하신 가장 큰 일은 맹세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위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이상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맹세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으로 맹세하게 된다고 한다. 즉, 이 말씀에서 예언하는 사건은 ‘출애굽’보다 더 큰 사건인 것이며 이는 동일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역사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가장 큰 사건이 이제 더 이상 ‘출애굽’이 아니라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해 내신 것’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사43:5-6)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사49:11-13)
이 말씀들은 어느 특정한 한 지역이나 한 나라가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 곧 열방 혹은 열국을 지칭하고 있어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는 특정한 한 지역에서의 귀환을 예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시님 땅’은 현재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에서 돌아온다는 예언은 매우 특이하다.
이 사건이 무엇일까?
‘출애굽’보다 더 큰 사건이며,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어나며, 때도 한정되어 있지 않은 이 사건은 무엇을 예언한 것일까? 그리고 이 사건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바로 이 사건이 ‘알리야’ 혹은 ‘제2의 출애굽’ 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알리야’라는 이 사건은 1880년대부터 진행되어 1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전 세계 동서남북으로부터 돌아왔고,
돌아온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낳은 유대인을 포함한 것인데, 아직도 천 만 여명의 유대인이 지구촌 곳곳에 남아 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매달 수백, 수천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있으니 그 규모와 기간, 범위 등에 있어 바벨론 포로 귀환은 말할 것도 없고 출애굽보다 훨씬 더 큰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더욱 놀랍고 경이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 사건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또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눈 앞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는 예레미야31장 8절 말씀은 이스라엘의 북쪽인 구소련지역에서 귀환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들 중에는 맹인도 있었고, 다리를 절고 휠체어에 앉아 돌아오는 유대인, 아이를 잉태한 여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귀환하는 배 안에서 아이를 해산한 여인도 있어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실제로 이루어지는 지 증거해 주었다.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하신다”는 이사야 43장 말씀은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을 막고 붙잡고 있던 북방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렸고,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구소련지역으로부터 150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알리야’하는 것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 이는 ‘큰 무리를 이루어 울며 돌아온다’는 예레미야 31장 말씀의 성취를 보여준다. 구소련지역에는 아직도 90만 전후의 유대인이 남아 있다. 구소련지역에서 귀환하는 유대인들은 요즈음 모스크바 공항을 이용해서 돌아오고 있는데 모스크바는 이스라엘의 정북방에 위치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2천 수백 년이 지나도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 눈 앞에 현실이 되고 있으니 들여다볼수록 소름 돋는 예언성취의 현장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이 알리아 사건은 북방뿐 아니라 예멘, 이디오피아, 남아공,인도,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헝가리, 체코,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전 세계 사방에서 진행되고 있다.
신명기 30장에 말씀하시기를,“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하셨는데, 저 북극 인근 에스키모 축치 족 가운데 살던 유대인까지 찾아내도록 인도하셔서 고토 이스라엘로 다시 모으신 일도 보고되었다. 인도에서는 므낫세 지파의 후손으로 알려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더욱 놀랍고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알리야의 수단이나 섬김이들까지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사60:8-9)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비행기가 있었을리 만무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먼 곳으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모습을 구름이나 비둘기가 날아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등장하는 다시스의 배에 대한 예언의 말씀처럼 알리야 사역은 비행기와 배를 이용하여 유대인들의 이주를 도왔다. 우크라이나 오뎃사에서 이스라엘 하이파까지의 항로를 통해 십수만의 구소련지역 유대인들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뭇 나라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치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사49:22)
하나님께서 손짓하여 부르시며 기호를 세워 부르시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뭇 나라, 곧 열방이며 여러 민족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열방 민족들 가운데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바로 주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열방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알리야’ 사건의 동역자요 이스라엘 섬김이들로 불러 이스라엘의 아들들, 딸들을 품에 안고 어깨에 메듯 사랑으로 섬기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따라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단체나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험한 지형이나, 어려운 여건 중에 숨어사는 유대인들까지도 발로 찾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알리야를 돕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도록 세세하며 그 말씀들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이루어진다는 불멸의 진리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는 것일까?
동서남북 사방, 땅 끝, 하늘 가에까지 흩어 쫓아내신 백성을 오늘날 이 시대에 왜 다시 모아 들이시는 것일까?
그것도 시온주의자들이 긍정적으로 논의했던 아프리카 우간다나 유럽의 어느 나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곳으로 다시 모아 들이시는 그분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또한 수천 년 전에 미리 말씀하신 일들이 5백 년 전도 아니고 5백 년 후도 아닌 바로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우리 눈 앞에서 성취되고 있는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분명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6:20-23)
이스라엘백성이고토이스라엘로다시모여드는 ‘알리야’ 사건은다름아닌우리하나님의명예가걸린일이다.
찬송 받으시기 합당한 이름,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 홀로 합당하신 그 이름이, 땅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하는 열국 가운데서 더불어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흩어진 백성조차 그 영화로우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다.
조롱당한 그 이름의 영광을 열국 가운데서 회복하시며, 더럽혀진 그 이름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내셔서 알게 하시는 사건이 ‘알리야’ 사건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과연 그렇다!
2천 년, 3천 년이 지나도 부르심을 바꾸지 않으시고 인자를 거두지 않으시는하나님, 반역하고 패역한 백성들을 엄히 징계하셨어도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않으시는 하나님, 수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한 번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온 땅의 하나님을 세계 열방 모든 민족이 목격하고 놀라워하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 보다 더 큰 ‘알리야’사건이다.
‘출애굽’ 때는 이집트를 비롯 중근동 여러 나라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목격했다면 이제 ‘알리야’를 통해서는 동서남북 사방 모든 나라들이 위대하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과 열심을 목격하게 되었다.
과거 이집트에서 4백 년을 지내며 남자 아이 학살, 종살이, 학대에 시달린 후 ‘출애굽’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지난 2천 년의 세월 동안 이곳 저곳에서 증오와 학대를 경험하고 홀로코스트 대학살이라는 고통의 바다를 지난 후 ‘알리야’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촌은 위 에스겔의 예언이 오랜 세월 후에 성취되는 현장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무대이다.
쫓겨난 지 2천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바로 그 백성이 바로 그 땅으로 모여드는 역사의 기적!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을 만방에 알리는 사건 알리야!
아무도 그 때와 시기를 내다볼 수 없었던, 아니 그 가능성조차 포기했던 사건이 성경의 예언을 따라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마24,눅21)
이 흐름속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의미하는바를 아는것은 때를 분별하는 시계를 보는 것이다.
이 시대는 자신들의 관념이나 지식을 내려놓고 성경을 다시한번 볼 수있는 겸손함이 가장 필요한 시점인것 같다. 주님은그런 겸손한 자의 무릎을 통하여 성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참고: ‘알리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올라가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이다.
예전 성전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3대 절기가 되면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처럼, 성전 파괴 이후 2천년 가까운 방랑의 세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베샤나 하바 비루샬라임–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인사말을 외치며 고토로의 귀환을 꿈 꿔왔다. 결국 이 꿈은 현실이 되어19세기 말부터 조상들의 땅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고향 땅으로의 귀환운동을 일컬어 ‘알리야’라고 부른다.
참고문헌: ‘제2의 출애굽’( 스티브 라이틀 저), IBS 성경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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