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을 알지 못하고 마치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매듯 공허한 마음으로 무엇인가 좋은 것이 어디 없나 하고 헤매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세에 (신약 시대 전체가 말세이긴 해도) 사람들의 특징들 중에서 첫째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 다음이 돈을 사랑한다고 했다 (딤후 3:2). 오늘날 정황에 얼마나 정확한 예언적 말씀인지. 사람들은 "나" 밖에 모른다. 어머니도 이제 이전의 그 헌신적 자식 사랑의 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위해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아 하고 '내'가 우선이니 자녀 교육 헌신 희생을 감수할 자신이 없어 한다. '내'가 우선 누리고 볼 일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돈"은 얼마나 매력적이고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가? 아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사랑에 있다. 사람의 가치와 존귀함은 나를 지으시고 죄에서 구속해 주시고 영생을 주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에 (예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것인가? 그것이 인간의 가치이며 인간의 존귀이며 인간의 만족이며 행복이라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첫째로 말씀 순종이 하나님 사랑이다
성경에서 "사랑 +계명, 명령" 그리고 "경외 + 계명, 명령" 이런 단어 조합들을 검색해 보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10)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신 11:1)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신 11:1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신 11:22)
또 네가 나의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신 19:9)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6)
경외 + 계명, 명령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신 6:2)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 8:6)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신 13:4)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니라마는(삼상 12: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런 말씀들은 야웨를 사랑하라 + 계명/ 명령을 지키라 처럼, 두 부분이 서로 등위절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그 사고나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계명/ 명령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계명/ 명령/ 말씀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편이다. 요일 5: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라고 (αὕτη γάρ ἐστιν ἡ ἀγάπη τοῦ θεοῦ, ἵνα τὰς ἐντολὰς αὐτοῦ τηρῶμεν) 말씀한 것과 같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나? 그분이 주신 말씀을 순종하고 사랑함이 곧 그분을 순종하고 사랑함이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인생의 본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경배) 일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방편은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는 일이다. 신구약 전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이다.
둘째로,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니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전파해야 한다
언젠가 시카고에서 목회할 때 성도들과 같이 사과 농장에 사과 따러 갔던 적이 기억난다. 사과 나무에 올라가 직접 따기도 하고 자루에 가득 담아서 나오면서 정문에서 저울에 달아 계산을 하고 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보니 아주 거대한 제철소가 고철로 화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이전에 세계 최대의 제철소였다고 성도들이 알려 주었다. 그런데 보니 가동을 오래동안 아니한 것인지 고물이 다 되어 녹물이 덮고 있었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것들은 저렇게 시절이 지나면 한물이 가고 만다. 세계 최고 석학들이 집필하는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타니카의 내용들도 1년이고 2년 지나면 벌써 그 담긴 사상이 고물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계속 새롭게 수정되고 발전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이 발전해도 변함이 없이 견뎌낸다. 왜냐하면 만물의 창조주 주관자이신 전지하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잠시 후에 고철이 되고 고물이 될 세상 다양한 지식을 얻는 데 투자하는 시간보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고 전파하는 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진리이고 영생을 주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이니 시대가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함은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만큼 순종할 이유도 있다. 말씀 순종은 하나님 사랑이기에 그분의 사랑을 불러오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분 말씀 지키고자 주기철 목사는 일본 귀신들 모신 신사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손양원 목사도 그렇다. 신사 앞에서 그저 고개 한 번 숙이면 될 일을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을 지키고자 자기 두 아들 동신 동인 군을 총살시킨 공산사상에 세뇌당하여 철없이 날 뛰었던 안재선을 국군이 총살시키러 가는 현장에서 건져내어 양아들로 삼았고 집에서 먹이고 기르고 성경학교에 보내었다. 그 안재선 아들이 안경선 목사이고 그는 손양원의 손자가 되는 셈이다.
지금 당장 손양원 목사 후예들이 현세에 복받았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 순종은 하나님의 주목을 받았고 끌었고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영원한 모델인 것이다. 그것 하나만로도 그는 복받은 삶을 사셨다! 만인의 모델이 되셨으면 그것 하나로 족하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시 119:43, 160, 요 17:17, 고후 6:7, 엡 1:13, 골 1:5, 딤후 2:15, 약 1:18) 영원하다 (사 40:8, 마 5:17-19).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고, 삶의 전 영역에서 말씀이 현실화되도록 힘쓰야 한다. 유대인들이 '테필린'이란 말씀 상자를 (Phylactery) 이마에나 우편 손목에 매거나 문에 '메주자'란 말씀 상자를 달아 두는 것은 신 6:8-9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이 부적처럼 악령에게서 지켜주고 재앙을 막아준다고 미신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말씀을 상기시키는 일은 사실일 것이다. 어쨌거나 영원 불변의 진리인 말씀을 우리는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고, 항상 가르쳐야 한다. 유대인들이 자기네 메시아 예수님은 배척하면서도 구약 율법을 가지고 토론을 쉬지 않고 하면서 "왜?" 라고 질문하고 답하고 반복하니 논리 사고가 발달해서 노벨상을 휩쓸고, 미국 하바드, 프린스턴, 예일 등 명문대 2, 30퍼센트를 점한다고 한다. 그런 현실적 탁월함이 영생을 의미하지는 않으나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고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두뇌를 명석하게 해 주고 아주 의미심장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말씀을 그렇게 묵상하고 토론한다면 현세와 내세에 복을 다 얻으리라. 공자의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고 그대로 실천하려 했던 유교 사회였던 조선이나 명나라는 허례허식과 탁상공론에 흐르고 외식자를 생산하고 제사 중심의 죽은 자 문화로 흘러 결국 서양 기독교 문명에 수치와 굴복을 당하고 만다. 하나님 말씀은 무슨 사상이냐? 창조와 부활, 재림 심판 사상이고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섬기고 그분의 뜻대로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고 짓밟는 진취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사상이다. 이런 말씀으로 무장한 나라가 부강하고, 능력있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성하고 명랑하고 아름답다. 잘못된 사상이 지배하면 여성이 운전도 못하고, 남성에게 얼굴까지 숨기도록 머리와 얼굴을 일년 열두달 감싸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상이 잘못되면 먹을 고기도 먹지 못하고 누려야 할 인생도 염세주의로 흘러 거부하게 되고 만다.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함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모르는 것이다.
셋째로, 말씀 순종에는 축복이 따른다
신 28장은 언약의 상벌 규정에 해당되는데, 특히 1-14절에서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이런 저런 만 가지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일은 의무이고 당연지사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아니하며, 꾸어주고 꾸지 아니하며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이니 그 법을 지킨다고 이렇게 축복을 주리라고 약속하는 법이나 헌법은 세상 어디에도 달리 없고, 더구나 축복을 준다고 약속을 해서 그것을 이룰 능력이 있는 나라나 지도자도 세상에 다시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면 만사 형통의 축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신다.
믿는 자들이 건강과 현세에서도 형통하게 살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영생 복락을 저 영원 세상에서만 누리지 않고 여기서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죄와 사단의 세력을 짓밟아 버리고 물질을 누리고 베풀고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이 지상 전부에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왜 돈을 불신자가 지배하도록 두어야 하겠는가? 성도들이 물권 영권 인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도로 사용하고 모든 물질은 당연히 전도와 선교, 교회 섬김 (예배) 교육 (미래 세대를 말씀으로 양육), 사회 악 제거하는 일에 풍성하게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에 우리 각 가정에, 우리 개개인에게 이런 말씀 순종과 그에 따른 형통과 축복의 삶이 임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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