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의 감독들 중에서 유명한 이가 폴리갑 감독이다 (주후 155년 사망). 그는 믿음을 지키고 장하게 순교하였다. 말 한 마디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건만 폴리갑은 "86년간 내가 주님을 섬겼지만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배반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분을 배반하리요?" 라고 답하고 죽음을 택했다.
요한 계시록은 대개 주후 90년대 로마의 도미치안 황제 시대에 (89-96년) 기록되었다고 학자들이 추정한다. 그렇지만, 네로 황제 시대에 (54-68년) 저술되었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K. L. Gentry, Jr., Before Jerusalem Fell, 1988참조). 왜냐하면 도미치안 시대 박해보다 네로 황제 시대의 것이 더 심각했고 조직적이었고 또한 후대의 평가도 네로를 최고의 악행자로 매도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저작 연대에 대한 더욱 더 중요한 증거는 (신약 다른 책들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이지만) 어디서도 주후 70년 예루살렘 파멸과 그 성전 멸망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신약의 어떤 책의 저자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멸을 목도하거나 체험 하였어도 그것을 언급하지 아니했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성전 파멸이야말로 어쩌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함께 구원 역사에서 아주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성전 파멸은 구약 신앙 생활의 초점이었고 토대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었던가? (John A. T. Robinson, Redating the NT, 1976참조)
여하간 폴리갑 감독은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저술한 때로부터 (주후 65-67년?) 약 80년 정도 이후 사람이다. 폴리갑 감독은 특별히 유대인들의 간계로 잡혀 화형을 당했는데, 그 이전에도 서머나 거주 유대인들이 교회 성도들을 많이 핍박했던 것이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핍박의 환란 때문에 서머나 성도들은 물질적 궁핍에 처해졌고 곤고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부요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자칭 유대인이지 실상은 사단의 회당에 불과하였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기독교를 핍박하는 편에 서 있다. 유대인들 중 남은 자는 유대교에서 빠져나와 교회에 속하여 이방인 성도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거나 자기들의 교회를 구성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 그런데 혹자는 저 중동의 유대인들이 곧 이스라엘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릇 판단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백성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 여기서 보듯 그들은 사단의 회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는 유대인이건 누구건 상관없이 모두 사단에 속한다. 중간지대, 기독교에 근접하는 그런 중간지대는 없다. 예수님이냐? 사단이냐? 둘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주님 재림 즈음에 집단적으로 개종하여 믿으리라는 시나리오나 그들이 개종하면 지상에 다윗 왕국이 재건되고 유대인이 제1등 국민이 되고 이방인은 그들의 종이 된다는 사고는 모두 비 성경적이다.
성경에서 특히 유대인들의 위치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리를 따라 그들을 보아야 한다:
전체를 위한 일부의 선택 (pars pro toto) – 이스라엘 선택의 목적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 –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들
남은 자의 원리
그리스도께 속함의 원리
이제 하나 하나 살펴보자.
1) 이스라엘은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 선택된 선교사였다 (창 12:3). 만민이 그들을 통해 복을 (구원) 받아야 했다. 저들은 먼저 부름받은 선교사였지 저들만 사랑해서 편애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2) 이스라엘은 구약의 견지에서 미래에 (메시아 시대에) 고국으로 귀환하고 성소를 세우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 제사를 드리고 다윗 후손이 왕이 되리라 예언되었다:
렘 33:16 그 날에 (메시아 시대에 =신약시대)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18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주전 600년 어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미래를 예고한 것인데, 다윗 왕국의 재건과 성전 제사의 재개, 예루살렘에서의 평안한 삶이 약속되었다. 이를 근거로 주후 1948년 독립을 선포한 이스라엘이 이런 예언을 성취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구약 예언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의 유사한 다른 모든 예언들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약 예언들은 그 당대인들이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차원에서 그들의 관례와 그들의 지리적 요소들로 미래사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즉 예언은 시대적 제약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신약에서 강조하듯 예수님 안에서 구약 예언들이 전부 신약시대에 이루어진다고 이해해야 한다. 방금 인용한 그 예언은 교회에서 성취되는 도중에 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십자가에서 자기 흠 없으신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구약 제사는 완성되었고 성취되었다. 이제 제사는 다시 없다. 그렇다면 레위 제사장들이 지속되며 번제 소제가 지속되리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성도는 오늘날 자기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롬 12:1).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십자가이다 (히 13:10). 우리가 드려야 할 제물은 찬미와 (히 13:15), 구제 선행 (히 13:16), 그리고 기도 (시 141:1-2) 등도 포함된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레위인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벧전 2:9, 계 5:11, 20:4-6).
그렇다면 다윗 후손이 왕이 되리라는 것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다윗 후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왕이 됨으로 성취된다. 우리는 왕이요 제사장이다 (벧전 2:9, 엡 2:5-6, 계 1:6, 2:26-27, 3:21, 5:11, 20:4-6). 그렇다면 다윗 왕국의 재건은 어떤가? 그것은 행 15:16-17에서 보듯, 암 9:11의 다윗 왕국 재건 예언은 이미 주님의 초림 때에 성취되어 그 왕국이 재건되었고 그 안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고 있다 (교회가 그 다윗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의 몸이다. 거기에 성령님이 임재하여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고전 3:16, 6:19, 고후 6:16, 엡 2:20-21). 더 이상 건물 성전은 필요 없다. 제3 성전? 그것이 우리 몸이다. 우리 성도들의 모임이 제3 성전이다. 이미 세워졌고 세워지고 있다.
3) 남은 자의 원리
롬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조망하면서 구약부터 언제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서 남은 자를 택하여 구원하신다고 남은 자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재림 직전에 집단 개종한다는 사고는 그런 남은 자의 원리에 어긋난다. 재림 직전에 살 유대인들에게 그런 축복을 베풀 하등 이유가 없다.
4) 그리스도께 속함의 원리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제 어떤 혈통으로나 육신의 가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 속하느냐? 에 따라 백성됨이 결정되는 시대이다. 이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속할 때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모든 구약 약속 예언들은 이제 따라서 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에게 속한다.
이런 조건들에 비추어 본다면 유대인들 중에서 택함 받은 남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섬길 때 그들이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한다. 이들에게는 둘째 사망 곧 불못 지옥 형벌이 없다. 첫째 사망은 육적 사망을 암시하겠다. 반면 첫째 부활은 영적 부활 곧 중생을 의미하고 (계 20:4-6) 둘째 부활은 육체 부활, 주님 재림 때에 일어날 그 육체 부활을 지시한다. 여하간 참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님으로 거듭난 자로 그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 이는 결국 생명 곧 영생이 주어짐으로 불못 지옥에 던져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지금 우리 성도가 누릴 수 있고 영원히 누려야 할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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