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사고를 열심히 전파한다. 그런 사고를 전파했던 이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한다고 다짐하고 여러 교단들로부터 이단 해제를 받았음에도 그것은 형식적 모습이고 실제로 그런 가르침을 중단했다고 보이지 않고,[1] 더구나 그런 가르침을 펴는 이들은 교단들이 억지로 바른 주장을 자갈 먹였다고 불만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사고는 조상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사고와 연결되는데, 이런 사고는 우리 성도가 당하는 어려움은 죄 때문이라는 사고와 (이것은 그릇된 생각이 아니다) 그 죄들에는 나의 죄만 아니라 내 조상들의 죄까지 들어 있다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김씨이면 자기 무슨 김씨의 1대조까지 죄를 회개하여야 하고 압해 정씨라면 압해 정씨 1대까지 지은 죄를 상상해 가면서 (특히 우상숭배) 회개에 힘을 쏟는다고 한다.[2] 이것만 있는가?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외가집도 있다. 외가는 어머니로부터 30대까지 십계명 어긴 죄를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고 한다.
이들이 조상 죄까지 내가 안고 회개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의 근거는 대개 구약에서 나타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세력을 무장 해제하시고 (골 2:14-15) 우리의 죄악 목록을 모두 도말시켜 버리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저들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가 진정 성령님으로 거듭났다면 그의 모든 죄가, 그것이 조상의 죄와 연관된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제거되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된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에서 혹은 그 저주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해방된 것이다 (벧전 1:18, 롬 8:1-3). 구속 역사에서 구약적 사고나 관례가 신약에서 단절되거나 변화된 경우들이 적지 않음에도 조상 죄 운운하는 이들은 이런 신 구약 간의 연속성과 단절성에 대해서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구약을 근거로 조상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적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다. 아브라함의 거짓말 죄성이 아들에게 전가되어 동일한 거짓말을 이삭도 한다거나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거짓말 했더니 그 후손 이삭도 거짓말 하고, 야곱도 속이고, 시므온과 레위도 세겜 사람들을 속이는 등 후손으로 대대로 전가되어 내려갔다 한다.[3] 아말렉 사람들이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쳤는데, 그들의 죄악을 500년이 지난 후에 사울 왕을 통해 처벌하셨다면, 예수를 믿고 우리가 교회를 다니더라도 조상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않느냐? 는 논리이다 (53).
사울 왕이 무죄한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죄로 다윗 시대에 3년 연속 기근이 임한 사건도 유사하고 (54),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최전선에 보내어 전사하게 한 살인죄 등 때문에 다윗이 밧세바에게 난 아이가 죽고, 암논이 죽고 압살롬이 죽고 아도니야가 죽고 4명이 죽었다는 사실도 유사하다고 한다 (55-56). 이런 사건들과 함께 출 20:5, 레 26:39-40, 사 65:6-7, 렘 16:10-11, 눅 11:50-51 등의 구절들은 조상의 죄를 후손이 담당해야 하고 후손이 조상의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들이 된다. 그리고 레위는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고 할 수 있다는 히 7:9-10도 근거로 활용된다 (62).
더 나아가 김석곤 목사는 아주 이단적인 사고인 김세윤 교수의 칭의 유보론에 동조해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대에서 최종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84이하). 최종 심판대에서 우리가 저울에 달려서 우리 행위가 의롭다고 판정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으로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천국에 합격 통지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데, 성경의 구원론이나 예정론을 뒤집어 버리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성령으로 거듭난 나라도 중간에 범죄하고 타락하면 결국 버림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알미니안주의, 행위 구원론에 다름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성령님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고 성령께서 내 영에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시는 것은 이들의 사고에서 그저 임시적 요소가 될 것이다. 이런 구원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이 아니라, 내 의로운 행위로 구원얻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오늘날 구원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보이는 온갖 불신앙적 행태들 때문이고 더구나 앞에 언급한 김석곤, 정동진 목사 등은 모두가 한양훈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죄를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영안이 열려서 영적 세계를 보고 성도들의 이름만 듣고도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진단 가능하고 전화로도 그러하다고 한다. 이들은 심지어 과거 수 백년 전의 사람이라도 영적 진단이 가능하다고 하고 성도들의 교회나 가정 생활 등도 진단하고 천국에 집에 있는지 여부도 진단 가능하다고 한다.
여하간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세력이 (저들은 악령을 이렇게 표현한다) 많이 그 안에서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세력을 축출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보니 죄의 문제에 아주 예민하다. 이것은 제대로 된 목회 사역이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조상의 죄까지 몽땅 내가 안고 회개해야 한다거나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해도 최종 심판대에서 최종적인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등 예수님을 통해 얻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행위 구원으로 대체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 가운데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악령이 그들 가운데 침입하여 역사한다는 주장이 옳다고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의 회개와 의로운 행실이 예수님이 이루신 온전한 구원까지 대체하기까지 나아가는 사고는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의 행위 구원론은 (그들은 결콘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겠지만) 그들이 조상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자세의 필연적 귀결이다.
조상의 죄를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릇되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 성도들은 엄연히 언약 체계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도는 모두가 한 언약 백성이었고 한 종족이었다. 하지만 신약 성도는 특히 우리 이방인 성도들은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서 믿음을 갖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약 성도들은 한 언약 백성으로서 조상과 후손은 말하자면 영적으로 일체감을 가졌고 한 덩어리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방인 신약 성도는 불신 조상과 믿는 내가 한 영적 일체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래서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생식기에) 있었을 때 아브라함을 통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진술은 이방인 신약 성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조상은 불신자였기에 우리와 영적 유대감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새 언약은 구언약 시대의 많은 것들과 단절되었다. 물론 연속성을 갖는 것들도 많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건은 절대적이고 최종적이고 단회적이다 (롬 8:1-3, 히 10:14, 벧전 1:18).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 불신 조상들의 죄가 나에게서 끊어져 버린다 (벧전 1:18).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예수님 안에서 나에게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망극한 구원의 은총이다. 그런데 조상의 죄 운운하는 이들은 이런 예수님이 가져다 주신 망극의 은혜를 하잖은 것으로 간주해 버리고 자신들의 회개와 의로운 행실로 최종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라는 판결을 받기 위해 몸부림칠 것을 요청한다. 물론 회개와 의로운 행실은 우리가 마땅히 일상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과 동행하기 위함이지, 최종 심판대에서 합격받기 위한 노력은 아니다. 나는 이미 의로운 자라 선포를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생필름을 보고 온전한 회개를 한 이들이 많다. 예컨대, "와이 미?"의 (Why Me? 왜 하필 나입니까?) 저자 김춘근 박사, 천국 지옥 간증의 박영문 장로, 구연순 집사, 십 수번의 전과자 이원록,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모"의 저자 설화영 사모 등등. 인생 필름이란 죄를 회개하는 중에 자신의 과거 죄악들이 눈 앞에 필름처럼 지나면서 그것들을 보고 통곡하며 철저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그 수단을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신 자신의 과거 행적을 보고 회개한 사람들인데 그들의 간증 중에 조상들의 죄까지 보여주시고 회개시켰다는 기록을 찾아 본 적이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 신약 성도들도 불신 조상의 죄까지 회개하길 원하신다면 왜 보여주시지 않으셨겠는가?
신약에는 조상의 죄까지 회개해야 한다는 암시나 언급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대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구원의 절대성과 완전성이 강조된다 (히 10:14, 벧전 1:18). 우리가 성령님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불신 조상들이 범한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 붙이자면, 주님은 최후 만찬 자리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적이 있다 (요 13장). 그 때 베드로는 황송해 하면서 주님에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자기 발을 씻도록 허락치 아니하였다. 그럴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 답한다. 이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의 논의에 의미심장하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 말씀은 성령님으로 거듭날 때 우리의 모든 죄가 목욕하듯 다 제거되었다는 선언이고, 동시에 발은 지속적으로 씻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지속적으로 씻어야 할 우리의 발은 말하자면 중생 체험 이후에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을 매일 회개를 통해서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1] 이윤호, 「가계적 속박의 사슬을 끊어라」 (2014). 책명을 살짝 바꾸었지만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2] 김석곤, 「회개」 (2018), 40이하; 정동진, 「회개, 더 깊은 영성으로」 (2015), 197이하.
[3] 김석곤, 「회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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