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게 (예배) 하시고
[한역: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인간 구속의 목적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출 3:12b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함이 목적: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예배하며)
이재철 목사가 기독교 방송에서 비대면 예배 곧 얼굴 마주 아니하고 각자 흩어져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가 제2 종교개혁이고 또한 그간 성전을 신성시하던 잘못된 풍조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1. '교회'란 말 자체가 '예배 모임'/ '예배 회중'을 의미한다
이재철 목사가 말한 '성전'이란 신약시대에 "교회당"이고 사실 건물 성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당을 신성시하는 목회자나 성도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에클레시아) 임하거나 각자 성도 몸 안에 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라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란 말은 구약 헬라어역에서 (70인역) "하나님의 회중"을 (예배 회중, 언약 백성)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다"/ "카할"의 번역어이다. 이 히브리어는 때로 "수나고게"란 (회당) 헬라어로도 번역되었다. 구약시대에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인들이 '에다'나 '카할'로 불렀던 그 예배 회중/ 총회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나 '수나고게'로 번역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주전 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 추방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이방 땅에서 끼리 끼리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어느 때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유대인들은 성인 남자 10인이 모이면 회당을 세울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고 회당을 세우고 성전을 대신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회당 예배의 전통은 아마도 제2 성전 어느 시기에 곧 주전 516년에 재건된 제2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 존속하던 주후 70년까지 기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회당"이란 말로 ("수나고게") 자신들의 예배 모임을 불렀기에, 유대교보다 훨씬 늦게 주후 30년 이후 시작된 기독교는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예배 모임을 구약 "회중"에 상응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란 말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수나고게"란 말은 이미 유대교에서 전용해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란 말은 (헬, 에클레시아) 어떤 건물이 아니라, 예배를 위한 회중이란 의미라는 것이다. 이 말은 '교회'란 단어 자체가 바로 '예배 모임'이란 의미이고, 이 예배 모임이 비대면 예배니 하면서 파괴된다면 그것은 벌써 "교회"일 수 없다는 뜻이다. 즉 "교회"는 단어 자체 부터가 "예배를 위한 회중/ 모임"을 의미하고 전제한다.
그런데 모임이 없이 흩어져 각자 처소에서 드리는 "비대면 예배"가 축복이니 제2 종교개혁이니 망발을 늘어 놓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고 성경적이지 못하다.
2. 성도는 (양 떼) 흩어지면 죽는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교회)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현실적으로, 성도들이 교회당에 모여 예배 드리지 못할 때, 어떤 참혹한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알아야 한다.
성도들을 성경은 '양'이라 부른다 (요 10장). 양은 혼자 살아 남을 수가 없는 동물이다.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절대로 생존할 수 없다. 이리/ 늑대/ 승냥이가 따로 떨어진 양을 공격해서 잡어 먹어 버리기 때문이다. 목자의 인도하에 양 떼는 함께 움직여야 한다.
성도를 향한 악령들의 공격과 궤계가 너무나 간교하고 치명적이며 집요하기 때문에 혼자 홀로 서기는 자멸의 원인이다.
또한 성도들 서로 간의 격려와 보살핌, 그리고 견제 내지 감독 감시가 사라질 때 성도는 방자하게 되고 허탄한 길로의 유혹에 너무 쉽게 빠져들어간다. 성도는 모여 기도하고 모여 예배 드리고 모여 교제할 때 장작불처럼 은혜와 거룩함으로 타오른다.
1년 여를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흩어진 중에 있는데 모르긴 몰라도 예배가 정상화되면 기독교인 통계는 10분지 1이하로 팍 감소할 것이 예상된다.
신앙이란 모임에서 활력과 생명을 찾는다. 비대면 예배는 신앙을 꺽어 버리고 신앙을 파괴시키는 최고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3. 가정 예배는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성도들이 교회당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각자 가정에서 가정 예배로 드리는 것이 차라리 더 축복이라 말하는 이재철 목사, 과연 그럴까?
성도들은 여러 나름대로의 환경에 처해 있다. 성도들 중에서 온 가족이 함께 믿고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많은 수의 성도들은 자기 가정에서 함께 가족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 가정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다. 설혹 온 가족이 믿는다 할지라도, 교회 예배를 대신하여 가정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교회 예배를 드리는 일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은 축복이지만, 교회 예배를 대신해서 가정 예배로 드림은 축복이 아니라,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다.
4.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선교사로 섬기는 한 제자가 비대면 예배가 성경적인 양 페이스북에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작성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주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셨는데 (요 4:21) 이 말씀은 어떤 특정 교회에서가 아니라 각자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원리를 말씀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주님 당시는 구원 역사에서 전환기였다. 즉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로 전환되는 시기였는데,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 한 성전에서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드려야 했었다. 구약 시대인 주전 5세기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지금 나블루스 인근) 자기네 성전을 세우고 자기들의 모세 오경을 만들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그것은 바벨론 추방 생활에서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인들이 제2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들도 함께 참여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족으로 간주하고 순전한 유대인 혈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이 성전에 너희가 간여할 바가 없다고 거절하면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네 성전을 건축해서 자기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주님 당대까지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조차 아니하고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런 상호간 적대감은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 나라가 갈라지는 처벌을 받은 이후 북왕국과 (이스라엘) 남왕국으로 (유대) 분열되면서 사실 시작된 지역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북왕국이 주전 721년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북왕국 수도 사마리아 성 거민들은 거의 대부분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하고, 대신 앗시리아 다른 지역 거민들을 다시 사마리아 성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반란의 싹을 근원적으로 잘라 버린 앗시리아의 강제 이주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왕하 17:23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미쳤더라
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사마리아 성에 강제 이주하게 된 이방인들은 남아 있던 하층민들하고 섞여 살면서 혼합 결혼하고 또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 신들도 섬기는 등 혼합 종교 양상을 띄었다:
왕하 17:28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이렇게 혈통도 잡종에, 신앙도 혼합종교였기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기 민족의 일부로 간주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무시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적대감과 증오심이 싹트게 되고 서로 원수지간으로 고착화 된 상태였다.
한 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서 (남쪽 지방 예루살렘) 북쪽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고자 할 때, 유대인들이 통과하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 통과하고자 하셨다 (요 4:3-4). 주님은 아마도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셨다고 판단된다.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성에 가신 주님은 우물가에서 물길러 나온 여인에게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하신다. 이에 그 여인이 주님의 영광을 접하고 (주님의 전지하심)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에 달려가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여 그 마을 사람들이 우물가로 주님을 만나고자 몰려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저들도 믿는 역사가 일어났었다.
주님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신 말씀은 여인의 말 곧 "우리 조상들은 (사마리아인들)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유대인들)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한 사마리아인의 갈등하는 마음에 해답을 주는 말씀이었다.
주님의 말씀은, 이제 구원 역사가 흘러 구약 시대처럼 한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 중심의 예배 시대가 도래할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 마 18:20의 말씀은 그것이 위치한 문맥을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그 말씀이 위치한 문맥은 교회적 상황을 다룬다. 곧 마 18:17에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나듯, "두 세 사람의 모임"은 각자가 흩어져 지금 우한 폐렴 시대처럼 드리는 가정 중심의 비대면 예배 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교회 예배" 모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교회나 성전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 예배 회중을 의미하고, 각 성도가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그 모임이 반드시 교회가 아니라, 가정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늘 우리가 모이는 그 교회 예배 모임을 주님은 염두에 두고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모임"을 언급하셨다.
나의 제자 선교사는 우한 폐렴 때문에 선교지에서 사역하지도 못하고 비자 문제로 문제도 많고 여러 상황에 처한 것을 짐작은 한다. 그런데 자신의 글이 얼마나 교회에 파괴적이고 반 기독교적인지 알지를 못하는 듯 하다.
5. 예배 모임을 범죄 사실로 기소장에 기록하는 사악한 정권
손현보 목사는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면서 정부의 어떤 조처에도 교회 예배를 중단하지 않고 6번의 고발을 당하고 이번 1월 말에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검찰이 예배를 드린 일을 범죄 사실로 기소장에 적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예배 모임 곧 교회가 예배 때문에 범죄자가 되어 기소당하는 한국 주사파 공산정권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간 한국 교회는 충직스럽게도 이 주사파 정권에 굽신거리며 예배까지 팽개치고 아부해 왔다.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굽히는 그것이 아부이지 무엇인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적 소행이다. 거기에 대해서 기독교인은 생명을 걸고라도 싸워야 하고, 예배 모임을 지켜야 한다. 물론 방역 수칙을 잘 지키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이란 나라와 민족은 교회를 통해 축복을 받았고 보호를 받았으며 앞으로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주사파 정권은 교회를 자신들의 연방제 통일을 향한 최대 장애물과 걸림돌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의 목표는 교회를 온전히 제압하고 제거하는 일이다. 소위 네오 맑시즘 혹 문화 마르크스주의에 물든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들은 기독교의 가치를 파괴함으로 공산화 혁명을 피 흘림이 없이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 파괴 곧 해체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기독교 가치관 중에서도 남녀 구분과 남녀 이성 결혼과 사랑, 남녀 결혼으로 생기는 가정, 동성애 정죄 (창조 질서의 파괴), 합법적인 권위에 대한 순종, 하나님 절대주의, 세계 복음화 등을 이 네오 맑시스트들은 해체시켜 버리고자 한다. 그래서 동성애를 옹호하고 차별 금지법을 만들고자 하고, 남녀 성구분도 해체시키고 학생과 선생의 구분도 제거하고자 한다. 서로 상호 상부 협조해야 할 남녀 혹은 남편과 부인, 학생과 선생 사이의 관계를 주종 계급 관계로 설정하고 계급 투쟁과 대립과 적대감을 부추기는 것이 사단이 하는 일이고, 그 사단적 행동을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광란적으로 행하는 중이다.
예배 모임은 교회 존립 근거이고 교회 생명 자체이다. 예배 모임을 방해하고 자기들 멋대로 통제 제압하려는 주사파 정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허탄하고 사악한 악행을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멸과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6. 우한 폐렴의 최고 확산자는 문재인 정권이다
대만 확진자 819 (사망자 7): 2천3백,6십4천,265명
한국 확진자 66,686 (사망자 1,046); 5천1백,7십8만,5백79명
대만에 비해 한국의 인구가 2.2배가 많다. 확진자는 대만에 비해 한국이 81배가 많고, 사망자는 149배가 많다. 인구 비율로 계산한다면, 대만에 비해 한국의 확진자는 37배가 높고, 사망자는 68배가 높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나? 그것은 문재인 한 사람 때문이다. 그것은 우한폐렴 초기 때 중공에 대한 입국을 금지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대만은 즉각 중공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그고 미리 방역 마스크 수요도 계산하여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 이에 비해 문재인은 전국 의사회에서 그렇게 거듭 거듭 권고함에도 전염병 진원지에 대한 차단 조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대만에 비해 이렇게 엄청나게 높은 확진자와 사망자 결과를 산출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문재인은 살인 범죄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중공에 대해 그렇게 운명 공동체니 하면서 감싸고 돌았는가?
이렇게 국민을 살인지경에 몰아넣고도 이제 와서 우한 폐렴을 방편으로 교회를 압살하고자 기회 있을 때마다 마치 교회가 이 전염병의 확산자인 양 오도하고, 무슨 K-방역 케이 방역하면서 선전 선동하는 것은 국민과 세계를 기만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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