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평신도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기도법"을 가르쳐 준다고 동영상을 올렸다. 65만번이나 독자들이 보았다고 한다. 잘못된 정보가 많이 퍼져 버린 것이다. 이 평신도는 잘못된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오해하게 만든 죄가 크다.
마 17:21에서 개역이나 개역 개정은 (없음)이라 처리했는데 킹제임스 역을 말씀 보존학회가 번역했다는 성경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τοῦτο δὲ τὸ γένος οὐκ ἐκπορεύεται εἰ μὴ ἐν προσευχῇ καὶ νηστείᾳ) 주님 말씀이 실려있다.
이 평신도 왈, 사단이가 역사해서 이 중요한 기도 비밀을 주님의 말씀을 싹 빼어서 사단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평신도의 주장은 킹제임스 번역본만 진짜 성경이고 오늘날 개역 성경은 가짜라는 주장이겠다.
성경은 원본이 있었지만 모두 오늘날에는 사라졌고, 원본을 복사한 (필사) 사본들이 많이 생겨났다. 원본은 성경 각책마다 있었겠지만, 필사본이 만들어지고 후대에 전해지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본들을 하나라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가치는 아마도 엄청날 것이다. 1947년 사해 인근 쿰란 동굴들에서 구약 사본들이 발굴되었는데, 주후 1008년에 필사된 사본이 가장 오래된 사본인 구약 성경의 필사본의 경우, 주전 2세기나 1세기에 필사된 사본들이 발굴됨에 따라 무려 1천년 이상 오래된 사본들을 갖게 된 셈이다. 그런데 그런 오랜 간격을 가졌으면서도 이전 사본들과 후대 사본들 사이의 차이는 아주 미미하였다. 전체 책이 온전히 보존되어 발굴된 이사야서의 사본들의 경우 쿰란 사본은 후대 사본과 비교해 볼 때 철자면에서 차이가 있는 정도이지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철자에서 차이라는 것은 소위 완전 독법과 불완전 독법의 차이이다. '토브'라는 히브리어가 있다면, '토브'라고 모음을 완전하게 표기한 완전 독법과 'ㅌ브'라고 모음을 생략한 불완전 독법으로 달리 표기될 수 있다. 이런 철자 상의 차이는 사실상 차이도 아니다.
여하간 앞서 그 평신도가 신약 마태 17:21에서 개역은 구절이 없다고 했는데 왜 킹제임스 역본은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을까? 이런 질문은 사본학이라는 신학이 연구 분야가 있는데 그 사본학에서 다루는 문제와 연관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연대기적으로 오래된 사본들이 후대사본들에 비해 더 가치가 있고 더 원본에 가깝다고 인정된다. 예컨대, 3, 4세기에 필사된 사본들은 8, 9세기에 필사된 사본들보다 더 원본에 가깝고 따라서 가치가 높다고 보는 것이다. 마 17:21의 사본들을 본다면, א*, B, Θ, 33, 579 와 같은 오래된 사본들은 21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보다 후대 사본들인 C, D, L, W, f1, f13, Byz, Lect 와 같은 후대 사본들은 21절에서 주님의 말씀, 이런 류는 (귀신)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갈 수가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담고 있다. 이 후대 사본들은 아마 막 9:29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정된다. 다시 말해 원래는 마 17:21에 없었지만, 후대 필사자들이 병행구절인 막 9:29에서 주님의 말씀을 가져와서 마태 17:21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금식"이란 말은 아마 필사자들이 자기들의 판단으로 삽입했을지도 모른다.
마 17:21에서 주님의 말씀이 없었는데도, 필사자들이 막 9:29에서 가져다가 삽입시켰다는 것은 과잉 충성의 예가 된다. 성경을 옹호한다고 너무 과도하게 나아 간 경우이다. 없으면 없는 그대로를 필사함이 더 신실한 자세요 충성일텐데, 후대 필사자들이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었어야 하는데 왜 빠졌냐? 하면서 막 9:29에서 가져다 삽입시킨 것은 주제 넘은 일이다.
우리는 성경을 기준으로 신앙생활한다.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는 많겠지만, 그래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이나 사고들에서 공감대를 이루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뿌리고 바르고 마십니다!" 뭐 이런 식으로 주님의 피를 강조하는 기도를 한다는 사실이다.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혹은 귀신을 축출할 때 "예수 피! 예수 피!" 하기도 한다. 이런 관례는 잘못된 것이다. 어떤 분이 그런 기도를 자주 하길래, 어디서 배웠나?/ 들었냐? 물으니, 설화영 원장이 그렇게 하더라고 했다. 목사 사모들 200여명이 모인 매주 모이는 집회에서 설 원장이 그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아 보이고 틀렸다고 하니, 나더러 "하나님이냐? 왜 그렇게 자기만 옳다고 하느냐?" 고 했다.
내 말은 성경적으로 귀신을 축사할 때나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귀신에게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떠나가라!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 내 말이 옳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뿌리고 바르고 마십니다! 이런 사고는 성경에 이질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라는 것은 (제물의 피) 구약에서 제단 주변에 뿌리고 혹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 기둥들과 인방에 바르기도 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이시니 (곧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제물이 되신 어린 양) 그의 피를 우리 몸에 바르고 뿌리고 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정당한 듯 보인다. 더 나아가 피를 마신다고 한다. 피를 마신다는 사고는 구약에서 금지된 사고인데, 요 6장에서는 주님께서
요 6:5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다.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 단 7:13의 반영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칭하는 자칭호이다. 주님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고 그분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말씀은 성찬식을 통해 우리가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우리 위해 버리신 그분의 고귀한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곧 그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한 마디로 그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곧 자기 생명을 (살 + 피 = 생명) 희생하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피를 마십니다!" 라고만 그치면 곤란하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십니다" 라고 해야 (만약 구지 해야 한다면) 그분의 고귀한 '생명' 희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자기 생명을 바쳐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살을 먹는다는 말씀은 뺴고 피를 마십니다! 라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건겅해 진다는 것인가? 그것은 성경적 사고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를 절대 마시지 말라! 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사고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므로 (레 17:11) 생명은 하나님께 속했으니 너희는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자살이 죄가 되고 지옥간다고 하는 이유도 이유야 어떻거나 자기 생명을 자기 것인 양 훼손시키는 살인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구약이나 신약에서 보혈을 마신다는 사고는 아주 성경적 사고와 어울릴 수 없다. 왜 주님의 피만 귀하게 보는가? 그분의 눈물도 귀하고 그분의 땀도 귀하고 그분의 털도 귀하고 모든 것이 귀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으니. 왜 유독 피를 다른 신체 부위와 구분해서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피를 흘려 구속하셨다거나 피로 죄를 씻음 받았다는 식의 표현 때문일 터인데, 피라는 것은 생명의 상징이기에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곧 자신의 고귀한 생명, 곧 자기 전체를 주셨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그리고 말씀 보존학회라는 곳에서는 영역본 킹제임스역만이 진짜 성경이고 다른 성경은 가짜라는 식의 풍문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그런 말은 무지를 스스로 폭로함에 다름 아니다. 그런 말은 마치 이전 칼빈의 신학이 최고이고 지금의 신학은 전부 보잘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아니 비유를 좀 더 실감나게 하자면, 컴퓨터 이전의 타이프라이터가 최고이고 컴퓨터는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함과 같다라고나 할까? 여하간 중요한 것은 킹제임스 역본의 번역자들이 얼마나 많이 기도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당대 최고의 신학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여 영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611년 그 시대까지의 신학적 성과에 불과한 것이고, 그 이후로 4, 5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얼마나 많은 성경에 대한 연구가 발전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구나 사해 사본이 1947년 발굴되었고, 사본들의 첨가나 여러 성경 연구 도구들의 발전으로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는 1611년의 그것에 비길 수 없는 비약적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킹제임스 역본이 진짜이고 지금의 번역본들은 가짜라거나 부족하다거나 하는 식의 말은 무지의 폭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 보고자 한다. 킹 제임스 역본은 사 2:16에서 And upon all the ships of Tarshish, and upon all pleasant pictures 라고 번역했다 (다시스 모든 배들 위에와 모든 아름다운 그림들 위에).
16절을 그 문맥에서 보자면,
사 2: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이다.
여기서 보듯 12절에 언급된 주어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12, 13, 14, 15, 16절 모두에 해당된다.
야웨의 날, 곧 주의 날이 교만자/ 거만자/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라
레바논의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위에 (임하리라)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작은 산위에 (임하리라)
모든 높음 망대와 견고한 성벽에 (임하리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라)
구약에서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은 야웨께서 세상에 부인할 수 없는 정도로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시어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범죄자들을 심판하고 경건한 자들을 구원해 내시는 날이시다. 그 주의 날은 예컨대 주전 586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 사건도 해당된다. 그 심판의 날이 예루살렘에 임하여 그곳이 멸망당했던 것이다.
여기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그런 주의 날이, 사람들이 가장 귀하다고 혹은 강하다고 (망대/ 성벽) 혹은 자랑스럽다고 (백향목/ 상수리 나무) 혹은 가장 돈벌이가 된다고 (백향목/ 상수리 나무) 의지하고 신뢰하며 자랑하던 그런 세상의 모든 것들 위에 임하여 그런 것들을 모조리 깨어 버리고 오직 야웨 하나님 한 분만이 홀로 영화롭게 되시고 높이 되시리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16절에서 한역은 다시스의 모든 배/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 이라 했다면, 킹제임스역은 다시스의 모든 배/ 모든 아름다운 그림들이라 했다. 한역에서 "아름다운 조각물"이라 번역하고 킹제임스가 '아름다운 그림들'이라 번역한 히브리어는 '세키욧'인데, 이 말은 여기서만 딱 한 번 나타나므로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대략 추정해서 번역해 놓은 말이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면서 보니, 12-16절에서 1611년 학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병행법'이란 문학적 기교가 여기 사용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각 절마다 한 쌍씩 야웨의 날이 임할 대상이 제시되고 있다! 16절에서 킹제임스역이 "아름다운 그림들"로 번역된 '세키욧'은 의미는 분명치 않아도 "다시스의 배"와 한 쌍이 되는 의미의 말이라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은 '플로이온'이라 (배) 번역했다. 그리고 '세키욧'이란 말은 애굽 신성문자에서 "배"란 의미이다. 이런 세 가지를 근거로 우리는 16절에서 "다시스의 배들"에 짝이 되어야 할 '세키욧'이란 말이 "배들" 혹은 "상선들" 같은 의미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연구는 1611년대 사람들에게는 전혀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상한 말로 추정해서 번역해 놓은 것이다. 즉 킹제임스역의 사 2:16은 틀린 번역이다.
이런 식으로 찾으면 킹제임스 역본에는 많은 잘못된 번역들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킹제임스 역이 진짜이고 오늘날 번역 성경은 가짜이다, 사단의 속임수 라는 식의 주장은 전혀 합당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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