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박순애 전도사님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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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애 전도사님 약력=1963년 경북 포항 출생, 구룡포초 중퇴, 예장통합 서울북노회 성서신학원 졸업, 벧엘종합학원 원장, 오륜교회 전도사 역임, 현 분당제일교회 전도사, 의정부교도소 정신교육 강사 및 교정위원, ㈔ 국제사랑재단 홍보대사, 찔레꽃 예향선교회 대표, 저서로는 ‘찔레꽃 그 여자’ ‘절대희망’ 등.
나는 (박순애) 1963년 경북 포항의 구룡포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위에서부터 세 남매는 아버지의 전처 소생이고, 어머니는 오빠 둘에 나를 낳았다. 곱디고운 내 어머니는 불쌍한 여인이었다. 16세에 시집간 어머니는 결혼 일주일 만에 남편이 일제에 강제 징용되자 생사를 모른 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20대 후반, 아홉 살 많은 아버지를 중매로 만나 재혼했다. 아버지는 전처와 사별하고 세 남매를 홀로 어렵게 키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기잡이배를 탔다. 산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지만 가족간 정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탔던 배에서 불이 나고 말았다. 바다 한가운데서 화로가 엎어져 25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었다.
유일하게 아버지만 살아남았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배를 타지 못했다.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했다. 불안과 공포심을 털어내지 못해 늘 안절부절못했다. 급기야 불같이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고 알코올 중독에 폭력까지 일삼았다. 날로 심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에 오빠, 언니들은 모두 집을 나갔다. 당시 여섯 살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늘 울고 계셨다. “순애야, 순애야, 이 불쌍한 것을 어쩌누.”
초등학생이 되어도 아버지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인 아버지를 피해 학교를 갔지만, 그곳에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육성회비는 늘 밀렸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빵 나눠주는 시간만 되면 홀로 운동장에 나와 설움만 삼켰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아 늘 멍투성이인데, 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집엔 돈이 없었다. 그렇게 참고 인내하던 어머니가 나만 남겨두고 구룡포를 떠난 것이다. 내 나이 열 살 때, 난 그렇게 버림받았다. 엄마라는 둥지를 잃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학교도 집에도 갈 수 없었다. 배가 고팠다. 쓰레기통을 뒤졌다. 깡통을 들고 구걸했다. 그런데 그걸 아는가. 절대절망은 절대희망의 시작이란 것을. “뎅그렁, 뎅그렁.”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찾아간 구룡포교회에서 난생 처음 예배란 걸 드렸다. 밥도 얻어먹었다. 그때부터 교회만 찾아갔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교회 같았다. 또래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이들은 “선생님, 얘네 엄마 도망갔어요” “얘네 아빠 정신병자예요” “얘는 길에서 더러운 거 주워 먹고 다녀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교회 문을 나섰다. “엄마,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내 삶에 찾아온 천사, 교회학교 선생님이다. “순애야, 친구들은 너를 싫어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너 같은 아이들을 더 사랑하셔. 하나님, 이 불쌍한 아이를 버리지 마소서.” 거지꼴을 한 나를 선생님은 꼭 안고 기도해주셨다. 아직까지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셨다. 그 선생님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나는 구룡포에서 만난 교회학교 선생님에게서 전도자의 자세를 배웠다. 전도자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 영의 눈으로 사람을 품어야 한다. 그래야 전도가 된다. 그런데 요즘 전도하기 참 힘들다고들 한다. 그렇다고 이 귀한 일을 포기할 것인가.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데 말이다. 전도만이 생명을 부여받는 길이다. 그래서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10세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삶의 의욕을 꺾을 수밖에 없던 내가 다시 생명을 얻게 된 것도 교회학교 선생님의 전도 때문이다. 그분은 내게 사랑을 주셨다. 그게 전도다. 얼굴이며 손발이 온통 시커멓고 더러운 아이가 선생님의 사랑으로 찌든 때를 벗겨냈듯, 내 안에도 한줄기 빛이 찾아온 거다. 사랑의 힘이다. 사랑을 주면 전도가 된다. 그런 내가 13세 때 구룡포를 떠났다. 계기가 있었다. 버려진 인생의 고통을 초월하는 더 큰 고통이 온 것이다. 성폭행.
한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나란 존재는 살기 위해 태어난 거 같지 않았다. 난 버려졌고 외톨이인데 나 하나 죽는다고, 폭행을 당한다고 누가 상관이나 하겠는가. 이미 버려진 삶 그 자체인데 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구룡포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바다에 몸을 맡겼다. “엄마, 엄마, 엄마….” 어느 순간 음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파도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말려 들어간 것이다. 바다는 그렇게 나를 삼켰다. 비록 버려진 아이였지만, 누군가의 사랑 때문에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짧은 시간이었다. 무참히 그런 시간들조차 짓밟히고 나니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던 거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떴다. 처음엔 죽음 이후의 세상인 줄 알았다. 해는 중천에 떠있고, 맑은 하늘이 나를 감싸 안았다. 어젯밤 분명 바다는 나를 삼켰는데, 지금 이렇게 살아난 것이다. 하늘을 보며 따지듯 외쳤다. “하나님, 왜 나를 살리셨나요? 나란 존재는 죽어야 하는데….”
가슴을 울리는 음성, 그건 선생님이 가르쳐준 기도였다. “순애야, 하나님께 기도하면 네 소원은 꼭 이뤄진단다. 엄마를 만나고 싶으면 하나님께 꼭 기도해.”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건 어머니를 찾으란 뜻인가? 구룡포를 벗어나 엄마를 찾아 나섰다. 경북 청송에서도 깊은 산골. 마을 이름은 황골이다. 내 어머니의 고향이다. 몇 고개를 넘어 겨우 찾아간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 마치 꿈만 같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내 발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걷고 또 걸어서 그리 된 발이었다. 그런 발을 하고 어머니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날 나는 밤새도록 어머니 팔베개를 하고 말했다. “엄마, 다시는 나 버리면 안 돼. 어디 안 가고 내 옆에 있을 거지?” 불안에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황골 마을에서 두 달을 살고 또다시 어머니와 헤어졌다. 안동의 부잣집 식모로 보내졌다. 거기에서 일만 잘하면 학교를 보내주고 배불리 쌀밥도 먹여준다는 말에 어머니는 더 좋은 세상을 보라며 나를 식모로 보낸 것이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만 했다. 따뜻한 밥은 먹어본 적도 없다. 밤마다 성경책을 꼭 끌어안고 골방에 누워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며 눈물로 기도했다. 어린 식모는 3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16세 추운 겨울,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골에서 조금 떨어진 예텃골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렸다. 이곳은 축복과 기적의 땅이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흙집에 겨우 몸을 의지하는 정도였지만 어머니와 나, 둘이기에 행복했다. 예텃골 이전의 삶은 절망뿐이었다. 그저 눈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내 안에 주님이 온 순간, 같은 세상이어도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꿈꾸는 자로 변했다. 17세부터 다시 교회를 나갔고, 19세에 성령체험을 한 뒤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절대희망의 삶을 살았다.
예텃골에서의 삶은 훈련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 훗날 내가 받을 복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세 가지 그릇을 준비했다. 기도와 수고, 결단. 이것이 준비된 자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한때는 나도 ‘무늬만 성도’였다. 그런데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게 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주님을 믿어선 결코 복 받을 수 없다. 목숨을 바치듯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비로소 주님을 만난 건 열아홉 살 때다. 아직도 그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성령님은 평범한 예배 중에 감동으로 오셨다. 눈물 콧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입에선 알 수 없는 방언까지 터졌다. 처음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뼛속 깊은 곳의 ‘나’까지 다 토해냈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질렀던가. 어머니와 내게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 어린 나를 무참히 짓밟은 그 악마를 수백번, 아니 수천번씩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런데 주님은 내 속을 단단히 해부하셨다. 그 상처들을 모두 파버리셨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1주일 동안 눈물의 무릎 기도를 드린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시골 처녀는 이 집 저 집 일꾼으로 불려 다녔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앞에선 숨 쉬는 것조차 무서웠기에 ‘아버지’를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영혼을 바라보게 됐고 그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게 아닌가.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관계 회복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까지 허락해주셨다. 삶의 끝자락에 놓인 아버지에게 나는 주님을 전했고 아버지는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19세 박순애는 이때부터 예배의 성공자가 되겠다고 결단했다. 인생의 성공은 부귀영화가 아니다. 예배의 성공이다. 즉 거듭남이다. 영적 체험 없이는 거듭날 수 없다. 믿음과 삶은 거듭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늘나라 특권이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진짜 신앙인인지, 가짜인지는 믿음과 삶으로 드러난다.
나는 새벽마다 2시간을 걸었다. 그렇게 읍내의 한 개척교회에 나가 새벽예배를 드렸다. 집에서 교회까지 오가는 길 왕복 4시간. 새벽예배 30분. 가끔은 산길이 무서워 시편 23편을 큰 소리로 읽고, 목청껏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나의 길을 훤히 밝혀줬다. 교회로 가는 길은 그래서 두렵거나 떨리지 않았다. 27세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매일 그 길을 걸었다. 비록 내가 처한 환경은 처절했지만 ‘무릎 기도’는 내 가슴에 꿈을 심어줬다.
주님과 교제를 하면 할수록 내게는 한 가지씩 꿈이 늘어갔다. 그 첫 번째가 성경통독. 구룡포에서 초등학교 3 학년을 채 마치지 못한 나는 글을 완벽하게 읽고 쓰지 못했다. 성경을 읽으려면 한글을 떼는 게 필수였다. 간절하게 내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드렸다. 성경을 읽고 싶다고 기도했다. 성령님이 내게 주신 감동은 “성경을 쓰라”는 거였다. 창세기 1장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읍내에 걸린 간판들을 줄줄줄 읽어나갔다. 22세 가을에 성경 통독을 했고, 성경 필사도 마쳤다. 그때부터 무엇이든 다 읽었다. 오죽했으면 휴지 대신 걸려 있는 헌책들을 훔쳐다 읽기까지 했을까. 온 동네 품팔이로 일하러 다니면 책 한두 권씩 빌려와 밤새 읽고 중요한 내용들을 노트에 적었다. 시집을 정독했다. 한국문학전집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셰익스피어 작품들, 간디 자서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레미제라블, 몽테뉴의 수상록…. 노트에 요점을 기록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책을 통해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만났다. 책은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배움에 굶주렸던 나에게 책은 학교였다. 예텃골이라는 깊은 산골에서 그야말로 가슴 떨리게 책을 읽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며 노트에 정리한다. 그렇게 모아진 노트가 800권에 달한다. 오늘날 내 인생의 아름다운 자양분이 됐다. 내 수고의 땀방울을 주님은 잊지 않으셨다.
그는 “당시 성령님을 만나고 내 얼굴이 활짝 폈다”고 말했다.
“박순애 4-H 회장님이십니까? 여기는 청송보호감호소입니다.” 그 전화를 받은 게 19세 때다. 재소자들에게 성공사례를 발표해 달라는 거였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성공사례를? 의아했다. 산골에 살면서 내가 한 일이라곤 열심히 새벽기도 드리기, 열심히 일하기, 열심히 책읽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농촌 살리기 계몽 운동인 4-H 연합회 회원이 됐고 다양한 영농교육을 받았다. 그 덕에 경운기, 콤바인, 트랙터를 능숙하게 작동하고 몰았다. 뭐든 열심히 했다. 그러자 4-H 연합회 경북 여회장에 뽑힌 것이다. 모범 청소년상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재소자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열아홉살 소녀 강사는 수백명 재소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강단에 섰다. 차갑고 서늘한 눈빛에 그만 울고 말았다. 재소자들은 측은한 눈빛으로 강사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생겼는지, 소녀 강사는 또박또박 말했다. “사람은 저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굴레 안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 운명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인생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주십니다.” 그리고 담담히 나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재소자들이 보였다. 단상에서 내려오는 나를 향해 꾸벅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3일 뒤 한 번 더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은 다른 분위기 속에서 재소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마음에 생기를 심어줬다. 노래를 가르쳤고 웃음을 선물했다. 나는 21세가 되던 해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교정위원 위촉을 받았다. 최연소 교정위원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이 모든 건 하나님의 큰 계획안에 있었다.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는 건물주의 요청으로 급하게 자리를 옮겨야 할 상황에 처했다. 나는 우리 교회를 위해 작은 씨앗이 되게 해 달라고 눈물을 뿌려가며 기도하고 있었다. 특별건축헌금을 드리자는 목사님의 제안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새벽마다 “최고 많이 드리게 해주세요”를 부르짖었다. 종일 흙먼지를 마시며 남의 집 품꾼으로 일하면서도 입술에선 “최고 많이 드릴 수 있다”란 믿음의 확신을 선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환갑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찾아왔다. 신문을 읽다가 내가 쓴 글에 감동받아 직접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신문의 내용인즉, 재소자들 중에 가족이 없거나 있더라도 외면당하는 이들은 내복 한 벌 입을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재소자들을 만나고 온 뒤 가슴 아픈 사연을 적어 두 달 전 신문사에 보냈는데, 그 글이 실린 거였다.
그분은 “재소자들을 돕고 싶다.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분의 손을 꼭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성전 이전 문제로 힘듭니다. 저는 너무 가난해 드릴 게 없습니다. 주님께 최고 많이 바치고 싶은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먼저 도와주세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분은 장로님이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사업체를 일군 뒤 시골에 교회를 짓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로님은 많은 돈다발을 건네며 “이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난생 처음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응답받아 우리 교회에서 최고로 많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
눈물의 깊이는 신앙의 깊이요, 믿음의 깊이다. 나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면서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하나님의 확신을 갖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은 따라온다.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
이 장로는 박순애를 보고서 자기 인생을 다 주욱 이야기를 한다. 내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데, 그냥 주지 않고 인생의 교훈을 막 풀어 놓는다. 마지막에 돈을 준다. 이것이 내 인생의 축복의 비결입니다. 소중한 축복의 비밀을 알아냈다. 인생의 맨 주먹으로 도시에 나가서, 말단에서 시작해서 그 몸담은 공장의 사장이 되었다. 70명 직원을 거느린 회사이다. 가정도 이루게 되었다. 인수받아서 300명으로 10년 만에 축복을 받게 되었다. 교회에서 최고 많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15년간 새벽마다 기도하고, 그리고 몸이 닳도록 봉사하게 되었다. 외국에 지사가 생기고. 새벽기도가 날아가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바쁜 몸이 어디 새벽 기도하겠나? 십일조도 적당하게 주먹구구식으로 드리고, 봉사도 코 흘리게 애들하고 놀게 생겼냐? 내가 회장이, 신문에도 나는 내가 성가대 한다고 서게 생겼냐?
교회 안에서 자기 위치는 굳어지고, 위치는 교만이 내면에서 쌓아 가는데, 어느 순간에 부도가 나고 15억의 빚더미에 올라앉고, 부동산도 다 날아가 버렸다. 10년 간 새벽 기도 안 나간, 어느 날 생전 나가지 못한 새벽 기도에 나간다.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아버지! 뒷자리에 앉아서, 부르짖으니 목사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도하는 사람 중에 근심되는 사람이 있다. 아이고, 저 장로가 나온 것 보니, 무슨 일이 났나 보네! 기도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교회가 땅을 사 놓았는데, 장로가 잘 나갔을 때, 큰 소리 쳤다. 내가 다 낼테니, 교회 지읍시다! 하는데, 하나님의 사인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장로가 지금 교회에 와서 아이고 하나님 부르짖을 때, 성전 건축할 때가 되었다 했다. 목사님이 아이고, 우리 교회의 별이 떨어졌는데요, 하나님, 어떻게 해요? 장로가 완전 쪽박을 찬 그 순간에 성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 장로가 그 교회의 건축 위원장으로 임명 받고, 나는 할 수 없어요! 눈물로 목사님을 찾아서 호소했다. 우리 애들 학비도 못 내고, 나는 완전 쪽박을 찼다. 장로 직을 내어놓고, 이 교회를 떠나겠다! 목사님이,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니 순종하세요! 장로가 순종하라고 하는 한 마디가 자기의 엎어진 자기를 축복으로 일으켰다고 했다. 뒤통수에 대고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과 수군거림을 다 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 몇 시간의 장로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께 순종하세요 하니 그 길로 교회로 가서 하나님 청년 시절부터 섬긴 교회가 싫어졌다. 모든 재산이 처갓집으로 돌려놓은 집이 생각났다. 급매로 2억에 팔았다. 아들딸 3남매, 권사와 마주 앉아서, 마지막 방법이다. 이 돈으로 오늘 밤 튀는 거다. 아들이 머리를 흔들며 아빠, 왜 그렇게 야반도주를 해야 되요? 그러면 방법이 하나 밖에 없다. 성경 위에 돈을 얹어 놓고,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이 마지막 시험을 하시는 하나님, 이 돈을 몽땅 하나님 교회의 건축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이제부터 평생에 주님 앞에 새벽마다 무릎 꿇고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때에 홀랑 빈껍질로 돌려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 때에 처음으로 성숙한 것을 깨달았다. 잃은 여호와를 다시 찾게 되었다. 건축헌금으로 2억원을 내어 놓고 다섯 식구가 지하실 단칸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1천 번제를 드리게 되었다. 세 가지 1천 번제, 1) 가정 예배의 1천 번제를 드린다. 쫓기는 몸이고,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가정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자식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시고, 장학생으로 좋은 대학 들어가게 되었다. 자녀들이 비뚤어지지 아니하고, 어려울수록 우리가 더욱 기도하고 공부해야지 새 결심을 하였다. 2) 잃어버린 1천 번제 새벽 기도,
3) 1천 번제 예물로 매일 1만원씩 새벽 기도회 때 드림. 물질로 하나님께 망할 때 심어야 하겠다. 지금 가장 곤고할 때 물질을 심어야 하겠다. 물질의 고통속에 있을 때, 물질을 심었다. 새벽마다 새벽 나가서 1천 번제 예물을 드린다. 모든 것을 잃었으니, 이제 갑절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1만원을 매일 드리는데, 어느 날 헌금이 없었다. 아들 차비도 주지 못했다. 아들들이 아빠를 위로했다. 30분 전에 집을 나가서 걸어 다닌다. 어느 날부터 빈 봉투예요, 내일은 다 채워 넣게 해 주세요. 목사님이 빈 봉투를 잡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다. 빈 봉투를 올릴 면목이 없었다. 왜 빈 봉투 드리게 하세요?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울면서 기도한다. 교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보다보다 저렇게 망한 사람들은 처음 본다. 장로님이 그렇게 우니까? 그 다음날 교인들이 돈 만원을 그 봉투에 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와서 채워서 드리는데, 작정은 지가 하고, 돈은 우리가 다 낸다고 했다. 일단 서원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불쌍하게 드리고 있으니, 교인들이 그냥 올 수도 없어. 교인들이 억지로 들었으니 그렇게 1천 번제를 드렸다. 영성이 살아나고, 하나님께서 주목하셨다. 교회당 건축이 되는 중에, 장로가 그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신문지 펴 놓고, 울면서 그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전 잘 나갈 때, 돈을 냈으면 거기서 건축 감독자로 어쩌고 저쩌고 간섭했을 것인데, 이제 하나님 왜 이렇게 저를 낮추셨어요?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나는 네가 돈을 내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네가 그렇게 겸손하게 낮아져서 기도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세요. 돈 몇 푼 있다고 그들먹 거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교만하게 행동한 것이 회개되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로 그렇게 기도한다.
고난은 고통이지만, 고난 뒤에 하나님의 축복의 단비가 넘쳐난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돈이 있으면 돈 몇 푼 내었겠지만, 이렇게 낮은 자리에서 주님의 은혜를 크게 느낄 수 있었겠는가? 그 장로는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앙모하게 되었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부르짖었다. 이 장로에게 눈물의 씨가 싹을 내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해 주셨다. 15억 부도가 해결되었고, 밑바닥에서 다시 회복되고, 자녀들과 가정의 영적 회복이 되었다. 기도하고 나니, 가라! 돈 갚아야 할 사람들에게 찾아 가라! 내가 해 놨으니 가라! 빚쟁이 찾아 가라! 나, 아무 것도 없지만, 합의서를 써 주세요! 3년 뒤에 갚겠으니, 합의서를 써 달라! 억지로 감방에 가게 한다고 될 것이냐? 이왕 망한 것 믿어 주자! 1천 번제가 적금 넣는 것이니까! 1년 만에 새벽 기도를 통해서 합의서 받아 내서 15억짜리가 되었다. 3년 적금을 들었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게 해 주실 것이다. 나도 믿어 보겠다. 사람들이 합의서를 써 주었다. 헌 창고를 근거로 이전 사람들과 함께 다시 시작했다. 하나님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다. 교회당 건축을 3년간 하고, 그간에 장로의 밑바닥에서 울며 부르짖을 때, 3년 후에 돈 다발이 생겼다. 집 팔아 전 재산을 하나님께 믿고 드린 그것이 씨앗이 되어, 이제 이 돈 다발이 생겨났으니, 이제 시골의 교회 건축을 위해 바쳐야지! 새벽마다 이 돈을 놓고 시골 교회 건축을 위해 드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돈 빌려 간 사람들이 떼어 먹고 도망갔다. 그런데 한 사람이 기독교 성도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네가 떼어 먹은 돈을 배로 갚아라! 해서 "제발 이 두 배를 꼭 받아 주세요. 그래야 내 문제가 풀립니다." 장로가 받아 그대로 두고서, 시골 교회당 건축 헌금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다가 신문지를 보고서 "교회 건축은 나중 보내고, 교도소 죄수들 옷이나 사주자!" 하고 했는데, 바로 박순애의 입에서 교회 건축을 한다고 하니 기도 응답이 된 것이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가 일해 봤자 얼마나 일을 하겠는가? 기도는 능력이고, 기적이다.
박순애에게 수표 한 장으로 끊어 올까요? 새파란 만 원짜리로 주세요. 수표를 본 적이 없다. 새 파란 만 원짜리를 신문지에 싸 가지고 왔는데, 이게 전부 돈인지 모르겠다. 조심해서 가지고 가세요. 교회는 가깝습니까? 언제 갚아요? 나 이거 언제 갚아요? 겁이 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갚지 않아도 좋대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꿈은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안고 가니까? 장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본다. 들고 뛰어간다. 목사님, 목사님, 하고 간다. 애 셋이 목사님 집이 초라하고 단 칸 방에 살고 있는데, 목사님 있잖아요? 있잖아요? 있잖아요? 한 쪽 신발 신고 안방까지 들어갔다. 이거요, 이거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요. 땅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에, 세상에 목사님이 삐용하고 놀래서 이게 뭐요? 이거 하나님이요, 저 한테 주신 건데요. 은행을 털어 왔냐? 가난뱅이가 어떻게 이 돈을 갖고 왔나? 돈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내가 잘못 했습니다. 눈앞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보다는 염려에 쌓였다. 돈 되는 것들은 없고, 껍데기가 딱 달라붙어 가지고 시끄럽게 부르짖는 기도를 하니까, 귀를 막고 기도했는데, 어느 날 못난 자식이 효도하고, 병든 자가 효도한다. 잘난 자식은 제 잘난 맛에 산다.
목사님이 이 딸을 일생에 축복해 주옵소서! 다음 날, 그곳에 살 때, 식모살이해서, 소 한 마리 사 둔게 있다. 소에 코를 꿴다. 뽀족한 나무를 코에 꿰맨다. 말을 잘 듣는다. 새끼도 한 마리 낳았다. 나중 순애 시집갈 때, 밑천이다. 마지막 건축 헌금 하는데, 소 팔려 장에 가자. 금반지 팔고, 소 팔고 돈 80만원을 가지고 얼마나 울었다. 하나님 우리 집 전 재산 다 떠나갑니다. 서울 갈 차비가 없다.창 12:1 고향 친척 집을 떠나가라! 하나님 나는 십일조 드리고 싶어요! 기도는 혼자 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기도해 놓고, 십일조를 못 드린다.
축복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보이는 축복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다. 나는 19세에 성령 체험을 한 순간부터 축복을 받았다. 물론 주변에선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내 손에 쥐어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열심히 기도드리고 집에 가도 역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의 기도는 생명줄이라고. 믿음의 눈에는 그 길만이 생명이다. 그래서 조금만 참고 견디면 반드시 응답받는다. 나 역시도 처절한 시간들을 견뎌냈다. 그러자 축복은 고난의 포장지에 쌓여 다가왔다.
내가 서울에 온 건 1989년 12월이다. 새벽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창세기 12장 1〜2절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다. “너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겠다.”
낯선 땅 서울에 올라와서는 문 열린 교회를 전전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는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부여잡고 새해를 맞았다. ‘예배당 떠돌이’로 살면서 세 가지를 놓고 기도했다. “하나님 방을 주세요, 일터를 주세요, 교회에 제 자리터 만들어주세요.” 두 달 만에 공장에 취직했고, 월세 5만원 하는 방을 얻었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교회 강대상 바로 앞자리는 내 무릎 기도터였다. 예텃골에선 험한 산 길을 2시간씩 걸어 교회에 갔는데, 서울에선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으니 모든 게 감사했다. 공장에서 보름치를 가불하고 1만원을 첫 십일조로 드리며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기도는 이렇게 먼저 달려가는 축복이다. 먼저 심어놓은 축복이다. 최고 많은 십일조, 최고 많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하나 더 추가해 무릎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교회학교 교사가 되게 해주세요.” 구룡포교회 그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열정을 보신 목사님께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 반 아이들이라며 다섯 아이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받았다. 등록만 해놓고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었다. 일일이 찾아가 교회에 나올 것을 권면했다. 아이들을 전도하는 데는 자장면만한 게 없었다.
공장에서 그때 받은 월급이 22만6000원. 십일조 3만원, 감사헌금 2만원, 월세 5만원, 한달 생활비 2만6000원을 제하고 나니 10만원이나 남았다. 구하지 않는 돈이 왜 남았을까.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번도 나를 위해 돈을 모아본 적이 없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다 드렸다. 그래서 남은 돈도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할지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자장면을 먹이며 전도했다. 아이들은 “선생님, 친구 데려오면 자장면 사주실 거죠?”라며 친구들을 데려왔다. 전도할 친구들 이름을 세 명씩 적게 하고 데려오면 학용품 같은 선물도 줬다. 아이들이 적어낸 이름을 매일 새벽마다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다. 석 달 만에 18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10만원은 우리 반 아이들 자장면 값으로 모두 사용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땐 비정상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이게 축복이었다. 나는 스스로 조금 부족하게 살고자 마음먹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에게 오셔서 나를 완벽하게 채워주심을 믿었다. 내가 완벽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 보시기엔 그게 아름다운 거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채워주시는 것. 10만원은 기적의 씨앗이었다. 부족한 내 삶을 채우고도 남았다.
믿음은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공허한 이론의 믿음은 생명력이 없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기에 교회학교 우리 반 학생들에게 바른 예배부터 가르쳤다. 바른 헌금도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려주는 길이었다. 헌금은 새 돈으로 용돈을 모아 준비할 것, 헌금은 반드시 봉투에 넣어서 드릴 것, 드릴 땐 봉투에 기도제목을 쓰라고 했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따라오진 못했다. 그러나 삶 속에서 훈련이 되니 아이들이 먼저 헌금 봉투를 찾았다. 그리고 최고의 것으로 예물을 드렸다. 말씀도 열심히 읽게 했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해 내 생애 최고의 기적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우리 반에 글씨를 모르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다. 말씀을 읽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교회에 안 나오겠다고 했다. 학교에서도 받아쓰기를 매번 빵점 맞는다며 다른 친구들이 두 아이를 놀렸다. 반 친구들의 수군거림에 눈물 쏟는 아이들을 본 순간 그 옛날 내가 놀림 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아이를 끌어안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 밤부터 선생님하고 공부하자.”
매일 밤 두 아이를 데려다 공과에 나오는 본문 말씀을 읽게 했다. 새벽 1시까지 붙잡아놓고 성경을 하루에 세 장씩 쓰도록 했다. 그러자 한 달 만에 아이들은 성경을 줄줄 읽어나갔다. 학교에서도 받아쓰기 100점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나는 몇 년 걸려 성경을 읽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한 달 만에 성경을 읽다니….’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이들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한글도 다 뗐고,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 마지막 공부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이들 과외를 부탁한다며 봉투를 건네는 게 아닌가. 과외를 해본 적도, 무엇보다 초등학교 중퇴의 실력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아무리 사양해도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돈 봉투 두 개를 들고 새벽기도에 나갔다. “하나님, 솔직히 돈을 보니 욕심이 납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니 겁도 납니다.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그때 마음 가운데 이런 감동이 찾아왔다. “그래도 너는 3학년까지 다니지 않았느냐.” 우리 아이들은 2학년이었다. 서점에서 2학년 문제집을 샀다. 책장을 넘기며 알게 됐다. 나는 겨우 여기까지 배웠다는 사실을. 백단위의 덧셈과 뺄셈. 1학년 1학기 참고서를 사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밤에는 예습하고 낮에 우리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게 배우고 성적이 나날이 향상됐다. 아이의 오빠까지 공부하러 왔다. 사실 아이들을 가르친 것보다 더 열심히 한 게 있었다. 매일 새벽예배에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기도한 것. 간절한 나의 기도에 주님은 응답하셨다. 공부를 못하고 말썽만 피워 학교에서도 문제아로 찍혔던 우리 아이들이 나와 함께 믿음을 키우면서 전혀 다른 아이로 변화된 것이다. 덕분에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과외 선생님이 됐다.
두 명을 데리고 성경을 읽게 했던 것이 1년 만에 32명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일로 커진 것이다. 그때 십일조를 20만원이나 드렸다. 결국 공장을 그만두고 본격 과외 선생님으로 나섰다. 청송에 계신 어머니도 모시고 왔다. 모든 게 형통하게 잘 이뤄지는 듯했다. 30・60・100배로 채워질 것만 같았는데, 어느날 불법과외로 걸리고 만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 교무실에 불려가 다시는 과외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했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삶의 갈림길에서 난 생명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바로 무릎 기도. 40일 작정기도에 돌입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철저히 하나님만을 바라봤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을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나님은 초등학교 중퇴인 나에게 교육사업으로 성공하는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셨다.
불법과외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40일 작정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이었다. “혹시 박순애 선생님 아니십니까?” 거리에서 한 사내가 나를 불러세웠다. 스포츠머리에 떡 벌어진 어깨, 단번에 재소자 출신임을 알아봤다. 깍듯이 인사하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청송교도소에서 내 강의를 듣고 하나님을 영접했으며, 출소하면 꼭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단다. 새벽에는 신문을 배달하고 한 중소기업에 취직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신장을 기증해 죽어가던 군인을 살렸다며 수술 부위 영광의 상처도 보여줬다. 참 행복해 보였다.
사내는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사실 재소자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진실만이 사람을 감동시킨다. 지금 처한 내 상황을 처음 보는 사내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헤어졌다. 그런데 사흘 뒤 사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회사 사장님이 나를 꼭 만나고 싶어한다는 거였다. 재소자 출신을 채용한 사장님은 자신도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다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학원 차릴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런 큰돈을 빌려준단 말인가. 사장님은 “우리 직원을 이렇게 멋지게 변화시킨 분인데,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며 오히려 재소자 사역을 멈추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사내도 간곡하게 말했다. “선생님, 돈 갚는 것은 걱정하지 마시고 꼭 성공하세요. 이 튼튼한 몸으로 열심히 일해서 제가 갚으면 됩니다. 선생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요.”
대체 내가 뭐라고, 하나님은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단 말인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의 일이기에 가능한 거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중퇴로 과연 학원 원장이 될 수 있을까. 기도의 힘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나는 염려치 않았다. 어차피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학원 원장 자격에 특별한 규정은 없었다. 교원자격증을 갖춘 교사를 직원으로 채용하면 됐다.
40일 작정기도가 끝나는 날, 속셈학원 간판을 걸고 개원 예배를 드렸다. 학원 문을 여는 날 60명의 학생들이 왔다. 내게 공부를 배웠던 학생들이 모두 돌아왔다. 1년 후 176명이 됐고, 두 번째로 피아노 학원을 열었다. 당시 학원 두 곳에서 들어오는 월 수입이 약 2400만원. 교사 월급, 건물 임대료, 차량 유지비 등 학원 운영비를 제하면 750만원이 내 손에 들어왔다. 매월 십일조로 80만원을 드렸다. 그런데 새벽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단호한 음성이 가슴에서부터 울려퍼졌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결코 적은 십일조를 드린 게 아닌데,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32명을 과외할 때 20만원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지금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가 드린 십일조는 고작 80만원. 이건 내 방식, 내 계산대로 드린 십일조였다. 그 계산법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음을 회개했다. 십일조 통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은 ‘축복의 십일조’. 그날 이후 학원비가 들어오면 바로 10분의 1을 떼어 통 안에 담았다. 그렇게 한 달을 모아 250만원의 십일조를 바쳤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일, 처음 결단하는 게 힘들다. 하지만 마음의 중심을 잡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진다.
축복의 십일조는 더 큰 열매를 맺었다. 6개월 뒤 세 번째로 컴퓨터 학원 문을 열었다. 이어 웅변・글짓기・미술・태권도 학원에 유치원, 중・고등부 학원까지…. 1994년에 땅을 사고 학원 건물을 지었다. 95년 3월 31일 청송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5년 만에 벧엘종합학원 개원 예배를 드렸다. 1000여명의 학생이 다녔다. 십일조의 순종으로 빚어진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었음을 고백한다.
“박순애 선생님, 저 좀 잡아주세요. 교도소 재소자들만 불쌍한 인생이 아닙니다.” 험악한 인상의 한 남자 손에는 ‘재소자에게 희망 전하는 교정위원 박순애’란 신문 기사가 들려 있었다. 술 취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아 달라. 안 그러면 큰 사고를 칠지 모른다”고 협박하던 남자의 눈에선 살기마저 느껴졌다. 대구 태생의 남자는 중학교 때 유도부에 들어가면서 불량 학생들과 어울렸고 학생 폭력서클을 만들기도 했다. 별명은 ‘도루코’. 면도날로 친구 얼굴을 그어 소년원에도 갔다 왔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공수부대를 자원해 갔지만 상관폭행, 탈영 등의 죄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부모는 책임질 가정이 생기면 정신 차릴까, 과거를 속이고 아들을 결혼시켰다. 하지만 모든 게 들통 나면서 아내는 어린 두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평생 아들 뒤치다꺼리만 하다 세상을 떠났다. 남자는 일가친척 모두에게 외면당한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 불현듯 끼어든 이 남자, 한번은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빠가 팔만 살짝 움직여도 자기를 때리는 줄 알고 아이들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이후 “아이들이 선생님을 보고 싶어한다”며 계속 만나러 왔다. 2년 동안 남자에게 시달렸다. 주님께 길을 물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나님은 이 말씀을 주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이요, 본질인 이 말씀이 왜 내겐 절망으로 들렸을까.
“그 남자를 위해, 아니 그 가정을 위해 저더러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겁니까”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했다. 그 가정을 위해 썩는 밀알이 되기로 했다. 1990년 5월 5일. 당시 두 아들의 나이가 9세, 7세였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우리 애들 가슴에 상처주지 않고 잘 키우겠습니다. 저는 자식을 낳지 않고 오로지 이 아이들만을 사랑하며 내 목숨처럼 키우겠습니다.” 남편도 감동했는지 무릎을 꿇고 같이 기도했다.
이 감동, 얼마나 갔을까. 일주일을 못 넘겼다. 남편은 도박에 미쳐 며칠씩 집을 비웠다. 돈이 떨어지면 들어왔다. 죄악된 생활이 인간의 신념만으로는 바뀔 수 없었다. 돈 내놓으라고 숨이 넘어갈 직전까지 내 목을 졸랐다. 남편은 아이들을 막무가내로 때렸다. 학원 원장실까지 들이닥쳤다. 십일조 통에 손대는 그를 향해 “이건 하나님의 것”이라며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순간 번쩍했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코뼈가 부러져 누워 있는 내 팔을 붙잡고 아이들이 울면서 애원했다. “엄마, 아빠랑 헤어져도 우리 안 버릴 거지? 우린 엄마랑 살 거야.” 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남편과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면 할수록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맞으면서 기도하고, 죽음처럼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더는 지탱할 수 없었다.
비가 쏟아지던 날 밤, 학원 건물 옥상으로 갔다. 퍼붓는 비를 맞으며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더는 힘들어 못하겠습니다.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옥상 난간에 섰다. “주여!”를 외치며 몸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엄마,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에 중심을 잃고 옥상 안으로 떨어졌다. 50년 내 삶을 지탱해온 비결은 인내와 기도다. 인생의 폭풍우가 쏟아질 때도 내가 한 것은 인내하며 기도한 것뿐이다. 영적 성숙은 인내로 완성될 수 있다. 인내의 기도 결과, 그렇게 폭력적이던 남편은 어떻게 됐을까. ‘트로트 찬양전도사 신승균.’ 하나님의 사람인 그는, 내 남편이다.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나는 행복한 가정, 웃음이 피어나는 가정을 꿈꿨다. 목회자와 결혼해 평생 하나님 일을 한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주님의 종을 만나게 해달라고 배우자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돈 때문에 폭력을 일삼던 남편, 그렇게 이성을 잃은 남편의 그 눈빛. 어디서 본 듯했다. 어머니와 나를 무참히 때렸던 내 아버지였다. 어머니처럼 사는 게 너무나 싫었는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바꾸실 줄 알았는데, 남편을 바꿔보겠다고 눈이 짓무르도록 기도했는데 내 인생은 구룡포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내 삶의 죽음과 같았던 10년의 시간들, 한 남자를 위해 죽도록 기도하며 두 아들을 목숨 바쳐 사랑으로 키우며 눈물로 엎드린 그 자리에는 절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고, 이를 악물고 옥상 아래로 몸을 내던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룡포 바닷가에서 나를 살리신 하나님은 한 번 더 나를 붙잡았다. 엄청난 빗줄기를 뚫고 내 심장에 꽂힌 절규,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였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두 아이를 본 순간,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놓고,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밤 10시 눈물의 가정예배를 드렸다. 다시 힘을 냈다. 웃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두 아들과 행복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잊고 지냈던 남편이 불쑥 들어왔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남편은 갑자기 엎드려 “내가 잘못했다. 나를 용서해줘”라며 엉엉 울었다. 나의 마음은 이미 돌아선 상태였다. 냉정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내가 키울 겁니다. 당신은 아버지 노릇 할 자격 없습니다. 이쯤에서 끝냅시다.”
더 이상 남편이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전과는 좀 달랐다. 며칠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더니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 나를 따라나섰다. 남편은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다. 그러면서 새벽예배 때 경험한 일들을 고백했다. 성전 바닥에 엎드려 있는데 “눈을 뜨라”는 음성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고 한다. 눈앞에 대형 스크린이 펼쳐지면서 지난날 도 루코 시절부터 시작된 수많은 죄악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는 거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그대로 성전 바닥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단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그만하세요. 저 같은 놈 데려가시지. 왜 살려 두셨어요?” 그 순간 남편은 똑똑히 들었다고 한다. “네가 산 것은 네 아내의 눈물의 기도 때문이니 라.” 남편은 우리 가족에게 진심을 담아 용서를 구했다. 자기 속에 수십년간 죄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눈물로 쏟아내는 회개의 시간을 새벽마다 가졌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깊은 눈물을 흘릴수록 혼탁한 영은 씻겨진다. 회개는 영혼을 맑게 하는 작업이다. 남편은 그것을 몸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머리를 빡빡 밀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등록금을 못 내는 학생을 돕고 싶다며 가끔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평소 노래를 잘 부르던 남편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찬양 전도사로 사역했다. 모든 찬양을 트로트로 부르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세상 노래를 너무도 많이 불러 봤던 그는 ‘뽕짝 전도사’로 유명해졌다. 남편은 지금도 자신의 인생의 무대에서 헛되이 살아온 것을 끊임없이 회개한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히 6:14) 이 엄청난 축복의 메시지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이다. 축복은 인내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 호롱불 밑에서 빌린 책으로 밤을 새우며 인생의 인내를 보석처럼 켜내며 살아왔더니 오늘날 하나님은 ‘남편의 변화’라는 최고의 선물로 보답하셨다.
나는 청송에서 긴 세월을 가난 속에서 훈련받았다. 이것이야말로 내 평생의 자산이다. 가난이 두렵지 않은 법을 배웠고, 인생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도 배웠다. 주님만 계시다면 모든 것을 다 가진 기쁨으로 살아가는 법도 배웠다. 2000년 기도 가운데 주님은 “학원을 떠나라”는 감동을 주셨다. 27세에 “청송을 떠나라”고 명하신 것과 똑같은 말이다. 처한 상황은 달랐다. 청송을 떠날 땐 무일푼이었다. 2000년엔 내 손에 쥐어진 게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길 원하셨다. 학원을 떠난 건 주님의 명령이었다. 금식하며 순종했다. 그 결과 지금의 내가 있게 됐다. 2001년 1월, 37세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찔레꽃 그 여자’ 여러 방송과 신문에서 인터뷰했다. 학원을 운영하며 밤에는 예장통합 서울북노회 성서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해 전도사 임명도 받았다. 그러자 교회에서 집회 요청이 쇄도했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후함으로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삶이 궁색해진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깨달았다. 인색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낭비한다. 반면 후한 사람은 자신에게 늘 근검절약한다.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이 아니고, 부자라고 모두 후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 차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그림자 같은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역 확장에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
학원을 경영할 때부터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을 돌봐왔다. 1000여명 학생 가운데 보육원 아이들 등 150여명은 무료로 학원에 다녔다. 돈을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열심히 공부하고 교회도 잘 다녀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격려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미자립교회 은퇴목사님이나 해외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다 몸이 아파 들어오신 분들을 섬긴 것도 그때쯤이다. 또 27세까지 산에서 약초 캐며 품팔이로 살았던 고향 마을에서 잔치를 열고 어르신들께 효도관광을 보내 드리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다.
3년 전에는 충북 청주에 선교복지요양원을 개원했다. 소외 어르신을 섬기려고 한 일이다. 당초 은퇴목회자쉼터 건축을 위해 부지를 알아보던 중 목사님이 세운 요양원을 인수받았다. 오직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공동체로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내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은 교도소 사역이다. 재소자들과 함께한 세월이 벌써 30년이다. 2008〜2009년 2000여권의 책을 의정부교도소에 기증해 도서관을 꾸며주기도 했다. 책을 통해 내가 꿈꿨던 세상을 재소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이 모든 사역을 ‘찔레꽃예향선교회’ 이름으로 한다.
최고의 악질 남편이 순둥이로 변해 주의 사역을 감당하며 같이 달려온 시간이 14년이다. “위 부부는 갖은 역경을 극복하여 모범적인 가정을 일구어 왔으며 특히 국내외 집회를 통해 가정 및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왔으므로 이에 올해의 특별 부부상을 수여합니다.” 2009년 세계부부의날 위원회로부터 받은 ‘올해의 특별부부상’ 패에 기록된 내용이다. 남편과 내가 이런 상을 받을 줄이야. “그동안 애썼다”며 하나님께서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우리 부부에게 주신 것 같다. 10세 때 구룡포 바닷가에 버려져 눈이 파랗게 되도록 울던 그 아이는 주님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나를 닮은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눈물 흘리며 달려간다. “꿈이 없는 수천명의 사람보다 꿈을 가진 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목숨 바쳐 주님을 믿으면 두려울 게 없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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