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의 가난한 마을 출신 손종일은 1905년 5월 이웃집 형뻘되는 사람에게 복음을 듣고 상투를 싹둑 잘라 버렸다.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효지종야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楊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 - 우리의 몸이나 머리 털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하지 않고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이런 유교적 사상을 믿고 따랐던 손종일이 예수님을 만나니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손종일은 38세에 좋아하던 술 담배도 끊어 버렸다. 잘못된 사상, 종교를 갖고 있으면 우리는 마귀에 종노릇하며 사는 것이다. 믿는 성도는 자신이 은연 중 따랐던 사상이나 관습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배척하고 잘못된 생각이나 관습을 끊어 버려야 한다.
손종일은 교회에 처음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한 성도가 손종일을 위해 기도를 하는데 크게 감동을 얻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왔습니다. 여태 미로 같은 세상을 헤매다니다가 이제야 제 길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가시에 찔리고 수렁에 빠진, 상처투성이의 아들이 아버지께 의지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귀하게 받아 주시고 그 가정에도 축복을 내려주옵소서. 세상에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여전히 캄캄하기만 한 이 나라 이 땅에 촛불이 되게 하옵소서. 황무지와 같은 이 나라 이 땅의 복음 전파를 위해 귀한 씨앗이 되게 하옵소서!. ..
손종일은 술담배도 끊고 밤을 새워 성경을 읽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전하였다. 손종일의 신앙이 자랄수록 집안 어른들의 핍박과 조롱도 강도가 더해 갔다. 손종일의 부인도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인은 동네 사람들이 당신 남편이 중얼거리며 길거리를 다니는 것을 보니 미쳤나보다 라고 했다. 그래서 "요 요 영감 오기만 해 봐라" 마, 사생결단을 낼끼다" 하고 남편이 이상한 행동에 속이 편치 않았다. 마침내 남편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부인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와 당신 미친 사람처럼 길거리에 다니면서 무어라고 중얼대는기요 제발 그 '예수, 예수' 소리 좀 안 집어치울라요. 내사 마, 남부끄러버 못 살겠소." 부부 싸움이 대판 벌어졌다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해마다 명절이면 조상 묘에 절하는 것이 손종일에게는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결심을 하였다. 자기만 변화되었다고 그저 편안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한 해는 설날 아침에 손씨 문중 일가가 다 모여 조상의 묘에 가서 절을 하는 중이었다. 모두 묘 앞에 엎드려 있는데 그때까지 장승처럼 서 있던 손종일이가 갑자기 제삿상을 훌떡 엎어 버렸다. 제물로 놓여 있던 과일이며 나물이며 음식물과 그릇들이 떼굴떼굴 굴러 사방으로 흩어지고 깨어져 저 멀리 개울 우물까지 굴러 떨어졌다. 삽시간에 성묘 자리는 난장판이 되었고,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조상님께 드리는 음식상을 뒤집어 엎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불효 중의 불효요, 죄악 중의 죄악이었다.
정신을 차린 친척 어른들이 달려 들어 손종일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인정사정없는 폭행이 근 1시간 지속되었다. 미치지 않았다면 이따위 개망나니 짓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했고 예수인지 뭔지 하는 서양 귀신에게 단단히 흘린 모양이니 때려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먹질을 했다.
손종일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매를 아무 저항도 없이 고스란히 다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축 늘어진 손종일의 몸을 일으켜 세워 커다란 감나무에 매달았다. 감나무에 달린 손종일은 매달린 채로 소리를 쳤다:
여보시오, 어르신들. 내 말 좀 들으시오. 하나님은 유일신이시니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도 숭배해서는 아니 되오. 죽은 무덤에 절하지 마시오. 하나님이 싫어한단 말이요.
"저런 미친 놈" 사람들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 혀를 끌끌차며 돌아섰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난 후에 밖에서 돌아온 손종일은 광을 뒤져서 제사용 제기 한 벌을 꺼냈다. 그리고 마당에 불을 피우고 그 제기들을 집어 넣었다. 불꽃이 타 올랐다. 우상을 숭배하는 도구를 태워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마침 불어 불길이 한쪽 옆에 쌓아놓은 짚더미에 옮겨 붙었다. 동네 사람들이 놀라 뛰어왔다. 일대 소란이 벌어진 후에 불길이 잡혔다. 알고보니 제기를 태우다가 불이 났다는 것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손종일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고 고개만 설레설레 젓고 가 버렸다.
많은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손종일의 믿음과 전도는 중단이 없었다. 그 결과 미쳤다고 반대하던 부인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 때가 손종일의 아들 양원이가 7세 때였다.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새벽기도, 아침 저녁 가정 예배, 십일조 헌금, 주일 성수 등은 어길 수 없는 가정의 규칙이 되었다.
손종일은 어린 7살짜리 양원이를 주일학교에 보냈다. 비 오는 날에도 등에 업고 데리고 갔다가 시간에 맞추 데려오곤 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비가 온다고 거를 수 없고 눈이 온다고 게으름을 피울 성지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손종일은 양원이를 포함해서 (어려서는 양원이가 아니라 연준), 문준, 의원 등 세 아들과 봉연이란 딸을 하나 두었다. 그 세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다. 손종일의 믿음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손종일은 나중 교회 장로가 되었다. 교회가 없는 곳에 칠원교회를 세웠다. 1923년에 교회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손종일의 전 재산은 논 다섯마지기가 남아있었다. 그 부흥회에서 손 장로는 논 세마지기를 교회에 바쳤다. 두마지기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겨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부인이 나머지 두마지기를 다 헌금으로 바쳐버렸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배웠으니 손양원 목사가 태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양원 목사는 나중 일본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5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어 풀려났고, 1948년에는 여순 반란 사건으로 매산중학교 다니던 두 아들 동신 동인이가 공산당 청년에게 총살을 당했는데, 그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흥회 인도를 떠나던 중이라, 딸 손동희 양에게 부탁 하길
“내 아들 죽인 사람들이 잡혔거든 절대로 사형시키지 말고 때리지도 말게 해 달라, 그러면 내가 전도해서 회개시켜 예수 믿게 하여 내 아들 삼겠다!”
거절하는 손동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5년이나 너희들을 고생시켜 가면서 감옥생활을 견뎌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 . 제1계명과 제2계명이 하나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도 똑 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그 명령은 순종하면서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두 오빠를 죽인 자는 지옥 갈 것이 분명한데 내 전도하는 자로서 지옥으로 가는 그를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손동희 양은 나덕환 목사를 찾아가서 손목사님의 부탁을 전했다. 나덕환 목사는 계엄군을 찾아가서 이 부탁을 전했지만 계엄군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나목사님은 가족도 아니면서 이일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꾸 그러면 빨갱이를 옹호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목사님은 손동희 양을 데리고 계엄군 본부를 찾아갔다. 그때 마침 체포된 좌익 학생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트럭이 모자라서 안재선은 아직 끌려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몰매를 맞고 거의 반죽은 모습으로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손동희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 눈을 보는 순간 살인자의 눈에 소름이 끼쳤다고 할 정도였다. 나목사님은 다시 계엄군 사령관에게 손목사님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손목사님의 딸이 왔으니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손동희는 그 마음속에 원수를 죽이고 싶은 분노와 살리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수도 없이 교차했다. 그러나 결국 울면서 아버지의 뜻을 말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듣던 계엄군 사령관은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며 “아 너무 위대하신 분이다.” 감격을 하였고, 안재선을 석방해 주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7월 23일부터 9월 27일까지 전라도 일대를 북한군이 점령하였다. 이때 인공기를 게양하는 곳에 식량을 배급하였다. 손양원 목사님은 인공기 게양을 반대했고, 결국 애양원 식구들을 피난시켜야 했다. 직원들과 환우들을 피난 보내는 배에서 예배를 드린 후 손 목사님은 남아있는 애양원 환우들을 지키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 그는 순교하자 설교한대로 실천할 결심을 한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9월 13일 애양원 내부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가서 교육을 받던 중 인민군에게도 전도를 하였다. 9월 28일 총살과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차진국씨의 증언에 의하면 손목사님은 총살 중에도 “주여 주여”하고 부르짖었다. 손양원 목사님의 시신은 그 입이 다 으깨어져 있었는데 복음을 전하는 손목사님의 입을 돌로 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만 위해 살자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인해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을 위해 살면 주 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일 되게 하지 말자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
두 아들 죽인 원수를 아들 삼는 고통
나환자들과의 구별을 두지 않는 사랑
손목사를 취조한 악질 일본 경찰을 (킨조 히사오) 만나 그를 용서하고 전도하는 사랑
손목사님의 고대가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앞이 캄캄한 이 시국에 우리의 신앙 선조의 걸어가신 길 걸으리라 다짐해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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