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6: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주님은 제자들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답하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2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필요한데 어디서 무슨 수로 사다 먹입니까? 라고 반문했다. 1데나리온은 일군 하루 품삯이니 200데나리온은 오늘날 값어치로 환산하자면 200데나리온x 10만원 (노동자 하루 품삯) =2천 만원 정도이다. 노동자 약 7개월 어치 품삯에 해당된다.
그러자 주님은 빵이 몇 개나 있는지 알아 보라고 하신다. 알아보니 떡 곧 빵은 5개, 물고기는 2마리 밖에 없다. 사람들은 남자만 5천 명 정도이고 그 외 여자들과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무리에게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주님은 항상 누군가의 값진 희생에 근거해서 혹은 믿음에 근거해서 기적을 행하셨다. 요 6장이 병행 기사라면, 거기서는 한 아이가 빵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어 놓았다. 이 아이는 자기의 도시락을 내어 놓았을 것이다. 그 헌신에 근거해서 주님은 그것들을 손에 들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표하시다.
그리고 41절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한다. 빵을 찢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생선도 그렇게 찢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는지 그냥 통채로 1마리씩 제자 2사람에게 주셨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간 빵은 찢어서 5개를 12개로 찢었는지 그렇게 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분배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언제 빵이 다시 생겨났던가? 그런 언급은 없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때마다 다시 생겼던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예수님의 손에서부터 제자들에게 주는 순간 다시 생겨난 것인가?
어떤 과학자는 이런 기사를 읽을 때 질량 불변의 법칙에 어긋나는 이런 이야기는 순전히 믿을 수 없는 신화 정도로 간주했다고 했다. 물 위로 걸어간다거나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거나. 이런 일들은 과학자가 인정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일들이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초자연적인 일들이 많이 많이 기록되었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의심이 없이 믿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유사한 일들이 믿음 생활 가운데 체험되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는 얼마나 클까? 달나라에도 갔다 오니 엄청난 듯 하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는 불신자들의 눈이 완전 감긴 상태이다. 그래서 전혀 무지하다. 성경은 영적 세계의 일들을 말씀한다. 믿음으로 영안이 열리기 전에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하바드를 나왔다고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님으로 거듭 태어날 때에 비로서 성경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어떤 물리학자가 강연을 하는데 창 1-2장의 창조 사건이 일어나려면 하나님은 13차원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3차원의 존재이고 평면에서만 이동하는 2차원의 존재에 비해 1차원만 높아도 엄청나게 고차원의 존재처럼 다르다. 13차원 이상의 존재? 하나님은 13, 14차원 정도로 생각할 수 없다. 그분은 무한 차원의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정치권력은 마르크스 유물론 사상이나 혁명 사상에 세뇌당한 자들이다. 이들은 김일성 주체사상 파라고 (주사파) 하기도 하고 좌파, 운동권 출신 등의 말로 지칭된다. 이들은 세계에서 이미 폐기처분된 마르크스 유물론 혁명사상을 가지고 이 나라를 몰락의 길로 이끌고 있다. 하는 말마다 하는 정책마다 다 이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 온다. 왜 저런 사악한 자들이 이 나라의 운명을 끌게 되었나? 교회의 책임이다. 성도들의 책임이다.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무한하게 크다. 어리석은 민중은 어리석은 지도자 밖에 뽑을 수가 없고 자기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골라서 결국 같이 공멸하고 마는 것이다. 이 어리석은 백성과 지도자들이 깨어나도록 하여야 한다. 사악한 세력이 청와대를 적와대 혹 적화대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악한 북한 김일성 통치집단과 결탁해서 연방제를 실시해서 이 나라를 사단의 나라로 만들 꿍꿍이 수작을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탁월함을 온전히 말아 먹어 버리고자 결단한 흑암의 세력이다. 나라의 곳간을 텅텅 털어서 국민을 매수해서 환호하게 하고 몇 년 뒤에 쪽박을 차도록 할 심산인 모양이다.
청와대는 적화대로, 교육계는 전교조의 적화 혁명교육장으로, 노동계는 적화 전사 훈련장으로 돌변한 한국의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보면서 누가 편히 잠잔다는 것인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이 나라를 살리고자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앞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자기에게 모여든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빵을 공급하셨는데, 영적 양식인 말씀도 선포하여 저들의 영을 새롭게 하셨을 뿐 아니라 육적인 필요도 공급해 주셨던 것이다. 그러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을 오실 그 다윗 후손 메시아로 확신하고 (혹은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요 6:15). 이 군중들은 다윗 후손 메시아 왕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에게서 그런 왕의 자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 저분이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아이시다.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우리 나라의 독립을 찾고 우리의 영적, 육적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시다! 이렇게 군중은 그를 추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가진 지상적, 물질적 정치 군사적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구약에서 메시아 예언들은 구약 당대 청중의 이해 수준 때문에 그 당대의 관례들과 그 당대 지리적 요소들을 가지고 미래사를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예언의 제약이었다. 그렇지만, 먼 미래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일들은 구약적 그런 그림과 사뭇 달랐다.
예컨대,
슥 2:4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하였다면, 얼핏 보기에 예루살렘의 회복이 사람들의 증대와 가축들의 불어남을 가져올 것인 양 느껴진다. 주전 520년 정도에 예언된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선지자의 말씀인데, 여전히 예루살렘 회복이 미래사로 선포된 것이다. 그 미래는 언제인가? 주님 당대에도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넘치고 가축도 많았다면, 그 때에 성취된 것인가? 추방을 당함으로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희귀하던 때의 관점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사람과 가축의 충만의 견지에서 기술했지만, 5절이나 10-12절의 말씀을 보라.
슥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4절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는 메시아께서 오시는 때이다 (10절; 슥 9:9 참조). 그리고 그 때는 이방인들이 다수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 때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가운데서 영광이 되시고 사면에 불 성곽이 되시는 때이다.
이런 조건들은 메시아 예수께서 오셨던 그 때에 충족되었던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임하여 거하시는 조건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는 때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속죄제 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메시아 왕으로 정식 즉위하신 때 곧 성령님을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에게 부으신 그 때부터 모두 충족되기 시작했다. 그 때에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이키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하나님은 예루살렘, 곧 새 예루살렘인 교회 가운데 성령님으로 임재를 나타내시고 영광이 되시고 불성곽으로 성도들을 두르신다. 즉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또 이방인들 중에서 택한 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새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로 세우신다.
이처럼 교회에서 슥 2:4의 예언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여기 본문을 본다면, 4절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 돌아가서 사는 때에 성취될 것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가? 물으면 아마도 세대주의 자들은 지난 1948년 5월 14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슥 2:4의 말씀대로 사람들이나 가축들이 가득하게 되었으니 이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 아니냐? 고 할 것이다. 이런 해석은 전혀 본문의 바른 해석일 수 없고, 주님의 복음 전파의 가치나 십자가 사건을 완전 경시하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공적 생애 기간 동안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교회를 조직하셨고 부활 승천 하신 후에는 오순절 성령 보내심을 통해서 제자들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온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이런 복음 전파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고르고 선택하고 체를 쳐서 골라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모인 자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이방인들 중 택한 자들과 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이런 복음 사역과 무관하게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동으로 태동된 중동 이스라엘의 1948년 독립을 마치 구약 예언과 연관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모하고 그릇된 것이다. 저들은 여전히 예수님과 무관하고 예수님을 신성모독하고 있으며 교회를 파손하고 십자가에 침 뱉으며 믿는 자를 핍박하며 전도하는 사람들은 체포하여 5년 징역을 시킨다. 이런 이스라엘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고, 마치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을 대적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자들이라고 말함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면 12절에서 언급된 "거룩한 땅"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유랑하다 1948년에 팔레스틴에 독립을 선포하고 귀환했다면 대단한 사건이 아니며 그것이 구약 예언의 성취가 아닐까? 라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겉보기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구약 예언들은 그 당대인들이 들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미래사를 예언해야 했기에 그 당대인들의 견지에서 미래사를 기술할 수 밖에 없었다. 스가랴가 활동한 주전 520년 시대에 저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이미 일부가 귀환한 상태였지만, 거룩한 땅 곧 더러운 이방 땅과 구분되는 팔레스틴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리라는 말씀은 아직 귀환하지 못한 이방 땅에 거하는 많은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었던 예언이라 보아야 한다. 주전 520년에 예언하면서 주님의 초림과 그 이후 2000년의 교회사 시대를 지난 1948년의 상황을 예언했다고 보는 것은 본문의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 이방 땅에 거하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장차 귀환해서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리라는 예언은 구약적 방식으로 채색되었으나 그 진정한 알맹이는 (의미)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대로 예수님이 복음 전파를 통해서 혹은 그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골라 교회에 새 언약 공동체 새 이스라엘로 세우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거룩한 땅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적 관례대로 언급되었지만, 신약시대 곧 메시아 시대에는 온 세상을 지시하고 더 나아가 신천신지를 지시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롬 4:13이나, 출 20:12과 엡 6:3을 비교한다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저 중동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온 세상을 기업으로 얻으며 더 나아가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벧전 1:4).
예수님은 다윗 후손 메시아 왕으로 오셨으나 오늘 본문에 언급된 그 무리들이 가졌던 그런 정치 군사적, 지상적 통치자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메시아 사상은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인간을 건져내어 그들을 한 종족 이스라엘을 초월해서 온 세계적인 언약 공동체로 세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구약에서 제시된 구약적 메시아 사상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예언들의 그 시대적 제약성을 직시하여, 겉옷을 벗겨내고 그 속에서 알맹이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라 부른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축복들이 구약 예언들의 성취에 다름 아니다.
저 중동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들도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입되는 것이다. 집단적 종족적 언약 공동체의 시대는 구약으로 끝났고 이제 구원사의 새로운 장이 예수님의 초림으로 열렸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변천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중동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간주하고 저들을 축복하는 자가 복받고 저들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어리석은 사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그 사상을 가진 무리를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이라 부르는데, 미국에만 수 천만이 있다. 한국에도 그런 잘못된 신학사상을 가진 이들이 많은데 온누리 교회가 대표적으로 그런 교회에 속했었다. 이제 몇 년 전에 그 교회 지도자가 바뀌었으니 잘못된 세대주의 신학 버리고 점차 새롭게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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