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훈 목사, 나는 뉴욕의 거리 전도자의 옥의 티 (잘못된 사상, 189페이지 이하)
지용훈 목사, 김우현 감독, 김종철 감독, 한-이 성경 연구원 (송만석), 인터콥 등의 ‘이스라엘’ 사고는 기독교 복음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린다. 이들은 저 중동의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약 약속들의 수혜자들이라 확신하고 있다. 저들은 이스라엘을 따라서 축복하면 그가 축복을 받으며 (창 12:3), 예루살렘의 평안을 빌면 자기가 형통하게 된다고 (시 122:6)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즉 저들은 친 이스라엘적이어서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저들을 지지하며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안간힘을 쓰며 이스라엘의 회복 내지 부흥이 (복음 전도를 통한 이스라엘의 돌이킴) 열방에 축복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누가 저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아니하고자 하는가? 기독인으로서 그렇게 유대인을 적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저들에게 전도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앞에 언급한 사람들과 다른 것은 우리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믿기에 저들도 여타 다른 열방 사람들처럼 동일한 차원에서 전도하고자 하는 것이지 저들은 별난 민족이기에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앞에 언급한 이들이 (이후, 한 마디로 ‘세대주의자들’로 칭하겠다)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저들에게 우호적이고 저들에게 전도하고자 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은 재림 직전에 대거 집단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리라고 이해하고 유대인들이 재림 직전에 자기 본토로 돌아가리라고 이해한다. 왜 그렇게 보는 것인가? 왜 저들은 이스라엘에 그렇게 우호적이고 이스라엘에 안달해 마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보기에 대략 네 가지 근거에서 그리한다고 본다.
1) 재림 직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 성경은 유대인들이 열방에서 고토로 귀환하리라고 예언한다 (신 30장, 렘 16:14-15, 겔 39:28-29 등등)
3)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4)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네 가지 구절들에 대한 세대주의자들의 이해는 전혀 잘못된 것이다.
이제 차례대로 이런 구절들을 고찰해 보자.
1) 재림 직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세대주의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은 지금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지만, 재림 직전에는 대거 주님께로 돌아와서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저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열성적으로 함으로 재림을 단축시키리라 다짐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잘못된 열성이다. 왜냐하면 롬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일관되게 구원역사의 기간 내내 하나님은 오직 “남은 자만”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서 오직 이삭만 (50퍼센트), 이삭의 자녀들 에서와 야곱 중에서 오직 야곱만 (50퍼센트) 구원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엘리야 시대에는 다 배교하고 엘리야와 7천 명만 남았고 이들만 구원에 이른다. 여기서 7000이란 수치는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 전체”를 지시하는 상징적 수치이다. 왜냐하면 7은 완전을 상징하고 10도 그렇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남은 자가 있다고 한다. 바울 당대에 혹자가 사도에게 왜 너네들 유대인들은 자기 메시아가 왔음에도 그렇게 전부 배척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자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 고 말하고 그 예로 구원역사를 통해 아브라함 때부터 줄곧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하였다. 바울 당대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배척했지만 바울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 고 반문하였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항상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원사의 전환기에 말씀하기에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만으로 국한된다. 즉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갈 3:29)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갈 6:16).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을 결코 버린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롬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렇게 롬 9-11장에서 흐르는 근본 주제는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역사에 흐르는 원리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 중에서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하였다 (롬 11:7).
그런데 사도는 곧 롬 11:11에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전부가 넘어지고 배교한 것은 아니다. 남은 자는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희의 넘어짐은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실패는 이방인의 부요함이 된다면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라고 했다 (롬 11:12). 이 말씀도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전부 돌아온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 이해된다. 과연 그러한가?
사도 바울은 롬 11:13-14에서 자기는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했다. 즉 재림 때가 아니라 바울 자신도 이방인들에게 전도해서 유대인들로 시기나게 하여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도록 힘쓴다고 했다. 유대인의 충만함은 남은 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구원받는다는 암시를 주는 듯 하나,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진술은 필시 사도 바울의 전도 선교 사역 현장에서 특정 사건에 부딪혀서 나왔을 것이다. 예컨대, 행 13:46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하였다. 유대인들의 극렬한 반대와 적대 행위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유대인의 넘어짐 불신앙이 이방인들에게 결과적으로 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넘어졌지만 (배교) 언젠가 재림 때에 모두 주께로 돌아오리라 기대했던가? 그런 암시는 없다. 항상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고 했는데, 다시 그 사고를 번복할 것인가? 번복할 수 없다. 남은 자의 원리는 구원 역사 내내 작동된다. 하나님은 재림 직전에 사는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호의와 은총을 베풀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고 그런 전례도 없었다.
세대주의자들은 또한 롬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하면서 재림 때에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것이 마치 죽음에서 부활함과 같다고 말씀했다고 이해한다. 여기서도 재림 때에라거나 재림 직전에 라고 국한시킬 이유가 없다. “그 받아들이는 것”이 유대인들을 재림 직전에 전부 하나님이 받아 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당대에도 유대인 남은 자를 하나님은 받아 들이셨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음에서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로마서나 신약 어디서도 이스라엘이 재림 직전에 전부 예수께로 돌아온다고 하는 말씀이나 사고는 없다. 앞에 언급한 롬 11:25의 “이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이런 식으로 온 이스라엘 곧 모든 남은 자 이스라엘 전부가 구원에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시대마다 남은 자가 있고 그런 식으로 남은 자들이 전부 구원에 이르리라는 사고이지 재림 직전에 온 이스라엘이 대거 집단 개종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음으로
2) 성경은 유대인들이 열방에서 고토로 귀환하리라고 예언한다 (신 30장, 렘 16:14-15, 겔 39:28-29 등등)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열방에 흩어졌다가 고토로 귀환하리라고 예언하는 구절들이 많다. 그런 구절들은 주전 586년 바벨론 추방으로 열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주전 538년 페르시아 대왕 고레스의 유대인 귀환령으로 유대인들이 고토로 귀환했을 때 1차적으로 성취되었고 주전 457년이나 445년에도 역시 유대인들이 열방에서 고토로 귀환함으로 성취되었다. 그런데 사복음서 기자들은 하나같이 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 예언인 사 40:3-5을 놀랍게도 예수님의 길을 인도한 사도 요한의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세례 사역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다 (마 3, 막 1, 눅 3, 요 1장). 이 말은 열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의 고토귀환 혹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아 교회를 구성함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작하셨고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을 증거함으로 교회사 내내 이사야나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취되고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롬 11장을 그릇 이해하여, 이스라엘의 회복 혹은 부흥이 마치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집단 개종함으로 일어나는 일인양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롬 11장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며 구약 예언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내용도 아니다.
유대인이 세계 어디에 살건 그들 중에 남은 자가 예수님을 자신들의 메시아로 영접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그는 영적으로 고토에 귀환한 자라는 것이다. 이제 저 팔레스틴 중동의 작은 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무관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으로 구원역사는 한 종족 이스라엘의 집단 구원 체제에서 개개인이 주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된 믿는 성도들이 받을 기업은 저 중동의 작은 땅 때기가 아니라 온 세상이며 (롬 4:13, 엡 6:3과 출 20:12 비교), 또한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기 (신천지)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재림이 가까워 온다고 고토로 귀환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 좁은 땅에 가서 뭐한다는 것인가? 거기에 성전이 있는가? 제3 성전이 거기에 세워진다고?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
이제 다음 사항을 보자.
3)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저 중동의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저들을 축복해야 우리가 축복을 받으리라 이해한다면 그의 신앙은 아직도 구약에 머무는 것이다. 이제 구원사의 전환으로 신약시대 성도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갈 3:29). 믿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새 이스라엘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 그러기에 구약의 모든 약속이나 예언의 수혜자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에수님을 믿는 우리들이다. 우리 성도 곧 교회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성도 곧 교회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은 저주하신다는 의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4)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는 말씀도 바로 3)의 경우처럼 이제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이 된다. 신약에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지상의 저 중동 땅 구 도시가 아니라 교회 곧 새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 위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계 21:9, 히 12:22, 갈 4:2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 중동의 구 도시 예루살렘은 성경에 의하면 영적으로 소돔이고 애굽이다 (계 11:8). 그리고 교회를 대적하는 유대교의 회당은 사단의 회당에 불과하다 (계 2:9, 3:9). 왜 이렇게 간단하고 평이한 신약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유대교를 옹호하고 유대인을 별나게 좋아하는 척 하려 하는가? 그들도 이제는 열방의 어느 민족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구원을 얻는 한 종족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들은 더 이상 구약시대처럼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는데도 이런 평이한 신약의 가르침을 무시하려 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복음을 대적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마귀의 자식이 되어 사단의 편에 서겠다는 것인가? (요 8:44, 마 23장 “화 있을진저”)
우리가 제시하는 이런 사고의 글을 논박하는 '최정현'이란 이는 이렇게 논박을 했다:
이 글은 복음과 언약을 구별하지 못하신 글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복음이 아니라 언약에 의합니다. (롬 11:27) 그리고 복음과 택함은 다른 것이며 (롬 11:28) 택함은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과 택함을 구별하지 못한 글이 이 글입니다. 언약에는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이 있고 율법의 언약이 있습니다. 율법의 언약에는 첫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새 언약이 첫 언약에 대한 대체 언약이라는 것을 첫 언약에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포함시키고 복음을 새 언약에 포함시켜 복음으로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폐한 것이 이 글입니다. 하나님은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은 변치 않는다고 맹세로 보증하셨기 때문에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은 이 하나님의 맹세를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하신 언약이 변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저주로 열국에 흩어지나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에 의하여 다시 돌아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말로 만들어버린 이 글은 비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들지 마십시요. 새 언약도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인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는 깃이요(히 9:15) 복음도 약속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엡 3:6) 그러나 이 글은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변개한 것으로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복음과 언약 곧 복음과 택함을 바로 보십시요.
이 사람은 전형적인 세대주의자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말씀 전체가 한 하나님의 일관된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여기서 보듯, 성경의 언약들이나 복음을 별개로 구분하고 두부 자르듯 잘라서 별개로 존재하는 양 이해하는 것이다. 열조에게 맹세로 주신 언약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고토로 돌아오게 되어 있기에, 복음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최정현은 엡 3:6을 언급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글에서 엡 3:6을 왜 언급했을까? 의아해 하면서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세대주의 신학에서 엡 3:4-6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들이다.
엡 3: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말씀을 근거로 세대주의자들은 (진보 세대주의자들도 그렇게 이해하는지 모르지만) 원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예루살렘에 다윗 왕국을 재건하시고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와서 예배를 드림으로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가졌지만 (사 2:2-4, 슥 14장 등) 유대인들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자 그런 계획은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으로 미루시고, 임시방편으로 원래 계획에도 없던 교회를 창설하시고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향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임시방편의 계획은 구약 시대에는 알려진 바가 없고 오로지 사도 바울에게 제일 먼저 계시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임시 방편화 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전능하심을 폄하시키는 누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최정현이란 이가 앞의 글에서 보듯, 복음과 무관하게 열조에게 주신 맹세로 주신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이 고토로 귀환하리라 하는데 복음과 무관하게 재림 직전에 예수님을 전부 믿게 되리라 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복음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멸시하는 자세이고 또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유대인과 연관해서는 적어도 없었어도 좋았을 하찮은 그 무엇으로 취급하는 자세가 아닐까?
왜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세대주의자들이 원래 하나님의 열방 구원 계획은 예루살렘에 다윗 후손 메시아가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이방인들이 거기로 순례해서 거기서 경배하고 구원에 참여한다고 보았던가? 그것은 사 2:2-4이나 슥 14장 같은 곳에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미래사를 그 당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당대 관례대로 지리적 요소들로 묘사했기에 그런 묘사를 문자적으로 이해한데서 야기된 오해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게 유대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당대인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려는 적응의 일부였고 그 내용 알맹이는 우리가 지금 신약 시대에 교회에 주어지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이었다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 하나님은 세대주의 자들이 오해하듯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이방인들의 교회를 만드시는 우준하신 분이 결코 아니다. 그분의 구원 계획은 영원한 것이며 창세 전에 우리를 이미 선택 예정하셨다고 사도 바울은 엡 1장에서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세대주의자들은 구약 예언 이해는 신약 기자들의 예언 해석 방식을 버리고 구약 예언들을 선포한 원 저자 선지자들의 원래 의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세일하머나 카이져 같은 이들). 아니다. 구약 예언들은 모두 신약 기자들이 해석한 방식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구약 예언에 그리스도를 맞추면 그리스도가 너무나 크셔서 구약 예언에 딱 들어 맞지 아니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구약 예언들을 전부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넉넉하게 전부 수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Christotelic Interpretation (그리스도 중심 해석법) 이다. 구약 예언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통해 전부 이루어진다. 이 해석과 달리 구약 이스라엘을 신약 교회와 분리시키고 구약 예언을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일 수 없다.
어떤 “나무”라는 필명의 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육적인 이스라엘 중심의 관념을 깨뜨리신 것이” 라 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세대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는다는 신약의 기본사상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폐지된 구약의 제사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도대체 신약성경을 어떻게 읽으면 그런 해석이 나오는가? 다들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세대주의 이론 중 핵심은 구약의 예언이 신약의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약의 교회가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있다. 이것보다 이단적인 사상이 어디 있는가? 신앙과 그 경험에 문제없어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보편화시키고 절대화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신구약의 구분과 관계와 신약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을 재해석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인데 세대주의 신학사상은 기독교 사상의 근본을 흔드는 사상이다.
라고 지적했다.
세대주의자들은 듣고 있는가
지용훈 목사, 나는 뉴욕의 거리 전도자의 옥의 티는 그의 잘못된 종말론 사상이다 (189페이지 이하)
지용훈 목사, 김우현 감독, 김종철 감독, 한-이 성경 연구원 (송만석), 인터콥 등의 ‘이스라엘’ 사고는 기독교 복음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린다. 이들은 저 중동의 이스라엘 혹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약 약속들의 수혜자들이라 잘못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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