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새 언약 체제하의 성도들과 정치

중일사랑 2020. 7. 15. 00:45

a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b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c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d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고후 6:16)

 

d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도 여러 번 나타난다 (출 6:7, 레 26:12, 신 29:13, 렘 7:23, 24:7, 30:22, 31:1, 32:38, 겔 14:11, 36:28, 37:23, 27, 슥 13:9, 히 8:10, 계 21:3). 이 말씀은 선지서에서 새 언약 체결을 예고하는 표제어 가능을 한다. 반면 신약에서 이 말씀은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체결되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새 언약의 의미

'새 언약'은 창조 언약 (창 1장, 렘 31:35), 아담 언약 (창 3:14이하), 노아 언약 (창 9장), 아브라함 언약 (창 15, 17장), 모세/ 시내산 언약 (출 19-24장), 영원한 제사장직 언약 (민 25:12, 13), 다윗 언약 (삼하 7:11이하) 등을 모두 갱신하고 흡수하여 체결되는 최종적, 종말론적 언약이다. 언약 갱신이란 계약 갱신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년 전세 계약을 갱신하는 것은 그간 물가가 올랐거나 아니면 외부적 환경이나 당사자의 교체 등의 이유로 새롭게 쌍방간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언약 갱신도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이시나, 시대가 흘러 환경이 달라지고 인간 당사자가 달라지므로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새 언약 체결 의식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체결 완성되었지만, 그 의식적 (제의적) 형태는 십자가 사건 전 날 밤, 곧 유월절 밤에 가졌던 그 최후 만찬을 통해 거행되었다. 왜냐하면 언약 갱신이나 언약 체결은 쌍방 간의 법적 관계 설정으로서, 반드시 피를 흘리는 제물을 근거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창 15장, 렘 34:18; 출 24:8). 주님은 짐승 제물을 대신하여 새 언약 체결 의식에서 제물이 되셨고,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당사자 쌍방 간을 중개하는 중보자가 되셨다.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 편을 대표하셨고, 그 최후 만찬에 참석하였던 제자들은 인간 편의 대표였다.

 

새 언약의 인간편 당사자

렘 31:33에서 (히 8:8이하)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혹은 이스라엘 집과 세우리라 하셨다 (렘 31:31, 33). 최후 만찬에 참석했던 그 제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집의 대표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결국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닌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구 언약이 유대인 종족에게 주어졌던 것이었음에도 (출 19장), 그 유대인 중심의 언약 공동체는 이방인을 배제하는 배타적 종족 공동체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 약속을 주실 때 (언약은 쌍방 간의 관계설정이란 측면이고, 약속은 그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의 성격을 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한 후손을 약속하셨고, 그의 후손을 통해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창 12:3, 15:5-6, 18, 17:5이하). 

 

그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땅의 티끌처럼 무수하게 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생식기에서 나온 혈통 후손만 아니라, 이방인 성도까지 포함하였다. 아브라함의 혈통 후손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지만, 아브라함 후손을 통해 참 하나님을 알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언약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결국 그렇게 복을 받은 이방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에 가입되는 것이다.

 

롬 1:2에서 복음은 선지자들이 예고한 것이라 할 때, 혹은 바울 사도께서 호 1:10, 2:23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입술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자기 백성이 될 것을 예고하셨다고 해석한 일 (롬 9:23이하), 혹은 바울 사도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라 할 때, 바로 아브라함 언약에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언약 백성에 가입되는 사실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그리고 롬 4:3에서 바울 사도께서 창 15:6을 해석할 때, 단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므로 둘 사이에 유추가 성립된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롬 4장은 창 15장 강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 언약이 벌써 이방인이 믿음으로 언약 백성에 가입된다고 약속했다고 말씀한다. 즉 현재 전파되는 새 언약의 복음은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고 성취라는 것이다. 

 

12제자는 말하자면, 구약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새 언약 공동체의 토대가 되었다 (엡 2:20, 계 21:14). 그래서 맛디아라는 사람을 가룟 유다 대신해서 기어이 12란 수자를 맞추었다 (행 1:26). 비록 맛디아란 사람이 선출된 이후에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행적을 알 수가 없어졌을 정도로 별 의미를 그에게 둘 수 없음에도.

 

이렇게 여러 말로 최후 만찬에 참석한 제자들의 성격에 대해 설명한 것의 요점은 새 언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집과 체결되었다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은 단지 유대인들이란 종족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언약 공동체에 가입될 많은 이방인들까지 포함하였다는 점이다.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호칭되고 있고 (갈 6:16),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던, 성도, 택한 자, 하나님의 백성,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의 교회/ 회중 (구약 '카할, 에다') 등등의 용어들은 모두 이제 새 언약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다 (롬 1:1, 7, 고전 1:2 등). 

 

새 언약의 예고

새 언약은 렘 31:31이하, 32:40에서 예고되었는데, 사실 이사야서나 (사 55:3, 61:8) 에스겔서에서도 (겔 16:60, 37:26) "영원/ 영영한 언약"이란 표현으로 그 개념이 나타난다 (히 13:20에서 영원한 언약의 피 참조). 이 새 언약 예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사 53장) 성취가 되었고, 성령님을 부으심과 복음 전파를 통해 그 축복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되었다. 

 

새 언약의 축복들

새 언약의 축복들은 무엇인가? 새 언약은 앞에 언급했던 그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언약들을 전부 갱신하고 최종 완성시킨다. 더 이상 새로운 언약은 없다. 그 축복은 무엇보다 새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죄 용서를 선물로 준다 (렘 31:34). 그리고 새 언약은 구 언약이 (모세 언약) 돌판에 계명을 새긴데 반해, 마음 판에 법을 새긴다 (렘 31:33). 

 

새 언약은 앞서 언급한 대로, 모든 옛 언약들을 갱신하고 완성시키며, 옛 언약들이 약속한 바들을 완성시키면서 미완의 것은 흡수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로 선고된 사망과 노동의 고역, 출산의 고통, 땅의 저주 등은 새 언약 체결을 통해 이제 완성되어 폐기되었다. 사망의 저주가 새 언약 참여자들에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지 말아야 할 것인데 여전히 성도들은 죽는다. 이 죽음은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는 지속되지만, 하나님과의 단절이란 영적 형벌과 두려움이란 육체적 사망의 저주는 성도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생물학적인 죽음은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것마저 폐기하고 제거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 저주로 임한 여러 악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은 구속받은 성도들의 성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너무나도 많이 끼친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이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을 떠나 세상의 오염에서 청결케 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영원 세계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새 언약 참여자들은 이제 사망이나 노동의 고통, 출산의 고통, 땅의 저주 등을 더 이상 당연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이 내게 더 이상 부담이 되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오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새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을 완성시켰다. 이제 아브라함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인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고,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던 영광과 예배, 약속들과 만 가지 은혜들을 우리가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고, 그분에게 내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노아 언약은 홍수로 이 세상을 다시 멸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인데, 생물들도 여기 참여한다 (창 9:10). 언젠가 주님이 오실 때, 이 지구는 불로 태워지고 녹아지고 리모델링을 거칠 것이다 (벧후 3:10이하). 그렇다고 현 지구가 불로 태워져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롭게 갱신되는 것이다 (롬 8:19이하). 새롭게 된 신천지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들만 아니라 사 11:6-9이 예고한 야수 자연계의 완전한 조화를 보게 될 것이다 (롬 8:19이하). 

 

새 언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지구가 언젠가 폐기되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지구는 새롭게 갱신되어 영원한 우리의 처소가 될 것이다. 지금 천국은 육신이 없는 영혼들의 고향이지만, 신천지는 여러 생물들과 의롭게 된 우리 성도들이 거주하는 영원한 고향이 될 것이다. 

 

새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그 갱신인 모압들 언약을 (신명기) 갱신 완성하였다. 따라서 율법의 제의적 (의식적), 이스라엘 국가적 법규들은 모두 완성 폐기된다 (엡 2:15). 반면 나머지 영구적인 성격의 법규들은 새 언약 체계 안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율법이 모두 폐기되었다고 이제 새 언약 성도는 율법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롬 3:31). 롬 10:5-6에서 시내산 언약과 모압들 언약 말씀이 서로 대조되어 나타나는데, 이 부분은 주석가들에게 난제를 제공한다. 하지만, 새 언약의 견지에서 본다면, 그 구절은 시내산 언약과 모압들 언약이 새 언약으로 갱신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새 언약 체결로 시내산, 모압들 언약을 성취되었고, 이제 증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새 언약 내용이다. 

 

새 언약은 비느하스에게 주어졌던 영원한 제사장직 언약도 성취하였고, 또한 다윗에게 주어졌던 다윗 언약도 성취하였다. 이제 다윗 후손 메시아 왕, 혹은 메시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성도들이 바로 왕이며 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벧전 2:9, 계 1:6, 2:26-27, 3:21, 5:11, 20:4-6).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시고 (계 17:14), 만주의 주이시며 (계 19:16), 세상 임금들의 머리로 (계 1:5) 지금 성령님과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그의 권세와 통치권은 온 우주에 미치며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그가 다스리신다. 그의 통치권에서 벗어날 자나 피조물은 아무 것도 없다. 

 

성도들과 율법 성취

새 언약 성도들은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를 통해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자들이다 (롬 13:8-10, 갈 5:14). 

 

성도들과 신앙생활

구약 성도들은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막은 이동 성전이었고,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정착 생활 때 신앙생활의 중심지였다. 주전 586년에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고, 주전 516년에 추방에서 귀환한 무리들이 스룹바벨 지도 하에 성전을 재건하였다. 이를 제2 성전이라 한다. 그러다가 헤롯 대왕 때에 거의 재건축 수준의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었고 이후로 건물 성전은 없었다. 

성전은 유대교 신앙의 중심지였으나, 주후 70년에 하나님은 구원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이 완성되었기에 건물 성전을 파괴하셨다. 더 이상 건물 성전을 필요치 않다. 이제 성도의 몸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떤 건물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성령님과 개개인이 혹은 성도들이 모여서 교제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한 폐렴을 계기로 교회를 집중 억압하는 정권의 행태를 목도하게 된다. 교회는 엄밀하게 말해서 건물이 아니고, 성도들의 모임, 회중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교회당 혹은 예배당이라 해야 정확하다.

 

우리의 몸에 오셔서 거주하시는 성령님과 어떤 교제를 갖고 신앙생활하는가? 한 번은 중국 지하 교회에 가서 롬 8:9-10을 근거로 성령님의 내주와 교제란 주제로 말씀을 증거했더니 설교 후에 질문 시간을 갖는다고 하더니, 청년들이 주로 질문을 하였다. 지금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목사님이 가르치시는 것과 정 반대이다! 라고 했다. 자기 목사는 기록된 말씀 중심이고 성령님과 교제하고 음성을 듣는다거나 환상이나 꿈과 같은 것은 일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 오병이어 교회 권영구 목사의 신앙 간증을 소개하였는데 거기에는 신령한 여러 체험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단면적, 1차원적 말씀 중심의 정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니다! 역동적인 신앙생활, 성령님과 교제하는 인격 신앙이 필요하다. 기록된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의 절대 기준이다. 그러나 말씀을 매개체로 성령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없다면 그 신앙생활은 죽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새 언약 체제 하에서 세상을 사는 성도들

우리는 우한 폐렴이 만연하고 부정선거로 사회적 도덕 질서가 무너져 버린 나라, 자살 혹은 좌우파의 진영 논리에 갇혀 버린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혹은 지구 어디에서 산들, 만연한 죄악과 재앙,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환경과 시점에서 성도들은 정치나 사회와 고립되어 수도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극적인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이 사회와 정치를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는 자들이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영적인 방면에만 관심을 갖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정치와 교회 분리 원리란 (정교 분리) 그럴듯한 사고도 한 몫을 해 왔다. 그리고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모습은 사실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런데 21세기 민주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자기가 사는 나라의 정치나 사회의 방향성에 무감각하게 복음 전파만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 사고라면 투표도 하지 말고, 나라야 어떻게 되건 기도와 복음 전파만 해야 할 것이다. 민주 사회는 그 백성이 주인이 되어 나라의 방향을 정하는 사회이다. 그렇다고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제쳐두고 주인이란 의미는 아니지만, 이전 왕정시대 군주의 종으로 간주되던 그런 신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나라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 흐름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고 교회의 입을 막고 동성애나 우상숭배를 죄라고 설교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부정 선거로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백성의 신상 정보를 디지털 기계에 입력하여 중앙에서 백성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감시하는 그런 사회와 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그냥 방관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신앙 자유를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 언약을 깬 정권은, 곧 국민의 주권을 부정 선거로 강탈하고 양심을 유린한 이 정권은 그 합법성이 이미 무너진 상태이다. 

 

중공이나 북한의 체제에 접근해 가는 이 나라 사회주의 정권, 부정 선거와 사상적 헌법 파괴를 통해 이미 합법성을 상실한 정권을 성도들은 저항하고 무너뜨려야 한다. 새 언약 체제 하의 성도들의 삶은 한편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고, 한편으로 영원한 세상의 후사들답게 복음 전파와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두 가지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사실 벅차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