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믿음의 장군 나희필 장로

중일사랑 2020. 10. 20. 21:57

신앙의 장군 나희필 장로
믿음의 장군 나희필 장로의 신앙
< 제 75 호 2002. 4. 1 발행 >
- 목차 -
I. 대통령이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잔을 거부했던 만찬장의 사건
II. 믿음의 장군 나희필의 굳건한 신앙
III. 태중에 있던 박정희를 유산시키기 위한 어머니의 죽음의 몸부림
IV. 술이 역사에 남긴 비극과 교훈


1 대통령이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잔을 거부했던 만찬장의 사건

 

1968년경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방 시찰을 마치고 육군의 군단장 이상 주요 지휘관들을 위한 만찬 파티를 춘천에서 베풀었다. 특히 대통령이 베푼 만찬 자리이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이 행사의 준비는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국방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만찬장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은 밝은 미소를 지우면서 대통령 석에 앉았다. 이 만찬장에는 2군단 예하 사단 중 3개 사단장만 착석할 수 있는 자리에 오늘의 주인공 나희필 준장도 초청을 받았다. 이날 만찬장에는 위로는 국방장관에서부터 대장, 중장 등 육군 고위급 장성들이 참석했는데 그 중에는 나희필 준장이 자신의 부대운영에 대한 보고를 대통령에게 직접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영광을 얻었다. 보고가 끝나자 박 대통령은 나희필 장군에게 사단 운영에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데 대해서 높이 치하한다면서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습을 본 군 고위급 장성들은 이제 나희필 준장이 드디어 8년 만에 소장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모두들 기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앞에 있던 빈 술잔에다 첫 잔으로 술을 가득히 따랐다. 이때 바로 옆 자리에 앉은 국방장관이나 사령관, 군단장 등은 누군가는 오늘 그야말로 임금님으로부터 어사주(御賜酒)를 받는다는 기분으로 잔뜩 기대감에 차 있었다. 박 대통령은 넘실거리는 술 잔을 조용히 들더니 장관과 대장도 중장도 다 지나치고 나희필 준장에게 그 술잔을 권하면서 사단 운영을 정말 훌륭하게 잘 했다는 또 한번의 격려와 함께 "축하의 술잔이요"하면서 손수 잔을 권했다. 그런데 이날 만찬장 사건의 발단은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났다. 

 

나희필 준장은 모태 신앙으로 어머니로부터 자상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 후 군대 생활의 그 수많은 술자리에서 술은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특히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 그를 유별히 아끼던 직속 상관은 장교가 술을 피하면 대인관계도 멀어지고 앞으로 진급에서도 큰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경험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희필은 장교로 임관되는 그날부터 자주 생기는 파티 장소의 술자리에는 항상 콜라 잔만이 외로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술 먹는 사람보다 더 즐겁게 술 좌석을 이끌어 나가는 성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일 그가 부임하는 부대마다 장병들을 항상 신앙으로 보살펴 주다 보니 장병들의 근무 사기는 날이 갈수록 왕성해졌고 군대 내의 각종 안전사고가 현저히 줄었다. 당시 1군 사령관이었던 한신 장군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러한 현상에 감동하여 신앙 전력화, 전군 신자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 장군이 당시 부임해 온 27사단의 장병들 중 기독교인 장병은 11%에서 25%로 늘어났다. 잘 먹이고 잘 훈련이 되고 신앙으로 잘 무장된 우리의 국군은 세계 최고의 강군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이때부터 군 지휘관들이 가지게 되었다. 즉 우리 국군은 (신앙)이라는 첨단 무기를 각자가 하나씩 더 소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신앙 전력화로 인해 27사단을 모범 사단으로 만든 나 장군에게 오늘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격려와 함께 축하의 술 잔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권하는 축하의 술 잔을 나 장군은 곤혹한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 받지 않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이날 대통령이 술잔을 들고 있던 시간은 불과 1분도 안되었지만 이 광경을 바라본 만찬장의 사람들은 아마 10분은 더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 장군이 술 잔을 받을 때까지 박 대통령은 한치도 흐트림 없이 계속 술 잔을 나 장군 가슴 앞에 대고 있었다. 이 순간부터 화기애애하던 만찬장은 고요하면서도 무서운 적막감에 쌓였다. 그런데 이 광경을 아주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특별히 이 자리에 초청된 장병들이었다. 그들이 호기심으로 본 이유는 평소 자기 사단장은 "신앙인은 절대 술을 과음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또 자신은 오늘날까지 술이라고는 단 한 방울도 입에 댄 적이 없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 사단장이 오늘 대통령이 권하는 축하의 술 잔도 끝까지 받지 않을 것인지?....


한편 만찬장의 모든 사람들의 시야는 술 잔을 권하고 있는 대통령 표정에 계속 집중이 되고 있었다. 분이 차면 육영수여사에게도 담배 재떨이를 날렸다는 말도 있었는데 오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술 잔을 거부하고 잇는 이 사단장에게 과연 어떤 돌출 상황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하고 이 순간을 가장 안절부절한 사람은 나 장군의 직속 상관 격인 국방장관이었다. 이러다간 틀림없이 술 잔이 내동댕이 칠 것 같은 예감이 국방장관의 머리를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나 장군이 이처럼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한번 맺은 그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의 체면을 봐서라도 모른 체 하고 넙죽 받아 마셔 버릴까?..... 그러나 나 장군은 하나님과 약속한 그 굳건한 믿음의 정절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이윽고 드디어 나 장군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 저에게는 술 대신 콜라나 사이다를 주십시오! 저는 술을 못합니다!" 일언지하로 대통령의 축하 술잔을 거부해 버리자 박정희대통령은 나 장군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이 날의 이순간을 지켜봤던 한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고 난 후 엄청난 정적 속에 잠긴 것이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본 격이 된 대통령의 굳은 표정을 본 국방 장관이 순간 벌떡 일어나 "각하 나 장군은 원래 술을 못합니다. 그 잔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하고 잔을 뺏다시피 하여 단숨에 마셔 버렸다. 대통령의 체면 손상! 그 위기의 순간을 국방장관의 기지로 일단 넘어갔지만 만찬장의 분위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의기소침해 있던 나 장군에게 다가 가더니 "니가 진짜 기독교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찬장을 나가버렸다.
이슬람권 국가 원수가 방문하는 나라의 만찬 석상에서 양국 국가 원수가 건배를 할 때 어떤 종류의 술을 사용하느냐를 두고 양국 외교 팀의 사전 의논과 준비는 항상 골칫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국빈 만찬에서 건배의 순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서로 진행된다. 참고로 아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 만찬 석상에서 축배를 거절당한 예는 이때가 아마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이날 만찬이 끝났을 때 박종규 경호 실장이 나희필 장군에게 다가와 "선배님 해도 너무 했습니다! 꼭 그렇게 각하에게 망신을 주어야 합니까? 국군의 통수권자요 대통령으로서 손수 축하의 술 잔을 권하면 정중히 받아서 입잔이라도 하는 척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분 초를 따지며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 또한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펴야 하는 경호 실장으로서 이 날의 그 순간의 초조함과 그 고뇌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이 떠나간 후 선배 장군들이 나 장군에게 찾아와 너무 경솔했다는 질책을 했다. "이 사람아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인데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지 내일 일찍 책상 정리나 하게.”‥‥‥‥


사단장 관사로 돌아온 나 장군은 정작 매우 불안해야 될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면서 "내가 과연 그 정도의 신앙에 대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다. 내일 당장 청와대에서 어떤 책벌이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겠지 내가 육사를 졸업 할 때 구대장께서 장교가 되어 술을 안 먹으면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나를 오늘날 장군까지 진급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나 장군은 기도와 함께 이날 밤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런데 나희필 장군은 왜 술을 그토록 싫어했을까? 그것은 아마 어린 소년시절 술을 자주 마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항상 고생하던 모습이 그가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항상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더 크게는 당시 평양에서도 소문난 전도사인 어머니(임태화)의 눈물의 기도가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 자신이 모태 신앙인으로 술을 자주 마시게 되면 인생을 사는 동안 술의 즐거움보다 후회스러운 일들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군복을 벗을 것으로 생각한 나 장군은 다음날 책상 정리를 끝내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별을 하나 더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영전되었고 다시 3군 사령부 창설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2 믿음의 사람 나희필, 쥐도 새도 모르게 즐기는 하루 밤을 발로 걷어차다


나희필 장군의 군대생활에는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월남전이 치열할 때 우리나라 장성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월남으로 갈 때는 꼭 대만의 한 호텔에서 1일 숙박을 하게 된다. 잠이 들 무렵 호텔 지배인이 나 장군 방을 노크 하더니 정중히 인사를 하고 책 한 권을 건넨다. 여자들의 나체 사진첩이었다. 한 사람 골라 주시면 보내 주겠다고 했다. 물론 돈은 출장비에서 계산이 다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나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내일 새벽 교회를 가야 하니까 교회 위치나 알려 달라고 했다. 그 후 이 호텔 지배인은 한국의 고위 인사들이나 장성들이 이 호텔에 유숙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립이래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과거도 지금도 오직 한국의 나 장군 한 사람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 장군의 부인 박영례 권사는(새문안 교회) 이 일화를 필자에게 두 번이나 알려 주었다. 특히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이 그것도 공짜로 수청(?)을 들겠다는 아가씨와 하룻밤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평소 남편의 믿음이 그날 밤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러니 박영례 권사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그 애틋한 사랑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하루빨리 남편과 천국에서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한편 나 장군이 육대 총장에서 만기 제대 예편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나희필이는 더 있어야 할 인물인데"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나희필 장군이 제대 후 어느 날 밤 심야에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의 차장보 자리의 인선문제로 며칠 밤을 지새던 김재규 부장은 문득 나희필 장군이 생각나 새벽 두 시에 전화를 했다. "나 장군이야 말로 바로 이 자리에 앉을 가장 적임자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오" 당시 이 차장보 자리는 중앙 정보부의 막대한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요직이기 때문에 청렴 결백성이 요구되는 인물을 추천해야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김재규 부장의 보고를 받고 난 박정희 대통령도 흐뭇한 표정을 지우면서 "일국의 국가 원수가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 잔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믿음의 장군 나희필이야 말로 그 어떤 압력도 부정도 유혹도 능히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잘 추천했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또한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도 나희필 장군에 대한 칭찬을 자주했다. 얼마 후 대통령은 나희필을 다시 장관급인 비상 기획원 위원장 자리로 영전시켰다. 그런데 만일 이때 영전이 안되었더라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자리에 나희필은 김재규와 함께 꼭 참석을 해야만 되는 확정적 인물이었다.


3 태중에 있던 박정희를 유산시키기 위한 어머니의 죽음의 몸부림

 

고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 보통학교 때부터 6년 간 고향에 있는 상모교회를 다녔다. 당시 부모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시절 박정희 소년은 그래도 자유롭게 교회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백남의 씨의 배려나 또는 직접 권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선산군내 동화 구연 연합 경연대회서 박정희 소년은 찬송과 동화 구연에서는 늘 일등을 했다. 특히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구약 성경구절의 그 장면을 가장 멋있게 읽었고 또 좋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가 대구 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교회 출석이 중단되었다. (당시 박정희와 동갑내기로 같이 교회에 다녔던 장기현 장로의 증언)
1966년 추석 날, 선산에 성묘를 마치고 고향의 상모교회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소년시절에 이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교회 건물이 많이 상했네" 하면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교회를 다 돌아보고 떠 날 때 그는 몇 번이나 뒤돌아 보면서 옛 교회생활을 회상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상모교회 증축 기금에 보태라고 100만원을 보내 주었다. 한편 앞에서 언급된 박정희 대통령의 어머니 백남의 씨가 아들을 교회에 나가게끔 권유한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과 연관시켜보면 결코 우연이 아닌 그 무엇인가 선뜻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내 어머니께서는 나를 품으셨을 때 경제적 고통 때문인지 나를 출산하지 않으려고 간장을 마시고 또 산 속에 들어가 넘어지고 또 언덕에서 뒹굴면서 나에게 죽음을 강요하셨지만 그러나 하늘의 뜻인지 나는 죽음의 위기를 뚫고 기적적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네 세상 만물에는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데 내가 살아서 출생하게 된 것에는 필시 하늘의 뜻이 있지 않았을까?”‥‥‥‥


이 말은 지난날 박 대통령이 당시 청와대 사정담당 비서관으로 근무하다 서울 시경 국장으로 발령을 받고 떠나던 이건개 씨에게 들려준 말이다. 즉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창조주의 섭리가 절대적으로 있었다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그의 어머니 백남의 씨는 가난이 산천을 휩쓸었던 그 시절 그 가난이 너무나 무서워 임신중인 박정희를 유산시키려고 간장을 바가지에 가득 부어 꿀꺽꿀꺽 삼키기도 했고 높은 바위에 올라가 눈을 감고 뛰어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논둑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 왈칵왈칵 넘어지는 일 등 옛부터 전래되어온 무서운 유산 방법의 종류를 전부다 실행했지만 태중의 아이는 결코 죽지 않고 탄생했다‥‥‥‥


다시 나희필 장군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군 재직 시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면서 1987년 서울의 새문안교회 장로가 된 나희필 장로는 본격적인 교회 봉사에 들어간다. 초등부 부장, 고등부 부장, 경조부장, 사회부장, 성가대 대장 등 맡기는 부서마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폐암 선고를 받게 된다. 투병 중에서도 맡은 봉사에 최후의 노력을 다 하던 중 나 장로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가까워 왔다. 임종 6시간 전 그는 있는 기력을 다해 모든 친구들에게 마지막 안부의 전화를 했다.


또한 필자에게도 마지막 전화가 왔다. 당시 필자가 집필했던 글 중에서(안드레 명상) 식물 인간으로 살면서도 장애인들의 복지 중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식물인간 서상복 씨의 눈물겨운 사연을 읽고서 그 불쌍한 서상복 씨의 애절한 소망이었던 장애인 도서관 마련에 2천만원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이 기부금은 자신의 장례식 때 조위금으로 들어오는 돈으로 드릴 것이며 이미 유언으로 가족들에게 알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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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 장로는 투병생활 중에서도 제2회 안드레 선교대회에서 자신의 신앙역정을 특별 간증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러나 어느 날 그의 전화 음성은 이미 기력이 다 소진된 상태였다. "김 장로님과 약속한 이번 선교대회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나갈 것 같습니다‥‥‥


4 술이 역사에 남긴 비극과 교훈

영국의 대 정치가였던 WE 글래드스턴은 1809년 리버풀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31년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수상을 네 차례나 역임했다. 대영 제국의 수상을 네 번이나 할 수 있었던 그의 정치 배경에는 항상 술을 제1의 경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글래드스턴은 전쟁, 흉년, 전염병 이 세 가지를 다 합쳐도 술이 주는 손해와 비교할 수 없다고 술에 대해서 항상 경고했다. 발명가 에디슨은 자신이 술에게 두뇌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많은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회고했다. 또한 F 로가우는 술자리에서의 우정은 그 술과 함께 하룻밤 밖에 효용이 없다고 했다. 


화산 폭발로 거대한 도시 가 통째로 사라진 곳이 폼페이다. 기원전 79년 8월 어느 날 폼페이는 순식간에 용암과 화산재로 전 시가지가 묻혀 버렸다. 그로부터 천 칠백 년의 세월이 흘러간 1748년 밭을 갈던 한 농부가 쟁기가 돌에 걸린 것이 폼페이 발견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다시 15년이 지난 1763년부터 본격적인 폼페이의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집집마다 지하실에는 큰 술독이 평균 20개씩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폼페이는 바로 술의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폼페이 발굴터에서 감명 깊게 본 것은 남녀 혼탕의 공중 목욕탕이었다. 목욕탕 벽 속에는 이미 그 당시 벌써 동으로 만든 배관이 설치되어 목욕탕 온도를 조절했다는 사실이다. 50명의 남녀가 들어가는 이 혼욕탕에서 바로 나귀의 젖을 풀어 놓고 술을 마시면서 온갖 난잡한 행위가 밤낮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호화, 사치, 허영이 극에 달했던 주색의 도시 폼페이 시가지를 보면 술집만 모여있는 유흥가 그리고 지금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사창가 건물의 표시, 또한 부유층이 살았던 건물 내부의 벽화는 대부분 남녀 성행위의 자극적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어 여행에 지친 관광객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차돌 같은 바위만 깔아서 만들어진 도로는 당시 취객들을 밤낮없이 실어 날랐던 탓으로 마차의 수레바퀴 자국이 그 깊이가 15센티 미터나 파여져 마치 기차 레일처럼 뻗어 있었다. 특히 술집과 사창가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표시가 길바닥에 조각이 되었는데 그 표시가 화살표가 아닌 남자의 성기 모습을 돌바닥에 조각을 해놓았다. 폼페이의 모든 시설은 오직 취객 제일주의로 만든 도시다. 술로서 해가 뜨면 술로서 해가 지는 세상이었다. 용암을 토해냈던 베스비오 화산은 폼페이에서는 다소 먼 거리에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곳 폼페이에만 용암과 화산재를 퍼 부었을까? 주색의 도시 폼페이를 통채로 묻어버린 베스비오 화산은 아직도 2천여 년간 계속 침묵만 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국민 1인당 최대 술 소비국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리 한국,」특히 40대 나이의 사람들이 이곳 폼페이를 관광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망률 제1은 40대가 차지한다고 했다. 노인들의 죽음이 0순위에서 밀려 난지가 오래되었다.
부산 근교 어느 공원묘지의 석공이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석공은 비석의 글씨를 미리 새겨두는 것이 출생연도라고 한다 그 이유는 40대의 사람들의 사망이 제일 많기 때문에 미리미리 새겨 둔다는 것이다.


한편 40대 죽음의 90%가 술로 인한 갖가지 죽음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40대 국민의 사망이 높은 것은 개인 가정으로 보면 청년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전 외무부 장관 김용식 씨는 고령의 외교관으로 오랜 기간 활약한 국내외에 많이 알려진 외교관이었다. 흔히 외교관은 파티에 참석하는 회수가 다른 직종보다 많으므로 혹시 술로 인해 건강에 지장이 없었는지를 여쭈었더니 양주가 아닌 도수가 낮은 술로서 칵테일 한 잔으로 보통 1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주 파티에 참석해도 술 때문에 건강을 해칠 일은 없다고 자신의 예를 들었으며 또한 외국 사람들의 파티 경우도 그들은 대부분 독한 술은 피한다고 했다.


칵테일 한 잔으로도 아름다운 파티 문화를 만드는데 우리는 칵테일이 아닌 양주 원액을 그대로 마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소위 폭탄주를 단숨에 마셔야 되는 그야말로 죽음을 향한 술자리야 말로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는 현실이다. 년간 양주 수입 량이 4천 5백만 병에 OECD회원국 중 우리는 그들보다 5배나 더 독한 술을 먹는다고 알려졌다. 우리의 팔만 대장경에는 술의 추잡함을 지적했다. 즉 술은 번뇌의 아버지요 더러운 것들의 어머니라고 기록했다.
한편 고 박정희 대통령이 처참하게 죽어간 궁정동 최후의 만찬장에는 그 날도 변함없이 그가 즐겨 마셨던 양주<시바스 리갈>이 놓여 있었다. 만일 그날 박 대통령이 독주에 심하게 취하지만 않았더라도 권총은 감히 그의 머리에 접근을 못했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독주에 미혹된 자는 지혜가 없다고 했으며 특히 술 취함과 방탕한 생활을 절대 금물이라고 경고했다.


역사에는 만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마르크스가 그렇게도 원했던 1841년 독일의 본 대학 교수자리만 얻었다면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도 하지 않았을 것이요 더 나아가 중국의 공산당도, 그리고 북한의 공산주의도, 삼팔선도, 6.25전쟁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박정희 소년이 대구 사범에 진학 한 후 계속 교회를 다니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더라면 궁정동 안가(安家)의 술자리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박 대통령이 비명에 쓰러진 지 14년이 지난 1993년 9월 16일 위대한 신앙의 장군 나희필 장로는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새문안 교회 김동익 목사의 눈물의 기도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오히려 목사를 위로하면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잘 보필하지 못하고 먼저 떠납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찬송가 455장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청초한 가을 백화처럼,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포근히 잠든 모습처럼, 그는 허물 많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하직하고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죽어도 그 일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며 재앙이 닥치기 전에 내가 그를 데려가도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가 아무도 없구나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죽어도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 (현대인의 성경 이사야 57장 1-2절) 

나희필 장군 약력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
육군 사병 입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 전속
육군사관학교 교도대 병사로 복무 중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 졸업, 소위 임관
1948년 국군 제5연대 제2대대장 부관
1950년 육군 대위
6.25 전쟁 때 수도경비사령부 제25연대 제2대대장 직무대리로 참전
1950년 6월 26일 6.25 전쟁 직후 의정부 전투, 동두천 지구 전투, 포천지구 전투 등에 출전
1952년 육군대학 입교
1953년 육군대학 수료, 국방대학원 입교
1953년 국방대학원 수료
1956년 육군대학 근무[2]
1957년 51연대 연대장
1961년 2군 사령부 인사담당 참모
1961년 5.16 군사 정변에 참여
1965년 군사고등재판소 재판관
베트남 전쟁에 참여, 이때 참전 장교 위로차 지급된 여성을 홀로 거절하였다.
1967년 27보병사단 사단장
1968년 27사단 재직 중 박정희의 술 권유를 신앙을 이유로 적극 거절하여 화제가 되다.
1969년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차장
3군 사령부의 창설에 참여
1973년 1월 20일 3군사령부 창설 준비위원회 조직, 나희필 소장은 위원장으로 취임, 3군사령부 창설 직전까지 이를 주관하였다.
1973년 3군사령부 참모장
1974년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 예비사단장
1975년 육군 대학 총장
1977년 육군 소장 예편
1977년 중앙정보부 차장보
1978년 11월 16일 국가안보회의 비상기획위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
1981년 1월 국가 안전기획부 차장보
1982년 5월 20일 국가안보회의 상근위원 겸 비상기획위 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겸 국무위원
1982년 5월 21일 국가 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관급)
1984년 5월 4일 한국 조폐공사 이사장(~1987년)
1987년 4월 27일 한국 조폐공사 이사장 재임명(~1989년)
1989년 한국조폐공사 이사장 퇴직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
1993년 9월 19일 서울국군통합병원에서 사망
출처 : 새소망 쉼터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