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남 연기군 어머니 외가에서 51년 2월8일 출생했다.
6.25 전란 의 포성이 전국을 뒤덮던 혼란 중이었다.
위로 누님이 세분 있었기에 아들인 나에 대한 집안 식구들의 관심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이 군장교로 전선을 따라 다녀야 했으니 우리가족은 어머니와 거의 지내야 했는데 이때부터 어머니는 저녁마다 우리들을 모아놓고 가정 예배를 드렸고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선이 가라앉으면서 우리 가족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성남 감리교회의 속장으로 교회 봉사에 적극적이셨는데 아버님이 이런 어머니를 못마땅해 하시는 바람에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다.
54년 아버님이 전역한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직업을 찾지 못하셨던 아버님은 새로운 일을 찾아 서울로 떠나셨고 어머님은 삯바느질과 가축을 키우는 일로 부업을 하셨다. 그 무렵은 모두가 먹고 사는데 힘겨워할 때였다.
내가 4살 때 어머님이 나를 위해 내내 기도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은 모두가 구호 미로 (미국에서 보내 준 곡식) 끼니를 채울 때였는데 옆집에서 밀밥을 보내와 누나들과 나는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소화가 되지 않아 헛배가 차오르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민간요법을 썼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어렵게 병원을 찾았다.
『장이 꼬였습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니 수술비를 마련해 오세요』
의사의 벼락같은 진단에 어머니는 잠시 정신이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4살짜리 아들의 몸에 칼을 대 수술하면 목숨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나를 들쳐 입고 병원을 돌고 또 돌며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종수를 살려주세요. 이 애를 살려주시면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만들겠습니다. 제 말 목숨만 살려 주세요』
어머니의 이 간절한 서원기도는 결국 내가 수술을 받지 않고도 병상에서 일어나게 했다. 그 대신 어머니는 이 약속을 지키셔야 하는 책임감을 항상 느끼시며 나를 키우셔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욱 나를 위한 기도드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때 나는 미국에 가서도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에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에 마음의 부담을 덜었지만 내가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된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 생각하면 내 신앙이 형성되고 자라나는 골격이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성경을 읽으며 신앙에 몰입했던 나는 거의 매일 교회에서 철야 기도를 하다시피 했다.
고등학생이면 한창 공부하고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데도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이 한없이 즐겁고 기뻤다.
67년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간에 굵지만 분명하고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종수야, 종수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깜짝 놀랐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 이 음성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주일학교에서 배운 솔로몬의 지혜가 떠올라 지혜를 달라고 말씀드렸다.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하나님의 응답으로 무엇인가 신체적인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후였다. 새벽 기도를 다녀와 로마서 16장까지 두 번을 읽었던 나는 그 말씀들이 살아서 움직이듯 흡인되는 것을 느꼈다. 계속 읽고 싶었으나 학교 갈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섰다.
성남동에서 대흥동까지 버스비가 없어 걸어가는 동안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거리의 간판을 쳐다보면 그 간판들이 아까 본 로마서의 성경으로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몸이 허약해 어지럼증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큰 문제가 생긴 것으로 여겼다. 병원에 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그 무렵 나의 학교성적은 대전 고등학교 동급생 4백 80 명 중 3백 50등 정도였다. 매일 철야예배에 새벽기도를 다닌데다 밴드부를 한답시고 시간을 빼앗겼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병치레도 잦았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네가 성적이 이게 뭐니,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담임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은 나는 이 때부터 공부에 매달렸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공부한 뒤 첫 시험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신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지난번 로마서가 선명하게 들여다 보이던 것처럼 내가 공부했던 책이며 노트 필기가 고스란히 눈만 감으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전교 석차가 3백50등에서 5등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담임 선생님과 동급생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수학 점수만 좀 낮았는데 이것은 책에 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공부에 재미가 붙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나는 전교1등으로 졸업을 했으며 서울대 의대에 지원, 합격했다. 요즘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수가 크게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아까워서라는데 한 마디로 하나를 얻기 위해 열을 버리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의 자녀로 거듭남의 확신과 영적 평안을 소유하는 것이다.
서울대 3학년 때는 의대 기독 학생회장을 맡아 무의촌 진료와 봉사 활동을 했다. 나도 어려운 처지였지만 누구를 돕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정말 흐뭇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찬송을 인도하고 설교도 했다.
당시 학생들 데모가 극심할 때였고 기독 학생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아도 회장이기 때문에 형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언젠가는 종로 경찰서에 붙잡힌 적도 있었는데 지도 교수님이 내 학적부를 가지고 찾아와 이 학생은 기독교 신자로 절대 데모할 사람이 아니니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바람에 훈방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인도로 피난처를 주셨고 도와줄 사람을 만나게 해주셨다.
학교 성적은 늘 상위였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약간 특이하다. 공부하기 전 성경을 한 장 읽어 마음을 가다듬은 뒤 기도를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지금 공부하는 이 과목이 머리에서 지식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게 하옵소서! 이 공부가 나의 인간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이는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뒤 공부하면 피곤한 줄 모르게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기도에 간적이 많았다. 새벽이슬을 맞고 찬송을 부르며 집을 향하는 그 기분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75년 2월, 서울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전국의사 국가고시 에서도1등을 했다. 나는 이것이 분명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루어졌음을 믿는다. 최선을 다해 공부는 했지만 그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주위에서 나만 지나가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원종수인데 서울 의대 수석 졸업하고 의사 고시도 1등 했으며 아직 총각이라는 이야기였다. 자만심이 생기는 것 같아 이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 나의 학력과 성적만 보고 중매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결혼을 흥정처럼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웠다. 배우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가난해도 성령 충만한 아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우리 모든 가족을 친 형제 이상으로 대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 기도 응답은 30살이 넘은 82년 미국 생활에서야 이루어졌다. 인턴 생활은 힘들고 바빴다. 미국으로 들어가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병역 의무를 치러야 했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은 방위병이었다. 이 방위병 근무를 통해 하나님은 나를 철저히 깨뜨려 주셨다.
나도 모르게 서울대 수석 졸업생이라는 교만이 들어와 있었는데 방위복을 입은 뒤 이것이 사라져 버렸다. 나이도 서너 살이 어린 고등학교 갓 졸업한 방위병이 단지 일주일 먼저 입대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심한 욕을 하며 기합을 주는데 이것을 참는데 무한한 인내가 필요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방위병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는 수속을 밟는 나는 들떠 있었다. 그런데 미국 대사관에서 건강진단서를 요청해 검진을 받고 보니 예전에 폐를 앓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사진으로는 미국에 가기 힘들다고 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즉시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큰일 났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일주일 기도하고 다시 X레이 사진을 찍어 보자고 말씀 하셨다. 누나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전 식구가 3일 금식 기도를 하기로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세밀히 그리고 정확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어머니 말씀대로 일주일 뒤 세브란스 병원에서 다시 X레이를 찍었더니 시꺼먼 흔적이 있던 부위가 사라져 있었다. 예수님을 모르면 이런 사건이 신기하고 기적적인 일이라고 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에겐 이것을 당연한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렵게 여비와 생활비를 마련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비를 아끼느라 입양아를 데리고 나가는 일을 자청했다. 의사이기에 이 일을 자청하면 비행기 표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13명의 아이들을 하나 하나 안고 기도했다. 이들 입양아가 예수 믿는 부모를 만나 훌륭하게 성장하고 구원을 얻기를 간구했다. 뉴욕 공항에 도착해 아이를 인계하고 나니 앞일이 막막했다.
동행했던 미국인의 집에서 하루를 신세 지고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하지스 목사님 댁으로 가라는 영감이 왔다. 나의 계획은 미국 의사 시험을 거쳐 내과의가 되는 것이었다. 대전에 살 때 어머님이 일을 도와주셨던 하지스 선교사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 멕키스 포트는 버스로 9시간이나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하지스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를 마치고 이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늦게 버스에 내려 하지스 목사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는데 한 할아버지가 하지스 목사를 안다며 교회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 목사님 대신 딘이란 분이 나를 데리러 왔다. 그분은 하지스 목사님이 지금 집회를 인도 중이니 오늘 밤은 자기 집에서 자고 내일 목사님을 만나라고 했다.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안내하는 그분에게서 성령 충만함이 느껴졌다.
『닥터 원은 진정한 크리스천입니까? Are you a real Christian?』
딘은 내게 이 질문을 던졌다. 이 당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이 질문은 후일 내 삶에서 수시로 대두되었다. 지금 내가 진정한 기독인으로 살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나를 반성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거듭나지 못한 기독교인이 참으로 많다. 종교를 윤리적 지침으로, 삶을 정화하는 수단으로만 여기는 이들은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영적 방황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자신 있는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딘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3백여 명이 모인 미국인 집회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
미국인 딘은 다음날 집회 장소에 같이 가면서 예배가 끝난 뒤 내가 간증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영어가 서툴러 안 된다고 말했다. 학교식 영어에만 익숙한 나는 미국에 도착해서 대화를 해도 반 이상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딘이 나의 거절 의사를 확인해 줄 알았는데 예배가 끝난 뒤 한국인 친구인 미스터 원의 간증이 있겠다고 광고를 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머뭇거리는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눈을 감고 정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단위에 올라간 나는 담대함으로 영어 간증을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 입에서 나도 놀랄 정도의 영어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붙잡아 인도해 주신 사건이었다. 30분 정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역사하신 과정을 이야기했다 (유사한 체험을 나도 경험한 적이 있다; 미국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할 때).
나는 미시간 대학에서 공부하며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의 인턴 생활도 힘들었지만 미국이 더 힘들면 힘들었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곳의 동양인 의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턴 생활을 통해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부딪쳤다. 그것은 나의 주임 교수인 아놀드 와이놀러 박사가 인종 차별을 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유색 인종인데다 한국에서 왔다니 실력이 없을 것으로 여기면서 무조건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마다 환자 상황 보고 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보고만 하면 꼬투리를 잡아 잘못 됐다고 창피를 주었다. 이것이 계속되다 보니 나는 인턴 사이에서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녀는 머리되지 꼬리되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던 와이놀러 박사가 두 손을 바짝 든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내가 반격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나는 취침 시간에 최신 의학 잡지와 신문 등을 자세히 정독하곤 했다. 거의 두 번씩 빠짐없이 읽었다.
황인종이라고 나를 멸시하던 와이놀러 박사는 아침 보고회에서 의학 잡지에 근거한 최신 자료들을 인턴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날짜나 통계가 다소 틀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때마다 나는 그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지적 했다.
『박사님, 지금 말씀하신 통계는 2주전이 아니라 3주전의 것이며 32%가 아니라 32.8%입니다. 페이지는 32입니다』
와이놀러 박사는 인턴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 속에는 저녁마다 보았던 잡지내용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책을 통채로 외우며 공부했던 나였으니 당할 수 없었다.
짓궂은 면이 있는 나는 와이놀러 교수가 아침 보고회를 할 때마다 그의 보고 중 잘못된 부분을 꼬집었다. 딱히 잘못도 아니지만 내가 당한 복수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볼 때마다 시원했다.
나중에 회개했지만 와이놀러 박사가 백기를 들었다. 나를 부르더니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하나님의 주신 지혜의 은사라고 할 수는 없어 서울대학 출신은 다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좋은 간증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나와 함께 근무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는지 내게 다른 병원에 갈 것을 권유했다. 전문의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3년 동안 수련의를 거쳐야 한다. 2년을 마치고 3년째 다른 병원에 가도록 돼 있는데 1년만 마친 내게 1년을 건너 뛰고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었다. 미국 학생들보다 1년 일찍 내과 전문의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와이놀러 박사가 나를 황인종이라고 깔보고 업신여겼지만 종국적으로 하나님은 내가 인턴 중 제일 먼저 의사가 되도록 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좀 더 기다리고 멀리 내다 볼 것을 원하신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다. 금방 결말이 나는 것이 아니다. 좀 손해보고 실패한 것 같아도 그것이 나중에 하나님의 귀한 섭리요, 은혜의 통로였음을 깨닫게 된다.
미국생활은 외롭고 힘든 일의 연속이었지만 주님이 함께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마감할 수있었다. 이 무렵 나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신 어머니는 내가 침대도 없는 작은 아파트에 지내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하셨다. 어머니의 이 모습을 보며 나의 마음이 더 아팠다. 그토록 고생하시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시며 지내오신 어머님이 이제 훌륭하게 성장해 가는 아들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는 사랑에 목이 멨던 것이다.
레지던트로 있으면서도 미국인 의사들은 나만 나타나면 수군거렸다.
미스터 원은 (Mr. Won) 모르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질문했다. 이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수를 믿으세요. 주님께서 놀라운 지혜와 용기와 자신감을 주십니다.
영적 평안은 당신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미국 의학협회의 개업의시험을 통과한 85년 병원을 개업했다.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주겠다며 남아줄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다.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면 전도하는데 제약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레지던트로 있으면서 체험했지만 미국은 공공 장소에서 열심히 전도하면 제재가 심했다.
또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 사역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어머니께서 평생을 기도해 오시지 않았는가? 목회자가 되지 못했으니 전도에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전부터 쭉 해왔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목회자가 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단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여겼을 뿐이다.
개업하기 전 미시간 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하던 민윤식 양을 어느 분의 소개로 만나 한국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평범한 가정 출신인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신앙의 호흡이 맞았다. 데이트를 하면서도 서로 손잡고 기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부부는 신혼 여행 대신 어머니를 모시고 금식기도원으로 가서 3일간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 먼저 바른 삶을 살 것을 서원하고 기도한 것이다. 개업을 하면 주님이 도와주셔서 환자가 많이 몰려올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동양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왔던 환자도 슬며시 되돌아갔다. 하루에 서너명을 진찰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환자들을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 진료했다. 그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며 병인을 찾아냈다.
어느 날 흑인 환자를 치료했다. 정성껏 친절하게 대해 주었더니 어려워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차에 제가 존경하는 흑인 목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은퇴를 하셨는데 당뇨가 심해 눈이 멀었습니다. 좀 봐주실 수 있는지요 』
기다리는 환자가 없었으므로 어서 모셔오라고 했다. 더듬거리며 들어온 목사님과 병에 대해 1시간 정도 상담을 했고 약도 무료로 조제해 드렸다. 흑인 목사님은 매우 감격해 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고 하셨다. 가운을 입은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할 전도대상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동양인 의사가 친절하고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인근에서부터 나기 시작했다.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병원은 예약전화를 받을 정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의 일과는 새벽기도로 시작된다. 하루를 열기 전 어스름한 새벽 여명에 주님을 만나는 기쁨은 새로운 활력을 준다.
병원이 암 전문병원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수입도 늘어나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하나님의 선교 사역도 열심히 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병원을 하나 더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바빠야 하니 도저히 새벽 기도에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기도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내가 많은 돈을 벌어 선교 사업하고 자선 사업하는 것보다도 새벽기도 하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이었다.
과감히 병원 인수를 거부했다. 사실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소리가 나를 다독거렸다. 크리스천들이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하나님 사업에 투자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을 먼저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목격했다. 버릴 것과 얻을 것의 우선순위를 잘 선정하는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 선교나 자선사업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뜻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분명이 열어 주신다.
수년 전부터 나는 제3세계, 즉 복음의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하는 아프리카나 남미의 정글 지역에 들어가 무료 진료하며 선교하는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인력과 물질이 필요한데 이것을 하나님은 정확히 공급해 주신다.
미국내 녹내장 분야의 권위자인 한국인 S박사도 그중 한분이다. 나는 전도 대상자를 놓고 6개월 정도 준비 기도를 하다가 복음을 전한다. 그래서 이분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의 반응이 나를 매우 무안하게 만들었다.
『원박사,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왜 그렇게 지나칩니까? 나도 기독교에 대해 알만큼 알아요. 나에겐 두 번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지 마세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런 무안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잊어버린 6개월 후였다. S박사가 나를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원박사, 정말 미안해요. 예전에 내가 너무했지요. 얼마 전에 병원에 갔더니 암 진단을 받았어요』
눈물을 글썽이는 그분을 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무안을 당한 뒤 기도하면서 S박사가 곤고함을 당해서라도 주님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즉시 S박사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교회기도 팀에 요청하고 나 역시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의 몸에서 암세포가 사라졌음을 확인한 S박사는 온전히 거듭난 신자로 변화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해외 선교의 막강한 후원자가 됐다. 큰 액수의 헌금을 요청해도 선뜻 주셨고 안과의가 필요하다면 본인이 직접 해결해 주셨다.
나의 전문 분야는 암환자를 진료하는 것이다. 오늘도 이 불치의 병인 암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런데 많은 암환자들을 대하다보면 일종의 공통 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암환자들 중에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울분을 참아왔던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 몸에는 자연적으로 나쁜 병균을 몰아내는 항균작용능력이 있다. 부신피질 호르몬과 아드레날린 등이 바로 항균 작용 물질들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고 즐겁고 기쁘면 이런 물질이 급속히 생성되는 반면 갈등과 번민, 원망과 고통이 마음속에 자리하면 이 물질들이 억제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병을 진전시키느냐 억제하느냐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이 자리잡고 있으면 나쁜 균을 잡는 「경찰」물질이 생성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학대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학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화해할 때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수 믿어 변화되는 중요한 현상이 자신과 이웃과 모든 사람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의 확신과 영생을 소유할 때 우리에게 나쁜 불안과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모든 병과 고통을 초토화시키는 핵무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다. 이 기도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병을 물리칠 수 있다.
암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보다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이미 죽었으니 문제해결의 열쇠는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십시요』라는 최대한 낮아지고 깨어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암의 의학적 치료는 일부분이다. 나머지는 환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이 되어 기도하고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스스로 치료해야 한다.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수긍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율이 높았다. 주님을 영접한 암환자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내가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절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만하고 부유하고 돈만을 전부로 알고 살아왔던 제가 죽음을 앞둔 절대 절망 속에서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닥터원을 통해 암에 걸린 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더 연장하다가 지옥을 가는 것보다 조금 일찍 가더라도 천국에 가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복음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핵융합을 일으킨다. 복음이 없다면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세상만을 저주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건강한 것 자체를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길어야 80세인 인생을 멋지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영혼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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