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용서하는 방법

중일사랑 2021. 1. 23. 12:23

악인이 교회당에서 부린 난동이나 어떤 사람이 내게 가한 모욕적 언사나 악행 혹은 기만적 행위 등이 가끔씩 생각나고 그럴 때 증오심이 불타 오를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 악인에게 천둥 번개로 징벌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성도의 삶의 방식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증오심을 품게 되면 그 증오심은 더욱 증폭되고 마귀는 그런 증오심을 근거로 우리에게 침투하여 우리를 공격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병들거나 영적으로 심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가해자의 악행이나 언사가 생각나거들랑 곧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증오심은 내게서 떠날지어다!" 라고 명령하고 "하나님, 그가 내게 행한 모든 악행들, 주님의 교회에 가한 악행들을 낱낱이 깨끗하게 삭제하여 주옵소서! 그 모든 것들을 지우개로 글자 지우듯 깨끗하게 지워 버려 주옵소서!" 라고 생각날 때마다 거듭 명령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회개와 용서 사고에 적절하고 우리 자신의 신상에도 좋은 것이다.

 

어떤 기독인은 포괄적 무조건적 용서를 말하면서 동성애자도 무조건 용서하고 품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미국의 한 장로교단에서는 동성애자도 이런 포괄적 용서론을 근거로 목사 안수를 준다고 한다. 참으로 가증한 범죄 행위이다. 한국에서도 손봉호 장로 같은 사람이 그와 유사한 논리를 펴면서 동성애자의 축제를 보수적인 교회 성도들이 가서 훼방하고 드러눕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비판했다고 들었다. 과연 그러할까?

 

저들의 논리가 아주 잘못되었다. 동성애자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동성애라는 것은 사탄의 역사가 개입된 창조질서의 파괴이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엄중한 도전 행위이다. 동성애자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사탄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을 극렬하게 대적하는 상태에 있다. 그런 자들이 백주에 나서서 이 나라의 성도덕을 문란시키고 창조질서를 와해시키는 행동을 활보하며 벌이는 판에 품위나 포괄적 사랑 운운하면서 방관함은 결코 온당치 않다. 우리는 이 무법자들의 행위를 차단하고 이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외쳐서 저들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만 구원과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또 다른 용서의 문제는 저 북한 김정은이나 김일성교 추종자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 집단은 세계 공산 집단 중에서 유례가 없는 최악의 타락한 사이비 공산집단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에서 입맛대로 골라서 김일성 종교로 만들고 김일성 광신도인 김일성 민족을 만들어 버렸다. 김일성교는 추종자 수자 면에서 세계 10번째 종교에 속한다. 십계명을 모방해서 만든 김일성 신격화의 토대인 조선로동당 영도 10대 원칙이란 것이 있고, 전국에는 김일성 김정은 우상들과 학습실 사당들이 즐비하다.

 

김일성교는 테러와 거짓 선전선동을 무기로 인민을 세뇌시켜 한 평생 김일성교의 노비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런 김일성교의 북한과 한 민족이란 공통점만 강조하면서 우리 민족끼리 연방제 통일을 구상하는 이들은 '자유'를 빼앗아 가려는 마귀에 다름 아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무조건 용서가 아니라, 회개를 외쳐야 한다. 잘못된 이념과 사상에서 전향하고 회개할 때만 저들도 우리는 형제로 받아 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김정은은 말하자면 한 특정 시대에 무수한 사람들을 학살한 독재자의 상징인데, 그런 자까지도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의의 심판이 그런 자들에게 임하여 속히 제거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할까? 가령, 본 회퍼는 히틀러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를 폭주하는 운전사에 비유해서 말하길, 나는 목사로서 저 폭주하는 운전사로 인해 죽임당할 저 승객들의 장례식이나 치뤄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저 폭주 운전사를 제거해서 승객을 살리는 목사가 되어야 할까? 그는 후자를 택하였다. 그러나 그의 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용서라는 개념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롭게 성령님과 말씀의 도움을 받아 주님의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