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의 특별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평양의 특별호텔에 있을 때 김원봉, 허헌, 박헌영 등의 방문을 받았다. 환영 피로연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 장단에 맞추어 우리 춤을 추자'며 자주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규식과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간단한 인사말을 했을 뿐이다. 4월 22일평양시내에 도착한 김규식은 4김회동에만 참석했을 뿐, 이후 병을 이유로 숙소에 머무르며 한 번도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1948년4월 23일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4월 25일평양방송은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발표된 결의서와 격문이 이때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한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은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4월 26일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 거부로 인하여 빈손으로 귀경하였다.
같은 날 4월 25일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48년4월 30일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렸다. 김두봉의 제의 하에 연백평야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조만식의 월남 허용 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 유골 국내이장 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수락하였고, 조만식과 안중근 이장문제는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5월 5일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5월 6일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과 전력송전을 중단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들 통일 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1948년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1948년5월 6일 김구는 "경교장에서 내가 떠날 때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다녀왔는데 이번 우리 일행의 큰 소득은 말할 수 없으나 장차로 남북의 우리 동포는 통일적으로 영구히 손잡고 살아가겠다는 기초를 튼튼히 닦아 놓았다. 첫술에 배부르는 법은 없는 것이니 다만 한 두 번 또다시 만난다면 우리의 목적 달성을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소감을 밝힌 후 남북협상의 성과에 대한 김구·김규식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48년5월 14일 북한이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고 이에 남한도 즉히 북한 송전을 중단하였다.북한에서 남북협상 당시 끊지 않겠다고 약속한 송전을 끊어버림으로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송전이 마비된 뒤 미군에 의해 전기 공급이 일부 복귀되기는 하였으나, 송전 중단의 원인을 김규식의 탓으로 몰고 가는 비난 여론이 나타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