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Καὶ πρωῒ ἔννυχα λίαν ἀναστὰς ἐξῆλθεν καὶ ἀπῆλθεν εἰς ἔρημον τόπον κἀκεῖ προσηύχετο)
"새벽 오히려 미명에" (πρῳ ἐννυχα λιαν) - 밤의 마지막 경점 (πρωῒ 오전 3-6시) + 마지막 경점의 이른 시점 (ἔννυχα λίαν 3, 4시?) → 아주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4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는 (ἀναστὰς ἐξῆλθεν καὶ ἀπῆλθεν εἰς ἔρημον τόπον) "그가 일어나, (집에서) 나가, (가버나움 마을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여기서 "한적한 곳"은 중국어 역본들이 "광야"나 "황야"로 번역했지만 (旷野地方, 화합본; 荒野的地方 신역), 가버나움 근처에는 광야가 없다. 따라서 한역처럼 "한적한 곳" 혹은 "인적이 없는 곳"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마 갈릴리 바닷가 어느 한적한 '구릉지'였을 (丘陵地 나즈막한 언덕 산지) 것이다.
고대 전승에 의하면 (제롬), 그 한적한 곳은 타브가 (Tabgha; 아랍어 알-타비가; 히, 엔 셰바 [일곱 우물]) 마을과 갈릴리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 마을 서편 산등성이였다. '타브가'란 마을 이름은 "일곱 우물들"이란 의미의 헬라어 '헵타페곤'에서 (Heptapegon) 유래했다. 후대에 '헵타페곤'은 줄여서 "타페고"라 (Tapego) 불렸고, 결국 아랍어에서 타브가라 (Tabgha) 고착되었다. 고전 아랍어에는 p, g, o 음들이 없어 b, gh, a or u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 주변 지역의 경관은 아름답고 평온하다. 갈릴리 바다에서 약한 경사로 비스듬하게 누운 구릉지대인데, 네게브 지역에 비해 물 공급이 잘 돼서 풀이나 나무가 잘 자란다. 반면 남쪽의 유다 광야나 브엘세바 같은 네게브 지역은 완전 황량한 황무지이다.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는 (κἀκεῖ προσηύχετο) 미완료상 동사로 "그가 (새벽 미명에 곧 4시경부터 동이 트기까지) 기도하고 계셨다" 라고 생생하게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중계한다.
최근에 극동방송을 통해 들으니 (아침 8시 이후) 어떤 설교자는 이 본문에서 "기도하다"란 말을 헬라어로 찾아보니,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기도를 하다"를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기도하다'란 단어 (προσεύχομαι) 자체가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기도하다"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고, 그 단어의 시제가 '미완료'이기에 반복적, 습관적 행동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 경우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고 번역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여기 본문에서 기도하시는 행동은 가버나움에서 하루 아침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만 묘사하기 때문이다. 문맥이 반복적, 습관적 행동을 묘사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가령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할 때, "거기서"는 방금 그 앞에 언급된 그 가버나움 인근 '한적한 곳'이다. 그곳, 그 장소에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 그것은 아니다. 그분은 곧장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시고 (막 1:38) 갈릴리 여기 저기를 순회하시며 설교하셨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성도들 앞에서 헬라어 지식이나 히브리어 지식을 좀 드러내고자 부족한 실력을 과장하다가 오히려 거짓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 성경 원문을 이해하기에 부족한 실력이라면, 설교자는 이래 저래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시간에 쫓기면서 전문 성경 주석들이나 서적들을 읽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 미천한 실력으로 설교하자니 또렷하고 선명하게 무엇인가 제시할 바도 마땅찮고.
그래서 설교자가 (목회자) 되려면 미리 성경 원문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그 방면에 열성을 내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 원문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영어 정도는 확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중요한 신학 서적들은 영어로 산출되거나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실력이 안된다면, 능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무슨 능력? 기도해서 불을 내리는 능력이나 신유 능력, 각종 이적과 축사의 능력이다. 그러면 말씀을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
그것도 안되면, 설교자는 설교 본문을 정했으면 이런 저런 주석이나 설교보고 베끼려 말고, 그 본문을 달달 외우면서 계속 묵상하며 주님, 이것이 무슨 뜻이죠? 지금 우리에게는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어떻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할까요? 계속 본문을 암송하면서 매달려야 한다. 그러면 멋진 설교가 나오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어떤 대중적인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자기가 성경의 어떤 부분에 의심이 나서 자기가 신뢰하는 한 성경신학 교수에게 전화로 문의하였더니, 그 의미는 이렇다고 하더라고 전하였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한다고 '아, 저 설교자, 실력이 별로 없구나!' 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목회자나 설교자는 제대로 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별로 없다. 솔직하게 자기 모습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오히려 사람이나 주님 앞에서 좋은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이 부족하니 그저 하나님께 매달려 지혜와 능력 주시라고 의지할 것 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성령 충만해서 이적과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고, 그 밑바탕에는 탄탄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이 있는 설교자이다. 신학 훈련은 영원 생명을 다루는 일을 목표로 하기에 세밀하고도 확실하게 되어져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신학이 시시하다거나 '그 문제아가 은혜 받았다고 신학교 가던데 아, 그까짓 거 누구는 못해?' '수능에 점수 약하면 신학교나 가거라!' 식으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영생을 책임진 목사가 그렇게 저능아 출신들이라면 그들이 제대로 영적인 진리를 바로 정확하게 전할 수 있을까? 가장 머리가 명석하고 인품이나 신체가 좋은 자녀라면 너는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다! 주의 종이 되거라! 라고 격려해야 하고, 가장 출중하고 탁월한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중세 시대 천년 동안 서구 유럽에서 신학이 모든 학문의 왕좌를 점했었다는 사실은 알 것이다. 지금은 학문의 변두리로 밀려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신학을 성공적으로 공부하려면 영적인 면에서 곧 근본적인 면에서, 첫째 거듭난 자라야 하고, 둘째 성령 충만해야 한다. 머리가 명석하지 못해도 기도하고 매달리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것이다. 설교자도 성령 충만하면 비록 신학 학력은 별 볼 것없어도, 성령께서 주시는 놀라운 지혜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다. 최남수 목사는 내가 아는 한, 공부는 그냥 정상 코스로 신학대학원 나오는 정도지만, 기도를 하여 주님을 만나고 영적인 파워가 있어 설교를 들으면, 어, 어디서 저런 설교가 나오나? 하고 놀랄 정도이다.
신학을 성공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 상식적인 면에서
1) 성경 언어들인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천년 이상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 지식을 축적한 서구 신학계의 서적들을 기록한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 고대 중동의 정치 역사를 기술한 악카드어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인들이 사용했던 쐐기문자; 그 조상은 인류 최고 문명 수메르어), 고대 애굽 신성문자 (그림 문자), 아람어, 유가릿어, 지금 터키 지방에 자리잡고 애굽 중왕국과 자웅을 겨루었던 히타이트 제국인들이 사용했던 히타이트어 등을 확실하게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언어에 확실치 못하면 신학 발전에 진전이 없다. 가령 중요한 히브리어 문법책이나 기타 신학 전공 서적들은 대개 영어나 독어 불어 등으로 출간된다.
2) 역사 지리 정치 문화 다 방면으로 글들을 읽어야 한다.
주여!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많은 유능한 일군들을 일으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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