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ingdom in Person
by Fred Sanders on July 28, 2015
프렛 샌더스란 인물이 '왕국 자신'이란 글을 올렸기에 흥미로워 원문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약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하시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 자체라는 것이다. 오리겐이란 교부가 마 18:23의 천국 비유를 근거로 그렇게 말씀한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 혹 하늘 나라는 같은 의미를 지시하면,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을 의미한다. 고대 왕국에서 핵심은 왕 자신이었고, 왕의 권세가 전부였다. 그래서 왕국이라 하면 영토를 생각하곤 하는데 고대에 헬라어 '바실레이아'란 (왕국) 말은 무엇보다 왕권을 지시하였고, 오직 부차적으로만 왕이 통치하는 영역을 지시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실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왕권/ 통치권이 임하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성령님을 통해 행사된다. 그래서 주님은 마 12:28에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 당대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랐던 무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하였을 때, 그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했을까? 베드로도 그러했지만, 대다수는 예수님을 다윗 후손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메시아"로 생각한 것인가? 그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어떤 메시아의 영상을 가졌을까? 아마도 대다수는 예수께서 당대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너진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정치 군사적 독립을 이루고 세상을 정복하여 지배하는 (시 2:9이하) 그런 군사 정치적 영웅, 그러니까 모세나 다윗 같은 영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메시아는 구약 메시아 예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전개되는 것과 이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세계사를 통해) 나타난 바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 중심의 정치 군사 왕국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생각하신 하나님 나라, 재건된 다윗 왕국은 (암 9:11-12의 예언은 행 15:16-17에서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행사되는 하나님의 왕권이 역사하는 신령한 나라이다. 이는 대략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니까 신약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이 동일한 실체는 아니로되, 대략 포개지는 동일체라 할 수 있다. 지금 주님은 말씀과 성령님으로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오리겐이 왜 주님을 왕국 자체라고 하였을까? 그것은 마 18:23에서 천국은 마치 한 왕과 같다고 할 때, 천국이 곧 왕이기 때문이다. 그 문맥에서 제시된 그 왕은 바로 예수님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성령님으로 무한 충만하셨기에, 그는 곧 하나님 나라/ 왕권 자체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어떤 피조물도 여기서 제외되지 않는다. 바람이나 귀신이나 인간이나 자연계나 천사들이나 모두가 예수님의 왕권 하에 굴복된다. 그분이 지금 통치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신약 시대를 천년왕국 시대로 본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새롭게 창조되어 신천신지로 변하고, 거기서 우리는 부활한 몸으로 영원히 거할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왕권에 참여하여 메시아로서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 예수께서 메시아 왕이시라면, 고대 용어로 황제에 해당되고,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는 왕들이다. 그래서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이라 칭한다 (벧전 2:9, 계 20:4-6).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 자유연맹에서 반국가 세력이 종전 선언 노래를 부르고 다니며 자유 민주체제의 전복을 꾀하였다고 지적했고, 이번 광복절 축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이 민주 투사인 양 변장하고 행세한다고 바로 지적하였다. 문재인과 이재명 세력은 반 국가 세력이고 자신을 민주 투사로 행세하는 공산주의자들이다. 무력으로 자유 민주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였던 이석기 일당을 변오한 이재명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분명하게 우리 대한민국이 나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밑에 장관들이나 국힘당 의원들은 어떤가? 이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확실하게 내세워 대통령이 제시한 그림을 실행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이런 지도자가 나타났으니 자유 민주제를 이 땅에 확고하게 세우도록, 극우라는 딱지를 붙여 공산주의자들이 자유 우파를 매도하는 사실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대결해서 아예 공산주의 연방제 건설을 꿈꾸는 어리석은 자들의 시도를 완전 무력화시키고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공산당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유 민주제를 세우는 통일만이 우리의 목표이고 그 사실을 확실하게 모든 국민이 표명해야 한다. 특히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한다. 불신자들은 그냥 나는 우도 좌도 아니고 중립이다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중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하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반대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마귀가 이면에서 주장하는 공산당 사고로 무장한 사악한 자들과 싸우지 않고 이 나라의 자유 민주제는 지킬 수가 없고, 자유 민주제가 없는 그곳에 신앙의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자유 민주 정체성을 파괴한 장본인이 김대중이다. 그 사람은 북괴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행동한 사람이고 또 김일성에게 돈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이번 광복절 광화문 집회에서 전광훈 목사가 연단에 모시고 대담한 그 97세인가 되는 전북 한 노인, 그는 1946년 남노당에 가입하였고, 월북하여 간첩 교육을 세게 받고 역시 월북하여 북괴 부수상까지 지냈던 홍명희에게 (남자였다 1888-1968) 직접 전북도 도 위원장 임명을 받고 전라북도에 적화 통일 기지를 세우도록 간첩으로 남파하여 활동했던 어르신의 증언에서 그 점은 분명하게 확증된다 (“김대중은 간첩” 증언한 97세 전향 남파간첩 할아버지 나왔다 - 자유일보 2023.5.22 참조). 그리고 이동호 교수도 전대협 연대 사무국장이었을 때 김대중씨와 20번 만났는데 그 때 김대중이가 김일성의 지령을 시행한다는 것을 직접 목도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 나라에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구글 검색이나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매체에서 전광훈 목사를 검색하면, 부정적인 글이나 영상만 검색될 뿐 광화문 집회나 전광훈 목사의 영상들이나 글들은 찾을 수가 없다. 선전선동과 기만술에 능한 공산주의자들이 이 분야를 완전 장악하고 농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부정선거 주체로 지목되는 선관위가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같은 매체 언론에서 금지하도록 요청한 문건들이 전체 금지 목록의 97퍼센트인가를 차지한다고 한다. 왜 윤석열 정부는 아직까지도 언론 방면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관과 백성의 마음을 혼미케 만든 제2의 장본인은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김대중이가 자기랑 민주화 투쟁했다고 김대중과 연관된 자들을 (사상범들, 김일성 남조선 적화 혁명 투사들로 활동한 이들; 자신들은 민주화 투사로 코스프레 하지만) 다 민주 투사들이라고 석방시키고 5.18광주 사건도 민주화 운동으로 포장시켜 주었다. 이 때부터 공산주의자들이 민주화 투사로 버젓이 활개치고 이 나라를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독인들은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광주의 5월 정신 운운하는 것은 사실 김일성 지령으로 야기된 광주 사태의 진실을 가리는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김일성의 손에서 놀아난 희생자들이다. 이 사실을 바로잡지 못하면 자유 대한민국은 없다. 남한에서 일어난 폭동이나 사건 사태에 북한이 개입하지 않고 조종하지 않은 사건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공산주의자들이 모조리 장악한 이 나라를 다시금 자유 민주주의 나라로 바꿀 것인가? 우리는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악령이 역사하고 배후 조종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기도로 악령을 축출하면 이 나라는 다시금 자유 민주체제로 확고하게 세워 질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교회들은 무조건 기도를 많이 많이 올려야 한다. 교회가 성령 충만하여 왕적 제사장으로 성도들이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한다면, 이 자유 대한민국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에게서 인권과 존엄성을 말살시키는 공산주의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도록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Origen of Alexandria (ca 184-254) apparently coined the word “autobasileia,” meaning something like “the kingdom in person.”
It was in his commentary on Matthew 18, as he was discussing the parable that begins: “Therefore the kingdom of heaven may be compared to a king who wished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ervants.” Origen, who had by this time worked through a number of parables of the kingdom, seems struck by the fact that now, in this one, Jesus compares the kingdom to a king. In fact, what Origen is staring at is the Greek text whose idiom and word order present him with: “compare the kingdom of heaven to a man a king” (ὡμοιώθη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ἀνθρώπῳ βασιλεῖ). This man, a king, who is what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can only be one person:
If it be likened to such a king, and oㅇe who has done such things, who must we say that it is but the Son of God? For He is the King of the heavens, and as He is absolute Wisdom and absolute Righteousness and absolute Truth, is He not so also absolute Kingdom?
That’s the 19th-century translation. But to see what’s happening in Origen’s Greek, try this: for each of those occurrences of “absolute” you can instead restore the prefix auto- to the noun: autosophia, autodikaiosyne, autoasphaleia, and therefore, “is He not also autobasileia?” The Latin translation offers ipsa sapientia est et ipsa justitia, et ipsa veritas, therefore ipsum regnum. (Here’s a link to the PG pages scanned so you can see the Greek and Latin in parallel columns, but I’m warning you, that Migne printing scanned by Google will make your eyes bleed.)
“Absolute” is okay; “ipsa” is pretty cool; but “auto-” is amazing. Why?
Because “auto-” takes what the noun is saying and underlines it, refers it back to itself rather than to anything else outside of it (hence the translation “absolute”), and also personalizes it. He, Jesus, is wisdom, but he’s more than that: he’s auto-wisdom, self-wisdom, wisdom itself, wisdom in person: autosophia. There’s not some extrinsic wisdom (or righteousness, or truth) somewhere outside of him that he measures up to. The wisdom is him; he himself is wisdom itself.
What Origen puts together here in the third century is almost a third-person way of echoing the intensity of Jesus’ “I am” statements. On the lips of Jesus, his claims like “I am the bread of life” and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are not the same kind of identifying statements we normally make. They allude reverently to the divine name (the one that unfolds as “I am that I am”) and set the speaker within it in a way that only this speaker could be. Jesus gathers up biblical images in his teaching, and then as Henri de Lubac says he “sublimates and unifies them by making them converge upon himself.” When a commentator paraphrases “I am the life” to “he is the life,” the numinous intensity necessarily fades. But Origen wants to keep it, so he says “he is auto-life,” he himself is the life, in person.
It’s all pretty heady and Alexandrian, but sober modern Bible scholars have also felt the need to say something similar, precisely because the biblical message demands it. So if you consult the article on “kingdom” by Karl Ludwig Schmidt in the Little Kittel p. 101, you find him exploring many details but summing up the biblical theology of the kingdom this way:
Jesus alone truly fulfills the demands of the kingdom. Hence the kingdom of God is especially linked to Christ… This equation accounts for the once-for-allness of the mission of the Messiah. Origen’s term autobasileia aptly sums up the equation, which also explains why the later NT does not refer so much to the kingdom, the phrase ‘the Lord Jesus Christ’ being in itself an adequate substitute.*
And that explains two things about the New Testament which readers may have noticed: First, it’s why Jesus in John’s gospel replaces all his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x, y, and z” statements with a series of “I am” statements. And second, it’s why the explicit theme of Jesus’ message was the kingdom of God, but the explicit message of Paul and the other apostolic preachers is Jesus himself. It’s because he is the kingdom: autobasileia.
(Several classic Greek documents of the Christian faith feature conspicuous “auto- pileups,” if I can coin an unlovely term that sounds like a traffic jam, and often for the same Christocentric effect. Paul uses the word “him” powerfully as a unifying refrain in Colossians 1:18-20; the Chalcedonian definition uses “the same” over and over again to drive home the point that these two natures are the two natures of this one singular person; and John of Damascus makes truly remarkable use of auto- compounds in a key passage of Book 8 of The Orthodox Faith).
*Eschatological footnote: I reserve the right to draw different eschatological conclusions than Schmidt may have in mind, and which may seem obvious to my amillennial friends. And though I know Schmidt’s point is merely grammatical, the word “substitute” is an ugly one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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