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나는 왜 승복을 벗고 목사가 되었는가?

중일사랑 2020. 1. 21. 18:51

나는 왜 승복을 벗고 목사가 되었는가 (김진규 목사 )

(1938-2014년)


어린시절, 군대 생활의 이모저모

부전자전이란 (父傳子傳) 말이 있는데 본인의 할아버지는 경북 울진군 백암 온천 부근에 백암사를 창건하여서 강원도 지구 불교 신도 회장을 지내셨고, 아버지께서는 한국 불교 태고종으로 (대처승)* 경상북도 봉화군과 영양군 사이에 위치한 일월사에서 주지승으로 계시면서 74년을 지내셨습니다. 본인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수동에서 3남 4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부모님을 따라 경상북도 영양으로 와서 천기 초등학교와 영양중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동자승 (童子僧 나이가 어린 중), 사미승으로 (沙彌僧)** 승복을 (僧服) 입고 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대처승 (帶妻僧) 아내를 두고 살림을 하는 승려. 대처. 화택승.

**십계를 받고 불도를 닦는 어린 남자 승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가서 불교대학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을 하려고 결심을 하고 서울로 상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문제로 취업을 하여서 야간 공부를 할 생각으로 취직 자리를 구하였으나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결국 동국대학도 포기를 하게 되었으며,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돈을 벌어서 공부할 결심으로 고아원에서 심부름도 해 보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우동집 심부름도 해보고 여러 가지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면서 노력을 했지만 돈도 벌 수가 없었고, 친구를 잘못 만나 타락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내가 중학교 다니면서 자취 생활을 할 때 같이 하숙하고 있던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의논한 끝에 돈도 못벌고 대학도 못갈 팔자니 군에라도 가서 복무를 마쳐야 하겠다고 마음 먹고 학도병으로 지원 입대를 하여 1956년 7월 16일 논산 제2 훈련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군에 입대할 때는 헌병이 되어 멋있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전반기 교육이 끝나고 육군 통신학교로 가게 되어 정비 교육을 받게 되어 헌병은 될 수가 없었습니다. 통신교육을 마치고 미8군 통신대대로 (대구) 가서 카투사로*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였으나, 만기가 되어 한국 군으로 다시 와서 101보충대에서 육군 8사단 통신 중대로 보충을 받아 가보니, 미군 부대에서 생활하던 것과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KATUSA는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의 약자 (주한 미육군에 파견 근무하는 한국병사)


입는 의복이며, 잠자리 문제며, 계급 차별 문제, 야전삽 하나를 가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 가지고 오는 일이며, 겨울 밤 보초를 세워 놓고 교대해 줄 생각도 안하고, 계급 차별이 너무 심해서 육군 하사관으로 지원하여 하사관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사 계급을 달고, 가설병 훈련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에 육군 공수부대로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공수부대로 (空輸部隊) 지원하여 제6기생 공수 훈련을 받고, 제1공수 특전단에서 32회 공수 낙하를 한 바가 있습니다.


공중에서 낙하할 때 한 가지 경험한 바를 말씀드린다면 1,500m 상공에서 등허리에 낙하산을 짊어지고 땅을 내려다 보면 가물가물 거립니다. 점프 신호가 오면 창문이 열리고 1만, 2만, 3만, 4만 하면서 뛰어 내려야만 합니다. 그 때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무 토막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순간 내 옆의 친구가 두 손을 붙잡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낙하산이 펼쳐지게 해 주세요. 주여 믿습니다." 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중 생활을 하다가 왔으니 부처님께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연거푸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80세에 열반했기 때문에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와서 도와 주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포기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 손목을 꽉 잡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위급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을 볼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였기에, 즉 어린 자식이 급하면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공수 부대 훈련이나 힘든 생활은 다 말씀드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1960년 11월에 만기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계종 승려가 되는 수련과정

조계종 승려가 되려면 결혼도 할 수 없고, 동국대학 불교학과나 승가 대학이나 불교 강원에* 입문하여 먼저 행자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엄청난 고행의 계율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일주문에 (강원 정문) 한 번 들어가면 3년 동안 일주문 밖을 나올 수가 없으며, 먹고 싶고, 입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고, 듣고 싶은 108 번뇌를 끊어야 하고, 부모 형제가 죽어도 가지 못하며, 누가 찾아와도 면회할 수가 없으며, 편지 한 장도 받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못하며, 신문이나 다른 서적도 못보게 하며, TV나 라디오도 청취하지 못합니다.

*강원 (講院): 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경학 연구의 전문 교육 기관


오직 참선과 (參禪) 불경 독경으로만 시간을 보내야 하고, 두 눈동자는 멀리도 가깝게도 좌우로 돌리지도 말아야 하며, 언제나 자기 콧등과 발끝을 보고 다녀야 합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타인의 허물을 보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을 보기 앞서 나의 허물을 볼 줄 알아야 하고, 타인의 잘못을 고쳐주기 전에 나의 잘못을 고칠 줄 알아야 하므로, 타인을 보지 말고 자기를 보고 살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웃음도 마음대로 웃을 수가 없습니다. 참선 도중 한 번 웃다가 발각되면 60명 선배들의 빨래를 10일 동안 빨아 주어야 하며, 두 번 웃으면 산에 가서 나무를 10일 동안 베어 와야 하며, 세 번 웃다가 발각되면 60명의 공양짓는 밥을 해야하는데, 그 밥은 모자라도 안되고 남아도 안되며 돌 한알만 누가 씹게 되면 10일동안 연장하여 밥을 지어야 합니다. 나무 한 가지라도 거꾸로 매면 그 밥을 먹는 사람도 마음이 거꾸로 된다고 하며, 불을 지펴 불을 때는데, 살아있는 곤충이나 개미 한 마리만 발견해도 아궁이에 불을 몽땅 끄고 난 후 그 벌레를 살려주고 다시 불을 피워 공양 진지를 해야 합니다. 두 손을 항상 차수를 하고야 마음과 뜻이 합쳐 불심이 온다고 하여 항상 차수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3가지 참선이 있는데, 첫째 입선제도입니다 (立禪).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종일 서서 고행을 해야 합니다. 둘째, 좌선제도입니다 (坐禪). 아침 9시 쯤 법당에 앉으면 오후 3시까지 꼼짝도 못하고 앉아서 1천 7백 가지 화두를 (깨닫는 것) 해야 합니다. 셋째, 행선제도입니다 (行禪). 떨어진 누비 승복을 입고 사방을 다니면서 배우고, 가르치고, 보고, 듣고, 칭찬도 받고, 욕도 먹고, 맞아도 보고, 때려도 보고,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고, 추우면 부엌에 들어가 자기도 하고, 더우면 강가에 가서 자기도 하면서 인생의 생 노 병 사 문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수계를 (受戒)* 받게 되는데, 남자의 경우 한방 쑥을 팥알같이 뭉쳐서 팔에 얹어 놓고 불을 붙이고 250군데를 태워서 250계를 받아서 비구승이 됩니다. 여자일 경우 향나무에 불을 붙인 다음 불꽃을 끄고 피는 불로 348군데를 지져 348계를 받아 비구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좋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도하고 나면 정신 상태가 맑아지게 되어 불교 신도들이 절간을 찾아오는 모습만 보아도 어떤 사연으로 오는지를 먼저 알 수가 있습니다. 병 고치러, 사업 문제로, 결혼 문제로, 자녀 문제로, 이혼 문제, 기타 문제를 가지고 오는 분들의 눈동자나 얼굴 표정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큰 스님에게서 법명을 (불교의 이름) 받아서 중생 제도를 하게 됩니다.

*수계: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계율을 받음


지면을 통하여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기본 과정을 적어 본다면 종교관, 세계관, 생사관, 자유관, 인생관, 윤리관, 전쟁관, 진리관, 창조관 들을 배우며 인간은 오온의 (五蘊)1] 집결체이며, 인과응보의 업을 따라 108 번뇌를 벗어나야 하고, 삼계,2] 육도 (六道),3] 윤회, 전생을 (轉生) 해야 하고, 고행과 참선으로 탐, 진, 치를 (貪瞋痴)4] 버리고, 합장하고, 참배하며, 예의 범절, 삼보에 (三寶 부처, 교리, 승려) 귀의, 사홍서원 (四弘誓願),5] 육바라밀 (波羅蜜多),6] 팔정도, 화랑 5계, 십계, 입정 (入定 혹 禪定),7] 법구경(法句經),8]무상정각 (無上正覺),9] 도량 법회,10] 기타 교육이 있습니다.

1]물질과 정신을 오분(五分)한 것. , ()·수()·상()·행()·식(). 오음(五陰). 오중(五衆). 

2]① 천계(天界)·지계(地界)·인계(人界)의 세 세계② 중생이 사는 세 세계.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③ 불계(佛界)·중생계(衆生界)·심계(心界). ④ 과거·현재·미래의 세 세계. 삼세(三世).

3]모든 중생이 선악의 업인(業因)에 의해,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天上 등). 육계(六界).

3]모든 중생이 선악의 업인(業因)에 의해,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天上 등). 육계(六界). 

4]탐은 욕심을 버려라의지에 해당. ()은 분노를 버려라; (受 감정)에 해당. ()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라; ‘상과 식’이 (想·識 생각과 기억) 작용

5]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워 최상의 불도를 이루겠다는 4가지 서원을 가리키는 불교 교리. 총원.

6]보살(菩薩)의 수행. 현실의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넌다는 뜻.

7]속정(俗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 삼매경(三昧境)에 이름

8]불교의 수행자가 지녀야할 덕목에 대한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내용은 폭력, 애욕 등을 멀리하고 삼보에 귀의하여 선한 행위로 덕을 쌓고 깨달음을 얻으라

9]석가모니께서  인생의 괴로움 때문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 6년 동안 철저한 수행 끝에 중 인도 마갈타국 부다가야 땅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경전에서는 인도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다 하고, 한자로는 ‘무상정득정각’, 우리말로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

10]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질병을 낫게 하거나 가뭄 등의 천재지변이 없도록 하고, 수명을 연장하게 하며 번영을 이룩하고 도둑이나 외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불교 주술을 조직적으로 의식화한 것을 도량이라



저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태선 승려가 되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승복을 입고 염주를 목에 걸고, 장삼을 (長衫) 걸치고, 목탁을 들고, 바랑을 (배낭) 걸머지고 다니며 소원 기도를 올려 주었습니다. 이름이 안 좋으면 오색등을 달아 주고, 천도 (薦度) 제사,* 다비식도 하여 주고 49 제도 지내주고, 운명이 나쁜 사람은 새빨간 부적을 만들어 붙여 주기도 하며 부처님의 은혜로 승려가 된 나는 불자의 사명을 평생토록 하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혼령이 극락세계로 가도록 기원하는 일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동기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가 된 나는 불교의 중생제도에 한 평생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승복을 벗고 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는가?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으나 지면을 통하여 3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 불교의 다비식을 보고(불교 장례식) 회의를 느끼고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다비식은 승려들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는 예식입니다. 저희 은사 스님께서 82세가 되어 갑자기 중풍병이 와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는 중은 제자들이 밥상도 갖다 드리고, 목욕도 시켜드리고, 소대변도 치워드려야 합니다. 하루는 친구 스님이 은사 스님의 용변을 치우려고 요강을 가지고 가다가 문턱에 걸려서 넘어져 용변 그릇이 깨어지고 방바닥과 옷에 용변이 묻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그때 친구 스님은 화를 내었고, 신경질을 부리면서 은사님을 원망하고 모욕적인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에 계신 은사 스님이 모욕적인 말을 듣고서 식사를 하시라고 공양을 갖다 드렸더니 "너희들이 귀찮아 억지로 갖다 주는 공양은 먹을 수가 없고, 너희들을 괴롭히지않고 안락사를 할 것이니 지금부터 공양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안락사는 자살을 말하는 것이며 불교에서는 정당한 자살은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굶어 자살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며, 매일같이 법회를 할 때마다 은사 스님의 모습은 처량하기만 했습니다. 하루는 안락사를 시키는데 본인의 각서를 받고 인장을 찍은 다음 참나무 장작 일곱 짐을 높이 쌓아 놓고, 스님을 장작 위에 눕게 하고, 연꽃 가운을 덮은 다음 석유를 붓고 다비식을 하였습니다. 큰 스님, 작은 스님, 학인 스님, 보살들이 모인 다음 고승들은 앞에 서고, 학인승은 뒤에서 견학을 하게 하고, 가사장삼을 입고, 염주를 목에 걸고, 손에 목탁을 두들기며 장작에 불을 붙인 다음, 불타는 모습을 보며 극락 왕생하라고 염불을 합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조견오온개공도 일체 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증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시제법공상법 탁탁탁 . . . (이하 생략)


생명이 끝나는 비명소리며 살갖이 터지는 소리, 뼈들이 어그러지는 소리는 참으로 들을 수가 없었으며 나무 일곱 짐이 다 타버려도 시체는 덜 타서 또 다시 이탕 삼탕을 하여 태운 다음 잿봉지를 싸들고 산에 올라가 동남풍 서북풍 바람부는 방향을 따라 날려 보내는 것을 지켜보고, 그날밤 밤새도록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보니 나도 중인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고 사는데 나도 죽으면 다비식을 해야 하고 불에 타야 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승복을 벗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시주 바랑에 넣어 준 신약성경을 선물로 받아 보고 기독교는 생명이 살아 있는 영생의 종교임을 알고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한 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으며 어떤 절간에 가서 일주일, 10일간, 15일, 30일 정도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고, 또 어느 절간에 있든지 마을로 가서 시주 쌀을 (공양미) 얻어 가지고 와야만 공양밥을 받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영주 부석사에 가서 수행하는 중에 봉화군 춘양면 법전이라고 하는 마을에 가서 염불을 하며 목탁을 치면서 시주공양을 받고 있는데, 어떤 젊은 청년이 내게 와서 인사를 하고 "스님, 시주 공양미 받지 말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세요" 했습니다. 나는 그 청년을 보고 "왜? 구원만 주나요, 100원도 천원도 주시면 안됩니까?" 했더니, "구원은 돈이 아니라" 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무엇이냐고 하니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때 저는 그 청년을 보고 야단을 치면서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사는가? 인간은 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 생 노 병 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당신도 나도 인과응보에 따라 업보중생을 하는 것이니 오늘 소승을 만난 후 그러한 거짓말을 하면 죽은 다음 지옥의 문턱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부처님 저 사람을 용서하옵소서.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책망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는데 이 청년이 또 따라와서 하는 말이 "예수는 차츰 다음에 믿고 먼저 이 책 한 권을 드리오니 꼭 읽어 보세요." 하기에 무슨 책이냐? 고 하니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나는 화가 나서 "나는 그 책을 읽을 수 없소. 부처님 정법인 팔만대장경중의 화엄경, 법화경, 천수경, 반야심경 같은 책을 평생을 보아도 다 못보는데, 당신이나 보세요. 관세음보살" 하고 가는데 이 사람이 또 따라와서 나의 시주 바랑 속에 억지로 성경 책을 넣어 주고 가버렸습니다.


불교에서는 시주 바랑을 한 번 걸머지면 하루에 세 번 이상 벗을 수가 없고, 누가 무엇을 시주 바랑에 넣어 준 것은 승려 혼자서 판단하지 말고 3인 이상이 같이 보고 판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짊어지고 다니다가 절간에 돌아와서 꺼내 보니 기드온 신약 성경책이었습니다. "불교는 이런 전도법이 없는데 기독교는 왜 이렇게 따라 다니며 전도하는가? 여기에는 무슨 진리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나서 다른 스님들 몰래 성경을 여섯 번이나 읽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니, 불교의 주인공인 석가모니는 80세에 열반(죽음)하셨는데, 기독교 주인공인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고 했으니 주인공이 살았다는 것은 종교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승복을 벗고 나온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살아계신 체험을 통해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승려만 되면 어느 절간에 가도 먹고, 입고, 잘 수 있는 의 식 주는 무조건 해결해 줍니다. 본인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싶어도 당장 의식주 문제 때문에 나올 수가 없어서 생각만 했을 뿐 매일 3-4회 정도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하루는 졸음이 와서 부처님 앞에서 잠이 들었는데 은사 스님으로부터 장군 죽비로 호되게 얻어맞았습니다. 잠이 오면 방에 가서 잘 것이지 부처님 앞에서 발을 뻗고 자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얻어 맞고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성경을 6번 읽는 가운데 한 구절이 머리속에 기억이 나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부처님은 80세가 되도록 살았어도 자기를 따라 오라고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책임을 질 수가 있기 때문에 오라고 하지 않는가 하여 절간을 뛰쳐 나와 뒷산으로 올라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시거는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합장 배례를 한참하고 나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질문을 했지요. "성경책을 읽어 보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천명을 먹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정말 그러한 능력이 있으면 소승이 3일동안 금식을 할 터이니 당신의 능력으로 배가 고프지 않게 하여 주세요. 그렇게 된다면 승복을 벗고 예수님을 따라 살겠습니다" 하고 3일간을 굶어 보았어요. 그러나 기대와는 어긋나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 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실망을 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탐진치에 또 내 눈이 어두웠구나! 도로 아미타불"을 하고 다시금 절간을 향하여 내려오는 도중 배도 고프고 힘도 없고 하여 조금 쉬어서 내려간다고 바위 밑으로 가서 돌베개를 하고 누웠는데, 피곤하여 잠깐 잠이 들었어요. 그 순간 비몽사몽간에 꿈을 꾸었는데 음성이 들리기를 "한 자 한치 앞도 볼 줄 모르는 인생이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냐. 어서 일어나 네 앞을 보아라" 하는 것입니다. 깜짝 깨어 앞을 보니 1미터 전방에 큰 독사뱀 한 마리가 올라오다가 꿈틀거리는 사람을 보고 머리를 들고 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내 자신이 무능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사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일깨워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내려와서 아버지께 (원구 스님) 큰절을 하고 "아버님 저는 주인공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기 위해 이곳을 떠납니다. 불효 자식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7년간 입었던 승복을 벗었습니다. 할렐루야!


개종 후의 연단과정과 고학의 길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연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은 17년 동안 절간에서 승려생활의 연단도 받았지만, 개종 후의 연단은 더 큰 연단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인간의 모습을 보고서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절간을 나와서 보기 싫은 승려 옷을 벗어 버리고 작업복 한 벌을 사서 입고 성경, 찬송가를 사들고,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먼저 회사나 공장에 가서 취직을 하여 돈을 벌어서 셋방이라도 구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보이는 회사마다 찾아가서 합장 인사를 올리고 취직을 부탁했지만 나를 보는 사람마다 옷은 작업복이요, 머리를 빡빡 깍은 것을 보고는 "당신 형무소 출신이군. 몇 년이나 살고 나왔소?" 하며 죄수로 취급하고 취직을 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고 식당 사람에게 아무데라도 좋으니 취직좀 시켜 달라고 호소하였더니, 두 젊은 청년이 자기 회사에 가면 취직이 된다고 같이 가자고 하여서 반갑고 고마워서 그들을 따랐습니다. 한참 가다가 그들이 하는 말이 취직을 하려면 사장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약주라도 한 병 사가지고 가야 하니 약주 살 돈이 있느냐고 하기에 그 정도는 있다고 하니 되었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따라오라고 하여 밤 11시까지 골목 골목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도 없는 교각 다리 밑으로 가서 앉으라고 하면서 여기가 당신 직장이니 가지고 있는 약주 값을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그때서야 저는 속은 줄 알고 도망을 가다가 각목에 얻어맞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보니 머리는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고, 호주머니에는 한 푼의 돈도 없이 빼앗기고 말았어요.


그때 저는 세상의 완악함을 알게 되었고, 절간에서 나온 것을 후회도 했습니다. 절에 있으면 스님 대우를 받을 것을 생각했지요. 어쨋든 밤은 깊어지고 통금도 있을 때라 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지혈하고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니 막연하기만 했어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는 않을 것인데 오늘밤 지내고 내일 또 취직을 하러 다녀보고, 취직이 안되면 다시 절간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있는데 몸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밤시간이 너무 적적하여 가지고 간 찬송가를 불러 보고 싶어서 책을 펴 보았습니다. 가사 내용은 읽을 수가 있는데 곡조를 몰라서, 불교의 염불은 곡조가 없으니 곡조없이 염불식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1장에 보니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양 성부 성자 성령 아멘." 


계속하여 읽어가는 중에 한 중간에 가서 내용을 보니 지금 찬송가 440장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하는 내용은 내 신세나 내 팔자와 같았습니다. 그 날 밤 찬송가를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이 들었다가 다시 깨어보니 날이 밝았습니다. 또 다시 취직하려고 다녔는데 오후 3시 경에 국제 사진관이라는 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눈물이 나더군요. 국제 사진관에 취직을 한 후에 사진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6개월 후에 어느 정도 기술 연마를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은 한 푼도 안 받고 먹고 자는 문제만 해결했습니다. 자취 생활로 닥치는 대로 먹을 때도 있고 굶을 때도 있었으며, 세탁은 차가운 물로 빨아 입고 잠 자는 곳은 마룻 바닥에 방석을 깔고 냉방에서 담요 한 개를 가지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면 교회를 가고 싶었으나 사진 일 때문에 교회에 갈 수가 없었고, 저녁에는 성경책을 읽고 잠을 잤습니다. 사진관에 오는 분들 중에 교회에 나가는 분들을 만나서 신앙 상담도 하게 되었으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신학교를 소개 받았습니다.


서대문 순화동에 있는 평안교회 내의 칼빈 신학교를 소개 받아서, 그 곳을 찾아서 그 때 이춘삼 목사님의 안내로 칼빈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 사정으로 등록을 하지 못하고 6개월간 낮에는 사진 일로 저녁에는 신학교에서 밤 11시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게시판을 보면 등록하지 않은 학생은 등록하라는 광고가 붙어 있었고, 독촉을 받을 때는 혼자 머리를 숙이고 '없어서 못냅니다' 속으로만 말을 하면서 춥고 배도 고프지만 끝까지 배움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한 학기(6개월)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방학과 동시에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등록을 못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실망을 하고 생각해 보니 이젠 절간에 가면 중들에게 맞아 죽게 되겠고, 신학교는 퇴학을 당해 목사의 꿈도 깨어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고향으로 가서 농사나 짓고 살고 싶어서 보따리를 싸들고 경상북도 영양군 부모님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교회개척과 목회 현장에서

고향에 돌아온 나는 경북 영양군 당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돈을 벌어서 부요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생겨서 여러가지 장사를 하였습니다. 파리약 장사, 무. 배추씨 장사, 사진 찍는 일, 찐빵 장사, 그릇 장사, 인삼 장사, 고추 장사, 고기 장사 등 하는 것마다 실패를 하고 머슴살이까지 하다가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칼빈신학교에서 6개월 동안 배운 실력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해 보겠다고, 경상북도 영양군 입압면 병옥동에 가서 막노동을 하면서 병옥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때 처녀 한 분과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 처녀가 지금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사모가 되었어요.


그 후 전도사로서 경상북도 지역 영양균 병옥교회, 노달교회, 교동교회, 영덕군 신기교회, 원구교회, 영일군 화산교회, 영천군 녹전교회, 청송군 지소교회 등 10개 개척 교회로 옮겨다니며 목회를 하다가 나의 부족한 실력과 여러가지 경제적 기타 문제로 목회를 포기하고 그만 세상길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게 되었고, 나쁜 친구들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 낙오자로서 어느 날 약주를 정신없이 퍼먹고 차에 치어 죽으려고 커브길 모퉁이에 누웠다가 치어 죽지도 않고 운전기사에게 뭇매를 맞았습니다.


도박을 하면 짓고땡을 하여 돈을 빼앗아야 하는데 속이지 않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속이랴 속지 않으랴 상대방 보다 내 것 보다 하다가 잠을 잘 수가 없어 눈알이 빨갛게 되었습니다. 먹는 것은 생기면 먹고, 안 생기면 굶고 때로는 올챙이 같이 먹고 때로는 빈대같이 굶고, 잠자는 곳은 추운 곳 더운 곳 선택할 수도 없어 닥치는 대로 잠을 잤습니다. 맥주, 소주, 뼈갈을 섞어 먹고 세월을 보내다가 몸에 질병이 생기에 되었습니다. 위장병, 간장병, 신장병, 대장병, 나중에는 당뇨병이 생겨서 결국 죽게까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건강할 때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죽은 다음의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죽어서 유황불못에 가서 죽지도 않고 타면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이 길을 벗어나야 하는데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성경 말씀이 생각나서 예수님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주님을 믿으면 용서해 준다고 하셨으니 이제 나의 생애는 주님을 의지할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회개하고 통회하며 자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 울고 통회하고 보니 마음이 시원하고 살 것만 같아서 찬송가 337장을 불렀습니다.


철학(관상, 사주, 수상)으로 전도

병을 고친 다음 전도할 결심을 하고 경희 대학교 의료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침을 맞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마침 동의보감 책을 펴서 읽어보니 숯가루를 (착골) 먹으면 몸 속의 죽은 피, 노페물이 녹아서 해독이 됨으로 혈액 순환이 잘되어 모든 속병을 고칠 수 있다는 허준 선생이 쓴 내용을 읽었습니다. 옛날 저희 아버지께서도 숯가루 먹는 자는 건강하다고 하신 이야기가 생각나서 돈도 없고 하니 돈 안드는 숯가루를 먹어 보자고 결심하고, 이산 저산,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숯가루를 구해 먹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신기하게 건강이 차츰차츰 회복이 되었습니다. 


숯가루는 간장, 된장 담글 때 장독에 넣어서 해독을 시켰으며, 공동우물을 먹기 위하여 우물을 팔 때 숯을 넣어서 대장균을 죽이게 했습니다. 음식을 먹고 너무 과식하여 설사를 할 때에 숯가루를 먹으면 곧 중지가 되고, 자녀를 낳고 문 위에 금줄을 칠 때에 숯을 꽂아 놓은 이유는 병균이 아기에게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패였습니다. 각종 소, 개, 돼지, 닭 사육에도 숯을 사료에 넣어 먹이면 설사를 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며, 지금 이온정수기 속에도 활성탄을 (숯) 넣어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깨끗한 잣나무 숯이나, 소나무 숯가루를 장기간 복용하면 건강하여 장수 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건강이 차츰차츰 회복되어서 경희 대학교 한의과 대학 한방 침술과에서 청강을 하면서 침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관상, 사주, 소금을 봐 주며 전도를 했습니다. 관상, 사주, 손금은 365가지 보는 법이 있는데 지면을 통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의 과거를 알아 맞춘 다음에는 성명 철학으로 수리, 오행, 이정을 보아야 하고, 사주는 초년, 소년, 중년, 말년을 봐야 하고, 지시각을 본 다음 "당신은 천도 복성법으로 살지 않으면 망한다"고 했지요. 천도복성법은 한문으로 하늘 천자, 길 도자, 복 복자, 소리 성 하니 하늘의 복된 소리라고 하여 그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한다고 하며, 그 소리를 듣고 살려면 교회에 나가야 팔자 고친다고 하여 많은 사람을 전도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원구 스님) 개종 시키다

전도를 열심히 하고 싶지만 성경과 신학 상식이 부족하여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신학교 학생모집 신문을 보고 부산 신학교에 편지를 하였더니 김소영 목사님께서 와서 만나자고 하여 부산으로 갔습니다. 나의 어려운 사정을 아시고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를 (엘리스) 만나게 하여 스폰서를 맺게 하여 주었습니다. 부산 동아교회 주일학생을 지도하면서 부산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 올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대전 목원대학교 신학과에 편입하여 1976년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동 교회가 감리교 재단에 가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을 졸업한 후 감리교 전도사로 파송을 받게 되는데 아버님께서 절간에 주지스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전도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고, 또 나를 아는 분들이 아버지도 전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전도하느냐고 반문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 17년 동안 승려 생활을 하던 나를 예수 믿게 하셨는데 사람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시니 아버지를 전도하고 난 후에 나도 목회를 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마음을 감동하게 하기 위하여 효도가를 (부모 은덕가) 적어가지고 경북 일월사를 찾아 아버님께 큰절을 하였더니, 불효자식이라고 돌아보지도 인사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주무시는 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매일 저녁 부모 은덕가를 4개월간 계속 불러드렸더니, 그 가사 내용을 듣고서 "기독교에도 그런 효도관이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타종교는 죽은 후에 효도하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살았을 때 효도하는 종교이기에 불효자식이 찾아왔습니다" 하였더니 "너 같은 자식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보니 기독교가 괜찮은 종교다"하고 하시면서 "본인이 젊을 시절에는 불교 신자가 많이 왔는데 늙어지니 오지 않는다"고 하며 "인생은 늙어지면 헛 것이요, 나이 많으면 자식 따라 사는 법이라"고 하며 "내 인생은 이미 끝이 났으나 너의 인생은 시작이니 네가 잘 되는 일이라면 나도 예수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날 저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고마왔고 아버지가 자식을 따라 믿겠다고 하니 무척이나 기쁘고 감격하여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아도 졸음도 오지 않았으며 찬송을 부르며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74세에 승복과 염주와 목탁을 불에 태워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아버님을 개종시킨 부모 은덕가(허사가곡)

1. 부모님의 은덕을 어디 비하며 무어라고 그 은혜 칭송하리요 

하늘같고 바다같고 높고 깊은 것 부모님의 날 기르신 은덕이로다 

2. 임신 중에 열달동안 지나실 때에 불편하고 어려우심 어떠 했으며 

해산 시에 피 흘리고 고생하신 것 일평생에 잊지 못할 은공이로다 

3. 오줌싸고 똥 싸는 것 사양치 않고 마른자리 진자리를 가라 눕히며 

감기하고 경기하고 잔병 할 때에 눈물로서 구호하는 자정이로다 

4. 죽은 아들 잃은 딸이 한이 되어서 밥 한술과 잠 한 잠만 전과 달라도 

놀라시고 걱정되어 할 바모르는 자정으로 미쳐지는 어버이로다 

5. 나를 업고 방아 찧고 불을 펴시며 먼 거리에 빨래하고 밭을 메신 공 

무엇으로 드리어서 보답하리까? 보화로서 갚지 못할 은정이로다 

6. 책보 끼고 학교가도 잊을 수 없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리시며 

책 펴 놓고 글 읽는 것 사랑스러워 날며 들며 웃으시는 은정이로다 

7. 자기 몸은 못 잡수고 못 입으셔도 좋은 의복 좋은 음식 장만 하시어 

자식만을 입히시고 먹이시려는 잊지 못할 어버이의 순정이로다 

8. 부모님의 슬하 떠나 성장한 몸이 새벽마다 눈물 짓고 기도할 때면 

보고 싶어 애태우심 생각할 때에 목이 메고 가슴 아파 눈물만 나오 

9. 재물 많은 부모라면 덜하련만은 가난하게 기르신 것 애처로워서 

못 먹이고 못 입힌 것 한이 되었고 마음대로 못해 주어 병이 되었네 

10. 하나님께 비는 말도 자식을 위해 이웃에게 하는 말도 자식의 자랑 

자다가도 생각는 것 자식이옵고 일하시는 그 재미도 자식 뿐이라 

11. 금의옥식 문화 주택 못해 드리나 부모님의 교훈만은 잊지 않고서 

부모님의 그 소원 이루기위해 이 몸 바쳐 주 섬기며 살아 보리라


박용묵 목사 중학생 시절 아버님 생일을 당하여 북만주에 계시는 데 가진 못하고 부모님 은덕이라는 노래를 지은 것이라고 함. 박용묵 목사 "기독교와 효도" (기문사, 1967년), 24-27. 

 

사동교회와 실업 중학교 설립

아버지가 74세에 개종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고, 아버님의 절간 일월사를 철거하고 초등학교 졸업생 35명을 모아서 절터 위에다 고등 공민학교를 세워서 인가를 받아, 경제적 사정으로 중학교에 못 가고 있는 자녀들을 모아 중등한문을 가르치며 기독교 교육을 시키며 신앙지도를 하여, 학생들을 예수 믿게 하고 그들 부모님을 전도하여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절간을 철거할 때에는 그 속에 뱀들이 새끼를 치고 각종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태울 때, 그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벼락 맞는다는 말까지 했으나 아직까지 맞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을 공부시킬 때에 자비량으로 가르쳤으며, 돈이 없어 찬송가를 구입하지 못하여 칠판에 한 장 한 장 써가지고 오르간도 피아노도 없이 육성으로 가르치고, 교과서 책들은 기독교 계통의 미션학교를 찾아다니며 얻어 가지고 와서 가르쳤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가르칠 선생님이 없어 나 혼자 12과목을 가르치며, 모르는 것은 안 가르치고 내가 아는 것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4회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으며 졸업생 가운데는 지금 대학 교수도 1명, 목사가 3명, 장로가 3명, 초 . 중 . 고등학교 교사, 공무원, 회사 사장님 등 여러 명이 배출되어 예수를 믿고 고향 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 공민학교는 중학교 평준화 관계로 문을 닫게 되었으며, 그 곳에 사동교회를 세워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즉 절간이 변하여 학교가 되었고, 학교가 변하여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간지 동아일보, 중앙일보, 주간지 영성중앙, 기독교 각계 신문, 극동방송,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 기독교 TV 방송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신문 기자를 통하여(동아일보 안동 주재기자) 상록수에 기사가 보도되어, 가계의 도움과 협조금으로 75만원으로 700평의 하천 부지를 구입하여 35명의 학생들이 합심하여 33평의 교회부터 건축하고 차츰차츰 돈을 모으고, 지방 주민들의 협조와 노력으로 40평의 학교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신문기사를 본 2명의 자원교사가 (여선생) 찾아와 합심해 주었기 때문에 배움에서 외면당한 자녀들이 배움과 신앙을 얻어 지금 졸업생 중에는 은행원, 5급 공무원, 각종 기업체에 상당수 취업을 하였고, 학생들이 단결하여 그들의 부모님께 전도하여 교인이 늘어나서 1974년 3월20일에 기독교 대한 감리회에 설립보고를 하여 재단등록까지 필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이 지역은 산간 벽지이지 때문에 버스를 타려면 2시간을 (8Km) 걸어야 하고, 기차를 타려면 4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안동역이나 영주역에 도착되는 곳이며, 서울 청량리역까지 중앙선 보통열차로 7시간이 소요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시설, 병원시설도 없는 곳이며, 중학교에 가려면 2시간은 걸어서, 또 버스를 타야 합니다. 주민 대다수가 불교와 무당 (미신) 종교에 가입되어 있는 지역으로 논이 없고 밭농사만 하는 곳이며, 여자들은 치마 외에 바지를 입지 못하며 살아가는 불모지대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절골 마을에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어, 멸망받을 영혼이 구원받아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었으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자랑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학생들과 생사를 같이하여 기사와 이적을 나타냄

미신과 가난과 무지의 자녀들이 모임 저희 사동실업학교는 남자 5명, 여자 30명 모두 35명이 생사를 함께하여 생활하며, 부활과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를 믿고 성령의 뜨거운 은혜와 사랑으로 뭉쳐서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교회와 학교를 짓는데 힘을 합치고 밤에는 철야기도 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74년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여러가지 무용, 연극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설 극장을 만들고, 20리 내에 있는 주민들 600여명을 초대하여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절간 찾는 사람에게 밥과 떡을 배불리 먹도록 주었으나 성탄일에 찾아온 600여 명에게는 줄 것이 없어, 무엇을 줄까 생각하다가 전 재산을 털어 돈 1만 5천원을 가지고 쌀을 구입하여 쌀밥을 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돌아간 이튿날 여기저기서 부조금을 모아온 것이 1만 8천원이 되니 하나님께서 3천원을 더 보태 주시는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절간 신도 회장댁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를 구원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3일 후 신도회장 아들이 독사(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전도하여 신도 회장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지금은 교회 주인인 권사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기독교의 위력을 보기 위해 서울 견학

불교 신도회장이 예수를 믿고, 그들의 집안 식구와 친척이 예수를 믿고, 많은 교인들이 늘어나게 되자 부흥회를 하고 싶어서 여러 목사님께 요청했으나, 너무 멀고 산간벽지라고 해서 모두 거절을 당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그리스도의 산 위력을 보이기 위하여 서울 구경과 기독교 기관이나 교회를 견학시킬 계획을 세우고 "왕복 차비 5천원만 납부하면 일주일간 숙식과 경비는 제가 책임을 진다." 고 광고를 하니, 평생 서울 구경 한 번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서울 구경은 하고 싶으나 돈 5천원을 낼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편도비 2천 5백원씩 내라고 했더니, 어떤 사람은 3천원을 내고 5백원을 달라는 이가 있으며, 어떤 사람은 돈을 내지 않는 분도 있었습니다. 15-75세까지 남녀 37명을 인솔하여 1975년 11월 5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동행해 줄 것을 믿고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 20리길을 걸어서 4시간 버스 타고 7시간 기차 타고 청량리에 도착해서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교회와 기독교 병원, 학교, 방송국을 다니면서 기독교의 위력을 보여 주었고, 이화여고에서 4명의 학생이 우리 교인 1명씩 책임지고 4일 동안 서울 구경과 숙박에 대한 책임을 맡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복까지 모아 주어서 한 보따리씩 들고 시골에 돌아와 서울 구경 못한 친척들에게 얻어 온 의복 가지를 나누어 주고, 그리스도의 주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견학 도중 저는 교인들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았건만 성도들은 피로 회복제 박카스 1병 사주는 이가 없었고, 평화시장을 구경시킬 때 한 줄로 세워 앞뒤 사람과 수건을 잡게 하고 줄을 서서 가니 모든 사람들은 구경거리 마냥 쳐다보았으며, 교통순경에게 많은 욕과 수치도 받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교향에 가서 기독교의 위력을 집안 친척들에게 얘기했고, 전도를 해서 90% 불교와 미신 지역이 70% 기독교 지역이 되었고, 이제는 전기도 전화도 가설되고 버스도 하루에 4회씩 다니게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너희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4:2)


목사 안수받고 목회지를 옮김

1973년 3월에 경북 사동교회를 개척하고 1977년 3월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남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고등 공민학교와 사동교회를 계속 섬기다가, 승려들과 불교 신도를 전도하기 위하여 사동교회는 후임자에게 넘겨 주고, 1978년 경기도 여주에 있는 여광 직업훈련원 원목으로 와서 연장 고아들과 여광원 고아원 아이들에게 신앙지도를 맡아서 2년간 하고, 1981년 서울에 와서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불교인 선교회 간판을 걸고 선교하다가 불교 신자와 승려들이 문공부에 고발을 하게 되어 포기해 버렸습니다. 1982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우상인 선교회 간판을 붙이고 간증 전도집회를 하여 여러 명이 개종을 하게 되었는데, 또 다시 불교계의 시비와 협박과 고발 사건으로 인하여 우상인 선교회 한국 제일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계속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물 주인이 부도를 내는 바람에 건물세를 받지 못하고 나오게 되어 영동전화국 앞 개인 가정에 월세방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공터를 빌려서 조그만 가건물을 세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터에 건물이 들어서게 되어 할 수 없이 양재역(말죽거리) 은광 여자고등학교 앞에 상가 3층 60평을 전세로 얻어서 30평은 교회 예배실로, 30평은 개종 전직 승려 숙소로 마련하여 지내다가, 1990년도에 서울 서초구 우면동 교육 개발원 앞 석천빌딩 지하 75평을 전세로 얻어가지고 중생교회와 기독교 중생인 선교회 간판을 걸고 지금까지 계속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따라 승려와 보살 87명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감리교 신학대학교 선교 대학원을 공부하고 목회학 석사가 되었습니다. 나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종교 선택을 잘못하여 허송 세월을 보냈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연단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승려 전도와 우상 숭배자들과 불교인을 전도하는 데 핍박은 물론이며 전도집회를 하는 도중에도 불교 승려들과 깡패를 동원하여 집회를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계속 이 생명 다하기까지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나의 계획과 소원

나의 계획은 개종자를 위하여 선교센타를 (선교회관) 마련하여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오는 분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결혼을 시켜서 가정을 만들어 주고, 기술을 가르쳐서 직업을 알선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여 주며, 사명감이 있는 자는 신학을 공부하게 하여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나의 간절한 소원은 1천 6백년 불교 역사 속에서 경치 좋고, 산수 좋고, 위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과 암자를 변화시켜서 기독교 재단을 만들어서 기도원이나 수양관을 만들고, 승려와 보살들이 승복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학을 배워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 조상은 불교를 믿고, 사실 우상을 믿고 살 때는 모두들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증거되는 한 예를 들면, 아침에 만났을 때 "아침 드셨어요?", 점심 때 만나면 "점심 드셨어요?" 저녁 때 만나면 "저녁 드셨습니까?" 했으니 얼마나 먹지 못했으면 만날 때마다 인사가 먹었느냐? 였겠습니까? 본인이 승려로 있을 때 마을에 나가서 시주 공양을 받을 때, 나이 많은 할머님들이 시주할 공양미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시주할 쌀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찢어지도록 가난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자식은 많고 먹을 양식이 없어서 산에 가서 산나물과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밀가루와 함께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고 변비가 생겨서 변을 보다 엉덩이가 찢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또 불교 신도들이 절간에 소원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불공을 드리고 쌀밥을 먹게 하면, 그 아이는 절간에 있겠다고 하면서 쌀밥이 먹고 싶어 집으로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산 범어사에 있을 때, 아침기도를 드리고 체력 단련을 위하여 산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개울가에 땀을 씻기 위해 물가로 내려가니, 숲 속 바위 위에 애기의 울음소리가 나서 찾아보니 갓난 아기를 기저귀에 싸서 갔다 놓고 "운명이 길면 부처님의 은덕으로 보살이 갖다 키워서 승려가 되라"고 쓴 글씨를 보고 데려다가 유미죽을 먹여서 키우도록 인계를 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 가난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1백년 역사로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민족은 이처럼 오늘날과 같이 행복하게 살게 되었음을 볼 때, 우리 민족 전체가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돕고 산다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백성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선교회관이 세워져서 함께 모여 단체 생활을 시키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저를 따라 나온 승려들 중에는 의식주 문제도 적응하지 못하여 다시 돌아간 분들도 20여 명이나 됩니다. 승려들은 어느 절간에 가도 의식주는 무료로 해결됩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빈 손 들고 돌아오는 분들이 되돌아 가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서 보살펴 준다면 많은 승려도 우리를 보고 개종하여 올 것입니다. 직접 사찰에 가서 전도하기 보다는 돌아오는 분들을 잘 돌보아 준다면 더 큰 전도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사랑을 실천하여 예수를 믿고 자자 후손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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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내용은, 개종인 선교회를 (구 중생인 선교회) 섬기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신 고 김진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지금은 아드님 되시는 김태훈 목사께서 아버님의 고귀하신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 사역에 헌신하고 계십니다. 몸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께 온 열정을 쏟아 헌신하시며 많은 일들을 벌려놓고 계시던 아버님의 갑작스런 소천으로 가족들이 엄두를 못내고 당혹스러워 하시는 것 같았지만,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기관들을 섬겨나가고 계십니다.


이 사역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사역같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사역이라 혼자 알고 있기에는. . . . 적은 헌금에도 항상 꼼꼼이 챙겨 보내주시는 영수증과 선교 소식들, 그리고 가끔씩 그 바쁘신 중에도 친필로 감사의 답례 편지도 있지 않으시는 성실과 겸손을 보여주시던 김진규 목사님. 정말 진솔하시고 귀한 분이다라고 느껴지더군요. . . . 혹, 이 귀한 일에 적은 힘이나마 기도와 물질로써 동참하시고자 하는 분이 있지 않나 해서 이 간증을 올려 보았습니다. 아래 주소와 전화번호 함께 올려드립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개종인 선교회, 새로남 교회 : www.nbmc.or.kr

139-900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13-8

기도원: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 산14-1번지

☎ 02) 572-3601(교회), 02) 576-7415(목사관)

033) 747-2594 (개종인 생활관)

*이 주소나 전화 번호가 2020년 1월 현재도 유효한 지는 모르겠음.



*위의 간증은 https://m.blog.naver.com/hope_4u/110041953865에서 가져 옴. 

그러나 각주를 첨가하고 몇 군데서 교정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