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통치 역사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
우 리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라고 믿는다. 혹자는 언약을 중심주제라 지적하기도 혹자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교제 등 여러 다른 주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핵심 주제에서 하나님의 통치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다시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통치하실 때, 언약을 (헌법과 법률들) 수단으로 하여 통치하신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언약의 사고 역시 하나님의 통치 사고와 함께 나란히 나타난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창조 때에 하나님은 창조 질서를 세우셨고, 아담과 에덴에서 언약을 체결하셨다 (창 2:15-17). 하나님과 인류의 조상 아담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제 1부 서론
역사관
순환적 (循環的) 역사관
로마나 그리스인들, 혹은 고대 인도인들은 역사가 돌고 돈다고 이해하였다. 이런 시간관은 어쩌면 고대인들이 일년 마다 순환되는 계절들의 변화나 밤낮의 주기적인 교체 등을 고찰함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것이다 (M. Eliade, 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 영역 W. R. Trask 번역 [Routledge & Kegan Paul: London: 1955], 80, 128, 184, 217 참조).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은 모든 예술과 과학이 여러 차례 완전 발전한 뒤 소멸되었고, 또 시간이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사물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세계는 반복하는 역사의 장으로서, 현실의 특이성과 기이성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다. 미래는 본질상 이미 결정된 것이며 (왜냐하면 이미 지난 과거의 반복일 것이므로), 현재는 다시 반복되지 않는 유일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그래서 헬라인들에게 구원이란 이 반복되는 시간으로부터의 도피였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수학 공식을 통해서 익히 아는 수학자, 과학자 피타고라스는 사실상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과 대동소이한 영혼의 윤회를 믿었던 자였다. '영혼의 윤회'를 영어로는 metempsychosis라 하는데, 이 단어는 헬라어 meta (변화) + en (in) + psyche (영혼)의 합성어이다. 즉 영혼에서의 변화란 의미이다.
끝임없이 반복되는 세계 역사로부터의 탈출이란 구원관은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존재의 끝없이 반복되는 수레바퀴에서의 탈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전생담을 서술한 자타카에 (Jataka) 수 많은 부처의 화신이 나타나게 되는 것도 이런 순환론적 역사관 때문이다 (The Jataka or Stories of the Buddha's Fomer Births, E. B. Cowell 편집 [Cambridge Univ. Press: Cambridge, 1895-1913], 6 vols).
기독교의 직선 역사관
기독교는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그분이 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신 그 시점은 오늘날 주전과 (Before Christ, B.C.) 주후로 (Anno Domino, A. D.; in the year of the Lord 주님의 해에) 구분되는 분수령을 (分水嶺 watershed) 이루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은 하나님의 세상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타락과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선포, 그 선포된 약속의 성취를 위해 역사 가운데 오신 에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 사건들을 선포하는 복음의 세계적 전파, 그 이후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심판, 그 후에 나타날 영원한 세상에서의 삶 등으로 시작과 진행과 종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직선적 역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제2 부 초기 역사
창조와 에덴 동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이 구절은 우주 만물의 창조를 기술하는 창조 기사의 제목이다. 이 제목이 제시된 직후에 (창 1:2) 창조 당시 창조의 원질의 상태와 상황이 묘사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런 우리의 본문 분석은 오늘날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본문-언어학적 (text-linguistic) 분석에 근거하며, 이런 분석이 있기 이전의 '문장 단위' 중심의 (sentence unit) 전통적 히브리어 문법서들로는 (E. Koenig, GKC, Joueon-Muraoka 등) 문장들의 결합인 '본문'을 (text) 제대로 분석하기 어려웠었다.
창 1:2에는 창조에 간여(干與)하시는 "성령님"이 마치 독수리처럼 수면 위에서 날개를 펼치고 배회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수면에 운행하시다"는 (werûªH ´élöhîm meraHeºpet `al-Penê hammäºyim) 영역본 NIV가 그 의미를 좀 제대로 전달하는 듯 보인다: "수면 위에서 날고 있었다" (was hovering over the waters). 사복음서가 하나같이 묘사하는 주님의 세례 받을 때의 장면이 없었다면, 성령님을 새에 비유하여 묘사하는 이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2)
어쨌거나 하나님의 창조 말씀 선포가 있기 전에 성령께서는 창조의 준비를 하신 듯 보인다. 어떤 창조적 일도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는 일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창조 원질의 상태와 상황이 묘사된 후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기술된다 (창 1:3-2:4). 창조는 말씀에 의한 창조였다. "빛이 있으라!" 빛이 생겨났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의 목적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는 하되, 왜 만물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이 무엇일까?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말씀 전체에서 창조와 연관된 사고를 모아서, 나름대로 묵상해서 왜 창조하셨나?를 추론해 내어야 한다. 이 방면으로 묵상을 많이 한 사람이 미국의 설교자 부흥사 조나단 에드워즈였다고 여겨진다. 그의 성경적 창조에 관한 사고는 예일 대학에서 에드워즈의 논문을 전체로 웹에 올려 놓았으므로 언제든지 참조해 볼 수 있다:
http://edwards.yale.edu/archive?path=aHR0cDovL2Vkd2FyZHMueWFsZS5lZHUvY2dpLWJpbi9uZXdwaGlsby9nZXRvYmplY3QucGw/Yy43OjU6Mi53amVv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창조와 역사 이해
하나님은 무한히, 영원히, 불변하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영화로우신 분이시며,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피조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으시고, 피조물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거나 피조물에게서 어떤 것을 받을 것이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하신 분이 어찌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성경은 여기에 대하여 언급하길,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라 한다 (계 4:11). 이런 찬양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 돌려진 찬양과 상응한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계 5:12). 측, 천상 예배에서 울려 퍼진 찬양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창조와 구속을 찬양의 이유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시 19:1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신데 왜 세계를 창조할 필요성을 가지실 수 있었을까?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이, 스스로 영화로우시고 자족하신 분이 아니신가? 여기에 대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향 가운데는 선함을 전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곧 피조물이 흔히 선행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립적이며 자기 운동적인 분임을 보여준다. 피조물은 선함의 실천에 있어서 그토록 독립적이거나 자기 운동적이지 못하다. 피조물들은 선함의 실천에 있어서 그들이 발견하는 어떤 대상에 의하여 움직이거나, 보기에 좋거나 선함을 베풀 가치가 있어 보이는 대상에 따라서 자신을 내어 주거나 또는 친절함을 나타낸다. 반면에 오직 하나님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기 운동적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전달적인 성향을 실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성향을 촉구하거나 유도하는 그 어떤 다른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과 가치있는 것, 심지어는 대상의 존재 그 자체도 하나님의 넘쳐나는 충만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상현 1999:256).
에드워즈는 오는 세상에 대하여도 주목할 만한 주장을 내세웠는데,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대에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은 완성되겠지만, 구속의 열매는 신천신지에서 끝없이 증대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으로 세상은 끝인가? 구속된 성도들은 영화롭게 되고 그것으로 모든 역사는 중단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생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또 완성하지만, 그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영생은 그저 지속되는 기간이 아니다. 영생이란 역사와 자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포함한다. 성도는 결코 다함이 없는 동안 영광을 즐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고 종결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완성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이 도래한다. 완성된 구속의 현실태의 영속적인 증대가 계속되는 시발점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부활 후에 성도들은 영화롭게 된 육신을 입을 것이다. 동시에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충만한 기쁨과 능력, 지혜를 입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최종 완성이 아니라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충만성에서 비롯되는 증대와 확대가 성도들에게서 무한하게 재현되어 더욱 더욱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같이 영원한 자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하였다: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거룩성과 행복에서 영원토록 자라갈 것인데, 나는 이러한 기초로부터 그들이 가질 생각들이 영원토록 증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도들이 최초로 영화롭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가진 생각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숫자는 유한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영광 가운데 너무 오래도록 살아서 이제는 살아온 기간의 각 시기가 그들이 가진 생각들의 수효보다 많아질 때가 틀림없이 도래할 것이다. . .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영원토록 증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지식이 증대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거룩성 또한 증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 지식에서 증대하고 자라가고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것에서 자라감에 따라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탁월성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탁월성을 보게 됨에 따라서, 마찬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됨에 따라서, 마찬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가지게 될 것이다 (327).
에덴 성소
에덴은 모든 후대 성소들의 원형이었다. 에덴성소와 출 25장 이하의 성막 묘사에는 서로 병행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가능해 진다 (최종태, 예언자에게 물어라, 2판, 23페이지 이하; M. G. Kline, Kingdom prologue: Genesis founations for a covenantal worldview. [Eugene: Wipf and Stock, 2006], 48; G. J. Wenham, "Sanctuary symbolism in the Garden of Eden story," Proceedings of the World Congress of Jewish Studies 9 [1986], 19-25).
타락하기 전,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성전, 에덴동산은 말하자면, 성전 안의 성소 혹은 지성소에 해당되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행 7:4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마 5:34-35)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세상, 곧 자신의 성전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에게 자기 영을 불어 넣으시니 그가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다른 형상을 하나 더 만드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남자와 여자, 곧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에덴동산에 저들을 두셨다 (창 2:15).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인 인간에게 명하신 바는 자기를 섬기고 (아바드), 자기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창 2:15).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고, 동시에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해야 할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든 면에서 나타내야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실은 그가 거룩함이나 의로움 등과 같은 성품에서의 특질면에서 (골 3:10)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과 그의 언어성과 통치성 등과 같은 자질, 혹은 그의 신체적 외모에서의 닮음 (창 5:1-3 참조) 등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인간은 그러니까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 혹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할 때에, 신약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고를 찾을 수 있다:
1)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는 (그리스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골 1:15)
이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 1:3)
3) 영적으로 성숙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도 안에 이루어진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이런 신약의 사고는 요약하자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참 형상이시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영적으로 성숙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셨고, 지혜, 거룩, 의와 능력, 권세에서 충만하였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그런 완전하심은 성령님을 한량없이 그 위에 부으심으로 가능했다 (사 11:2, 요 3:34, 눅 4:18, 행 10:38).
오늘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목표는 무엇보다, 인격에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고 (갈 5:22),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대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내 인격에 더함으로 인격에서의 성숙, 다음에 우리의 지적인 영역에서 성령님의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충만함을 받고, 다음에 우리의 신체적인 면에서의 건강, 끝으로 우리의 영적인 면에서의 능력과 권세를 받음으로 달성될 것이다.
오늘날 "영성" 훈련을 강조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초점은 인격에서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아량과 용서의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어떤 상황에서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굴복하는 자기 부인의 삶의 방식에 두어진다. 이런 영성 훈련에 더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권능도 받아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며, 자연도 우리가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고대 근동의 형상/ 우상 사고를 조금 언급해 볼까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지금의 이라크, 시리아, 터키 동남부 지역) 짐승 형상들이나 (theriomorphic images) 사람 형상들이 (anthropomorphic images) 만들어져 신전들에 안치 되었었다. 그런 형상들은 저들의 생각에 신들을 상징하는 형상들이었다. 그런데 고대 근동세계에서, 이 신의 형상들을 조각하여 만들었다고 곧장 그것을 신의 형상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 만들어진 형상은 여러 의식들을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신이 그곳에 자신을 나타내고, 신이 된다고 믿었다. 그 의식들 중에서 "입을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었고 (mis pi) "입을 여는 의식"이 (pit pi) 있었다. 입을 씻는 (정결케 하는) 의식은 그 형상을 조각한 장인이 나무로 만든 칼로 자기들의 손을 절단하고는 (상징적, 의식적으로 그렇게 흉내를 낼 뿐이지만), 자기들이 절대 그 형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한 신이 태어난 것이라고 맹세한 의식이었다. 그리고나서 그 형상의 입술들을 적어도 14번 씻어서 신이 거하기에 적절한 처소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 후에, 그 형상의 입은 여는 의식을 통해 열려졌다. 곧 그 형상이 향 냄새를 맡고, 듣고 음식을 먹고 하는 식으로 감각들이 살아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 형상은 산 자가 되었고, 산 신으로 대우를 받았다. 실제로 신전 관리들이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키고, 음식을 제공하며, 분향을 하였다. 이런 살리는 의식을 행한 이후에, 그 형상은 신전의 지성소에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런 이방인들의 관습과 달리 성경은 어떤 형상도 만들어 그것에 절하거나 섬기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출 20:4). 할로는 (W.W. Hallo) 제안하길, 이런 금지 명령은 인간이 야웨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이 신을 나타내는 유일하게 적절한 형태로서 기능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했다. 할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성경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첼렘 엘로힘) 인간이 그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bidemut elohim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것이고, 제2 계명에서 금지된 바는 . . . 신을 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는 것이다 (W. W. Hallo, “Cult Statue and Divine Image: A Preliminary Study” in Scripture in Context II [Winona Lake: Eisenbrauns, 1983], 2).
다시 말하자면, 형상 금지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할로의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달라서 다른 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나무나 돌, 금속으로 만들어진 의식용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의 살아있는 형상인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자기들의 신의 형상들을 만들어 신전의 가장 거룩한 곳, 곧 지성소에 안치하였다 (이스라엘은 지성소에 '언약궤'를 안치하였다). 고대 근동 사람들이 과연 자기들이 만들어 신전 지성소에 안치한 그 신의 형상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다. 예컨대, 프리드만은(R. E. Friedman) 그 신전 형상들의 (cult statues) 기능은 카톨릭 교회의 예수님 혹은 마리아 초상이나 성상 (icons) 같아서, 그 형상이 경배자들에게 그것이 상징하는 신을 상기시키고, 자기들의 신들에 더욱 가깝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M. Dick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ult Image and the Deity in Mesopotamia” in Intellectual Life of the Ancient Near East [Prague: Oriental Institute.1996], 111). 그렇지만 프리드만은 자기의 주장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오직 그는 바벨론 문헌들은 형상이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R. E. Friedman, Who Wrote the Bible? [London: Jonathan Cape.1988], 35).
프리드만과 달리 커티스는 (E. M. Curtis) 형상은 단지 신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에 불과하다는 사고는 고대 근동 사람들의 사고와 다르다고 지적한다. 고대 근동인들은 신이 실제로 그 형상 안에 임재한다고 믿었고, 그 형상은 비록 배타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신이 자신을 나타내는 아주 특이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Dick 1996:111). 즉 그 형상에만 어떤 신이 자기 임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신의 형상은 그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야콥슨은 (Thorkild Jacobsen)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장하길, 신전에 안치된 형상은 (cult statues) 신이 어떤 특정한 신적 내용물을 쏟아 붓는 일종의 "그릇"이나, 아니면 신이 그 안에 자기를 드러내는 신체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 형상의 물질적 요소들은 (돌이나 나무, 금속 등) 어떤 방식으로건 그것이 나타내는 신이 되도록 변질된다고 (transsubstantiated) 간주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그 형상이 신비롭게도 그것이 나타낸 그 신으로 변모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신이 초월성에서 제약을 받아 그 형상에 갇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T. Jacobsen, “The Graven Image” in Ancient Israelite Religion.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7], ed. Patrick D. Miller et al., 22-23). 그럼에도 그 형상이 신이 되었지만, 그 형상이 형상이 되기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한다. 다시 말해 그 형상은 신이 되었지만, 동시에 신이 아니었다.
보이는 현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구분하는 우리 현대인이 보기에는 그런 고대 근동인들의 사고가 아주 모순되게 보일 것이지만, 그들은 그런 모순을 생각지 못하였다고 한다 (Jacobsen 1987:18). 고대 근동인들의 마음에는 그 신전의 형상과 그 형상이 상징한 그 신은 서로 별개의 것이면서도,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형상이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형상은 신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저들은 제물을 그 신의 형상 앞에 둔 것이 아니라, 그 신 자체에게 바쳤다. 그 형상은 신의 살아있는 화신이었고 그 신은 사람이 만든 형상이 아니라 실제로 신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에라 (Erra) 신화에서, 바벨론의 신 마르둑의 형상이 숯 검댕으로 덮이고, 그 의복이 파손될 때, 이는 그 형상만의 운명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지 않고, 마르둑 신 자체가 그렇게 되었다고 간주되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앗시리아 산헤립 왕이 바벨론에서 마르둑 신의 형상을 납치해 가져갔을 때 (주전 689년) 마르둑 신이 앗시리아로 포로가 되어 간 것을 의미하였다 (Marduk's Ordeal)(C. Walker and M. Dick, The Induction of the Cult Image in Ancient Mesopotamia. [Finland: Vammalan Kirkjapaino Oy, 2001], 7).
만약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신전이 적의 공격을 받고 그 신전 형상들이 전리품으로 탈취당했다면, 그 신은 그 형상이 더럽혀져서 그 형상을 버리고 떠났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 신전 형상들을 원수들에게서 되 찾으면, 그 형상들을 의식을 통해 정결케 만들고 신전에 복원시켰다. 그런 복원의 때에는 제사장과 왕, 모든 백성이 그 신전 형상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형상의 죽음은 곧 신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 형상이 성공적으로 복원되면, 다시 입을 씻는 의식과 입을 여는 의식을 시행하여 원래 있던 자리에 안치되었다. 그렇게 형상이 제 자리를 찾으면 그 때는 형상의 부활 곧 신의 부활의 때로서 즐거워하였다.
자, 이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방인들이 나무로 신을 조각하여 금은을 덫칠하여, 신의 형상을 만들었던 관례와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방인들은 죽은 실체를 여러 의식을 통해 신이 실제로 그 죽은 실체인 형상 안에 들어와 그 형상이 산 실체 곧 신으로 변화된다고 믿었다.
자, 이제 이런 고대 근동 사람들의 "형상" 이해는 성경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성경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고대 근동의 불신자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의식들을 통해 신이 된다고 믿었던 것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고대 근동인들의 형상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의식을 통해서 살아 있는 신이 된다고 믿었다. 인간은 타락하기 전에 지상에서 하나님 자신을 대리하는 자로 세움을 입었었다. 말하자면, 타락하기 전에 적어도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신적인 권위와 영광을 상실해 버렸다. 고대 근동인들이 자기네 형상이 탈취를 당하면 더럽혀져서 신이 떠나고, 그 형상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고 간주하였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 그분의 임재를 지니지 못한 '육'으로 (신약에서 '사륵스'; 구약에서 '바사르') 전락하고 말았다 (창 6:3, 사 31:3).
아담은 자기 형상, 자기 모양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창 5:3).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신 사실을 반영하는 말씀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의 속성을 아들은 그대로 전수 받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분의 속성과 자질을 그대로 받은 자이다. 그분의 거룩함, 의로우심, 사랑, 신실함만 아니라, 통치성과 언어성 등에서도 그러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어떻게 보면 신적인 존재이지만, 타락한 후에 그런 신적 권세나 영광, 지혜와 거룩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때, 다시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희미하게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 삼중 직분을 행사하였던 모세, 완전하게는 역시 완전한 의미에서 삼중 직분을 행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원래 위치
경배와 말씀 준수 (창 2:16-17)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역할은 겨우 동산지기나 농부가 아니었다. 인간은 창조 기사를 검토해 본다면, 원래 왕 (창 1:26-28; '정복하라, 다스리라'), 제사장 (창 2:15-17; '섬기고 지키다'), 그리고 선지자적 (창 2:19-20) 존재였다 (최종태, 예언자에게 물어라, 17페이지 이하 참조).
창 2:15에 대한 오해 때문에 인류의 조상은 원래 농부였다는 식의 말이 나오게 되었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본문에서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는 히브리어 le`obdäh ûlešomräh이다 (레오브다흐 울레쇼므라). 이 표현은 부정사 (infinitive) 구문인데, 에덴 동산에 두신 목적을 표현한다. 그것을 다시 번역하자면, "그것을 섬기고, 그것을 지키도록"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셨다). 이 표현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에덴 동산에 두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 (최종태, 구약개론 신학, 169이하; 최종태, 예언자에게 물어라, 17페이지 이하 참조).
노동은 원래 인간의 사명이 아니었고, 오직 타락한 후에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게 되었던 일종의 저주였다. 다음의 말씀을 음미해 보라.
창 3: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타락 이전에는 사실 노동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전 자동으로 조절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무상으로) 모든 것은 풍성하게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예배, 감사, 찬양, 기도, 교제, 충만을 향유하면 되었다!
이제 범죄한 인간은 그런 축복을 향유할 권리가 박탈당했다. 에덴에서 쫓겨났고, 저들은 땅을 갈고 거기서 식물을 얻어야 했다.
그렇다고 오늘날 노동을 무시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처벌을 달게 감수하는 일이 인간의 도리이고, 비록 구원을 받았다 하나, 여전히 인간의 사는 환경은 완전하게 저주에서 풀림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구원의 최종 완성은 아직 도달하지 아니했다. 이런 중간 상태에 사는 우리로서는 노동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일을 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아담 언약
창 2:15-17은 하나님께서 에덴에 인간을 두시고 그에게 삶의 목적을 주셨다고 묘사한다. 에덴에 두셨다라고 할 때 사용된 히브리어 "누아흐"의 사역형은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안식과 안전의 향유를 위한 배치임을 암시해 준다. 동시에 "섬기고 지키도록" 사람을 에덴에 두셨다는 것은, 그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아담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에덴 동산에 주어진 제사장적 존재였다. 아담은 결코 처음부터 동산지기 정도의 농부가 아니었다. 이런 우리의 주장은 몇 가지로 확정할 수 있다. 우선, "섬기다"란 동사와 "지키다"란 동사가 같이 사용된 경우, 구약에서 대개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다, 곧 그분을 경외하다, 그분을 사랑하다란 사고와 대동소이한 사고를 전달한다. 다음으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것은 에덴동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분을 배반하고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린 때문이었다.
나중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진입할 때, 하나님은 저들에게 가나안 땅을 잘 경작하고 지키라고 결코 명령하신 적이 없다. 대신 하나님은 거듭해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은 신 30:15이하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섬기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시고 (지키다), 그들에게 사망과 생명, 화와 복을 각기 저들 앞에 두셨다고 말씀하신다. 가나안 땅에서 생명과 축복을 얻는 방식이나 에덴에서 그것들을 얻는 방식은 동일하였다. 즉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에덴동산에 두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 관계 설정으로 인하여, 비록 완전 수동적인 방식이었지만, 아담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서게 된 것이다. 그 언약은 우리가 '에덴 언약' 혹은 '아담 언약'이라 부를 수 있는데, 각기 장소나 그 언약의 대상을 주목하여 명명한 것이다. 아담 언약의 조건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분의 계명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으로 대표되어지고 있다. 다른 계명들이 있었는지는 본문에 언급이 없어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언약에 충실할 경우, 아담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덴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 나무만 아니라, 생명나무도 있었기 때문이다.
창 1-2장의 창조 기사에는 인간의 창조는 기술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어떤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에게 선악과를 금지하였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을 불순종하거나 거역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두어졌다는 점이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행동에서 일정한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언약 관계 하에 위치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다음으로, 창조 기사에서 언약 사고를 암시해 주는 다른 사항은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린 이후에 자연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창 3: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여기서 보듯, 자연계는 아담의 범죄 때문에 덩달아 저주를 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였다. 자연계와 인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길래 자연까지 인간의 범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창세기 저자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묘사하면서, 은연 중에 인간과 자연 만물 사이에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그 둘 사이의 관계란 무엇인가?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사고가 고대 종주권 조약 사고이다 (손석태,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계약 구조" 신학과 경건, [광주: 광신대 출판부, 2002, 41]).
고대 근동의 종주권 조약이란 강대국과 주변 약소국이 맺었던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외교틀이었다. 강대국이 종주국이 되고 약소국은 그 강대국의 보호를 받는 봉신국이 된다. 봉신국은 강대국의 식민지는 아니지만, 여러면에서 강대국의 입김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조선과 명나라, 혹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관계도 일종의 종주권 조약의 틀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한 事大주의가(사대; 큰 나라를 섬김) 조선시대의 국가 외교의 기본이었던 때에, 명나라나 청나라 황제가 보내는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은 영접도감이란 관청에서 도맡아 하였지만, 상국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결코 되풀이 되어서 안될 과거의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다.
중국에서 칙사가 온다는 기별이 오면, 2품 이상의 원접사가 신의주까지 가서 마중하고, 거기서 서울까지 칙사 일행이 지나는 동안 적어도 다섯 번의 연회가 저들을 위해 베풀어졌다. 칙사가 서울에 도착하면, 임금 주재로 입경한 그 이튿날 下馬宴을 (하마연=말을 내리는 축연. 사신도착 축하연) 베풀고, 그 이튿날은 익일 연을, 그 다음날에는 정전천연, 그 다음 날에는 회례연, 별연, 그리고 돌아가는 전야에 상마연 (말을 타는 것을 기념하는 축하연), 돌아가는 날 전연 등 7차례의 융숭한 접대 잔치를 베풀었다. 그뿐인가? 칙사가 돌아갈 때는 선물로 은 10만냥, 인삼 2천근, 호피, 비단, 담뱃대, 종이 등 한국 특산물 200여 가지를 300여 마리의 말에 실어 보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칙사가 한번 왔다 가는 날이면 조선의 국고 재정 4-5분의 1이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 행은 두 가지 형태로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행이 있었고 비정기적으로 가는 두 가지 형태를 취했다.
정기적인 사신
1) 동지사 - 해가 저물기 전에 황제를 뵙는 것
2) 정조사 - 새해가 열리는 연초에
3) 성절사 - 황제의 생일 축하연에 참례
4) 천추사 - 황실의 중요 제사때 참례
비정기적 사신
1) 사은사 - 감사한 일 발생시
2) 주청사 - 청원할 일이 있을 때
3) 진하사 - 축하할 일이 있을 때
4) 진위사 - 위로할 일이 있을 때
이때 사신 인원은 약 200명으로 정사 부사 서장관이 수행원을 이끌었고 이 사신 행차는 조공 무역도 이루어졌고, 중국의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종주권 조약 관계에서, 종주 대왕은 일방적으로 쌍방간의 관계를 규정하여 봉신국 왕에게 부과하였다. 둘 사이의 관계는 봉신국이 종주국에 일방적인 충성을 바치고, 종주국은 봉신국을 보호하는 그런 외교 관계였다. 만약 봉신국이 종주국을 배반하는 경우, 봉신국의 왕이나 봉신국 백성은 모두 종주국의 무서운 보복을 감수하거나 종주국을 맞서 죽기까지 저항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종주권 조약 사고가 창조기사 이해에 어떤 빛을 비출 것인가?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했지만, 자연 만물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아담은 만물을 통치하도록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대리 통치자였다 (창 1:26-28). 말하자면 종주 대왕이신 하나님의 봉신 왕으로 세움을 입은 셈이다. 아담이 통치하도록 세움을 받은 나라는 온 세상이었고, 그 온 세상 만물이 말하자면 아담의 백성이었다. 시편 기자는 창조 때 인간의 위치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사도 바울도 롬 8:19이하에서 이렇게 인간과 다른 자연 만물 사이의 관계를 노래한 바 있다: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런데 봉신국 왕이 반역하면, 그 봉신 왕만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백성이 모두 처벌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종주권 조약의 틀에서 본다면, 아담의 범죄 때문에 만물이 저주를 받게 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 관계를 설정하였다는 이해는 신약에서 사도 바울의 사고에서도 지지받을 수 있다. 사도는 롬 5:12이하에서 어떻게 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지 그 원리를 제시하면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다. 적어도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땅도 아닌 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 점을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비교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모든 태어날 인류의 머리였고 대표였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역시 모든 그를 믿을 자들의 머리시요 대표이시다. 아담 이후에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벌써 죄인으로 태어난다. 아무런 죄도 지은 적이 없을 터인데, 태어나는 갓난 아기까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혹자는 죄의 유전성, 혈통의 유전성을 근거로 그 점을 설명하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개연성 있는 설명은 아담의 대표성 사고로 설명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종주권 조약 사고를 언급한 바 있는데, 아담의 대표성 원리라는 것도 사실 이 종주권 조약 사고와 연결된다. 종주권 조약에서 봉신국 왕이 종주 대왕에게 범죄하면 봉신국 왕만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봉신국 백성이 죄인이 되어 처벌 대상으로 전락함이 대표성의 원리이다. 한 사람이 범죄했지만, 왕은 백성의 대표로서 그 나라의 머리인 까닭에 그에게 속한 모든 백성이 범죄한 것이 되고,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왕과 그에게 속한 백성 사이의 법적 일체성 혹은 집단 인격체 사고와도 연결된다.
아간이란 한 사람이 범죄했지만, 그에게 속한 가족 전체가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수 7:24-2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7: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이 대표성의 원리는 오늘날도 엄연히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어떤 가장이 노름에 미쳐서 가산을 탕진했고, 마침내 집까지 날려 보냈다. 집이 타인에게 넘어갈 때, 집달리들이 와서 물건들에 딱지를 붙이고, 집의 문을 못을 쳐서 봉해 버린다. 이제 그 타락한 가장의 재산은 전부 타인의 것이 되었고, 그 가족들은 아무런 죄도 없지만, 그 가장에게 속한 가족이라는 한 가지 이유에서 자기 집인데도 발을 동동 구르며 자기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누가 알 것인가?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고, 원망해야 한다면, 아빠를 잘못 만난 것, 남편을 잘못 만난 것을 원망해야 할 뿐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그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에게 속한 모든 후손은 전부 죄인이 되었고, 사망은 아담과 그 후손 전부에게 임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죄만 아니라, 은혜 역시 대표성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그를 믿어 그에게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농구 코트에서 혹은 축구 경기장에서 주장 한 사람이 경기를 누가 먼저 시작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주장 한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쌍방 팀원들은 무조건 결정된 사항대로 따라가게 된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이다.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 때문에, 그에게 믿음으로 속하게 되는 이들은 전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함으로 그분을 믿어 그분에게 속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자기 순종으로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어, 그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이 전부 죄인이 되듯, 그리스도께 속하는 자들이 모두 의인이 된다. 이런 대표성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도 언약 관계가 있었기에 그를 믿는 자들이 전부 의롭게 될 수 있다. 그 언약이란 아담의 경우는 아담을 머리로 하여 그에게 속하는 모든 자들이 아담의 행동을 인하여 축복 혹은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내용이라면,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자기 것을 주장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그분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내용이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통치 방식
하나님은 인간을 통치하실 때, 언약 관계를 먼저 설정하시고 통치하신다. 언약 관계란 오늘날로 하면, 헌법과 법률을 통해 한 나라의 통치 기준을 정하는 일과 같다. 오늘날 민주 국가들에서는 먼저 법을 제정한 후에, 그 기준에 따라 지도자를 뽑고 지도자가 나라를 통치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먼저 언약관계를 설정하신 후에, 그 언약 조항들에 따라 언약 백성을 다스리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은혜를 먼저 베푸신 후에" 은혜를 베푼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으시고, 언약 조항들에 근거하여 그들을 통치하신다. 창조는 인간에게 베푸신 무상의 은혜였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먼저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두시어 거기서 안식과 안전을 누리며 하나님이 무상으로 제공하신 만물을 향유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만물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적 존재로 세우셨다.
그렇게 인간을 존귀한 지위에 두신 하나님은, 이제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이 에덴 언약 혹은 아담언약이라 할 수 있는 데, 그 아담 언약은 창 2:15-17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담은 모든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을 항상 인정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권세 하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고 고백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신 이유였다. 그 금지가 아담이 피조물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게 하는 계명이었고,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분에게 굴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아담이 자신의 지위를 항상 자각하도록 만드는 금지는 곧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 설정이었다. 그 금지가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 관계를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그분의 통치 방식을 보게 된다. 에덴에서 맺으신 (혹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설정하신) 그 아담 언약은 이후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의 모델로 작용한다. 예컨대, 나중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실 때 (출 20-24장), 그 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로서 이미 베풀어 주신 자신의 은총을 배경으로 하여, 이스라엘에게 시내산 언약을 설정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이후에, 곧 망극의 은총을 베푸신 다음에, 시내산에서 저들과 언약을 설정하셨던 것이다. 예컨대, 출 20:2-3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 .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낸 구원자이심을 먼저 기술한 후에, 이렇게 살아라 라고 이전과 다른 삶을 요청하신다. 이처럼 은총을 베푸신 다음에, 그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 네가 이런 은총을 받았으니,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마 26:26), 그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 주어 언약의 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사 53:10), 새 언약을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들에게 허락하셨다. 인류의 죄값을 이미 십자가에서 갚으시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은 "새 언약"이란 관계 설정을 통해 인류에게 허락된다.
"새 언약"의 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법적 관계로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자에게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 주어지리라는 법적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에덴에서처럼 하나님은 새 언약의 백성에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신앙생활의 규정을 부과하신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을 보면 구약과 같이 일정한 형식을 지닌 언약 조항들 혹은 율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고찰이고,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고찰한다면, 신약에서도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언약의 조항들을 부과하고 계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보낸 자신의 서신들에서 먼저 하나님의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술한 후에, 그것들에 근거하여 이렇게 살아라 라고 기독인의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이런 두 부분을 학자들은 "직설법과 명령법"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교리와 실천"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란 다름 아니라, 구약에서는 창조와 출애굽의 구원 사건들이라면, 신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 그리고 성령 부으심 등의 일련의 구원 사건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다 이루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받고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라' 라고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른 삶을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과 삶이 죄악에 오염되고 망가진 상탤르 잘 아시기에, 먼저 은혜를 베푸신 다음에, 이렇게 살아라고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즉 항상 은혜가 먼저 주어지고 다음에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청하신다. 창조 때에도 그러하셨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에게도 먼저 구원을 베푸신 후에, 언약 조항을 주셔서 그 조항을 준수하도록 요청하셨다. 그리고 새 언약의 시대인 지금도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구원 은총을 맛보게 하신 후에, 이전 불신앙의 생활과 다른 삶의 방식을 요청하신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항상 먼저 "은혜"가 있고 나서 모든 선행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가능해 진다.
선악과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것에 대한 금지는 인간에게 인간의 피조물됨을 늘 상기시키는 상징적 조처였다. 그런데 이 선악과는 인간이 시험을 통과해서 보다 완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사도 바울의 말을 의지한다면,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6). 창조된 당시에 인간은 완전하였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선악과의 시험을 통해서 그는 영생하는 존재로 성숙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시험대로서의 선악과는 동시에 마귀에게는 인간을 넘어 뜨릴 수 있는 좋은 발판이었다. 오늘날도 아담과 동일하게 성도들은 하나님의 시험과 마귀의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시험이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 (창 22장), 그의 마음의 충성됨의 여부를 떠 보는 성격의 것이다. 반면 마귀의 시험이란 어찌하건 성도를 타락시켜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악한 성격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거기서 많은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시험에서 떨어졌고, 그 결과로 사망과 저주가 인류와 자연 만물에 임하게 되었다.
선악과는 그 나무 자체에 무슨 마술적인 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으로 지정한 후에, 인간은 그 과일을 따서 먹음으로 먹는 순간 자신의 죄악됨을 자각하게 되고,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가져오는 결과를 저들은 선악과를 따서 먹는 순간에야 처음 체험했기 때문에, 선과 악의 개념을 그제서야 분명하게 체험적으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 나무는 자체로 마술적 능력은 없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 불러 손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생명나무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사망 선고를 받으면서 주목의 대상으로 부각된다 (창 3:22, 24). 우리는 이 생명나무도 선악과 나무처럼 자체로 어떤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 나무에 부여하신 어떤 상징적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타락과 구원 약속
타락 (창 3장)
뱀의 유혹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구약보다 진전된 신약계시의 조명에 의하면, 사단이었다 (옛 뱀, 계 12:9, 20:2). 사단의 기원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인 암시는 찾아 볼 수 있다.
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이 본문은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시이지만, 어쩌면 사단의 몰락을 암시하는 사고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겔 28:12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이 본문은 두로 왕을 조롱하는 시인데, 여기서도 사단의 타락을 암시하는 듯 들린다.
여인이 미혹됨
하와는 뱀의 꾀임에 미혹을 당하여 하나님의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 에덴 언약을 깨뜨렸다. 그런 범죄 행위는 결국 인류의 사망을 초래하게 된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딤전 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약 1:14은 하와의 범죄가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후 11:3에 의하면, 하와의 타락은 뱀의 간교한 미혹 행위와도 연관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뱀의 미혹과 여인의 탐심이 결합되어 결국 하와의 타락이 초래되었고, 아담이 여인의 제안에 굴복함으로, 아담 마져도 죄악에 굴복당하게 되었다. 인류의 첫 조상이자 대표인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그 조상의 범죄 결과인 사망에 쳐해져야 하는 아담과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아담은 인류의 머리 곧 대표였기에, 그의 행위는 그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그 선악간의 결과에 동참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구원 약속 (원시 복음, 창 3:15)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 인류의 구원자가 예언되었다.
그는 1) 정복자이다. 뱀의 머리를 깨뜨린다. 골 2:14-15, 계 12:7이하, 20:1-3에서 십자가 사건이 사단의 세력을 깨뜨리는 것으로 묘사한다. 뱀 곧 사단의 머리통을 깸이 인류의 구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통을 깨었던가? 그것은 물리적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골 2:14-15에서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NAB, despoiling the principalities and the powers, 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leading them away in triumph by it;EELB, er hat die Gewalten und die Mächte völlig entwaffnet und sie öffentlich zur Schau gestellt. In ihm hat er den Triumph über sie gehalten 정사와 권세를 완전 무장 해제하셨고, 그것들을 공적으로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십자가로 그것들에 대하여 승리하셨다]
에서 "정사와 권세" 곧 사단의 세력을 벗어 버렸다는 것은 사단의 세력을 무장해제하셨다는 것이고,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사단의 세력을, 로마의 개선장군이 포로들을 끌고 환호하는 인파가 늘어선 대로를 행진하듯, 만 천하에 패배자로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로 승리하셨는데, 십자가에서 사단에 대한 결정적 승리는 창 3:15에서 사단의 머리통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십자가 사건이 사단의 머리통을 깨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승리였던가? 그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영적인 원리에 의한 것인데, 그것은 율법에 근거한 죄의 기소를 도말시킴으로 되어졌다: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롬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범한 죄악 목록은 율법의 죄의 규정들을 근거로 사단이 인류를 기소하고 징벌하고 주장하였다면, 십자가로 인류의 죄악은 곧 믿는 자들의 죄악은 도말되었다. 그래서 사단은 기소권을 박탈당하였다. 사단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2) 고난을 받는다. 그는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기 때문이다. 그의 고난은 사 53장에서 보다 생생하게 예언적으로 묘사되고, 사 복음서들에서 그 성취가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레위기서에서 묘사되는 제사 규정들은 앞으로 나타날 인류의 구세주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할 제물의 대속의 원리를 그림자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히브리서가 구약 제사의 영적 의미를 해석하여 주지 않는가? 대속의 죽음이란, 남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대신 죽어 주는 것이다. 제물된 양, 염소, 소 같은 짐승들에게 죄인이 자기 죄를 전가시키고 (짐승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자기 죄를 용서받는 것, 이것이 구약 제사의 의미였다.
그는 3) 여자의 씨이다.
이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에서 (사 7:14) 보다 구체화 되고 (마 1:23에서 예언 성취 기록),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두 길: 가인과 아벨
가인과 아벨
가인은 농부, 아벨은 양치는 목자, 이렇게 형제의 직업이 달랐다. 아마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었고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시점이었던 듯 보인다. 가인은 자기의 농산물 중 일부를 제물로 올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진 부분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그의 제물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 여기서 열납의 기준은 "피"가 있는 제물이냐 "피"가 없는 제물이었나? 의 문제가 아닌 듯 보인다. 모세법에서도 소제, 곧 곡식 제물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레 5:11-12에서 속죄제 조차도, 짐승 제물을 바칠 여력이 없을 경우, 곡식을 바쳐 죄를 용서받을 수도 있었다: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12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문제는 내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내가 드린 제사가 그분이 받으실만한 것인가? 하는 것의 문제였다.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배격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 가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하였고, 그가 드린 제물 역시 되는대로 아무렇게 농산물 일부를 골라 드린 듯 보인다. 반면 아벨을 받으셨다는 것은 아벨의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가 바친 제물은 아무렇게나의 것이 아니라, "양의 첫 새끼"와 "기름진 부분"이었다. 즉 모세법에서 규정하는 바에 비추어 (출 13:2, 23:19 등에서 초태생 혹은 첫 열매; 레 1:8, 3:3 등에서 "기름"), 이런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것이었다. '첫 새끼'라 함은 가장 좋은 것이란 의미일 수도 있다. 인간이나 짐승의 초태생이 부모의 가장 좋은 요소들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짐승의 '기름'은 (비계 fat) 오늘날 콜레스테롤 (cholesterol) 때문에 기피 대상이지만, 이전에는 가장 고급 음식이었던 것 같다. 오직 기름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했다.
예배에서 삶의 구분이 시작된다. 예배에서 인정받으면 삶도 인정받는 것이다. 예배에서 실패하면 삶도 엉망이 된다.
불행의 역사/ 세속사 (Unheilsgeschichte)
일과 직업
창 4:17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 . .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본문에는 적어도 네 종류의 직업이 가인의 후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소개된다: 건축 토목 (성을 쌓다), 육축 치는 자 (목축업), 음악 예술, 공업 기계 등. 반면 아벨과 같은 경건한 자의 계통으로 보이는 셋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곧 에덴에서 시작된 예배를 재개하였다. 아벨의 사망 후에 예배가 중단되었었는지 모른다. 창 5장에서 우리는 경건한 자들의 족보를 보는데, 거기서 저들은 세상 직업이 아니라, 자녀를 낳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의 측면에서만 묘사되고 있다.
가인과 아벨/ 셋의 두 인류의 흐름은 불신앙과 신앙의 두 흐름이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문명을 일으켰고,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다.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b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구원사 (Heilsgeschichte)
소명 - 경배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인들은 직업을 소명이라고, 천직이라고 생각하여 직장에 충실하다 세상을 뜰 것인가? 아니면 세상 직장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할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은 자기 당대의 그릇된 카톨릭의 직업관을 교정한다고 너무 멀리 직업관을 다른 편으로 옮겨 버린 듯 보인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주신 것인즉, 그것에 충실하라! 말은 좋으나 직장에 매여 살다가 예배는 뒷전이고 기도와 전도는 엄두조차 못 내는 삶이 과연 좋은 신앙인의 모습인가? 그래서 기독인 성도는 갈등을 가지게 된다. 어떻게 함이 성경적인가? 갈등은 멈출 수가 없다.
가장 최선의 길은 직장을 그만두고 전도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다 직장을 등진다면 누가 직장을 맡을 것인가? 그래서 고민이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무엇인가? 직장을 성실하게 섬기되, 거기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라!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직장에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라? 불가능에 가깝다고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심판: 노아 홍수 (창 6-8장)
노아의 경건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은혜를 입었기에 그는 의인으로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로 살 수가 있었다. 완전한 자? 그러니까 세상 불신자들에 비하면 그러했다는 것이겠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노아는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다. 노아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뜻이 맞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자아가 죽어야 한다. 노아는 자기의 이성적 판단에 거스릴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 언약 (보존의 언약)
창 9: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노아의 타락 (창 9:20, 21)
창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노아 방주에서 가족과 짐승들과 함께 나온 후에, 하필 포도나무를 재배하게 되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본문에는 분명하게 언급은 아니하나, 추론하건대, 아마도 방주 안에서의 스트레스 받는 생활을 끝내고 이제 밝은 세상에 나온 노아의 식구들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욕구 충동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로 노아는 술에 취하게 되었고,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은 어쩌면 술에 만취하여 제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벌거벗은 노아에 대하여 자식으로서 결코 할 수 없는 동물적 행동을 자행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동성애라고 할까? 그런 어떤 성적 음란 행위를 한 듯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체를 보았다고 가나안에게 그런 무서운 저주를 발할 수 있었을 것인가?
저주받은 가나안 (창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종들의 종"은 히브리식으로 "최고로 비천한 종"이란 최상급적 표현이다. 종들에게 종이 된다고 생각해 보라. 유사하게 "노래들 중의 노래"는 (아가서의 히브리어 명칭) 최고의 노래란 의미이다.
가나안이 함의 아들이지만, 함족 전체가 저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통속적으로 함족 곧 아프리카 흑인들이 저주를 받아 저렇게 검고 못산다고 하는 사고는 성경적이 아니다. 함의 자손들은 창 10장에서 이렇게 제시된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19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구스는 지금의 수단 (Sudan) 지역 (70인역이 '이디오피아'로 번역했고, 이를 따라 영역본 킹제임스 역본이 '이디오피아'라 번역함으로 [예컨대, 창 2:13, 왕하 19:9, 더 1:1, 8:9 등] 이후로 의미가 잘못 전달되었다), 미스라임은 애굽을 지칭하고, 붓은 (Put) 리비아(?), 가나안은 나중 이스라엘이 정복하는 그 팔레스틴 땅에 거했던 족속들의 조상이다. 가나안 족속은 시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등으로,이들이 노아에게 저주를 받았고, 그 결과, 일차적으로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라사 지역이 창 19장에서 보듯, 유황 불비로 태움을 입고 전멸당하는데, 이는 저들의 포악함과 동성애 같은 죄악의 충만 때문이었다. 또한 가나안 족속은 나중 여호수아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의 정복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이스라엘의 종으로 전락했다 (수 16:10). 이렇게 하여 노아의 가나안 저주가 성취되었다.
셈과 야벳 족속과 달리, 함에 대하여는 노아가 언급을 아니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하여만 저주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함 족속의 미래 운명에 대하여 우리는 판단을 삼가해야 한다. 즉, 함족은 저주를 받았다는 사고를 갖지 말아야 한다. 함의 아들 가나안만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셈과 야벳
창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셈 족속은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을 받았다. 셈족은 누구였던가? 창 10장에서 이렇게 제시된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웹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등이 다 셈족에 속하고, 나중 학자들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셈족어라 (Semitic) 한다. 앗시리아인들이나 바벨론 사람들은 악카드어를 (Akkadian) 사용했는데 이는 수메르어의 후손이다. 악카드어는 쐐기문자라고 (cuneiform) 불리며, 우편에서 왼편으로 글자를 적어 문장을 기록한다. 고대인들은 진흙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반반하게 만들어 정으로 글자를 새겨 굳혔고, 그 토판들을 선반에 두어 도서관을 만들었다.
셈의 아들 야벳은 누구였나? 창 10장에서 야벳 족속은 이렇다:
10: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여러가지 다른 설명이 있지만, 야벳은 노아의 장자였다. 다음이 셈이고, 함은 막내였다 (창 9:24 참조). 이 야벳에 대하여 노아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라 예언하였다. 야벳이 셈족의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에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야벳 족속 중에서 "야완"은 헬라인들을 지시하고, 깃딤은 지금의 키프러스 (혹 어떤 이들은 로마인 혹은 마케도냐인 등으로 추정), 도다님은 헬라의 에피루스 지역의 도도나, 혹은 로도스섬 (Rhodes) 등으로 추정한다.
야벳 족속을 대략 서양인들로 함족은 아프리카 사람들, 셈족은 동양인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족속들이 나중 복음을 받아 구원에 참여하는 데, 원래는 셈족 그 중에서도 히브리인들에게 참 하나님을 섬기는 전통이 전해졌고, 그들의 섬기는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처음에는 서양으로 전파되다가 나중에야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로 퍼지게 되었다.
"가나안" 족속이 셈의 종이 된 일은 이미 창 10장에서 기술되고 있다. 창 10:22에서 엘람은 셈의 후손으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창 14:1-4에서 가나안 후손들인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소알 (창 10:19) 등의 거민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 가나안 족속은 셈족속의 종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나중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함으로도 성취되었다.
"가나안"은 동시에 "야벳"의 종이 되리라고도 예언되었다. 이는 나중 알렉산더 대제가 페르시아 제국을 (페르시아 제국은 함족인 애굽까지 지배하였다) 정복할 때 성취된 양 말하는 이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창 14장에 기술된 전쟁기를 본다면, 이미 가나안 족속이 야벳 족속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창 14: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섬겼다는 말은 “종” (에베드)이란 말과 연관되는 동사이다 (아바드). 그런데 엘람 왕의 동맹들 중에서 “고임 왕 디달”도 있었다 (창 14:1, 9). 이미 10:5에서 야벳 후손 중에, 연안 “백성들”이 (고임) 언급된 바 있다. 따라서 야벳은 이미 셈 족속의 장막에 거한 셈이다. “누구의 장막에 거하다”란 표현은 그 주인의 축복과 환대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고임 백성은 엘람과 함께 동맹하여 가나안 족속의 섬김을 받았다 할 수 있다.
민족들의 족보 (창 10장)
창 10장에 제시된 민족들의 계보에는 70개 민족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70은 완전을 상징하는 7이란 수자와 10이란 두 수자의 곱이다. 따라서 온 세상 열방을 총 망라한다는 의미이다. 세상 나라들은 원래 타락 이후에 각 민족별로 분리되었을 때, 그들 나라들 마다 악령이 각기 주장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그분의 직접 통치하에 두어졌다.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70인역, 하나님의 천사들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단 10장에서 미가엘, 바사 군장, 헬라 군장 참조)
창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1) 마곡과 (2) 마대와 야완과 (3) 두발과 (4) 메섹과 (5)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6) 아스그나스와 (7) 리밧과 (8)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9) 엘리사와 (10) 달시스와 (11) 깃딤과 (12) 도다님이라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13)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14) 스바와 (15) 하윌라와 (16) 삽다와 라아마와 (17)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18) 스바와 (19)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13 미스라임은 (20) 루딤과 (21) 아나밈과 (22) 르하빔과 (23) 납두힘과 14 (2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26) 갑도림을 낳았더라 ((25)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15 가나안은 장자 (27) 시돈과 (28) 헷을 낳고16 또 (29) 여부스 족속과 (30) 아모리 족속과 (31) 기르가스 족속과 17 (32) 히위 족속과 (33) 알가 족속과 (34) 신 족속과18 (35) 아르왓 족속과 (36) 스말 족속과 (37)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19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 셈의 아들은 (38) 엘람과 (39)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40) 룻과 아람이요
23 아람의 아들은 (41) 우스와 (42) 훌과 (43)게델과 (44)마스며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45)알모닷과 (46)셀렙과 (47)하살마웹과 (48)예라와 27 (49)하도람과 (50)우살과 (51)디글라와28 (52)오발과 (53)아비마엘과 (54)스바와 29 (55)오빌과 (56)하윌라와 (57)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백성이 나뉘었더라
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58)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59)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60)자녀를 낳았으며
11: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61)자녀를 낳았으며
11: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62)자녀를 낳았으며
11: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63)자녀를 낳았으며
11: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64)자녀를 낳았으며
11:24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십구 년을 지내며 (65)자녀를 낳았으며
11: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66)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11: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67)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68) 이스마엘
(69) 에서
(70) 야곱 (=이스라엘)
이 70개 족속들의 나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온 세상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관심은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실 때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왜 우리 주님이 온 세상에 관심을 가지시나? 그것은 그분이 그들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이스라엘에게서 구원자가 나타나셨고, 그간 악령들의 지배하에 던져졌던 (신 32:8-9, 단 10장) 열방까지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십자가로 인류의 죄값을 치르심으로 악령의 세력을 꺽으시고 (골 2:14-15),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아 버려진 영혼들을 회복시키신다. 이방인들이 저 아프리카나 아마존 정글의 일자무식 미개인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기에 그들 미개인들에게도 복음이 접촉할 접촉점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온 세상의 나라들은 몇 개나 되는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바벨탑의 반란 (창 11장)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 사건이었다. 그 범죄적 성격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노아 홍수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러나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하였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 사람들의 죄는 우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흩어짐을 피하고자 한 것, 다음으로, 자기들 이름을 내고자 한 것이었다.
혹자는 창 10;8-14이 창 11장에 기술된 바벨탑 사건을 이해하는데 열쇠라고 생각한다.
창 1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성이라)을 건축하였으며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그러니까 여기 창 10:10에서 처음으로 "바벨"이 언급되었고, 11:9에서 다시 언급되는데, 이 둘을 연결시키면, 결국 바벨탑 사건의 주모자는 니므롯이란 자라 한다. "니므롯"이란 말은 "반역하다"를 의미하는 "마라드" 동사와 연관되는 듯 보이는데, 반역자란 의미일 것이다. 이 니므롯이 주동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 최초의 조직적인 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이런 지상의 반란은 창6장에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들 곧 천사들의 천상 반란을 상기시켜 준다. 물론 사단의 타락은 창조 이후 인간의 타락 이전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언어 혼란"을 통해 깨뜨리셨다. 원래 하나였던 언어가 이제부터 여럿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부터 외국어 공부의 필요가 대두되었고. . .
제 3부 족장들의 역사
아브라함의 선택과 족장들
선택과 특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2)
아브라함 언약 (창 15장)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브라함의 씨를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번성케 하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발 디디고 거주할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언약"이란 히브리어로 "베리트"인데, 이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법적 관계 설정을 표현하는 용어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 혹은 관계 설정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쌍방 간에 쌍무 계약을 체결하는데, 이는 보통 쌍방이 동등한 지위에서 체결하는 계약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은 항상 그분의 일방적인 약속에서 시작된다.
1) 자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창 12:2)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 13:16)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
"자손"이라 번역된 히브리어는 "씨"를 의미하는 "제라아"이다. 이 씨는 문법적으로 단수형이지만, 그 씨가 생명을 갖고 많은 열매로 발전하므로, 의미상 복수로 취급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본들은 "씨"란 (zera`; seed) 히브리어를, "자손들"로 (descendants, NASB, NAB, NJB) 번역하거나, "자손, 후손"이란 (offspring) 말로 번역한다 (NIV, NRSV, TNK).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무수한 "씨"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 곧 하나님의 참 백성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롬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무수한 "씨"는 다른 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남은 자"로 이해할 수 있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무수한 "씨"는 세상 만민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복의 통로, 복의 근원이 될 자들이다 (창 12:2, 18:18, 22:18, 26:4 등). 아브라함의 씨, 곧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셨던가? 그것은 그들을 통해서 만민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에서 "복음"은 참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복음"이란 신약에서 "그리스도 예수" 자신인데, 그분이 모든 복의 원천이며, 복된 소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복음도 사실 하나님 자신이라 할수 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은 복음 자체이신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하라고 세움을 받은 증인들이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43:12)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사 44:8)
만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사실, 그 자체가 복음이었다.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 그가 바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복을 (하나님)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은 세상 만민의 복의 근원으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무수한 "씨"는 기능적으로 세상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자들이다. 그런 기능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씨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은 과연 그런 기능을 감당하였던가? 구약에 제시된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자기의 그런 기능 혹은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저들은 만민에게 복을 전파하기는 커녕 스스로 이방인의 우상숭배의 올무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나중에는 앗시리아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망함), 바벨론으로 (주전 586년에)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선택과 의무
아브라함과 그 씨인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 목적이 "전체를 위한 일부의 선택"으로서 (pars pro toto), 만민에게 축복의 근원,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2)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그분이 그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심을 의미한다. 아브람의 선택은 그와 그 후손에게는 여타 모든 인류를 배제한 편애적 사랑 표현으로 비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복 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인가? 그것은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이참 복을 세상에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저들의 선택은 선교적인 목적을 위함이었다. 선택은 특권임과 동시에 이처럼 의무를 동반하게 된다. 특권을 누리면서도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그 사람은 너무나 이기적인 자라 정죄를 당할수 밖에 없다. 왜 너희 이스라엘은 그렇게도 배타적이고, 자기 민족 중심주의, 국수주의에 빠져서,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하고 멸시하며 백안시하였나? 묻고 싶다!
그런데 동일한 질문은 오늘을 사는 나, 하나님의 백성된 나에게도 돌아오게 되어 있다. "너는 과연 오늘까지 누구에게 네가 받은 그 복을 (예수 그리스도) 전파하였나?" 네가 전도해서 하늘 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너는 오늘도 과연이 사명을 위해서 일어나서 기도했으며, 그 목적을 위해서 오늘을 값지게 보낼 준비를 하였던가? 유대인을 비난하는 너는 과연 너의 인생을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는 사명감으로 살아왔던가? 그렇게 보낼 계획이라도 있는지? 오늘도 나는 내가 어떻게 더 빨리 승진하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더 나은 직장을 얻고, 더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할 생각으로 머리가 분주하지 않은가? 무엇을 위해 승진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가? 내 자식과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함인가? 그것이 하나님이 너를 부르신 목적이었던가?
오늘날도 고대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성도가 99퍼센트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자는 1%가 될까 말까? 우리 주변에 그런 목적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나는 만나 보지 못하였다. 적어도 그런 목적에 완전히 사로잡혀 시간과 계획과 내 생명과 물질을 쏟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아니 몇몇 사람은 알고 있다. 얼마 전에 가족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떠난 남선교사, 저 아프리카에서 홀로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는 김선교사, 그리고?
"복"이란 근본적으로 말해 하나님 자신이다 (시 16:2). 그분 자신이 모든 만물의 근원이며, 주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예화 한 가지. 한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이 부자는 자기의 종을 데리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객지에서 죽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죽기 전에 유서 한 장을 써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유서의 내용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모든 재산은 나의 종에게 주라 그리고 나의 아들은 나의 모든 것 중에 한 가지만 골라서 가질 수가 있다."
뜻밖에 주인의 유서를 본 종은 당장 벼락부자가 되어 그 유서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주인의 아들에게 보여 주었다. 아버지의 유서를 본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아버지가 남긴 유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런 유서를 남긴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이런 유서를 쓸 수가 있느냐?" 심지어는 아버지가 임종 때 치매가 든 상태에서 유서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아들은 너무 답답해서 그 유서를 가지고 랍비를 찾아갔다. 찾아가서 유서를 보이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 랍비는 그 유서를 남긴 아버지를 "지혜로운 아버지"라고 칭찬을 하였다. 왜냐하면 만약에 아버지가 유서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모든 재산을 내 아들에게 주라"고 했다면 그의 종은 그 유서를 찢어 버릴 수도 있고, 또는 거짓말을 해서 아들을 속이고 재산을 다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려한 아버지는 유서를 아주 지혜롭게 썼다는 것이다.
이렇 게 설명을 해 준 랍비는 그 길로 아들과 종을 데리고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게 했다. 재판장은 유서의 내용대로 모든 재산을 종에게 주라고 했다. 그 다음 아들에게는 그 모든 아버지의 소유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이 때 아들은 "모든 재산은 전부 종에게 주고 나는 종만 가지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의 법은 종의 재산은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아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지혜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소유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소유하리라! 참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모시고 사는 인생, 그에게 복이 있으리라. 모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축복은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사랑하며 교제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다. 아브람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시고 자신과 교제하는 대상으로 삼으신 것은 아브람과 그 후손을 편애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브람과 그 후손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면서 그분의 성품을 닮아,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바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길 원하셨다. 저주 하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는 방식이 바로 아브람의 선택이었다. 아브람은 참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할 전도자로 세움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 아브람과 그 후손의 선택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 사상의 원리이다. 일부를 택하여 전체를 축복하시는 것이다. 나를 택하신 목적은 바로 나를 통해서 내 가족과 내가 속한 사회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항상 모든 일은 눈을 뜬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때 세상을 호령할 듯 했던 공산주의란 사상과 그 사상이 산출한 거대한 조직도 알고 보면, 칼 맑스나 레닌 같은 사상가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깨달은 바를 열정으로 이웃에게 전파하면 감염되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움직이면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가 변화된다. 어떤 정신과 사상을 깨닫는가? 이것이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의 영안을 여시고 세상을 보게 하셨다. 모두가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저주 하에 신음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하셨다. 그 깨달음이 사명의 시작이다.
아브라함의 씨 --> 여자의 씨 (창 3:15)
아브라함 언약은 아담에게 주신 언약 곧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28) 하신 축복 말씀의 성취에 다름 아니다.
세상 만민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심판 하에 떨어졌으므로, 저주에 처한 만민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은 저들이 처한 그 사망과 저주에서 건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원래 창조 때에 인류에게 계획하셨던 그 축복을 인간의 범죄로 거두신 것이 아니라, 거두셨음에도, 다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그와 그의 씨를 통해서 다시 인류에게 베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인자하심이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비록 자신을 배반하였으나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시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이다.
세상 만민을 복되게 하는 아브라함의 씨의 기능은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인간의 최초 범죄 이후에 주셨던 희미한 복음, 곧 태아 복음 혹은 원시 복음에서 약속된 그 "여자의 씨"의 기능을 계승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너의 씨, zar`ákä)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여자의 후손, 곧 여자의 씨는 뱀의 씨와 원수가 되고, 여자의 씨는 뱀의 머리통을 박살낼 것이다. 바로 사탄의 자손과 원수가 되고,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기능을 '아브라함의 씨'가 감당하는 것이다. 이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일이지만, 이것을 동전의 후면이라 한다면, 그 동전의 전면은 '만민의 복'이 되는 일이다.
즉 아브라함의 씨는 여자의 씨가 감당해야 할 사단과의 적대 전쟁을 수행하는 자이다. 그것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다면 만민에게 복이 되기도 어렵다. 오늘날 성도는 한편으로 사단과 싸워야 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이 남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될 수 가 있다.
아브라함의 씨 ---> 다윗의 씨
다시 구원역사를 따라 더 진행하다 보면, 우리는 다윗의 씨를 만나게 된다.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자식을 (네 씨, zar`ákä)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씨"를 약속하시는데, 그 씨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 씨의 나라 보좌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일은 물론 솔로몬이 감당하였고, 하나님은 솔로몬의 보좌를 견고케 하셨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타락했고, 그로 인하여 징계를 받았다. 그의 보좌는 영원하지 못했다. 다윗에게 약속된 씨의 기능을 온전히 감당하는 이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그가 오셔서 신령한 성전, 구속사의 목표를 달성하셨고 (엡 2:20-22, 고전 3:16), 그분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능도 온전히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의 씨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은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충성하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물로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되는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것이 부자 관계로 비유된 바의 의미이다.
아브라함의 씨 --->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의 씨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0)
고난 당하는 야웨의 종은 많은 사람의 범죄를 대신 담당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고 결국 그들을 의롭게 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야웨의 종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로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 (사 49:6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야웨의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징계를 당하고 채찍을 맞아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동일한 기도로 부르짖었던 주님의 기도가 바로 이 야웨의 종, 고난당하는 종이 감당해야 할 그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한 기도였다.
고난을 통해서 야웨의 종은 야웨의 뜻을 성취하고, "씨"를 얻게 되고, 그의 날 곧 그의 영광과 권세의 날이 장구할 것이다.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이 얻게 될 그의 "씨"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자기 생명을 쏟아 사망에 이르게 한 그 결과로 얻을 그의 분깃, 그의 전리품이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läkën ´áHalleq-lô bäraBBîm wü´et-`ácûmîm yüHallëq šäläl)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사 53:12).
이 부분에서 TNK의 번역이 좋은 것 같다:
Assuredly, I will give him the many as his portion, He shall receive the multitude as his spoil (진정코, 나는 그에게 많은 사람을 그의 몫으로 주며, 그는 무리를 자기 전리품으로 취하리라).
즉 야웨의 종은 자기의 고난을 통해 많은 무리를 전리품으로 얻게 된다. 그것이 그의 "씨"이다.
누가가 자신의 두 책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분명하게 해석하듯, 여기 야웨의 종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얻으실 전리품은 그를 믿게 될 성도들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유대인들 중에서 하루에 3천명, 또 다음에는 5천명, 또 다음에는 많은 무리가 예수께로 돌이키는 것을 듣는다. 이들이 바로 야웨의 종이 얻는 전리품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씨는 결국 여자의 씨이고, 다윗의 씨이며, 야웨의 종의 씨이기도 하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러니까 이런 씨들의 기능을 최고도로 완전히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보건대, 이 씨는 전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뱀의 머리를 박살낼 자, 만민에게 복이 될 자, 야웨의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뜻을 100퍼센트 순종하여 받들 자, 고난을 통해 전리품으로 수 많은 무리를 얻게 될 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에게 속하고 그분과 연합한 성도는 여자의 씨가 되고, 아브라함의 씨가 되며, 다윗의 씨, 야웨의 종의 씨가 된다.
이 아브라함의 씨가 곧 창조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정복하여 통치하라고 축복하셨던 그 아담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영적인 군사들이다.
2) 땅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창 15:18-21)
3)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예배와 언약
롬 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4)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오늘날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즉 저 중동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저들을 축복하면 축복을 받고, 저들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전혀 성경 문맥에 맞지 않는다. 오늘날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즉 교회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 약속의 상속자이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항상 말씀하는 책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에게가 아니라, 그의 영적인 자손 곧 약속의 자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선상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모든 약속의 수혜자들이다. 따라서 고려 중인 말씀은 저 중동 이스라엘이 (불신자들)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비준 의식 (ceremony of ratification)
창 15:9b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 . .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씨와 (자손들) 땅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 언약을 확정하기 위해 제사 의식을 아브라함에게 명하신다. 여기 묘사된 언약 비준 의식은, 한 마디로 제물들을 쪼개어 양편에 벌여 놓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통과함으로, 내가 약속한 언약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이 쪼개어진 제물처럼 나도 저주를 받아 쪼개지리라는 자기 저주 맹세 의식이다.
삼국지 연의에 의하면, 이전 후한 시대에 유비와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장비의 집, 복숭아 흐드러진 동산) 형제의 연을 맺은 도원의 결의란(桃園結義) 것이 있었다. 검은 소와 흰 말의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신 뒤 형제의 의를 맺고, 향을 사르며 천지신명께 고하는 맹세가 바로 도원결의이다. 왕족인 유비(劉備)는 선조의 한 왕조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 "도원 안에서 세 사람이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생각건데 유비 관우 장비는 비록 성씨는 다르나 이미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곤궁함을 구제하고 위태로움을 부축하여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리라' 天地神明께 제사하고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죽기로 맹세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三人 焚香再拜而誓曰 念 劉備 關羽 張飛 雖異姓 旣結爲兄弟 則同心協力 救困扶危 上報國家 下安藜庶).
유비, 관우, 장비는 말의 피를 받아 마셨다고 하지만, 성경의 언약 비준 의식은 제물을 쪼개어 그 사이로 언약 체결 당사자들이 지나가거나 (창 15:17, 렘 34:18), 아니면 제물의 피를 받아서 언약 당사자 쌍방에게 뿌림으로 (출 24:6-8) 자기 저주맹세 의식을 가졌다. 제물 사이로 언약 체결 당사자가 지나가거나 혹은 언약 당사자들에게 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하는 행위는 모두 언약에 불충하면, 쪼개지거나 죽임 당한 제물처럼 죽임을 당하리라는 자기 저주 맹세 의식이다.
그런에 어떤 목회자들은 설교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13절에 언급된 대로, 이방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고 학대를 당한 이유가 아브라함이 새를 제대로 쪼개지 아니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황당한 소리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작정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브라함 후손들 곧 이스라엘의 애굽 이주와 거기서의 400년간의 체류와 또한 거기서의 압제 받는 일 등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다. 이스라엘의 애굽 이주와 거기서의 종살이에 관하여, 성경을 통해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그분의 섭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야곱 가족이 몇 명 되지 아니할 때에, 가나안 땅에 계속 살았다면, 유다가 가나안 여자 수아와 결혼하여 아들들을 낳고, 그 아들도 가나안 여자 다말을 며느리 삼아 결혼 시킨 데서 보듯 (창 38장), 조만간 이스라엘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가나안 족속 가운데 동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 후손이 아직 소수일 때에, 애굽으로 이주시키신 것이다. 그렇게 이주하게 만든 원인은 물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기근을 불러 야곱 가족이 거기 살지 못하도록 환경을 주장하셨던 때문이다.
여하간 애굽에 이주한 야곱 가족은 70여명 남짓인데, 야곱이 바로를 접견할 때, 요셉이 시킨 대로, 바로에게 야곱은 자신들의 생업이 목축으로서 가축 떼를 위해 고센 땅을 달라고 부탁한다 (창 46:31-34, 47:1-6). 물론 고센 땅에 야곱 가족이 땅을 얻어 따로 정착하게 되었고 (창 47:11 “라암세스”에), 애굽인들은 목축업을 멸시하는지라, 야곱 족속이 애굽인과 동화될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고센 땅에서 저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증대하여 한 민족으로 성장하였다 (출 1:7). 야곱 족속은 가나안 족속에 동화될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애굽에 보낸 이유였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수적으로 증대되면서, 요셉의 치적을 인정하기 거절한 한 새 바로 왕이 등장하여 (혹은 한 새로운 애굽 왕조) 이스라엘 족속을 압제하기 시작하였다. 수적으로 크게 증가한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압제 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핍박도 사실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 목적은 당시 세계 최고 문명국 애굽에서 오랜 기간 정착해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자신의 기업인 가나안 땅을 망각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영구히 떠날 생각조차 아니 했기 때문에, 저들에게 약속을 상기시키고 자기들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애굽인들의 손에 이스라엘이 핍박을 당한 이유였다. 애굽인의 학대 곧 고난이 그들을 깨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약속을 붙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족장들에 대한 "엘 샤다이"의 보호와 인도, 돌보심
출 6:2b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전능의 하나님은 “엘 샤다이”이고, “여호와”란 이름과 구분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야웨”란 이름은 무슨 의미인가? 둘은 서로 대조되고 있다. 족장 시대에 두 이름으로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엘 샤다이는 창 17:1에서 나타난다:
창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인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가족을 돌보셨고, 구원하셨고, 보호하셨다. 그런 은혜는 엘 샤다이의 속성의 표현이었다.
①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 사래를 빼앗길 뻔 했었지만, 개입하셨다.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②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을 때도 개입하셨다.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 20:2-3)
③이삭의 경우에는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았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와서 화해를 요청했다.
창 26:6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7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④ 이삭이 거부가 되도록 축복
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⑤ 이삭이 우물을 팠으나 빼앗겼을 때
창 26: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⑥ 야곱의 경우에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 할 때, 억울한 일을 열 번이나 당했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야곱을 도와 주셨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창 31:7)
⑦ 나중에 외삼촌 라반이 죽이려고 쫓아 왔을 때, 하나님이 꿈에 라반을 책망하시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도록 개입하셨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 31:24)
⑧ 야곱의 형 에서가 야곱과 가족을 죽이려고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을 때도 하나님께 구하는 야곱의 기도에 응답하사 에서의 마음이 녹아지게 하셨다.
창 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창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이렇게 족장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보호와 돌보심의 은총을 베푸셨다. 그래서 시 105편에서,
시 105: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⑨ 야곱의 시대에 애굽에 요셉을 먼저 보내셨고, 그곳에서 요셉이 총리가 되게 올리시고, 흉년이 들자 가나안에 거하던 야곱 가족이 다 애굽에 내려가서 그곳에서 생명을 존속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17)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21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22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 역사하셨다. 인도하셨다. 보호하셨다.
수 24:2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이것이 구원 역사, 곧 구속사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돌보신다.
제 4부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생활을 통해서, 특히 애굽인들의 학대 가운데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갖게 된다. 저들의 애굽에서의 생활은 곧 종살이의 생활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비전을 통해서 (창 15장) 오래 전에 예고된 바였고, 그 비전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항상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일하신다. 아브라함에게 그와 그 후손의 창성함의 청사진을 보여 주셨고, 요셉에게는 장차 지도자가 될 비전을, 모세에게는 민족 해방의 비전과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비전 (신 32, 33장), 그리고 자기 같은 선지자에 관한 비전을 (신 18장),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약속의 땅 정복 비전을, 다윗에게는 장차 메시아의 오심의 비전을 보여주셨다.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꿈과 비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받은 자들이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자녀들은 예언하고, 청년들은 비전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한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생활과 그 이후의 탈출과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 생활 등은 하나님의 청사진 가운데있었고, 그 설계도대로 진행되어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 민족을 주의 백성으로 세우고, 그들을 통해 세상 만민을 자기에게로 되돌려 축복의 자리에 서게 하실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구원
애굽에서의 삶
성경은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삶에 대하여 구속사의 진전 묘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말씀한다. 그들이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수적으로 증대하던 때로부터 (출 1:7) 저들에 대한 애굽인들의 학대가 시작된 것, 그리고 그 즈음에 모세가 태어나서 나이 40이 되어 자기 민족을 돌아볼 생각을 하였으나, 마침내 미디안으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건, 그 이후에 거기서 양치는 목자로 살면서 시내산에 양을 몰고 갔다가 주님의 신현을 체험하고 소명을 받게 되는 사건 등이 그것이다. 애굽에서의 삶은 사실 자체로 묘사된 것이 없고, 오직 거기서 어떻게 모세가 태어났고 소명을 받았으며,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났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세를 부르심 (출 3장)
모세는 모든 후대 선지자들의 원형이었다. 모세의 소명을 기술하는 소명 기사는 후대 선지자들의 소명을 기술하는 소명 기사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사명 부여가 있을 때, 당사자는 자신의 부족을 들어 대개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임재가 사명자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한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은 가능하게 된다. 이 하나님의 임재 - 이것이 귀한 것이다. 그분의 임재를 누리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분에게 내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일, 그분에게 시간과 몸을 드리는 일, 내 생각을 그분에게 바치는 일이 요청되는 것이다.
"야웨"란 이름으로 나타나리라
출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출 6:3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설명이 있겠지만, 여호와 (야웨 Yahweh라 통용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족장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참조) 출 6:4-8에 제시되는대로, 여호와란 이름이 전달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이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족장들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엘 샤다이) 나타나셨다. 곧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되, 지금 출애굽을 통해서 나타나실 언약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 드러내실 그 웅대한 규모와 차원으로 결코 이전 족장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적이 없으셨다.
히브리인들의 사고에서 '이름'이란 그 사람 자신, 곧 그의 인격, 속성을 의미한다. '야웨'란 이름은 "엘로힘"과 (하나님) 구분되어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으로 특징지어진다. 야웨 하나님은 출 6:4-5에서 보듯,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야웨 하나님은 출 6:6에서 보듯,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기 백성을 종살이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이시다. 야웨 하나님은 출 6:7에서 보듯 구속한 백성과 언약을 맺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야웨 하나님은 출 6:8이 보이듯, 조상들에게 언약한 말씀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10재앙들 - 이 재앙들이 기적인 것은 자연력을 하나님께서 자기 임의대로 움직이시되, 시간과 장소, 그 자연력의 정도 등을 주장하셨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개구리라는 세력을 하나님은 자기 임의대로 특정한 수만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곳들로 부르시고 주장하셨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사건도 기적이었지만, 10재앙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애굽인 전체에 어떤 재앙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고, 사단을 상징하는 뱀이 주장하는 바로의 궁중에서 하나님의 압도적인 세력을 시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재앙은 출 12:12b에서 언급했듯,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린 사건이었다. 각 재앙들은 애굽인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애굽인들은 그저 보이는 생물은 모두 신격화시켰고 (예컨대, 개구리며 소며 뱀이며 등등), 태양이나 나일강 같은 자연력까지도 그리하였던 것이다.
홍해변의 노래와 야웨의 왕권
출 15장에서 우리는 홍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시적인 묘사를 보는데,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라고 노래한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영상은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라는 선언에서 드러난다 (출 15:3).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과 바로 사이의 전쟁이었고, 영적으로 하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이었다. 사단의 수하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전쟁이었다. 오늘날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세력을 궤멸시켜야 한다. 이미 십자가로 주께서 사단의 세력을 궤멸시키셨지만 (골 2:14-15), 사단의 잔당들을 각 영혼들에게서 추방하고 그 영혼을 자유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애굽 왕 바로가 끈질기듯, 사단은 끈질기고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면서 바로의 군대는 궤멸당하고 만다. 그런데 홍해를 건넜음에도,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불평 원망을 통해 반역행위를 일삼는다. 사단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여 저들로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출 15장에 제시된 홍해변의 찬양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자기 성소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친히 그들을 통치하시리라는 것이다 (출 15:18). 이것이 하나님의 왕권 행사에 대한 첫 구체적인 언급이다. 야웨께서 이스라엘을 영원히 통치하시리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은 어떻게 행사되는가? 그것은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여 법적 관계를 설정하심으로 되어졌다. 어떤 나라건 헌법과 법률을 먼저 제정하고 그 틀에 따라 통치권이 행사된다. 고대에는 왕권이 절대적이어서 독단적으로 통치한듯 해도, 역시 나름대로 통치하는 기준이나 원리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로 하면 헌법이요, 법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브람,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 시대에는 저들 집단이 많아야 수백, 수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규가 문서로 기록되어 구성원들의 관계를 규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한 이스라엘은 이제 사회 생활, 국가 생활의 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필요에 부응한 것이 시내산 언약으로 주어진 율법이었다. 그 언약 규정은 이스라엘 내적으로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지만, 외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을 주변 이방인들과 구분시키는 정신적, 영적 울타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저들이 지켜서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며, 이미 구원얻은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과 구분되도록 만들어 주는 표지였다.
시내산 언약 (결혼언약)
시내산 언약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영적 결혼 언약인데, 그것은 세상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한 민족이 한 특정한 신과 언약을 맺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인류가 범죄한 이후로는 각자 잡신들과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에, 한 민족일지라도 섬기는 신들은 수만, 수백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은 한 하나님과 언약하고 그분만 섬기게 되었다. 이는 저들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후손을 선택하여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믿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약 2: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십계명과 법률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법률들을 받기 전에도 여러가지 불문법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언약 조항들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언약서"이다 (출 20-23장 내용). 언약서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규정해 주는 언약 조항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 관계를 영적 결혼 관계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신부로서 신랑되신 야웨께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특히 정조를 지켜야 할 일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십계명은 오늘날로 하면 헌법에 해당되고, 나머지 법들은 오늘날 헌법보다 하위법인 법규들이다. 십계명은 원리라면 (출 20장), 법규들은 (출 21-23장) 그 원리들의 구체적인 적용과 연관된다.
비평가들은 오경에 언약법전(출 20-23장), 성결법전 (레위기 17-26장), 신명기 법전 (신명기), 제사법전 (레위기 1-16, 민수기 여기 저기) 등의 별개 법전들이 있다고 가정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이해라 할 수 없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10:10까지의 사건들이나 법규들은 모두 시내산에서 주어진 것들이지만, 그 내용에 따라서 따로 구분해 놓은 것에 불과하고, 오직 민 10:10이하의 부분에 담긴 민수기 법전들이나 신명기서에 담긴 법전만이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광야를 방황하던 38년간 주어진 법규들이다. 더 정확하게는 신명기는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여 가나안 정착을 준비한 모압들 언약의 법규집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시내산 언약 법규의 반복 내지 개정판이다.
이런 오경의 법규들은 신정국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했던 법규들이었다. 그래서 후대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역사를 판단할 때, 그 오경의 법규를 기준으로 판단하였고, 선지자들이 언약 백성을 향하여 메시지를 선포할 때도, 언약 조항인 법규들에 근거하여 저들을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였다. 이처럼 오경의 율법은 (언약 조항들) 모든 후대 성경의 근본 토대로 작용한다.
성막과 제사 (예배)
성막은 "미쉬칸"의 번역인데, "거처"란 뜻이다. 하나님의 거처이다. 이스라엘와 영적 결혼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동거하는 아파트인 셈이다. 그 거처가 얼마나 중요한지 출 25장에서 40장까지 (물론 중간에 우상숭배 사건이 있다) 성막 기술에 할당되고 있다. 출 32장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숭배 배교 사건은 그 가증함이 얼마나 흉칙한지 그 사건에 대한 기술이 위치한 문맥을 고려할 때 드러난다. 말하자면, 결혼식을 하고 (출 24장 언약 비준식) 이제 신랑 신부가 동거할 아파트를 마련하고자 중개인 모세가 시내산 산정에 올라 머무는 동안에, 그 동안을 참지 못하고 신부된 이스라엘이 바람을 피운 것이다. 우상숭배, 그것은 성경에서 영적 음행, 간음으로 정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영적 결혼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제사는 곧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는 오경의 핵심에 해당된다. 따라서 제사법규를 담고 있는 레위기는 오경의 핵심이다. 구약 제사는 신약에서 갈보리 십자가 희생 제사의 그림자 혹은 모형이었다 (히브리서가 해석해 주는대로).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이다. 아무리 영적으로 결혼한 사이라 하더라도, 신랑이신 야웨 하나님은 높고 높은 곳에 높이 들리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영원하 보좌에 좌정하신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 곧 영이 깨어지고 영이 겸비한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 57:15). 이 말은 하나님은 자아가 깨어지고,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는 심령 상태가 아니면 결코 임재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마음이 상했다, 영이 깨어졌다, 자아가 부서졌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것은 내 자신이 완전 부인되고 거부되어 졌다는 것이다. 자기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거기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앙모하는 심령이 남는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감과 그분께 대한 절대 위탁심, 나를 버리고 그분에게 내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상태, 그것이 온전한 믿음의 상태이다.
제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을 온전히 깨뜨려서 제단에 올려 태워 연기로 하나님께 자신을 올려드리는 결단과 자기 부인의 의식이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그 마음의 상태, 그것은 자기 부인과 자아 깨뜨림이다. 속죄제나 속건제는 모두 죄를 정결케 하거나 제거하는 제사였다면, 화목제는 감사, 서원, 자원의 제사였고, 소제는 곡식 제사, 번제는 헌신과 생각나지 않는범죄 행위를 전부 국가적인 행사에서 전부 몽땅거려 속죄하는 제사였다. 소제는 번제나, 화목제나 속죄제 (혹 속건제)에 동반하여 드린 곡식 제사였다. 전제는 관제라고도 하는데, 이는 식사에 비유하자면, 고기로 드린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에 동반되는 음료수 제사였다. 소제는 고기 제사에 동반된 곡식 음식이었다고나 할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그것은 자신을 깨뜨려서 세속을 제하고 순전하고 온전한 마음이 필수조건이었다. 제사는 그런 내적인 상태를 마련하기 위한 외적 수단이었다.
왕과 선지자 법규
신 17:14이하에 "왕의 법규"가 있고, 신 18:15이하에는 선지자 법규가 있다.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은 신정국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삼중 직인데, 하나같이 대왕이신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연결시키는 기능을 가졌다. 왕은 하늘 대왕의 지상 대리자로서 그분의 법을 집행하였고, 선지자는 하늘 대왕의 전권대사로서 오늘날 검사, 판사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제사장은 하늘 대왕을 섬기되 백성을 대변하는 자였다.
왕은 이스라엘 언약 백성 중에서만 선출해야 했다. 왕은 네 가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이런 왕의 규정은 하나같이 그 당대 고대 근동의 이방나라들의 왕권사상과 대치되는 사고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로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리에 있었다.
선지자의 원형: 모세 (신 18)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제사장과 달리 세습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의로 필요한 때에 지명하여 일으켜 세우셨다. 모세가 모든 후대 선지자들의 원형이었는데, 선지자는 (히, 나비) 하나님의 입 곧 그분의 대변자이다. 선지자는 통상 미래사를 예언하는 자라고 이해하겠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언약 백성을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검사요 판사의 기능을 가진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서의 기능이 더 컸다.
이스라엘 미래의 전망 (신 32장)
모세는 모든 후대 선지자들의 원형이라 할 때,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모든 후대 선지자는 모세의 사상/ 신학과 일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선포한 신 32장의 노래는 후대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견하고 경계하고 있다. 신 32장은 문학장르상 예언자들이 선포한 '심판 메시지'에 해당된다. 그 심판 메시지는 오경의 언약서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최종태, 「 예언자에게 물어라」, "제11장 선지자와 언약은 어떤 관계?" 참조).
언약서 형식이란, A 전문 (preamble), B 역사 서언 (historical prologue), C 언약 조항들 (stipulations), D 상벌 규정 (sanctions), E 증인들 (witnesses) 등의 요소들로 구성된 형식이다. 반면 선지자들이 선포한 "심판 메시지"는 언약서 "전문"에 상응하는 A "사신 도입문" (messenger formula), B 역사 서언, 그리고 언약 조항들에 근거한 C 기소문 (indictment), D 상벌규정에 상응하는 심판 선고 (judgment) 등의 요소들로 구성된다.
구약에 언급된 언약서의 형식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통용되던 "종주권 조약"의 형식과 흡사하였다. 다음 도표를 참조해 보라.
종주권 조약 | 신명기 |
A 전문 | 1:1-5 |
B 역사 서언 | 1:6-4:44 |
C 언약 조항들 | 4:45-11장 (헌법적 조항들) 12-26장 (법률적 조항들) |
D 축복과 위협/저주 | 28장 |
E 증인들 | 4:26, 30:19, 31:28 |
자기 저주 맹세 | 29:9-29 |
언약서 보관 | 10:1-5, 31:24-6 |
정기적 낭독 | 31:9-13 |
언약서 복사 | 17:18-19, 31:25-26 |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후대 선지자들이 선포한 "심판 메시지"는 언약서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삼상 2: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A 여호와의 말씀에 (야웨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thus says the Lord; Köh ´ämar yhwh)
B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C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D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2:36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가로되 청하노니 내게 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나로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이 (무명으로 언급됨) 엘리 대제사장에게 와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한다. 이는 엘리에게 주어진 심판 메시지이지만, 후대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한 심판 메시지나 그 형식은 대동소이하다.
A, B, C, D로 표기한 부분은 각기 사신 도입문 (messenger formula), 역사 서언, 언약 조항에 근거한 기소문, 기소에 근거한 심판 선고문이다. 언약 조항은 곧 법조항이므로, 법조항에 근거하여 죄목을 기소하고, 그 기소문에 근거해서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역사 서언"이란 지금 기소당하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런 저런 은혜를 주셨다 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너는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하였다고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는 것이다.
A는 우리가 사신 도입문이라 불렀는데, 이는 선지자가 자신이 지금 선포하는 그 말씀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야웨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는 형식 요소이다. 그 사신 도입문은 "이같이 야웨께서 말씀하시느니라" (Thus says the Lord) 이는 다음에 오는 말씀이 야웨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고 도입한다. 이런 도입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야웨 자신이 친히 말씀하는 직접 화법으로 제시된다.
예컨대, B 조항에서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1인칭으로 (내가) 말씀하고, 듣는 자는 "너희 조상의 집 . . ."이라고 2인칭으로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B는 역사 서언이라 불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 하나님께서 지금 메시지가 주어지는 당사자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기소당하는 자가 범한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다.엘리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에게 제사장 직분을 주어 그들이 제단에서 제사를 집행하는 특권을 행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 언급된다. 제사장으로 섬긴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크신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C는 오경 언약 조항들에 근거한 "기소문"인데, 언약 조항, 곧 이런 이런 율법을 깨뜨렸다고 기소한다. 여기서 기소된 사항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라고 하였는데,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서 (대제사장의 아들들은 자동으로 신체적 흠결이 없는 경우 제사장이 된다) 하나님 앞에 범한 죄를 기소한다. 이런 기소가 성립하려면 그들의 행위를 정죄하는 법조문이 있어야 한다. 그 법조문은 오경의 어디에 있을까?
물론 오경의 법조문들에는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지 말아라" 라 규정한 법조항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관한 법규들은 얼마든지 많다. 여기서 하나님은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라고 기소했는데, 결국 제사를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멸히 여겼다는 정죄이다. 이런 사고와 연결되는 오경의 법규는 여기저기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번제와 연관하여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고 (레 1:3) 하였다면, 엘리의 두 아들들의 악행은 그 제사를 열납은 커녕 야웨의 진노를 폭발시키는 방식으로 드렸다. 사무엘서 기자는 엘리 두 아들 제사장들의 악행을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삼상 2: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들의 악행은 한 마디로 제사 자체를 완전 멸시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그렇게 멸시하고 제 멋대로 대하였다는 것은 민 18장에 기술된 "성직죄"에 해당된다. 이런 죄악에 대한 기소는 곧 D 심판 선고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하였다. 그 내용인즉, 엘리 후손들은 모두 젊어서 죽게 하여 그들로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며 그들로 빌어 먹게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선포하는 "심판 메시지"와 오경의 언약 조항 곧 법조문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결관계를 갖는다. 그것은 심판 메시지가 법조문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선지자이 당대 언약 백성을 기소한 심판 메시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선지서 이해의 열쇠는 오경의 법조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평가들은 이런 율법과 선지서 관계를 완전 무시하고 선지자들이 연대기적으로 먼저 나타나서 도덕적 유일신론을 주창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자들이 율법 조항들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거꾸로 바꾸려 든다 (벨하우젠의 문서설 참조). 이런 비평가들은 한 마디로 생물학에서 다윈의 진화론처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종교사상이나 종교 제도가 발전해 갔다고 종교 진화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고가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 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계시는 그렇게 진화론적 발전으로 나타난 인간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한편, 오경의 법조문은 이렇게 선지자들의 메시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왜냐하면 후대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모두 오경의 언약 조항들을 근거로 이스라엘 역사를 조망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일연이 몽골과의 항쟁 시대에 반 몽골 항쟁 사고를 고취하고 몽골을 극복하기 위해서 부처의 괴력난신을 의지하도록 유도하고자 "삼국유사"를 저술했다면, 일연의 사고에서 역사를 주장하는 힘이 부처의 힘 곧 불력이었다 할 수 있다. 일연의 역사서에는 불교의 사상이 역사를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보다 약 150년 전에 김부식 주도하에 기술된 삼국사기는 유교적 사고로 역사를 조망하고 판단하였다. 예컨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유교 사상에 비추어 곰이 무슨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간 햇볕을 보지 아니하고 사람으로 변했고 환웅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 바로 그 아이였다는 식의 불합리한 신화적 사고는 삼국사기에서 제거되었다.
광야 방랑과 이스라엘의 반역 행적들
빈번하게 나타나는 불평 원망은 종주 대왕을 향한 반역에 다름 아니었다.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나라는 대대로 중국을 큰 나라로 상국으로 섬기고 자기는 낮추었다. 이를 큰 나라를 섬기는 정책이라 (사대주의) 하였는데, 만약 종주국인 명이나 청나라 황제에 대하여 조선 왕이 불평 원망을 터뜨렸다 하자. 그럴 경우 그 소문이 명청의 황제에게 들어갔다면 조선의 왕은 아마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대의 관례대로 하면 그러했으리라는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이처럼 봉신과 종주 사이의 관계가 절대적인 위계 질서를 잡고 근엄했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 역시 가볍게 설정된 관계로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 이르러 거기서 시내산 언약을 맺는데, 그 언약 체결 전과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는 방식이 천양지차이다. 체결 전에는 불평해도 처벌을 아니하고 지나쳤지만, 언약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종주 대왕에 대하여 불평함으로 반역의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시내산 언약 체결 이전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본인들에게 언약 백성으로서의 기준이 주어진 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들이 범죄해도 처벌할 근거가 (불문율로 내려오던 십계명 정도는 있었다 해도) 불분명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약 체결 이후에는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동해야 할지 매우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시내산 언약 체결 이전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출 15:24)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출 16:2)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시내산 언약 체결 이후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민 11:1)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민 14:2) . . .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게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 . 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리는도다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민 16:11) . . . 31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33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하고(민 16:41) . . . 47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간즉 백성 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48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 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가나안 정복
가나안 정복은 오직 믿음의 역사였다.
시 44: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생활의 신학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지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방인들과 구분되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세우심을 받았다. 저들은 원래 인간에게 주셨던 삼중 직분을 세상에서 감당해야 했었다. 저들은 세상의 복의 근원, 곧 복의 전달자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참 하나님과 그를 섬기는 방식을 전파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했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복의 원천이시기에 그를 증거함으로 복의 전달자,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하여 그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지도 인도하셨고, 그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열방에 참 하나님을을 전파하길 원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선택은 열방에 대한 저들의 책무를 동반한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영광, 예배, 언약, 약속, 율법, 양자됨 등), 그 특권은 동시에 의무를 동반했으니 그 의무란 바로 열방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방인들과 구분되는 삶, 곧 거룩한 삶을 살면서 이방인들에게는 자신들이 받은 복을 증거하여 저들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것은 이사야서에서는,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이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둠에 속한 열방에 참 진리의 빛을 비추어 저들로 빛 가운데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야 했다.
사사들의 통치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망할 때, 그 관점은 무엇인가? 구약에는 두 개의 큰 역사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비평가들이 말하는 소위 "신명기 역사서"이고 (the Deuteronimistic History) 다른 하나는 역대기 역사서이다 (the Chronicler's History). 전자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라면, 후자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서 등이다.
이런 역사서들은 관점이 약간 다르다. 소위 신명기 역사서는 추방 당한 상태에서, 곧 포로 생활할 때에 기술되었으므로 (대략 주전 560-540년 어간에) 왜 우리가 망했나? 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대기 역사서는 추방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후에 기술했으므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시 망하지 않는 축복의 나라를 세울 것인가? 란 질문에 답을 구하는 목표로 역사를 기술한다. 따라서 소위 신명기 역사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언약을 깨고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던가? 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대기 역사서는 이전 왕들 중에서 특히 통일 왕정 시대의 다윗과 솔로몬의 선한 모습들 곧 신앙적인 모습들을 집중 조명함으로 우리도 그들처럼 하여 부강한 축복의 나라를 세우자 라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이나 솔로몬의 범죄한 사실은 생략했고, 대신 저들이 신앙적으로 행동한 점을 집중 묘사했다. 그리고 배반의 왕국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도 생략했다.
룻기서
룻기서는 사사 시대 생활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기근이 들어 베들레헴에 거주하던 나오미 가족이 모압 땅으로 건너갔지만,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거기서 두 아들이 결혼한 모압족 며느리들과 나오미만 (곧 여자만 삼인) 남게 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나오미, 그를 끝까지 따라 가겠다고 작정한 룻이란 며느리. 이 두 여인은 초라한 모습으로 고국 땅 그것도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지성 공양하게 되자, 시어머니는 어찌하면 며느리에게 남편을 얻어 줄까? 마음의 부담이 컸다. 마침내 친족중에 보아스란 자를 만나게 해서 결혼시키는데, 보아스와 룻이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오벳이다.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기 때문이다.
보아스 (+ 룻) - 오벳 - 이새 - 다윗
룻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시다. 이 룻기서 기사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불리는 친족 사고를 토대로 삼고 있다. 친족 곧 가장 가까운 친족은 세 가지 의무를 친족에게 갖는다. 1) 경제적 의무, 2) 복수의 의무, 3) 혈통 계승의 의무 등이다. 경제적 의무란, 가까운 친족이 어떤 이유에서건 빚을 졌다 하자, 그러면 그가 빚을 갚기 위해서 가진 땅을 팔아야 하는데 땅은 대대로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기업으로서 팔지 말아야 하나 부득이한 사정때문에 꼭 팔아야 한다면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팔아야 하고, 친족은 사도 이득이 없고 부담이 된다 할지라도 사 주어야 한다. 이것이 경제적 의무인데, 그 친족은 샀던 땅을 희년이 되면 (곧 50년째) 무조건 원래 주인에게 돈 한푼 받지 않고 돌려 주어야 했다. 살 때는 돈 주고 샀지만, 희년까지 산 논이나 밭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햇수가 5년이라 하자. 5년 후에는 돈도 받지 못하고 그냥 원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니, 그 산 친족만 돈을 날려 버린 셈이다. 여하간 그렇게 해야 했다. 친족이기 때문에.
다음으로 복수의 의무란 가까운 친족이 어떤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을 경우, 고의적인 살인자가 죽인 그 사람의 가까운 친족이 그 살인자를 죽일 권리를 가졌다. 즉 복수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혈통 계승의 의무란, 어떤 남자가 아들이 없이 부인을 남기고 죽었다 하자. 그러면 죽은 남자의 가까운 친족이 그 죽은 친족이 남긴 미망인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그 죽은 친족의 대를 잇도록 해 주어야 했다.
룻기서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아들도 남기지 않고 죽어 버렸다. 그 두 남자가 남긴 두 여인 미망인 중에서 하나는 모압 자기 고국에 남았고 다른 여인 룻만 나오미를 따라와서 보아스와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다. 보아스는 사실 엘리멜렉 집안에 (나오미) 아들을 낳아 준 셈이다. 고엘로서 의무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도 사 주었다.
룻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룻기서에서 또 한 가지 부각되는 사고는 "헤세드"란 히브리어 단어가 전하는 사고인데, 이는 우리 말로 "인자"로 번역된다. 인자함은 관대함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지 모르나, 히브리어 헤세드는 언약 관계 하에서 상대를 향한 불변 신실함과 사랑을 의미한다. 인자를 영어로 lovingkindness 정도로 번역하기도 한다. 결혼 관계도 언약인데,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남편은 죽었어도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에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헤세드 사랑이 아닌가? 그런 그녀에게는 다윗의 조상이 되는, 그리고 나중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영예가 돌려졌다 (마 1:5).
한편 히브리인들은 구약 성경만 성경으로 간주하는데, 그들은 구약 성경을 배열할 때 우리처럼 사사기 - 룻기 - 사무엘서 이런 식이 아니라, 잠언서 - 룻기 이런 식으로 배열해 두었다. 이는 잠언서 맨 마지막 장 31:10이하에 기술된 '현숙한 여인'과 룻기의 룻이 독자들이 읽을 때 자동적으로 연결되도록 의도적으로 그렇게 배치한 것이다:
잠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 . .
29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3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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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 . .
이러한 배열은 연대기적으로는 잠언과 룻기서가 서로 많은 간격을 지니고 있고 다른 사회적 배경 면에서도 그러할 수 있지만, 잠언과 룻기서를 인접하게 둠으로 서로를 연결시켜 읽도록 함으로 잠언서 31:10이하에 기술된 현숙한 여인은 다름 아닌 "룻"과 같은 여인이다! 라고 유도하는 셈이다 (con-textuality).
사사들
사사기에는 여러 사사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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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지파 |
대적 |
압제 |
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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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구 |
웃 니 엘 |
유 다 |
구산 리사다임 |
8 |
40 |
갈렙의 조카로 첫 사사 |
삿 3 :9 -11 |
에 훗 |
베냐민 |
모압 왕 에글론 |
18 |
80 |
왼손잡이로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함 |
3:12-30 |
삼 갈 |
? |
블레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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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인 600인을 쳐죽임 |
3 : 31 |
드 보 라 |
에 브 라 임 |
가나안 왕 야빈 |
20 |
40 |
여자 사사, 바락 장군과 협력하여 가나안 장군 시스라를 물리침 |
4:4-5:31 |
기 드 온 |
므 낫 세 |
미디안 |
7 |
40 |
삼백명의 용사로 승리를 거둠. 바알의 단을 훼파하여 '여룹바알(바알과 싸우는 자)'이란 별명을 얻었고, 만년에 '에봇'을 우상화 하고 70명의 아들을 두었다 |
6:11-8:35 |
돌 라 |
잇 사 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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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도도의 손자 |
10:1-2 |
야 일 |
므 낫 세 ( 길 르 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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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아들 30과 30성읍을 둠 |
10:3-5 |
입 다 |
갓 ( 길 르 앗 ) |
암몬 |
18 |
6 |
큰 승리를 얻었으나 성급한 서원들을 하여 자기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혹 평생 처녀로 바침 |
11 :1-12:7 |
입 산 |
유 다 ( 베들레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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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아들 30을 낳고 며느리로 타국의 30여자를 데려오고, 딸 30은 타국에 시집보냄 |
12:8-10 |
엘 론 |
스 불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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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특징적인 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 |
12:11-12 |
압 돈 |
에 브 라 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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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아들 40과 손자 30이 70필의 나귀를 탐 |
12:13-15 |
삼 손 |
단 |
블레셋 |
40 |
20 |
나실인이었지만, 구분되는 성결한 삶에 실패한 결과 들릴라의 꾀에 빠져 머리를 잘리고 눈알이 뽑혀 원숭이 재롱 부리듯 블레셋인들에게 조롱거리로 화하였고, 죽을 때 수 많은 블레셋인을 죽여 보복하다 |
13:2-16 : 31 |
주)
①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도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나 행적이 악하므로
사사의 반열에 들지 못함. *이 도표는 "펌"인데, 약간 수정을 가했다. |
"사사들"은 히브리어 "쇼페팀"이란 단어의 번역인데, 단수로 하자면 "쇼펫" 곧 재판자가 된다. 그러나 구약에서 재판자는 오늘날의 입법 사법 행정부가 구분되는 권력 분리의 개념이 없었던 시대의 사고이므로 사사기의 기술을 보자면, 세습하지 않는 나라의 최고 통치자 곧 카리스마로 권력을 장악하고 통치하다가 죽는 최고 지도자였다.
사사들에게는 성령님이 임하여 권능을 부여하시고 국난을 극복하면서 일약 나라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사울이나 다윗도 사실 나라의 국난에 처한 시기에 성령님의 카리스마로 일약 영웅이 되어 나라의 지도자로 부상되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 체제 (theocracy) 이었기에 모든 것은 하나님 한 분의 통치 하에 진행되어야 했다. 사사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임재하에 나라를 통치했던 것이다.
오늘날 성령님의 카리스마가 강하게 역사하는 목회자가 이끄는 교회가 바로 구약 사사시대의 한 면을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현대는 신정체제가 아니라 세속국가 (secular state) 체제이므로 교회도 그 사회의 법 지배하에서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둘 사이의 비교는 원천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여하간 성령님의 은사 권세 지혜가 임한 사사들이 나라를 통치했다.
그런데 삿 19-21장은 사사기의 부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세 장은 모두 사사들의 통치가 시작되기 전의 상황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사사기를 연대기 순으로 사건들이 배열된 책이라고 읽으면 오해이다. 삿 19-21장의 내용을 보면, 사사들의 통치 이전, 곧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공백기에 일어난 사건들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삿 19장 1절을 보자: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여기서 "왕이 없을 때"라는 말은 "사사"가 없을 때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21장의 내용이 그렇게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7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벧엘) 있고 28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여기 "엘르아살"이 누구인가? 잘못 읽으면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이 되는데 그렇게 읽을 수 없고, "아론의 손자 곧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 - 여기서 아론의 손자는 엘르아살이 아니라 비느하스이고,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로서 대제사장이 된 경우이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불타 죽는 심판을 당했기 때문에). 삿 19-21장은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으로 섬기던 때에 일어난 사건이다.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모세와 함께 섬겼던 대제사장이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아론의 뒤를 이었다가 (민 20:28), 비느하스에게로 대제사장직이 넘어갔다. 비느하스는 민 25장에 기록된 저 유명한 사건, 곧 이스라엘 장정들이 미디안 성녀들과 음행하다가 하루에 2만 4천명이 죽어갔던 음행 사건 때에 야웨의 질투심에 불타 음행하는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동침 현장에서 창으로 그들의 배를 꿰뚫어 죽인 용사였다. 그 당시 모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모세가 죽고 그의 지도권이 여호수아에게 인계되었는데, 여호수아 때에 비느하스는 대제사장으로 섬겼을 것이다. 여호수아 사후에 얼마간 비느하스가 섬겼는데 바로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 삿 19-21장에 기록된 것이다.
이 시대는 사사들이 일어나기 전이었고,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였다. 따라서 나라의 지도직에 공백이 있던 시기였다는 것이 삿 19:1의 의미이다.
사무엘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 시대의 교량 역할을 하였다. 그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왕에 해당되는 사사, 선지자, 대제사장의 삼중 직무를 한 몸으로 감당했던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이후로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지위를 가지는데, 예수님은 사실
통일 왕정 시대
우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왕권, 그분의 통치를 기술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살피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정으로 나타난 왕들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은 마땅히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통치해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이스라엘의 왕은 마땅히 하나님의 왕권에 복종하여 그분이 진정한 왕이시고, 자신은 그분의 대리자 청지기에 불과함을 늘 의식해야 했다. 왕들이 그런 자각을 하도록 하나님은 자기 종 선지자들을 보내어 왕이나 백성을 치는 설교를 하게 하셨다. 그것이 심판 메시지라 불리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더 잘 굴러가도록 더 원만하게 관계가 진전되도록 만들어야 할 총 책임을 걸머진 언약체제의 핵심 기관이었다. 제사장 제도나 선지자 제도 역시 왕정 처럼 언약 체제의 중요한 기관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언약서인 신명기 17-18장에 왕, 제사장, 선지자 제도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로 확인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시편에서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르고, 또 자신은 당신의 종이라고 지칭한다. 구약 시대에는 아무나 주의 종이 아니라, 이처럼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 같은 언약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들로 간주되었고 그렇게 불렸다. 이런 사실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모두 언약 제도의 중요한 기관들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백성들에게 모본이 되어야 했는지를 암시해 준다.
신 17:14-20에 제시된 "왕의 법"에서 하나님은 왕들에게 형통의 비결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세 가지가 부정적인 금지 사항들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시행 사항이다:
신 17:16 왕 된 자는
①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② 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③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것이니라
④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여기서 제시된 형통의 비결은 하나같이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세속 국가에서 절대 통용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선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말은 탱크나 장갑차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이다. 혹은 전투기 전폭기 미사일, 대포나 총, 혹은 잠수함이나 전함을 많이 두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왜 이런 비현실적인 규정을 왕에게 부과하였던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신정국이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정치체제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기로 삼고 하나님의 보호자로 삼고 의지해야 할 뿐 보이는 어떤 군대나 무기를 의존하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시 44:2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선견자 하나니는 유다 왕 아사에게 말하길,
7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대하 16:7-8)
전쟁의 용사 다윗은 선언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
이런 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이스라엘은 부강하였다. 반면 세상 나라들을 의지하거나 군대를 의지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다윗이 한 때 인구조사를 감행하다가 하나님이 진노하여 7만명의 장정이 도륙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는데 그렇다면 인구조사가 그렇게 죄악된 것이었던가? 아니다, 인구조사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 인구 조사를 행한 동기가 죄악되었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행한 동기는 분명하게 성경이 언급지 않지만, 인구 조사를 직접 행하도록 명령받은 국방장관 요압의 말에서 어느 정도 함축되고 있다고 보인다:
삼하 24:3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고대에 인구조사는 두 가지 목적이었다. 하나는 군대를 위한 장정 조사였고, 다른 하나는 납세자의 머리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다윗의 경우는 아마 상비군 설치를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국방장관이 인구조사를 명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우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온통 정신을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해야 하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 성령님의 감동을 늘 받아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도 아니고 권세와 영화, 쾌락을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왕에게 그런 일은 영적인 기쁨 이전에 육체의 심각한 제약이었고 자기 고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아마도 다윗은 생각하길, 아,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도 의지하겠지만, 이방 나라들처럼 상비군을 조직해서 철저하게 훈련시켜 전쟁을 대비하도록 하자!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동기 자체가 죄악되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지금 부패해졌기 때문이다.
평소에 국방을 충실하게 준비하는 자세가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의 동기가 나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보다 외적인 군대나 무기를 의지하려는 마음이 크게 불타오른다는 사실이 죄악이 아니겠는가.
여하간 '말'을 많이 두지 말라!
다음으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고 했다. 고대에는 동서양을 무론하고 후궁에 많은 왕의 처첩들이 있다는 것은 권세의 상징이었다. 저들을 입히고 저들을 돌볼 재력이 있어야 하고 저들과 잠자리를 같이 할 정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경도 은연 중에 세상 관습을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일부다처는 허용되고 있었다. 율법에서도 구체적으로 일부다처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명하시는가? 잠언서에 담긴 르무엘 왕의 모친은 자기 아들 르무엘에게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지어다!" (잠 31:3) 라고 했다지만, 남자가 여색을 탐하게 되면 몸이 쇠약해 지기 때문에 왕에게 여인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인가?
하나님의 의도는 솔로몬에 관한 진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왕상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3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하나님께서 많은 아내를 두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신앙적 이유 때문이었다. 솔로몬의 경우에서 보듯, 이방여인들은 자기네 신들을 가지고 와서 왕의 사랑을 빌미로 자신의 신앙을 왕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누구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왕상 16:31)
시돈 사람들의 왕의 공주였는데, 시돈이라 함은 오늘날 레바논에 위치한 고대 한 도시 국가였다. 레바논은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한 때는 지중해 무역을 주름 잡았던 페니키아라는 해양 세력이었다. 저들에게 오늘날의 영어 알파벳이 기원했다고 전해지며, 저들은 나중 로마와 지중해 상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였다가 (저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 중심으로) 로마에게 패배하면서 세력이 사그라 들었다. 그런데 이전의 그 페니키아나 그 은근의 시리아 사람들은 바알 신을 중심하여 수 많은 잡신들을 섬겼는데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시집 와서는 바알 신을 극성으로 섬기면서 바알신 전도사로 열성적으로 일하였다. 왕비의 지위를 이용해서 왕은 물론이고 전국에 바알 신앙을 퍼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로 전국에는 바알 신앙이 맹렬한 기세를 떨치는데, 오직 나중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수 백명과 영적으로 대결하여 저들을 처단하고 예후의 정변으로 바알 신당 지기들을 처단함으로 그 기세가 수그러 들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한 여인이 그것도 왕비가 어떤 이방 신앙에 사로잡혀 전도활동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영적으로 쑥대밭이 될 것이다. 이를 아는 하나님은 왕들에게 많은 여인들 특히 이방 여인들을 두지 말 것을 규정하신 것이다.
후에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추방생활에서 귀환한 자들 중 다수가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고 있었는데,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 조처로 이방여인들과는 이혼하고 저들을 내어 보내게 했다. 인간적으로는 못할 일이었지만, 구약 시대 신정국 체제하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조처였다.
청나라 때에는 황귀비(皇貴妃) 1명, 귀비 貴妃 2명, 비 妃 4명, 빈 嬪 6명 외에 귀인, 상재, 답응 答應 등이 있었다. 귀인, 상재, 답응의 수는 제한이 없었다. 황귀비, 귀비, 비, 빈 만 해도 황제는 13인의 여인을 애첩으로 거느린다. 그리고 3년마다 한 차례씩 수녀(秀女 왕의 여자)를 뽑아 들였고, 궁을 거닐다가 궁녀 중에 마음에 들면 불러 잠자리를 하면 내 여자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수적으로 제한이 없다! 전국에서 뽑힌 수녀에게는 최소한 '귀인' 이상의 지위가 주어졌다. 그러나 궁녀로 일하다가 왕의 부름을 받아 왕의 여자가 된 답응의 신분자는 그 위 지위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청나라 때 궁녀의 수가 2천여 명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적은 숫자였다. 당현종 시절에는 궁녀의 수가 4만여 명, 수양제는 무려 6만여 명 이상으로 중국 황제
중 가장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는 매일 밤 여자를 갈아대다 해도 166년이 걸리는 숫자다. 한령제, 진무제, 송창오왕, 진후주, 김해릉왕 등 제왕들도 후궁에 만여 명의 애첩들과 궁녀들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징에서 한국에 많은 여인들이 결혼을 해서 들어온다. 베트남 여인들이나 중국 여인들이 그중 가장 많다는 데, 베트남 사람들은 근명하고 영리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럼에도 태국이나 캄보디아, 베트남,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등등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종교가 불교나 아니면 모슬렘교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저들은 남편에게 회교 사원에 가자고 하고, 불교 사찰에 가서 섬기자고 한다. 영적으로 저들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끌려야 하는데 반대로 저들이 한국인의 마음을 우상 잡신들에게로 도적질해 가고 있다.
다음으로 "은금"을 자기 위해 많이 쌓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정치를 하려면 개인 비자금이 많이 든다는 현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은금은 왜 금지 하셨던가? 그것도 역시 영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구약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설명은 신약성경에서 주어졌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끝으로 율법을 복사해서 곁에 두고 왕은 항상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김영삼 장로 대통령에게 하나님은 "이 사람아, 정관정요가 아니라 성경을 자네 청와대 집무실 책상 위에 두고 주야로 묵상하게나! 그리고 그 말씀대로 좀 담대하게 행동하게나!" 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말씀대로 행하자면, 그렇지만 김장로는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말씀은 모두가 구속하는 것들로만 비췰 수도 있다. 적어도 완전히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삶을 세속에서 끊지 않는 이상 말씀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이런 왕의 법규에 따라 행동했던 왕들이 구약에 몇이나 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경외한 왕들의 치세는 형통하였다. 그렇지 못하고 우상을 따라간 자들의 형편은 비극이었다. 그런데 예외 없이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권세 지반이 잡히고 쾌락이 눈에 들어오면서 영적으로 타락하고 세속에 오염되어 결국 변질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모든 권세가 집중되었던 왕이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상 왕들이 아무리 공과 의로 통치한다고 해도 (곧 말씀을 근거로 통치한다 해도) 그들의 통치는 진실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점을 곧 지상 정부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완전한 왕을 사모하게 된다. 그 완전한 왕이 바로 구약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타날 "다윗의 의로운 가지"라고 지칭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다윗 후손으로 태어나서 왕 노릇 할 자를 "메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의미의 "메시아"란 말은 구약에서 제사장을 묘사할 때,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 혹은 왕 메시아 등으로 나타난다. 장차 의로 통치할 그 오실 왕으로서의 메시아란 칭호는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는데, 단 9:26에서 그 한 예를 볼 수 있다.
구약에는 수 많은 "메시아"들이 있었다. 제사장, 선지자, 왕은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구세주 "메시아"란 (헬라어로 "그리스도") 말은 구약 성경이 마감된 이후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건져내고, 다윗과 같이 다윗 왕국을 재건하여 세상을 호령하며 유대인의 기세를 드 날리게 해 줄 영웅 군주를 기대하면서 사용하면서 보편화 되었다.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신 18:15이하가 예고하는 모세 같은 기적을 행하고 이방인들에게서 건져내어 자유를 주고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는 선지자 혹은 다윗처럼 이방인들을 정복하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위대한 군사 정치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 53장이 예언하는 그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의 모습은 자기들이 기대한 그 메시아의 모습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오해하였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결정적인 판단 착오였고 예수님을 배척한 중요한 이유였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예고된 그 고난당하는 대속자 야웨의 종이 바로 이방인들의 손에서 고난당한 자기 백성 혹은 의로운 유대인들이라고 잘못 해석해 버렸더 것이다. 그들의 해석이 이사야서의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나의 종"이라 고 부른다는 사실과 사 53장에서 고난당하는 대속의 죽음으로 죄를 용서하는 그 야웨의 종이 "나의 의로운 종"이라 불린다는 사실 때문에 기인되었다 하더라도, 저들의 그릇된 해석은 참 구세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오늘날까지도 사단의 회당으로 전락한 유대인의 비참한 현실을 계속되게 할 것이다.
유대인들의 기대한 정치 군사적 영웅, 그리고 그들이 기대한 세상적인 다윗 왕국의 재건, 유대인들의 위세 등등의 사고는 전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셨다. 베드로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당대 유대인들의 그릇된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면서도 때로는 그분이 고난당하리라는 예언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까지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에 주권을 회복시키는 일이 곧 다윗 왕국을 재건하는 일이 지금입니까? 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행 1:6). 구약의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들을 정치적, 물질적 다윗 왕국의 재건으로 그릇 판단한 결과였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성령님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세상에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영적인 메시아 왕국이었다.
오늘날 세대주의 신학이나 많은 지상 천년왕국 사상을 가지고 적그리스도의 7년 대환란 운운, 666 수자 베리칩 운운 하는 이들의 사고도 이전에 유대인들이 가졌던 그릇된 지상 다윗 왕국의 재건의 반복에 불과하다. 구약 예언들을 (특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물질적 세상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울
다윗
솔로몬
작품들 (잠언, 아가, 전도)
분단 왕국 시대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의 우상숭배 때문에 남과 북이 분단되어 200년 이상을 (주전 930년-주전 722년) 대치 상태로 전쟁을 하거나 서로를 대적하는 대치 상태를 지속해야 했다. 죄란 이처럼 나라를 분단시키고, 피를 흘리게 만든다.
왕상 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12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남북 분단의 비극은 바로 죄 때문에 기인되었다.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중심하여 역사를 기술하는데,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바로 오경에 주어진 언약 법규였다.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이것이 언약 백성의 우선적 임무였다.그렇게 행동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축복해 주실 것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데, 그것을 좀 더 세분한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 곧 그분의 뜻의 표현인데, 그 십계명을 보다 세밀하게 특히 구약 시대의 그 시대적,지리적 환경에 맞추어 규정한 것이 언약 조항들 곧 법규들이다. 십계명은 원리를 말씀한다면, 법규들은 그 원리의 구체적 적용을 염두에 두고 보다 세밀하게 환경에 비추어 법을 규정한다.
나중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을 당하고, 주전 586년에는 남 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만다.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같이 저들이 하나님 사랑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사랑! 그것이 언약 조항들과 그것들의 요약인 십계명의 핵심이다. 저들은 이방 우사을 따라갔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아니했다. 이것이 저들이 멸망한 이유였다. 저들이 무기가 없어서, 군대가 약해서, 국력이 약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하나님 사랑이 없어진 결과였을 뿐이지 근본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분단되어 총과 대포를 겨누며 대적 관계를 지속하는 한민족! 이전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마땅하다. 죄는 나라를 분단시키고 나라를 멸망시킨다. 한국에는 1천만 성도가 있다고 하지만, 세속화의 속도가 너무나 급속하다. 교회 강단은 영적 순결과 능력을 상실해 가고, 이전의 그 뜨거웠던 산기도의 부르짖는 소리는 이미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아, 누가 이 나라의 부패와 어둠을 제거할꼬? 모두가 스마트폰에 사로잡혔고 동영상에 사로잡혔고, 인터넷에 몰입해 버렸다. 모두가 다 음란의 영에 사로잡히고 세속의 영에 사로잡혔다. 이런 나라에 소망이 있을까? 앞날이 있을까? 북한은 중국에 남한은 일본에 멸망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교훈을 받지 못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당할 수 있을까? 통일을 하려면 단단한 정신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 정신력은 오로지 진리의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만 배양될 수 있다.
남북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자면, 남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은 나머지 10지파가 구성원이었다. 남의 유다 왕국은 유다 지파 이름에서 유다란 이름이 유래했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유대인이라고 저들을 부르게 만들었다. 반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야곱이 개명한 이후에 얻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에서 근거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북왕국의 이름으로 고착된 것은 열왕기서를 통해 본다면, 아주 약간 기이한 내력에서 그렇게 된 듯 하다. 먼저 우리는 왕상 12장에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어떻게 북왕국이 분리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왕상 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 . . 3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 . .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18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니람을 보내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돌아왔다 함을 듣고 보내어 저를 공회로 청하여다가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으니라(왕상 12:20)
"이스라엘"이란 말은 남북이 분리되기 이전에 전체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예컨대,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의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왕상 11:25)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왕상 11:32)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38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왕상 11:37-38)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 년이라(왕상 11:42)
이런 구절들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체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솔로몬의 범죄 때문에 다윗 왕가는 오직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통치하고,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모두 솔로몬의 대적자 곧 북왕국의 창건자 여로보암의 손에 넘겨져 버렸다. 그래서 결국 다윗 왕가는 자기들이 속한 "유다 지파" 왕국이란 의미에서 "유다 왕국"으로 불리고, 나머지 10지파로 구성된 여로보암의 북왕국이 오히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니까 다윗 왕가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축소되어 자기네 지파 왕국으로 전락했고, 모반으로 야기된 북왕국이 오히려 이스라엘이란 영예로운 이름을 차지해 버렸다.
선한 왕과 악한 왕
분단 왕국 시대에 남과 북으로는 다음과 같은 각기 19명의 (유다는 '아달랴' 제외) 왕들이 통치했다. 그들의 계보를 먼저 제시하고, 그들의 통치 연대도 알아보자.
이 가계도에서 드러나는 바는 북왕국은 빈번한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이고, 남왕국 유다는 오직 다윗 왕가만이 통치했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다윗 언약으로 (삼하 7장) 오직 다윗 후손만이 영영 왕 노릇 하리라고 하나님께 약속하신 덕분이다. 반면 북왕국은 그런 신학적 정통성이 없었기에 빈번한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남왕국 여호사밧이 북왕국 아합의 딸 아달랴를 며느리로 데려와서 서로 결혼 동맹을 맺은 것이 남북 왕가들 사이의 결혼이었고, 그 잘못된 결혼 정책으로 남왕국의 다윗 왕가가 씨가 말릴 뻔 한 위기에 몰렸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남왕국에서는 쿠데타로 성이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은 예가 없었지만, 그렀다고 쿠데타 자체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쿠데타 혹은 모반은 남왕국 왕들에 대하여도 일어났는데, 그것은 대개 왕들이 우상을 따라갈 경우 신복들이 왕을 모반하였지만, 모반한 자들이 정권을 잡은 예는 없었다.
히브리어에서 모반하다, 반란하다란 단어는 '카솨르'인데, 이 말은 바아사가 나답을 (왕상 15:27), 시므리가 엘라를 (왕상 16:9), 예후가 요람을 (왕하 9:14), 요아스를 옹립하고자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왕하 11:14 이 경우는 "아달랴" 자신의 입으로 "모반!"이라 외침), 남왕국 왕 요아스의 신복들이 요아스를 (왕하 12:21), 무리들이 남왕국 왕 아마샤를 (왕하 14:19), 살룸이 스가랴를 (왕하 15:10), 베가가 브가히야를 (왕하 15:25), 호세아가 베가를 (왕하 15:30), 호세아가 앗시리아 왕을 (왕하 17:4), 무리가 남왕국 왕 아몬을 (왕하 21:23) 각기 모반하여 정권을 탈취하거나 죽인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 구절들을 본다면, 남왕국 왕들의 경우에는 요아스, 아몬 두 왕에게만 모반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북왕국 왕들에게 일어났다. 남왕국의 아달랴는 원래 왕비였지만 모반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여호야다의 정변은 모반이라 하기 어렵고 정상적인 다윗 왕가에로의 정권 이전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모반 사건들과 연관하여 "죄"를 생각해야 한다. "죄" 때문에 모반이 일어나고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잠언에서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라고(잠 16:12) 한 것이다.
1980년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선진조국 창조’라는 국정지표 아래에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국가 건설’을 국정목표로 내걸었다. 여기 본문에서 "공의"라 함은 그 제5공화국 시절에 구호가 되었던 "정의"의 개념과 다르다. 성경에서 공의란 언약 질서를 가리킨다. 곧 하나님께서 언약조항들을 통해 주신 그 질서, 상하로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간의 관계,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해서 바로 설정되는 상태를 가리킨다.곧 십계명의 원리대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거짓이 없고 탐욕을 부리지 않으며 간음하지 않으며 살인하지 않는 사회적 상태가 곧 공의로운 사회이다.
하나님을 뒷전으로 내 몰고, 우상을 따라가면 아무리 "공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사회! 라는 슬로건을 내 걸어도 그것은 의미가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공염불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에는 잡신들이 창궐하여 사람들을 공격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적대케 하고 음란과 거짓, 탐욕의 영이 역사하여 사회가 어지럽게 분열과 다툼의 상태, 적대와 빈부 지역 갈등의 상태로 변질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 공의로운 사회라는 개념은 원래 성경에서 출발한 것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만 의미가 살아날 수 있는 개념들이다. 오늘날 민주사회 민주 사회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친 민주사회는 어리석은 여론이 이끄는 중우 정치로 몰락하고 만다. 원래 말씀위에 토대를 두었던 서구의 민주사회 개념이 이제는 세속화된 서구에서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이제 북과 남의 분단 시대에 통치했던 왕들의 통치 기간들을 도표로 일목 요연하게 제시한다.
유다 | 연대 | 이스라엘 | |||||||
왕 | 재위 | 성향 | 구절 | B.C. | 왕 | 재위 | 성향 | 구절 | |
르호보암 | 17 | 악 | 왕상 12:1-14:31대하 10:1-12:16 | 930-913 | 930-909 | 여로보암 1세 | 22 | 악 | 왕상 11:26-14:20대하 9:29-13:22 |
아비야 | 3 | 악 | 왕상 15:1-8대하 13:1-22 | 913-910 | |||||
아사 | 41 | 선 | 왕상 15:9-24 대하 14:1-16:14 | 910-869 | 909-908 | 나답 | 2 | 악 | 왕상 15:25-28 |
908-886 | *바아사 | 24 | 악 | 왕상 15:27-16:7대하 6:1-6 | |||||
886-885 | 엘라 | 2 | 술꾼 | 왕상 16:8-10 | |||||
885 | *시므리 | 7일 | 악 | 왕상 16:10-20 | |||||
885-874 | *오므리 | 12 | 극악 | 왕상 16:16-27 | |||||
874-853 | 아합 | 22 | 극악 | 왕상 16:28-22:40 대하 18:1-34 | |||||
여호사밧 | 25 | 선 | 왕상 22:41-50대하 17:1-20:37 | (872) 869-841 | |||||
853-852 | 아하시야 | 2 | 악 | 왕상 22:40,51-53왕하 1:1-17 대하 20:35-37 | |||||
852-841 | 요람 | 12 | 악 | 왕하 3:1-3; 9:14-25 | |||||
요람 | 8 | 악 | 왕하 8:16-24대하 21:1-20 | (853) 848-841 | |||||
아하시야 | 1 | 악 | 왕하 8:25-29; 9:27-29대하 22:1-9 | 841 | 841-814 | *예후 | 28 | 악 | 왕하 9:1-10:36대하 22:7-12 |
*아달랴 | 6 | 극악 | 왕하 8:18,25-28; 11:1-20대하 22:1-23:21; 24:7 | 841-835 | |||||
*요아스 | 40 | 선 | 왕하 11:1-12:21 대하 22:10-24:27 | 835-796 | |||||
814-798 | 여호아하스 | 17 | 악 | 왕하 13:1-9 | |||||
798-782 | 요아스 | 16 | 악 | 왕하 13:10-25; 14:8-16 대하 25:17-24 | |||||
아마샤 | 29 | 선 | 왕하 14:1-14 대하 25:1-28 | 796-767 | |||||
(793) 782-753 | 여로보암2세 | 41 | 악 | 왕하 14:23-29 | |||||
웃시야 | 52 | 선 | 왕하 15:1-7 대하 26:1-23 | (792) 767-740 | |||||
753 | 스가랴 | 6개월 | 악 | 왕하 15:8-12 | |||||
752 | *살룸 | 1개월 | 악 | 왕하 15:13-15 | |||||
752-742 | *므나헴 | 10 | 악 | 왕하 15:16-22 | |||||
요담 | 16 | 선 | 왕하 15:32,33 | (750) 740-732 | |||||
아하스 | 16 | 악 | 왕하 16:1-20 대하 28:1-27 | (735) 742-715 | 742-740 | 브가히야 | 2 | 악 | 왕하 15:23-26 |
752-732 | *베가 | 20 | 악 | 왕하 15:27-31 | |||||
732-722 | *호세아 | 9 | 악 | 왕하 17:1-41 | |||||
히스기야 | 29 | 선 | 왕하 18:1-20:21 대하 29:1-32:33 | 715-686 | |||||
-여기 제시된 연대는 E. Thiele의 연대를 기준한다 -( )안의 연대는 정식 즉위 이전 부왕과의 섭정 공동통치 연대 -이 도표는 “펌”이지만, 몇 군데와 연대는 수정했음 *표는 쿠데타로 집권한 경우 -남왕국 요아스의 경우는 불법 찬탈자 아달랴에게서 다윗 후손에게로 정상적인 정권 이전 -남왕국의 시조는 다윗, 북왕국은 여로보암 1세인데, 이들이 각기 자기 나라 후대 왕들에게 한 모델로 작용함; 여로보암 1세는 경건한 자들의 남왕국에로의 귀환을 막고자 임의로 제사장을 세우고, 우상 성소를 세웠으며, 임의로 제의 달력을 제정했고 우상들을 섬겼다.
| |||||||||
므낫세 | 55 | 극악 회개 | 왕하 21:1-8 대하 33:1-20 | (696) 686-642 | |||||
아몬 | 2 | 악 | 왕하 21:19-23 대하 33:21-25 | 642-640 | |||||
요시야 | 31 | 선 | 왕하 22:1-23:30 대하 34:1-35:27 | 640-609 | |||||
여호아하스 | 3개월 | 악 | 왕하 23:31-33 대하 36:1-4 | 609 | |||||
여호야김 | 11 | 악 | 왕하 23:34-24:5 대하 36:5-7 | 609-598 | |||||
여호야긴 | 3개월 | 악 | 왕하 24:6-16 대하 36:8-10 | 598-597 | |||||
시드기야 | 11 | 악 | 왕하 24:17-25:7 대하 36:11-21 | 597-586 |
선한 왕? 악한 왕?
그 기준은 무엇인가?
북왕국 오므리 왕조의 시조 오므리는 아주 유능한 왕이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위업을 이룬 왕이었다. 고고학적 발굴물에서, 오므리는 자기 당대 이후로 수 세기에 걸쳐 이스라엘 왕국의 대명사로 불린 것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서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모압을 압제했다고 언급되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 대신에 이스라엘은 "오므리 집안"이라 (Bit-Humria) 혹은 "사마리아"라 (오므리가 도읍지를 정한 곳) 불렸다. 대영 박물관에 소장된 앗시리아의 검은 오벨리스크는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로 언급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오므리 후손도 아니고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밧의 아들이다 (왕상 19:16, 왕하 9:2). 이렇게 대외적으로 "오므리"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유능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성경 기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왕상 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26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27 오므리의 행한 그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역사가의 오므리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인색하다. 아니 인색 정도가 아니라 가혹하고 신랄하다. 왜 그러했나?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열왕기서의 저자나 역대기 기자) 선지자나 제사장이었으리라 추정되는데, 저들이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오경의 법규들이었기 때문이다. 오경 법규의 요약이 십계명이고, 십계명의 요약이 주님이 요약하신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다. 이 둘은 하나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이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법규들의 핵심과 요약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여러 법규들이 주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어긋나면 경제적, 군사적 업적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악이었다.
우리가 역사를 보는 눈도 다를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위대하게 평가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지? 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활동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언약 사신들로서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 파송되어, 언약백성을 기소하고 심판을 선고하거나, 심판 이후에 나타날 이스라엘의 회복/ 구원을 선포하였다.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메시지들은 오늘날 선지서들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메시지는 크게 심판 메시지와 심판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회복/ 구원 메시지로 대분된다. 선지서들에는 이런 두 메시지들과 함께 선지자들 당대의 상황 묘사 혹은 선지자들의 소명 기사 등도 담겨 있다.
언약의 사신으로서의 선지자
선지자를 언약의 사신이라 하는 것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종주 대왕이신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사신'이란 의미이다. 국제 정치 질서에서 예나 지금이나 큰 강대국과 주변 약소국들 사이에는 엄연히 종주권 조약이 존재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주전 14세기 어간에 애굽이나 힛타이트 제국이 강대국으로 서로 자웅을 겨룰 때, 주변 약소국들은 두 강대국 중 한 나라에 붙어서 자신을 지켜야 했다. 강대국과 주변 약소국 사이에는 종주권 조약이 체결되어, 종주 대왕이 일방적으로 약소 봉신국 왕과 그 백성의 충성을 요청하고 강제하였다. 종주권 조약들은 대개 일정한 형식들을 갖추는데 (최종태, 예언자에게 물어라, 2판, 181이하 참조), 우선 전문이 제시되어 그 조약을 허락하는 종주 대왕이 누구인지를 소개하고, 다음에 역사 서언 부분이 뒤 따른다. 이 역사서언에서는 지금까지 종주 대왕이 봉신국 왕에게 베푼 은혜가 기술된다. 이렇게 함으로 봉신국의 종주국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충성을 요청하는 조항들이 이 종주권 조약의 핵심인데, 조약을 체결하는 당대의 봉신국 왕만 아니라 그 후손들 대대로 종주국에 충성하도록 규정한다.
그리고 종주권 조약은 이 조약 규정을 쌍방이 (사실은 봉신국에서 종주국에 대한 충성을 바치도록 함이 주 목적이지만) 준수하도록 여러 신들을 증인들로 불러 이 조약을 어길 시에 저주를 내리도록 규정한다. 그리고 조약을 지킬 경우에 축복을, 깰 경우에는 저주가 임할 것을 역시 규정한다.
이런 종주권 조약의 형식이 구약의 시내산 언약이나 (출 20-24장) 그 갱신인 신명기 모압들 언약이나 (신명기) 세겜 언약 (수 24장) 등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종주권 조약에서 종주 대왕이 봉신국 왕에게 보내는 사신이 바로 구약에서 선지자들에 해당된다. 종주 대왕이 봉신국에서 파송하는 사신은 전권대사로서 종주 대왕을 대신하기 때문에 봉신국은 그를 대할 때 마치 종주 대왕을 대하듯 처신해야 한다. 그 사신은 종주 대왕의 뜻을 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명나라 사신이 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간이 무대인 채붕을 세우고, 음악과 무용으로 환대하고, 나례라는 축사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명나라 황제를 대신하는 사신들을 섬기는 의식이었다 할 수 있다. 사신의 말은 곧 황제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조선 관료들은 저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힘을 다해야 했다.
하나님은 종주 대왕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봉신이다. 그런 관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일으키시는 선지자들은 언약 사신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였다. 저들은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 첫 머리에 "이같이 야웨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라고 외쳤다. 이제 뒤 따르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도입하는 사신 도입문인 것이다.
언약 사신인 선지자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언약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고 규정되었다 (신 18:19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 6:5) 요청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핵심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쌍방 사이의 관계 설정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을 요청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시고, 그분의 구원자시기 때문이다 (신 32:6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여기서 "사랑"이란 말은 "충성"이란 뉘앙스가 강하다.
심판 메시지
언약 사신으로서 선지자들은 무엇보다 언약 조항들에 근거하여 언약 백성을 기소하였다. 예컨대,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선지자들은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언약 조항에 근거하여 언약 백성을 기소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렘 17:21)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렘 17: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렘 17:24)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17:27)
여기 메시지에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부분은 기소문이다. 기소문은 오경 안식일 법규에 근거한 것이다. 그 기소문에 근거해서 심판이 선고된다: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혹은 언약 조항에 근거하여 부동산 투기를 기소하기도 하였다: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10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사 5:8-10)
여기서 사 5:8은 언약 조항을 깨뜨린 것을 기소하는 기소문이라면, 9절 이하는 기소에 근거한 심판을 선고하는 심판 메시지이다. 이처럼 심판 메시지는 오경의 언약 조항을 근거로 기소하고, 그 기소에 근거하여 심판을 선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복 메시지
회복 메시지는 심판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리라는 내용을 선포한다. 이 회복 메시지는 얼핏 보기에, 이스라엘이 주전 586년 바벨론에 추방당한 후에 (심판), 70년 추방 생활을 마치고 주전 539년 바벨론을 멸하고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페르시아의 고레스의 해방령으로 (주전 538년) 고국으로 귀환함으로 성취된 듯 보인다. 그러나 사 40장 이하에서 보듯, 회복의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의도한 바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귀환 정도가 아니라, 그런 정치적 사건은 하나의 겉 표상일 뿐, 깊은 이면에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란 인류의 근원적 문제 해결이었다.
바로 이 영적인 회복을 선지자들의 회복 메시지에서 보아야 한다. 만일 그러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란 순전히 현세적 시각에서 선지서들의 회복 메시지를 이해하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세대주의 신학의 그릇된 친-이스라엘 사고, 곧 기독교 시온주의 사상에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신약 기자들은 선지자들이 외친 회복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 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악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신약에서 우리는 구약 선지자들의 회복 메시지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 성취되었고 성취 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가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이사야가 선포했던 이스라엘의 회복자 메시아인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언약(중보자)이 되시고, 소경의 눈을 여시고, 이방의 빛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 일은 십자가 사건과 그 후에 일어난 부활과 승천, 보좌에 앉으심, 성령님을 부으심 등의 일련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복음 전파를 통해 어둠에 처했던 이방이 빛으로 나아오는 놀라운 일들이 성취도고 있다고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보도한다.
열방을 치는 설교
선지자들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만 아니라, 열방을 치는 설교도 선포했다. 이는 열방이 모두 하나님의 통치 대상임을 간접으로 증거해 주는 일이다. 열방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창 10장의 열국의 족보가 제시된 것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권은 이스라엘을 직접 통치하심으로 드러났지만, 열방에 대한 그분의 통치는 자연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선지자들의 열방을 치는 설교를 통해서 일부 행사되었다. 선지자들은 열방이 장차 종말의 때에 곧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을 섬길 것을 바라 보았다. 그들의 비전은 신약 시대에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 선지자와 문헌 선지자
여기 도표에서 선지자들이 활동한 시대가 제시되었다.
우리가 성경 책 이름에서 이름이 언급된 선지자들은
문헌 선지자라 (Writing prophets) 하고, 그 이름으로 성경책이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 기사들에서 그
들의 활동이 언급되는 선지자들은 대중 선지자라 부른다.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것이다.
예컨대, 엘리야나 엘리사는 대중 선지자에 속할 것이고, 미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등은 문헌 선지자에 속할 것이다.
예배 시들
시편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전부 150편의 시들이 함께 모아 졌는데, 자세히 보면 5권으로 분리될 수 있다:
제1권: 1-41편
제2권: 42-72편
제3권: 73-89편
제4권: 90-106편
제5권:107-150편
각 권의 말미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이 (doxology) 첨가되었다.
41:13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72:19b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89: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그런데 마지막 5권 말미에 기대되는 송영은 시 150편 전체라 할 수 있다:
150: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이렇게 시편은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대개 제2성전 (스룹바벨) 시대에 곧 추방 이후 고국으로 귀환한 자들이 성전 예배 때에 사용하기 위해 시편들을 수집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배열 편집했다고 추정된다. 물론 시편의 표제들이 암시해 주듯, 그 원래 저자들은 다윗을 비롯한 여러 다른 사람들이었다.
다윗이나 다른 시편 저자들이 원래 예배 목적으로 찬양시를 작사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영적 생활을 추구하다가 사적으로 작사했는지는 각 시편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지만, 대개 학자들은 예배 목적으로 작사되었다고 이해한다. 우리로서는 그런 이해가 모든 시편에 적용될 수는 없다고 본다. 때로는 개인적인 정황에서 작사된 것들도 있었는데 나중에 성전 예배를 위해 수집되어 (약간 수정된 형식으로) 시편 모음집에 담겼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시편의 해석
시편을 이해할 때,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시편 하나 하나를 묵상하고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최종태, 시편 주석 I에서 "시편 해석사" 부분 참조). 그것도 중세 시대에는 시편 하나 하나를 오로지 예수님에 의해 올려진 기도 혹은 예수님을 노래하는 기도로 기독론적으로 해석했고, 4중 해석법이라 하여, 각 시편에서 문자적 의미, 풍유적 의미, 도덕적 의미, 천상적 (anagogical) 의미 등을 찾고자 하였다. 이런 성경의 4중 해석법은 영국의 비드와 (Venerable Bede 672-735) 마우루스에게서 (Rabanus Maurus 786-856) 시작되었다 (Erwin I. J. Rosenthal, "THE STUDY OF THE BIBLE IN MEDIEVAL JUDAISM," in The West From The FATHERS To The Reformation,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IBLE, 2,264).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 선조들이 한 일을 보여주고, 풍유적 의미는 우리의 신앙이 숨은 곳을 보여주며, 도덕적 의미는 우리 일상생활의
규칙들을 보여주고, 천상적 의미는 우리의 싸움이 끝나는 곳을 보여 준다는 사고였다.
4중적 의미의 예를 들자면, "예루살렘"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도시를 의미하고, 풍유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하고,
도덕적으로는 인간 영혼을 의미하고, 천상적으로는 하늘의 도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 달리 예를 들자면, "물"은 문자적으로 물을 의미하고, 풍유적으로 세례 혹은
민족을 혹은 은총을 의미하고, 도덕적으로는 슬픔 혹은 지혜 혹은 이단 혹은 번영을 의미하고, 천상적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실제의 창조행위를 의미하고, 풍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도덕적으로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신적으로 조명을 받으라"는 말씀이고, 천상적으로는 "그리스도에 의해 영광으로 인도되라"를 의미한다는 식이었다. 4중
의미로 성경을 해석한 결과 하셀바흐란 이는 이사야서 1장에 관해서만 24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Hasselbach). 그러나 칼빈으로 시작하여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성경에 대한 그런 해석들 대신에, 역사적-문법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자, 헤르만 궁켈이란 독일 학자가 양식 비평법을 시편 연구에 도입한 이래로 시편 연구는 대개 분위기나 주제가 같은 시편들끼리 모아서 이것들은 탄식시, 이것들은 감사시, 이것들은 찬양시, 이것들은 확신/ 신뢰시, 이것들은 시온의 노래, 이것들은 왕권시, 이것들은 율법시, 이것들은 예배 의식시 등과 같이 양식별로 모아 함께 연구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정경 비평적 시편 연구도 도입되었는데, 그것은 현재의 시편 배열 순서를 아주 주목하면서, 배열된 순서에서 신학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예컨대, 전체 5권의 시편들이 각 권 말미에는 대개 왕의 시 혹 메시아 시가 배치되었다는 점을 주목해 보라: 시 72편이나 시 89편. 왜 그렇게 했을까? 세상 왕들에게서 실망한 나머지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도록 성도들의 초점을 미래로 향하도록 하기 위험이었던가? 혹은 시 1권에는 대개 다윗 왕의 시들이 모아져 있는데, 언약 하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 생활을 노래한다면, 제4권은 (90-106편) 추방 이후 상황을 광야 시대로 상정하고 새로운 출애굽을 기대하도록 편집되었는지 모른다. 예컨대, 시 90편은 모세의 노래인데, 출애굽과 광야 여정의 사고가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 점에서는 시 90-100편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시 101-106편에서도 출애굽과 방랑 사건을 염두에 두었는지 모른다. 시 제4권에서 특히 시 93, 95-99편에서 특히 부각되는 사고는 "야웨의 왕권" 사고이다. 추방 이후에 다윗 왕정이 사라진 후에,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의지해야 했다. 그분이 언젠가 지상에 임하여 통치하실 때를 바라보았다. 이런 사고는 이사야 후반부에서도 현저하게 드러나는 사고이다. 결국 이런 미래 지향적 사고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다시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로 성령님을 보내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실현시키심으로 성취되었고 성취 도중에 있다.
시편에서 우리는 구약 성도의 대표인 다윗왕이 작사한 시편들을 많이 듣는데,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접근하며 의지하며 섬기며 사는지를 우리에게 알도록 그의 삶이나 마음을 표현하게 하신 것이다. 언약 체제하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 따라 살 때 형통했지만, 언약을 범할 때는 몰락과 수치에 내 몰리기도 하였다. 언제까지니이까? 란 부르짖음이나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란 기도는 말하자면 언약을 범한 언약 성도가 하나님의 징벌적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영적으로 몸부림 치는 울부짖음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대로, 시 제4권에 담긴 야웨의 왕권 사상은 사실 어쩌면 모든 시편의 핵심 사고인데 (차일즈가 지적한대로) 야웨께서 직접 지상에 임하여 통치하시리라는 기대는 구약 성도들의 가슴에서 지상 왕들의 실패 때문에 사무치는 기도의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고, 이사야 53장으로 대표되고 레위기 제사들이 예표했던 그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메시아 왕으로 즉위하여 성령님을 보내셨다. 성령님을 부으셨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 왕의 통치 행위의 시작인데, 성령님의 임재,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현장이며 통치의 실체이다.
여하간 시편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도) 여러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시편을 어떻게 내 것으로 섭취할 것인가? 인데, 필자는 많은 시편들을 암송한다. 특히 기도 시간에 시편들이나 (시 1, 2, 3-6, 9, 16, 19, 23, 33, 42-43,46-48, 82, 121, 127, 131, 145-150 등) 다른 말씀들을 (특히 디모데 후서 전체나 사 53, 55, 60-62장) 암송할 때 내 삶의 모든 부분들이 다시 영적으로 재 정립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기도는 말씀에 근거해서 할 때 힘을 갖는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말씀을 암송하다 보면 기도가 터진다는 것이다.
잠언, 전도, 아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평안한 삶을 영위할 때, 특히 솔로몬 시대에 많은 문학 작품들이 산출되었다. 물론 고난당하는 다윗의 삶을 통해서 많은 시편들이 작사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솔로몬은 직접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로서, 수 많은 문학 작품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성경에 담긴 잠언들이나 아가서, 전도서 등을 솔로몬의 저작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잠언"이란 우리 말로 하면 격언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격언은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진리를 짧게 명쾌하게 진술해 주는 짧은 문장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 (자녀 많으면 늘 문제 많다)
급할수록 돌아서 가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두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그런데 성경 잠언들은 어떤가 하면, 고대 근동의 여러 지혜자들의 격언들과 공통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신론적 사고가 배제되고 야웨 하나님만 신앙하는 유일신론적 사고가 지배한다는 점이 근본적 차이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유일신론적 신앙관이 표현되지 않고 일반은총의 측면에서 진실 사실을 진술하는 잠언들이 많다.
잠언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는 주제가 말에 관한 것이 아닐까? 곧 혀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혀는 자갈을 머금고 다니듯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 21:23)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잠 4:24)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케 되느니라(잠 18: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 10:32)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잠 11:9)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어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잠 12:6)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잠 12:18)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잠 14:5)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잠 15:28)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
그런데 오늘날 가장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잠언의 주제는 말에 관한 것과 함께 '음란'에 관한 것이리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잠 6:26)
6: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26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29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
30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치는 아니하려니와
31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게 되리라
32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33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34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35 아무 벌금도 돌아 보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7:6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 보다가
7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8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9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10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 .
13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하되
14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15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16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17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19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20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21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23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24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25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오늘날 음란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음란 광풍의 바람이 휘몰아 치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 음란의 영에 한 번 사로 잡히면, 그 얼마나 빠져 나오기 어려운고? 정결한 맘, 그곳에서 신령한 빛 비취오니 . . .
거룩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음란은 무엇인가?
음란 동영상 (야동), 누드 사진들 (야사) 감상, 음란한 글들 (야설), 음란 행동 등등이 인터넷을 통해 집안 안방 깊숙 내밀한 곳까지 침투해서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롬 13:13)
잠언들 가운데 "재물"에 관한 가르침도 상당하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0:2)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잠 21:6)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잠 13:11)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 13:22)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잠 10:15)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잠 18:11)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잠 11:4)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잠 27:24)
잠언들은 이스라엘이 정착 생활을 하는 가운데, 사방에 안식이 주어졌을 때,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과 인간들의 삶을 모습을 조용히 관조할 기회를 가졌을 때에 대부분 생겨났거나 주변 나라들에서 들어온 인류 보편적인 진리 말씀들을 접하면서 히브리인들이 자기 나름대로 사물들과 주변 환경 혹은 인간 관계 등을 성찰을 하는 가운데 작사하게 되었을 것이다.
전도서는 처음부터 아주 비관적인 사고를 전개한다:
전 1:2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전도서 저자는 솔로몬이라 이해되는데, 그는 이렇게 자신이 추구했던 바를 기술하고 있다:
전 2: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10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결론은 허무하다는 것이다.그래서 전도서는 불교의 염세주의 사고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론은 불교의 염세주의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전도자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전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이렇게 마무리 한다:
12: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요컨대,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 고 일단 부정한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을 떠나서 하는 인간사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이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바울 사도의 권고를 따라 삶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의 기독인들의 삶까지도 허무하다고 비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전도자의 권면을 들어야 한다. 늦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이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심판의 때가 오면 내가 행한 모든 행위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받지 못한 모든 삶은 전부 내 형벌의 요소로 작용하게 될 때가 오리니.
아가서는 원래 히브리어로 "노래들 중의 노래"란 제목을 갖는데, 이는 최상급을 표현한다: 노래들 중에서도 최고의 노래. 히브리어에서 최상급을 표현하는 방식이 몇 있지만, 그 중에서 명사 복수형 속격에 명사 절대형을 함께 결합시켜 표현하기도 하는데 "노래들 중의 노래"나 "종들 중의 종" "거룩한 곳들의 거룩한 곳" 등은 모두 최상급적 표현이다. 종들 중의 종이므로, 가장 비천한 종이란 의미이고, 거룩한 곳들 중에서도 거룩한 곳이니, 가장 거룩한 곳이란 (지성소)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가서가 노래하는 내용은 무엇이기에 최고의 노래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는 남녀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친구들 사이의 우정, 부모의 자식 사랑 등등 여럿이 있는데 헬라어에서 이런 다양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다르다는 것에 근거해서 각 사랑을 분명하게 구분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예컨대, 요 21:15-17에서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agapas me pleon tou twn)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filw se)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agapas me)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filw se)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fileis me)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fileis me)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filw se)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은 처음에 두 번은 신적인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나? 라고 (agapaw) 물으셨다면, 시몬은 두 번 모두 "당신을 친구로 사랑합니다" 라고 (pilew) 답했고, 세번 째에는 주님이 "친구로서 네가 나를 사랑하나?" 라고 (pilew) 물으셨고, 베드로는 역시 "내가 친구로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pilew) 라고 답했다. 이런 식의 해석은 헬라어에서 사랑하다란 말이 "아가파오"와 "필레오" 두 다른 단어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런데 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과 친구로서 사랑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친구로서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인가? 그렇다면 부모의 자식 사랑은 신적인 사랑과 어떻게 차이를 가질까? 연인 사이의 사랑과 친구사이의 사랑과는 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말을 따져서 어떤 차이를 찾으려 한다면 현실을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즉 부모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신적인 사랑 모두 사랑이란 공통점이 있고, 사실 그것들 사이에 차이를 꼭 집어 지적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친구의 사랑이라고 반드시 조건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하간 아가서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사랑 (유대인들의 해석), 예수님과 성도들간의 사랑을 (기독교의 해석) 노래한다고 이해되어 왔다. 아가서에 소위 풍유적 해석을 가해 온 것이다. 그렇지만, 아가서 자체를 그대로 놓고 문자적인 해석을 가한다면 분명 그것은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노래한다.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도 순전한 마음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남녀간의 사랑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에게 남녀간의 사랑은 자주 자주 음욕을 채우려는 그릇된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결혼 전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 사랑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가서는 육체적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고, 육체적 관계를 노래하기도 한다. 아주 에로틱한 부분들이 없지 않다. 그래서 미성년자는 읽지 못하도록 금지하기도 했다지만, 오늘날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 그런 육체적 사랑을 노래하는 노래들을 성경의 일부가 되도록 하셨을까? 그것은 우리 성도들의 남녀 사랑이 부정될 수 없는 현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때문일 것이다.
아 4: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 . .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7: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7: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8: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결혼 테두리 안에서의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사랑과 남녀간의 사랑은 서로 간혹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와 천국 사역을 위해서 내 육체적 정욕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데이트 하는 남녀는 어느 정도까지 육체적 접촉이 허용될 수 있을까? 아가서는 아주 노골적이어서 육체적 관계를 대담하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혼 전에 남녀가 육체관계를 갖는다면 신약적 가르침에 비추어 불법적 행동일 것이다. 결혼 관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육체 관계는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남녀가 결혼하기 까지 육체 관계는 갖지 말고 결혼 첫날 밤을 위해서, 그리고 아름다운 서로의 결혼 관계를 위해서 남겨 둠이 좋다.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
북왕국 예후 왕이 앗시리아 살만에셀 III세 왕에게 굴복함
북왕국의 멸망
남왕국의 멸망
애가
바벨론 포로 시대
추방의 예언
추방 생활
다니엘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남왕국 유대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각기 멸망 당했다. 주전 586년의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는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신학적, 영적, 실존적 공황 상태를 야기시켰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생명 전체를 걸고 믿고 섬겼던 하나님이 과연 계신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심까지 가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우상숭배자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이방 나라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당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은 무참히도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정 체험한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을 보았겠지만, 영적 체험을 갖지 못한 명목적인 이스라엘인들은 분명 자신들의 정체성이나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주권자인가? 바벨론의 섬기는 마르둑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믿어 왔던 하나님이신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추방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땅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했음직한 일일 것이다. 물론 신앙 체험이 확실한 자들은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머리카락 하나도 다 헤아리시고,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 없이는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는 절대 주권자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회의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그럼에도 상황이 바벨론 추방과 같이 사약을 받는 지경으로 악화되면 강한 신앙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일지 모른다. 그런 신앙적 회의나 갈등은 결코 오래 방치될 수가 없다. 다니엘은 붓을 들어서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세상의 절대 주권자는 우리가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다! 느부갓네살이나 그의 군대 혹은 그들이 섬기는 마르둑 신이 강해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니며, 우상 숭배자 느부갓네살 왕까지도 하나님은 주장하시며, 온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흥망 성쇠를 이룬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섬긴 그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세계사의 유일한 주장자이심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바벨론 추방생활로부터의 고토로의 귀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귀환자들의 재건 운동
신구약 중간기 시대
하나님의 나라 대망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무렵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 하에서 자신들을 외세의 세력에서 구원해줄 메시아 왕의 도래를 간절히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정황은 당대 유대인들이 남긴 문헌들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으로 가진 구약 성경 외에 소위 신구약 중간기로 불리는 구약과 신약 시대 중간 시대 동안에 특히 주전 200년에서 주님이 오신 그 시점까지에 여러 유대인 문헌들이 산출되었는데, 구약 성경과 관련된 내용이나 제목을 가진 책들은 우리는 외경 혹은 가경이라 부른다. 그런 외경이나 가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성경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성경을 근거로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연구하여 기록한 책들이기 때문에 당대 유대인들의 사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유대인 외경, 가경들이 제시하는 묵시 사상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리라고 저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성격의 것으로 이 악한 세상을 멸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가 임하리라는 기대였다. "묵시"라는 것은 숨겨진 것의 드러남을 말하는데, 동시에 묵시적 사건이라 하면, 초자연적인 세상의 종말과 새 세계의 도래라는 세상 파국적인 의미를 전한다. 유대인 문헌들은 그런 사고를 많이 기술하고 있다.
제 5부 회복과 성취의 시대
새 시대의 여명과 천국의 도래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출생하신 주전 4년 경의 유대 나라의 형편은 로마 식민지로 유대인들이 압제와 신음 가운데 구약 선지자들이 예고했던 그 다윗 후손 왕 메시아의 출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성전도 파괴당했다. 그리고 상층 계층은 모두 포로로 잡혀가고 하층민들만 농사를 지어 세금을 바치도록 남겨졌다.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이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중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유대인 해방령을 내려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렘 25장)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주전 332년에는 마케도냐의 대왕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중동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세월이 또 흘러 주전 63년에는 로마가 마케도냐를 대신해서 중동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주님이 태어나신 그 시점에는 로마의 권세가 최 정점에 이르른 때였다. 아우구스투스라는 (Augustus; Latin: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63BC–AD14) 총명한 지도자가 출현하여 그야말로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시대 초석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로마의 평화 시대에 주님이 태어나셨다. 하지만 그 대국적 견지에서 인류의 평화를 위해 로마가 이룩한 위업과 달리, 유대인들에게 로마인들은 여전히 이방인 세력이었고 압제자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주전 168년 당시 자신들을 통치하던 마케도냐 세력인 셀루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게릴라 전쟁으로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대적했고, 마침내 주전 143년에는 독립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게릴라 전쟁을 주도한 마카비 가문이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워 약 80년간 반짝 독립을 향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 장군의 침공에 유대 왕국은 무너졌고,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볼 때, 주님 태어난 당시 유대인들은 반짝 독립의 기간을 제하면 거의 500년 가까이 이방인의 지배하에 살아온 것이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그냥 강한 나라의 일부로 흡수되고 동화될 법도 하지만, 그들이 가졌던 그 천적 신앙 덕분에 여전히 자신들을 이방인들의 손에서 해방시켜 줄 다윗 왕 메시아를 학수고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기대는 렘 23:5과 같은 예언에 근거한 것이었다:
렘 23:5-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구약 왕정시대에 '메시아'란 말은 오직 현직 왕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 유대 나라가 주전 586년 바벨론 군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에는 더 이상 메시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추방 시기 어느 때부터 앞서 언급한 그런 구절 예언에 근거해서 "메시아"란 말을 장차 다윗 후손 중에서 나타나 다윗 왕국을 재건하고 (암 9:11이하) 자신들을 이방인들의 압제에서 건져 낼 왕을 지칭하게 되었다. 신약에서 사용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역이고 바로 이 장차 나타날 다윗 후손 왕을 지칭하는 의미이다.
메시야의 즉위와 통치
다윗 후손 요셉의 후손으로 (법적인 후손에 불과하였지만) 태어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로 오신 것이다. 30년간 목수의 가정에서 섬기다가, 이제 3년간 정도를 공적인 사역, 곧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의 메시아 사역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되었다.
그 세례식은 사실 그분의 메시아 왕 즉위식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긴 했어도 엄연히 메시아 왕으로의 즉위식이었다. 그 때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하나님의 선포가 있었다 (막 1:11이하 참조). 이는 구약 시대 다윗 후손이 왕으로 즉위할 때, 대 제사장이 기름을 다윗 후손 머리에 붓고 선지자가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선언하는 즉위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 다윗 후손은 기혼 샘으로 가서 목욕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상 1:32이하 참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일이 그와 유사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여하간 구약 시대 다윗 후손의 왕 즉위식은 하나님의 아들로의 (천자) 입양식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아 왕으로 즉위한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게 된다 (마 4장과 병행절 참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라는 마귀의 말은 곧 네가 다윗 후손 메시아 왕이라면 이라는 의미이다. 메시아는 세 가지 면에서 시험을 받는다. 먹는 문제, 그리고 백성에게 환호를 받는 능력의 문제, 그리고 세상 천하 왕국의 영광을 얻는 문제 등.
주님의 광야에서의 40일간의 금식 고난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방랑하며 당했던 고난을 상기시킨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시대는 만나라는 하늘 양식을 주어 먹였던 모세 시대의 특징들을 재현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예수님은 다윗 후손 왕 메시아일 뿐 아니라, 모세같은 선지자 메시아였다. 그러므로 사탄의 시험은 이전에 광야에서 만나를 내렸던 그 모세의 기적을 재현하라는 요청이었다.
예수님은 마귀의 첫 시험에 대하여 신 8:3을 인용하여 응수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간을 방랑하면서 살아야 했다. 광야 생활은 저들을 낮추고 저들을 연단시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법을 훈련받는 기간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의 창설자로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할 수 없었다.
둘째 시험에서 마귀는 시 91:11-12을 인용하여 예수님을 다른 방면에서 공격했다.
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그런데 사단의 성경 인용과 적용에서 결정적으로 왜곡하는 그 무엇이 하나 들어 있다. 그것은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시 91:11에서 사단은 “네 모든 길에”를 생략하고 나머지만 인용했다. 이것이 왜 결정적인 왜곡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를 천사들을 보내어 보호하신다는 약속은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그 모든 길에서” 걸어갈 때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지금 마귀가 시험하듯,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이 단지 과시할 목적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군중들이 운집한 마당으로 훌쩍 뛰어 내린다면, 그것은 메시아가 걸어야 할 마땅한 길은 결코 아닌 것이다. 마귀의 요청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 6:16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응수하셨다: “너희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셋째 시험에서 마귀는 세상 왕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 모든 세상 권세를 주겠다는 것이다. 마귀는 아담의 타락 이래로 세상 임금으로 군림해 왔다. 메시아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면, 다윗 후손으로 오셔서 세상을 모두 지배할 것이었다 (시 2:6-8, 72:8이하 참조). 주님 당대 유대인들은 다윗 후손 왕 메시아가 오면 원수들에게서 유대인들을 건져내고 열방을 다 제압하고 다윗 왕국을 재건하리라 기대하고 있었고,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무엇보다 따라서 정치적 군사적 영웅이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속죄 제물로 드리는 고난당하는 '야웨의 종'의 모습과 같은 제사장 메시아 사고는 없었다. 마귀가 제안하는 바가 바로 당대 유대인들이 가졌던 그 정치 군사 메시아, 즉 십자가 없는 세상 열방을 통치하는 대왕의 모습이었다. 세상의 죄를 제거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세상 열국을 통치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바이고 여기 마귀가 제안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신 6:13을 인용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신다. 사단을 경배하고 세상 열방과 그 영광을 차지하는 일은 우상숭배이고, 이것이 바로 광야의 이스라엘이 빠졌던 시험이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다.
이렇게 사단의 공격을 물리치고 1차적으로 승리하신 메시아는 이제 3년 여 기간 동안 지상 메시아 사역에 돌입하셨다.
그분의 공식적 메시아 왕으로 즉위식은 계 5장이 환상으로 보여주듯, 마 28:18이하가 예기적으로 말씀하듯, 부활 승천 이후에 하늘 궁중에서 일어났다. 롬 1:3-4에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역)
메시아의 지상 사역
1) 천국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복음 전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이스라엘의 회복 시작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마귀가 지배하던 세상에 우주적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받아 여타 열방과 달리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오긴 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직접 강림하셔서 통치하신다. 시 93편 이하 소위 '야웨 왕권 시들'이나 이사야 40:10-11 등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시 96:13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통치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통치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통치하시리라)
사 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 나라/ 통치의 성격은 천국에 관한 비유들이 (마 13장) 드러내어 준다. 그분의 통치는 오늘날 성령님과 복음 전파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일어나서 구원받고 (남은 자만), 열방이 구원에 참여하는 메시아 통치 시대이다. 이 메시아 통치가 곧 하나님의 통치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들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
각종 '하나님 나라' 해석자들 - 리츨, 슈바이처, 불트만, 쿨만, 다드, 예레미아스
유대인들 중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세상 종말이라는 묵시 사고가 성숙한 때에 주님은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다. 그분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사를 통해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는데, 소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랑 공동체에 다름 아니라고 이해했다. 그러니까 윤리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이스나 알버트 슈바이쳐 같은 신학자들이 나와서 하나님 나라는 바로 유대인들의 묵시 문헌에서 말하는 초자연적인 세상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해석은 바른 방향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예수께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 오셨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묵시 사상에 심취한 예수께서 초자연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들여오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던졌지만 기대한 그 하나님 나라나 세상 종말은 오지 않고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몸이 갈기 갈기 찢겨졌고, 그의 시도는 실패로 마감되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슈바이쳐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그릇된 신신학을 따름으로 예수님을 묵시 사상에 심취하여 환청과 환상을 경험하는 정신병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한 바른 해석
그렇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신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말해서, 죄와 사단의 세력을 멸하고 성령님과 말씀으로 인류를 통치하는 영적인 성격의 것이다. 복음 전파를 통해서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인류를 건져내어 말씀과 성령님으로 통치하신다. 오늘날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복음 전파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직접 통치하셨다면, 이제 신약 시대에는 온 열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열방을 직접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테우'인데, 하늘 나라나 같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나라"라 (영어로 kingdom) 번역한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영토 개념이 아니라, 왕권, 통치권의 의미를 기본으로 갖는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어떤 영토적 개념이라기보다, 하나님의 통치권, 왕권을 초점으로 한다. 성령님과 말씀으로 통해서 그의 나라/ 통치권이 행사되고 있는 것이다. 죄를 근거로 인류를 사로잡고 통치하던 세상 임금 사단은 축출당하고, 사단이 야기한 저주와 질병이 제거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가져오는 현실 상황이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 나라/ 통치의 시대이다. 요한은 계 20:4-6에서 그 하나님 나라/ 통치를 천년간이라고 상징적으로 기술하였다. 그 기간은 신약시대 전체 기간에 해당되는데, 그 기간 동안에 죽임당한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이다. 천년왕국 사고의 핵심을, 어떤 이들은 핍박과 박해를 당하여 순교한 성도들의 중간기 상태에 누리는 축복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데, 우리로서는 베드로 사도가 선포했듯,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현재 영적으로 사단과 죄악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은혜의 통치를 천년왕국 사고의 핵심이라 본다.
2) 가르침
구약 말씀을 제자들에게 풀어주고 설명하심, 여러 비유들로 가르치심, 생활로 가르치심, 사역으로 가르치심.
3) 치유 및 축사
메시아 왕은 구약 선지자들이 행했던 그 치유, 초자연적인 치유 사역을 감당하셨다. 엄밀하게 왕의 사역이라기 보다 선지자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축사 곧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도 치유 사역과 함께 일어났다. 많은 경우 질병은 귀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사단의 졸개들로 그 위에 정사와 권세 같은 장관들의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은 메시아 왕의 권세로 사단의 세력을 축출하시고 죄와 저주로 파괴된 사람의 몸과 영을 회복시키셨다. 오늘날 불치병으로 고통당하는 영혼들이여, 이수 저수 안 되면 오직 예수(님)! 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먼저 약국에 갔다가, 병원에 갔다가, 다음에 무당에게 갔다가, 다음에 절간에 갔다가, 다음에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좋은 수가 있다. 최고의 수는 예수! 그분은 못 고칠 병이 없으시다. 지금도 그렇다. 김동일 장로의 간증을 직접 들어 보시면 최고의 수가 예수님이라는 말을 수긍할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저 먼 나라 천국에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것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당신의 고통과 고민을 해결해 주실 수 있고 주시는 분이시다.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님의 지상 강림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십자가와 부활 승천 사건을 통해 세상에 우주적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가 박살났고 사단의 세력은 무장 해제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골 2:14-15, 계 1:5-6, 12:7이하, 20:1-3).
이는 아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을 말한다. 어떤 추상적인 철학적 사고가 아니다. 지금 불치병으로 고통당하고 있고 귀신에 잡혀 고통당한다면 그 사람을 예수께서 메시아 왕으로 치유하시고 해방시키신다. 무당들도 예수님의 최고 권세를 인정한다. 영적 진리가 최고 진리이고 유일하게 완전 진리이다. 철학적 진리는 진리의 알갱이를 담고 있을 뿐이고, 여타 종교들도 그러하고 과학 지식들도 시대가 흐르면 구식으로 전락해 버린다. 오직 성경 진리만이 영원하고 유일무이하게 절대적 진리이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치유의 길이고 능력이며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나 목회자가 그 능력을 얼마나 현세상에 나타내실 수 있는지는 각자의 헌신과 충성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자 하는 목회자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이네 하면서 자기들의 부패한 본성에 놓인 '들보'를 빼어내고 회개할 마음은 없고 오직 타 기독인들의 '티'만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 손봉호 장로 같은 이가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애국 집회나 문재인 하야를 선포할 때 기독교의 수준을 저급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지만, 전광훈 목사의 삶을 좀 고찰해 보고, 그의 간증도 들어본다면, 손장로 같은 사람은 수 만 분의 일도 전광훈을 따라갈 수 없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 권세를 가진 자,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사모하여 가진 자, 지금도 무릎을 꿇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복음 전도에 자신을 드리는 자들을 통해서 참 기독교는 나타난다.
메시아의 고난
레위기 제사들의 실물 예언과 선지자들의 말씀 예언 (사 53장)
예수님은 왕 메시아만 아니라, 선지자 메시아로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치유와 축사 사역을 하셨다. 그러다가 그의 공적 생애 말기에 마침내 유대인들에게 체포당해 십자가 처형을 받는다. 이는 사 53장에 예언된 제사장 메시아 사역을 감당하신 고난과 대속적 (타인의 죄를 담당하는) 죽음이었다. 시 22편에 예고된 왕 메시아의 고난 묘사는 제사장만 아니라 왕으로서의 고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사단의 세력 괴멸 (골 2:14-15, 계 12:7-12, 20:1-3)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단의 세력이 치명타를 입고 괴멸됨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죄를 근거로 사단의 세력이 인간에 대해 권세를 행사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죄를 제거하는 십자가 대속 죽음은 사단의 권세를 박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지금도 귀신들을 축출한다. 우주적 정권 교체가 일어났기에 이제는 귀신들도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듣고 떨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예수님의 피! 피! 피! 하고 피를 먹고 마시고 뿌립니다! 등의 기도를 하거나 축사를 하는데 성경적이지 않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는 시각: 이스라엘의 회복 (복음 전파를 통한 예언의 성취)
부활하신 주
오순절 성령강림
세계사적 의의
복음의 세계적 전파
유대인의 배척과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의 구원은 오순절 복음 전파할 때부터 일어나서 재림까지 이른다. 재림 직전에 이스라엘이 대거 집단 개종하는 그런 시나리오는 성경적이 아니다. 항상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구원사의 원리이다.
메시아 통치 (천년왕국 =신약시대)
교회사/ 구원사
복음의 세계 전파
세속사
대국 굴기
세계사의 흐름
세계사는 1600년대 이래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네델란드 (화란), 영국, 미국 등의 순서로 세상을 지배해 온 역사를 보인다. 혹자는 중국 시대가 이제 왔다고 한다. 미국은 이제 힘이 꺽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2020년 4월 중순 현재 우한 폐렴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미국이 확진자가 59만에 이르고, 사망자도 2만 4천에 이르는 등 세계 최악의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발생율을 (인구수 대비 발생 환자 수) 본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세계 최악국가는 미국이 (1774명) 아니라, 룩셈부르크 (5259), 아이슬란드 (5014), 스페인 (3638), 스위스 (2968), 벨기에 (2639), 이탈리아 (2638), 아일랜드 (2156), 프랑스 (2095) . . . 한국 (206) 등이다. 이런 통계 수치에서 어떤 영적 진리를 찾아 내고자 한다면, 이 발생률과 사망률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런 최악의 국가들은 영적으로 최악의 국가들이라고 보면 확실하다. 왜냐하면 우리 성경 진리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만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그분의 주권 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사 14:22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그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23 내가 또 그것으로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비로 소제하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25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세계 최악의 국가란 영적으로 최악으로 범죄하는 나라들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수상이나 지도자가 동성애자들인 나라들이 어디인지 살펴 보면 된다. 그러나 한국은 상대적으로 양호하네! 라고 한다면 잘못된 판단이다. 영적 범죄율은 어디까지나 육신적 우한 폐렴 한 가지로만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칫 공산화될 위험이 눈 앞에 다가왔지 않나? 4.15 총선 결과에 따라 자유 민주제가 폐지되고 전체주의, 감시체제의 나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잠시 후면 지날 우한 폐렴이 무섭나?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를 전체주의, 감시제의 공산 사회주의가 더 무섭나?
미국에서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을 살았던 경험에 의하면, 미국도 내부적으로 완전 부패하여 가나안화 되었고 동성애 합법화로 그 부패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언제 폭삭 주저 않을지 모른다고 본다. 중국은 어떤가? 공산 독재 감시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우한을 종교 시범지구로 정하고 48개 교회당을 강제 허물거나 폐쇄시키고 교회 십자가 종탑을 만인이 보는 중에 불질러 하나님을 능멸하였다. 그 결과가 우한 폐렴 아니겠나?
서울에서도 유사하게 교회예배를 강제 폐쇄하는 신성 모독적인 공권력 행사를 마다 아니했다. 사회주의 세력은 교회 타도를 근본 목표로 정하고 때만 기다리고 있다는 정황이 여기 저기서 나타난다. 한국의 교회는 이제 내부적으로 타락하여 사회를 주도하고 소망을 주기에 힘들어 한다.
미국을 대신해서 중국이 조만간 세계를 주도하리라는 전망에 동의할 수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공산사회가 민주화되고 안정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탈바꿈한다면 중국이 세계 지도국으로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지만.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세상은 암울하기만 하다. 소망이 없다. 오직 기도에 몰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능력을 힘 잆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일, 그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세계사의 미래
제 6부 인류 역사의 종말과 영원시대
재림과 심판
재림과 종말과 연관하여 비성경적인 온갖 소설같은 허구적인 해석들이 난무한다. 그런 해석들의 중심에는 세대주의 신학이란 그릇된 해석체계가 자라집고 있다. 예컨대, 7년 대환란이라든가, 지금의 유럽 공동체가 계 13장의 짐승으로 상징된 적그리스도를 산출한다거나, 그 환란의 시대에 666이란 짐승의 표는 전자 확인증 곧 베리칩이라 불리는 컴퓨터 칩을 몸에 이식시키는 일이라고 하거나, 소련이나 그 동맹이 이스라엘로 진격하고, 중공의 2억의 군대가 유브라데 강을 건너 이스라엘로 향하는, 무서운 첨단 무기들의 총 집합 경연장 같은 냄새를 풍기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소설적 묘사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사실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허구적 가설들에 불과하다.
아마겟돈 전쟁이란 기본적으로 말해 교회와 사단의 세력 간에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이다. 하늘로부터 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번 소리를 발하시면 원수들은 끝장이 난다. 그것이다. 거기에 무슨 핵무기가 미사일에 실려 날아가는 시나리오는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 (=곡과 마곡 전쟁)
미사일과 핵 전쟁이 아니다. 아마겟돈 전쟁, 곧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선과 악의 최종 대결, 곧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단의 세력의 대결은 인간이 발명한 최첨단 무기들의 경연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번쩍" 하는 순간에 악인의 궤멸로 끝장날 초자연적 전쟁이다. 아마겟돈 전쟁의 좋은 선례는 주전 701년에 있었던 앗시리아 산헤립 왕의 예루살렘 침공에서 볼 수 있다. 그 때에 앗시리아 대군이 유대 왕국의 46개 성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만 새장 안의 새처럼 유대의 히스기야 왕을 포위했다고 자랑하는 산헤립의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전쟁의 결과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산헤립의 대군을 일순간에 쳐서 궤멸시켜 송장으로 만들어 버린 앗시리아 대군의 순간적인 궤멸 패배였다!
주님이 백마 타시고 하늘 군대와 더불어 공중에 나타나시는 순간 (이런 묘사가 계시록의 환상적 성격에 비추어 볼 때에 실제인지는 의문시 되지만) 악인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무엇을 싸울 것도 없고 자실 것도 없다.
재림
재림의 징조를 말할 때, 흔히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언급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 24:32-34)
통속 신학에 의하면,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의 상징이기에 무화과 나무 잎사귀가 무성해 지면 종말이 임했다는 징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 세대 안에 이루어지리라고 하셨기에 이스라엘이 왕성해진 때부터 곧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면서부터 한 세대 안에 종말이 임한다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1978년도인가 조용기 목사가 한 세대를 50년으로 계산하여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한 해) + 50년 = 1998년이 종말의 때, 주님의 재림의 때라고 설교하기 시작한 이래로 각종 강연이나 설교나 책들을 통해 강조하더니 1998년이 지나고 거짓 선지자로 아니면 그릇된 해석자로 판명이 났다.
이제 사람들은 날짜를 늦추기 위해서 한 세대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에서 보듯 (창 15장) 100년으로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홍도 목사). 1948년 +100년 = 2048년. 그렇다면 재림은 지금부터 35년이 남은 셈이다. 그 전에 재림하신다면? 아니면 그 후에 재림하신다면 김홍도 목사도 역시 가짜로 판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다. 틀린 해석이다. 왜냐하면 아예 원천부터 해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을 다시 보아야 한다. 특히 마 24장과 병행기사인 다른 복음서의 말씀을 비교하면 무화과를 이스라엘로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눅 21:29이하를 보라:
눅 21: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여기에 보면, 무화과 나무만 아니라 모든 나무를 보라! 고 하신다. 싹이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무화과만 아니라 모든 나무들에게서 우리는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상식을 말씀하고 있다. 결코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하면 이루어 질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그 당대를 기준하여 한 세대 안에 그분의 예언이 모두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이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파멸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도 역시 주후 70년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인가? 라고.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그렇다. 그분의 예루살렘 심판을 위한 임하심이 종말론적 그림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면,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의 바벨론을 치는 설교의 한 구절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사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10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11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12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1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이것이 주의 날에 대한 예고인데, 우주의 와해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예언했다. 그렇다고 이사야가 판단 착오를 했다, 예언에 실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당대에 바벨론이 지녔던 세상적 의미, 무엇보다 이스라엘과 이웃 나라들에게 대하여 가졌던 절대적 지위의 몰락이 우주적인 의의를 가진 양 과장했고, 우주적 파멸의 규모로 그려내었을 뿐이다.
부활
씨를 심으면 썩지만 새 싹을 낸다. 생명의 씨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죽어 흙으로 분해된 인간의 몸일지라도 하나님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 때 입을 부활의 몸은 썩을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 욕된 몸이 아니라 영광스런 몸, 약한 몸이 아니라 강한 몸이고, 육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과 뼈를 가지셨고 구운 생선도 드셨다. 그렇기에 부활한 몸은 시집 장가는 아니가고 지상의 육적 관계도 사라지지만, 현재의 육체를 가진 몸과 질적으로 다르지만 뼈도 살도 없는 그런 유령체가 아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천사들이 지닌 그런 몸인지 모른다. 각자 나이들면 늙어 추한 모습이 되지만, 부활한 내 몸은 이팔 청춘 곧 16세나 18세 청춘의 모습으로 변화되리라.
심판
심판은 불신자를 영원 지옥행으로 선고하는 심판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믿는 성도들의 믿은 이후의 행위 심판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 상급과 기업을 받을지 아니면 책망과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지 결정될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해서 철저한 구원과 주님이 내게 요청하시는 바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 그 마지막 심판의 날을 대비하는 것이 지금 성도들의 지혜이다.
영원 세계 (신천신지)
신천신지
두 모델이 성경에 제시되었지만, 둘은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보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 저주가 제거된 회복된 세상 (롬 8:19-22, 사 11:6-9)
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2) 옛 세상의 불 태움과 새 창조된 세상 (벧후 3:10이하)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지금 현 지구가 불로 심판을 받아 (벧후 3:10이하) 새로운 모습으로 (롬 8:19이하) 리모델링할 것이라 본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현 세상, 곧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모두 파괴시켜 버릴 이유가 없다고 본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 홍수를 통해 세상이 파괴되어 버렸다고 언급했다 (벧후 3:6 ἀπώλετο, apollumi 동사). 여기서 사용된 "아폴루미" 동사는 "파괴되다"를 의미하는데, 구약의 헬라어역인 70인역본에서 창 18:24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파멸을 묘사할 때도 나타난다. 여러 경우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소돔과 고모라 성은 완전 소멸되었다. 하지만, 노아 홍수로 파괴된 현 세상은 대 격변을 통해 새롭게 되어 현재까지 인간을 위한 삶의 무대로 기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예에서 드러나듯, 현 지구를 하나님은 이전에는 홍수로, 이제 곧 불로 새롭게 리모델링 하시고 거기에 우리 구원받은 자들이 영원히 거주할 신천신지를 제공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천국에 거하는 앞서 간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부활, 최후 심판 등의 사건들과 함께 이 지상 신천지에로 부활의 몸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이 지상에 얼마나 많은 인구가 거주할지 아무도 모른다. 간증들에 의하면, 구원 받는 자의 비율은 1천대 1이라 한다. 오늘날 인구가 70억이라면, 7,000,000,000명에서 1000분의 1로 축소시킨다면 700만명이 된다. 1세대를 50년이라 치고, 현재 기준해서 50년간 7백만이 구원받고 나머지는 죄 가운데 지옥행으로 떨어진다.
1500년대에 한국의 인구는 500만 정도였다라고 하는데, 그 때 5,000,000에서 1000분의 1로 축소하면, 5천명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 조선에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다. 그래서 1명도 구원자는 없었다. 오직 유럽에서 구원자가 있었고, 1300년 유럽인은 대략 9천만 정도였다 추정된다. 그러다가 흑사병의 유행으로 1400년에는 5천5백만으로 줄었다. 1500년도에는 5천만, 1600년도에는 8천만으로 약간 상승했고, 1700년에는 8천5백만, 1800년도에는 1억 2천만으로 증가했다 (한 연구에 근거한 것이므로 정확한지 여부는 불문하고). 그렇다면, 1500년도에 유럽 5천만 (50,000,000) 인구 중 1000분의 1인 5만명이 구원 받았다. 1600년도에는 8만, 1700년도에는 8만 5천, 1800년에는 12만 명 등이 구원 받았다. 사람이 죽고 나고 하기 때문에, 1세대를 기준해서 이런 식으로 구원 받은 자를 계산한다면, 기독교 복음이 신대륙에 전해지고 다시 아시아권으로, 아프리카로 전해진 기간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므로, 구약 시대 이스라엘 인들 중의 구원받은 자들과 신약 시대 구원 받은 자들을 다 합산한다 해도, 지구가 너무 좁을 정도로 복작거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현 지구가 신천지로 변화되어 내가 그곳에 거주한다고 한다면, 나는 기업을 얻어야 한다. 그 기업은 각자 행한대로 주어질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전도하고 충성 봉사한 그 일들에 근거해서 기업의 양이 결정된다. 그 기업은 토지와 집, 면류관 영광 등이 될 것인데, 이 신천지 영원 시기에 사람들의 모습은 죄와 저주가 사라지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세상이며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을 입고 시집 장가 가는 일도 없다. 하지만, 엄연히 기업에서 빈부 격차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진 타다 만 장작 막대기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런 자들은 영원히 신천지에서 아무 기업도 상급도 없이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리고 영적 거인들이 지날 때마다 허리를 굽히게 된다고 한다.
지금 부자들이 부동산 투자를 하여 금 싸라기 땅을 많이 장만해서 유산으로 자식들에게 전하지만, 재림 이후 신천지에서 토지 소유 상황은 완전 변할 것이다. 눅 19:12이하 므나 비유에 의하면, 열 고을 권세, 다섯 고을 권세, 그리고 죽임 당할 자 등으로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현재 지구처럼 5대양 6대주가 있을지 아니면, 달리 변화될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전체 지구는 신천지 상태에서 모두 새 예루살렘으로 화한다. 온 지구의 낙원화라 할 수 있다 (계 21장, 사 65장). 거기에 생명수 강이 흐르고 생명수 나무가 실제로 존재해서 우리가 마시고 먹을까? 정말로 황금 보석의 세상일까? 정말로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딩굴고 아이들이 독사굴에서 장난치는 세상일까?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상징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문자적으로 그렇게 될지. 다만 현 저주와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은 사라지고 영광이 충만한 세상,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황홀경의 세상일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거기에도 차등 상급제가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