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구름기둥과 불기둥

중일사랑 2014. 8. 31. 10:13

구름기둥과 불기둥

(출 12:37-42)


여기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그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홍해 앞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굽의 고센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었지요.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출애굽기 1장이 생생하게 보도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피라미드나 왕궁을 건축하는 일이었겠지요. 성서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출 1:14) 바로는 급기야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아이들 중에서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모든 산파에게 내렸습니다. 끔찍한 명령입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을 안고 살게 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사람은 개인이나 민족이나 모두 극도의 고통은 잊지 못합니다. 이것이 결국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제삼세계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 .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표에 대한 확신과 내적인 정체성만 명백하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별로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준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거기에 가야할 이유가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약속인데, 그들에게 그게 왜 분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성서 기자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나안은 별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못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던 고센은 나일강 유역의 기름진 땅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센이 좋았습니다. 그런 것만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갈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자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머물러 있는 한 자유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비록 척박한 땅이지만 자유가 보장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어느 쪽에 더 마음을 두었을까요? 자유인가요, 물질적인 풍요인가요? 일반적으로는 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비록 궁핍하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에서만 이스라엘 민족이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으며, 그럴 때만 하나님의 민족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모세와 그를 신뢰하던 몇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가나안 땅으로 가야한다는 목표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서, 또는 애굽의 학대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을 뿐입니다.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도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출애굽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게 아닙니다. 당시 애굽에서 학대받던 여러 소수민족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광야에서 떠돌이로 살던 크고 작은 종족의 이합집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그 당시 근동에서 살던 하층민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광야생활에서 단일대오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먹을거리와 물이 부족할 때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이럴 바에야 애굽에서 살던 때가 더 좋았다고 민중들을 선동했습니다. 아주 심각할 때는 내전과 비슷한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모세는 한나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출 32:28) 일벌백계 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은 사분오열의 상태였습니다.

본 문의 상황이 어떤지를 저는 앞에서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둘째, 출애굽 초기에 벌어진 상황이 예측에서 어긋났습니다. 셋째, 가나안 땅이라는 목표에 대한 확신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넷째, 그들의 정체성이 서로 갈렸습니다. 정신무장도 시원치 않고, 내부 결속력도 희미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를 횡단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션 임파씨블’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이 당도한 곳은 홍해 앞 에담입니다. 그들은 지금 배수진을 친 격입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홍해가 버티고 있고, 뒤로 돌아가자니 블레셋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보따리를 싸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당시에 모세도 불안하고 백성들도 불안했을 겁니다. 그들이 놓인 상황만 놓고 본다면 독안에 든 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바로에게 임한 열 가지 재앙과 같은 그런 확실한 증거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군지는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익명의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주 자연스럽게 민중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져나갔을지 모릅니다. 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거기서 다시 용기를 얻을 수 있었겠지요. 한번 해보자는 결의를 다질 수 있었겠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화산활동입니다. 낮에는 화산의 구름과 화산재가 분명하게 보였고, 밤에는 용암이 쏟아내는 불꽃이 보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그것보다 더 장엄한 광경은 없었을 겁니다. 산꼭대기에서 짙은 회색 연기와 불길이 솟구칩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고대인들에게 활화산 현상은 신의 현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야기는 크게 보면 시내 산 전승에 속합니다. 시내 반도 아래쪽에 자리한 시내 산은 모세가 처음 부름을 받은 호렙 산입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뒤에 시내 산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시내 산의 장면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9) 전형적인 화산 폭발의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본문은 결국 화산 폭발을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로 오해한 거냐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현상에 불과한 거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안 됩니다. 가장 확실한 사실부터 확인합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화산폭발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두 사실은 모순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 자연을 창조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이 세상을, 이 자연을 통치하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이 자연현상에서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통치행위를 인식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예수님이 증거다

오 늘 본문이 말하는 핵심이 무엇일까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기준으로 가나안 땅을 향한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은 광야에서 해나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날씨가 나쁠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활화산은 늘 그 자리에서 날씨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갈 방향을 지시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시 시내 반도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모세가 이 화산을 놓고 백성들을 이끌고 나갈 수 있었다는 건 하나님의 은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신앙경험을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화산폭발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들의 영혼을 집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집중한 백성들이었기에 만나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떨기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세계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며, 통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이런 신앙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을 떠 보십시오. 그러면 만나가 보일 겁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리 옆에 만나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영적인 눈을 뜬 사람에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로 보일 겁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상투적인 것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세상이 따분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미 주변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구원하신다는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엉뚱한 것만 찾아다닐 겁니다. . . (200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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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제시된 글은 "정용섭님"이 적은 글이라는데, 신신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예증해 주고 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시내산 화산 폭발 현상이었고, 만나는 자연적으로 거둘 수 있는 무슨 열매다! 이런 식의 성경이해인데, 정용섭님은 "영적인 눈을 떠 보십시오" 라고 한다. 소경이 누구에게 눈을 뜨라고 하는 것인가? 여기 제시된 정용섭님이 하는 해석은 거짓되다. 영안이 열려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들은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강조하였다. 아래는 권혁승님이 기고한 글이다. 적절한 성경 이해로 보인다:


사막의 위험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환경의 위험과 길이 없다는 위험이다.
첫째로, 사막은 인간을 도와주기보다는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적 환경이다. 무엇보다도 사막은 인간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절대 부족한 곳이다. 또한 사막은 미디안이나 아말렉과 같은 거친 민족들이 공격하여 괴롭히는 곳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사막 속에서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였다.
사막에서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의 위험을 대변하는 것이 사막의 기후이다. 사막의 낮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정도로 뜨거운 폭염이 계속해서 내리쬐인다. 웬만한 식물들은 그런 뜨거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고사해 버리고 만다. 반면에 밤이 되면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견디기 힘든 추위가 몰려온다. 사막에서는 한여름철에도 밤에는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지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런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끼치는 해로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시 121:6).
둘째로, 사막에는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길이 없다. 사막에는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있을 필요도 없다. 사막에 사는 유목민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태여 길을 만들 필요가 없다.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들에 의하여 길이 생겼다 하여도, 모래바람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잠시 생겼던 길도 순식간에 모래에 묻혀 사리지고 만다. 막막하게 펼쳐 있는 삭막한 모래언덕들, 그 위를 사정없이 내리쬐이는 살인적인 폭염, 그리고 무더위 속에서 일어나는 현기증은 가히 갈 바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만든다. 사막에서 길을 잃게 되면, 낮의 무더위와 밤의 추위 속에서 정신마저 혼미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신기루와 같은 환영에 사로잡혀 결국은 뜨거운 모래 속에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로 들어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시작하셨다. 이것은 사막에서 겪게 될 위험과 어려움을 막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배려이다.
낮의 구름기둥은 태양의 뜨거움을 차단시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극도의 건조함 때문에 햇빛만 차단하면 곧바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사막이다. 니느웨의 멸망을 지켜보기 위하여 성 동편에 자리잡고 있었던 요나에게, 조그만 박넝쿨은 심히 기쁘게 할 정도로 유익함을 안겨준 것이 좋은 예이다(욘 4:6).
불기둥은 화롯불과 같아서,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으로 인한 밤의 추위를 막아주는 난방장치였다. 마치 이스라엘 진영의 주위에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 놓은 것처럼 훈훈하고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열악하고 길 없는 사막에서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호와 인도였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나그네 인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머물러야 할 곳과 가야 할 방향이 정확한 성령 충만한 삶이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표상이었다. 기둥들이 머무르면 그곳에 자신들의 장막을 쳤고, 그것들이 다시 떠오르면 그 방향을 따라 가는 삶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밤과 낮의 구분 없이 인도하셨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그것을 특별히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출 13:21)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인도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 역시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은 총체적이고 전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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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14:19-20에서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라고 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구름 기둥, 불 기둥을 자유롭게 임의로 이동시키셨다는 것이다. 요컨대, 구름 기둥, 불 기둥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었고 실체였는데, 사막 광야에서 1) 길을 인도하였고, 2) 낮의 작열하는 태양 볕에서 지키고 3) 밤의 추위에서 보호하며, 4) 야수나 원수에게서 이스라엘을 지켰다. 주님이여, 오늘도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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