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의 홍수
오늘날 간증들이 홍수처럼 쏟아져서 너도나도 간증을 하는데, 간증은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증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그런데 간증 중에서도 환상 간증들이 많기도 하다. 이는 환상들을 보고 증거하는 것인데, 환상들은 꿈과 약간 차원이 다르긴 하나 꿈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환상은 아주 선명하고 수 십년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이다. 성경에서는 행 10장에 묘사된 베드로의 환상이 유명하다. 혹은 왕상 22장의 미가야 선지자의 환상도 유명하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꿈과 환상을 계시의 매개체로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꿈과 환상이란 하나님의 계시 수단으로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도 환상이나 꿈이 있는가?
있다!
그러나 환상들이나 꿈 같은 주관적인 체험들은 최종, 최고 계시인 성경 아래에 온전히 두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신약 성경 27권, 구약 성경 39권으로 마감된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런 환상들이 있는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우리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우리는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초대교회 시대로 끝났고 오늘날은 환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방언이나 예언, 기적들도 초대교회에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없다고 한다. 조직 신학의 교재로 널리 사용되는 루이스 벌콥의 Systematic Theology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데, 이는 옥의 티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교들인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나 시카고 무디 성경신학원 등에서도 방언이나 환상, 기적들은 초대교회를 끝으로 마감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옳은 것인가? 지금도 분명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기적과 (특히 불치병의 치유) 방언, 환상들은 분명 일어난다. 그런 초자연적인 것을 초대교회에만 국한 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기도하는대로 기도하는 곳에서 성령님은 강력하게 놀라운 일들을 오늘날도 행하신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오늘날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일들도 (신유나 방언, 예언, 환상과 꿈 등) 엄격하게 성경계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모두가 성령님의 역사라고 할 수 없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민감한 이들은 말하자면, 영적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천국 전사들이다. 그런 곳에는 지뢰밭이나 위험 환경이 많은 것이다. 다시 말해 마귀도 아주 근접해 있다는 의미이다. 마치 캄캄한 밤중에 형광등을 켜면 1초도 지나지 않아 환하게 어둠이 물러가지만, 스위치를 끄면 다시 1초도 되지 않아 캄캄 칠흑으로 변함과 같이, 아주 영적으로 경계가 근접해 있어서 환상이나 방언 혹은 신유의 은사가 있는 곳에는 마귀의 역사도 아주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걸어가는 사람은 발을 걸어도 넘어가지 않지만, 최고 속도로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누가 옆에서 살짝 발목만 걸어도 꽈당 나딩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민감한 자들의 근처에는 언제나 사단의 세력이 서성거린다고 보면 된다. 이 비유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성령님께 한 번 은혜를 받아 그분과 통로가 열린 사람에게는 마귀도 앗차 하는 순간에 순식간으로 통로를 들어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마귀의 역사를 늘 경계해야 한다.
필자의 경험에서
필자 역시 꿈이나 환상을 자주 보는데, 경험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환상이나 꿈이나 무조건 믿어서는 아니되고 성경의 사고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하고, 섣불리 믿어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내가 기도로 충만하고 은혜로 충만하고 말씀으로 충만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문제가 없지만, 기도가 약해지고 세속적 생각이 일어나면 그 때는 마귀도 역사할 기회를 노리다가 순식간에 틈을 타서 역사할 수가 있다. 그래서 환상이나 꿈을 다 믿어서는 아니되고 항상 말씀으로 분별해야 하고, 영분별의 은사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미국에서 귀국하려 할 때 여행 경비 부족으로 근심하며 부르짖을 때 주신 환상
한 번은 공부를 마치고 교회에서 2년 담임 목사로 사역한 후에 귀국 준비를 하는데 식구들의 비행기 표값이며 대한통운 시카고 지점에 부탁한 화물 운송비 등이 수 천불에 달하여 마음의 짐이 무거웠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잠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는데, 헬리콥터 한 대가 두두두두 하면서 태평양 상공을 날아 건너오는 것이 보이는데, 지금도 선명하게 눈 앞에 보이는 듯 하다, 그것이 내 앞에 와서는 내려 앉는데 땅에 닿자마자 파일럿이 훌쩍 뛰어내리더니 주유하는 파이프를 빼서 들고는 주유소 주유구에 갖다 대고 채웠다. 다 채워지니 다시 두두두두두두 하면서 올라가는데 줄이 몇 개가 내려와서 그곳에 있는 내 이삿짐들이 들어 있는 큰 나무 상자들을 (비행기용 수하물은 냉장고나 침대나 이런 것들이 통채로 들어갈 나무 목재로 가꾸?를 짠다) 걸어서 달고는 태평양을 건너 두두두두 날아간다. 어디로 가나? 하고 궁금해서 보니 내 고향으로 가는데 고향에서도 고향 뒷산 우리 논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그 산 등성이에 짐을 내리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다가 깨었는데 그 광경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것을 보고 깨어나는 순간 이제 이사할 비용은 하나님이 주셨구나! 라는 직관적인 이해가 들어왔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돌아갔다. 섬기던 교회에서 2500불을 주신다고 했고 기타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은 마련해 주셨다. 할렐루야.
-몸이 아파서 너무 곤고한 중에 산에 올라가 사흘을 부르짖을 때 주신 환상
그 때 배가 콕콕 쑤시고 밤마다 잠은 오지 않고 먹어도 소화는 되지 않고 배가 거북하고 - 건강에서 최악의 상태에 있던 때였다 - 학교에 까지 운전해 가는데도 얼마나 피곤한지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그런 때에 학교 여름 방학이 돌아와서 나는 연구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이제 가방을 싸서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응답을 받고 오겠다고 결단하고 집을 나섰다. 산에 올라가서 큰 바위 위에서 아침부터 부르짖었다. 이틀째 되는 날 그날도 반석 위에서 부르짖고 다음 날 새벽 4시가 지난 시각에 잠시 환상을 보았는데, 보니 큰 누렁 구렁이가 저기 앞 마루 아래 구석에 웅크리고 고개를 팍 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자 어디서 여자 소리가 나는데, "사단아, 너 싸우지 않느냐?" 라고 하자, 갑자가 이 누런 놈이 그 마름모 사각형 살모사 머리를 스윽 위로 드는데 내 눈과 그 놈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 때에 내가 어디서 났는지 창으로 그 놈의 목구멍에다 팍 꽂아서 좌우로 힘껏 좍좍 흔들어 대었더니 이놈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 창 끝이 파르르 떨리는데 환상에서 깨었다. 직관적으로 내가 치유 받았다는 확신과 감사의 눈물이 볼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제 산에 햇살이 비취는데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밤마다 작정기도하던 때에 받았던 환상
한 번은 저녁마다 철야기도를 하던 때이다. 내 몸에는 B형 간염이 있어서 늘 몸이 피곤했었다. 그래서 이 놈의 뿌리를 뽑고자 하는 데 약은 없고 해서 여간 걱정이 많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인데 환상이 나타나는데 뱀이 한 마리 죽어서 길바닥에 허연 배를 드러내고 있다. 내고 보니 손을 내밀어 그 놈을 집더니 그 옆의 도랑에, 풀이 우거진 도랑에 던져 넣었다가 다시 꺼내어 가위로 그 놈을 치니 두 동강이 난다. 그 두 조각을 집어서 그 풀이 우거진 도랑에 던져 넣고는 환상에서 깨었다. 그때 직관적으로 나는 치유 받았다는 확신이 들어왔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침 4시 30분부터 저녁까지 활동하고 철야기도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해도 피곤하지가 않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참으로 이 일에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 때 죽을 목숨이었는데 간염이 오래되면 간경화가 되고 간암으로 사망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구청 보건소에 가서 피 검사를 할 때마다 수치가 높아서 늘 걱정 태산이었고 의사는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고 나는 참으로 고민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놀라운 은총을 베푸시다니. 말할 수가 없다. 죽도록 충성해야지.
-어떤 기도 많이 하는 여전도사님의 환상과 연관된 이야기
이 분은 기도원에서 사역하는데 24시간 기도를 한다고 할 정도로 기도에 몰입했다. 그래서 설교를 들어보면 압도적인 영권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낄 정도이다. 그런데 이 분이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했다. 남자를 만난지 3개월 되었는데 자기는 남편 사별했고, 남자는 부인과 이혼한 목사님이라고 하고. 그래서 왜 그렇게 성급하시냐? 고 하고 가급적 결혼을 아니함이 좋아 보인다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결혼하라고 사인을 많이 주셨다고 한다. 그것들이 무엇이냐? 물으니 자기가 전혀 모르던 남자인데 환상을 여러 번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니 말하기 쑥스럽다고 하고서도 들려주었다. 내가 들으니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간주될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전도사님에게 "이는 하나님의 주신 환상이 아닙니다" 라고 잘못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고전 7:7-8을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근거로 그냥 주님을 섬기시는 것이 더 좋겠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확신에 찬 나머지 결혼했다. 그 후의 결과는? 차라리 혼자 지냈더라면 . . .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자기가 받은 환상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는 중에도 사단은 교묘하게 역사한다는 것이다.
환상 간증들에서 주의할 점
-666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환상 간증들
1) 한국 전쟁을 예언하는 여자 목사님인데, 그녀는 666 짐승이 표가 (계 13:18) 베리칩이라고 자신이 환상을 통해 여러번 확인을 했다고 간증하고 있다. 자기는 의사로서 여러 번 실험을 통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을 때만 확실한 것으로 어떤 가설을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환상을 한 번 두 번 받아서는 확신이 없었지만, 여러 번 하늘에 가서 주님을 만날 때, 666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자기 환상이 얼마나 주관적인 체험인지를 알았으면 한다. 여러 번 환상을 받았다고 그것이 실험실에서 실험을 여러 번 해서 얻은 결과처럼 확실하다고 믿을 것인가? 그런 식으로 환상의 신빙성을 확인하려 하지 말고, 그 환상이 기록된 객관적 계시인 성경에 비추어 적절한가? 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상이나 꿈은 극히 주관적인 체험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특별계시로 주어진 성경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 비추어 모든 꿈이나 환상은 검토되고 검증될 때 확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아무리 사도 바울이라 하더라도 내가 경험한 바를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계 13장에 대한 해석은 만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개연성 있는 해석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 짐승의 표라는 666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완전수 7이 조합된 777에서 하나가 부족한 그럴듯 하나 진짜는 아닌 마귀의 모방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이마에 표를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표시를 해서 심판을 면하게 하시는 방식인데, 즉 계 7장이나 (3절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겔 9장에 그 표를 치는 환상 계시가 나타난다. 환상들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인데 그것을 평이한 직설법 문장으로 바꾼다면, 엡 1:13, 4:30이나 다른 구절들에 말씀하듯 성령님으로 인을 (도장) 친다는 (찍는다) 의미이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기 소유물로 보증하는 표시로 이마에 표시를 한다는 환상 만화는 성령님으로 도장 찍어 우리를 자기 소유로 보증한다는 말씀과 같다. 이는 아주 영적인 사건이고 세상의 물리적 수단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귀도 자기 소유물로 독사의 새끼들에게 표시를 하는데 그것도 역시 영적인 표시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어떤 물리적 수단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모친의 귀신을 받아 무당을 6, 7년 하다가 이제 예수님을 영접한 어떤 이의 간증을 듣는데, 아! 하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내용인 즉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가끔 점을 보러 오는데 그 사람들은 오른편 어깨에 십자가 금빛이 반짝인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쟁이는 교회를 잘 다니면 된다고 자기가 권면해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 십자가가 더 크더라고 했다. 이런 일도 있나 싶은데 여러 무당들에게 한 번 물어 볼 일이다. 과연 자기들 눈에도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분별이 되는지를.
앞서 언급한 그 여자 목사님이 자기가 환상을 대여섯번이나 보면서 베리칩이 확실하다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는 이는 아닌 듯 한데, 자기 주관적 경험을 가지고 객관적 최종 계시이자 최고 권위인 성경을 대체하려 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천국 지옥 간증들에 묘사된 바는 상징적 그림에 불과하다
기타 여러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환상을 보았네 하면서 천국 지옥 간증을 한다고 하는데 내가 들은 천국 지옥 환상 간증들 중에서 박영문 장로, 박용규 목사, 강도환 집사, 구순연 집사 등은 분명한 듯 하고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다. 기타 나머지 사람들은 기억도 잘 나지 않거니와 내용이 정말 하나님의 주신 것인지 확신도 없다. 그런데 이들의 환상 간증들에서, 하늘 나라에 각기 자기 집이 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이 지상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는지 여부를 통해 크고 아름답게 지어진다는 것, 천국에도 노숙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기 집이 없어 꽃밭에 살거나 공동 건물에 공동생활 하는 경우), 천국에도 변두리가 있고 서울 새 예루살렘이 있다는 것 등등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간증자들은 자기들이 본 그 보석으로 지은 천국 집에서 작은 금덩어리 하나만 가지고 지상에 왔어도 부자가 되었을 것인데 라고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본 것들이 실체인 양 착각을 한다. 단언컨대, 성경에 기록된 이상의 세세한 내용이나 기타 주관적인 모습들은 결코 신뢰해서는 아니되고, 더구나 자신들이 보았다는 그 환상들을 정말로 천국에 가면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가령, 계 5:6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어떤 신학교에서 여러분 우리 주님은 현재 하늘에 어떤 모양으로 계신지 아십니까? 바로 일곱 눈과 일곱 뿔을 지니고 털이 복실복실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아멘? 이라고 하면 아멘! 이라고 크게 응답한다. 아니다. 환상이란 것은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지 아니하고 어디까지나 만화나 애니메이션처럼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기억해야 한다. 일곱 뿔은 평이한 말로 바꾸자면, 마 28:18이하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주님의 전능하신 권세를 상징하고, 일곱 눈은 심장 폐부를 감찰하시는 그분의 전지하심을 상징하는 만화 그림이다. 그리고 어린 양으로 그것도 죽임을 당한 흔적을 지닌 어린 양이라는 것은 그가 우리 죄르 위한 대속제물로 죽임 당했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만화 그림인 것이다.
이렇게 환상을 매개체로 한 묵시문학은 상징성을 특징으로 한다. 상징적 그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계시록 4-22장을 모두 해석해야 한다. 가령 계 21:10이하에서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이런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도 실체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 아니라,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만화 그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그림은 구약의 여러 곳을 근거로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10절은 에스겔이 40장 이하에서 묘사하는 그 환상 성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12절의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들이 문들 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과 13절의 성벽의 12기초석 위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이 성이 곧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12지파 이름은 구약 성도들을 상징하고, 12사도들은 신약교회 성도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곧 모든 교회 성도들의 이상화된 모습이 곧 새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그 곳은 동시에 성도들의 영원한 처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성도들이 거할 처소라고 해도 실제로 묘사된 그런 보석들로 지어졌다는 말이라고 하기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다.
특히 이 성은 정방형인데 (16절) 이 성의 성벽 두께가 144규빗이나 되고, 그 성의 길이, 넓이, 높이가 각기 12,000스타디온이라 했다. 킬로로 환산하면 길이, 1스타디온은 185미터로 계산해서, 넓이 높이는 각기 2,220킬로 정도 된다. 성벽 두께는 144규빗 x0.45미터 = 64미터 정도. 새예루살렘은 정방형으로 구약의 지성소라는 암시를 주고 최고의 안전과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이라는 상징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다음 그림을 보라.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지구와 비교하면 이런 정도의 비율이 된다. 이런 곳의 성벽 두께서 64미터나 되는데 그 안에 갇혀 살 것인가? 그런 곳이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구약 지성소를 근거로 한 상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화 그림 환상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란 메시지이다.
23절의 사고는 사 60:19-20을 반영하고, 26절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는 이 성이 완성된 교회의 이상을 묘사하는 만화 그림임을 잘 보여준다. 땅의 왕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될 때 저들은 자신들의 모든 보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경배하게 되리라는 것인데 지금 신약시대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시 72:10, 15; 학 2:7-9 참조).
요컨대, 환상들의 내용은 상징적 메시지를 담은 만화요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므로 실체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환상들은 같은 실체에 대하여도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혼란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성경에서 겔 1장과 계 4-5장의 네 생물들은 겔 10장에서 그룹 천사들로 확인되는데, 겔 1장과 계 4-5장의 네 생물 모습이 다르다. 왜 그런가? 전승들의 차이인가? 그것은 환상을 경험하지도 못한 비평가들이 자기 머리로 지어낸 설명이고, 메시지가 다르면 환상 그림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겔 1장에서 네 생물은 각기 한 몸에 네 얼굴이 있는 모습이라면, 겔 10장이나 계 4-5장에서는 몸 하나에 얼굴 하나의 형상이다. 이런 다른 생물 그림은 다른 메시지가 그런 환상들을 통해 에스겔과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해석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하늘에 갔다 왔고 지옥에 갔다 왔다 간증하는데 다 다르다. 혹자는 자기가 보니 아담은 지옥에 있더라 하고, 혹자는 천국에 있더라고 한다. 누구의 말이 옳으냐? 환상은 저마다 다르고 따라서 잘못하면 현실과 성경을 무시하는 잘못에 빠지거나 교회의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교회의 혼란 방지를 위해 방언, 환상, 예언을 금해야 할까?
기억할 것은 잠 14;4의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말씀이다. 환상들이나 방언 예언이 환란을 야기할 위험이 있으니 무조건 금지하자고 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그렇게 할 경우 성도들은 영적으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사할 위험이 크다.
그래서 영들 분별력이 요청되고, 그리고 말씀 계시에 모든 주관적 체험들을 복종시킨다면, 성도들이 자유롭게 방언 기도하고 예언하고 환상과 꿈을 갖도록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 모든 환상들과 꿈, 예언을 받았다는 이들은 자신들의 것을 맹신하지 말고 말씀 계시에 비추어 세세히 분별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의 제목으로 먼저 삼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유포시켜 혼란을 야기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