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신학생들의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변들

중일사랑 2014. 12. 22. 16:07

교육부 인정 학점 은행제 사이버 서울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제기한 여러 질문들과 그에 대한 필자의 답변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일반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특히 서울 사이버 신학생들이라면, 36, 54번 질문에서 중간고사를 치른 후의 소감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시험문제가 예상을 빗나갔다는 것이라 했다. 시험 문제는 성경 내용을 주로 묻는 것들이고,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정한 시간 내에 모든 정보를 다 종합해도 제대로 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질문1: (안xx님)

교수님, 말라기 강의를 듣다가 예정설에 대한 강의를 잠시 다뤄 주셨는데 예정설이 좀 더 깊이 알고 싶습니다. 예지 예정설도 있고 여러 가지 설이 있는 걸로 대략적으로는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이러한 예정설을 신앙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고 전도를 하거나 어떠한 불신자를 인도 할 때 대부분 무조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여기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는 기도 하면서 그래도 또 계속 주님의 사랑을 인지 시키는 과정을 되풀이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예정에 따른 선택자들이 따로 있는 거라면 택하지 않는 자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는 건가요? 예정설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하고 싶고 신앙의 적용도 배우고 싶습니다. ^^

 

답변1:

좋은 질문이예요. 카톨릭이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가령 웨슬레 감리교 등) 칼빈의 예정론을 이단적이라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진리이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창조주 되심을 인정한다면 예정론은 논리적 귀결로서도 당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정론은 성경적 진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정론은 하나의 진리고 성경에는 여러 진리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진리에는 그 서야 할 자리가 있답니다. 가령, 밥은 밥그릇에 있을 때 적절한 것이지만, 밥알이 김치 그릇이나 다른 반찬 그릇에 몇 개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지저분하게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머리카락도 머리에 있을 때는 적절하지만, 그것이 밥이나 국 속에 한 가닥이 들어 있다면 얼마나 부적절합니까? 마찬 가지로 예정론도 성경적 진리로되 그것을 전도 현장에서 무조건 언급해서는 곤란합니다. 예정론은 예컨대, 엡 1장 첫 부분의 예정론의 문맥을 본다면 찬양의 문맥이지요. 즉 우리가 예정론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뒤돌아 볼 때 하나님의 선택과 이끄심이 분명 있었구나 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 마음은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내게 되고, 예정론은 찬양과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이것이 바른 예정론의 용법일 것 같군요.

롬 9장에서도 예정론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언급되는데, 이 부분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에 대한 논의이므로 찬양과 감사의 문맥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자주 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믿지 않고 배척해서 못을 박아 죽였던가? 왜 그들은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라고 자주 질문을 받았는데 거기에 대하여 롬 9-11장에서 구약으로부터 신약 자기 당대까지 구원 역사를 죽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작정, 예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롬 9-11장도 하나의 찬양의 주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롬 11장 말미에서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라고 자기 임의대로 인간을 예정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의 절대 주권과 예정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교 현장에서 왜 유대인은 메시아를 배척하느냐? 는 질문에 대하여 사도는 그렇지 않다, 오직 구원사에서 구원받는 자는 남은 자에 국한된다. 항상 그러하다. 과거 구약시대로부터 지금 나 바울 시대까지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의 원리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그 남은 자들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고 (롬 9:6-8) 선언하고 유대인의 미래 운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과 남은 자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예증하는데, 예컨대, 같은 아브라함의 자식들이었지만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 선택된 남은 자이고 이스마엘은 아니며, 똑 같은 이삭의 자녀들이었지만 야곱만 남은 자 선택된 자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사는 항상 선택된 남은 자만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 7천인의 경우에서도 들었고, 다음에 사도 바울 당대의 경우에도 그렇다고 하고 장차도 그러하리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고 토기장이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옹호합니다. 이것을 "어항 속의 금붕어" 비유로 설명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어항 속의 금붕어와 같이 자유롭게 노닐고 먹지만, 사람이 돌보아 주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그분의 선택을 받아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그분의 절대 주권에 비추어 본다면 너무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전도 현장에서는 "아, 내가 보니 당신은 선택을 받지 못한 것 같다!" 라거나 "전도를 받지 않고 저렇게 완악하니 하나님이 버린 사람인가 보다" 라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판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영혼의 선택된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물론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는 속담대로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해, 삶의 변화를 통해 그의 선택 여부를 간접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기다려 보아야 최종적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어떤 사람의 선택 여부를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는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정론은 요컨대, 감사와 찬양의 제목으로 구원 얻는 자들이 활용하고 선포해야 할 진리입니다.

그런데 질문 중에, "예지(豫知) 예정"(豫定)을 언급하셨는데, 예지 예정이란 롬 8:29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에 근거한 이론인데,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미 각 인간의 성격과 믿을지 여부까지도 아셨기에 (예지, 미리 아심) 예수님을 믿을 자들을 선택하셨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 진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미리 아신 자들이란 표현에서 '알다'란 말은 구약적으로 본다면 (히, 야다-) '선택하다,' '사랑하다' 란 뉘앙스입니다 (시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아신다 yd']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암 3:6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따라서 롬 8:29은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예정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웨슬레 파 사람들이 하듯),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 사랑하신 자들을 예정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알미니안 파는 (그 중에 18세기 웨슬레 감리교나 안식교도 들어간다) 이단인가? 교회사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지요. 그러나 오늘날 교리적으로 알미니안주의를 약간 자기 식으로 적용한 감리교회도 정통교회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5개 조항은

1. 구원이나 심판 날의 정죄는 인간 자신의 신앙이나 불신앙으로 조건지워진다

(Salvation and condemnation on the day of judgment) was conditioned by the graciously enabled faith (or unbelief) of man


2 속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적용된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믿는 자 외에 이 죄의 용서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속죄를 얻는다

(the Atonement is qualitatively adequate for all men, "yet that no one actually enjoys [experiences] this forgiveness of sins, except the believer..." and thus is limited to only those who trust in Christ)


3 인간은 스스로 구원의 은혜를 갖지 못하고, 자기 자유의지의 에너지도 갖지 못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뜻에 반응할 수가 없다.

("That man has not saving grace of himself, nor of the energy of his free will," and unaided by the Holy Spirit, no person is able to respond to God’s will)


4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선행의 시작, 지속, 완성이지만, 사람이 성령님을 거역할 수도 있다

(The [Christian] grace "of God is the beginning, continuance, and accomplishment of any good", yet man may resist the Holy Spirit; and)


5 성도들은 은혜를 통해서 죄를 저항할 수 있고,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은혜를 모두 상실할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는지는 보다 세세하고 고려해 보아야 한다

(Believers are able to resist sin through grace, and Christ will keep them from falling, but whether they are beyond the possibility of ultimately forsaking God or "becoming devoid of grace", "must be more particularly determined").

 

그러니까 알미니안주의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자유 의지를 활용해서 믿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믿음과 불신앙에 따라 (하나님의 예정이나 유기(遺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도 버림받을 수도 있다고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였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선택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은 모든 인류를 위함이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구원을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도 나중에 타락해서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알미니안들의 주장은 아주 합리적이지만, 인간 중심적 사고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의지도 지적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그러하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의 그 누구도 하나님이 부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믿었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선택된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시니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않습니까? 베드로나 안드레, 요한을 주님이 먼저 부르지 않으셨나요?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지요? (요 6: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도 하셨지요? (요 6:44, 65)


이제 칼빈주의 5개조를 제시한다면,

1. 인간의 전적 부패 (Total Depravity)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구원을 이룰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막 7:21-23, 렘 17:9, 롬 6:20, 3:10-12, 고전 2:14, 엡 2:3, 15, 요 1:11-13, 빌 1:29, 행 13:48, 엡 1:1-11, 롬 8:29, 9:9-23)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어떤 인간의 성품이나 선행을 미리 아시고 거기에 근거해서 선택하지 않는다)

(엡 1:1-4-8, 롬 9:11, 15, 21)


3.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는 오직 택한 자들만 위해 죽으셨다)

(마 26:28, 요 10:11, 15, 25:32-33, 요 17:9, 행 20:28, 엡 5:25-27)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이 택한 자들에게는 거역할 수 없도록 역사하여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롬 9:16, 빌 2:12-13, 요 6:28-29, 행 13:48, 요 1:12-13, 6:37)


5. 성도의 보존 (Preseverance of the Saints)

(택한 자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타락하여 배교하지 않도록 보존 보호하신다)

(요 6:47, 10:27-28, 고전 10:13, 빌 1:6)

 

등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칼빈주의 대신 알미니안주의 구원론을 따른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따른 것이고 언제 내가 타락해서 지옥 갈지 천국에 갈지 확신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정하셨고 그분이 붙드신다는 이 확신은 우리를 모든 시련에서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분을 찾아야 하고 기도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 노력은 그분의 선택과 최종 보존의 은혜를 전제할 때만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이 확실합니다.

 

질문자의 감사:

교수님 감사합니다.

한 학기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지식의 지경, 지혜의 지경 많이 넓혀 주신 덕분에 알고 싶은 것 마음껏 배우고 너무 좋았습니다.

또 뵙길 소망하며,,, 늘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읍니다.

 

질문2: (홍xx)

교수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로 생을 끝냈고 박태선은 장로 였지만 이단종교의 교주가 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시작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을 멸망 가운데로 끌고 갔던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믿는 우리가 무얼 교훈 삼길 원하시는 것일까요?

답변2:

예,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분의 은혜 안에, 사랑 안에 거하도록 우리의 최선을 다해 그분을 섬기고 헌신하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아요. 가룟 유다는 헌금을 맡았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고, 또 박태선 같은 경우는 오늘날이라면 온 세상을 흔들 정도로 놀라운 기적을 행한 사람이라는데, 얼마나 능력이 세게 임했으면 자신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스스로 하나님이라 했을까 싶은데, 그렇게 배교(背敎)하고 떨어져 나간 것을 보면, 우리의 사역에서 삶에서 정말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매일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지 시험해 보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선택을 받은 것에 대하여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 증거해 주시지만 우리는 그 증거가 매일 확신의 삶을 사는 재촉의 채찍이 되도록 해야 할 것 같군요.

 

질문3: (황xx)

우상 숭배와 각종 악행을 저지른 것은 므낫세가 한 일이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였기에 힘없는 백성들은 므낫세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힘도 없고 지위도 없으므로 무고함에도 왜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멸망시키시고 처벌하시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답변3:

질문의 요지는 므낫세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유다를 멸망시키신 것은 너무 과하다는 것인가요? 가능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유사하게, 우리는 아담이란 (그리고 그의 아내 하와) 한 사람이 타락했음에도 온 인류가 죄인이 되는 것은 너무 불합리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도 바울이 롬 5:12이하에서 전개하는 논리에 의하면,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로서 모든 인류는 그 아담 안에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사하게 한 분 그리스도의 순종이 모든 믿는 자의 순종으로 간주되고 의롭다함을 받게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이것을 대표의 원리라고 합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모두가 범죄한 것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한 가장이, 곧 어떤 가정의 아버지가 노름을 해서 빚을 지자, 빚쟁이들이 달려들어 그 집안의 가구며 심지어 집까지 몽땅 가져가고 가족들은 무죄하나 꽁꽁 얼어붙은 길거리로 내 몰리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한 사람 머리가 잘못하면 그에게 속한 자는 모두 망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후세인 한 사람이 잘못 결정해서 미국에 맞서다가 미국에게 이라크가 초토화되고 후세인은 제거되었습니다. 그 백성이 그를 지지했건 반대했던 간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백성을 대표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지고 백성도 그 지도자의 결정에 따라 운명이 엇갈립니다.

 

질문자의 감사:

솔직한 심정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해가 안된다! 입니다만 어떤 의미 인지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_^

 

질문4: (안xx)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공부를 하다가 영적개념에 이스라엘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올바른 지식인지 검증이 필요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겨 이렇게 질문 올렸습니다...

교수님, 이스라엘의 시작을 국가적 개념이기 이전에 에덴동산으로 보며 영적 개념을 보는 일부의 시각이 있는데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점을 미루어 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인 아벨을 가인이 죽인 행위는 악마의 계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사라지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믿음의 족보로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을 이루시는 과정을 보이신 말씀들은 이러한 관계가 영적인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이시는 영적 원리로써 구원의 길을 보이시며 방법을 알리시는 상징적 의미 라고 하는데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해석도 좀 더 깊이 알고 싶고 가인의 자손이 따라 있고 이러한 의인과 악인이 나누어 진다는 원리를 어떻게 해석 해야 하는 것인지, 이러한 부분과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 해야 하고 구원적 문제가 이분법인지도 좀 더 궁금해 졌습니다...

악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하려고 (아벨의 죽음 처럼) 틈을 노리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개념으로 위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견해에 긍정과 부정이 궁금합니다.

질문이 좀 방대하지만 창세기 강해와 구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료와 책도 권면 부탁드립니다. 교재로 사용 중이신 교수님의 저서도 열심히 참조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럼 늘 건강하시고 날이 많이 춥네요.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두손 모읍니다.

 

답변4: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에 감동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고 얻은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정도의 어원론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창 32:28), 그 이전에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원론을 따진다면 “사라 (sarah) + 엘”이고, “사라”는 “다투다”이며, “엘”은 하나님이므로, “하나님과 다투었다”란 의미입니다. 이겼다라는 의미는 창 32장에 묘사된 야곱의 얍복 강가에서의 천사와의 씨름 결과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는 어쩌면 성육신 이전에 사람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 32:28-30에 제시된 진술들을 보면 그는 분명 신적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민족과 결부될 때 의미가 있지, 그 이전의 에덴동산이나 가인이나 아벨 혹은 소위 원시사에서 (창 1-11장) 이스라엘 사고를 찾으려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스라엘을 너무 성경의 핵심적 근본적 사고로 간주하는 듯한 입장을 접하신 듯 한데, 무슨 책인지 질문을 하실 때는 자신이 본 그 책 이름을 언급했더라면 좋았을 법 했어요. 이스라엘은 분명 구약의 중심 주제이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역사의 흐름에서 원시사 이후에 족장사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야곱 이삭 등의 족장들이 선택되고 그 후손들이 애굽에서 자라 이스라엘 민족으로 발전하고 시내산 언약을 통해 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로 왕정시대를 통해 구약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추방 이후에 귀환하여 다시 새롭게 이스라엘을 재건합니다.

그런데 구원사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은 구약시대에 국한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세우셨는가? 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이루실 일을 위해 선택된 도구였습니다. 그것은 창 12:3의 약속대로 만민이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전체를 위한 일부”의 (pars pro toto) 선택이라고 하는데, 저주 하에 처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교사로 세운 것입니다. 선택은 의무를 동반하지요.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것은 저들이 특별히 타 민족에 비해 의롭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 목적이란 인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만 좋아하셔서 편애(偏愛)하고 저들을 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세운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자신마저 주변 이방나라들의 우상 문화에 물들어 결국 바벨론으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나중 추방지로부터의 귀환을 통해 새로운 믿음 공동체가 팔레스틴에 세워졌지만, 저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영적으로 쇠약해졌고 말라기 선지자 이후 주님 당시 세례 요한의 등장까지 선지자가 없는 영적 암흑 시대를 거칩니다. 메시아로서 주님의 등장은 구약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이 분명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사 49:6) 오셨지만, 그 회복의 방식은 혹자가 생각하듯 군사적 정치적 다윗 제국을 재건하여 열방을 정복하고 세계를 통치하는 그런 지상적 물질적 왕국 건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방식은 사 40:3-5의 이스라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말씀이 결국 신약에서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주의해 보신다면, 사 53장이 기술하는 대로 자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바침으로 (사 53:10), 많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사 53장의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은 바로 레위기에서 규정된 속죄제, 속건제 등의 대속 제사 제물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레위기의 제사는 결국 오실 메시아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을 예언한 실물 교육이었습니다.

여하간 주님이 이루신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분의 지상에서의 설교와 치유 사역을 통해, 그리고 본격적으로는 십자가 희생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준비되어졌고 성령 강림 후에 사도들의 설교와 전도 활동을 통해 시행되었습니다. 오순절에 무수한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교포들 그리고 이방인 유대교 개종자들이 주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본질상 영적인 것이고, 근원적인 것입니다. 근원적이라 함은 지상의 물질적 정치적 회복이 아니라 죄와 사단에게서의 해방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함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데, 이 회복에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열방도 참여합니다.

결국 신약 시대 전반을 통해 이스라엘 회복이 일어나는데 이스라엘 회복은 기존의 유대교 대신에 교회 공동체의 설립으로 진전됩니다. 교회는 주후 1세기 이래로 유대인들이 극력 복음을 반대 배척함으로 결국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이방인 중심입니다. 곧 절대 다수 기독인이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 교회들은 메시아를 믿는 유대인이라 합니다 (messianic Jews). 이 유대인 교회는 수적으로는 작지만 이들이 사실 구약에서 예언된 회복된 이스라엘, 남은 자들입니다.

롬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길게 논하는데, 거기서 초점은 오직 선택받은 남은 자들만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사의 원리입니다. 그 부분을 오해하여 주님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리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렇게 재림 직전에 살게 될 그 유대인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신약시대 전체를 통해서 있었던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사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감당했던 것은 구약에서이고 구원사의 흐름에 따라서 주님이 오신 이래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종족 인종 민족 구분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어 그분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에 대하여 한 마디 하자면, 가인과 아벨 이래로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들이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도 그런 두 갈래의 구분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롬 9-11장에서 지적하듯 똑 같은 아브라함의 자식들이었지만 이스마엘은 아니고 이삭만 택함 받은 약속의 자녀, 같은 이삭의 자식들이었지만 오직 야곱만 (에서는 제외) 택함받은 자녀, 곧 하나님의 택한 자녀였습니다. 그 이래로 엘리야 시대에는 오직 7천명의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시대마다 남은 자가 있었고, 신약시대에도 그러합니다. 유대인 중의 남은 자는 항상 구원에 참여했습니다. 앞으로 그러할 것이고, 재림 직전에 유대인 대부분이 대거 집단 개종하리라는 시나리오는 따라서 헛된 비성경적인 사고입니다.

참고: 다움의 블로거 '주님과 얼굴 맞댄 만남'에서 여러 이스라엘 관련 자료 참조하세요.

 

질문자의 감사:

교수님 감사합니다

 

질문 5:

교수님 절기 계산 하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교회에서 익숙하게 절기를 지내기는 하는데 날짜를 다 기억 못하고 그냥 목사님이 일러 주시는 대로 지내서요. 무지를 회개하며.... ㅠㅠ

교수님, 절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

 

답변5:

절기는 입추, 추분, 동지 등 24절기가 생각나게 하는데요, 히브리어에서 hag란 말 곧 정한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성소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거나 즐겁거나 슬프거나 지난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지키는 명절이었습니다. 영어로는 festival, feast라 (독 Fest; 불 fete) 번역하지요. 구약의 절기들로는 3대 절기가 있는데, 애굽에서의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유월절, 첫 곡식 보리를 추수하는 맥추절 혹 오순절, 그리고 애굽에서 해방될 때 광야에서 장막에 거하던 어려운 시절을 기념하는 초막절 등입니다. 그리고 주전 164년 안티오쿠스 4세가 더럽힌 성전을 수복하고 정결케 하여 봉헌했던 수전절은 (hanuka 봉헌절 捧殿節) 후대 유대교에서 명절입니다 (요 10:22).

이제 구약시대가 지나고 메시아 예수님의 오심으로 신약시대가 도래했지요. 구속사의 변천에 따라 이제는 신약 성도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 중심으로 절기를 지킵니다. 곧 성탄절, 부활절, 고난(苦難) 주일, 사순절(四旬節) 등인데요, 여기에 구약의 맥추절과 감사절을 (초막절) 지킵니다. 이런 신약 절기들은 사실 주님이 지키라고 명령한 말씀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사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에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고난, 부활 등을 기념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감사 주일은 구약 초막절이 가을 추수가 끝난 시점에 지킨 절기이므로 수장(守藏)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구약적 배경에 근거해서 미국에 건너갔던 청교도들이 추수 후에 감사절을 지킨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질문자의 후기:

감사합니다.

 

질문6: (채xx)

시편은 많은 노래와 고백들로 이뤄져 있는데 이 시편을 편집하고 다듬은 사람 혹은 공동체는 누구인가요?

 

답변6:

시편들은 여러 사람들이 개인적 경건생활에서 작사했거나 (많은 시들은 다윗이)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성전에서 예배용으로 레위인들이나 음악인들이 작사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런데 제2 성전 시기에 곧 바벨론 추방에서 귀환한 믿음 공동체가 이전의 시편들을 수집하고 혹은 스스로 작사하여 지금의 시편으로 배열하고 편집했을 것입니다. 그 때 가장 중심 역할을 하였을 사람들은 에스라나 그 당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질문7: (이xx)

구약의 제사법을 구분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시원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전제(奠祭), 요제(窯製), 거제(擧祭)도 제사 드리는 방법이 아니라 제사법인 줄고 어떻게 제사를 흔들어서, 또는 제사를 들어서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었는데 밝히 알게 되어서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동해 보복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정에 격앙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받은 만큼만 돌려주라는 말씀이라고 들었을 때 이해가 안 되었는데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고 재판정에서 제사장들의 공정한 심판에 대한 규례임을 듣고 이해가 되며 또한 깨닫게 되어 기쁨니다.

지도를 그려서 설명해 주시니 사해 동쪽의 에돔, 모압, 암몬 등의 위치도 말로만 들을 때보다 새롭게 다가와서 기억이 잘되고 구약공부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다려지는 시간이 되게 하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질문8: (박xx)

몇 달 간의 기도와 검토 끝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학문에 도전합니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하지만 교수님의 가르침에 최선 다해 열공 하겠습니다. 주님섬기는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 열심 내겠습니다,,,항상 수고하시는 교수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박xx 배상

 

답변8:

모세는 80세에 주님의 소명을 받아서 40년간 일하셨답니다. 젊은 청춘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항상 그러란 법은 없어 보입니다. 늦게 출발하셨어도, 최선을 다하시면 충성스런 일군이라 칭찬 받으실 것입니다. 아멘

 

질문9:

교수님! 이번 학기에 구약개론을 공부하게 된 김xx입니다. 구약 공부에 대해 신학 공부에 대해 너무 자세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상세하게 말씀해 주셔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사실 주변에 신학을 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고 또 쉽게 의논이나 조언도 구하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신학을 한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신학을 하다가 오히려 믿음을 떠난다고 애시 당초 만류를 합니다.특히 저같이 나이 먹은 아줌마 평신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매 과목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과목에서는 무엇을 최종적으로 배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는데 교수님의 지침서를 보면서 많을 것을 느끼게 되었고 또 신학에 대한 공부의 길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공부하면서 느낀 거지만 많은 사람이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냥 성경책 가지고 주일 예배만 (물론 아닌 분도 많으시겠지만)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제대로 주님을 알게 되면 어떻게 달라질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말씀해 주신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교재가 (구약개론 신학은 2011년에 출간되었음) 다음 주에 나온다고 하니 많은 기대가 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늘 강건하시길 기 드립니다.^^

답변9:

감사합니다. 신학교 들어갈 때, 목사님, 다닐 때, 장로님, 졸업할 때 쯤에는 집사님, 졸업한 후에는 빈정대는 평신도나 반-기독인이 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무서운 말씀인데요, 신학교에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신학이 말 유희로 흐르고, 여러 부작용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신학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기도하고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바로 되지만, 기도 않고 성경만 연구하면 머리만 발달해서 비판력만 높아질 뿐이고 교만해집니다. 그런 신학공부는 결국 신앙을 쓰러뜨리고 말 것입니다. 스탈린도 원래 신학도였고, 서양의 내노라 하는 철학자들도 신학은 많이 공부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없지요. 학문으로만 신학을 배우면 교회에 유익은커녕 해를 끼치게 됩니다. 원래 신학은 경건을 추구하는 학문이었는데 계몽시대 이후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여겨집니다. 늘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질문10:

성실한 답변 감사합니다. 구약 총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반론을 제기하고 엉뚱한 소리가지고 시비 걸고 하는 것들 보면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괜히 시비건걸 왜 배우나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고 그런 걸 책으로 읽으면서 공부하며 시간낭비랑 필요가 있나 싶어 괜히 신학을 시작 했나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말씀처럼 기도의 양을 늘려 갔더니 복잡 하던게 정리 되면서 다시 본래의 신앙관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요즘 많이 힘들어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신학을 시작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답변10:

말씀하신대로, 얼핏 보기에 쓸 데 없는 일에 시간 낭비가 많아 보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비생산적인 성경비판에 신경을 쓰야 하는가? 하면, 신앙이 없는 비평가들의 지적들에도 무언가? 귀담아 듣고 답해 주어야 할 필요가 분명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성경을 읽을 때 생겨나는데 그것들이 때로 말 같지 않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면서 점점 성경을 깊이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많은 부분을 신화네, 전설이네, 민담이네, 동화네 하면서 역사성이 없는 고대인들의 오랜 기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민담 혹은 사게 / 사가 (Saga) 라는 사고는 현대 비평학자들의 사고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간주됩니다. 그런 구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승) 시기에 전해진 이야기 형태들이나 그것들이 전해진 상황 등을 추정해서 현재 본문은 이렇지만, 이전의 원래 모습은 이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그것이 작은 형태를 찾을 때는 양식 비평이라 하고, 보다 큰 이야기 덩어리들의 변화를 가리킬 때는 전승사 비평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비평적 접근법을 듣다보면 머리가 돕니다. 불신앙의 덩어리들을 다루는데, 그것도 학문이라고 고생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기도로 성령님의 감동을 받는 자만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굳게 서시기 바라고요,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잘못된 것을 배척하는 능력을 기르고,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알고 증거하기 위함이랍니다.


질문11:

언약과 율법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거 같은데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변11:

언약을 (계약) 체결하면 쌍방 간에 지켜야 할 언약 조항들을 기록한 언약 문서를 각자 한 부씩 갖게 됩니다.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서는 출 20-23장이라면, 시내산 언약의 갱신인 모압들 언약의 언약서는 신명기서 전체입니다.

그런데 언약 조항들을 다른 말로 율법이라 (토라) 하기도 합니다. "토라"라는 히브리어는 가르침, 법, 교훈 등의 뉘앙스를 갖는데, 우리가 율법이라 흔히 부를 때, 그것은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하고, 모세 오경의 모든 법규들을 총칭하기도 합니다.

율법이란 그냥 "법"이라 해도 됩니다.

 

질문12:

교수님! 레위기 23장 절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는데 초실절과 칠칠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는 추수에 관계된 것 같은데 어떻게 다른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또 한 가지 교수님 "소논문" 제목은 미리 게시판에 올려야 하는 건지요.

올려야 하면 언제까지 올려야 되는지요? 평안하세요.

답변12:

출 34: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77절은 히브리어로 "하그 솨부오트"입니다. 이 말은 "주간들의 절기" 곧 7 주간들의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부터 계산해서) 7개의 주간들 (7 x 7주 =49주간) 다음에 오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77절을 "오순절"이라고도 (五旬節) 하는데, 한어에서 순(旬)은 "열흘"을 의미하고, 따라서 "오순"은 5 x 10 =50을 의미하겠지요. 그래서 "오순절"이란 7 x 7 = 49일 다음 날 곧 유월절로부터 오십일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를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맥추의 초실절"은 (初實節) 77절을 기간이 아니라, 그 절기를 농삿일의 견지에서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밀 추수의 첫 열매를 거두는 절기란 의미입니다.

결국 칠칠절 = 초실절 = 맥추절 = 오순절 입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이름이 약간씩 달라졌습니다.

"수장절"은 다른 말로 초막절이라고도 하는데, 가을의 추수를 거두어 들이는 절기란 의미입니다.

참고로 2011년을 기준하여, 양력 4월 19일이 유월절에 해당되고 (유대 성력으로 니산월 15일), 양력 6월 8일이 오순절 혹은 칠칠절입니다 (유대 성력으로 시반월 6일).

 

질문13:

수업 중에 제사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우선순위를 말하시면서 제사를 드려도 된다고 말씀하시던데, 예배를 드려도 제사를 드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어떻게 조상귀신을 섬기는 제사를 드려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지요. 제사 드리는 것이나 불전에 가서 부처에게 절하는 것이나 다 같은 것 아닙니까? 생활 속에서 하나님 우선이 되어야 되고 죽은 조상을 섬기는 것은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답변13:

김xx님,

좀 황당하군요.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 누가 말했다는 것입니까?

고전 10:20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셨는데 누가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 말을 하였습니까?

확실하게 들으시고 다시 글을 올려 잘못된 지적을 수정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질문14: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개론부분이 너무 어려워 이해를 도우려고 따로 책을 살 수가 없어서 집에 있는 김정우역 구약총론을 읽고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읽어야 할 지, 무엇을 중심으로 읽어야 할지 알려주세요.

답변14:

제 생각으로는 지금 제가 하는 강의가 가장 쉽다고 생각이 되요. 김정우님의 책은 어렵기 마련입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른데, 제가 보기에 그분은 공대 출신으로 수학적, 기계적 조립하듯 신학적 사고를 조립하는데 탁월합니다. 거기에 기도로 녹인 말씀의 고기를 덧붙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재 체재로는 없으니 읽으면 무미건조하고 추상적인 이론들만 나열되어 있으니 어려울 수밖에요.

그 책의 저자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에 따라서 책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일단 강의를 잘 들으시고 어려운 책은 덮어 두시길 바랍니다.

 

질문15:

연xx님이 쓴 글:

8강 강의를 들으면서 그동안 궁금해 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벌하심이 다름에 대해 그 동안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알았고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는데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데 순종하지 않아서 벌을 내리셨다는 말씀, 법이 정해지기 전에는 그냥 들어 주셨지만 법이 정해지므로 그들이 순종했어야 했는데 순종하지 않으므로 벌을 내리셨다 말씀하시니 이해가 갑니다.

 

질문16:

귀한 강의 감사합니다.

49장 7절 말씀에서 제 소견에는 레위 지파를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말씀에 흩음을 이스라엘 가나안 땅 분배시에 48개 도성에 나누어 이스라엘을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레위의 흩으심은 역대하에 나오는 흩음이 아닌지요.

답변16:

보호 차원이란 무슨 의미인지요?

12지파 영지들은 각기 4개씩 자기네 성읍들을 레위 지파인들에게 내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 48개 성읍에 레위 지파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는데, 이는 레위 지파인들이 성직자 계층인지라 자기네 영지가 없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흩어진 레위인들은 전국 각처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를 행하였습니다.

레위인이 성직자 계층으로 성별된 것은 저들이 출 32장 우상숭배 사건 때 하나님께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출 32:29, 신 33:8-10). 헌신으로 성직자 계층이 되므로, 결국 48개 성읍에 흩어져 살게 되면서, 창 49:7의 저주가 축복의 상태로 성취됩니다. 즉, 원래 저주로 흩어져 살리라고 했지만, 후에 헌신을 통해 저주를 복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질문17:

교수님!

교회에서 접하는 구약과 다른 부분이 많아서( 깊이 있고 상세하여) 많은 부분에 귀가 쫑긋해 집니다. 강의 들으면서 궁금증이 생겼다가 또 답을 찾고 또 궁금증이 생기고 또 답을 찾고 그러면서 강의를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한가지, 계속 궁금한 것은 애굽에 있는 신들도 능력을 행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에는 비길 바가 아니겠지만 애굽인들이 단순이 우상 숭배한 대상들(신)에게도 능력이 있다는 게 왜? 그런가? 하는 궁금증이 계속 제 맘에 있어서 여쭙니다.

늘 강건하시고 오늘도 기쁨이 넘치는 하루 되세요^^

 

답변17:

고대 이집트 궁궐에는 (고대 동방의 왕실에서 그러하듯) 제사장-술객들이 있었는데요, 이들은 말하자면, 왕의 최고 자문관들입니다. 이들은 앞날을 예언하거나,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의 영적 의미를 해석하고, 나라의 운명을 점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들은 그런 예언이나 점술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대소사(大小事) 영적인 일을 책임지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모든 것은 신들의 역사로 간주되었으므로, 제사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출 7: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곧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다)

출 7:22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곧 나일 강을 쳐서 피로 변하게 함)

출 8:7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대로 이와 같이 하여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등에서 보듯 어떻게 그들이 이적을 행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출 8:18에서 "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 있은지라"고 했듯, 어느 차원 이상의 기적은 행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차원의 이적은 이집트 술객들도 자기들의 기만술이나 혹은 사단적 능력을 통해 행했지만, 어느 차원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 13장에서 유사하게 사단적 세력이 이적을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승려들이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질병을 치유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도사는 귀신처럼 잘 알아 맞춘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사단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단도 피조물인지라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습니다. 욥기서에서 보듯, 사단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욥을 치는 것도 사단이 어느 수준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인간이 이적이라 생각하거나 초자연적이라 생각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쉽게 생각하여, 귀신은 타락한 천사들로 사단의 졸개들인데, 이놈들은 한 마디로 보이지 않습니다. 능력이 아무리 없다 해도, 일단 인간이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인간에게 다가와서 넘어뜨리고 병들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단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보다 한 수 위인 것은 사실입니다.

요컨대, 이방 술객들이 어떤 이적을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은 기만술에 의한 것이거나 (마술), 아니면 사단적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질문18:

교수님 연속해서 듣는 중에 8강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비교하시면서 강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교회의 목사님의 설교내용도 포함) 만나와 메추라기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보니 만나와 메추라기의 사건은 무조건 축복이라고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축복으로 봐야하는지 아니면 징계로 봐야하는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답변18: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은 반석에 물이 나온 사건과 같이,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 동안 곤고할 때, 불평을 터뜨림으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사건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음료와 양식의 공급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고 나서 유사한 불평이 나타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공급이긴 하지만, 징벌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민 11:33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감사합니다

 

질문19:

교수님~ 귀한 강의 감사합니다

강의 중에 출애굽기 1: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역사 속에서 그 왕은 누구이며 애굽에서 바로라는 뜻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평안하세요.

답변19:

구약 족장(族長) 시대의 연대 확정은 여러 면에서 변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사를 전적으로 신뢰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 가족이 이집트에 내려갈 때, 성경 연대기에 의하면, 야곱의 나이 130세였고 주전 1876년에 해당된다. 이는 요셉이 이집트에 내려간 후 22년 만의 일이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 높여진 1885년부터 그가 죽을 때인 1805년까지 기간에 이집트는 12 왕조 시대로 (주전 1991-1786년), 세소스트리스 2세 (1897-1878년), 세소스트리스 3세(1878-1843년), 아메네메스 3세 (1842-1797년) 등이 통치하였다.

출 1:8 이하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자손을 박해하는 상황을 기술하는데, 그 왕이 요셉을 몰랐다고 하기보다, 요셉이 이집트에 행한 여러 일들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 봄이 좋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기술하길, 요셉에게서 받은 여러 은총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망각해 버렸다. 특히 왕이 다른 가문에서 일어나면서 저들은 이스라엘을 아주 학대하고, 여러 모로 핍박해 마지않았다 (유대인들의 고대기, 1권, 9장, 1절).

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이집트 12왕조가 끝나고, 새로 들어선 왕조의 왕으로 보입니다.

"바로"란 말은 이집트 신성문자에서 "큰 집"이란 (대궐) 의미였지만, 제 18왕조 때부터 시작하여 (주전 1570-1085년) 그곳에 사는 이집트 왕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가 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연속적인 연대 기술은 없었고, 단지 무슨 왕의 통치 몇 년 이런 식으로 각 왕의 통치를 기준으로 몇 년이라고만 남겼답니다. 이런 저런 왕의 목록들을 종합하고, 훨씬 후대의 역사기록 등을 토대로 오늘날 고대 이집트 역사는 대개 원시 왕국,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후대 등으로 구분 짓습니다. 성경대로의 연대기에 의하면, 요셉의 이집트에서의 생활은 중왕국 12왕조 시대에 속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20:

강의 듣다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어 질문드립니다. 창 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한 천사로 보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천사가 타락해서 이 땅으로 내어 쫓길 때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왔다는 말씀이신가요? 제가 알기로는 타락한 천사를 사단과 귀신으로 알고 있는데요.

답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주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욥 1:6, 2:1, 38:7). 그리고 창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 이유는 무엇보다 벧전 3:18-20, 유다서 1:5-6의 말씀이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서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의 날에 불순종한 타락한 천사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을 "영"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에 불순종한 "영"이라는 표현은 창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 외에 누구를 가리킬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오해는 천사는 결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로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를 듭니다. 그러나 천사가 결혼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니할 뿐입니다. 그렇게 보아야 할 이유는 유다서 1:6-7에서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하였지요.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 그 주변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라는 것은 6절의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선행사로 받습니다. 즉 천사들처럼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동성애 했다는 말입니다.

타락한 천사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가? 라는 의문도 있는데, 욥 1장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참석하지 않습니까?

천사가 지상에 나타날 때는 대개 눈부신 광채가 나는 흰옷을 입은 인간과 닮은 모습입니다. 인간도 타락 이전에는 아마도 그런 영광의 광채 옷을 입고 있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그런 것이 사라졌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찬가지로 천사가 타락할 때 그 영광의 옷은 사라지고, 인간처럼 나타났다고 추정합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그렇게 추정한다는 것일 뿐, 연xx님이 질문하신 것처럼, 타락한 천사는 사단과 그 졸개들인 귀신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귀신은 인간처럼 형체를 가진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로 이해할 때, 그 놈들이 귀신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람과 결혼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여기 본문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은 타락한 천사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결혼이라고 벧전 3:20이 (유 6, 7)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면, 이 타락한 천사들은 오늘날 더 이상 그런 악행을 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아 시대의 사건 이후로 (혹은 그 이후에도 몇 번 그런 사건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런 천사들의 반란은 영계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전 노아 시대처럼 사람의 딸들이 인간 아닌 어떤 존재와 결혼하는 일이 없는 것은 1) 타락한 천사들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2) 현재 활동하는 귀신들이 타락한 천사들이 아니라, 교회사를 통해 혹은 불신 세계 사람들이 종종 생각하듯, 죽은 자의 영이기 때문이라 추정해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사건의 범죄성은 천사들이 종(種)이 다른, 사람과 성적으로 결합하여 창조 질서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찾아야 합니다.

 

질문21:

교수님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재를 사야 하나요?

궁금해서 문의 드려요.

답변:

네 감사합니다. 교재(敎材)는 이제 선교횃불에서 출간 되었습니다. 양장에, 책은 최고로 잘 만들었다고 합니다. 페이지는 650페이지 이상인데, 용지 여백을 최소로 줄이고 최대한 용지를 사용하여 많은 분량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본인의 구약에 대한, 혹은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를 여기 한 권에 담으려고 고심한 책입니다. 저는 필자로서 모두가 구입해서 읽어 유익을 얻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강의를 들으실 때, 그 강의를 하는 이의 책은 필수로 구입하여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사상을 먼저 파악한 다음 강의를 들으면 글을 하나 쓰더라도 그 강사의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짚어 적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책을 팔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공부는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교수에게 배우고자 한다면 그가 쓴 책이나 글을 필수적으로 전부 읽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본전을 뽑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22:

안녕하세요 교수님.

다름이 아니라 창 10장의 70족속 설명하실 때 7과 10은 완전수라고 말씀하셨는데요. 7은 알고 있는데 10이 왜 완전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0이 왜 완전수인지 혹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10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천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할 때, 10의 3승인데, 거기서 ‘완전’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즉 문자적 1천년이라기보다, 묵시 문헌 곧 환상으로 영적 세계를 표현하는 환상 문학에서 1000이란 수자는 하나님께서 작정한 완전한 기간, 그 기간을 가리킵니다.

창 24:55에서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라

단 1: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등에서 10이란 숫자가 적어도 짧으면서도 완전한 기간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성경에 10이란 수자가 완전을 상징한다 라고 쓰여 있지는 않지만, 10이란 수치가 성경에서 나오는 구절들을 여러 모로 검토하면 ‘완전’을 상징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7도 마찬가지입니다. 7은 특히 창조의 날들 7일이므로 완전의 상징입니다. 6은 7에서 1이 빠진 수자인데 계 13:18에서 666은 짐승의 수, 곧 하나님을 상징하는 7에서 1이 부족한 수, 곧 하나님과 근접하려 모방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마귀의 수자입니다. 이것을 바-코드 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계시록은 상징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책에서 수자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나옵니다.

천년 통치란 (천년왕국) 사고도 계 20:4-6에서만 나타나는데, 거기서 1,000이란 수치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기간, 곧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 승천, 보좌에 왕으로 즉위하심, 성령 부으심 등으로 성취된 구속사의 사건과 함께 시작된 메시아 왕의 통치에 동참하는 기간이 그분의 구원 계획이 전부 완성되는 시기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곧 수치상 1천년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의 완전 성취가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의미입니다.

단 9:24-27에 언급된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역시 수자 상징법이 개입되고 있습니다. 70번의 주간들 기간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전 성취된다는 것이지요. 7이 완전수라면 그것의 10배에, 거기에 다시 7배수의 수자가 되니까요. 70 x 7일 (한 주간) =490일. 여기서 대개 1일을 1년으로 환산하여 490년 기간에 일어날 일로 봅니다. 그러나 490년은 수치상 정확하게 490년이라기 보다, 그 수치에 근접하는 년수들 기간에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단 9:24)

(1)허물이 마치며 (2)죄가 끝나며 (3)죄악이 영원히 속죄되며 (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5)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6)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등이 성취된다는 예언입니다 (단 9:24).
 

질문23:

신학공부가 처음이고 동영상 공부도 처음이라서 많이 두렵고 소심했었는데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많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잘 종합하여 내 주장을 제시하라. 글을 쓸 때의 주의 사항은 자기가 선택한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문제로 의식을 느끼며 성경본문을 읽고 묵상하여 생각하는 훈련을 제대로 해야 신학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답변:

그렇습니다. 과제물을 말씀한다면, 글 쓰는 훈련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한국과 미국 교육의 차이였고, 또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느낀 한국인과 외국인 학생들의 차이였습니다. 논술 훈련이라 하지요. 어떤 것이건 문제의식을 가지고, 왜? 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쓰야 합니다. 그리고 글은 논리의 비약이 없이, 증거를 꼼꼼하게 대면서 왜에 답을 구하는 자기주장의 글이어야 합니다.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논리학과 철학개론 같은 것을 배우는데 사실 1학년 때 배우지만 생각하는 훈련이 안된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과목들이죠. 신학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생각이란 기도와 말씀묵상입니다. 왜? 라는 질문을 가지면서 본문을 대하면서 부딪치는 생각들을 다른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 글 쓰는 훈련을 하면 좋겠다 싶어요. 자기가 보고 겪은 것들을 글로 기록하는 습관을 익혀두면 글 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질문24:

교수님 존경합니다.^^

컴퓨터와 친하지 않아서 글을 다 읽기에 조금은 무리였지만 궁금한 것도 많고 아는 것도 없어서 최대한 읽어 보았습니다.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이버 강의가 아니고 출강을 들으면서 교수님과 직접 면대하며 지도를 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성도 있으시고 학식도 대단하시고 기도도 많이 하시는 분이라 곁에서 지도받고 싶습니다.

암기력도 없고 지리에도 어둡고 지명이 나오면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걱정입니다. 교수님의 뜻하시는 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요.

첫 주 강의를 듣고 첫 과목을 잘못 선택했다 싶었습니다. 조금 쉬운 과목부터 적응을 해 나가야 하는데 남편권유에 의해 개론부터 시작했는데 ...교수님 좋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숙제 잘하는 법도 중요하지만 제 수준에서 개론을 잘하는 방법 알려주심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반갑습니다. 일단 강의를 찬찬히 들으시고, 이해가 어렵다면, 녹음을 해서 반복 들으시면 좋겠다 싶어요. 컴퓨터에서 나오는 음성을 녹음하는 것은 첨부한 소프트웨어 깔고 녹음하세요. 먼저 구약 개론 들으시는 것이 순서를 제대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잘 들어 두시면, 다른 모든 과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질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질문25:

교수님~

귀한 강의 감사합니다.

특히 강의를 듣기 전에 꼭 읽어보라고 하시던 "친절한 공부 안내서"를 읽고 많은 깨달음과 함께 큰 도전을 받습니다. 늘 기도하면서 교수님의 말씀대로 나의 가장 큰 단점들을 이번 훈련들을 통해 장점으로 바꿀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교수님, 질문 드립니다

총론강의 1중에 프톨레미와 셀류크스를 말씀하시면서 다니엘서 11장에서 북방왕과 남방왕의 싸움을 자세히 예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프톨레미와 셀류크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무엇을 참고하면 되는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답변25:

단 11장에서 묘사되는 남방 왕과 북방 왕은 지금으로 하면 이집트 왕과 시리아 왕인데, 주전 200년경에 이집트는 헬라 마케도냐 사람들이 세운 톨레미 왕조가 통치했고, 지금 시리아를 비롯한 이라크, 이란, 사우디 이런 광대한 지역은 역시 헬라 마케도냐 사람들이 세운 셀루커스 왕조가 통치했습니다. 같은 헬라인들이면서 이 두 왕국은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을 (팔레스틴)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 사건들은 주전 200년 어간에 일어났지만, 다니엘은 벌써 주전 530년경에 환상 중에 그 사건들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이런 역사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그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자가 기술하면서 마치 그 사건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환상을 통해 본 예언인 양 가짜 예언으로 기술했다고 말을 합니다. 비평가들은 신앙이 없고, 성경을 순전히 인간이 만든 문서로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26: (권xx님의 글)

교수님 솰롬!!!

성지순례로 7박8일 이스라엘만 다녀왔습니다. 3.22일~3.29일 8일간이었어요.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긴장은 정말 화약고와 같은 현실이었고 체류기간 동안 버스 폭탄테러도 있었습니다.

정말 잘 다녀왔습니다. 글로만 보던 역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어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성경의 박물관과 같았습니다.

사해 .유대광야 .감람산에 보는 예루살렘의 황금 성전은 묘한 서글픔을 주었어요.

베들레헴의 종파간의 출생자리. 골고다 길의 무슬림 상인의 상점들 등 상징이지만 아이러니 했습니다. 다큐영화처럼 회복과 용서를 간구 합니다.

일생의 가장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중간시험도 빠지고(추시) 일주일 수업도 빠졌네요. 죄송합니다.

열심히 할께요. 감사합니다.

 

질문27:

안녕하세요...교수님

유익한 수업 잘 듣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23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치료기간이 2달~3달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움직일 수가 없어서 수업듣고 과제를 이행하는데 불편사항이 많이 있습니다.

병원에 있어서 컴퓨터 이용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네요..

수업은 최선을 다해 성실히 듣기위해 노력할 것인데요....

혹시 미흡한 점이 있으면 선처 부탁드립니다.

답변:

그래도 수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들으시겠다는 그 의지를 높이 사고 싶군요. 그런데 정 사정이 불가피하게 어렵다면, 이번에 중단하시고 교무처에 말씀드려 다음에 다시 듣는 것도 (수업료는 다시 내지 않을 듯) 좋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자기가 빨리 가고자 한다고 신속하게 나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도우심이 우리를 크게 만드는 비결이 아니겠어요?

 

질문28:

안녕하세요 ~

저는 이번부터 처음 수업을 듣기 시작한 이xx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처음 배우는 것이다보니까

생각한 것보다 많이 어렵네요 ㅠ

그래도 교수님 강의를 듣다보면 배우는것도 많지만

은혜도 받으며 강의를 듣는것 같아 참 좋습니다. ^^

그런데 공지사항에 올려주신 친절한 공부안내서가 열리지 않습니다.ㅠ

과제도 그곳에 올려주신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답변:

첨부파일을 누르시면 pdf파일이 다운됩니다. 그것을 보려면 pdf 보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29: (유xx님의 글)

의욕을 갖고 시작하고 있는데 끝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현재 사역중이라서 그런지 도움이 많이 되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질문30: (박xx님의 글)

여러 번 망설이다 용기를 내 입학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도 해야 하고, 교회에서 봉사도 해야하고, 아이들도 아직 어려서...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주님 말씀

잘 배워보고 싶은 욕심에 용기를 냈습니다~~

교수님과 여러 학우님들... 반갑습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시는 삶이 되시길 기도하며..^^~

 

질문31: (김xx님의 글)

신앙생활에 좀 더 확실한 도움이 되고자 등록한 신입생입니다. 나이가 많아 망설였는데 막상 들어와서 강의실을 둘러보니 저로서는 너무나 준비가 잘 되 있어서 강의 듣기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외의 공부는 잘 따라가도록 노력 해 보겠습니다.

 

질문32: (문xx님의 글)

이번 학기에 처음 등록한 학생입니다.

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될 지, 스스로 잘 할 수 있을 지 많은 고민 끝에 수강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어 본 후에 공부하기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도 들고, 수강 신청한 3과목도 많은 것이 아닌가 부담이 됩니다.

교수님의 친절한 공부 안내서를 읽고 마음의 부담과 점수에 대한 고민이 조금은 수그러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순결한 마음과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부담도 생겼습니다.

총신을 통하여 공부하는 동안이나 그 이후에도 "순결"을 잃지 않도록 근신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좋은 강의 감사히 보겠습니다.

 

질문33: (류xx님의 글)

먼저 최종태 교수님과 함께 구약개론 수업을 듣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현재 서울 신학교와 학점 은행제를 병행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서울 신학교도 이제 마지막 학기이고 학점은행제도 이번 학기에 끝내기 위해 8과목을 신청을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신학교가 방학기간중이라 여유 있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자료실에 있는 구약개론 강의안을 글씨를 좀 키워 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시력이 좋지 않아 10포인트로 되어 있는 글씨를 거의 보지 못합니다.

뒤에 올라와 있는 구약개론 워드 파일로 되어 있는 것 말고 앞에 있는 PDF 파일로 되어 있는 부분을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시험을 치룰 때 만약 객관식 시험이면 시간을 조금 더 안배해 주실 수 없는 없는지요?

그럼 끝까지 교수님의 수업을 열심히 듣도록 하겠습니다.

늘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답변33:

한 가지 방법은 현재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으로 강의안을 여시고, 쪽맞춤이나 기타 200%, 300% 같은 것에 맞추면 글자가 크게 보입니다. 제가 가진 파일을 찾았는데 없어요. 그래서 PDF파일로 보내려고 해도 만들 수가 없고, 도울 수 있는 길은 현재 것을 한글에서 확대해서 보시는 것입니다.

 

질문34: (박xx님의 질문)

강의 내용 중에... 시내산 언약과 모압들 언약의 공통점 중에 십계명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중 안식일의 적용 근거가 다른 것이 차이점이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에는 그냥 넘겼을 것도 새삼 귀에 들리더군요...

전에는 안식일= 주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차이가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칠일 안식교에서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며 이날에 예배드린다고 하더라구요......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요?

답변34:

시내산 언약을 40년 후 모압들에서 갱신한 것이 모압들 언약인데요, 신명기가 그 모압들 언약서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이전 언약의 내용 중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맞지 않는 부분들, 예컨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할 때에 그 상황에 비추어 주어진 법을 정착 생활을 염두에 두고 개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안식일과 주일이 이 시내산 언약을 모압들 언약으로 개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거나 변경된 것은 아닙니다. 시내산 언약을 모압들 언약으로 갱신했을 때, 핵심적인 개정 사항은 어디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 곧 제단의 문제였습니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습니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반면 모압들 언약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할 때 하나님께서 정하는 한 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도록 합니다:

신 12: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이 한 곳이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밝혀집니다.

한편 안식일과 주일의 변경은 시내산 언약이 모압들 언약으로의 갱신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압들 언약에서 시내산 언약의 내용 중 일부를 개정할 때, 안식일 조항에서 약간 조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내산 언약에서 안식일의 근거를 창조에 두었다면, 모압들 언약에서는 이집트에서의 구원에 두고 있습니다: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반면 모압들 언약에서는

신 5:12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 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왜 이렇게 안식일의 근거를 바꾸었느냐? 그것은 이제 정착 생활에 들어갈 이스라엘의 생활환경을 염두에 둔다면, 창조 보다는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의 구원이 훨씬 현실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이전에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할 때에는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다. 그 때의 곤고한 상황을 기억하고, 너희는 가나안에서 안식일을 맞으면 기쁜 마음으로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곧 그 날에 다른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라! 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일종의 목회적 필요에 의해서, 안식일 관련 문구를 약간 조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안식일은 구약 시대에 지금의 토요일을 구분하여 예배드리는 것이라면,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그 주일을 구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일 대신 주일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구약시대에는 창조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면, 신약시대에는 새 창조의 완성일인 주일을 (주님이 부활하신 날)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초대 교회의 관례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교라는 교단에서는 (삼육대학이나 삼육 두유) 주일에 예배드리게 된 것은 로마 사람들이 태양을 섬기던 Sun-day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 황제가 그릇되게 인도한 결과라고 공격한답니다. 즉 안식일을 주일로 변경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안식교의 그런 주장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안식 후 첫날"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곧 오늘날의 주일이지요. 그러므로 그 날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행 20:7, 고전 16:2).

감사합니다.

 

질문35:

수강생들의 질문 하나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답변해 주셔서 모두가 공유하여 내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목회자로서의 삶에 대해 체험적인 말씀들을 들려주셔서 더욱 유익합니다. 샬롬^^

 

답변35:

신학의 목표는 설교와 목회, 선교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학기 수강생들을 보니, 과제물을 제출했는데, 6명이 욥기서에 대하여 썼는데, 공지사항에 올린 글 쓰는 법을 무시하고 그냥 욥기서의 개괄을 제시했습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구약을 읽다가 어떤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 문제를 그 본문 중심으로 묵상하여 왜 그런가? 이유 곧 해답을 찾는 식으로 글을 쓰시라. 곧 논술하라고 요구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욥기서같은 책의 내용분해나 저자 등에 대하여 기술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과제물 작성법을 따라 꼭 과제물을 제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질문36: (박xx님의 글)

대학에서 시험을 첨으로 보았다. 거기다 컴으로 보는 시험 또한 첨이었다. 내심 걱정도 하고 기대도 하면서...

과연 어디서 시험이 나올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무작정 강의안과 수업중 강의안에 필기해 놓았던 것을 중심으로 반복을 하면서 강의를 다시 한번 더 듣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세세한 성경의사건과 내용보다는, 과목이 개론인 만큼 개락적인 내용과 흐름을 잡으려고 애썼는데(문헌비평이나 문서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 근거,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성경상의 반박근거, 언약서상의 각 언약의 차이점이나 공통점등..신명기 역사서설과 그의 대한 가설..그에 대한 반박..모 이런 것들..)... 이거 나의 예상이 쩜 빗나간 것 같다...ㅠㅠ

시험이 끝나고 생각나는 대로 확인해보니, 점수를 주시려고 낸 쉬운 문제도 틀린 것 같은데... 어렵게 생각하고 대한 것 같다.(괜히 문제에 무슨 신학적인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이제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요번 시험을 경험삼아 남은 시험 때에는 더욱 노력하여 잘 치루어야 겠다!! 이젠 또 과제물도 준비해야 하고 ...이건 어찌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지만 기도하면서 준비해보려 한다. 그래도 나름 없는 시간 쪼개가며, 성경찾아가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처럼 시험보시고 당황하신 다른 학우 분들도 자신을 가지시고 힘을 내셔서 핫팅!!!!!!!하시자구요^^~ ㅋㅋ

글구 시험성적 언제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지 알려 주세여^^~~승리하세요!!!

답변36:

맞아요. 구약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아시는지 테스터했습니다. 성적은 바로 나오지 않고, 종강 무렵에 기말고사, 과제 등과 함께 나옵니다. 기다려 주세요. 열심히 하신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모든 공부는 주님 앞에서 장래 사역에 도움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힘을 내세요.

 

질문37: (조xx님의 질문)

교수님!!

지루하지 않게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수업이 늘 기대됩니다. 한 가지 여쭈어 볼 것은 제가 전에 "카톨릭은 이단이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수많은 것을 지적을 했더군요. 근데 정경 목록의 차이에서도 카톨릭은 우리 개신교와 달리 7권이 더 추가되어있다면 명백한 이단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지요?

 

답변37: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 단체이고, 그 안에는 교황을 정점으로 수많은 교단들이 있고, 일률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습니다. 즉 개신교 안에도 자유주의 신학이 있고, 보수주의 신학이 있듯 카톨릭 안에도 여러 사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단순화시켜 말할 때, 카톨릭의 사상에는 비-성경적인 것들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구마경이란 것은 미카엘 대천사장에게 귀신 축출을 기도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천사에게 (아무리 대 천사장이라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해야 그분의 지시로 천사가 움직일 것이 아닙니까?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도 있고요.

언젠가 도올 김용옥이 TV에서 강의할 때, 김수경 추기경을 초대해서 "아, 그 기독교는 너무 편협적이지 않습니까? 추기경님. 자기만 구원이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라고 하니, 추기경은 "어떤 종교를 믿던지 진심으로 믿는다면 다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할 이유도 없고, 또 교회 나가서 예배드릴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의미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도 보수적이라는 김 추기경이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일반 평신도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노벨상을 받았던 인도의 성녀로 불린 테레사 수녀는 인도에서 사역할 때, 전도를 방해하고 복음을 가로막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녀는 말하길, 힌두교 신자들에게는 힌두교를 더 잘 믿도록 함이 우리의 의무라고 가르쳤답니다. 그저 육체적 정신적 위로와 돌봄은 주었겠지만, 그 인도 영혼들이 천국문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막은 반-복음적 사역에 열중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성당에서는 조상 제사나 술, 담배도 다 허용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신앙생활하기에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여기 앞의 성당에 사제는 미사 끝나고 경내 마당에 서서 성도들과 함께 담배를 뻐끔 뻐끔 피우던데, 사제들 중에는 담배, 술 중독자가 많다고 합니다. 미사 때 남은 포도주는 전부 혼자 마시니 알콜 중독이 될 수 있겠지요. 사제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과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제의 독신제를 고수하는데,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보니, 사제들이 어린 여아들을 성추행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독신제도 성경적이 아닙니다만, 초대 교회 때부터 잘못 시작된 관례가 그렇게 전통을 만들었답니다.

카톨릭은 어거스틴이 집대성한 그 예정론도 이단시합니다.

카톨릭은 혼합주의 경향이 농후하다고 여겨져요. 성경 + 외경 = 정경으로 알기 때문에, 외경에 담긴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자살 미화, 미신적 관습 정당시 등의 문제가 나옵니다.

연옥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옥설은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많이 헌금하고 기도하면 연옥에서 죄 씻고 천당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비 성경적 사상입니다. 여하간 카톨릭의 사상에는 여러 비 성경적인 것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주 안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질문38: (박xx님의 질문)

저는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일부다처(一夫多妻)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나올 때 깜짝 놀랐었습니다. 교수님

답변:

일부다처제는 타락한 인간들의 죄악된 제도이지만, 구약 율법에서는 현실을 인정하고 허용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과 구약 율법도 일부다처제를 부정하고 금지한다고 이해하는 편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신약의 윤리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구약의 윤리 기준이 약간 낮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약도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우선, 창조질서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는 남과 여자의 일부일처(一夫一妻)제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는 오직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 라멕에게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창 4:19).

구약의 관련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일부일처제를 기준으로 말씀한다는 점이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ëšet rë`ekä)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말 2:15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ëšet nü`ûrekä) 궤사(詭詐)를 행치 말지니라

잠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ëšet nü`ûrÊk) 즐거워하라

전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iššâ ´ášer-´ähabTä)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分福)이니라

이런 구절들에서 하나 같이 “아내”는 단수형이다. 즉 “네 젊어서 취한 아내”나 “네가 사랑하는 아내”라는 표현은 일부일처(一夫一妻)제를 기준하여 말씀한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어 준다. 그리고 “네 이웃의 아내”란 표현도 이웃 사람도 한 아내와 사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적 관계에서 유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도 둘 사이의 영적 결혼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 사이의 관계를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예증으로 사용하셨다.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정숙한 ‘사모님’이 아니라, 음란하여 외간 남자랑 바람을 피우듯, 이스라엘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 영적 음행을 한다는 정죄였다 (호 2:2). 구약에서 우상숭배는 영적 음행으로 자주 묘사된다 (미 1:7, 렘 13:27, 16:20, 41, 겔 23:19, 27, 호 9:1).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를 대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ël qannä) 묘사되기도 한다 (출 20:5/[신 5:9], 34:14, 신 4:24, 6:15). 민 5장에서 “질투하다” 혹은 “질투”라는 연관어가 부인이 바람피운 여부를 의심하는 질투하는 남편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질투심’이 (한, ‘의심’) 생겨서 그 아내를 ‘질투’하든지 (한, ‘의심’) 또는 아내가 더럽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남편이 ‘질투심’이 (한, ‘의심’) 생겨서 그 아내를 ‘질투’하거든 (한, ‘의심’)

이 진술은 “질투심”이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함을 보여준다 (잠 6:34, 아 8:6). 물론 히브리어 qin'ah는 열성, 분노, 경쟁심 등도 의미하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부부 사이의 음행 때문에 나타나는 ‘질투’이다. 내게 속한 것을 타인이 갖는데 대한 그 질투와 시기심은 아 8:6이 표현하듯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강력하여 어떤 물로도 끌 수가 없다. 아내가 음행한 경우, 그 남편의 마음이 바로 불타는 질투심인데,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무 벌금도 돌아보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잠 6:34). 아내나 남편의 마음에 질투의 불길이 붙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끌 수가 없고, 음행한 편이 죽거나 큰 상처를 입고야 진정시킬 수 있게 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도 하나님과 그 언약 백성 사이의 정조(貞操) 관념에서 생각될 수 있다. 약 4:5에서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라고 할 때 (물론 해석상의 이견들이 많지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전적 소유욕이 질투심을 유발시킨다고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도 영적 결혼 관계, 곧 둘 사이의 영적 지조의 견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 6:4),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명하셨다 (출 20:3).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러 잡신들과 관계 맺는 것을 금지하시고 오직 자신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요청하셨다. 이런 일대 일의 인격적 관계는 인간의 결혼 관계를 규정하는 신적 원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는 영적 결혼 언약 관계라 할 수 있고, 인간들 사이의 결혼 관계는 그런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언약 관계의 반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인간이 남녀 사이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범죄로 타락하기 전에 어디까지나 일부일처(一夫一妻)의 결혼이 기준이었고, 일부다처(一夫多妻)제 같은 관례는 본래 것의 왜곡이거나 타락 변질임이 분명함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정조가 중요하듯, 남녀 사이의 결혼 관계는 인격 대 인격의 정조(貞操) 관계로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하기 이전의 창조질서는 이렇게 일부일처제가 기준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구약의 일부다처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셋째로, 야곱의 일부다처제

성경에서 야곱의 사이클이 일부다처제 관계를 다루는 가장 긴 기사일 것이다. 야곱이 외삼촌 집으로 향한 것은 거기 자기 친척 중에서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함이었다 (창 28:2). 야곱의 선택은 원래 첫 눈에 반한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이었다 (창 29:18-25). 그러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자기 큰 딸 레아를 야곱에게 결혼시키고, 나중에는 라헬까지 주어 야곱으로 하여금 일부다처의 남자가 되게 만들었다. 그런 관례가 그곳에 익숙하였다 (창 29:26-28). 나중에 이 두 자매 부인들은 자식 경쟁하느라, 자신의 몸종들을 남편과 동침하게 만들어 결국 야곱의 첩이 되게 했다. 빌하는 야곱의 첩이라 (창 35:22) 혹은 “부인들” 중의 하나로 (창 37:2) 불렸다. 빌하나 실바는 야곱의 적법한 부인들로 간주되었고, 그들의 자녀들 역시 적법한 부인들의 자녀들로서 법적 상속인의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창 46, 49장, 출 1장, 신 33장). 야곱의 일부다처 관계로부터 (즉 네 부인들) 12아들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그런데 일부다처제의 야곱 가정사를 본다면,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다툼과 시기심에 의한 경쟁 관계가 세세하게 보도되고 (창 30:1-16), 시기, 복수, 혈기, 절제하지 못함 등의 악한 성향들이 야곱의 자녀들에게서 일부다처제 가정생활의 역기능이 잘 드러난다 (34:13-31, 37:2-34). 야곱 자신도 그런 일부다처제 가정 상황 때문에 여러 난관에 봉착해야 했다. 야곱은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했고 (창 29:30), 레아는 남편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미움을 받았다) 한다 (창 29:31). 야곱 가정의 여러 분쟁이나 긴장 묘사는 일부다처제 가정이 결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어 준다. 말하자면, 일부다처제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부다처제의 실상은 이렇다고 소리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넷째로, 모세법

어떤 학자들은 모세법 중 어떤 것들은 일부다처제의 관례를 전제하거나 인정한다고 말한다.

1) 출 21:7-11에서 여자 노예에 관한 법규

7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8 만일 그녀가 ‘자신을 위해’ ("for himself" Qere; Ketiv는 ‘-아니다’ not) 지명했던 상전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그는 그녀를 속신(贖身)케 할 것이나 그가 그 여자를 속였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타국인에게 팔지 못할 것이요 9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같이 대접할 것이요 10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11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8절은 사역私譯)

이 법규는 일부다처제를 지지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 법규가 어떤 특정 행동이 취해진다면 따라야 할 바를 기술하는 사례법이라는 것이다. 사례법은 그 경우의 행동을 합법화시키지 않고, 오직 그런 경우들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만 규정할 뿐이다. 이 사례법은 출 22:1의 사례법이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도적질을 합법화시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일부다처제를 합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례법의 존재는 (casuistic legislation) 그런 경우들이 일어날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상황들을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법규를 좀 더 상세하게 고려해 보자. 8절에서 본문은 (Ketiv) "-아니다"이지만, 케레 독법은 “자신을 위해”로 (for himself) 읽으라고 권고한다 (70인역이 그를 따랐고, 대부분의 현대 영역본들이 그리한다). 그런데 사본상의 근거는 그런 케레 독법이 강력하지 못하다 (70인역, 탈굼, 벌게잇 등이 케레 독법을 따르나 사본상의 근거는 약하다). 원래 본문대로 읽는다면 (Walter C. Kaiser, Jr. 1983:184), 그 여자 노예의 상전은 8절에서 그녀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과 무관하게 된다. 그럴 경우 “만약 그녀가 자기 상전을 기쁘시게 못한다면, 그래서 그가 그녀와 약혼하지 않는다면. . .”이 된다 (NIV 각주에서 “만약 그녀가 자기 상전을 기쁘시게 못한다면, 그래서 그가 그녀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 .”).

9-10절에서 그 여자 노예와 연관하여 야기될 두 다른 상황들이 묘사된다. 하나는 그 상전이 그녀를 자기 아들에게 주는 경우이다 (9절). 이런 상황은 의미상 논란이 없다. 다른 가능성은 상전이 “다른 ('acheret) 아내를 취하는” 경우이다 (10절). 학자들은 대개, 이 다른 부인을 8절에 언급된 그 여종 외의 다른 부인이라 가정한다. 그러나 만약 8절이, 상전이 그 여종을 자기 아내로 취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면, 10절에서 “다른”이란 말은 “-에 더하여 다른”이란 의미가 아니라, “-대신에 다른”이란 (another instead of, different) 의미를 갖게 된다 (민 14:24, 신 29:28, 삿 11:2, 사 28:11, 렘 22:26, 36:28, 32). 10절에 묘사된 상황은, 만약 상전이 여종 ‘대신에’ (“-에 더하여”가 아니라) 다른 부인을 취한다면, 그 여종에게 주어져야 할 대우들이다. 다시 말해, 8절은 그 상전이 여종과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10절은 그 여종의 결혼의 권리를 (부부관계) 언급할 수 없다.

그 여종이 받아야 할 대우는 무엇인가? 대개 현대 역본들은 8절이 상전과 여종 사이의 결혼을 말씀하고, 10절은 일부다처제를 지시한다고 전제하고, 상전이 그 여종에게 계속 베풀어야 할 대우를 세 가지로 번역한다: "음식, 의복, 부부관계" (we'onatah).

10절은 세 가지 목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이 구절에 대한 문학 구조 연구들은 11절의 “이 세 가지 일들”이 10절에 언급된 세 목록을 지시하지 않고, 오히려 8b, 9b, 10b 등에 제시된 귀결절들을 (apodosis) 지시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출 21:2-11의 구조는 2, 7절에 두 주요 사례들을 언급하고, 각 주요 사례는 세 부속 사례들을 (3a, 3b, 4절과 8, 9, 10절)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외적 사례를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5-6절과 11절)(Gordon P. Hugenberger 1998:320-21은 이런 견해는 라쉬, 이븐 에스라, 라쉬밤 등의 입장이기도 하였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의 문학 구조 분석의 기초는 Yair Zakovitch 1979:2,452; Gregory C. Chirichigno 1989:226-27 참조).

고대 역본들은 히브리어 'onah가 "부부 관계 권리"라고 (conjugal rights) 이해했다 (LXX, Syriac, Targumim; Robert North 1955:204-206). 이런 번역은 'onah를 'nh동사와 (동음이의어 III “강탈하다, 압제하다, 폭력을 행사하다, 굴욕을 주다”) 연관시켜 이해했다 (Ibn Ezra는 이 말을 'et와 [때 time] 연관시켜, “성관계의 때”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런 이해는 의문시되며, 오늘날 학자들은 그런 이해를 널리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다 (Hugenberger 1998:320). 샬롬 폴은 (Shalom Paul 1969:48-53) 'onah를 “음식, 의복, 기름”을 삶의 기본 필수품으로 언급하는 수메르어나 악카드어 문헌들에 근거하여 “기름”이라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어원적으로 근거가 약하다. 왜냐하면 'onah가 기름을 의미하는 용례는 구약 어디서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카드어나 수메르어에서 “기름”을 의미하는 말도 'onah와 연관이 없어 보인다. 이렇게 어원적으로 'onah는 설명이 되지 못하고 있다.

고대나 현대 학자들이 다수 지지하는 이 말의 가장 개연성 있는 이해는, “거처, 거주”를 (habitation, dwelling) 의미하는 히브리어 명사들과 (ma'on, me'ona) 어원적으로 연관되는 히브리어 어근 'wn에 근거해서 “거처”로 해석하는 입장이다 (Umberto Cassuto 1967:269는 “그녀의 거주 조건들”이라 번역하고, “이것이 'onatah란 말의 실제 의미인 양 보인다”). 나훔 사르나는 (Nahum H. Sarna 1989:121) 유사한 이해를 가졌던 라쉬밤이나 베코르 쇼르 등의 중세 랍비들을 언급한다 (Hugenberger 1998:321도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Wolfram van Soden 1981:159-60도 참조). 이렇게 본다면, 그 여종에게 제공되어야 할 생활필수품들은 “정상적인 음식, 의복, 그리고 거처”이다.

그렇다면 이 법규는 일부다처제를 합법화시키거나 지지하기는커녕, 일부다처제를 다루지도 않는다. 이 법규는 여자 노예에게 야기될지 모르는 세 우발 상황들을 다룬다: 1) 만약 상전이 그녀를 아내로 취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되물려져서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 2) 만약 상전의 아들이 그녀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상전의 딸로 취급되어야 한다; 3) 만약 상전이 이 여종이 아닌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면, 그 여종에게는 생활의 기본 필수품들이 제공되어야 한다: 음식, 의복, 숙소 등 (일부다처제와 무관한 상황이라 해석하는 또 다른 대안적 해석은 Hugenberger, 1998:320-22참조).

 

2) 두 자매와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규 (레위 18:18)

레위 18:18은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고 한다. NIV는 “네 아내가 생존한 동안에 네 아내의 누이를 경쟁 아내로 취하여 그녀와 성관계를 갖지 말라”고 번역하여 한역과 유사하게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양 제시하고 있다. 현재 부인의 자매(姉妹)가 아닌 이상 다른 여인을 본 부인이 살아생전에도 취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본 부인이 사망한 이후에는 그 부인의 자매를 취하여도 무방하지만, 부인이 살아생전에는 그 자매를 첩으로 취할 수 없다고 금지하는 고대 근동 법규들과 유사하게 된다 (앗시리아 중기 법전 §31, COS 2.132:356-57, ANET 182; 힛타이트 법전 §192, COS 2.19:118, ANET 196; 힛타이트 법전 §194, COS 2.19: 118, ANET, 196).

그렇지만, 레위 18:18을 더 큰 문맥에 비추어 자세히 살핀다면, 이런 이해는 합당하지 않음이 드러날 것이다. 이 구절에서 핵심적 표현은 “한 여인. . . 그녀의 자매에게”이다 ('issa 'el-'achotah). 여기서 “자매”는 핏줄이 같은 친 자매를 가리키는가? 그러니까 이 문맥에서 친 자매를 함께 취하는 근친상간(近親相姦)적 일부다처제 관계를 금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자매”는 넓은 의미에서 여성, 곧 본 부인 외의 다른 첨가될 부인을 지시하는가? 다시 말해, 여기서 금지된 바는 어떤 종류의 일부다처제건 모두 해당되는 것인가?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들에서 방금 언급한 바가 사실이라 보인다.

(1) 'issa 'el-'achotah란 (한 여인 . . . 그녀의 자매에게) 표현은 구약에서 8번 모두 항상 혈육 친 자매 관계가 아닌 “다른 여자에 더하여 한 여자”란 의미로 분배적 의미에서 관용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 26:3 (두 번), 5, 6, 17, 겔 1:9, 23, 3:13). 이는 사람들이 아닌 경우에도 사실이다. 출 26장에서 휘장들의 짝들, 걸쇠들의 짝들 (clasps), 판들의 짝들 (모두 여성형 명사들) 등을 지시하는데, “서로 간에” (to one another), 문자적으로 “한 여인을 그녀 자매에게”로 나타난다. 에스겔에서는 그룹 천사들의 날개들이 (여성형 명사) “서로” (one another; 문자적으로 “한 여인이 그녀 자매에게” 맞닿는 것을 묘사한다. 유사한 표현 'issa re'utah도 문자적으로는 “한 여인이 자기 이웃/ 친구와 더불어”인데, 새들이 “각기 자기 짝과 함께” 모이는 것을 묘사한다 (사 34:15-16). 혹은 여인들이 “각자 자기 이웃에게” 가르치는 것을 (렘 9:20) 의미한다.

고려중인 표현의 남성적 표현 'ish 'el-'achiv는 (한 남자가 자기 형제에게) 구약에서 12번 나타나는데, 항상 “서로 간에”란 배분적 의미로 (one to another or to one another) 나타난다 (창 37:19, 42:21, 28, 출 16:15, 25:20, 37:9, 민 14:4, 왕하 7:6, 렘 13:14, 25:26, 겔 24:23, 33:30). 이런 관용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번역함은 적절하지 못하다. 문맥에 문자적인 해석을 요청하는 특별한 요소가 있다면 예외일 것이다. 밀그롬은 (Jacob Milgrom 2000:1548) 고려중인 표현이 두 친 자매를 지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의미라고 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의미를 따르는 것이 그 표현이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관용적 배분적 용례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가? 더구나 “한 여인/ 아내가 자기 자매에게”라는 표현이 문자적으로 (배분적 의미의 관용적 의미로가 아니라) 이해함이 분명한 의미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친 자매를 지칭하는 다른 방식이 엄연히 사용되고 있음에도 그렇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2) 만약 레위 18:18의 의도가 두 친 자매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오해를 없이하기 위해서) 전치사 “-에게” (le) 대신에 접속사 “그리고”를 (ve)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여인과 그녀의 자매”라고 ('issa ve'achotah) 말이다. 바로 앞 구절에서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렇게 접속사를 중간에 배치해서 표현했다 (20:14에서도). 그렇게 표현한다면, “어머니와 딸”이란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자적으로 친 자매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런 손쉬운 표현이 있음에도 다른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고려중인 표현의 ('issa 'el­'achotah) 배분적 의미를 (다른 구약 용례들에서처럼) 지지해 준다.

(3) 레위 18:18에서 “자매”란 말은 ('achot) 레위 18장의 다른 구절들에서 (12-13절) 모두 그러하듯 문자적 자매를 의미함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Milgrom, Leviticus 17-22, 1549). 그러나 그런 주장은 레위 18장 다른 곳에서는 'achot만 나타날 뿐, 18절에서처럼 'issa 'achotah란 관용적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두 다른 표현들을 단순하게 동등하게 취급함은 적절하지 못하다 (Angelo Tosato, "Leviticus 18:18," 202, n.8). 레위 18장에서 사용된 특정한 관용어적 표현을 단도직입적으로 문자적 자매들을 지시하는 구절들과 혼동하는 일은 책임 있는 학자의 할 일이 아니다.

(4) 많은 학자들은 레위 18장의 인접 문맥은 18절에서 고려중인 표현을 친 자매로 번역하기를 요청한다고 한다. 문맥은 문자적 친 자매 관계나 근친상간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6-17절). 이런 견해는 하지만, 레위 18장의 문학적 구조가 제시하는 함축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토사토의 문학 구조 분석에 의하면, 17절과 18절 사이에는 주요한 문학적 단절이 놓여 있다. 레위 18:18은 그 앞부분인 6-17절의 반-근친상간(近親相姦)의 법규들과 함께 포함되지 말아야 한다. 레위 18:18은 18-23절에 제시된 여러 종류의 불법적 성관계를 금지하는 일반 금지 사항들을 다룬다. 토사토는 이런 두 주요 부분들의 구분은 일관된 문장 구조나 법규들의 내용을 보면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7-17절에서 모든 구절은 'ervat로 (-의 알몸 nakedness of) 시작되어, 부정 불변사 (negative particle) + 미완료상 lo' tegalleh로 (너는 벗기지 마라 you shall not uncover) 절정에 이른다. 반면 18-23절 부분에서 각 문장은 바브 접속사와 'ervat 아닌 다른 단어로 시작하여, 부정 불변사 lo' (not) + tegalleh (드러내다) 아닌 다른 동사 미완료상으로 끝이 난다. 다시 말해 6-17절에서는 법규들은 친족 관계에 근거하여 금지되는 관계를 다루는 법규들로 구성된 하나의 문학 단위를 구성한다. 반면 18-23절의 법규들은 친족 관계 아닌 다른 것에 근거하여 성관계를 금지하는 광범한 범위의 금지된 성관계를 다루는 법규들을 담고 있다.

(5) 18절은 6-17절과 다른 구조적 단위에 속한다는 다른 증거는 6-17절에 담긴 반-근친상간 법규들 중에 하나를 제하면 전부가 명사절로 결론이 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 명사절은 금지된 개개인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예컨대, 10절에서 “이는 너의 하체니라”라고 한다) 금지를 정당화하는 정당성을 제공한다 (7-8, 10, 12-15, 17절; 9절만 예외이다). 18절은 (19-23과 함께) 이런 설명하는 절을 (clause) 갖고 있지 않다. 만약 18절이 친 자매 관계이기 때문에 금지한다면, “그녀는 네 친 혈육이기 때문이니라” 라고 설명절을 동반했을 것이다.

(6) 18절은 근친상간을 다루는 법규들의 (6-17절)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 법규는 6-17절에 담긴 법규들이 영속성을 갖는 것과 달리 시간적 제약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issa 'el­'achotah란 표현이 전하는 금지는 첫째 여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해당된다. 이는 친족이기 때문에 성관계가 금지된 근친상간의 법규와 완전히 대조된다. 근친상간 법규는 그런 시간적 제약성을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18절은, 19-20절이 6-17절과 달리 끝장 날 수 있는 조건들을 다루기 때문에 19-20절과 문학적 유사성을 갖도록 두어졌다고 주장하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6-17절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이 어떻게 어떤 남자가 다른 남자의 부인과 갖는 간통에 (20절) 비해 더한 혹은 덜한 영속성을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남의 부인과 간통하는 일이 근친상간에 비해 덜 영속적인가? 아니면 더 영속적인가? 근친상간이나 남의 부인과 간통하는 일이나 항상 금지되지 아니한가? 따라서 18절은 영속적인 근친상간의 법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또한 시간적 제약을 갖는 따라오는 법규들을 바라보기도 하는 이중적 (Janus)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다는 주장은 받아 들일 수 없다 (Roy Gane 2004:319-20).

(7) 친족 관계를 다루는 레위 18장의 법규들은 문자적 친 자매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한정하는 제약들을 갖고 있다: “네 부친의 딸 혹 네 모친의 딸” (9절), “네 부친의 아내의 딸” (11절), “네 부친의 자매” (12절), “네 모친의 자매” (13절). 이와 대조적으로, 18절은 그런 제약하는 한정 진술을 갖고 있지 않다. 레위 18:18-19과 20:17-18 (17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18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사이의 가정된 병행은 레위 18:18이 친 자매를 지시한다는 주장을 지지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레위 20:17에서 언급된 친 자매는 구체적으로 한정하는 제약 진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의 딸이거나 그의 모친의 딸이거나). 차라리 레위 20:17은 레위 18:9과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레위 18장에서 금지들을 배열하는 원리는 20장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18장에서는 가까운 가족 관계에서 먼 가족 관계로 이동했다면, 20장에서는 범죄의 심각성에 근거한 처벌에 따라서 배열되었다. 가장 심각한 범죄에서 가장 경미한 범죄로 나아간다. 따라서 18:18의 “자매”라는 용어의 용례를 파악함에서 18장과 20장 사이의 병행 배열을 고려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아니한다.

(8) 레위 18:18에 주어진 법규의 신학적 정당성은 (“그녀 자매에 대한 경쟁자로서”) 본질적 (intrinsic) 잘못됨을 강조하기보다, 두 여인과의 결혼에 적용될만한 일반적 상황을 묘사할 뿐이다. 그 법규가 피하게 하고자 하는 그 해(害)는 일단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어떤 여인이나 (반드시 첫 부인의 친 자매가 아니라도)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그런 경쟁심이나 적대심, 시기심이다 (Angelo Tosato 1984:207). 히브리어 어근 charar는 (경쟁자가 되다) 삼상 1:6에서 한나의 경쟁자가 되는 브닌나를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엘가나의 부인들이 친 자매들이라는 암시는 없다. 따라서, 이런 금지가 부인을 화나게 하지 않도록 하려는 동기였다면, 금지를 친 자매를 금지하는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 성경이나 인류학은 친 자매거나 전혀 피가 섞이지 아니한 두 여인들이거나 한 남편의 부인이 될 경우,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경쟁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Hugenberger 1998:117).

이런 모든 요소들을 고려하건대, 'issa 'el­'achotah는 친 자매 관계가 아닌 한 남편의 아내가 되는 두 여인의 상호 관계를 지시하고 있다. 그런 친족 아닌 두 여인이 한 남편의 부인들이 되는 경우의 상호 관계는 구약에서 사용된 그 표현의 관용적 일반적 의미에 (다른 여인에 더하여 다른 여인) 적절하다. 이 표현은 친 자매만 아니라 어떤 여인들이건 한 남자의 부인들이 되는 두 여인들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레위 18:18은 모든 일부다처제를 금지한다. 이 법규는 한 남자가 첫째 부인에 더하여 다른 여인을 (첫 부인의 생전에) 취하여 경쟁적 아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을 금지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 법규는 첫 부인이 사망한 이후에 재혼은 가능하다고 인정한다. 이처럼 창세기의 일부일처제 규범이 모세법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고돈 후겐베르거는 이런 레위 18:18에 대한 해석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는 이유에서 배척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그 법규를 범할 경우 처벌한다는 처벌 규정은 20장이나 오경 어디서도 없다. 성결법전에는 그런 이상적인 규정들이 많이 있다 (예컨대, 레위 19:17-18에서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고 금지한다). 그런 규정을 어길 경우 처벌한다는 조항이 없다는 사실은 그런 법규들이 단지 사법상의 규범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법규라는 것을 강조해 준다. 휴겐베르거는 레위 18:18은 불완전한 법의 한 본보기라고 지적한다 (lex imperfecta). 다시 말해, 어떤 것을 금지하긴 하나, 그리함으로 그것을 무효로 만들지는 아니한다. 이는 어떤 경우에건 그런 법규를 강제할 적절할 수단이 부족했던 사회를 반영한다 (Hugenberger 1998:118). 레위 20장에는 레위 18:18의 법규를 어겼을 경우 처벌할 처벌 조항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법규가 일부다처제를 다룰 뿐 근친상간에 관한 법규가 아님을 또 달리 입증해 준다.

레위 18장에는 그 처벌이 20장에서 언급되지 아니한 또 다른 근친상간의 법규가 있다. 그것은 손녀와의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법이다 (레위 18:17). 이론상 따라서 18절의 법규도 근친상간의 법규지만 처벌은 없는 그런 법규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모든 증거들에 비추어 보건대, 레위 20장의 처벌 목록에서 레위 18:18의 법규에 대한 처벌이 언급되지 아니한 것은 그 법규가 근친상간이 아니라, 일부다처제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처벌은 오경에서 법적으로 규정이 없지만 하나님은 도덕상으로 합당치 않다고 여러모로 증거하셨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레위 18:18의 법규를 일반적인 일부다처(一夫多妻)를 금하는 법규로 이해했다 (4QDa 4:20-21 다메섹 문서). 레위 18장에 제시된 근친상간 금지법규들이나 여기 일부다처를 금하는 법규는 모두가 창 2:24의 창조질서에 근거한 일부일처 결혼 생활을 기준으로 하여 말씀한다.

 

질문39: (박xx님의 글)

수업 잘 들었습니다.

지도공부를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지요?

답변39:

지도 공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리학을 말씀하는 것인지요? 성경 지리를 말씀합니까? 성경 지리는 우선 성경 지리부도를 필요로 하겠지요.

한글로 번역된 지리 부도로는 두란노에서 출간된 Thomas V. Brisco 저, 성경 지도책 있군요. 이전에 아가페에서 번역 출간된 것도 있는데, 좀 신신학 경향도 있고 (유대교 학자들), 또 번역도 틀린 부분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질문을 올려 주시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40: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돈으로 환산하였다 하시었는데 더 자세한 설명 좀 부탁 드립니다.

답변40:

출 21:23-25은 (레위 24:17-22, 신 19:18-19, 21 등) 소위 동해 보복법인데 (同害 報復法), 신체 어떤 부위가 피해를 입었다면 가해자의 그 신체 부위를 손상시키는 처벌을 가한다는 보복법입니다. 이런 보복법은 함무라비 법전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예컨대, 만약 한 시민이 한 귀족의 눈에 해를 끼쳤다면, 그들은 그의 눈을 뺄 것이다. 만약 그가 다른 시민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들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것이라. 만약 한 시민이 자기랑 동급의 시민의 이를 부러뜨렸다면, 그들은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라

여기서는 생명에서 시작하여 머리부터 신체 아래로 네 부위의 상해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눈, 이, 손, 발 등. 여기에 더하여, 유대인 랍비들은 불로 태움, 상처, 타박상 등도 언급된다. 그런데 랍비들은 이 성경의 동해 보복법을 신체적 보복이 아니라, 금전으로 배상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므킬타 미쉬파팀 8, 274-278; 미쉬나 바바 캄마 8:1, 83b-84a). 이렇게 신체적 보응이 아니라 금전적 보응이라 해석하는 데는 근거가 본문에 있습니다.

예컨대, “만약 해가 있다면, ‘너는 생명에는 생명을 주라’” (너는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하라)라고 했어요. 비인칭 주어가 아니라, 2인칭 남성 단수를 주어로 하여 지불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상의 특징은 22절에서 수동태가 사용되어 비인칭으로 “그 가해자는 반드시 벌금을 지불하도록 벌금형에 처해질 것이라” (아노쉬 야아니쉬, he must be fined) 제시된 것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돋보입니다.

그리고 22절에 제시된 사례와 비교해 볼 때, 23-25절에 제시된 여러 손상들은 적절하게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즉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의 태아를 낙태시키고, 그 여인까지 죽게 했다면, 나머지 신체 부위의 상해는 언급할 이유도 없게 되어 버립니다. 만약 임신녀가 눈, 이, 손, 발 등의 신체 부위에 손상을 입는 정도라면, 그녀의 태아에는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게 나아가게 되었는데, 요컨대 정확하게 보응하는 것, 곧 눈에 상처를 입혔다면, 그 눈에 정확하게 상처를 어떻게 입히겠어요. 시행상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동해 보복법은 개인의 보복이 아니라, 사법기관이 정확하게 상응하는 방식으로 재판할 것을 규정한 말씀입니다. 사법 기관은 현실적인 여러 면을 고려하여 벌금형으로 이 법을 집행하게 된 것입니다. 눈에 상처를 입혔으면 중할 경우 얼마, 경할 경우 얼마 이렇게 벌금을 물리는 것입니다.

 

질문41: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발람의 기사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민 22:20에서는 하나님께서 밤에 발람에게 모압 왕 발락에게 가는 것을 허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1절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가르쳐야 하는지요?

질문을 항상 읽어 주시고 자세한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41:

민 22: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 할지니라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20절은 허락, 22절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하여, 허락하셨음에도 왜 노하시나? 라는 의문이신가요?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초청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목적입니다. 그 일은 어느 모로 보나 발람이 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오직 자신의 주시는 말씀만 전하도록 즉 저주는 발하지 못하도록 미리 지시하셨습니다. 허용이 반드시 찬동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진노를 발하셨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발람을 궁극적으로 그가 떨어질 유혹과 죄악된 행위에서 막기 위함이었겠지요. 즉 발람을 궁극적으로 그가 (나중 결과적으로 그는 발락에게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타락시키면 하나님이 진노하여 이스라엘을 직접 치실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음, 민 31:16) 떨어질 그 유혹과 죄악은 그를 망치게 하고 망하게 하는 일이기에 허용하셨지만, 도중에 다시 그를 막기 위함일 것입니다. 지금 죄악의 마음을 품은 네 마음을 돌이켜라.

발람의 마음에는 만 가지 유혹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마음의 상태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도중에 발람에게 진노하신 것이라 보입니다.

나중 발람은 민 31:8에서 이스라엘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그 결과는 여기 사자를 보내 막으신 것이 발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발로였음이 드러납니다.

아마 이것이 죄의 유혹을 당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보입니다. 분명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도하니, 가도 좋다고 하셨다고 유혹의 처소로 발을 옮기는 것과 발람의 걸음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질문42: (류xx님의 질문)

이번 주 첫 강에서 언약을 맺을 때 쪼갠 고기 사이로 양 당사자가 지나감으로서 계약을 확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만이 지나 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고기를 놓을 때 지나 간 것으로 볼 수 있나요?

답변42:

렘 34장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계약 체결 때에, 쪼갠 송아지 사이로 쌍방이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경우는 특히 환상 가운데 일어난 경우에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체결하시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분이 자손을 주시고, 그 자손을 위한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받는 수동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신약에서 헬라어 '디아데케'라고 불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적 언약 체결을 가리키고, 다른 헬라어 '순데케'는 인간 쌍방 간의 쌍무적 관계 즉 동등 차원에서 상호 언약을 가리킵니다. 사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문맥에 따라서 "약속"이란 뉘앙스가 강합니다.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나 주어지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언약이란 쌍방간의 법적 관계 규정을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의심하거나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므로, 하나님의 강력한 약속 이행에 대한 보장으로 환상 중에 하나님의 자기 저주 맹세 의식을 통해 이전에 주신 약속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비준 의식이지요. 창 15:18 참조.

 

질문43:

두 번 째 질문은 창세기의 구분에 대한 질문입니다.

큰 두번째 구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시대에서 39장부터는 엄밀하게 말하면 요셉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은지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개개인의 족장으로 보기에 그렇게 나눈 것인지요??

답변43:

창세기 기자는 곧 모세는 요셉을 야곱의 "톨레돗"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톨레돗은 창세기에서 10번 정도 나타나는데, 대략(大略 2:4, 36:1, 36:9), 계보(系譜 5:1), 사적(史蹟 6:9), 후예(後裔 10:1, 11:10, 11:27, 25:12, 19 ), 약전(略傳 37:2), 세계(世界 10:32) 등으로 달리 번역되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창세기 기자의 묘사 방식으로 보건대, 족장들에 끼이지 않습니다. 족장을 카톨릭에서는 "성조들"이라 (거룩한 조상들) 번역하는데, 한 종족의 지도자란 의미입니다.

 

질문44:

창세기 4장의 문명에 대해서 비평학자들은 어떻게 보는 지요?

교수님의 강의에 의하면 창세기의 구분에서 1장부터 11장까지 원시시대, 선사시대로 본다고 했는데 비평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요? 잘못된 기록으로 보는 것인가요? 후대의 첨가로 보는가요?

답변44:

비평가들은 영어 critics에 해당되는데, 제가 사용할 때는 불 신앙적 성경 비평가들을 가리키고, 이들은 신앙적인 눈이 아니라, 학문적 관점에서만 성경에 접근하므로,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 차원에서 성경을 대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창 4장만 아니라, 창세기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런 오경의 책들에 기록된 바를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대개 민담 = 사게 (독어; 사가 [영어]), 전설, 동화, 신화 정도로 보지요. 이런 사고가 퍼져서 세계 내노라 하는 신학교나 (예컨대, 하바드, 예일, 케임브리지 등등), 국내 신신학 계통 신학교들에서 (예컨대, 한신, 장신?, 감신, 한일 장신 등등) 그렇게 가르치지요.

아브라함의 경우 주전 2000년대 즈음의 사람인데, 동양으로 치면 하나라 시대 (주전 2070-1600년경), 곧 선사시대에 (역사 이전 시대) 해당되지요. 그러니까 역사적인 기록이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평적 사고는 주전 2천 3, 4백년 경에 이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법률이 명문화 (성문화) 되었다는 사실이나,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이 주전 2400년대 작품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더 이상 견지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를 진화론적 사고로 접근하면, 원시적 주물숭배나 애니미즘에서 (정령숭배), 점차 다신론교로, 그리고 유일신교로 진화했다고 보고, 창세기에 기록된 족장들의 역사 같은 것은 후대 이스라엘이 자기 시대의 관습을 자기 조상들의 시대로 투사시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질문45: (김xx님의 글)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니 더욱 믿음이 확실 해 져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답변45:

흔히 하는 말이, 신학교 가기 전에는 목사나 장로, 들어가서 1학년 마칠 때는 집사, 졸업할 때는 평신도가 되어 나온다고 합니다. 믿음이 성경을 공부할수록 강해지고 좋아지면 좋은데 반대가 된다는 것을 지적한 좋은 예증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사람이 신학교 졸업할 때는 꼭 그렇게 부르짖고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느냐? 하나님은 기도 안 해도 다 아시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이고 마음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고, 또 어떤 사람은 철학에 빠져서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고민하면서 진로를 아예 철학으로 튼 사람도 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는 그렇게 되기도 했고, 중요한 것은 신학이란 theology란 헬라어로 하나님 (테오스) + 연구 (로고스) 합성어로 이전에는 하나님을 아는 학문 곧 경건의 학문으로 여기고 모든 일에 기도와 경건연습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계몽사상 여파로 유럽 신학계가 혼란해지면서 이성에 강조를 두고, 성경연구의 목적이 경건과 목회가 아니라, 머리의 의문을 풀고 성경의 인간적 기원을 파헤치는 것으로 바뀌면서 신학은 급격히 세속화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내노라 하는 서구 신학교는 모두 성경 구약 많은 부분을 케케묵은 고대인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신화나 전설, 동화, 민담으로 각하시켜 버립니다. 이것을 비평신학이라 하는데, 한국 신학교도 비평적인 경향으로 흐르는 곳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일이고, 불신앙입니다.

기도가 없고 영적 체험이 없으면 성경을 읽어도 의심만 들고 회의만 가중됩니다. 신학도가 변하여 독재 살인자 스탈린이 되었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마귀는 신학도를 노린다. 마귀는 신학교를 노린다. 왜, 그곳은 모든 교회 지도자들의 모판이기 때문이다. 마귀 백 이렇습니다.

세상은 온통 비평신학이 판 칩니다. 이 시대의 남은 자, 들림 받기 바랍니다. 신학의 목표는 내가 영적으로 확신가운데 서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고, 교회를 유익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근본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 목적에서 어긋나는 신학이나 모든 활동은 다 불신앙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질문46:

유대인들이 구약을 토라, 선지서, 성문서로 나누었다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나눈 건지 약간의 의구심이 있네요. 우선, 모세 오경을 하나로 묶어서 토라라고 했다는 점에선

수긍이 갑니다. 모두 율법에 관한 것이고, 이는 법으로 볼 때 헌법에 해당하듯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들이라는 점. 하지만 선지서와 성문서의 구분은 좀 의아한 점도 있네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등을 우리는 역사서로 보지만 유대인들은 선지서로 본다는 점도 좀 의아하고.. 역사서 같은 전선지서와 정말 예언서같은 후선지서가 선지서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일 수 있다는 점이 의아하구요..

여기까진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성문서는 더 이해가 안 갑니다. 그 책들이 성문서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어떻게 묶일 수 있는 것인지, 거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성문서에 묶인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성문서라는 뜻이 뭐죠? 그리고, 생뚱맞게 역대기는 왜 성문서에 가 있나요? 순서상으로 보아도 선지서 쪽에 있는 게 더 어울리고..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등과 더 내용상으로도 비슷하지 않나요?

답변46:

지금 질문하신 것이 바로 "문제의식"입니다. 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과제물을 쓸 수도 있겠지요? "왜?"일까 자꾸 질문하고 다른 이는 무어라고 말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구약개론 과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문제제기와 함께 구약의 본문 하나를 선택해서 문제와 본문을 연관시켜야 합니다. 즉 본문을 하나 정하고 그 본문을 근거로 왜 선지자라 했을까? 라고 물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삼대 구분은 유대인 랍비들이 (이들은 우리로 치면 목사) 성경을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그렇게 구분한 것일 뿐, 그것이 성경적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구약의 삼대 구분법은 주님이나 사도들도 그대로 따랐지요. 예컨대, 눅 24:44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셨지요.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오경, 선지자의 글은 선지서들, 시편은 성문서를 가리킵니다. 시편은 성문서의 대표로 언급한 것이고, 선지자의 글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서라 부르는 전-선지서와 후 선지서를 망라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이 역사서를 “선지서”라 불렀던가? 하면 그것은 선지자들이 역사서를 기술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히 1:1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듯, 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모두 선지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문서는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선지서나 오경을 제한 나머지는 유대인들이 모두 "책들" (히, 케투빔) 이라 불렀는데 여기에 "거룩"이란 의미의 "성"을 첨가하여 "성문서"가 되었습니다.

이런 삼대 구분은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에 대한 시각을 보여 줍니다. 저들은 오경을 구약 전체의 근본 토대로 보았고, 나머지는 오경에 근거한 설교나 해석으로 보았습니다. 선지서는 선지자들이 기록한 글이라고 보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술한 것이지만, 직접 선지자로 활동했던 이들이 아닌 자들의 작품이란 의미일 수 있어요. 예컨대, 역사서의 경우 추방 이후 귀환 한 다음에 기록된 역사서인데, 기록 연대가 늦어서 성문서에 들어간 것 같고, 더구나 귀환 한 후에는 학개나 스가랴, 말라기 같은 선지자들이 역대기를 쓴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쓴 사람이 공적으로 활동한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성문서에 분류되었겠지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는 전부 기독교에서 역사서로 간주하는데, 유대인들은 전-선지서라 부르지요. 이것을 비평가들은 "신명기 역사서"라 부르고 추방 이후 어느 저자가 기록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신명기 역사 가설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하면서 모세의 저작인 신명기도 그 역사서의 서론으로 추방 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소위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서는 언급하신대로 같은 이스라엘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기술한 것입니다. 저작 연대가 다르고, 시각이 다릅니다. 이 부분 강의를 참조하세요.

그럼 주님의 얼굴을 늘 앙모하시길 바랍니다

 

질문47: (류xx님의 글)

구약정경 확정에 대해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얌니아 회의에서 구약정경이 확정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회의에서 결정을 해서 우리가 사용을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지요? 아니면 성령님의 강권적으로 이것이 확정된 걸로 가르쳐야 하는지요? 이 회의의 성격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질문을 하겠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우리가 역사서라고 부르는 부분들을 선지서로 분류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답변47:

구약이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주후 90년 경의 예루살렘 근방의 얌니야 회의에서가 아니고, 에스라 시대 대회당 사람들의 결정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제 구약개론 신학책을 참조하세요. 이 책은 1, 2주 내로 출간될 것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결정을 했어도 지적하신대로 성령님의 인도에 따른 것입니다. 행 15장에서 사도들도 결정을 하면서 고백했지 않습니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행 15:28)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딤후 3:16), 스스로 신적 저작임을 증거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그 자증하는 성경책을 정경으로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역사서라 부르는 전 선지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서 등인데 이것들은 선지자들의 작품으로 보고 선지서라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의 견해인데, 그것이 성경과 같은 권위 있는 절대적 시각은 아니지만, 옳다고 보입니다.

 

질문48: (박xx님이 쓰신 글)

교수님! 대체적으로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경우 사람에게 직접 나타나서 보이시는 부분과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부분 2가지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라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함)그 두 가지 방식에 여호와께서 일정한 흐름이 있는 것인지 교수님 해답주시면 고맙습니다

답변4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야웨의 사자"로 나타내시는데, 그 야웨의 사자는 보통 천사라기보다,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부) 아무도 볼 수도 없고 본 자도 없기 때문이고 (요 1:14), 동시에 야웨의 사자가 야웨 자신인 양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신현은 결국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의 나타나심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베뢰아 신학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이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그릇되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구약의 야웨는 천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타날 때 사용한 이름에 불과하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요 5:43) "예수"라는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고 성자 예수님의 이름이고 성령님의 이름이라는 주장인데, 아주 이상한 이해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이란 그 사람 자신, 혹은 그의 성품, 인격을 의미합니다. 특히 정관사가 "이름"이란 명사 앞에 붙으면, (하나님의 이름인 경우) 하나님의 권세, 위임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는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권세로, 그분의 보내심을 받아 오셨다는 것이지,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출 34:5-6에서 야웨의 이름이 선포되지요? 야웨라는 이름이 그 전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것을 처음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보시면 드러나는대로, 야웨의 속성, 성품이 선포되고 있지 않습니까?

출 34:6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6:3에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라 하시지요? 거기서 "야웨"라는 이름을 족장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야웨'라는 이름이 족장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제 출애굽을 통해 나타날 그 놀라운 기적과 언약 체결과 같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실 그 야웨의 속성, 성품으로는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요 17:6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그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성품을 속성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야웨의 말씀이 임한다고 할 때는 주로 선지자들에게서 (특히 예레미야)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공중에서 들릴 때 유대인 랍비들은 그것을 "바트 콜"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들린 소리 같은 것도 "바트 콜" (소리의 딸, 작은 소리) 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에게 말씀이 어떻게 임했는가? 그것은 주로 꿈과 환상을 통해서 임했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적인 임재 가운데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웨의 사자로 나실 때는 주로 족장시대나 사사시대, 말씀을 주실 때는 선지자들에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49: 김xx님이 쓰신 글입니다)

교수님! 요즘 날씨가 제법 봄기운으로 완연합니다. 꽃들도 피고 새싹도 돋고 아름다움이 사방에 가득한 거 같습니다.

교수님~

오늘 더디어 책을 받았습니다.^^ 출판사 사장님이 깜빡하셔서 제가 좀 늦게 받았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방대한 량들인 거 같습니다. 이번 학기를 통해 교수님의 가르침에 가장 적절하게 이 책을 활용하려면 어떻게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좋을런지요?

귀한책을 통해 구약을 다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늘 강건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답변49:

책은 두고 두고 이해되는 부분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이번 시험을 위해서나 기말고사를 위해서만 아니고,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위해서 필요할 때마다 읽어 주십시오.

읽으시다가 어려운 사항은 질문을 주시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본인의 "구약 개론 신학"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강의를 듣지만, 책은 구입하지 않고 적당히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학점을 따면 모든 것은 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자세로 공부하지 마십시오. 일단 내가 공부를 하면서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그 교수의 관련 책과 글들을 다 수집하여 읽고 질의하고 그래서 일단 그 교수의 사상을 바로 파악하고자 노력하십시오.

본인의 구약개론 신학 책과 기존의 유사한 책들을 비교해 본다면, 그 어떤 책도 제가 하듯 그렇게 비평가들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상세하게 이해하기 쉽게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양식 비평이나 전승사 비평, 혹은 문학적 접근법, 정경 비평 등 비평가들의 성경 연구 접근법의 근본을 알아야 바로 이해해야 구약 연구에서 바른 길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분명하게 교회사에서 이어져 온 정통 신학의 입장을 피력하고 그것을 오늘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적당주의, 타협주의를 우리는 배척합니다. 신앙적인 입장에 분명하게 서서 불신앙적인 모든 주장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성경을 신앙적인 입장에서 확실하게 보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이들이 적당하게 타협주의로 흘러갑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본인의 구약개론 신학 책은 2만 몇 천원이라고 하는데, 그 돈을 주고 구입해서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글자를 축소시키고, 그리고 지면을 최대로 활용해서 지금 현재 책은 적어도 보통 책의 갑절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출판사에 의뢰하였을 때 2권으로 600페이지 이상이 나오기 때문에 출판비가 과다하여 힘들다고 거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횃불 선교에서는 이런 저런 어려움을 감수하고 최대한 책을 컴팩트하게 많은 내용을 담도록 수고를 무진 많이 했습니다.

물론 내용이 방대하다고 좋은 책은 아닙니다. 나는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스타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읽다가 애매하다, 무슨 말인가 좀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신학을 처음 하시는 분들에게는 버거운 부분들, 이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런 부분은 살짝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책은 구약만 아니라, 성경 전반의 신학을 다루기 때문에, 전체 성경 신학 사상을 파악하는데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질문50: (박xx님이 쓰신 글입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동일하게 십계명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있는지 교수님께서 알려주시면 고맙습니다.

답변50:

출애굽기는 시내산 언약의 일부로, 신명기에서는 그 시내산 언약의 갱신인 모압들 언약의 일부로 십계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두 언약 모두에서 헌법에 해당됩니다. 나머지 법규들은 모두 십계명 헌법을 보다 구체화시킨 법률에 해당됩니다. 헌법은 원리를 법규는 그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출 20장의 십계명과 신 5장의 십계명은 비교하면 주요 차이가 안식일 계명과 연관하여 나타납니다. 전자에서는 창조에 근거한 안식일 준수를 명한다면, 후자에서는 이집트로부터의 구속 사역에 근거합니다. 이는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생활을 할 때, 안식일 준수를 위해서는 창조의 원리보다는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의 자유없는 종으로서의 삶을 상기시켜 이제 자유인으로서 안식일을 기쁜 마음으로 지키라는 목회적 필요에서 그렇게 한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질문51: 연xx님이 쓰신 글입니다

교수님 책 제목을 알려 주셔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수기에는 레위인의 분깃이 48성읍인데 여호수아는 달라서요. 차이가 무엇인지요. (제가 묵상을 덜했나요?)

답변51:

민 35:1-8은 레위 지파에게 48개 성읍들을 할당하라고 명령합니다. 수 21장은 그 명령의 실행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48개 성읍 전부가 다 명령대로 제비뽑기로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할당 되었지만, 게셀과 (에브라임 지파가 정복하지 못함) 다나악 등은 (므낫세 반 지파가 정복하지 못함) 원래 영지로 받았던 지파가 제대로 정복을 못했으므로, 레위 지파에게 실제로 주어지지 아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수 16:10 (21:21), 삿 1:29에서 게셀, 삿 1:27에서 다나악 (수 21:25) 등을 보십시오.

비평가 벨하우젠은 48개 성읍이 주변 목초지와 더불어 레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1)현실적으로 산지인 이스라엘 지형 여건상 불가했을 것이고, (2)역사적으로도 레위 성읍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그 역사성을 부인했습니다.

레위의 아들 그핫 후손 제사장들 (유다, 시므온, 베냐민) 13 성읍

그핫 후손 일반 레위인들 10

게르손 (잇사갈, 아셀, 납달리, 므낫세 반지파) 13

므라리 (르우벤, 갓, 스불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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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48성읍

 

레위의 족보 -> 고핫[, 게르손, 므라리] -> 아므람 -> 아론[, 미리암, 모세] -> [아비후, 나답, 이다말,] 엘르아살 -> 비느하스

연미희 님은 부지런히 공부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사실은 아주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요?

 

질문52: 연xx님이 쓰신 글입니다.

신명기에 대한 역사 비평적 접근에서 드 비테의 비평을 말하면서 실용주의에 대해 언급 하셨는데, 실용주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변52:

드 비테에 대하여 본인의 "구약개론 신학" 82-83페이지에서 상술하지 않습니까? 드 비테는 성경 비평의 선구자 중에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는 신명기가 요시아 시대의 저작이라고 처음 주장한 비평가입니다.

드 비테는 구약의 역사서들은 내용상, 신정제를 기록한다고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기술한다고 봅니다. 드 비테에 의하면 이스라엘 역사가는 전체 역사를 하나님이 직접 주장하는 양 기술한다는 것입니다. 전체 역사는 세상에 대한 분명하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통치 계획으로 주장되며 개개 상황들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그분의 섭리 하에 두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하나님이 직접 간섭 통치하시는 실용주의 (theocratical pragmatism) 곧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일어난다고 기술하는 방식을 그렇게 편의상 '신정 실용주의'라 드 비테가 부릅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기술한 역사가는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께서 전부 주장하셨다고 하는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했다고 보는 것인데, 실제로 드 비테는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전부 주장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가 역사 기술의 편의상, 그러니까 실용적인 편의상 그렇게 기술했다고 말할 뿐입니다.

 

질문53: 정xx님이 쓰신 글입니다.

수강생들의 질문 하나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답변해 주셔서 모두가 공유하여 내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목회자로서의 삶에 대해 체험적인 말씀들을 들려주셔서 더욱 유익합니다. 샬롬^^

답변53:

신학의 목표는 설교와 목회, 선교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학기 수강생들을 보니, 과제물을 제출했는데, 6명이 욥기서에 대하여 썼는데, 공지사항에 올린 글쓰는 법을 무시하고 그냥 욥기서의 개괄을 제시했습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구약을 읽다가 어떤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면, 그 문제를 그 본문 중심으로 묵상하여 왜 그런가? 이유 곧 해답을 찾는 식으로 글을 쓰시라. 곧 논술하라고 요구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욥기서같은 책의 내용분해나 저자 등에 대하여 기술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과제물 작성법을 따라 꼭 과제물을 제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질문54: 박xx님의 글

대학에서 시험을 첨으로 보았다. 거기다 컴으로 보는 시험 또한 첨이었다. 내심 걱정도 하고 기대도 하면서. . .

과연 어디서 시험이 나올건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무작정 강의안과 수업중 강의안에 필기해 놓았던 것을 중심으로 반복을 하면서 강의를 다시 한 번 더 듣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세세한 성경의사건과 내용보다는, 과목이 개론인 만큼 개락적인 내용과 흐름을 잡으려고 애썼는데(문헌비평이나 문서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 근거,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성경상의 반박근거, 언약서상의 각 언약의 차이점이나 공통점등..신명기 역사서설과 그의 대한 가설..그에 대한 반박.. 모 이런 것들..)... 이거 나의 예상이 쩜 빗나간 거 같다...ㅠㅠ

시험이 끝나고 생각 나는 대로 확인해보니, 점수를 주시려고 낸 쉬운 문제도 틀린거 같은데... 어렵게 생각하고 대한 거 같다.(괜히 문제에 무슨 신학적인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이제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요번 시험을 경험삼아 남은 시험 때에는 더욱 노력하여 잘 치루어야 겠다!! 이젠 또 과제물도 준비해야 하고 ...이건 어찌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지만 기도하면서 준비해 보려 한다. 그래도 나름 없는 시간 쪼개가며, 성경찾아가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처럼 시험보시고 당황하신 다른 학우분들도 자신을 가지시고 힘을 내셔서 핫팅!!!!!!! 하시자구요^^~ ㅋㅋ

글구 시험성적 언제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지 알려주세여^^~~승리하세요!!!

 

질문55: 박xx님이 쓰신 글입니다

창세기 49장에 야곱의 열두 아들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사기를 많이 친 야곱도 나중에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 아들들이 일생 동안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예언을 했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장남인 르우벤이 큰 축복을 받지 못하였고...

성경을 읽다보니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다에게 매우 큰 축복을 내렸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형들인 르우벤, 시므온과 레위가 축복을 받지 못하여 장남의 축복권을 유다가 받은 것인지요? 유다도 그렇게 눈에 띄게 잘한건 없는거 같았는데요..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거 같아서 질문 드립니다. 바쁘신 시간 중에도 항상 자세한 답변 주시는 교수님께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답변55:

좋은 질문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상 5:1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 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요셉은 그 두 아들 에브라임과 (차자) 므낫세가 야곱의 임종시에 (창 48장) 야곱의 양아들로 입양되어 결국 두 몫을 받음으로, 장자의 권리가 있는 양 (결과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이 부친 야곱의 총애를 받은 까닭은 야곱이 그렇게 사랑했던 요셉의 모친 라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레아의 소생인 유다는 어찌하여 왕권을 받는 지파 조상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르우벤이 악행으로 실격당하고 (창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시므온과 레위는 각기 둘째와 셋째 아들인데, 모두 창 34장에 묘사된 대로 (창 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분노에 취한 나머지 세겜 남성들을 살육한 악행 때문에 르우벤 다음에 오는 서열이었지만, 장자로서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가 넷째 아들이었지만, 결국 왕권 지파로 장자권의 권리 일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창 38장이 묘사하듯, 아내를 잃고 난 후에 며느리 다말과 불의한 관계를 맺는 음행을 자행합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그는 실격당하지 않고 부친 야곱에게서 왕권 지파 조상으로 축복을 받았을까요? 이것은 유다가 여러 번 형제들 가운데 지도적 자질을 보여준 것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말하자면, 그분의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고 해야 옳겟습니다만).

예컨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했을 때에, 유다가 나서서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라고 형제들을 설득해서 이루었습니다. 지도자적 자질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중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에, 총리 요셉 앞에서 유다가 나서서 형제들을 위해 감동적인 일장 연설을 합니다.

창 44: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 . .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하기를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말째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고하였나이다 . . .29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31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34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양식을 사러 가야 한다고 부친을 설득했을 때, 베냐민을 내 놓지 않는 부친을 설득한 이도 유다였고, 요셉 앞에서 형제들을 대변하여 사정을 감동적으로 설명하여 요셉을 울린 이도 유다였습니다.

이런 저런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지도자적 자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비록 며느리 다말을 범했지만, 창녀인 줄 알고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창녀와 음행한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여하간, 중요한 것은, 야곱이 임종 시에 자기 아들들을 놓고 예언 기도할 때, 그 아들들을 지켜보고 체험한 결과로, 저들의 성품과 자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가운데 그렇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언 기도가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성품을 아는 부친 야곱은 그의 후손들의 모습을 유다에게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직관적 능력도 하나님의 성령님의 부으신 은혜의 결과일 것입니다만. 여하간 자식들의 삶을 통해 저들의 성품을 잘 아는 부친의 예언 기도에서 유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질문 56 

노아의 세자녀가 3명인데
제가 알리로는 순서는 셈 함 야벳으로 알고 있었는데~
교회 목사님 말씀을 통해 들을때 우리나라 성경의 오역으로 
야벳 함 셈의 순서라고 들었습니다..
어떤게 맞는지...헷갈립니다.
그리고 순서가 셈이 셋째라고 하면 장자가 아닌 셋째를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지는 건가요??

56답변 
좋은 질문이군요

1) 노아의 세 아들이 태어난 것은 5:32에 의하면, 500세 되던 해였다. 
2) 홍수가 나던 해가 600세 되던 해였으므로 (7:11), 그의 세 아들들은 그 때 쯤에는 적어도 100세가 되었다. 
3) 노아는 500세 되는 해에 첫 아들을 낳고, 그 2년 후에 셈을 낳았다 (창 11:10)
4) 노아가 술에서 깨어 자기 막내아들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았다 (창 9:24). 
종합하면, 노아는 500세 되는 해에 첫 아들을 낳고 (야벳), 그 2년 후에 셈을 낳았다. 야벳이 장자, 막내는 함이다 (9:24 참조). 창 10장 족보에서 장자 야벳의 후손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점을 참조하세요


57 질문

교수님 안녕하세요?

아무래도 노아홍수후 그 자손이 온세계로 퍼졌다고 성경은 언급하는데 세속의 역사는 연대가 성경연대보다 너무차이가 나서 두무지 이해가 않됩니다.
정말로 노아홍수후 그 자손만 이 이세상에 퍼졌다면 엄청난 연대 괴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니 페키넨시스니 쟈바 원인 이니등등 시원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57 답변

성경을 믿지 아니하는 일반 과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들은 화석이나 기타 자기들 나름대로 증거를 근거하고 말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말하니, 서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론을 배격하는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점차 진화되어 갔다고 보지요. 그러니까 원래는 수렵이나 하고 나중에 목축 그리고 나중에 농경사회로 발전했다고 보는데 성경은 아예 처음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하지요. 누가 맞는지는 신앙적 차원에서 판단해야지요. 요사이 과학계의 철학 원리가 되어버린 진화론은 창조론과 양립될 수 없습니다.
저 이집트의 피라밋, 거대한 구조물은 주전 2200년 경의 작품이라 하지요. 우리는 그 시대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하지만, 그렇게 고도로 발달된 기하학적 건축물이 건축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1만년 남짓 합니다. 창조된 세계는 그렇게 역사가 길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창조학회의 웹페이지에서 여러 창조 과학자들의 말도 들어 보세요


58 질문 

교수님 구약의 5가지 제사법은 자주 보는데도 구분이 명확히 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외울 수는 없을까요


58 답변

그러니까, 5대 제사라 하면 레위기에 제시된 순서대로 번제 (레 1장), 소제 (레 2장), 화목제 (레 3장), 속죄제와 속건제 (레 4, 5장), 그리고 이런 제사들과 연관하여 제사장들에게 주는 지침들 (레 6, 7장) 등이지요.
번제란 태울 번 제사 제 (燔祭), 그러니까 젬루 가죽 벗기고 내장 씻고 나머지는 몽땅 번제단에 태워 올리는 제사로 burnt offering 히브리어로 '올라'이지요. 올라가다란 동사와 연관되는 제물을 태운 향기가 올라가는 제사라고나 할까요 Koehler란 학자는 ZAW 54 (1936):292에서 주장하길, 히브리어 '올라'란 '민하 올라' 곧 올라가는 (불태워져서) 예물의 준말일 것이라 했는데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음에 소제란 히브리어 '민하'이고 (한문으로 素祭, 곧 곡식 제사란 의미) 예물이란 offering 뜻입니다.소제는 음식으로 하면 곡식 음식인데, 번제나 다른 제사는 모두 육식 음식이지요. 소제는 홀로 드려질 때도 있지만 다른 육식 제물과 동반됩니다. 곡식과 육식이 혼합되어 드려진다는 것이지요. 소제는 그래서 독립적 기능이라기보다 다른 육식 제물들에 동반되는 보조 제물입니다
다음에 화목제란 히브리어로 '쉘라밈' 이는 번역이 의견의 차이로 다양합니다. peace offering, fellowship offering 등. 화목제란 이름 때문에 화목케 하는 제물이란 인식이 있지만, 이 쉘라밈은 감사, 자원, 서원의 의미로 드립니다. 한나가 아들을 주시라고 서원 기도하고 응답받으니 서원 제물로 이 화목제를 드립니다 (삼상 1장). 자원제란 자원해서 아무런 조건없이 하나님께 드릴 때 이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이지요. 
다음에 속죄제나 속건제는 모두 속죄제사인데, 속건제는 남의 재산에 손실을 입혔거나 성소 기물을 손상시켰을 때 제사를 드리고 손실된 물건의 값을 120퍼센트로 배상합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가 생각날 때 드리는 속죄 제사입니다.
이에 비해 번제는 헌신의 의미와 국가적 행사 때 주로 드리는데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죄 곧 지었으나 아직 속죄가 되지 아니한 죄를 모두 속죄하는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도 번제를 드리는데 헌신의 의미가 있고 속죄의 기능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전제, 요제, 거제 등도 나타나는데 전제는 음료수라 생각하면 되지요. 전제는 독립적이지 않고 다른 제사드릴 때 동반됩니다. 그리고 요제나 거제는 흔들어 드리거나 받들어 들어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인데 독립적 제사가 아니라 오대 제사를 드릴 때의 방법을 지시할 뿐입니다. 이전에는 히브리어 '테누파'를 요제 (흔들어 드리는 제사)라 하다가 요즘에는 학자들이 특히 유대교 학자 밀고름이 테누파를 거제라고 번역하자고 주장하고 유대교 구약 번역본 TNK성경에서 그렇게 번역했고, 이전에는 히브리어 '테루마'를 거제라 (들어 드리는 제물) 했더니 요즈음에는 역시 앞서 언급한 그 밀고름을 위시한 학자들이 이는 그냥 헌물 contribution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학이란 항상 다른 학문처럼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학문이지요. 잘못된 이해가 바로잡히고 또 다른 가설이 나와서 검토해 보고 더 좋으면 그것을 채용하고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신학의 흐름을 파악함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폐기된 이론을 마치 정확한 것인 양 생각하고 성경을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새로운 이론이 다 맞을 수는 없겠지요. 여하간 신학을 할 때는 기도 많이 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본 자세는 성경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59 질문

후선지서4권중 소선지서를 왜 1권으로 봅니까?


59 답변 
아, 그러니까 그것은 분량이 적으니까 그렇지요. 전부 합해 보아야 이사야 한권 정도 되니까요. 
유대인들은 오경도 모세의 저작으로 한권으로 보지요. 그리고 전선지서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이렇게 4권, 후선지서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소선지서 이렇게 4권, 그리고 성문서는 여타 책들을 지시하는데 성문서란 그냥 문서들/ 문헌들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케투빔' (책들)이라 합니다. 오경은 '토라'라 하고, 선지서는 '느비임'이라 합니다. 우리가 역사서라 부르는 책들을 전선지서라 부르는 것은 그 책들이 선지자들의 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상하로 구분하는 것도 원래는 한권이었지요. 구분은 구약의 헬라어역인 70인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경이라 부르는 것도 (그리고 그렇게 오권으로 나누는 일도) 70인역에서 시작되었지요. 
이렇게 70인역으로 - 70인역에서 다시 라틴어역으로 (벌게잇), 그리고 기타 시리아어역이나 다른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지요. 영어역의 성경 책명도 다 라틴어역 - 70인역에서 유래합니다. 

60 질문

안녕하세요. 
교수님 유대인들이 절기 별로 읽는 성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인 절기를 알고 싶고 우리 기독교와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수고하세요.


60 답변

절기 (히, 하그) 곧 명절은 구약에서 유월절, 초실절 (77절, 오순절),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 등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전 164년) 수전절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안티오쿠스 4세가 더럽힌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하고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요 10:22에 언급되었습니다. 
이 유대인 절기는 출애굽 사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었고 또한 농경력과 연관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유사하고, 초실절에는 밀 추수를 시작하는 시기이고 유월절에서 7주간을 지내고 다음 날이라 해서 77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밀 추수절이라 해서 맥추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초막에 거하던 때를 회상하여 초막을 짓고 거기서 7일을 지킨다 해서 생긴 이름이고, 수장절은 그 때가 추수할 때이므로 (성력 7월 15일 - 양력 10월 초) 그렇게 불립니다

신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에 상응하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지요. 그래서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지킵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그분의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고, 추수감사절은 미국 청교도들이 지키던 관계를 우리 개신교에서 받아 지키는 것인데, 이는 구약의 수장절과 유사한 성격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 언약 백성으로서 구약의 절기 대신에 예수님의 구속사건 중심으로 절기를 지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약시대의 맥추절을 지키기도 합니다. 

61 질문

안녕하세요. 
구약의 레위인들은 제사장직을 맡아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예배 인도자는 목회자 즉,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제사와 예배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목사님들을 제사장직으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혹 맞는지요 ~

61 답변

중세기에 카톨릭 교회에서 성직지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소명도 성직자를 부르신 일로만 생각해서 평신도의 일반 세상에서의 삶은 좀 저급한 것으로 보았지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으로 마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직을 제창하는데 이는 우리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베드로 사도의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말씀을 근거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과 평신도 사이의 구분은 엄격했지요. 오늘날 그렇다면 제사장이 모든 성도들이라면 목사와 평신도는 어떤 구분이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목자 곧 양을 치는 자라는 의미로 엡 4:11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선물로 주신 직분인데, 양들을 잘 쳐서 저들로 봉사의 일을 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평신도나 목회자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을 섬기고 경배하는 자들이란 의미이겠고 세상 불신자들을 품고 중보기도해야 할 책무를 지닌 자들이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직분이나 기능적으로 목자와 양은 구분되지만, 모두가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 경배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섬긴다는 것은 같지요. 

62 질문

창세기 8장 홍수 후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아라랏산은 지금 터어키와 이란 아르메니아의 국경에 있는 산의 지명과 
같습니다 노아 홍수는 지금으로부터 4500~5000년 전의 사건인데 어떻게 
지금의 지명과 같나요 ?

62 답변

좋은 질문인데 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어요
창 8:4에서 노아 방주가 멈춘 곳은 "아라랏 산지"라 (hare ´arara†) 언급된다. 즉 여러 봉우리들이 있지만 어느 특정 봉우리를 지정하지 않고 아라랏 산지라고 그 지역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고대 앗시리아 문헌에서 "우라르투" 지방으로 불렸는데, 지금 터키의 동부 지역 밴 (Van) 호수 지역과 이웃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등의 접경지대이다. 아라랏 산지의 최고봉의 높이는 5137 미터에 (16854 피트) 달하며, 왕하 19:37/ 사 37:38 (산헤립을 죽인 두 아들이 아라랏 지역으로 피신했다), 렘 51:27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최고봉의 높이는 덮인 눈의 두께를 감안하면 5137 미터라고 하기도 한다. 
아라랏이란 지명은 오랜 세월 동안에도 이름이 바뀌지 않고 전해진 듯 합니다.


63 질문

창세기 50장에 야곱의 장례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야곱의 시체를 향으로 처리한다는 구절을 교안에는 미이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소개되었는데요... 야곱의 사후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의 장례방법이 미이라로 만들어 묻는 방식이 많이 쓰였는지요? 예수님 탄생시 동방박사가 바친 선물중 하나인 몰약이 미이라를 만들 때 쓰는 방부제용으로 쓰였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63 답변

미이라 처리법은 구약에서 야곱과 요셉 (창 50:26) 외에 언급이 없습니다. 야곱과 요셉이 애굽에서 죽었기에 그렇게 애굽 방식대로 처리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가나안에서 살면서 그렇게 방부제 처리를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겠지요. 
이스라엘의 무덤은 굴을 파서 굴 속에 선반을 만들고 각 선반에 자기 가족들의 시체를 두는데, 입구는 물론 큰 돌로 막아 들짐승이 시체를 해치지 못하게 하지요. 

64 질문

신약의 원어의 언약은 유언의 뜻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깨질 수 없는 언약 영원한 언약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내용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가도 다시 불신자처럼 살 경우에도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해도 주님의 언약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물론 구약의 언약이 신약의 언약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가도 다시 불신자처럼 살 경우에도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해도 주님의 언약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물론 구약의 언약이 신약의 언약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답변:
언약은 구약 히브리어에서 '베리트'이고 신약에서 '디아데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의 경우는 모두 일방적 언약이지요. 동등 조건에서 쌍방이 맺는 쌍무조약과 (헬라어로 '순두케') 다르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시거나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구언약은 새 언약으로 갱신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최종 언약이고 이제 더 이상의 다른 언약을 없습니다. 계약이란 말과 같은 것이지만, 언약이라 하여 어렵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계약은 쌍방의 관계를 법적으로 설정하는 법률 행위라 할 수 있지요. 
언약에는 유언이란 의미는 없습니다 히 9:15-20에서 유언이란 말로 "디아데케"를 번역했지만, 틀린 번역이고 언약으로 번약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 가입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어집니다. 중생하면 언약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기까지 그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인지 모릅니다. 중간에 타락해서 변질되고 탈락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히 6장). 우리는 그렇다고 알미니안주의처럼 인간이 구원을 받고자 결단하면 구원에 이른다거나,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도 중간에 타락해서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그런 사고는 배격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여부는 죽기까지 분명하게 우리가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대략 확신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그리고 누군가가 예수님을 부인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진정 선택된 백성인지 아니면 거듭났는지 의문시됩니다. 


65 질문 

좋은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교수님의 활기찬 강의를 감동깊게 잘 듣고 있습니다.
질문은....
1. 언약에 관한 질문입니다.
-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등은 편무적 언약이며 
시내산에서 모세의 중재로 제단에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피를 뿌리며
맺은 언약은 쌍무적 언약으로 위의 언약과 확연히 틀린부분이 있지는 않습니
까? 쌍무적 언약에 양쪽 다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나중에 그리심산에서 축
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며 이들이 믿음의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
까?

2. 율법에 관한 질문입니다.
- 모세가 시내산 또는 회막에서 레위기를 받았는데 율법의 핵심이 사실은
레위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많이 중요한건데 이 율법이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것이지요? 율법 폐기론자는 이단으로 알고있습니다.
문제는 완성된 율법이 지금의 교회나 신학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으며 
가르쳐 지고 있는것인지 궁금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샬롬~~


65 답변
1. 언약에 관한 질문입니다.

-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등은 편무적 언약이며 
시내산에서 모세의 중재로 제단에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피를 뿌리며 맺은 언약은 쌍무적 언약으로 위의 언약과 확연히 틀린부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쌍무적 언약에 양쪽 다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나중에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며 이들이 믿음의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모두가 일방적 언약입니다. 쌍무조약이란 동등 조건에서 서로 언약을 체결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방적으로 약속을 주시거나 혹은 이렇게 살아라고 요청하시지요.

2. 율법에 관한 질문입니다.
- 모세가 시내산 또는 회막에서 레위기를 받았는데 율법의 핵심이 사실은 레위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많이 중요한건데 이 율법이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된 것이지요? 율법 폐기론자는 이단으로 알고있습니다. 문제는 완성된 율법이 지금의 교회나 신학에서 어떻게 비춰지고 있으며 가르쳐 지고 있는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레위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제시되었으니 곧 신약의 십자가로 연결되며 (사 53장, 슥 3:8-10을 통해서) 지적하신대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율법의 모든 요청은 만족되어졌지요. 그러나 율법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그분은 성취시키고 완성시키셨습니다. 딤후 3:15이하에서 구약 성경을 우리의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한 것은 율법의 성도들의 삶의 안내자 (선과 악의 구분을 제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율법의 용도를 칼빈은 율법의 제3의 용도라 불렀습니다. 루터나 이전 사람들은 율법이 이제 성도들에게는 폐기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성취되어 성도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였다면, 칼빈은 율법의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은 모두 주님으로 인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 어떤 율법 조항도 우리 성도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의 정신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지요. 주님이 지적하신대로, 간음하지 말라는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 된다고 더욱 강화되었지요. 맹세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출 22:11에서 "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폐기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폐하러 오지 않고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으니 구약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주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헛된 맹세를 금지한 것입니다

66 질문

가나안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찾아가며 묵상해야 하겠네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창 9:22에서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라고 했고,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는데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잘못했다면,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지요? 

답변

우선 가나안이 받은 저주의 의미를 봅시다. 가나안은 그의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 히브리어에서 최상급을 여러가지로 표현 가능하지만, 여기서 "종들의 종"이 그 한 방식입니다. 종들 중의 종이니, 종들에게 종이 되는 최고 비천한 종.

여하간 문제는 왜 함이 잘못했는데 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느냐? 

여기 창 9장 본문에는 그 이유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처벌의 수위로 보건대 그리고 가나안 족속이 창 9장 이후로 언급되는 부분들을 고찰해 본다면, 가나안은 아마도 노아가 벌거벗은 상태에 있을 때, 부친의 말을 듣고 아마도 별로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못된 짓을 (동성애?) 하지 않았나? 추정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나안이 그처럼 무서운 저주를 받을 것이며, 나중 이스라엘에게 진멸을 당하게 되었겠습니까? 조상 가나안의 싹수가 노랗더니, 그 후손이 조상에게 음란성을 물려받아 음란에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67 질문

강의 중에 말씀하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강의 중에 말씀하신 것은 정결한 짐승은 제사에 쓰이기 위해 일곱씩 부르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양과 같은 몇몇 짐승만 정결한 짐승이 되는 것인가요?
짐승 또한 모두 창조하신 것인데 어떤 기준으로 구분이 생긴 것인지요? 

답변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구분은 레11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구분은 들짐승과 날짐승 그리고 고기가 각기 다른데, 굽이 갈라져야 하고 되새김질 해야 한다 (들짐승). 그리고 날개가 있지만 기어다니는 것 혹은 육식성 은 부정하다 (날짐승).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한다 (물고기). 이런 기준이지만, 오늘날 위생적 관념 때문이었는지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구분했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다만 그런 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인간의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식욕에서부터 구분의 훈련을 시작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은 구분의 개념인데, 그런 구분을 통해서 자신들의 구분된 신분임을 자각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의미이겠지요. 

안식일이나 절기를 통해서 시간 구분
십일조나 초태생을 드림으로 물질 구분
등등

질문 68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의들 들으면서 함께 성경을 보고있던 중에 궁금한 점이있어 강의와 상관 없이 문의 드립니다 

사사기 1장 13절에 갈렙에 아우요 그나스에 아들인 옷니엘이..라고 나오는데 

갈렙의 아버지는 민수기 13장에 여분네라 하고 역대상에서도 갈렙의 다른 형제는 나오지 않고, 그나스의 아들들은 옷니엘과 스라야라고 나오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인데 왜 갈렙이 옷니엘을 아우라고 기록했을까요?

답변 68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첫 사사인데 (사사란 히브리어 쇼펫 [판관 혹 통치자)(삿 3:7-11) 사사란 성령님의 카리스마를 입고 국가적 위기에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통치권을 장악 행사했던 지도자였습니다. 사사란 (士師) 말은 한문에서 온 것으로 보이고,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재판관이란 의미가 아니라, 3권 분립 개념이 없던 시대의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옷니엘은 대상 4:13에서 갈렙의 형제 그나스의 아들로 언급되고, 수 15:15-19에서도 갈렙의 조카로,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합니다. 삿 1:13은 갈렙의 아우가 옷니엘이 아니라, 갈렙의 아우는 그나스, 옷니엘은 그나스의 아들, 곧 갈렙의 조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나 원문을 보면 때로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요


질문 69

교수님 12지파 땅 분배중 시므온지파는 왜 유다지파의 안에 땅을 분배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69

좋은 질문이예요
우선 우리는 야곱의 후손들이 지파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야곱은 임종 시에 12아들을 불러 유언 축복 기도를 하는데 예언적이기도 하고 그때까지 자신이 경험한 자녀들에 관한 사항에 근거해서 드리는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각기 2, 3번째 아들들) 야곱은 예언하길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동의 병행법으로 구성된 이 예언시에서 우리는 시므온과 레위가 축복 대신에 저줄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창 34:24-30에 묘사된 디나의 강간에 대한 보복으로 세겜 사람들을 살육한 무자비한 살육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나중 기업을 분배 받을 때 불이익을 받습니다. 레위 지파는 나중 출 32:27이하, 신 33:8-10에 기록된 대로 시내산 우상 숭배 사건 때 주님의 열심으로 우상숭배자들을 처단하는 헌신을 통해 성직자 계층으로 부름을 받는데, 그 결과 저들에게 영지가 주어지는 대신 각 지파 영지에서 4개 성읍 전체 48개 성읍을 분배받아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거기서 저들은 레위 성직자로 말씀을 가르치며 혹은 성소에서 섬기는 것이지요. 
레위 지파의 경우는 말하자면, 전화위복을 이룬 것입니다. 헌신을 통해서 이전의 처벌을 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흩으지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지만, 성직자 지파로 선택되어 섬기게 되었으니 이것이 복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시므온 지파의 경우에는 제2차 인구조사에서 가장 수자가 작은 미약한 지파로 몰락하는데 (민 26:14; 신 32:8에서 시므온은 아예 예언에서 생략), 가장 수자도 작고 하니 그냥 유대 지파 영지를 조금 떼어서 가장 남편에 위치한 현재 브엘세바 광야 지역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곳을 할당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이란 진공상태에서 나오지 않고 우리의 실제 현실 삶과 연관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 부모일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경험하 자녀들의 성품이나 행동에 근거해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초자연적 요소가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장자였던 르우벤은 자기 부친의 첩 빌하와 동침해서 음행한 까닭에 장자권을 박탈당하지요 (창 49:3-4; 대상 5:1). 
유다 지파에게 왕권이 돌아간 것은 비록 그가 며느리와 음행했지만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고 나중 애굽 총리가 된 요셉에게 내려갔을 때 베냐민을 데려 오라는 총리의 말에 자기가 나서서 자기가 대신 구금당하겠다고 지도력을 발휘하고 총리를 눈물짓게 만들지요. 그의 지도력은 급기야 유다의 왕권 지파로 올려주었습니다. 


질문 70

교수님은 불을 받았다, 기도하시면서 불을 받는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답변 70

불은 말 그대로 성령님의 불인데, 성령체험이라고 할까요? 불덩이가 날아와서 내 가슴팍을 치거나 뜨거움이 온 몸을 감싸거나 아무튼 그 경험은 해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지요
불을 받는다는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딱히 뭐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그런 체험을 매일 기도하면서 하게 되면 어떤 영향이 나타나느냐? 이것이 중요하겠지요 한 마디로 머리가 확 맑아져 버립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그 상쾌함과 자신감 그리고 하늘의 기쁨이 온 맘과 몸을 채워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된 상태에서 말이나 글을 쓰게 되면 그렇게 멋지게 될 수가 없어요. 설교도 마찬가지겠지요. 
지적으로 하늘의 지혜로 채워지고 영적으로 하늘 기쁨으로 채워지고 육적으로 세상적인 욕망에서 자유하게 되고 정신적으로 자유와 자신 확신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충만하게 되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니 힌이란 부흥사를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하던데 그런 사람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쓰러지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 쓰러져서 어떻다는 거야? 라고 하는 말도 들어 봤습니다. 쓰러진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바람과 같은 역사 앞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렇게 쓰러진 상태에서 말하자면 불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 상태는 정말 황홀하고 충만하고 가슴이 벌렁거리고 터질것 같은 기쁨으로 넘쳐나지요
나는 그래요 신학을 하되 정통신학을 하고 (칼빈이나 어거스틴을 기준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런 노선에 서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기도나 전도 목회 실제 현장에서는 순복음의 요소가 많이 필요하다고 봐요. 많이 알려진 벌콥의 조직신학책은 정통 칼빈주의 혹 개혁주의 신학서적으로 너무나 좋습니다. 그 책은 화란의 헬만 바빙크의 4권 조직신학 책을 번역하다시피해서 집필된 책이지요. 그런데 제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벌콥 조직신학 (영어 원문에서) 602페이지라 기억되는데, 방언이나 각종 은사를 초대 교회에 국한된 현상이라 못 박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가 초창기라 그런 초자연적 은사가 필요했다는 것이고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이고 아주 근본적으로 잘못된 성경 이해입니다. 성경에 어디 그런 근거가 있나요? 그런 사고를 가지면 목회를 못합니다. 목회는 완전 실패에요. 말씀 중심으로 하면 된다고 하는데 말씀은 기준이고 재료이지만 그 재료를 맛있고 영양가 있고 살리는 음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성령님의 충만과 기름 부으심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학은 어거스틴 칼빈 헬만 바빙크 벌콥 노선으로 정통신학을 하고 실천은 기도 많이하고 은사들도 받아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단들을 따지지 말고 신학을 바로 세웠으면 여러 교단의 좋은 점들을 섭취하고자 해야 합니다. 




질문 71:

앞의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번엔 창6장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제가 교회 목사님에게 듣기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으로 알고있었는데 천사들이라니 의아합니다. 천사들이 예수님말씀처럼 결혼하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말이 옳을가요?


답변 71: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주로 천사들을 지시하고 간혹 이스라엘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천사들로 보는가 하면, 벧전 3:18이하에서 옥의 영들을 언급하는데, 그 영들이란 노아 때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창 6:1-4에 언급된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벧전 3:20)
그리고 천사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육체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요. 그들이 육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은 창 18장이나 유다서 5-6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창 19장도 참조하세요. 

부활하신 주님과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 사이의 만남과 대화를 보면 부활체 곧 천사들의 몸체가 어떤 것인지 암시를 줍니다: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여기서 부활체는 살과 뼈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물질 음식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이라고 육체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신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데 그렇다면 귀신들이 과연 오늘날에는 왜 창 6장에 기록된 그런 천사와 (타락한 천사) 사람 사이의 육체 관계가 없느냐? 고 물을 때 답변하기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신학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명확하게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다른 학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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